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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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는 신분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보탠 지 3년째, 평소처럼 책을 사들였지만 좀처럼 읽지는 못했다. 두 신분에 필요한 책들만 겨우 읽었음을 고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나오미와 가나코』는 그동안 목적 없이 순전한 재미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은, 거의 유일한 소설이다. 이런 몰입은 정말 오랜만인지라 흥분감이 가시지 않아 짧은 인상을 먼저 남겼는데 제대로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육체적인 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십중팔구 지독히 나쁘다. 대개는 남성이 여성에게, 성인이 아이에게 가하기 쉽다. 내 동거인인 남자는 남자치고 그리 힘센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잠결에도 온 힘을 다하는 나를 간단히 제압한다. 다행히도 문제적인 폭력성을 보인 적은 딱히 없지만, 언젠가 그가 내 서랍장에 화풀이를 해댔을 때 나는 완전히 겁먹어서 한동안 그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지도 못했다. 그때 그는 어떤 일로 나에게 잔뜩 화가 났는데 애먼 서랍장을 쾅쾅 닫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가 처음으로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소리쳤다. 내 서랍장에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내 서랍장을 치는 건 나를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 서랍장은 내 분신이라고. 내가 직접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은 분명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이었다.

가나코가 남편 핫토리 다쓰로에게 당한 폭력의 수위는 내가 겪은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쓰로는 냉장고에 넣지 않아 과일이 상했다는 이유 따위가 사람도 똑같이 상해야 마땅하다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나코는 머리칼을 잡힌 채 마구잡이로 손찌검은 물론 발길질까지 당하며 두들겨 맞아 온몸이 시커먼 멍으로 물드는 것은 기본이고 갈비뼈까지 다쳐야 했다. ‘반달에 한 번꼴’이라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예고도 가차도 없이 남편의 폭력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지 모른다. 단 한순간인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있었겠는가. 남편의 심사가 무엇에 뒤틀릴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데 말이다. 다쓰로의 폭력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지배당한 채, 가나코는 자기 목숨이 언제 치명적인 위협에 놓일지 암담한 상황인데도 저항의 몸짓도, 도움의 손짓도 한 번 하지 못한다.

누구도 가나코를 도와주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폭력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며느리의 입맛과는 상관없이 아들 입맛의 된장국을 끓이는 법만 알려줄 뿐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는다. 가나코가 남편의 폭력에 대해 말했어도, 시어머니는 아들의 역성을 들며 ‘맞을 만한 짓’을 하지 말라고 가나코를 탓했을 것이다. 시누이 핫토리 요코도 오빠의 폭력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다음에 만나면”이라고 외면했다(요코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오빠의 실종을 파헤치는 유일한 인물인데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도 하나뿐인 오빠니까”라고 놀라운 행동력과 실행력과 추진력 등등의 근거를 밝혔지만 나중에는 “왜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겨야 하는데?”라고 울부짖는다). 지금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다음’은 없다. “당하는 쪽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가나코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친구 나오미가 유일하다. 나오미의 적극적인 제안을 ‘도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그것은 살인이었으니까! 친구를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다니 얼핏 개연성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그러나 조금만 이해하려 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행동도 아니다. 나오미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을 피해 고향을 떠나 지금 이곳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기껏 도망쳐 온 자리에서도 똑같은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 광기 어린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숨어서 공포에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오미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잠재되어 있었다. 나오미는 친구라도 구해야 했다. 그때부터 다쓰로는 가나코에게뿐만 아니라 나오미에게도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폭력이라는 이름의 끔찍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러니 다쓰로를 살해하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제거’였다. 당연히 후회도 가책도 망설임도 없을 수밖에, 괴물을 제거하는 일에 양심 따위가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할 수밖에.

하지만 나오미와 가나코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다쓰로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고 도구를 준비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나오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 과정은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킬러가 아니다. 일단은 다쓰로를 무사히 살해하고 암매장하여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오미가 ‘신이 기회를 준, 완벽한 계획’이라고 믿어도 평범한 여자들이 저지르는 살인이 허술하지 않다면 그야말로 판타지가 아닌가. 오쿠다 히데오는 일부러 마련해 둔 허술한 구멍들에서 본격적인 스퍼트를 내기 시작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는 ‘괴물을 제거하는 일’이었어도 어쨌든 살인, 그에 뒤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오미와 가나코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 같은 사회가 아니다. 경찰은 가나코를 지켜주지 못했듯이 다쓰로의 죽음도 방관한다. 다쓰로가 겉으로는 모범적인 ‘훈남’ 냄새 폴폴 풍기며 잘 다니던 회사도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피해를 입을까 봐 직원의 실종을 은폐하려 든다. 오로지 오빠의 실종에 의문을 품은 여동생 요코만이 집요하게 나오미와 가나코의 숨통을 조여온다. 폭력이 한 개인의 몸과 정신에 어떤 상처로 각인되어 어떻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지 그 미묘한 심리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다가, 이제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끈질기게 추적하는 요코, 그리고 그 추적을 따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오미와 가나코가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데 집중한다. 이야기는 한순간에 절정, 절정, 절정…… 끝없는 절정으로 이어지는 궤도를 따라 내달리는데 한숨을 돌릴 틈조차 없다. 단연 압도적인 흡인력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글자 그대로 손가락이 책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오미와 가나코의 첫 행보는 델마와 루이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확연히 다르다. 죽음은 자유의 쟁취가 아니다. 델마와 루이스의 저항은 거기서 끝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일단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므로 나는 나오미와 가나코의 선택을 지지한다.

나오미와 가나코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느라 ‘리아케미’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빠트렸다. 이 소설에는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편견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인 리아케미도 처음에는 그런 편견에 기대어 그려지므로 오쿠다 히데오의 생각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큰언니처럼 나오미와 가나코를 지지하고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리아케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중국인에 대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아케미라는 멋진 여성 캐릭터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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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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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이 시는 사람은 과거나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어디 개인 뿐일까.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과거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사람들은 죽어가도 책임을 지는 시스템과 사람은 전무하며 타인은 망자에 대해 오지랖을 떤다. 끔찍한 세상이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서는 이런 재난 같은 삶 속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구병모가 그려내는 세계는 과거 신화나 전래동화에서 차용한 것에서부터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하지만 그 속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파르마코스」는 저수지가 되어버린 한 마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한 가뭄이 든 마을의 두 소녀, 수와 루. 우물을 배급받아 오는 도중 수는 한 여인에게 친절을 베풀어 우물을 나눠주고 입에서 보석과 꽃을 토해내게 된다. 값진 보물이지만 가뭄이 든 마을에서는 쓸모가 없고 운반할 수가 없어서 도시로 갈 수 없는 가족들. 수를 가두지만 마을에 온 의원이 선거에 쓰기 위해 수를 데려간다. 루 역시 한 여인을 만나고 보석 대신 벌레와 개구리를 토해낸다. 하늘은 개구리와 벌레를 위해 비를 내리고 루는 계속 토해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구해준 루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마을의 외딴 곳으로 내쫒는다.

「이창裏窓」은 현대인의 삶을 드러낸다. 창으로 보이는 옆집의 부모 자식의 모습을 보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라 생각에 신고를 한다. 사실 확인도 없이 상상만으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오지랖을 떠는 현대인의 모습 중 하나인 오지라퍼다. 오지라퍼들은 뒷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의 오지라퍼들은 타인의 삶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짧은 글로 악랄한 글을 남기지만 문제가 생기면 변명 몇 마디로 끝낸다. 나는 결국 나쁘지 않다. 「이창裏窓」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선택한 소재가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카페에서 타인을 뒷담화하는 오지라퍼와 수상한 옆집의 모습을 보고 신고하는 오지라퍼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타인에 대한 관심과 오지랖을 구분할 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악하게 태어나 교육으로 인한 최소한의 이성과 법률 같은 규제로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천사의 마음을 가진 듯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진다. 꼭 위기의 상황이 아니어도 사람은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만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억울하게 죽어도 대책이 없는 사회에서 어떤 개인이 이기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피해를 입지 않거나 나 자신이 안전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존재다. 나치의 세상에서는 조용히 있는 것이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치에 부역하는 것이 뒤탈 없이 나중의 삶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의를 포기한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끔찍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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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4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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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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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묘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와는 정서가 다른 나라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아이들과 캐치볼 ̄특히 미국에서의 부자지간의 캐치볼은 행복한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는 스테레오타입처럼 사용되지 않던가 ̄을 꿈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늙어갈수록, 아이가 자라날수록 어린 시절의 즐겁던 기억은 그저 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아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거북해한다. 그런 아이가 자라 아버지가 되면 다시 자기 자식과의 캐치볼을 꿈꾼다. 그런 아버지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어린 자식을 어떤 방식으로든 귀여워했을 것이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대를 이어지는 유전과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식들은 나이를 먹어가고 자신이 아버지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어린 시절부터였다면 아버지는 부러움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라면 그리움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큰 문제가 없는 가족이었다면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가 말하는 아버지는 어떤 것일까. 『익사』는 어떤 이야기일까. 장애인인 아들을 둔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말한 오에 겐자부로가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어떤 것일까.

소설가인 주인공인 조코 코키토는 어린 시절 홍수가 난 어느 날 아버지가 탄 배가 강에서 뒤집혔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자신을 기억하는 과거가 있다. 코키토는 군인들과의 궐기를 준비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오래전 ‘익사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 재료가 가득하다는 붉은 가죽 트렁크를 어머니에게 보여달라고 하지만 트렁크는커녕 어머니에게 보냈던 소설 초고마저 돌려받지 못하고 분노한 코기는 가족을 희화한 소설을 발표하고 어머니에게 의절당한다. 코키토에게 아들이 태어나고 장애가 있었지만 아들 덕분에 가족의 관계가 회복되지만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낸다. 어머니가 죽은 후 10년이 지나 트렁크를 보게 된 코키토는 대부분의 자료가 불태워졌고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익사소설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극단 혈거인의 우나이코를 만나고 극단과 함께 연극의 새로운 기획을 공동작업을 하게 되고 우나이코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이 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탐구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일본의 역사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굴곡이 많다. 제국의 기치를 내걸고 아시아 여러 국가들을 유린하던 2차대전 전후의 일본은 작중 소설가 코키토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였다. 이 시절의 일본인들은 제국과 천황을 무엇보다 뿌듯해했을 것이다. 원폭 투하 후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며 전쟁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코키토의 아버지처럼 천황과 함께 자폭하는 것은 종전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 장교들의 농담 때문에 아버지가 궐기를 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코키토는 절망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일본의 역사와 거대한 국가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중 등장하는 연극배우 우나이코는 큰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야스쿠니 신사에서 임신사실을 알게 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위안부 문제와 얽혀 큰 상징적 의미로 다가온다. 오에 겐자부로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위안부 문제가 전체주의, 국가주의적 나라가 만든 전쟁에서 ‘군인을 위한 여성’이라는 역할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 책임을 지고 사죄를 해야 할 국가와 집단은 침묵한다. 어느 나라나 사람들은 모두 다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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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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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은 일본 소설을 접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일이었지만 오래 전에 일본 소설  붐이 처음으로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90년대 즈음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후였을 것이다. 하루키는 독자들 뿐 아니라 국내의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하루키 붐에 일조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하루키를 읽고 다른 소설들을 찾던 독자들에게 하루키 옆에 꽂혀 있던 비슷한 이름의 작가를 보고 이것도 한번 읽어 볼까 하고 집어 들었던 것이 대부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을 것이다. 무라카미 류. 그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다. 팬이 되든가, 책을 집어던지든가. 1976년에 데뷔했던 그의 신작을 읽는다.

노년의 이야기, 삶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 새로운 인연과 희망으로 다시 한 번 출발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50대 여성이 이혼을 하고 결혼상담소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꿈꾸다 한참 어린 연하와 섹스를 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결혼상담소」.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 대신 애완견 ‘보비’라 이름붙이고 에게 사랑을 쏟지만 애완견이 병에 걸려 죽은 후 서먹했던 남편의 다정했던 속마음도 알게 되고, 보비 2세를 계획하는 「펫로스(pet loss)」. 다른 단편들 역시 노년의 불안감에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사람은 변한다. 천재적인 단편을 발표하던 작가가 종교로 귀의하는 경우도 있고, 하드록을 하던 뮤지션이 트로트를 부르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언제나 놀라운 것이 사실이다. 『55세부터 헬로라이프』를 접하고 난 느낌은 놀라움을 넘어선 당혹감이었다. 무미건조하고 차갑게 변태적인 묘사를 보여줬던 그의 문장은 책 뒤편의 말처럼 온화함과 희망적인 묘사로 호소한다. 젊음의 욕망을 보여주던 그는 이제 노년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이 2015년이고 작가가 데뷔한 것이 1976년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어쩌면 난 과거의 무라카미 류만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인간은 변한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작가도 변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본소설=하루키’라는 공식(지금은 미야베 미유키 정도려나)이 떠오르지만, 오히려 무라카미 류가 일본스러운 작가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과거 작품에서 보여줬던 청춘의 일탈, 욕망 등을 차갑고 무미건조하지만 솔직하게 드러냈고 이것이 바로 당시의 일본 젊은이들의 혼네(속마음)였다. 변태적인 묘사 때문에 꺼리는 독자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염세적이고 자극적이지만 현실적인 부분이 당시의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변화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버블 시절의 풍요로움을 몸으로 느꼈던 현재 일본의 노년 세대들은 지금의 일본의 현실은 천국에서 지옥에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여전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는 자신들 세대의 이야기를 쓴다. 고통스러운 현실, 그래도 꿈을 꾸고 사는 작가 세대의 사람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가의 이런 변화는 그다지 달가운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전한 이야기를 써 내는 것에 비해 이제 무라카미 류는 과거에 썼던 이야기 같은 것들은 접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이 작가의 변화는 이해가 가지만 이것이 혹시 육체적인 나이의 변화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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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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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의 갈등처럼 우스우면서 한심스러운 것도 없다. 특히 서구와 중동간의 갈등이 더 그러한데 같은 뿌리를 둔 자식들이 타 지역에서 자라나 서로 다툼을 하고 있는 양상과 다른 것이 뭘까? 게다가 이 다툼은 타 종교에 대한 살육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아무리 종교의 이상과 논리를 들이밀어봐야 그들의 부모인 절대자 입장에선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범죄 집단일 따름이다. 게다가 사악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파괴와 약탈과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념에 따른 행동이라며 종교를 내세우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으니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들부터 천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의 과격단체인 IS의 과격한 행동을 보고 있으면 종교의 말을 내뱉는 사탄의 모습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집트 출신의 나지브 마흐푸즈(Naguib Mahfouz)는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아랍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이 상이 제정된 이후 87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하니 문학상 자체가 서구적 시각으로 반영된다는 것과 같은 해에 ‘알카에다’가 수립됐고, 살만 루슈디의 살해 위협 등의 사건이 발생한 터라 작가의 수상에는 정치적인 고려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작품 『우리 동네 아이들』로 작가 역시 신성 모독 논란에 휩싸였고 실제 테러를 당해 오른손 신경손상을 겪기도 했다.

거친 사막 한 복판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소유하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자발라위, 그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후계자로 장남 이드리스를 제치고 막내아들인 아드함을 지목한다. 이드리스는 아버지의 결정해 반발해 집에서 쫓겨나고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이드리스는  막내인 아드함을 꼬드겨 비밀유언장을 보게 하지만 아버지 자발라위에게 들키게 되고 아드함마저 사막의 한가운데로 쫓겨난다. 아드함은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며 대저택의 삶을 평생 그리워했으나 결국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후 둘의 후손은 사막에 구역을 형성하고 살아가고 마을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타난다. 자발라위는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에게 피지배층의 지도자, 선지자의 역할을 주문하고 그들의 투쟁은 망각이라는 이름 아래 잊히고 또 잊히지만 계속된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종교라는 주제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알레고리란 ‘다른 것을 말하기(other speaking)’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를 어원으로 인물, 행위, 배경 등이 일차적 의미(표면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이면적 의미)를 모두 가지도록 고안된 이야기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의 등장인물들과 이야기들은 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서와 코란의 선지자들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야훼인 자발라위와 에덴동산이기도 한 대저택, 그리고 대저택에서 추방당한 사탄인 이드리스, 사탄의 유혹에 빠진 아담인 아드함의 이야기다. 이후 선지자인 자발, 라피아, 까심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세, 예수, 모함마드를 상징한다. 그리고 사막의 마을은 우리의 세계를 그대로 상징한다. 세계는 항상 갈등하고 폭력에 휩싸이며 매우 적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자신의 집에서 절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발라위처럼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악을 지켜보고만 있으며, 인간은 신의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왜곡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런 것처럼 앞으로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신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탄이 가득한 이 세상에 신은 왜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 않을까?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2권. 358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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