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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노희경 원작소설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새벽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나 혼자 깨어 라디오를 친구삼아 공부하고 있던 시각. 동네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도서대여점에서 이 책을 빌렸었다. 글쎄, 그 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당시의 나는 '노희경'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고, 이 책에 대한 정보라고는 탤런트 나문희가 출연한 드라마의 원작소설이라는 정도였으며, 소설책보다는 교과서와 문제집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까운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숨 쉴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놓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다 잘 안 되면, 쉬고 싶을 때 조금은 책을 읽어도 괜찮겠지-하는 마음. 결국 펜을 내려놓고 잠깐만 읽어야지 하며 집어들었던 책 때문에, 나는 그 날 밤을 꼴딱 새고 엉엉 울며 퉁퉁 부은 눈으로 잠자리에 들고 만다.
가족들에게 늘 헌신적인 엄마.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보살피고 무뚝뚝한 남편 뒷바라지에 자기 일로 바빠 엄마 마음 하나 헤아릴 시간 없는 자식들 등만 보며 살아온 엄마의 단 하나의 꿈은, 이제 조금 있으면 타게 될 곗돈으로 온전한 집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프다고 해도, 친근한 의사한테 찾아가겠다고 해도 퉁만 놓는 남편에게도 그러려니, 불륜으로 속앓이를 하는 딸아이에게 냉담한 대접을 받아도 그러려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아들이 짜증을 내도 그러려니 하며 무던히 살아온 세월이었다. 단 하나 걱정이라고 한다면 사람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박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불쌍한 동생이랄까. 그런 그녀가, 늘 공기처럼 가족들 뒤를 지켜주던 그녀가 아프단다. 얼마 못 산단다.
고통 속에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엄마는 온통 가족들 생각 뿐이다. 된장찌개 하나 제대로 못 끓이는 우리딸 연수가 앞으로 해야 할 집안일이 걱정스럽고, 아버지의 기대로 늘 힘들어하는 아들 정수가 잘못될까 걱정스럽고,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한평생 같이 살아온 남편은 어떻게 될까 염려되고, 내가 죽으면 제대로 돌봐주지 못할 시어머니가 걱정스럽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읊조린다. '어머니, 정신 드실 때 혀라도 깨물어, 나 따라와. 아범이랑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나 따라와. 기다릴게'
아내가, 엄마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가족들은 덜컥 겁이 난다. 아프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일이 후회되고, 자신의 일만으로도 버거워 별다른 대화도 못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공부가 무슨 벼슬이라고 짜증내고 함부로 행동한 일이 부끄럽다. 도박빚 청산하고 택시기사라도 하라고 마련해 준 돈도 또 다시 날려버려 번듯한 사람노릇 하는 것 보여주지 못한 게 한스러워서 그들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녀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그녀가 좋아하는 호두과자를 산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했던 일산 집을, 그리도 무뚝뚝했던 남편이 오직 그녀만을 위해 그 집단장을 시작했다.
헤어짐을 앞에 두고서야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은 언제나 안타깝다. 그 대상이 엄마일 경우에는 더더욱. 가장 소중하고 애틋한 존재임에도 우리는 왜 많은 시간을 그 존재를 잊고 살게 되는 걸까. 항상 곁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하는 공기처럼, 엄마도 언제나 우리들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웅다웅 티격태격 하면서도 무슨 일 생기면 항상 가족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속절없는 믿음. 그 믿음을 핑계로 엄마를 외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 <친정엄마> 속의 엄마와 소설 속 엄마, 그리고 아주 오래 전 보았던 탤런트 나문희의 연기가 겹쳐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내 아이를, 내 식구를 나보다 더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 내 몸 아픈데도 다른 사람들을 더 걱정할 수 있을까. 내 나이 때 엄마는 이미 나와 내 동생까지 보셨다는데,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고 두렵기만 하다. 내가 겁내는 그 일을 우리 엄마와 세상의 엄마들은 해내셨다. 그리고 지금도 해내고 계신다. 우리 엄마, 그리고 세상의 많은 엄마들에게 부디 우리가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를.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가 이별하게 될 때는 조금만 후회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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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방황은 정녕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그 시기 안에서 부디 방황을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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