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커 (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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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겨울은 유독 길고 추웠다. 겨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제법 혹독한 시간을 헤쳐나온 셈이다. 그 추위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서,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멋쟁이들은 한겨울에도 입지 않는다는) 내복을 꼭 붙잡고 놓지 못하게 했다. 그 긴 겨울의 어느 날,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던 동생이 이런 말을 했더랬다. '지금이 소빙하기래' 근거는 없다. 아마 동생도 길고 깊은 겨울이 계속되는 것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고 어째서 겨울이 끝나지 않는지 궁금해 한 번쯤 검색해 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아아, 그렇구나. 소빙하기구나' 라고 쉽게 인정했다. 그리고 '언젠가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 세계에서 자연으로 인해 사람이 겪는 재난이 끊이지 않는다. 먼 곳의 일로만 여겼던 지진을 이제는 우리나라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며 한 번씩 찾아오는 태풍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평소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화산재가 바람에 실려 많은 나라에 피해를 주기도 하고, 밀어닥친 쓰나미에 수십 만명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자연재해 뿐만 아니라 병은 또 어떤가. 작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신종플루와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걸린다는 암까지. 인간을 멸종시킬 수 있는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싱커]는 그런 지구의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21세기 중엽, 외계 행성에서의 삶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험차 거대 지하도시 '시안'과 열대우림을 완벽하게 재현한 '신아마존'을 만들어냈다. 2060년,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많은 영토가 사라졌고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 2063년에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인류는 몰살 지경에 이른다. 초국적 제약회사인 바이오옥토퍼스는 백신을 개발하지만 바이러스는 계속 변이하고 지상에 찾아온 빙하기로 시안은 봉쇄된다. 바이오옥토퍼스의 회장 파에타는 시안 시민들에게 장수 유전자를 제공하고 시안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진짜 하늘을 본 적 없는 아이들. 머리에 칩을 주입해서 그 칩으로 대부분의 생활이 이루어진다. 학교 수업조차 머리 속에서 삼차원 인터페이스를 불러내 이루어지는 현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편리하고 완벽한 시안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서조차 시안에 정착할 수 없어 부적절한 취급을 당하는 난민은 존재하고, 계급 간 차별이 발생한다. 집중력을 높이는 약을 구하기 위해 난민촌으로 내려간 미마는 우연히 '싱커'라는 게임을 손에 넣는다. 뇌파 동조를 통해 지금은 폐쇄된 신아마존을 체험할 수 있는 게임. 미마와 친구 부건, 다흡이 싱커를 즐기게 되면서 많은 아이들이 싱커에 접속하게 되고, 아이들은 차츰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세계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자연과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이 작품은 SF 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해 그저 살아가기만 하던 아이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 일어서는 이야기. 교실에 몸만 있을 뿐 수업은 가상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시안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스크린 증후군', '접촉 공포'까지 유발시키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 혼자 뿐일까. 올바른 인간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점점 허약해지며 인위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시안 시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싱커에 접속한 아이들은 지상 세계를 궁금해하고, 한 번 본 태양빛을 잊지 못하며, 새로운 시안을 건설하기 위해 꿈을 품게 된다.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추천서의 한 문구가 밝힌 것처럼 사실 [싱커]가 우리가 전혀 몰랐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으로의 회귀와 마음의 여유, 이미 작년 흥행한 영화 <아바타> 가 우리에게 던져준 메세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싱커]의 주인공들이 영화 <아바타>에서와 같은 성인이 아니라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밝고 진취적인 미래를 꿈꾸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구성면에서 각각을 잇는 끈이 조금 허술하고, 예측 가능한 결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싱커에 접속해 반려수와 교감한다는 설정에는 감동을 느꼈다. 씨네 21의 김도훈 기자가 충무로 영화쟁이들의 손에 이 작품을 어떻게든 쑤셔넣는다면, 이 작품을 스크린에서 보게 될 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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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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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착하고 고운 아내, 건강한 두 아이와 살아가던 한 남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폐암 말기, 남은 기간은 길어야 6개월. 최근들어 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기계로 검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무용담 삼아 자랑하려 했던 것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 앞에서 남자는 괴롭다.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느껴지는 극심한 외로움. 고민하던 그는 결국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삶을 자신의 시간을 정리하는 데 쓰기로 결심했다. 그가 관계했던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전부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유서를 보내기로 결심한 남자. 그의 유서는 고등학교 때의 첫사랑, 절교한 친구, 배신한 사업 파트너, 의절한 형, 사랑하는 가족과 숨겨왔던 애인에게까지 전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터라 조금만 아파도 쉽게 겁을 먹는 경향이 있다. '병'이라는,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감당해낼 수 있을 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단지 죽는 것이 무서워서일까. 그도 아니면 내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될 이 세상을 질투해서일까. TV 드라마의 주인공의 운명을 쉽게 결정해버리는 요소로 '병'이 자주 등장한 것이, 나의 그런 걱정과 잡념을 부채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처음 자각하게 된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계속되어온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 세세한 과정이야 다르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삶을 정리하는 소재 자체만 보면 진부하기는 하더라도 가슴 뭉클한 뭔가가 있다. 하지만 이 남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척 뻔뻔스럽다. 사업 파트너를 배신한 것이야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 아내에게는 잔인하다. 아내를 사랑하네,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네 읊으면서도 그동안 몰래 관계를 지속해온 애인이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어 슬퍼할까 봐 그 존재를 아내에게 밝힌다. 더구나 '뭐 해줄 것 없어?'라고 물은 대답에 '당신의 뼈를 갖고 싶어요' 라고 대답하는, 평생 함께 있고 싶다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까지 한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이라는 되도 않는 철면피 문구를 나열하면서. 어째 이리 생각이 없을 수 있는 지, 슬프고 안타까운 소설임에도 별안간 버럭하게 만들었다. 

남자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당연히 안타깝다. 혼자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나는 코끼리가 되기보다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고 싶었던 죽음을 향한 여정. 잊고 살았던 가족의 소중함, 일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열정, 기억 저편에 묻어놓았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절교한 친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권리였다. 내가 누구였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살아왔나를 알 수 있었던 그는, 어쩌면 갑작스레 세상을 뜬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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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니나 슈미트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흔히들 이야기한다. 연애는 시작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시간이 제일 좋은 때라고. 만나기 전의 설레임, 손만 잡아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 생각만해도 구름 위로 가볍게 안착해버릴 수 있는 몽롱함까지. 하지만 그 좋은 때는 아쉽게도 얼마 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같이 있는 것이 당연해지면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그것을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인지라. 애인이 있음에도,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되뇌이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찾아 눈을 돌리게 될 수도 있...지 않다!! 

주인공 안토니아가 걱정하는 것 또한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권태기를 맞이한 커플의 위기로 애인 루카스가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상대를 찾아 떠날까 두려워하는 가엾은 안토니아. 루카스가 전애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질투의 불길을 활활 태우면서도 자신이 속좁은 여자로 비쳐질까 전전긍긍한다. 루카스가 질리면 안되니까. 사랑한다는 문자 대신 식빵 한 봉지 사오라는 문자만 달랑 보내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언젠가 이 권태기도 끝날 것이라 믿는 안토니아. 그런 그녀에게 루카스의 전 애인 자비네의 관계는 너무나 큰 위기다. 

내 눈에 루카스는 지상 최대 둔남이든지, 일부러 안토니아의 성질을 긁는 최강 악독한 남자로 보였다. 현재의 애인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전 애인과 환경운동을 한답시고 돌아다니고, 현재 애인이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면서도 전 애인이 부르면 일이라고 냉큼 달려가고, 그러면서도 안토니아가 잘 생긴 게이 커플과 같이 있으니 금새 질투나 하는 루카스. 내 눈에 안토니아의 질투와 외로워하는 마음은 당연하게 보이건만 그게 왜 루카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 이 책을 읽은 다른 남자들도 안토니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무척 궁금하다. 

루카스의 마음을 다시 사랑으로 불태우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는 안토니아의 모습이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브리짓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안토니아. 결국 사랑을 얻었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험했으니.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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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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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혼자 먹는 밥은 나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자 먹는 밥은 이상하게도 괜찮다.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하다. 혼자 있으면 반찬을 대충 꺼내놓고 내 밥만 차리면 되니까. 국에 밥을 말아 김치 하나로 먹든, 마른반찬 몇 가지와 국 하나만 놓고 먹든 TV를 보며, 혹은 라디오를 들으며 먹는 밥은 좋다. 그런데도 밖에서 혼자 먹는 밥에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만 향해있는 것 같고, 내가 뭘 먹나 유심히 쳐다보는 것 같고, 왜 쟤는 혼자 밥을 먹나 궁금해할 것만 같다. 그래서 굳이 밖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샌드위치를 주로 이용하기도 했었다.  

윤고은의 소설집 [1인용 식탁]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식탁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세 명도, 두 명도 못앉고 오직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그런 식탁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표제작인 <1인용 식탁>은 혼자 밥을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된 일인지 점심 시간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주인공. 첫날은 그러려니 하며 넘겼지만 점심 시간에 함께 밥을 먹으러 가자는 동료 하나 없다. 결국 몇 개월을 혼자만의 식탁을 맞이해야 했던 그녀는 간단한 분식에서부터 패밀리 레스토랑, 고기집에 이르기까지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등록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혼자 밥 먹는 순간이 오면 외로웠던 것 같다. 밥을 앞에 놓고 외롭다니, 하루 세 끼를 챙겨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복에 겨워 하는 소리라고 욕을 내뱉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밥'은 더 이상 '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밥을 먹으며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고민도 풀어놓으며 관계를 다지는 시간으로 활용한다. 같은 찌개를 먹고 같은 반찬을 먹으며 친밀한 감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심리를 날카롭게 표현한다. '1인용 식탁'이라는 상상력에 깜짝 놀라고 그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1인용 식탁>만 내 취향과 맞았을 뿐 다른 작품들은 불편하기도 하고 잘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피어난 온갖 세계들.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맨 마지막에 실린 <홍도야 울지 마라> 정도가 앞으로의 그녀가 어떤 행보를 보여줄 지 살짝 궁금하게 만든 정도랄까. 단편보다는 장편을 더 좋아하는 나이기에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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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노희경 원작소설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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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벽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나 혼자 깨어 라디오를 친구삼아 공부하고 있던 시각. 동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도서대여점에서 이 책을 빌렸었다. 글쎄, 그 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당시의 나는 '노희경'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고, 이 책에 대한 정보라고는 탤런트 나문희가 출연한 드라마의 원작소설이라는 정도였으며, 소설책보다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까운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숨 쉴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놓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다 잘 안 되면, 쉬고 싶을 때 조금은 책을 읽어도 괜찮겠지-하는 마음. 결국 펜을 내려놓고 잠깐만 읽어야지 하며 집어들었던 책 때문에, 나는 그 날 밤을 꼴딱 새고 엉엉 울며 퉁퉁 부은 눈으로 잠자리에 들고 만다. 

가족들에게 늘 헌신적인 엄마.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살피고 무뚝뚝한 남편 뒷바라지에 자기 일로 바빠 엄마 마음 하나 헤아릴 시간 없는 자식들 등만 보며 살아온 엄마의 단 하나의 꿈은, 이제 조금 있으면 타게 될 곗돈으로 온전한 집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프다고 해도, 친근한 의사한테 찾아가겠다고 해도 퉁만 놓는 남편에게도 그러려니, 불륜으로 속앓이를 하는 딸아이에게 냉담한 대접을 받아도 그러려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아들이 짜증을 내도 그러려니 하며 무던히 살아온 세월이었다. 단 하나 걱정이라고 한다면 사람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박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불쌍한 동생이랄까. 그런 그녀가, 늘 공기처럼 가족들 뒤를 지켜주던 그녀가 아프단다. 얼마 못 산단다. 

고통 속에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엄마는 온통 가족들 생각 뿐이다. 된장찌개 하나 제대로 못 끓이는 우리딸 연수가 앞으로 해야 할 집안일이 걱정스럽고, 아버지의 기대로 늘 힘들어하는 아들 정수가 잘못될까 걱정스럽고,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한평생 같이 살아온 남편은 어떻게 될까 염려되고, 내가 죽으면 제대로 돌봐주지 못할 시어머니가 걱정스럽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읊조린다. '어머니, 정신 드실 때 혀라도 깨물어, 나 따라와. 아범이랑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따라와. 기다릴게'

아내가, 엄마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가족들은 덜컥 겁이 난다. 아프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일이 후회되고, 자신의 일만으로도 버거워 별다른 대화도 못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공부가 무슨 벼슬이라고 짜증내고 함부로 행동한 일이 부끄럽다. 도박빚 청산하고 택시기사라도 하라고 마련해 준 돈도 또 다시 날려버려 번듯한 사람노릇 하는 것 보여주지 못한 게 한스러워서 그들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녀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그녀가 좋아하는 호두과자를 산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했던 일산 집을, 그리도 무뚝뚝했던 남편이 오직 그녀만을 위해 그 집단장을 시작했다. 

헤어짐을 앞에 두고서야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은 언제나 안타깝다. 그 대상이 엄마일 경우에는 더더욱. 가장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임에도 우리는 왜 많은 시간을 그 존재를 잊고 살게 되는 걸까. 항상 곁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하는 공기처럼, 엄마도 언제나 우리들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웅다웅 티격태격 하면서도 무슨 일 생기면 항상 가족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속절없는 믿음. 그 믿음을 핑계로 엄마를 외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 <친정엄마> 속의 엄마와 소설 속 엄마, 그리고 아주 오래 전 보았던 탤런트 나문희의 연기가 겹쳐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내 아이를, 내 식구를 나보다 더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 내 몸 아픈데도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할 수 있을까. 내 나이 때 엄마는 이미 나와 내 동생까지 보셨다는데,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고 두렵기만 하다. 내가 겁내는 그 일을 우리 엄마와 세상의 엄마들은 해내셨다. 그리고 지금도 해내고 계신다. 우리 엄마, 그리고 세상의 많은 엄마들에게 부디 우리가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를.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가 이별하게 될 때는 조금만 후회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방황은 정녕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그 시기 안에서 부디 방황을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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