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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평점 :
더글러스 케네디는 미국 작가인데도 정작 그의 소설에 처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프랑스 독자들이었다. 문득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런 연유 덕분이다. 프랑스보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많이 사랑받는다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떠오르고. 우리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엇에 매혹됐고, 프랑스 사람들은 더글러스 케네디의 무엇에 매혹됐을까? 물론 나로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를 진작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손에 잡지 못했고, 더글러스 케네디의 열혈 팬도 아니면서 어쩌다가 국내에 출간된 번역서들을 모두 갖게 되어 『템테이션』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콕 짚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 나라 고유의 문학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든 독자의 저변을 넓히는 데 순문학은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특히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프랑스 문학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마디로 더글러스 케네디는 대중에게 팔리는 글, 즉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적당한 재미와 흥미를 자극하며 술술 읽히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작가이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소설 한 권을 읽고서 순문학까지 들먹이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지만 『템테이션』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런 소설로, 무겁고 지루하고 머리 아프게 다가오는 책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싶은 독자들의 소구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다는 생각이 든다. 페이지에 쓰인 대로 즐기기만 해도 좋다!
대형 서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무명의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상업 매스미디어의 메카 할리우드에서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일약 스타 시나리오 작가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많은 스타들이 TV 토크쇼에 나와 눈물을 보이며 고백하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각자 사연은 다 다르지만 이야기의 얼개는, 대중의 갑작스러운 사랑에 도취되자 초심이 흔들리고 판단력이 흐려져 자만심으로 오만하게 거들먹거리며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됐고, 그로 인한 온갖 부작용으로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들어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고백이 공통적이다. 이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그때 어리석었지만 그같이 값진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으로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는 마무리이다. 한때의 잘못이나 실수가 ‘성장’으로 귀결되지 못하면 아름다운 통과의례로 포장되기는커녕 일말의 감동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밟는 행로도 이 얼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먼저 조강지처 루시를 버린다. 아무도 그의 원고를 알아봐주지 않을 때,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상연되지도 않을 극본을 강독하는 것만으로 그와 사랑에 빠졌다 할지라도. 그가 가정 생계는 아랑곳없이 서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길 꿈꿀 때, 그녀는 배우의 꿈을 접고 텔레마케터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고단하게 딸과 남편을 먹이고 입혔다 할지라도. 각고의 시간 끝에 데이비드가 마침내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에서 한순간에 “유선방송계의 톰 울프, 비범한 작가라는 소수 엘리트 집단,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풍자 코미디 작가”으로 변신했을 때, 루시는 본능적으로 배신의 기미를 알아챈다. “이제 나를 버리겠군. 이제 나를 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설령 그녀가 홀로 떠안은 경제적 부양에 대한 책임감에 지쳐서 그에게 가시 돋친 말 “시나리오 하나 못 판 주제에 꼭 프로 작가라도 된 듯 말하는 것 좀 보라지”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차피 그의 배신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 꿈만 지킨 사람과, 그가 내팽개친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포기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자괴감, 피해의식, 불신, 의심, 거짓말 같은 것들이 심연처럼 가로놓일 테니까.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더는 필요 없는 루시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루시는 자신이 더는 필요 없어진 데이비드를 믿지 못한다.
전형적인 전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데이비드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시시각각 계산기를 두드려 그와의 적정 거리를 셈하며 몰려든다. 샐리 버밍엄도 그런 잇속에 재빠른 여자이다. 데이비드 역시 샐리를 사랑하는 데 자기 성공의 후광이 되어줄, 대형 방송국의 엘리트 중역이라는 샐리의 자리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데이비드는 물론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아내의 날선 독설에 깊게 파인 상처를 제 살처럼 핥아주는 운명의 짝, 영혼의 반려자, 혹은 진정한 사랑을 이제야 만났다고 착각하지만 말이다. 데이비드와 샐리는 도식적으로 첫눈에 (자신에게 ‘더 많은 돈’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는 상대방의 화려한 이력에) 반하여 할리우드의 공식대로 “현관문을 넘자마자 급히 상대의 옷을 벗겼다”. 첫눈에 반한 남자와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히기 바쁘게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옷을 벗기는 장면은 영화마다 너무 많이 등장하여 관능적인 열기를 농밀하게 뿜어내야 마땅한 광경이 클리셰(cliché)나 다를 바 없이 진부해져 버렸다. 이런 클리셰들은 『템테이션』 전체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데, 더글러스 케네디가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영리했다고 해야 할까?
수백 억 달러 갑부 필립 플렉의 초대는 데이비드 (가짜) 성공의 정점을 찍는 듯하다. 하지만 그 초대에는 구멍 숭숭 뚫린 치즈 덩어리로 유인하는 쥐덫처럼 음험한 조건이 있다. 천문학적인 돈, 전지전능해 보이는 명예, 아름다운 아내까지 전부 가진 남자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 데이비드의 작가적 재능을 돈으로 사려 한다. 250만 달러는 데이비드가 무명 시절에 썼다가 팔지 못해 낡은 가방 속에 내팽개친 원고의 저작권과 맞바꾸기에 아깝지 않은 거액인 동시에 필립이 그 저작권을 사들이기에 역시 아깝지 않은 푼돈이기도 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데이비드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는 필립의 음흉한 음모는, 그가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데이비드에 대한 열등감, 질투심, 시기심으로 고약하게 뒤틀린 장난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데이비드에게는 거액이지만 필립에게는 푼돈인 250만 달러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원고’는 데이비드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필립은 데이비드를 사는 데 푼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데이비드 자신이 매긴 자기 가치이다. 스스로를 언제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사프란 섬, 필립 소유의 “파라다이스”에서 자기 자신을 필립의 푼돈에 팔아넘긴 데이비드가 자신의 다른 원고들까지 필립이 감쪽같이 가로챘다는 사실에 분노했을 때 사실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 분노의 이유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절망감이나 정체성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지불돼야 할 경제적인 대가 없이 필립의 협잡으로 자신을 빼앗겼다는 억울함 때문이다. 데이비드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대신 남아 있어야 할 돈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우여곡절 끝에 필립의 마수를 알아채고 반격하면서 데이비드가 빠뜨리지 않은(어쩌면 절대 빠뜨릴 수 없었던) 행위가 자기 값을 25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올린 것이라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300만 달러도 필립에게 푼돈이긴 마찬가지일 테지만 데이비드에게는 그것이 성공이다.
승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데이비드는 아니다. 씁쓸하지만 돈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아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필립의 막대한 자본이다. 데이비드는 자기 자신이라 지칭할 수 있는 시나리오들을 모두 부당한 방법으로 필립에게 빼앗기고도 그의 사기극을 폭로하기는커녕, 고작 300만 달러를 위해 ‘세상이 등 돌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의리파’로 필립을 포장해 준다. 그리고 자본에 굴복하여 자본의 고물을 얻어낸 것을 실리적인 선택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며 스스로 의기양양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멋지게 먹인 한 방’은 그저 데이비드의 착각일 뿐, 무엇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아성으로 건재하는 자본의 위력에 오싹해진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심지어 더글러스 케네디까지 데이비드의 몰락 원인을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물질적인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개인이 자초한 탓으로 돌린다. 그 (가짜) 욕망을 부추긴 것은 필립이 소유한 카리브 해 사프란 섬이 상징하는 물질의 파라다이스이다. 그 섬을 ‘파라다이스’라고 묘사한 것은 데이비드이다. 데이비드의 낙원은 “자가용 비행기, 커다란 창문과 통나무 목재 외관이 단층으로 길게 누워 있는 현대 건축물, 그 건물 양끝의 대성당 같은 탑, 자연 바위로 만든 거대한 수영장, 영화도서관, 집사와 소믈리에, 요트, 7천4백만 달러짜리 마크 로스코 작품, 4천2백 달러짜리 의자, 30g에 160달러짜리 캐비아” 등등이다. 피노키오의 장난감 나라 성인 버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피노키오에게는 그런 가짜 낙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면서 왜 우리는 한없이 이끌리는가?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어떠한가? 나는 아직 고고한 척하고 싶다. 데이비드에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유혹 앞에서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할 수 있는 여력이 제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