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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문득 떠오른 것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였다. 어떤 목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리도 고달파야 했고, 아비가 딸의 눈을 상하게 해야 했고, 소리에 의해 일으켜 지는 살의를 피해 홀로 떠돌아야 했을까. 어떤 업보를 지니고 있기에 한을 키워 나가야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과 이해할 것도 같은 마음이 동시에 들면서도 갑갑한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3가지의 이야기를 내어 놓고 있는 [천년학]은 <서편제>와 <소리의 빛>과 <선학동 나그네>로 구성지어져 있다. 어쩐지.. 오라비의 이야기와 누이의 이야기가 선학동 나그네의 비상학을 향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목소리 좋은 사람이 정말 부러웠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중학생 때였던가... 직접 이야기를 녹음하는 스토리 텔링이 있었는데... 당시 라디오에 목소리를 녹음해 보고 얼마나 우울했었는지.. 결코 예쁘다 할 수 없는 목소리에 풀이 죽어 그 숙제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었던 기억이 있다. 난 예쁜 목소리를 싫어한다.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맑기만 한 목소리는 어쩐지 쉽게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거부하게 된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 목소리에 맑은 소리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책에선가... 한恨이 속으로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목소리에 무게를 얹어 준다는 그런 구절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였을까. 울음을 터트리지 않게 되었다. 슬픈 일이 있어도 꾹꾹 누르고, 눈물만 방울지도록 놓아두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표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도 같지만, 목소리가 조금은 진중해진 듯도 하였더랬다. 그렇게 한을 속으로 담으면 목소리가 멋지게 된다는 낭설을 무작정 믿었던 나였었지만, 영화 <서편제>나 [천년학]의 내용과 같이 한을 속으로 움켜 놓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단지 조금 더 목소리에 무게를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울음들을 삼켰던 나도 그 시간들이 힘들었는데 그들의 삶은 얼마나 고되었을지... 우리의 음악 안에 스며 있는 그 한들을 음으로 표해내기 위해 그들이 희생하고 삼켜야 했던 삶과 울음들은 얼마나 되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들은 자신의 삶보다 소리가 더 중요했을까? 하긴.. 이런 우문도 없겠지... 이야기 속에는 분명 소리에 대한 그들의 욕망과 갈증들이 담겨 있는데 내가 이런 질문을 던져 봤자겠지.
감동을 주는 글이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나 그 작품들에 담겨 있는 고통은 단지 창작한 자들만의 몫인 것일까...? 난 어떤 마음으로 그의 글을 읽고, 어떤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일까. [천년학]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그들의 절절한 마음을 내가 알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실제이든 허구이든 상관은 없지만, 우리의 음악과 우리의 글 속에 한이 들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 한을 그려 낸 이나, 그것을 읽고 그 한을 이해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미 우리는 한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든 우리 한국인의 마음 속엔 그 한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 이것이 대표적인 민족성인 것일까.
[천년학]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소리에 취해간다.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지, 혹은 좋은 소리가 나오기까지 어떤 아픔이 있었을지 그 사연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픔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이 생겨나는 과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무얼 그리도 바라기에 한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상념과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두루두루 드러나는 책읽기였다. 그들이 바라는 비상학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 부족하지만 마음으로 듣고 귀를 열어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리고 눈으로 그려본다... 그들의 소리의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