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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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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을 마감하는 작가가 직접 선정한 단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라면 자신의 단편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단편의 경우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응축시킨 것이 대부분일 터, 젊은 시절에 시작된 글쓰기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오에 겐자부로의 『사육 외 22편』은 60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발표했던 모든 단편소설 중에서 직접 스물세 편을 가려 뽑아 고쳐 쓴 작품집이다. 작가 스스로 ‘정본定本’이라 칭할 만큼 평생의 궤적이 작품별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이를 변주해 고쳐 쓴 「사자의 잘난 척」에는 모두 묘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에는 병원에서 기르던 실험용 개를 도살하는 개백정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죽을 시간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눈을 가진 개를 보며 자신을 동일시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자의 잘난 척」에는 낙태 비용을 벌기 위해 수조에서 시체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학생이 등장한다.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적의라는 감정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묶여 서로서로 닮아 가는, 개성을 잃어버린 애매한 우리, 우리 일본 학생. 그러나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정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일들에 있어 열중하기에는 너무 젊었든가 너무 늙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기묘한 나이였고 완전히 지쳐 있었다.
-「기묘한 아르바이트」 p.12


중기와 후기의 연작과 단편은 초기의 모습들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 자신의 삶의 변화가 작품에도 영향을 미쳐 관념적이고 관조적인 모습들을 보인다. 후기 단편인 「‘울보’ 느릅나무」와 「벨락콰의 10년」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시간이 지난 후 현재에 해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울보’ 느릅나무」에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거대한 나무 밑에서 시신을 몰래 매장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아버지가 몰래 매장한 타지인의 무덤을 다시 파버리려 한다는 아픈 기억이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의 작은 한글이 새겨진 작은 묘지에 아이들이 매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장식을 바치러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알게 된 나는 아버지가 공장 옆에 무덤을 옮겨준 것을 알고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이 작품집은 오에 겐자부로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개인적으로는 초창기 작품들인 전후의 일본의 암울한 상황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허무한 모습을 그려낸 「기묘한 아르바이트」, 「사자의 잘난 척」, 「사육」 등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스무 살에 지쳤다고 말하는 젊은 모습은 수면제 중독에 빠지고 세상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오에 겐자부로가 결혼 후 태어난 장남의 병은 오에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아들이 보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것을 알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가족의 모습은 삶에 대한 절망인 동시에 활력이기도 했다. 또한 히로시마 방문으로 절망 속에서도 보인 새로운 삶을 향한 재생의 몸부림을 보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얻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의 삶의 변화는 글쓰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작가의 이런 모습들은 이 단편집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이 책을 먼저 보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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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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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이다. 내가 속한 집단은 ‘그들’과는 다르며 우리만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결속을 강화시킨다. 집단의 힘은 강력하고 무섭다. 그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 역시 그들에게 떨어지고 싶지 않아 다름을 내보이지 않는다. 한 무리 속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지만 무리 속에서 빠져 나오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것이 인간이고 가족이라면 말이다. 이 무리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죽은 후에도 결국 집단 속에 존재하게 된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them』은 가장 미국스럽다는 도시 디트로이트의  한 빈민가에서 1937년부터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시기에 격동의 삶을 살아낸 한 가족의 연대기를 이야기한다.

로레타는 열여섯의 어려보이고 유행에 민감한 소녀다. 실직한 아버지와 오빠 브룩,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토요일 밤 로레타는 좋아하던 소년인 버니와 하룻밤을 보내지만 다음날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은 오빠인 브룩에게 총을 맞고 죽어 싸늘하게 식은 버니의 몸이었다. 로레타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하워드 웬들이라는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임신을 하게 된 로레타는 어쩔 수 없이 하워드 웬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세 아이가 태어나 엄마가 된다. 원치 않는 가정을 꾸린 로레타였지만 자신이 살아 왔던 집보다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된다. 로레타의 아이 줄스와 모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줄스는 가출을 일삼다 디트로이트의 변두리에서 살고 있었고 모린은 도서관을 사랑하는 착실한 아이였지만 새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의 과도한 억압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모린은 자립하기를 원했고 그녀가 자립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매춘밖에 없었다. 하지막 모린은 폭력에 노출되어 침대에서 2년여를 의식 없이 지낸다. 모린을 깨워준 것은 로레타의 첫사랑을 쏴죽인 오빠 브룩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줄스는 자신이 버린 과거의 연인에게 빠져들지만 총에 맞고 모린은 유부남인 대학의 강사에게 빠져든다.

디트로이트는 공업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범죄가 항상 삶 속의 일부인 도시이기도 하다. 이런 도시의 성폭행으로 이루어진 비정상적인 가족. 조이스 캐럴 오츠의 그들에는 삶과 지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흑인 폭동으로 디트로이트가 불탔을 때 줄스는 자신의 과거가 도시와 함께 불탔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부정할 수 없듯이 자신의 피가 이어진 가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떨쳐버릴 수도 없고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첫사랑이 총에 맞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정으로 이루었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안정을 찾게 된 로레타와 가정을 이룸으로써 안정을 갖고 싶어 하는 그녀의 아이들. 그들 일가에게 자신들의 가정은 ‘그들’에게서 벗어나 ‘우리’를 만들려는 희망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둘이 선택한 것은 자신을 총으로 쏜 옛 연인이고 가정이 있는 유부남 강사였다. 둘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와는 상관없이 비정상적인 사랑 속에서도 안정적인 가정을 추구하는 모습은 어머니인 로레타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결국 결혼을 한 모린을 찾아온 줄스에게 자신은 자신의 과거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잊게 될 거라고, 이제는 다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야?” 줄스가 물었고 모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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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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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검은색이 차별받는 것은 사람 피부색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동물이건 가전제품이건 심지어 음식에서도 검은색이 차별받지는 않는다. 오로지 인간뿐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일지라도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흑인에 대한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어디 검은색뿐이랴 누런 황인종들 역시 백인의 눈에는 별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유색인종 간에서 서로 차별을 하곤 하니 인간의 피부색에 대한 차별은 피부색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누리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 대륙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백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박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지배 세력에 대한 박해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동아프리카의 한 도시의 백인과 흑인의 서로 대척하는 삶 속에서 흑인 사회에 녹아들려 했던 한 백인 여성의 눈으로 보여준다.

스웨덴의 가난한 가정의 한나는 극심한 여름 가뭄으로 목전에 닥친 곤궁으로 집을 떠밀리듯 떠나게 된다. 네 한 몸쯤은 챙길 수 있다는,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줄 게 없다는 어머니의 말로 친척이 살고 있는 해안 도시로 향한다. 친척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한나는 우연히 호주에 가는 배에 오르게 되고 배의 항해사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남자는 병으로 죽게 된다. 배가 동아프리카의 로우렌소 마르케스라는 항구 도시에 정박했을 때 한나는 몰래 배를 떠난다. 우연히 투숙한 호텔에서 한나는 심하게 앓게 되고 조기유산을 한다. 그 호텔은 실제로는 유명한 매음굴이었고 한나를 돌봐주던 매음굴의 주인은 한나에게 청혼을 하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남편 역시 죽게 되고 한나는 매음굴을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흑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 백인과 남성이 지배하는 그곳의 삶, 한나는 그 부조리에 저항한다. 백인 남편을 살해한 이사벨이 감옥에 투옥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나의 이런 행동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외면받을 뿐이다. 한나의 피부색으로는 결코 흑인들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백인들에게는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흑인들을 생각하는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으며 흑인들 역시 오랜 기간의 백인에 대한 증오심과 뒤이을 보복 때문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한나를 의심하며 거부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결코 흑인 사회에 녹아들 수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흑인을 생각하며 아프리카를 떠난다.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p. 208) 


고단한 삶 속에서도 기득권은 존재한다. 가난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은 서로 같지 않다. 피부색만으로 기득권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이 세계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법으로 아무리 금지를 해도 유전자 깊숙이 박혀 버린 우월감은 어느 한 인종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차별은 아프리카가 아니더라도 어느 세계에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 모진 학대 속에서도 지켜내려는 그들의 영혼은 맑고 순수하지만 한없이 배고프고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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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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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 국어시간에나 배우고 말았을 명언이 현재에 와서 실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키보드는 칼보다 강하다.’ 방구석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조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이 죽기까지도 한다. 개인이 모인 것만으로도 이런 힘을 보이는데 국가가 인터넷 댓글을 관리하게 되면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 된다. 더욱이 이를 제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 더 끔찍할 따름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네트워크 여론조작이라니, 나치의 괴벨스가 본다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장강명의 『댓글부대』는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 사건이 모티프가 된 것으로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를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에 혁명적인 방식으로 등장해 대화와 소통의 장이 될 줄 알았던 인터넷은 그 등장만큼이나 어두운 이면으로 과거에 드러나지 않았던 끔찍한 모습마저 쉽게 보여주게 되었다.

소설은 그럴 듯한 이름의 팀-알렙의 멤버 세 명인 삼궁, 01査10, 찻탓캇이 해왔던 이야기를 폭로하는 인터뷰 형식과 그 이면의 이야기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상품평과 유학 등의 소소한 조작을 일삼는 것으로 돈을 벌어 ‘김치녀’라고 욕하지만 정작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여자를 안기 위해 안마방과 유흥업소를 전전한다. 이들은 점차 단순한 조작에서 벗어나 악성 루머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마치 자신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권력을 쥐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처음에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내 또래들은 정말 엄청난 도구가 왔다, 이걸로 이제 혁명이 일어날 거다, 하고 생각했지. 모든 사람이 직위 고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으로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지. 인터넷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권위를 타파해서 민주화를 이끌 거라고도 믿었어. 거대 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 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P.55)


결국 인터넷 혁명은 어두운 쪽에서 일어났다. 여론 조작의 신기원, 과거 TV속의 조작이 직설적이고 단순한 것이었다면 인터넷의 그것은 조금 더 교묘하고 심리적이다. 인터넷 여론 조작이나 선동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다. 단순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효과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바로 ‘이간질’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살살 건드려 실제 문제는 보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담배 값 인상으로 인해 정부의 비판이 거세지면 흡연자 대 비흡연자의 구도로 싸움을 붙인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면 외국인 노동자는 힘든 일도 열심히 한다고 한다. 결국 네트워크는 이전투구의 현장이 되고 남산의 실세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다. 문제의 본질은 이미 사라졌고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분노뿐이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세계를 좋아하는 것이다. 살인이 일어나고 세계가 황폐해져도 소설속의 이야기라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댓글부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너무나도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을 끔찍하게 반영한 것이 아니던가. “독기 없이 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저자의 말이 사무치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 불쾌하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권력이, 그 권력을 눈감아주면서 독이 든 떡고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불쾌하다. 바꿀 수 없는 희망조차 생기는 않는 현실은 더 불쾌하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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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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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제, 신분제라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희미해지지 않을까 예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특정 국가의 신분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명목상의 계급제나 신분제는 이미 역사 속에서나 쓰일 단어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성장한 자본가들은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고 그 두터운 벽은 과거 신분제가 무너지던 시절을 반성이라도 하려는 듯 높기만 하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금수저, 흙수저의 자조적인 농담만 보아도 과거 신분제가 또 다른 형태로 정착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급격한 사회체제의 변화를 겪은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런 체제의 변화가 동양의 경우 과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현재로 이어진 반면 과거의 계급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 구축―물론 과거로부터 이어진 세력도 있겠지만―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바로 노동자 계급의 사상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계급 질서 자체가 변동이 되었다는 것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 측에서는 환호성을 지를 만한 시기였다면 당시의 지배 계급들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가졌던 시기였을 것이다. 세라 워터스의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런 무너져가는 지배계층의 공포를 대저택 헌드레즈홀에 투영한다. 쇠락한 대저택에 출몰하는 귀신들, 그곳을 억지로 지켜나가는 노부인, 그녀에겐 자신들을 위협하는 노동자 계급의 성장이 귀신들이 주는 공포와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 워릭셔의 대저택 헌드레즈홀, 전쟁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으로 대저택은 물론 소유주인 에어즈 가문마저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는 노부인 에어즈 부인과 전쟁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아들 로더릭, 그리고 실제로 대저택을 지켜나가고 있는 캐럴라인, 하인들은 다 떠나고 새로 온 소녀 베티가 헌드레즈홀에서 살고 있다. 과거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인 패러데이는 자수성가해 의사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헌드레즈홀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의 주치의가 된다. 에어즈 부인은 새로 온 이웃과 파티를 열지만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헌드레즈홀은 괴이한 일이 연이어 발생하는 불길한 장소가 된다.

헌드레즈홀은 이제 팔리지 않고 무성한 수풀에 뒤덮여 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잊혀졌고 흉물스럽게 변한 건물일 뿐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굉장히 모호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것은 화자 자체가 어린 시절 헌드레즈홀을 욕망했던 ‘리틀 스트레인저The Little Stranger’이기 때문이다.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대저택, 이처럼 화자에 대한 의심은 이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화자 자체가 성공한 노동자 계급의 한 사람이며 대저택을 탐하던, 누구보다도 헌드레즈홀의 몰락을 바랐던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저택의 귀신으로 출몰하던 낯선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실재하지 않지만 각자가 가진 두려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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