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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 17강: 


오늘 좋은 삶이란 나쁜 삶에의 저항, 가장 진보적인 정신들이 투명하게 간파하고 비판적으로 해부해 온 나쁜 삶에의 저항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부정적 처방 외의 어떤 지침도 구상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염두에 두는 건 간파된 모두의 규정적 부정, 그리고 우리에게 강요된 그 전부에 우리의 저항의 힘을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작정하고 그것들에 저항하기, 우리의 무력함을 자각하면서도 그런다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세계가 우릴 통해 만든 그것에 저항한다는 건, 우리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으므로 외부 세계에 저항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시도는 언제나 "세상의 이치"를 강화할 뿐이며 그 "세상의 이치"는 우리 안에도 이미, 언제나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나쁨에) 합류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는 우리의 일부, 그것을 향한 저항의 힘을 우리는 가동해야 합니다.


아도르노가 어떤 극단적인 말을 하든 

"천재에게 실수는 없어. 천재의 실수는 발견의 관문." 이 말(율리시스에서 스티븐. 음 기억을 믿을 수 없으니 이게 맞는지 구글 검색이라도 해봐야겠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이 말 오글거리지만, 진실 아닌가?) 적용될텐데, <도덕 철학의 문제들> 강의 마지막 강에서 하는 말들은 예외다. 아도르노 자신 지금 자기 말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다고 보게 하는 면들이 여러 곳에 있기도 하다. 언어도, 방어-공격적. 


이 대목에 내가 적은 노트를 보니 이런 것도 있다: 아도르노의 비관주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여기야말로 그런 곳이다고 생각. 출구가 있어도 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 기특해져서 잠시 스스로를 쓰담쓰담. 잘 적어두었다, 과거의 나야. 

출구가 있고 그것을 보았음에도 다시 보기를 거부할 때. 그런 때가 비관주의 아닌가? 

출구가 없거나, 있지만 못 보았다면. 볼 수 없었다면. 그 때의 출구없음은 정확하거나 정직한 인식이지 비관주의가 아니지 않나? 


아도르노는 고독을 믿지 않는 것인데, 

그건 사회가 인간을 만드는 정도를 (어쩌면, 고의로?)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아도르노에게 고독은 언제나 고립이었을 것이며, 

그건 그가 깊은 충족을 주는 인간적 유대, 더 행복할 수 없는 타인과의 공존을 

내밀하게 아는 사람이었던 때문일 것같다. 넘치게 사랑받고 행복했던 아이가 그대로 나이만 먹은 것이 (청년에서 노년까지) 아도르노. 그런 아이가 가졌을 모든 매력, 그런 아이가 자극할 모든 반감이 그의 것이었다. 이런 회고를 그의 측근들이 여럿 남기기도 하지 않았나. 




*아 악몽같은 알라딘 서재 자동로그아웃. 

좀 전 또 자동로그아웃 발생해서 (요즘은 글쓰고 있으면 열어둔 다른 탭에서 수시로 로그인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함에도) 꽤 많이 날아갔다. 1분간격 저장이라는 건 맞음? 내가 1분 동안 그렇게 많이 쓸 것같음? : 알라딘에게 묻는 말. 


기억에 기대어 복구하려다, 조금 해보고 포기. 

우리를 만든 세계만이 아니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세계가 만든 우리에 저항하라는 아도르노 말이 

한편 얼마나 진리냐고 적어두려던 포스트였다. 읔. 나중 다른 포스트에서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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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고 남겼던 노트를 보니 "아버지"가 언급되는 흥미로운 대목이 둘 있다. 하나는, 라투어의 질문이 세르의 "지적 형성" 이것에 관한 것이었던 듯한데, 세르가 이런 얘길 한다. 19쪽. (*급히 대강 남긴 노트여서, 말이 엉성하다). 


당신은 내가 받은 사회적, 지적, 정치적 영향에 대해 알고 싶은 거 같다. 하지만 당신 앞에 있는 것은 고독하고 심란한 촌사람이다. 파리에서 1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역사라는 걸 모르는 곳이다. 내 아버지에게 그런 표현을 할 능력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사회는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Indeed, if my father could have expressed it, he would have said -- because he believed it and, thus, lived in that certitude -- that the social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powers of evil사회적 인정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가장 사악한 세력에 가까이 가게 된다.


여기서라면 "사회적 인정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이기보다 그 가장 위에서 그렇듯이 가장 밑에서도. 래도 되지 않을까. 세르의 말이 과장이듯이, 한국의 현실에선 이게 더 진실 아니냐며 바꿔 말해도 과장이긴 하지만. 그렇긴 한데 이거 참 놀랍지 않나? 악이 쥐고 흔드는 사회. 이렇게 말해도 거기 진실이 있다는 것? 


이어 다음 페이지에서, (질문이 어떤 것이었는진 짐작이 안된다. 새로운 질문에 답을 한 게 아니고, 앞 페이지부터 이어지던 세르의 답의 일부였던 건지도), 개인의 교육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얘기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나이 이후에는, 양육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결정적 교육을 위해 책임을 져야 한다. 게으르고 유약한 사람만이, 최초의 양육에 의존한다. 이것은 고쳐야할 병이다. 


해석은 철학의 출발이지만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발명이고, 그러니 학생은 어떤 의미에선 학교에 있어선 안된다는 얘길 근방에서 (22쪽) 하는데, 개인이 자기 교육을 책임지라는 말이나 학생은 (발명을 하고 싶다면) 학교를 떠나라는 말에서 보면 세르가 개인과 사회의 분리에서 바슐라르보다 한 술 더 뜨는 듯. 단호하다. 하지만 "학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학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바슐라르 말이, 더 심오 더 급진적이라 생각함.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말에 깜놀했었다. 아니 이건 내가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니냐며. ㅋㅋㅋㅋ 세르가 저 말 하는 걸 읽기 10년쯤 전 "내가 내 자식이다.." 내게도 남에게도 말함. 너에게 가장 좋은 걸 줄 사람은 너 자신. 이라는 둥 확장도 하면서. 지금 세르의 말 노트 남긴 걸로 보면서도 여러 생각이 자극되긴 한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되는가"처럼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가"에 대해 누군가 막강한 글을 써주면 좋겠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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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왼쪽 책일 것이다. 세르와 라투어의 대담. 메를로-퐁티는 가소로운 철학자다. 그가 유명하던(유행하던) 때 그의 책을 처음 펼치고, 터지던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하찮음이, 철학인가? : 세르가 대략 이런 얘길 하던 책. laughable, ridiculous, 둘 다 아니면 둘 중 하나 단어를 쓰면서. 


확인을 못하는 것이, 이 책도 대학원 시절 도서관 책으로 읽었고 (노트는 꽤 많이 남겼다. 메를로-퐁티 얘기는 적혀 있지 않지만. 최초 인상이 강력한 무엇이면, 내가 이걸 잊을 리 있겠어? 라며 적지 않는 일. 그랬던 것일 듯. 그럴수록 오히려 인용 + 내 반응과 생각, 형식으로 적어두어야 함에도) 채워야할 공백으로 남아 있는 책. 어쨌든 세르라는 저명 철학자가 그런 얘길 하는 걸 보고, 그리고 앞뒤 문맥으로 보아 내가 이해하는 그 뜻에서 하는 말이 맞음에 분명하다며, 갖고 있던 메를로-퐁티 책들을 아마존 중고로 팔아버렸다. 그 중엔 적어도 몇 페이지 고심하며 읽은 것도 있는데 (<지각의 현상학>?), 그 정도로는 전혀 공백이 될 수 없어서 메를로-퐁티 책들을 다시 봐야(사야) 할 일은 아직까진 없었음. 


저 대담집은 곳곳이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여러 인용들을 이 블로그에도 할 수 있을 텐데, 재미있는 지점들 중 하나가 바슐라르를 향한 적의. 세르도 아마 바슐라르의 (적어도 한때) 지도학생이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도 그랬던가 아닌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알튀세르도 바슐라르 험담을 하던가 아닌가. 그런데 세르의 오른쪽 책 <오감>. 이건 그가 바슐라르에게서 배우지 않았다면, 적어도 바슐라르에게서 자극 혹은 격려받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책이라고 바슐라르 애독자면 생각할 것이라는 점. 많은 공명이 (거의 간접 인용에 가까운) 있고, 주제와 방법에서 바슐라르 프로젝트의 확장 심화같은 것이라고 해도 한편 타당할 책이라는 점. 


*갑자기 자판 입력이 잘 되지지 아않ㄴ는ㄴㄷㄴ다. 아침ㅁ먹ㄱ고 다시 쓰겠ㅅ다. 


**아침 먹고 다시 와서: 얼마 전 읽은 어떤 책은, "가소로운" 이런 말을 쓰진 않았지만 그만큼 강하고 분명히 레비나스를 디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책이지? 뭐였지? 프랑스 저자인 장 그롱댕의 <형이상학 입문> 이 책도 레비나스를 강하게 비판하긴 한다. 그런데 <형이상학 입문>은 꽤 오래 전 읽은 책. 레비나스에 대해서 이런 얘길 하고 있구나. 기억해 두었던 책. 이 책이 아니라 최근, 며칠 전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 달 전까지는 가지 않는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레비나스가 했던 것같은 철학은 지혜는 커녕이고 사람들을 혼란으로 이끈다.. 


같은 내용이 있었던 듯한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난다고 쓰려다, 기억 남!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마신다> 이 책이었음. ㅋㅋㅋㅋㅋㅋ 하. 이게 사는 건지, 삶은 죽음의 특별한 형태인 건지. 여하튼. 무엇이든 그것의 원천(원전)으로 가본 다음에야 결정할 수 있겠긴 한데, 소문만으로도 거의 정확한 짐작이 가능한 경우들도 있지 않나? 레비나스는 실제로 읽은 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는 얘길 들으며 (특히, "얼굴") 그런 생각이라면 그건 자기위안용, 자기기만용.. 이겠네 결정. 그 결정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얘길 나중 계속 듣는 것이다. 지금 속도로 읽으면 80세까지 1200여권의 책들을 더 읽을 수 있다고 알라딘 17주년 기념 통계가 말해 주던데, 이미 사둔 책들(중에서도 안 읽은 것들)로도 채우고 남을 이 1200여권에서 레비나스 책은 없도록 함. 


이 저자를 읽고 나면 생기는 것. 알게 되는 것.  

이 저자를 읽는 동안 답해야 할 질문들. 그 질문들에 나왔던 답의 예들 (저자 자신의 답의 재구성 포함). : 주로 이런 내용으로 주요 저자들의 기여, 업적이 정리된다면 좋을 것 같다. 명백히 그런 방향의 작업은 아니더라도, 보통의 학술 논문들이 저런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준대도 좋겠고. 어쨌든 메를로-퐁티는 "가소로운" 철학자라던 세르의 말은, 심지어 계시같은 것이기까지. 봐 가소로운 철학자도 있다니까! 내 말이 아니니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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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하철에서 보려고 가방에 넣은 책은 <말>. 

지하철에서 넘기다 보니 페이지를 접고 밑줄을 그은 한 대목이 발견되었다. 


나는 반항함으로써 나의 입장을 세우려 했다. 그래서 오만과 사디즘으로, 다시 말해서 귀족성으로 달려들었다. 이 귀족성이란 따지고 보면 인색한 태도나 인종차별주의와 마찬가지여서, 자기 내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분비하는 방향제에 불과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중독시키고 마는 것이다. 피조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부르주아 특유의 불치의 고독을, 즉 창조주로서의 고독을 스스로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127) 


새벽에 그것도 세시 즈음에 일어나는 생활을 오래 하긴 했지만 1시나 2시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같은 시각이 결코 아니어서, 며칠 그 시각에 일어난 끝인 오늘 많이 피곤했다. 오늘은 좀 늦게 자고 내일 4시 즈음에 일어난다면 좋겠음. 어쨌든 그래서 버텨보는 중. 


거의 안 읽은 책, 배송되면 받아서 앞뒤 표지와, 처음 몇 페이지 그리고 역자해설 몇 페이지 읽은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읽은 흔적이 적지 않았다. 읽으면 뭐하나. 남는 게 없음. ;;;; 하여간, 위의 대목은 밑줄로 부족해서 페이지를 접어두기까지 했을지 알 것 같았음. 사르트르는 죽은 개가 아니라니까! : 이거였을 것이다. 길게, 좋은 주장으로 말할 능력은 안되지만 하지만 난 알아보고 있어! 이 정도 자기반성이 되는 사람이 심지어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드물다고! 그런 사람의 생각엔 무엇인가, 무엇이든 날카로운 게 없을 수 없.. 


사디즘은 아닐 것같지만 반항과 오만은, 

이건 아도르노도 잘 알았을 것 같고, 고독, 창조주로서의 고독 이것도. 

그런데 소년 아도르노는 소년 사르트르와 다르게 처신했을 것이며, 나중 이 경험들을 회고하며 썼다면, 

이와는 아주 다른 얘길 썼을 것같다. 일단 그가 남긴 자전적 기록들에서 소년기 경험들에 대한 얘기가, 저런 회고를 할 사람이 쓸 얘기들이 아니기도 하다. 


어떻게 다를 것이냐. 이것도 근거 있는 소릴 요만큼이라도 할 수 있기엔 사르트르를 알겠어 아도르노를 알겠어.. 라서, 그냥 얼른;; 수습해야겠다. "부르주아 이성은 편파적이고 동시에 보편적이다" 아도르노의 이 말, 이게 그가 사르트르보다 더 철저히 (적어도 "부르주아"와 관련하여) 변증법적 사고한다는 걸 보여주겠지. 부르주아 아이의 반항과 오만, 고독.. 이게 순수히 한 개인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사회, 역사의 생산임을 분명히, 예리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쓸 문장을 썼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단어 하나에 집중한다면, "부르주아" 이 말을 쓸 때, 사르트르의 경우 고정, 확정이 일어나지만 아도르노의 경우엔 "진실이 갖는 시간적 핵심" 이런 것이 그 말, 개념을 관통하는 게 느껴지게끔 한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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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가 "의미의 우리" 이 말을 쓴 건 <문학노트> 2권에 포함된 에세이 "참여"에서. (*같은 글이 다른 번역으로 오른쪽 책 <미학과 정치>에 실렸던 것 같은데 확인해보고 싶지만 집에 있는 책이 어제부터 지금까지 찾아지지 않고, 알라딘이나 아마존이나 책 목차를 볼 수가 없다. 루카치를 반박하는 글 "강요된 화해"는 분명 둘 다에 실렸다. "강요된 화해" "참여" 아도르노의 글은 이렇게 두 개가 저 책에 실렸다. 아니다 하나만 실렸다, 이게 확인이 안되니 확인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님에도 계속 더 하고 싶어지고..... 오후에 집에 오면 샅샅이 또 찾아보기로). 


사르트르에게 문학이 참여일 수 있는 건 문학이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미를 다룬다." 


이렇게 말하고 반박을 시작한다. 반박하는 아도르노에 따르면: 작가는 의미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쓰는 어떤 어휘도, 그것이 작품에 쓰임으로써 작품 바깥에서 소통의 언어일 때 가졌던 의미 전부를 박탈당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 변화도 겪지 않는 게 아니다. 어휘가 작품 안에서 갖게 될 변화한 의미, 그리고 그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작품 바깥에서 가졌던 의미의 잔재. 예술적 계기와 비-예술적 계기.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이 작품의 형식 법칙을 구성한다. 


이 반박의 문장들이, 이게 번역의 문제일까. 아도르노식 복잡한 문장의 어딘가가 훼손된 것같다..... 느끼게 하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문장들이긴 하다. 작은 훼손을 견디지 못할 문장이면 좋은 문장이냐? : 이런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름. 작은 훼손도 견디지 못할수록 좋은 문장이구나 당연히. 어떤 훼손도 하지 말아야 할 문장.  


어쨌든 저 제목의 문장은: "구속을 찬미하는 이들이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을 심오하다 여길 것이다. 이들은 언어가 의미의 우리를 흔들고, 언어가 의미로부터 갖는 거리를 통해 작정하고 의미의 실증적 행세에 거역하는 텍스트를 참을성있게 듣지 못할 것이다." 


 아도르노를 번역해 본 모두가 이랬겠지.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다: "Those who sing the praises of binding ties will be more likely to find Sartre's No Exit profound than to listen patiently to a text in which language rattles the cage of meaning and through its distance from meaning rebels from the outset against a positive assumption of meaning." 


모더니즘 언어 실험의 핵심, 그 의의를 더 잘 말하기도 쉽지 않을 한 문장이며, 

책을 얼마나 더 느리게 읽을 수 있나. 천천히 읽어야만 하나. 읽기의 어휘당 속도에서 내 책이 가장 느린 책이다. 이런 걸 놓고 모더니즘 작가들은 경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길 쓰려던 포스트. 


오직 천천히만 (아주 아주 천천히만) 읽을 수 있는 책. 아무나 쓸 수 있는 책이 아닌 책. 

이제 나가야 하니, 다음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 다시 더 잘 실패...;;;;;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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