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 오픈 코스 보던 시절에 

보면 이해 가능한 강의들 말고 물리학 같은 것도 열어봤었다. 

1강 시작하고 바로, 뜻밖에 웃음 터지게 했던 물리학 교수, 라마무티 샹카르. Ramamurthi Shankar. 퍼스트네임이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것이니 아마 라스트네임 위주로 사시나 봄. 예일 패컬티 페이지에 R. Shankar 로 나와 있다. 


2분 근방. 

"양자역학은 전혀 다른 무엇이죠. force, 혹은 trajectory 같은 것들이 여기서 적용이 되긴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제기되는 영역. 양자역학은 분자나 원자같은 아주 작은 것들에 적용됩니다. 그럼 나올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작아야 충분히 작은가겠죠. 누군가 내게, 인간 두뇌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충분히 작다면 할 수 있다: 이게 답이죠. 그리고 난 파티에 갔는데, 몇 분 동안 누구와 얘길 하다가 아 이 사람 두뇌에 양자역학적 접근을 해야겠다...." 


이 대목에서 어찌나 웃기던지, 

웃으며 순간 고양되던 그 기분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을 지경.  


이 수업 말고 다른 아마 일반교양 물리학 수업에서는, 

"물리학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여러분은 지금 자문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 중엔 의사가 될 사람도 있겠죠. 여러분이 의사가 되었는데, 여러분 환자가 어느 날.... 빛의 속도로 여러분을 피하는 경우..."  


그 때도 참 웃겼다. 강의실 학생들도 "일동 웃음". 

at the speed of light. 이 말을 쓰고 사람들을 웃게 한 사례 top 10. 이런 걸 누가 모아주면 3위 정도는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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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7-0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서 “인간 두뇌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⑴ 하나의 해석은 약 1.3~1.5킬로그램이나 되는 인간 두뇌 전체를 과연 양자역학적 대상으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즉 두뇌라는 거시적 대상을 양자역학적 미시적 설명 도구나 틀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⑵ 또 다른 해석은 인간 두뇌라는 한 물리적 덩어리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두뇌를 이루는 신경세포/뉴런, 시냅스, 미세소관 따위로 내려가서 이들 구성요소들이 보일지도 모를 양자역학적 현상이나 작동 기제를 탐구해 두뇌의 비밀이나 의식의 수수께끼를 밝혀낼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zauberberg’ 님께서 위에 정리해놓은 글에 따르자면, Ramamurti Shankar 교수는 단순히 ⑴번과 같은 유형의 물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해석은 재미난 웃음을 유발할 수 있긴 합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나 신경과학자, 인지과학자들한테는 그닥 별 도움이 안 되는 물음이죠.

반면에 ⑵번과 같은 해석의 질문은 실제로 뇌과학/신경과학/인지과학 등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질문이죠. 요즘 들어서 이런 물음에 답하려는 연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과학적/철학적 과제이니까요. 해서 이런 차원으로 Ramamurti Shankar 교수가 저 질문을 받아들였더라면 더 재밌고 더 의미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일찍 제가 알라딘 블로거 윙헤드(winghead)라는 분의 글 「문과에게 인공지능이란...」(http://blog.aladin.co.kr/winghead/8601125)을 읽고 댓글을 하나 달았었는데요. 그 댓글에서 뇌의 양자역학적 연구에 대해 짧게나마 얘기했었거든요. 그런데 또 zauberberg 님 글에서 양자역학과 뇌라는 재밌는 얘기를 마주친 거지 뭐예요. 그래서 이렇게 댓글 올리게 됐네요~ ^^

몰리 2016-07-04 19:02   좋아요 1 | URL
아 댓글, 그것도 자세히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여기 쓰느라 다시 보면서, 이게 순간적으로 미친 듯 웃길 수 있는 농담이긴 한데, 돌아가 따져보면 좋은 농담은 아니구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주신 내용과 같은 (제가 이렇게 정리할 수는 없었겠지만요) 이유에서요. 아마 나같은 사람에게만 웃겼을 수도 있(그러기엔 학생들도 와르르... 뒤집어지긴 합니다 ^^)다고, 이게 실은 말이 좀 안되는 것 같다고, 포스트에 추가하려다가 에고 사소한 옛기억의 기록일 뿐이라며,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Shankar 교수가 쓴 문장을 원문으로 보면,
˝Okay, this person needs a fully quantum mechanical treatment.˝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 문장에서 fully, 그리고 treatment란 두 단어 때문에, 그가 저 질문을 (1)번의 뜻으로 제시하는 (그렇게 제시하고 있음에도) 때의 그 무리함... 이 꽤 약해진단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그가 질문을 (2)번의 뜻으로도 제시한다 봐도 되겠다 한편으론 --> 이런 우호적 해석;;;;도 가능할만큼 그 무리함을 약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treatment는 치료, 혹은 시술. ˝(문제의) 접근˝ 이런 뜻으론 거의 쓰지 않으니까요. fully, 는 그게 이 문장 속에 있다는 그 자체로 오히려 모호성을 증폭하고.

자기 저 (웃자고 한) 문장을 진지하게 누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Shankar 교수 기뻐하겠네요 ㅎㅎ 근데 원문으로 보면, 완전히 무너지는 농담은 아닌 것 같아 보이니까, 이 농담 어휘 선택에서 그가 절묘했던 게 맞다면, 샹카르 교수 천재! : 이러게 되네요.

자기가 학생들을 잘 웃긴다는 데에 자부심이 엄청난 분 같더라고요. 학생들이 웃으면, 잠시 서서 보여주는 표정이 있어요 아주 깊이 흐뭇해하는. 이 분 강의들을 더 보아야겠습니다.
 















아침을 먹기 전이라면 먹기 전에, 

먹은 다음이면 먹은 다음에, 

뭐라도 여기 써야할 것 같아진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 먹은 다음 후식 과일을 먹다 쓰는, 아이고 의미없을... 포스트.  


어제 위의 책들 주문. 중고이며 쿠폰과 적립금 써서 만칠천얼마가 듬. 와우 저렴하다.. 고 쓰는 순간 대학원 시절 동네 헌책방이 기억났다. 음 왼쪽 책은 좋은 상태의 하드커버면 7불 정도, 오른쪽 책이라면 3불 정도. 그보다 더 비쌀 수도 쌀 수도 있지만, 그 서점 오래 다녔던 경험을 바탕으로 적절히 추정할 때 저 정도. 10불. 더 저렴할 수 있었다. 뭐, 다른 대륙에서라면? ;;;;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세르가 이 말 하고 있던 걸 보면서, 아니 이 말은 내 말인데! 

(내 말을 누가 따라 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내 말도 쓸만한 말일 때가 있는 것이다.....)

놀랐던 일이 준 교훈에 따라, 내가 했던 말 중에 쓸만한 말을 하나 꼽아 보라면, 

이 생이 어떻게 다를 수 있었나를 아는 것이 이 생을 사는 길.... : 이런 것이 잇따. ㅋㅋㅋㅋㅋㅋㅋ *오타는 고의적이 아님. 오타로 두는 것이 좋아 보인다. 


아도르노가 여러 곳에서 인용하는 헤겔의 말인데 (혹은, 통찰) 

경계를 인식함은 이미 경계를 넘는 것이다? 


(이제 헤겔이 내 말을 따라 했다고도 볼 기세?);;;;;; 


그런데 정말 그렇다. 이 생이 어떻게 다를 수 있었나, 다를 수 있나를 아는 건, 

이미 이 생을 다르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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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조나단 밀러가 스티븐 와인버그 인터뷰. The Atheism Tapes 6부작 중 2부. 

아서 밀러, 리처드 도킨스, 콜린 맥긴, 대니얼 데넷 등이 다른 부에서 인터뷰이들이다. 

2004년에 조나단 밀러가 Atheism: A Rough History of Disbelief 만드는 동안 이들 포함 여러 사람들과 꽤 긴 인터뷰를 하는데, 저 <무신론의 짧은 역사>엔 그 중 극히 일부만 들어갔고 그러나 이 인터뷰들 내용이 버리기엔 아까워서 그것들을 따로 <무신론 테이프>로 만듬. 


14-15년 동안엔 집 근처 산을 다니면서 Yale Open Course, 그리고 조나단 밀러가 만든 이 다큐들 많이 들었다. 

저 위의 정지화면에서도 보이지만 와인버그는 외모가 아름답게 ;;; 하여간 멋지게 늙은 노인은 아닌 편이다. 그 왜, 항상 눈물이 고인 것같은 눈. (유툽 유저들이 이걸 지적하고 있음. 그래서 나도.) 그런데 이거 들으면서, 구원을 체험함. 표나게 강력한 뭐가 어디 있어서가 아니라, 잘 살아온 인생들의 힘. 그런 거였을 것이다. 조나단 밀러라는 잘 살아온 삶 + 와인버그라는 잘 살아온 삶. 그리고 와인버그의, 과학 정신 in action. 





이건 조나단 밀러가 인터뷰이. 그보다 한참 젊은 여자 방송인이 인터뷰어.  

방송용 인터뷰라도 인터뷰어 인터뷰이가 개인대 개인으로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 두 사람의 정신이 만나기도 한다..... 이런 인상을 주는 인터뷰다. 


나는 사실 이걸 여러 번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저 두 사람이 하듯이 대화하면 (20년이 넘는 나이차 같은 건 장벽이 되지도 않으면서) "둘이 사귀냐?" 같은 반응일텐데? 상대의 정신에 흥미를 느끼고, 그걸 눈의 반짝임이나 지속적 눈마주침, 손짓 고개 갸웃함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 일이, 거의 여기선 금기 아닌가? 어디서나?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도? 언제나는 아니라면 적어도, 자주? 하긴 상대의 정신에 흥미를 느낀다, 이런 일부터가 희귀하게만 일어나지 않나? 흥미로운 정신이 드물기도 하겠거니와, 그런 정신이 있다 해도 누가 거기 흥미를 느끼는 일도 마찬가지로 드물겠어서? 


로버트 해리슨의 Entitled Opinions에도 

우리의 기준에서, "둘이 사귀네 사귀어"인 순간들이 참 많다. 

여자가 게스트일 때 그런 순간들이 더 많긴 한데 남자가 게스트일 때도 일어난다. 

마음이 맞아서 잠시 두 사람이 똑같이 좋아하고, 마음 맞음이 일으킨 설렘이 목소리에 담기고. 정성껏 질문하고 정성껏 답하고. 


고개 갸웃 정도의 제스처는 물론이고 심지어 평소의 눈빛에도, 

사람이 그 안에서 성장한 문화가 담기는 것이겠어서, 

조나단 밀러의 유툽 비디오들을 보면 우리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제스처와 눈빛. 

적어도, 여기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제스처와 눈빛. 그래서 한때, 강력한 해방감을 이것들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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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읽은 글. The Mind: Less Puzzling in Chinese? 페이지는: 

http://www.nybooks.com/daily/2016/06/30/the-mind-less-puzzling-in-chinese/
















필자는 이 책의 저자. 제목이 <중국어의 해부>라니 내가 읽고 싶진 않으면서, 어떤 얘기 하는 책인지 (좀 많이) 알고 싶다. "다른 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은 두 번 득을 본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먼저, 다른 문화에 대해 배우고, 다음, 자기 문화의 어떤 가정들이 자의적임을 알게 된다." 이런 말로 시작하고, 중국어와 영어의 차이가 중국어로 하는 철학과 영어로 하는 철학의 차이, 그 철학이 다루는 문제들의 차이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니냐.. 에 대해 질문하는 글. <중국어의 해부>를 쓸 때 그가 품었던 의문 중엔, 정신 개념을 놓고 서양 철학이 벌여온 싸움의 일부는 서양 언어에 그 뿌리가 있는 게 아니냐.. 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문, 질문을 영국 출신 재미 철학자 콜린 맥긴의 글들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렸다 하는데, 

내겐 조나단 밀러가 만들었던 BBC <무신론의 짧은 역사> 시리즈로 알았던 콜린 맥긴. 지금 이거 쓰면서 그의 책을 처음 검색해보는 콜린 맥긴. 많은 책들을 썼고 어떤 건 바로 관심이 간다. 위의 셋 중에선 특히 왼쪽. Mindfucking: A Critique of Mental Manipulation. 마인드퍽킹. 이 말이 책 제목으로 쓰였구나(처음은 아닐지 몰라도)며, 잠시 감사함. 


어쨌든, "정신, 중국어론 그리 수수께끼 아닐 듯?" 이 글의 필자에 따르면, 

중국어에선 동사가 강하고 영어에선 명사가 강하다. feel, experience, 이런 말들이 중국어에선 동사로 표현되지만 (현대 중국어가 영어식 표현 역어들을 갖게 되면서 그 경향이 약해지긴 했어도), 영어에선 명사로 표현되는 강한 경향이 있고, 그 때문일까 본질적으로 동사로 쓰여야할 말들까지 명사화하는 경향이 영어엔 있다. 이 강력한 명사화 경향 때문인지 몰라도, 실체 규정이 아마 불가능한 것들까지, 그걸 부르는 명사가 언어에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로 접근되는 일. 정신의 문제, 심신 문제와 관련한 서양 철학의 곤경은 이런 서양 언어의 특징과 적어도 어느 정도는 관련 있지 않겠냐는게 필자의 결론. 


짧은 글이고 애매하게 끝난다. 프린스턴 철학과의 한 교수에게 이 문제와 관련해 자기 생각을 말했더니, 

"그래서, 심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같은 식으로 ㅋㅋㅋㅋ; 반응했다나. 


막연히 (무식하게), 마인드-바디 프라블럼 이건 정말 양인들의 프라블럼.. 같은 생각을 나도 하긴 했었다. 이 글이 제시한 문제에 대해 그 필자 자신, 아니면 누구라도, 자세하고 강력한 연구를 해주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그래서 듬. 


그런가 하면, 동양언어(한국어)와 서양언어(영어) 사이의 차이는 

구속력과 해방력, 이걸 기준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도 듬. 언젠가 일기를 쓰면서, 누군가를 강력히 비판해야 했는데 그를 지칭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홍길동은.. 홍길동이.. 이러는 것도 너무나 어색했으며, "성 + 직업" 조합도 참으로 어색했고, "성 +"씨"" 조합도 마찬가지. ㅋㅋㅋ;;;; 영어에서 학술적이거나 어쨌든 공식적인 글에선 사람을 성으로만 가리키는 일, 이거 따라해서 성으로만 불러봤다. 그래도 어색했지만. 여기서 나는, 울프를 포함해 블룸스베리 사람들이 쓴 일기나 편지들에서, 사람을 이름으로 (퍼스트네임) 부르면서 그 사람에 대해 못할 말이 없다는 걸 기억했고, 여기에도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자문했다. 한국어에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애정이 강요된다. 아닌가? 그의 이름만을 부를 수가 없기 때문에. 교착어는 애착을 강제하는 거야. : 자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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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강의록의 마지막 강의는 

"틀린 삶을 옳게 살 수는 없다"에 바쳐진 긴 논평같은 것이기도 한데, 

내가 읽은 아도르노 저술들 중에서는 아마 유일하게, "실패하는" 아도르노를 보여준다. 니체, 특히 <짜라투스트라>의, 오독까진 아니면 어쨌든 (아도르노에게선 예상할 수 없을) 피상적인 읽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도망치라, 친구여, 너의 고독 속으로." 이런 구절을 아도르노는 부르주아 도덕의 추상적 부정......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을까 정말? 


아닐 것같기 때문에, 

만일 아도르노가 바슐라르를 읽었다면, 인간에게서 사회가 아닌 영역에 대한 탐구, 그것의 의의를 알아보았을 것같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너무 강력히 사회의 (사회라는 악의) 전면성, 이런 걸 말하면 흠 비관하기를 여기선 택한 것 같아.. 하지만 왜? 같은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당시 그가 일부였던 독일 지식인 집단의 무엇인가가 그를 그렇게 이끈? 


그런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우리를 재료로 만든 그것. 그것을 향한 저항. the resistance to what the world has made of us." 이런 구절엔 반박불가의 진실이 있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저항하라!"는 샹포르의 "정의가 너그러움에 앞선다"와 근접조우 한다고 생각한다.  

Take care of justice and love will take care of itself. : 아도르노나 샹포르나, 동의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몇 문장은 걸작에 분명한데 

기억해서 복구하는 문장은... 졸작에 분명하고. 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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