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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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포근하고 반짝반짝 햇빛 냄새가 난다. 올해 들어 가장 포근하다는 오늘, 그리고 어제. 산책하고 줄넘기도 뛰어보고 여기 저기에서 마음껏 바깥공기를 쐬고 들어온 다음에도,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적과 흑], 이 책의 흑백표지처럼 기분은 가라앉았고 1권에서 엉성하게 모여있던 꽃잎 배경이 2권에서 산산히 흩어져버린 것에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봄이 오려는 기운에 몸은 점차 꿈틀거리지만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마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의무와 사랑에 빠져 고뇌하던 쥘리앵의 우울이, 오늘의 햇빛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흑과 반대되는 색이라면 으레 떠올리기 쉬운 백. 어째서 '백과 흑'이거나 '흑과 백'이 아닌 '적과 흑'인 것인가, 로 오랫동안 궁금했던 작품, 스탕달의 [적과 흑]이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왕정이 복고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계급은 낮지만 야망을 가졌던 청년 쥘리앵의 사랑과 삶을 그렸다. 총명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쥘리앵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업에는 관심이 없고 책과 출세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마을 베리에르의 시장 레날이 그에게 가정교사 자리를 제안하는데, 그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쥘리앵은 자신이 몰랐던 세계, 그러나 그가 꿈꾸던 세계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언제 또 나폴레옹같은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늘 두려워하는 상류사회. 낮은 계급으로 비롯된 열등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자존심과 고집으로 출세의 길을 모색하던 쥘리앵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암기력, 준수한 그의 용모에 빠진 레날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의 관계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고 브장송을 거쳐 대도시 파리에 진출하게 된 쥘리앵. 그 곳에서 만난 마틸드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녀와의 사랑 또한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아간다. 

쥘리앵을 무시하면서도 같은 마을의 라이벌에게 그를 빼앗길까 두려워 내보내지 못하는 레날, 줄곧 그에 대한 감정을 부인하다가 하녀 엘리자가 쥘리앵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순식간에 마음을 열어버린 레날 부인, 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고자 했던 쥘리앵의 야망은, 다른 듯 보이나 같은 모습들이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존재의 정의. 쥘리앵은 그런 생활들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남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오? 그 '남들'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갑자기 끊어져버릴 거요. 제발 더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 마요. 판사와 변호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해요...그렇지만 삶의 종말이 아주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안 뒤에야 인생을 즐기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2권, p399 


감옥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는 쥘리앵.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낀 뒤에야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즐기는 그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1800년대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 한 인간의 삶과 사랑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 지 표현한 이 작품에서 '적'과 '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해설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잘 언급이 되지 않아 내내 궁금했던 이 색들은 통설적으로 군복의 붉은색과 승복의 검은색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 쥘리앵이 열망했던 두 개의 직업, 군인과 사제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고, 좀 더 넓은 의미로는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붉은 군복의 자유주의자와 성직자들로 대변되는 검은 승복의 복고주의자를 뜻한다고도 한다. 

사랑에 빠져 조바심을 내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의 심리, 한 시대의 양상을 그려내는 부분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만, 번역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작품일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역시 쉽지 않은 작품이었고, 때문에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게 다가오는 문장들. 감동을 느낄 법한 부분이 아닌데도 감동을 느꼈다고 표현되는 부분처럼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문장들에 내용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정서가 다른 건지, 단어와 문장의 표기가 본래 그런 것인지. 한 번 더 찬찬히 곱씹으며 읽을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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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마련의 여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집 마련의 여왕
김윤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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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나, 나는 집에서 웅크리고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좋아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아늑함, 혼자 있어도 고독함은 절대 느껴지지 않고,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자유. 집은 내게 그런 공간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는 친구들은 집에서 혼자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나를 독특한 사람으로 취급했고, 나 또한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친구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가서 쉬면 좀 나아지겠지' 라는, 그런 위안을 주는 곳이 바로 집이었다.

나는, 건물 자체의 조건은 물론 누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가, 자신 안에서 집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그 곳이 나에게 전달하는 정서는 무엇인가에 따라 진정한 집의 정의가 규정지어진다고 생각한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 방이 싫었다. 습기찬 냄새와 층간소음도 한 몫했지만 무엇보다 늘 혼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그 곳은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그저 잠시 머물 공간일 뿐이었다. '집에서는 혼자 있어도 괜찮았는데 왜 여기서는 이렇게 싫을까, 밤에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지' 등의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지금 사는 집으로 옮기면서 편안해졌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는 창과 조금 넓어진 공간, 안전에 대해 조금 덜 걱정할 수 있게 된 점. 기본적인 환경과 정서적인 조건 모두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하기 싫던 청소가 지금 집으로 옮기면서는 구석구석을 찾아가며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내 집'을 그렇게 외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한 나만의 것, 우리 가족 외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  

[내 집 마련의 여왕] 은 그런 집에 관한 이야기다. 보증을 잘못 써서 집을 빼앗기게 될 처지인 주인공 송수빈이,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눈 앞에 나타난 정사장의 의뢰로 어린 딸 지니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찾아주는 이야기. 경매와 부동산 등 그 쪽 방면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하고 집을 쉼터가 아닌 재산증식의 도구로 사용하는 암울한 내용도 등장한다. 송수빈에게 맡겨진 사람들도 돈에 맞춰 집을 구하고 수도관, 가스, 주변환경 등을 따진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진 집은 결국 따스한 보금자리로 자리잡아가는 것이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억지 설정같은 것도 보인다. 마법사처럼 훌쩍 나타난 정사장, 누이의 소개라지만 한 번 만나고 일자리를 제안하는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할까. 평생을 부자로 살아오다 이제 좋은 일 해보겠다고 두 팔 걷어붙이는 사람, 병까지 걸려 연민마저 불러일으키는 사람. 현실에서는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키다리 아저씨같은 사람이다. 게다가 송수빈이 집을 찾아준 사람 중 한 명인 박사장과 정사장의 관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엄청 억지스러웠다. 이런 저런 점-부동산과 경매 부분은 내가 잘 모르니 논할 수 없으니 제외하고-을 제외하면 집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상만큼이나 따뜻하고 희망있는 소설이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자유롭고 당찬 그녀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책과 다르다. 경기는 점점 힘들어진다고 하고 책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속 TV 안에도 좁은 방에 여러 명의 가족이 모여 사는 모습이 존재하며 철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다. 책과 같이 우연처럼 마법처럼 자신들에게 딱 맞는 집을 구할 수는 없다.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좋지만 좀 더 현실감 있게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도 집에서 뒹군다. 내 것이 아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이 책을 읽고나니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에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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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한 어글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랑받지 못한 어글리
콘스턴스 브리스코 지음, 전미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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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스토리, 누구나 좋아할만한 소재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사람이 오직 자신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자리를 마련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것, 웬만한 끈기와 집념이 없다면 이루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어제 영화 <인빅터스>의 시사회에 다녀왔는데요, 마지막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편견과 고통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용서함으로써 완성되는, 고난극복이었으니까요.  

[사랑받지 못한 어글리] 또한 어머니의 지독한 폭력과 폭언, 따돌림을 극복하고 판사가 된 한 흑인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 참 복잡한 사이입니다. 엄마와 친구처럼 잘 지내다가도 뭐 하나 틀어지면 바로 티격태격. 좋아서 하하호호 웃다가도 한 번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 좋았냐는 듯 집안이 시끄러워집니다. (저만 그런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감정은 서로에 대한 사랑일 겁니다. 때로 그 사랑이 버겁게 느껴져도 그래도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하는 마음으로 또 화해하고 다시 웃을 수 있는 거겠죠.  

그런데 이 흑인소녀 클레어와 엄마 카르멘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다른 자매들과 클레어를 차별하고 상처주는 말들을 던지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휘두릅니다. 엄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매일 밤 침대를 적시는 그녀를 벌준다는 명목으로 젖은 시트와 담요, 잠옷을 그대로 입힌 채 재우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어린 소녀에게 생활비를 내라거나 굶기기도 합니다. 차라리 뭔가 이유가 있었으면, 만약 클레어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조금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배아파 낳은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미움과 분노를 뭐라 이름할 수 있을까요.  

소녀 클레어는 강한 아이입니다. 법원으로 달려가 의붓아버지를 고발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수그러들지라도 바른 소리로 엄마에게 대들기도 해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결국에는 법정변호사 자격을 따고 1996년에는 영국의 흑인여성으로는 최초로 판사직을 맡기도 했다니, 그녀가 어떤 끈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지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성공스토리와는 별개로 저는 책읽기가 불편했어요. 책의 대부분은 그녀의 성공기록이라기보다 '학대기록'이라고 해야 좋을 정도로 어둠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고난은 되도록이면 짧게, 성공의 과정을 차근차근 과정있게 그렸다면 좋았을텐데 '내가 왜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이렇게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걸까'라는, 이상한 의문이 들게 하는 책이랄까요.  게다가 평생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클레어의 아픔과 어둠이 저를 붙잡아채는 것 같아 무서웠어요.  

때로 인생이 더 드라마틱하다고 하지만 이 책은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난 뒤 카르멘이 자신은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았다며 소송까지 걸었다니, '대체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불유쾌한 기분만을 남긴 책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가족들 사이에서 상처를 남기는 일이 그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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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2 - 네메시스의 팔 로마 서브 로사 2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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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세일러의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가 두 번째 이야기 [네메시스의 팔] 로 돌아왔습니다. 1권을 어찌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하루라도 빨리 2권이 출간되길 기다렸었는데요, 재미만큼이나 출간되는 속도도 매우 바람직하여 정말 애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리즈라 할 수 있겠어요.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더듬이 고르디아누스가 부친 살해 사건 용의자의 변호를 맡고 있던 키케로를 도와 멋지게 사건을 해결했었습니다. 저는 키케로와 그의 심복 티로가 계속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이 매력남 고르디아누스는 매번 다른 정치가들과 조우할 모양입니다. 참, 더듬이라 하여 이상한 곤충같은 것을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정보를 잘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애칭인 것 같거든요, 애칭. 

이번 편에서 고르디아누스에게 일을 의뢰한 사람은 '마르쿠스 크라수스'입니다. 로마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제압하고 집정관을 지냈습니다. 후에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3두정치를 시작한 인물이죠. 키케로와 함께 해결한 부친 살해 사건이 벌어진 후 8년 정도 지난 시기로 1권에서 등장한 술라는 이미 병에 걸려 사망했고, 로마는 트라키아 출신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동료 검투사 70여 명과 함께 양성소에서 탈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요즘 이 스파르타쿠스에 관련된 미드를 보고 있습니다만, 로마인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들이 반란군처럼 보이겠지만 또 이 미드를 보면 스파르타쿠스 또한 아내와 마을을 빼앗긴 불쌍한 남자인 겁니다. 

요런 정국 속에서 자신의 집에서 노예지만 사랑하는 여인 베테스다와 꿈나라를 헤매던 고르디아누스를, 크라수스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뭄미우스가 찾아옵니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고르디아누스를 데리고 오라 명한 사람인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무작정 그와 그의 아들 에코를 호화로운 배에 태운 뭄미우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가 누구입니까.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그는 금방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의 부름으로 가는지 알아채죠. 부자들이 해안에 별장을 짓고 더운 진흙으로 목욕을 한다는 '잔'에 크라수스의 명령으로 불려간 고르디아누스는, 그 곳에서 또 다른 살인사건과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느냐 마느냐에 백 여명의 노예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엄청난 사실. 

1부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전개는 만족스럽습니다.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고르디아누스의 끈기와 노예들을 향한 연민, 시간이 흐를수록 배가 되는 사건의 긴장감은 역시 가슴을 두근거리며 책을 읽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범인일까, 아냐, 저 사람인가' 하며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추리소설임에도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1권의 리뷰에서 언급했던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가 설정한 로마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는 거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의 배경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지속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크라수스는 원로원으로터 스파르타쿠스 진압군의 지휘권을 얻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집의 노예 백 명은 주인이 노예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르디아누스와 에코가 타고 온 배 안에는 노예들이 극악한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들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늘 위태롭기 짝이 없죠.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은 노예들에게는 당장 필요한 먹을 것들과 주인을 섬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단정짓습니다. 그런 시대에 벌어진 살인사건이기 때문에 비로소 고르디아누스의 사건해결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고르디아누스를 율법의 여신이자 인간의 주제넘은 오만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는 추상개념을 신격화한 숭배 대상인 네메시스의 팔로 비유한 것은, 그의 정직성과 공정함, 신분고하를 막론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로마시대하면 우리가 바로 떠올리는 검투사들의 대결 장면도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어요. 검투사들의 대결, 귀족들과 노예들의 모습, 크라수스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야망과 음모. 1부에 비해 2부에서 보다 로마의 속살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 제목, <로마 서브 로사> 처럼요. 이 시리즈를 한 번 접하면 로마라는 거대한 매력 앞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게 되실 테니, 저항하지 마시고 어서 빠져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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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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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학교 다닐 때 보았던 교통사고 예방 영상이 생각난다. 한 아이가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오던 아버지가 역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를 잃고 다리 한 쪽은 영원히 불편하게 된 채 퇴원을 하던 아이의 모습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다니, 제법 충격을 받긴 했나보다. 실수로 벌어진 일이 한 가정과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메세지는 지금 생각해도 무척 오싹하다. 한국인은 암 발병보다 교통사고 위험 확률이 더 높다는 수치까지 발표되는 것을 보면, 교통사고, 정말 무시할 것이 못되는 듯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교통경찰의 밤] 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 특이한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교통사고를 소재로 해서 경각심을 심어준다고 할까. 약 10년 전에 발표된 작품들이라 조금 옛날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운전대를 잡았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양면성, 한 사람의 이기심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사람의 인연 또한 '업보'와 관련되는 것인지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대부분 장편을 읽고 단편을 피해왔었는데, 이렇게 괜찮은 메세지를 전달하는 단편집이라면 앞으로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밤중에 교차점에서 일어난 추돌사고를 단 한 명의 목격자인 맹인소녀의 귀에 의지하여 해결하는 <천사의 귀>는 반전이 놀랍다. 상대 운전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물러서는 다른 쪽 운전자, 그 운전자의 증언에 반박하며 예리한 청각으로 수사에 일조하는 소녀, 과연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교통법규의 헛점을 그리는 <분리대>는 애절하고, 초보운전을 하던 사람에게 위협을 가해 사고를 일으키고 급히 떠나버린 가해자의 그 후의 이야기를 그린 <위험한 초보운전>은 인간의 악의를 떠올리게 한다. 미숙한 사람에게 가하는 악의적인 장난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을 듯. 

나의 불법주차로 인해 타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그린 <불법주차>는 오싹하면서도 애절하고, 고속도로에서 앞의 차에서 날아온 캔에 맞아 한 쪽 눈의 시력을 상실한 약혼자를 위해 가해 차량을 찾는 <버리지 마세요> 는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한다. 어느 날 벌어진 교통사고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거울 속으로> 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자 선수가 어떤 회사의 세 여자 선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작가가 우연의 신비함을 느낀 소설이라고 한다. 

매번 다른 형사,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등장하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동일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것. 나의 조그마한 실수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 아직도 면허 없는 나는, 연달아 가슴을 조이게 만드는 에피소드들로 인해 과연 면허를 따야 할까, 다시 의문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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