퍼시잭슨과 번개도둑 - Percy Jackson and the Lightning Th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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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동화다. 그러나 동화 같은 구성과 내용을 한 꺼풀 벗기면 동화 속에 감춰진 현실세계가 드러난다. 동시에 이 영화, 10대를 위한 영화다. 미국의 10대들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갈망을 담은 내용을 통해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10대들의 인간적 고뇌가 이 영화에 물씬 풍긴다. 미국의 10대의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 한국의 10대도 느껴지는 그런 상징들로 가득하다. 경제적 고충이 심화되면서 깨지기 시작한 가족의 유대는 편모슬하의 10대를 양산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인간적 고민은 더욱 심화된다. 특히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내적인 Trauma는 그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덩어리다. 그래서일까? 이 동화 같은 영화 속엔 10대의 위기 의식과 비현실적인 욕망이 표출된다. 주요 관객의 요구에 대한 당연한 감정노동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저려 왔다. 그들의 고민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해결은 결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한계를 넘는 것들이었고, 단지 극장이란 암실에서나마 위로를 받을 뿐이었다.
  10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은 주인공 Percy Jackson(Logan Lerman)이다. 10대의 어느 학교에 다닐 성 싶은 이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홀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Percy는 누군가의 자랑스런 아들로 자리매김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은 물론, 그의 앞에 있는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이런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그에게 제시해줌으로써 그의 멋지고 새로운 인생을 실현시켜준다. 그것도 신화의 세계로만 구성된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과의 연결을 통해서 말이다. 비록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영화가 만들어 준 진실을 알기 전까지 그는 어느 Loser 집안의 자식일 뿐이며, 그의 아버지는 의붓아버지로서, 그의 행실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남일 뿐이다. 그런 불행 속에 있는 Percy에게 그리스 신화로 채색된, 영화가 제공한 환상의 세계를 통해 그는 영웅으로 탈바꿈한다.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 앞에 아버지가 걸림돌로 남아 있다. 

  아버지, 언제부터인가 가족 구성원들 중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된 가족 구성원이다. 세계 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로서, 아버지는 가족의 화목을 깨거나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상징으로 언제나 묘사된다. 가부장적이란 표현은 집안의 사회,경제적 책임을 지는 굳건한 토대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즉 부정적인 대상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서경석’의 표현처럼 ‘긍정적 부성’의 부재라고까지 표현된 근대 이후의 아버지의 위상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다. ‘기러기 아빠’도 존재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내용보다 신경숙은 물론 많은 여성작가들조차도 공포스럽고 권위적이고 무능하기까지 한 존재로만 묘사한다. 이런 현상이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화 역시 이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우아한 세계’나 ‘즐거운 인생’과 같은 아버지의 입장을 대변한 영화도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똥파리’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갈등의 원천으로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버지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가족 구성원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가 이 영화에도 역시 존재한다. 그것도 비겁한 모습으로 말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 강력한 파수꾼이다. 아버지란 존재가 붕괴하면 가족 전체의 안녕이 무너진다는 점은 이 영화에서도 간헐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Percy의 가정적인 위기와 아버지의 부재를 연결시키면서 아버지에 대한 Percy의 분노와 미움은 이 영화의 보이지 않은 핵심 축이자, 미국 청소년들이 현재의 불운한 상황을 막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 고충에 대한 버팀목이 없는 10대에게 좋은 아버지는 갈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자 갈망의 대상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Percy는 현대판 남자 신데렐라이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안 순간 그는 강한 자이자, 책임 있는 행동을 아는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기이하게도 그 시점이 바로 자신도 아버지가 있으며, 그 아버지는 대단한 신이란 사실을 아는 순간이었고, 어린 학생에 대한 대우도 크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번개도둑이란 오명을 썼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탄생 신화에 의해 백조로 거듭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 없는 불운한 청소년의 인생이 순식간에 재벌 아들로 변하는 극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 점에서 물론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불우한 자신을 저주하며 새롭게 권력 있고 돈 많은 멋진 왕자와 공주를 꿈꾸는 수많은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멋진 Fantasy를 제공하는 시점이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위상은 자식의 인생을 화려하게 해줄 수 있는지 아니면 Loser의 인생을 대물림 시킬 수밖에 없을 만큼 무능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Fantasy다. 물을 통해 조화를 부리는 모습은 한국의 홍길동이나 전우치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류의 Fantasy는 세계 어디에서나 있으며, 전설이든 설화든, 아니면 민담이든 하루 노고에 지친 어느 불쌍한 인생들에게 잠시나마 활력을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 역시 그와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영화 뒤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청소년의 갈망은 사실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사회적 Loser들이 양산되는 이 시점에서 위기에 몰린 청소년들이 자신의 희망을 그래도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로 인해 버팀목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기 힘들어진 아버지란 사실이다. 좋은 아빠, 착한 아빠에 능력 있는 아빠까지 겸해야 하는, 즉 'Super Papa'가 되어야 하는 오늘의 아버지들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폄하해도 결국 그 존재가치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아버지의 노고를 생각해주기 보단 그들을 너무 수단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으로서의 포세이돈이 ‘데미갓’인 아들 Percy에게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용서를 비는 장면은 그래서 슬프다. 아들에겐 아버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의 번뇌에 대한 아쉬움이 우선이었던 Percy의 모습은 아버지란 존재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했다. 그리움의 대상이기보다 자신의 버팀목으로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내게 해주는 아버지가 더 필요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 이 구도는 경쟁만 가열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시대인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가족 내의 서글픈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서도 아버지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냉엄한 현실도 알게 됐다. 즉,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중요한 존재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Happy Ending이었지만 그 과정은 그렇게 힘든 모습이었다. 오늘의 아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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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핏 - Whip I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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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캐릭터들의 욕망은 서로 충돌하고 묘한 인연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 속엔 사회적인 계급문제와 인종문제, 그리고 조그만 마을에서 벗어나서 도시로 향하고자 하는 소녀들의 욕망까지 겹쳐지면서 어린 소녀의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같은, 단순할 것만 같았던 영화의 내용은 다양성을 띠고 폭넓은 시각을 요구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Texas, 미국에서 가장 전통적인 State다.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인해 다른 어떤 지역보다 전통적인 문화를 이루고 그를 지키려는 노력이 강한 이 지역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Austin이란 곳은 이 영화에서 Texas의 도시적 특성이 가장 강한 곳으로, 그리고 Texas의 어느 촌구석이라고 할만한 보닌이란 곳은 자그만 마을로서 나이 많은 세대가 주를 이루면서 젊은이들에겐 벗어나고 싶은 곳이기만 하다. 이 지역간의 차이와 충돌은 어쩌면 도시와 농촌간의 문화와 세대차를 동시에 보여준다. 주인공이 그렇게 떠나고 싶은 곳인 보닌은 그렇게 조용하고 작으며, 지역 주민들간의 공동체의식이 강해서인지 상대의 평판에 민감한,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곳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닌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겐 Texas의 주도인 Austin은 그런 고충을 한 번에 벗어나게 해줄 도시로 묘사된다. 

  어느 소녀의 선입견으로 가득한 세상과의 긴장을 시작으로 영화는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와의 충돌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이자, 미인대회에 출전해서 입상을 하고 그에 따라 좋은 남자를 만나는, 상식적인 세상의 성공방식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10대 소녀 ‘블리스 카벤더 (엘런 페이지)’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보다 자그만 마을 ‘보닌’으로부터의 일탈이야말로 뭔가 새롭고 활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갖게 된다. 이에 반해 현실은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표출된다. 미국 사회에서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는 우편배달부란 직업을 갖고 있는 어머니는, 자신과는 다르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신의 딸이 미인대회에 입상해서 보다 좋은 조건을 갖고 신분상승하기를 원한다. 이 모습은 한국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힘든 하루하루의 생활을 살고 있는 어느 사회생활을 하는 어머니들의 갈망이며, 이것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편향된 선입견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상식이다. 이러한 욕망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엄마와 딸의 갈등은 단순한 모녀간의 갈등이 아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충돌은 이것으로만 끝이 아니었고, 바로 그 점이 단순한 성장통의 영화가 아닌 보다 다양한 층위를 지닌, 수준 높은 영화로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고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또 다른 곳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소녀도 있다. 바로 식당 Part-time job을 하는 블리스의 친구 ‘패쉬(Alia Shawkat)’가 그녀이다. 그녀와 자신의 동료인 히스패닉 남자와의 긴장과 사랑에서 미국 내의 인종의 대한 문제가 보이기도 한다. 비록, 이 영화는 이 둘의 결말을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Happy Ending으로 처리함으로써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강한 백인문화가 살아있는 Texas의 작은 마을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Colombia University에 입학할 백인 소녀를 생각한다면 그들간의 관계는 이상적 설정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만 영화는 비극보다 희망찬 행복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을 뿐이고, 그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어쩌면 대중성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주요 테마로 정한 영화이기에 이 부분조차도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만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이 영화는 분명 사회성을 담고 있는, 보기 드문 성장통의 청소년 영화이다.  

  ‘블리스 Ruthless,’ 주인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잠시 쉬는 시간에 부른 노래에서 보이듯 작은 마을에서 도시로의 이탈을 꿈꾸는, 환상을 품고 사는, 10대 소녀다. 도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 Texas의 주도인 Austin은 그녀에게 더 없는 낭만과 환상, 그리고 도피처로서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마약에 찌든 곳이든, 거친 폭력적인 곳이든 왠지 끌리는 그런 곳이다. 그런 환상을 갖고 있는 10대에게 도시로 초대한 것은 미국의 주류 스포츠가 아닌, Minor라고 할 수 있고 거칠기만 한 롤러 스포츠였다. 도시 여자들의 신나는 롤러 경주를 통해 바라본 도시의 생활은 ‘보닌’이란 작은 동네의 한계를 절감하게만 한다. 그래서 그녀는 평범한 세상 살기를 벗어나 특별하고 좀 더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을 꿈꾸게 되며, 자신의 부모를 속이면서까지 그 매력적인 세상으로의 즐기기를 나선다. 그러나 경기 자체의 위험성으로 경찰이 나서서 경기의 중단을 요구할 만큼 주류가 못된 ‘롤러 더비(Roller Derby)’는 도시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멋져 보이지만 위험한 이 경기의 마약성은 도시 생활 속에서 피로에 지치고 힘든 것을 거친 야성을 회복시키면서 풀어주는 그런 류의 경기이다. 거친 몸싸움은 거기에 덤이며, 언뜻 보이는 미혼모의 가정 속에서 도시에서의 거친 생활 역시 보인다. 도시 속이기에 할 수 있는 이 경기에서의 참가자들은 확실히 거친 삶 속에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녀들이 갖고 있는 문신은 분명 비사회적이며, 반항적이면서도, 자유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듯하다. 이 점에서 영화는 과거의 영화와 격을 달리하게 된다.  

  영화는 과거의 영화처럼 도시 속의 생활을 미화하지 않았고 그 위험성을 감추지 않았다. 롤러 경기의 격하고 위험한 모습에서 불안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간헐적으로 볼 수 있는 멤버들의 현재의 생활 모습으로 도시를 우아하고 활력 있는 것으로 치장하지 않았다. 조그만 마을로부터의 이탈장소로의 도시는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고, 미혼모가 될 수 있고, 사랑에 배신당할 수 있는 그저 그런 곳이다. 영화는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획일성을 보여주지 않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세상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들을 과감 없이 보여주면서 보다 현실로 다가서고 있다. 그런 속에서 10대 소녀의 선택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에 기반을 두도록 묘하게 장치한다.
  이런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그래도 블리스는 롤러 선수로서의 ‘블리스 Ruthless’로 남길 원한다. 그녀의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지만 만족이란 측면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다소 전통적인 주제로서 결말을 맺는다. 친구의 명문대 진학이나, 마을에서의 미인선발대회에서의 참여보다, 그리고 낭만적인 사랑의 속삭임보다, 도시 속의 활력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을 사는 모습은 분명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재생되고 반복된 것이다. 이제 이런 것이 진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활력은 아직도 강렬하다. 힘들고 어렵지만 자신의 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관점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도 매력적으로. 또한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어렵고 힘들지만 어른으로 가는 당연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거기에 부모의 보호와 간섭을 뛰어넘고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런 생각은 분명 미국 주류사회의 인식이고 자유주의의 핵심이자, 지금 생각하는 우리들의 행복 방정식이다.  

  감독이 ‘드류 베리모어(Drew Barrymore)’라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그녀의 처녀작인 이 작품에서 그녀는 현실과 이상의 어려운 줄타기를 하는 어느 소녀의 성장통 영화를 슬기롭게 마무리했다.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격한 경기에서 힘든 연기를 보여줌은 물론, 이 영화에선 어린 시절의 [ET]에서부터 그녀의 성인이 된 과정을 영화를 통해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장통의 영화를 보여줬다.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는 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배경의 근간이 됐고, 혼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임을 그녀의 인생의 경험이 더해지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영화가 어린 소녀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아닌 어른으로서의 품격을 지닌 과정을 형상화한 이유는 바로 감독의 역량과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그녀의 차기작이 너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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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2-2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류 베리모어는 언젠가 감독으로 나오지 않을까? 했었습니다.
봐야할텐데...ㅜ
8주 연속이시군요. 어떻게 하면...암튼 축하해요.^^

novio 2010-02-25 02:17   좋아요 0 | URL
베리모어는 앞으로 뛰어난 감독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전 운이 무척 좋답니다^^
 
맨 온 와이어 - Man On W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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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망, 참 무서운 열병이자 마약이다. 관심을 받고 사는 사람들의 열정은 언제나 그 관심에 자신의 생명도 불사한다. 그래서 남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남들이 감히 다가서지 못한 것들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Performance는 과도해지는 것만 같다.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높은 꼭대기에서 줄타기도 하도록 이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Man on Wire’라는 Documentary 영화까지 나왔나 보다.
  이 영화는 아련한 추억도 갖고 있다. 현존하지 않은, 한 때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이면서도, 9.11 테러의 대상으로 지금은 이세상에 없는, 쌍둥이 빌딩이란 별칭도 갖고 있었던, ‘World Trade Center(WTC)’를 공간적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부터 거의 35년 전에 기막힌 이벤트 하나가 이 비극적인 장소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건물의 사연은 언제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제 새로운 건물이 그 건물 잔해를 뒤로하고 세워질 것이기에 또 다시 어떤 기막힌 일들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궁금할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얻게 되어서인지, 희극이든 비극이든 많은 일들이 다양하게 벌어지나 보다.   

  줄타기는 그 자체로 위험한 Performance다. 가느다란 줄 위에서의 묘기는 언제나 위험한 예술의대명사일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가장 공포스런 공연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가학성이 드러난 이 공연은 그래서 공연자의 위험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비겁한 인식이 숨어 있다. 모험으로 표현되는 위험하고 외로운 공연을 보면서 느끼는 짜릿한 자극성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고 극도의 즐거움과 향연을 제공하니까 말이다.
  독하다고 할까? 이런 위험한 줄타기를, 자신의 의식주 해결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인생의 낙으로 승화시킨 자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즉,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한다면 기쁨과 희망이 부재하기에 이미 포기하거나 시작부터 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영속시킬 수 있는 것이 단지 물질적인 충족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이리라. 그런데 이런 외롭고 위험한 공연을 자신의 즐거움과 매력으로 느끼면서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필리페 페티(Philippe Petit)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도 전인 시기에, 위험천만한 공중 Performance를 실행한 어느 줄타기 하는 프랑스 남자가 있었다. 프랑스의 ‘Norte Dame 성당’과 호주의 ‘the Harbor Bridge에서,’ 이름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유명하면서도 높은 장소들인 이 곳에서 그는 줄타기를 했다. 둘 다 높은 건물이다 보니 그곳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이다. 그런 곳에서 줄타기 Performance를 필리페 페티(Philippe Petit)는 시도했고 또한 성공했다. 이런 그의 Performance는 그의 일생에 굉장한 활력을 가져다 주었나 보다. 그의 목숨을 건 행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마치 그 관심에 취하듯, 그는 계속해서 더욱 위험한 공연을 시도하려 한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이런 이벤트의 끝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항상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즉 끝없는 불만 속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선가 또 해야만 하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에 이끌려 페티는 또 한번 위험한 장소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미국의 쌍둥이 빌딩인 ‘WTC’이다.       

  까마득한 과거는 아니지만 이미 과거가 된 그 때의 이벤트의 과정을 2009년도에 제작됐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그래도 시간과 상관없이 어느 줄타기의 명수가 벌인 이 세계의 Performance는 분명 흥미롭다. 영화의 문구처럼 “불가능에 도전하는 게 진정한 도전”이라는 문장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평범을 거부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할, 아니 아무도 그러고 싶지 않은 이벤트를 하게 되는 페티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도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Norte Dame 성당이나 the Harbor Bridge 역시 높이에서 차이가 있을 뿐,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줄타기의 위험한 매력은 어느 높이에서 실행이 되든 목숨을 거는 만큼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위험할 뿐이다. 그러나 좀 더 강한 것을 원하는 욕구에 휩싸여 더욱 높은 것을 선택하게 됐고, 그래서 거기까지 갔나 보다. 1974년 그의 모험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마치 마술처럼 말이다. 엄청난 높이에서의 그의 공연은 45분간이었지만 그의 남은 인생에 결코 잊지 못할 몇 십 년의 기억을 남겼다.  

  너무나 극적이어서일까? 이벤트를 위해 사는 사람의 말로는 너무 비극적으로만 보였다. 마치 인간의 희극 한 편이 끝난 후의 삭막한 분위기를 느낀다고 할까? 한 번 공연을 끝낸 줄타기의 명수는 계속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만 하는 비극적인 윤회를 하고 만다. 어떤 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을 모르는 나그네처럼 그는 좀 더 자극적이고 위험한 높이의 장소를 찾으려 떠나려고만 했다. 그를 통해 얻는 유명세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끝나고 난 후의 환영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결코 잊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만족을 위해 가는 상황이 언제까지 갈 수도 없지만 그런 Performance는 결국 주변의 사람들을 잊게 만드는 무서운 파탄을 숨기고 있다. 그래서 WTC Performance 이후 그의 주변에 있었던 친구와 동료,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여인 역시 떠나갔다. 영화는 이렇듯 마지막의 반전을 향해 쉼 없이 흘러온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였지만 더없이 극적이었다. 또한 이상하지만 인생의 긴박한 반전과 우울한 외로움이 존재했다. 주인공은 확실히 혼자 남게 되고 말았다. 1974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단순히 지금은 없는 WTC라는 건물의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고, 1974년 벌어졌던 믿기지 않은 줄타기만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어느덧 하나의 목적으로만 가려는 맹신에 가까운 열정을 담은 어느 남자의 후편을 보여주면서 열정에 사로잡힌 것의 위험성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끝없는 열정을 위해 또 다른 뭔가를 찾으려고만 했던 남자는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았고, 멈출 수 없는 자신의 열정으로 인해 타인을 힘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열정을 멈추지 못하기에 자신의 오랫동안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남자는 떠났고, 그를 소중하게 사랑했던 여인 역시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했다. 위험한 공연의 대가치곤 너무 값비쌌다.  

  영화는 관객에게 환상을 주면서도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도 남기게 해준다. 주인공 페티는 다시 한 번 그때의 열정을 보상해줄 Performance를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새로 지워질 WTC의 대체물 위에서 위험한 줄타기 공연을 할 지 모르겠고, 어쩌면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높은 봉우리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의 공연은 아마 다른 사람들과 할 것만 같다. 자신의 열정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동료가 바뀐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인생에서의 인간관계의 약한 면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자신의 열정 속에 타인의 고마움을 너무 쉽게 잊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혼자만의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혼자만의 인생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은 확실히 타인을 힘들게 하며, 동시에 불행한 인생을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별이 자행되는 것만 같다. 이 영화는 그런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영화의 진수는 줄타기를 보여주면서 그 뒤편에 숨쉬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데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의 노년의 Petit의 혼자만의 줄타기 공연은 한없이 외로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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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5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vio 2010-02-15 21:28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가 좋으니 글을 쓰느게 무척 즐거웠습니다. 꼭 보세요^^

Tomek 2010-02-1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주 연속 당선이시네요. 축하드려요. ㅎㅎ

novio 2010-02-17 22: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운이 좋은 편이네요. ^^
 
식객:김치전쟁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오감의 자극은 영화라면 언제나 꿈꾸어 온 것이다. 최근 3D나 4D 등으로 이야기되는 영화들 모두 시각과 청각이란 한계를 넘어 3차원적 개념을 통해 촉감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라는 Genre의 한계는 기술의 발전 앞에서 무릎을 꿇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기술이 아니더라도 시각을 통한 후각의 자극이라는 염원을 풀기 위한 것은 영화에서도 마련되어 있다. 바로 요리와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그것이다.
  [식객 2]는 1편에 뒤이은 작품이라 많은 부담을 갖고 시작했을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그 무엇을 갖고 있어야 차별성에 성공하기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고, 이 영화를 찍는 배우들 역시 전작의 성공으로 인해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전작을 갖고 있는 후속작들은 언제나 그런 부담을 갖고 마련이다. 다만 식객의 후속편은 그런 부담을 덜기 위해 다른 방법을 채택했다. 즉 후속작이라도 영화 [식객 2]는 전편과 관계 업는 것으로 시작하려 했고, 전편을 보지 않았어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편의 연장선에서 봐선 안 될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김정은’을 보면서 [파리의 연인]의 그녀를 연상할 필요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정도는 연관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연관성은 10% 미만이다. 그래서 차라리 [김치 전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좋을 뻔 했다. 

  요리와 음식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그것들 뒤편에 있는 인간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갈등의 씨앗은 한국의 전통음식인 김치였지만, 한국적 소재인 어머니와의 정과 인간적 분노, 그리고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또한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어머니의 정을 확인하면서 인간적인 믿음과 가족애에 대한 복원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를 포함해서 모든 예술에서 당시 시대에 즐겨 사용하는 주제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이자 넓게 보면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면 현대인들이 갖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이상적인 그 무엇이다. 진부하다는 표현은 어쩌면 그만큼 갈망한다는 것이며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형상화 방식이고, 이 영화는 김치라는 음식을 소재로 해서 감각의 전이를 토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김치는 자칫 뻔한 소재이기에 역시나 진부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음식으로 말이다. 전작이었던 [식객]에서 다룬 것 역시 진부한 것이지만 이번엔 더욱 진부하다. 그러나 그것에 영화의 생명력이 존재한다. 김치는 흔한 것이지만 김치의 맛은 분명 우리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맛의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고, 이점이 바로 과거 문화에 대한 향수와 과거 인간미에 대한 향수를 불어 일으킬 수 있는 좋은 소재로서 기능한다. 특히 어머니의 손으로 만든 김치가 점차 희박해진 현시점에서 김치의 흔함 뒤에 있는, 점차 인스턴트 재료와 음식으로 인간미가 훨씬 떨어진 김치를 먹게 되는 불운이 영화의 진정한 Focus다. 이 점에서 소재의 참신성보다 소재에 대한 해석과 그를 통한 한국인들의 갈망을 파악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한 것이다. 진부하지만 절실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음식이란 정적인 대상을 역동적으로 보이기 위해 동적인 미를 위해 쉼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 앵글은 공감각적 매력을 잘 보여줬다. 완벽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김치의 다양한 장면들이 객관적인 구성을 통해 다양하게 제시된 점에서도 좋아 보였다. 김치 대회에서의 역동성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김치 대회를 통해 나오고 있는 어머니의 정에 대한 해석은 나름 공감이 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언제나 잊고 있었던 것을 ‘계피 가루’를 통해 확인하는 장면은 확실히 인상 깊었다. 웃음보다 눈물이 더욱 많은 신들이었지만 그래도 현대인들의 열망을 되새겨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영화, 분명히 진부한 것들로 꾸려졌다. 막장적인 요소만 빼놓고 본다면 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극적 재미와 인상은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진부하지만 색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과거의 소재를 통해 현대의 슬픔을 바라보는 방식은 언제 봐도 즐거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연기자로서의 매력을 보여준 이도 있다. 오랜만에 코믹을 집어 던지고 강하면서도 여린 이중성을 가진 ‘장은’역의 김정은은 확실히 이번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보여줬다. 인기절정일 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최고의 절정일 지금의 이 시점에 영화 [식객 2]는 그녀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줬다. 세련되면서도 내면의 분노로 뒤엉킨 채 방황하는 ‘장은’이란 배역을 김정은은 세련된 감각을 가지면서도 내면의 분노를 잘 갈무리하는 현대여성의 그것을 잘 보여줬다.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까지 더한다면 영화 [식객2]는 확실히 볼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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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2-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구와 김정은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정말 볼만할 것 같습니다.
언젠간 보게 되겠죠? 축하해요!^^

novio 2010-02-11 12: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서 보시기 바래요 ^^
 
주문진 - Joomoonji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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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로맨스 영화의 매력은 Fantasy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탈피하기 힘든 도시인들에게 청량적인 요소는 점차 비현실적인 곳에서 찾기 때문인가 보다. 의식주와 같은 물질적인 것을 해결하는 곳에서 인생의 낭만과 행복과 같은 정서적인 만족을 겸하여 얻을 수 없는 현대인들은 확실히 불행해 보인다. 이런 아픔을 그나마 위로해주는 것이 비현실적인 Fantasy라면 그 뒷면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 Fantasy 한가운데 있는 것은 바로 로맨스와 평범하지 않은 사랑이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문학은 물론 영화에까지 미치고 있다. 과거보다 다른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오늘도 고심하고 있는 영화제작사들의 고충은 참으로 슬프다. 비현실적이고 동화 같은 작품을 만듦으로써 물질적인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 고충은 이루 말하기 힘들 것만 같다.  

  이런 고민에 따른 영화의 낭만적인 사랑이 진화해서 이젠 인간끼리의 사랑이 아닌 더 이상의 곳까지 다가왔다. 남녀의 사랑이란 방정식을 깨고 등장한 동성간의 사랑은 그래도 현실이란 곳에 발판을 두고 있지만 강원도 동해바다에 위치한 항구도시의 이름을 빌린 영화 ‘주문진’은 과거와는 조금 색다른 Fantasy를 선택한다. 즉 인간과 고스트와의 사랑이 그것이다. 과거 ‘데미 무어’와 지금은 세상에 없는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한 ‘사랑과 영혼’이 있었지만 이전의 연인관계를 바탕을 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영혼의 최초의 만남은 아니었다. 도리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인 것이다. 이 점에서 ‘주문진’은 과거의 인연이란 매듭이 전혀 없는 인간과 영혼의 만남이란 점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시작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영화다. 
  아마 가장 환타스틱한 로맨스이리라. 그래서 이 영화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강원도 동해가에 있는 ‘주문진’이란 항구 이름을 제목으로 채택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접근하지 못한 한국 내의 이국적인 장소를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 Fantasy를 갖는 로맨스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부여한 것이리라. 그래서 가을의 풍광이 더없이 펼쳐진 영화의 영상은 확실한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강원도의 매력 중 하나를 자그마한 암실에서 보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재미는 기이한 사랑일 것이다. 

  한국 영화계의 거두인 ‘하명중’ 감독이 새롭게 기지개를 펴며 제작한 이 영화는 과거의 특색이 아닌 새로운 감각으로 한국 영화에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극 진행에서 매끄럽지 못한 이어짐은 영화를 보는 내내 당혹스럽게 했다. 갑작스런 장면 전환 역시 마찬가지의 효과를 보였다. 어떤 이는 Old한 표현력이라고 비평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강원도 사투리의 매력은 이해하지만 사투리가 사랑영화에 적당한지에 대한 의문도 만들고 있었다.
  반면 기이한 사랑의 구조는 물론 뒤편에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묘한 종결은 분명 색다른 시도다. 과연 영혼이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간이었는지 모를 명백하게 뒤섞인 이야기에서 이 영화는 보는 이들의 명확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그런데 이 점이 무척 재미있었다.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서사는 언제나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이란 배경을 강제한다. 그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과 헤어짐은 공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죽은 자가 과연 죽었을까 하는 의심을 자아냄은 물론 사랑한다면 어떤 상황이든 꼭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주제를 만들기 위해 현실적이라는 서사를 뒤집고 진정한 Fantasy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영화에서 사랑을 보기 위해 온 관객들을 향해 그들이 가장 보고 싶은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장치는 과연 영화의 구성이 현실이었을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는 묘한 즐거움을 준다. 현실을 뒤틀면서 극장 안에서라도 Fantasy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인 사랑의 결실을 보여주면서 현실의 강인함을 약화시킨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우린 어쩌면 과도한 현실적 개연성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이 다반사인 이 시점에서, 현실의 이야기를 동화로 만들어줌으로써 검은 암실에서 행복의 마음을 일깨우는 것도 사실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억지스런 구성이겠지만 그 억지 뒤에 숨어있는 감독의 배려는 분명 예의주시할 내용이다. 여기에 황보라의 열연은 인상 깊었다. 로맨스에서 다소 아쉬운 매력을 보여줬지만 사투리의 완벽한 구사와 과도한 만화 캐릭터의 연기력을 보여줌으로써 밋밋할 것만 같았던 영화에 즐거운 활력을 제공했다. 아마도 사랑에서의 약점은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가 갖고 있었던 매력의 한계가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언젠가 황보라는 ‘주문진’에서 보여주지 못한 사랑스런 매력을 쏟아낼 것이다. 그때가 매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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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2-0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초기에는 <고스트>란 제목인걸로 기억하는데, 제목이 바뀌었네요. 배우 하명중은 좋아하지만, 감독으로는 솔직히 좀 버겁습니다.

novio 2010-02-02 23:11   좋아요 0 | URL
[주문진]이란 작품에 대해 말들이 많은 편입니다. 영화 보면서 저 역시 조금 버거운 면들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 보러 들어갔는데 기막히게도 우리팀만 영화를 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좋은 면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마지막 장면을 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