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신판 (16년? 최근이다).
60년에 초판이 나왔고 내가 갖고 있던 건 75년에 나온 그 초판의 4쇄.
거의 내 나이급 책. 종이가 변색되긴 했지만 다 말짱하고 짱짱하다. 종이책의 견고함에 새삼 감탄.
이백년 정도는 가뿐히 가지 않나. 칸트가 읽던 책 지금도 볼 수 있고.
하튼 이런 좋은 책, 좋고 어려운 책도 갖고 있었다.
갖고만 있었다가 얼마 전 읽기도 시작했는데, 많이 감탄한다.
학부 강의가 출발이었던 책이 이럴 수도 있다니! --> 이런 감탄도 있다.
저자 길레스피는 프린스턴에서 가르쳤고 영어권에서 과학사가 독자적 학제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이 책은 그가 프린스턴에서 했던 과학사 강의에 바탕한 책. <인문학 304 Humanities 304> 과목명이 이러했다.
헌사가 이런 식이다. (*번역은 멋대로 엉망입니다. "이런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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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957, 1958년에 <인문학 304>를 수강하면서
말로 전해진 이 역사에 눈을 반짝이며 그리고 인내하면서 반응했던 학부 학생들에게.
그 역사의 전달이 이 책에 담긴 형식이 된 건 그들과 했던 토론 덕분이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이 책이 되었다. 내 열정을 견제하기도 했지만 또한 그 열정을 자극하기도 했던, 그들이 보여준 호기심과 회의주의의 매혹적인 조합을 특별히 더 애정과 함께 기억하면서, 이 책을 내 학생들에게 바친다.
프린스턴, 195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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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에서부터 이미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면 더더, 더더더, 길고 복잡한 (복잡한데 압축적인) 문장들 쓴다.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요즘 이렇게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의 복잡하고 압축적인 문장은 요즘 스타일로 그럴 것이다.....). 문장만이 아니라 요즘 학술 경향에서는 금기일 감정, 평가들도 적지 않다. 유럽 과학의 성취에 열정적으로 감탄하기라든가. 베이컨의 경험론은 "미들 브로우" 부르주아들에게만 설득력을 가졌을 거라는 둥.
그런데 그게 다, 전혀 단점이 되지 않는다. 다 장점이 된다!
어떤 대목들엔, 살면서 알았던 가장 강력한 시름도 잊게 할 힘이 있다. 시름. 싫음.
과학자들의 전기 제목에서 흔히 보는 "life in science" "life in physics" 같은 구절 생각하게 한다.
과학자들 전기가 저렇게 쓰이는 데 반해, "life in history of science" 아니면 "life in history of ideas" 같은 구절을 제목에 넣으면서, 과학사학자나 사상사학자의 전기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과학에 바친 일생"은 만인에게 설득력을 갖지만 "과학"사"에 바친 일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인 건가? 과학의 권위가 역사의 권위보다 강하기 때문인가?
이 분, 정말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에 일생을 바치신 분.....: 이런 깨달음이 ㅎㅎㅎㅎㅎ 좀 뭐랄까 머리를 치듯이 들게 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