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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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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고운 아내, 건강한 두 아이와 살아가던 한 남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폐암 말기, 남은 기간은 길어야 6개월. 최근들어 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기계로 검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무용담 삼아 자랑하려 했던 것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 앞에서 남자는 괴롭다.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느껴지는 극심한 외로움. 고민하던 그는 결국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삶을 자신의 시간을 정리하는 데 쓰기로 결심했다. 그가 관계했던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전부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유서를 보내기로 결심한 남자. 그의 유서는 고등학교 때의 첫사랑, 절교한 친구, 배신한 사업 파트너, 의절한 형, 사랑하는 가족과 숨겨왔던 애인에게까지 전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터라 조금만 아파도 쉽게 겁을 먹는 경향이 있다. '병'이라는,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감당해낼 수 있을 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단지 죽는 것이 무서워서일까. 그도 아니면 내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될 이 세상을 질투해서일까. TV 드라마의 주인공의 운명을 쉽게 결정해버리는 요소로 '병'이 자주 등장한 것이, 나의 그런 걱정과 잡념을 부채질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처음 자각하게 된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계속되어온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 세세한 과정이야 다르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삶을 정리하는 소재 자체만 보면 진부하기는 하더라도 가슴 뭉클한 뭔가가 있다. 하지만 이 남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척 뻔뻔스럽다. 사업 파트너를 배신한 것이야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 아내에게는 잔인하다. 아내를 사랑하네,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네 읊으면서도 그동안 몰래 관계를 지속해온 애인이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어 슬퍼할까 봐 그 존재를 아내에게 밝힌다. 더구나 '뭐 해줄 것 없어?'라고 물은 대답에 '당신의 뼈를 갖고 싶어요' 라고 대답하는, 평생 함께 있고 싶다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까지 한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이라는 되도 않는 철면피 문구를 나열하면서. 어째 이리 생각이 없을 수 있는 지, 슬프고 안타까운 소설임에도 별안간 버럭하게 만들었다. 

남자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당연히 안타깝다. 혼자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나는 코끼리가 되기보다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고 싶었던 죽음을 향한 여정. 잊고 살았던 가족의 소중함, 일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열정, 기억 저편에 묻어놓았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절교한 친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권리였다. 내가 누구였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살아왔나를 알 수 있었던 그는, 어쩌면 갑작스레 세상을 뜬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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