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식수필
정상원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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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식탐이 많아 <탐식수필>이라는 제목과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를 결정했는데, 생각 보다 얻은 것이 많은 책이었다.

 

일단 추천사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학부시절 은사의 말을 만나 너무나 반가웠고, 책의 내용도 '쉐프가 빚어낸 파인 워딩의 세계'라는 추천사에 걸맞은 책이었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으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쉐프이자 작가 <정상원>의 세계는 어떨지 궁금하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책은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와 같이 미감의 역사를 되짚고 있으며, 크게 5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래디컬한 래디시>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로로 구현해낸 세계 각국의 요리를 통해 맛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2장 <오븐에 5분>은 식재료들을 시간과 정성, 정교한 레시피로서 맛있는 음식으로 승화시키는 맛의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3장 <최대한의 식사, 먹기 위해 사는 법>은 프랑스 코스 요리의 성찬에 대해 논하고 있고, 4장 <최소한의 식사, 살기 위해 먹는 법>은 반대로 기내식이나 선상식 등의 간이식사를 다룬다. 5장 <기술을 기술하는 기술은> 미감이 기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다. 먹을 때는 생활이고 먹고 싶을 때는 그리움이다. 맛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닐고 먹는다는 것은 삶과의 맞대면이다. 맛은 삶에 대한 직접성이다."

 

인용한 시인 백석의 문장처럼 누구나 경험하지만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각자의 맛에 대한 세계에 담긴 쉐프이자 작가 정상원의 체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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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수필
정상원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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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수필>이라는 제목과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를 결정했는데 생각 보다 얻은 것이 많은 책. 추천사에서 잊고 지냈던 학부시절 은사를 만나 반가웠음. ‘쉐프가 빚어낸 파인 워딩의 세계‘라는 추천사에 걸맞는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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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따위가 있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반려동물'의 정의이다. 비슷한 용어로 ‘애완동물‘이 있다. ‘애완동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금붕어 따위가 있다.“

두 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상 정의를 비교해보면 표현상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 ‘곁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공존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두 단어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으며, 이 때문에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 더 나은 용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애완동물(pet)의 '완(玩)'자는 '완구류'할 때의 완(玩)자로 사람이 동물을 애정하고 같이 놀아준다는 일방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이 동등한 관계로서 함께 더불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의 '반려동물'이 더 나은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애완'이라는 용어가 꼭 가지고 논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고 놀아주는 관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고 놀아주는 주체가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동물자유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애완동물을 입양 후 동물이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은 12% 정도에 불과하며, 88%가 도중에 애완동물을 유기, 파양, 재분양한다고 한다. 대다수의 애완동물은 늙거나 병들거나 직장이나 이사나 휴가 등 생활이 바뀌어 키우기 어려워지거나 귀찮아지거나 싫증이 나서 열에 아홉은 버려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 같은 통계 수치를 보면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보게 된다.

바질 작가의 <로봇 강아지 에보>의 아버지와 아들이 '강아지 에보'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열번 째 생일 무렵 화자는 아버지에게 강아지를 선물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바라던 강아지를 선물 받는다. 하지만 그 강아지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로봇 강아지였다.

왜 살아있는 강아지가 아니냐고 따지니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강아지는 장난감이 아니잖니.'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화자는 이내 로봇 강아지에게 '에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음을 준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진정한 동반자, 반려자가 탄생한다. 그렇게 화자에게 에보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 되었다.

'에보는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어요.'

'에보는 포기할 수 없어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있을까? 로봇 강아지 에보는 1년이 지나자 이상 행동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이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강아지 에보가 화자에게 한 행동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제서야 에보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보는 자기에게 집착하지 말고, 나와 내 가족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소설에서는 로봇 강아지와 인간과의 관계를 들고 있지만 어쩌면 모든 존재와 관계 속에는 상실과 이별을 전제로 유지되는 것 아닐까? 유한한 존재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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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유럽 - 도시와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여행
조성관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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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작가님의 <언젠가 유럽>의 부제는 “도시와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다. 사실 작가님 책을 접한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전 우연히 찾게 된 <런던이 사랑한 천재들, 찰리 채플린에서 버지니아 울프까지>를 읽으며 작가님의 책을 처음 접했다. 당시 나는 학창시절부터 고대해온 런던여행을 준비하면서 관련정보들을 찾아보던 중이었는데, <런던이 사랑한 천재들>은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추천코스만을 나열하는 여타의 여행서적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매력을 가진 책이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6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하여 런던이라는 도시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런던이 사랑한 천재들>의 독특한 접근방식에 매료되어 런던에까지 가져가서 여행중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본격적으로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책 날개를 보면 간략한 저자 소개가 있는데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천재 연구가”라는 작가님을 대표하는 수식어가 있다. 이는 ‘도시를 사랑한 천재들’ 시리즈에 기인한 것이다. 15년전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던 중 조성관 작가님은 모차르트와 교감을 나눈 진귀한 경험을 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도시 공간에 남겨진 천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기획했다. 2007년 <빈이 사랑한 천재들>이 처음으로 출간되었고, 뒤이어 프라하, 런던, 파리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올해 시리즈의 마지막인 서울편이 출간된다고 하니 이 또한 기대가 크다.

<언젠가 유럽>의 서문에는 이 책의 집필 동기가 서술되어 있고, 이를 통해 왜 이 책에 “도시와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대표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많은 부수적인 스토리들을 수확했다. 그것은 천재들의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수습한 이삭이었다. 그러나 천재 시리즈에서는 이 같은 주변적인 이야기들은 부득이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유럽>은 이를 여행기의 형태로 쓴 것이다.” (p. 6 ~ 7)

‘도시를 사랑한 천재들’은 거장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쌓은 조성관 작가님의 안내를 받으며 거장들의 삶을 깊이 파고드는 '책으로 하는 여행'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가진 시리즈다. 이는 거장의 삶과 작품에 매료된 사람들은 물론 문학기행 등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현재 여름휴가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사태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독자들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여행 안내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언젠가 유럽>은 ‘도시를 사랑한 천재들’ 시리즈에서 담아내지 못했던 점들을 다루며 뭔가에 쫓기듯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알레그로 (allegra)’가 아닌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는 ‘안단테 (andante)’ 여행을 지향하고 있다.

“코로나 창궐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유럽 여행도 더 이상 코로나 이전과 같은 양상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패턴이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나는 이 변화를 ‘지적인 개인주의 여행’이라고 정의한다.” (p. 8)

<언젠가 유럽>은 유럽의 6개 도시 (파리, 빈, 런던, 프라하, 베를린, 라이프치히)를 다루고 있다. 작가님은 천재 시리즈가 정장 차림으로 빈 필하모닉의 말러 교향곡을 듣는 것이라면, <언젠가 유럽>은 캐주얼 차림으로 쇤브룬 궁전 마당에서 앙드레 류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라는 책의 컨셉을 기가 막히게 설명하는 비유를 서문에 남겼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서두에서 각 도시를 대표하는 영화를 소개함으로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며 도시에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는 부분이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파리를 소개하고, 연인의 낭만을 담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로 빈이라는 도시에 대한 첫인상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심어주고 있다.

런던을 여는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노팅힐>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이고 개인적인 추억이 깃든 영화이긴 하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트라팔가 광장과 넬슨 제독, 내셔널 갤러리 등을 고려하면 런던을 소개하는 영화로 <007 스카이폴>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007 스카이폴>을 보면 인상 깊은 하나의 장면이 등장한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뒤로하고 나이가 들어 노쇠한 제임스 본드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 쓸쓸한 뒷모습을 여과 없이 노출하며 그가 바라본 그림은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였다.

테메레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에 조국을 구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영웅이었다. 책에도 소개하고 있지만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flagship) 빅토리호를 구하고 두 척의 배까지 나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007 스카이폴>에서 은퇴의 기로에 선 스파이는 그림 속 범선을 보며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인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처절하고 애잔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놀라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유럽>이 다루고 있는 6개의 도시 중에서 나는 지금까지 3개의 도시만을 방문했다. 작가님의 체계적인 큐레이션을 받으며 예전 여행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예술가들의 성지 몽마르트르는 파리 여행 중 들렸던 곳이지만 모딜리아니와 피카소의 단골 술집이었다는 ‘라팽 아질’이나 ‘몽마르트르 미술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카트린 아줌마 식당’은 미처 알지 못했던 곳이다. 추후에 다시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면 방문해보고 싶다. 또한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 중에서는 프라하를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다. 그 이유는 책에서 작가님이 모든 해외여행 경험을 통틀어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강력 추천하신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을 가보고 싶어서다.

2020년 8월 현재, 예년과 같을 경우 한창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을 기간이지만, 해외여행은 커녕 예전과 같은 자유로운 여행 자체를 생각할 수 없는 요즈음의 분위기로 인해 나는 이른바 ‘코로나 블루’로 지칭되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조성관 작가님의 신작 출간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바로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 유럽>이라는 책의 제목은 조만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또한, 다시 해외여행을 떠나게 될 근미래의 어느 날을 연상시키는 반가운 제목이기도 하다. 더더욱 마음을 설레게 한 건 책 표지에 쓰여있는 “우리는 언제나 떠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내게 <언젠가 유럽>은 예전 여행의 추억과 다가올 여행의 설레임을 동시에 주는 책이었다. 마스크와 방콕 생활로 지친 당신, <언젠가 유럽>을 통해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지난 여행의 추억과 새로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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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울립 2021-11-29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 소개된 도시 중 3개도시만 가 봤어요..조만간? 다시 유럽에 갈 수 있겠죠.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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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이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뒷 표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소설은 82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김지영씨'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김지영'이 아닌 '김지영씨'인 이유는 '김지영씨'가 한국의 에코세대 여성들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김지영씨의 평균적인 삶을 각종 기사와 통계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재현해냄으로서 독자들이 이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보편적 체험이자 삶이었음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서 그 보편적인 일상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 소설이 화제가 되고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주위에 보편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아픔과 상처를 겪었던, 또 겪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라고 한다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그 엄혹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마음 속 절벽들을 지속적으로 허물어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기 어린 손을 건냈던 한 인물과 그 삶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내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 331)

 

살아가는 동안 매일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었으며, 세상을 뜬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들의 삶을 지지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은 소설의 제목에도 언급되고 있는 심시선이다. 한국전쟁때 가족을 잃고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그녀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두 번의 결혼을 거치며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했다. 남성중심주의 문화 속에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세계를 조망해온 남성에 비해 그 혜택의 범주에서 벗어난 채 끊임 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했던 것이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심시선은 이러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정적 시선을 유지하며 화가이자 작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에디 우드 고 (eddie would go) 라는 말 자체는 서핑 대회 때 어머어마하게 큰 파도가 왔을 때 누가 한 말이라지만 사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겠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p. 141)

 

에디 우드 고에서 에디에디 아이카우라는 유명한 서퍼를 지칭하는 것이다. ‘에디 우드 고에디라면 갔을 거야.”라는 의미로 전설적인 서퍼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소설에서의 해석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그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에디 아이카우는 고대 항해기술을 재현하려는 탐사대에 합류했는데, 탐사대 전체가 조난을 당하자 구조를 청하기 위해 홀로 자신의 서핑보드만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서 결국 실종되었다. ‘에디 우드 고라는 표현은 소설 속 심시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299)

 

나는 이제 그만 말해야겠습니다. 내게 오는 말할 기회를 이제 젊은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 다음 사람이 또 나처럼 화살을 맞고 싸움에 휘말리고 끝없이 오해받을 걸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p. 326)

 

우리는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 주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아야 했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지나온 과거와 현재 속에도 심시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존재한다. 시대를 앞서는 말과 글을 남기고 그러한 삶을 지향했던 이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완전하진 않지만 완성된 퍼즐이라는 점에서 심시선은 우리가 꿈꿔온 이상화된 판타지에 가깝다. “심시선은 우리가 가질 수 없었던 과거이자 도달해야할 미래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p. 182)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p. 256)

 

또한, '김지영'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온, 또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삶일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또 공감하지 못하는 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역사와 세계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대부분의 남성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젠더이슈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이슈 해결에 동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 <두번째 페미니스트>의 저자 서한영교는 남성 중심의 역사와 신화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의 곁에서 두번째 사람으로서 폭풍 속에서 폭풍이 멈추기 전까지 모든 걸 걸수 밖에 없는 첫 번째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세계를 조망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남성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을 보태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두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서한영교 작가의 주장을 지지한다.

 

뭐야 파라다이스가 아니었잖아.”

파라다이스일리가 없잖아?”

하지만 자동차 범퍼에 웰켐 투어 파라다이스라고 쓰여 있었다고. 사람 헷갈리게 왜 붙이고들 다니는 거야, 그럼?”

그거야 독특한 자연환경에 대한 애정 같은 거지. 다른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건 아니야. 부동산은 폭등하고 깨끗한 물이나 하수처리장은 부족하고(p. 206)

 

현실 속에서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명준과 난정의 대화처럼 우리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얼굴을 한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교묘한 포장으로 인해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되고 있어. 교묘할 뿐이야. 좀더 포장을 잘 한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234)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앞으로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여행중 맞이한 심시선씨의 10주기 기일에 가족들이 그들만의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대목이다.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 83)

 

시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가족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추모를 한다. 큰 딸 명혜는 열심히 배운 훌라 춤을 추었고, 맞사위 태호는 말라사다 도너츠를, 손녀 화수는 팬케이크를 준비했다. 제사상의 뒤에는 병풍 대신 손녀 지수가 직접 찍은 무지개 사진이 펼쳐졌다. 둘째 딸 명은은 레후아 꽃과 화산석 자갈을, 미술관을 좋아하는 아들 명준은 손수 만든 블록탑을, 박물관을 좋아하는 며느리 난정은 목걸이와 소설을 준비했다. 손녀 우윤은 서핑시 만난 파도 거품을, 손자 규림이 시선의 이름을 붙인 산호의 증서 (시선스 코랄), 새를 좋아하는 손녀 해림은 깃털 컬렉션을 가져왔다. 막내 경아는 심혈을 기울여 손수 고른 원두 커피를 가져왔고, 마지막으로 특이한 것, 독특한 것을 찾다가 기본을 잊었을지 모를 가족들을 생각해 과일을 준비한 상헌의 선택으로 완벽한 제사상이 구성되었다.

 

 “엄마 이제 안울어? 왜 그런 걸로 울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p. 296)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 (p. 304)이라는 화수의 말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무채색 톤의 옷만 고집하던 혜림의 티셔츠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밝은 노란색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경아가 잠든 해림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 하고 기뻐하며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것에 대해서는 앞서 집기 보다는 천천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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