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따위가 있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의 '반려동물'의 정의이다. 비슷한 용어로 ‘애완동물‘이 있다. ‘애완동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금붕어 따위가 있다.“
두 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상 정의를 비교해보면 표현상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 ‘곁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공존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두 단어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으며, 이 때문에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 더 나은 용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애완동물(pet)의 '완(玩)'자는 '완구류'할 때의 완(玩)자로 사람이 동물을 애정하고 같이 놀아준다는 일방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이 동등한 관계로서 함께 더불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의 '반려동물'이 더 나은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애완'이라는 용어가 꼭 가지고 논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고 놀아주는 관계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고 놀아주는 주체가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동물자유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애완동물을 입양 후 동물이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은 12% 정도에 불과하며, 88%가 도중에 애완동물을 유기, 파양, 재분양한다고 한다. 대다수의 애완동물은 늙거나 병들거나 직장이나 이사나 휴가 등 생활이 바뀌어 키우기 어려워지거나 귀찮아지거나 싫증이 나서 열에 아홉은 버려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 같은 통계 수치를 보면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보게 된다.
바질 작가의 <로봇 강아지 에보>의 아버지와 아들이 '강아지 에보'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열번 째 생일 무렵 화자는 아버지에게 강아지를 선물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바라던 강아지를 선물 받는다. 하지만 그 강아지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로봇 강아지였다.
왜 살아있는 강아지가 아니냐고 따지니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강아지는 장난감이 아니잖니.'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화자는 이내 로봇 강아지에게 '에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음을 준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진정한 동반자, 반려자가 탄생한다. 그렇게 화자에게 에보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 되었다.
'에보는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어요.'
'에보는 포기할 수 없어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있을까? 로봇 강아지 에보는 1년이 지나자 이상 행동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이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강아지 에보가 화자에게 한 행동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제서야 에보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보는 자기에게 집착하지 말고, 나와 내 가족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소설에서는 로봇 강아지와 인간과의 관계를 들고 있지만 어쩌면 모든 존재와 관계 속에는 상실과 이별을 전제로 유지되는 것 아닐까? 유한한 존재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