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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
이는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뒷 표지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소설은 82년생 여성 중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김지영씨'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법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김지영'이 아닌 '김지영씨'인 이유는 '김지영씨'가 한국의 에코세대 여성들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김지영씨”의 평균적인 삶을 각종 기사와 통계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재현해냄으로서 독자들이 이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보편적 체험이자 삶이었음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서 그 보편적인 일상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 소설이 화제가 되고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주위에 보편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아픔과 상처를 겪었던, 또 겪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라고 한다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는 “그 엄혹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마음 속 절벽들을 지속적으로 허물어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기 어린 손을 건냈던 한 인물과 그 삶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내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 331)
살아가는 동안 매일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었으며, 세상을 뜬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들의 삶을 지지하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은 소설의 제목에도 언급되고 있는 “심시선”이다. 한국전쟁때 가족을 잃고 새로운 삶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그녀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두 번의 결혼을 거치며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했다. 남성중심주의 문화 속에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세계를 조망해온 남성에 비해 그 혜택의 범주에서 벗어난 채 끊임 없이 자신을 단속해야 했던 것이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 “심시선”은 이러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정적 시선을 유지하며 화가이자 작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에디 우드 고 (eddie would go) 라는 말 자체는 서핑 대회 때 어머어마하게 큰 파도가 왔을 때 누가 한 말이라지만 사실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겠다.”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가 다치게 되어도, 그런 의미로?”
“응” (p. 141)
‘에디 우드 고’에서 ‘에디’는 ‘에디 아이카우’라는 유명한 서퍼를 지칭하는 것이다. ‘에디 우드 고’는 “에디라면 갔을 거야.”라는 의미로 전설적인 서퍼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소설에서의 해석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그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에디 아이카우는 고대 항해기술을 재현하려는 탐사대에 합류했는데, 탐사대 전체가 조난을 당하자 구조를 청하기 위해 홀로 자신의 서핑보드만을 가지고 바다로 나가서 결국 실종되었다. ‘에디 우드 고’라는 표현은 소설 속 ‘심시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299)
“나는 이제 그만 말해야겠습니다. 내게 오는 말할 기회를 이제 젊은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 다음 사람이 또 나처럼 화살을 맞고 싸움에 휘말리고 끝없이 오해받을 걸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p. 326)
우리는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 주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아야 했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지나온 과거와 현재 속에도 “심시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존재한다. 시대를 앞서는 말과 글을 남기고 그러한 삶을 지향했던 이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완전하진 않지만 완성된 퍼즐이라는 점에서 “심시선”은 우리가 꿈꿔온 이상화된 판타지에 가깝다. “심시선”은 우리가 가질 수 없었던 과거이자 도달해야할 미래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p. 182)
“어떤 시대는 지나고 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p. 256)
또한, '김지영'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온, 또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삶일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또 공감하지 못하는 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역사와 세계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대부분의 남성들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젠더이슈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이슈 해결에 동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 <두번째 페미니스트>의 저자 서한영교는 남성 중심의 역사와 신화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의 곁에서 ‘두번째 사람’으로서 폭풍 속에서 폭풍이 멈추기 전까지 모든 걸 걸수 밖에 없는 ‘첫 번째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세계를 조망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혜택을 받아온 남성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권리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을 보태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두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서한영교 작가의 주장을 지지한다.
“뭐야 파라다이스가 아니었잖아.”
“파라다이스일리가 없잖아?”
“하지만 자동차 범퍼에 웰켐 투어 파라다이스라고 쓰여 있었다고. 사람 헷갈리게 왜 붙이고들 다니는 거야, 그럼?”
“그거야 독특한 자연환경에 대한 애정 같은 거지. 다른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건 아니야. 부동산은 폭등하고 깨끗한 물이나 하수처리장은 부족하고” (p. 206)
현실 속에서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명준과 난정의 대화처럼 우리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얼굴을 한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교묘한 포장으로 인해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되고 있어. 교묘할 뿐이야. 좀더 포장을 잘 한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234)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앞으로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여행중 맞이한 심시선씨의 10주기 기일에 가족들이 그들만의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대목이다.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 83)
‘시선’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가족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추모를 한다. 큰 딸 명혜는 열심히 배운 훌라 춤을 추었고, 맞사위 태호는 말라사다 도너츠를, 손녀 화수는 팬케이크를 준비했다. 제사상의 뒤에는 병풍 대신 손녀 지수가 직접 찍은 무지개 사진이 펼쳐졌다. 둘째 딸 명은은 레후아 꽃과 화산석 자갈을, 미술관을 좋아하는 아들 명준은 손수 만든 블록탑을, 박물관을 좋아하는 며느리 난정은 목걸이와 소설을 준비했다. 손녀 우윤은 서핑시 만난 파도 거품을, 손자 규림이 ‘시선’의 이름을 붙인 산호의 증서 (시선스 코랄)를, 새를 좋아하는 손녀 해림은 깃털 컬렉션을 가져왔다. 막내 경아는 심혈을 기울여 손수 고른 원두 커피를 가져왔고, 마지막으로 특이한 것, 독특한 것을 찾다가 기본을 잊었을지 모를 가족들을 생각해 과일을 준비한 상헌의 선택으로 완벽한 제사상이 구성되었다.
“엄마 이제 안울어? 왜 그런 걸로 울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p. 296)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 (p. 304)이라는 화수의 말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삶이 다르므로 각자의 삶에 말을 걸고 삶의 사소한 부분부터 변화에 대한 의지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 없이 삶 그 자체가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무채색 톤의 옷만 고집하던 혜림의 티셔츠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밝은 노란색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경아가 잠든 해림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 하고 기뻐하며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것에 대해서는 앞서 집기 보다는 천천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p.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