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트 - 연쇄살인범 랜트를 추억하며
척 팔라닉 지음, 황보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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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처음 올리는 리뷰입니다. 헷!  사실 이 아이, 읽기는 2009년의 마지막 날 다 읽었었습니다. 바로 어제였죠. 방학을 하고 났더니 어쩐지 마냥 뒹굴고만 싶은 마음이 강해져서 요 며칠 책 읽기를 아주 살짝, 게을리했거든요. 하지만 이 책이 더디게 읽혔던 것은 저의 게으름 탓만은 아닐 거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소~올직히 고백하자면, 저에게는 약간 어려웠습니다. 재미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웅? 빠져들 것 같은데?' 라는 기분에 폭 감싸일라치면 저의 정신을 금방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려고 결심한 듯한 내용들이 등장하더라구요. 어떤 분은 이 책의 매력을 느끼려면 자신의 공력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럴지도 몰라요. 이 책은 눈 앞에 모든 것을 펼쳐준다기보다 내용 하나하나를 독자 스스로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들을 하나씩 맞춰가며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일단 표지에는 요렇게 써 있습니다. '연쇄살인범 랜트를 추억하며'. 이 문구는 CSI의 광팬이자 미국드라마의 모든 형사물, 범죄물을 섭렵하고자 하는 저를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뭐지, 뭘까, 근데 왜 연쇄살인범을 추억해야 할까, 누명이라도 쓴 걸까'라며 홀로 정신없이 널뛰기를 하는 와중에, 또 하나의 문구가 눈에 띕니다. '랜트와 키스하지 마. 바이러스에 감염될거야'. 그렇습니다. 연쇄살인범이긴 한데, 이 랜트라는 사람은 키스를 통해 사람을 병에 걸리게 하는 범죄를 저지르더라구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랜트의 범행수법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라 해야할까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랜트의 부모, 친구, 자동차 충돌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요. 처음에는 조금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긴 하지만 보는 시각과 전해지는 말에 따라 좋게도 보일 수 있고, 나쁘게도 보일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니까요. 그 모든 의견을 모아서 한 사람을 상상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행히 그들의 진술은 '랜트'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랜트의 행동'에 집중되어 있어서 아주 살짝, 주관적인 감정은 배제되어있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그것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랜트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사람들과는 별개로 작가가 만들어낸 환경도 매우 기묘해요. 주간생활자와 야간생활자가 존재하는 사회, 자동차 충돌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랜트의 살인수법 (그게 정말로 사람을 죽이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아주 의심되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운전자 실황 교통방송에 시간여행까지. 아, 다른 사람의 경험을 부스트 할 수 있는 신기한 기술도 소개되죠. 어째서 저의 정신이 자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려고 했었는지 이해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자, 그럼 쪼콤 어렵긴 하지만 저의 모자란 능력으로 '랜트'에 대해 집중해 볼까 해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한 사람을 단순히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우린 그냥 들은 이야기로 랜트가 병을 옮겼고, 사람이 죽었고,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정부가 격리하고 심지어는 총으로 빵빵 죽이려고 했다는 것까지만 알지요. 도덕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류로 햇빛이 비칠 때 생활하는 주간생활자와 창백하고 타락하고 과격한 부류로 비치는 야간생활자 중에서 그 병에 걸린 것은 주로 야간생활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야간생활자와 그들이 만들어 낸 자동차 충돌파티, 병에 걸린 야간생활자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정부의 강경책.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딘가 사라져버린 랜트.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세운 시간여행과 도입되는 신에 관한 이야기. 과연 랜트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요? 

우훙. 저의 머리로는 여기까지가 최선인 것 같아요. 분명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데 더 설명하려 하다가는 큰일나겠어요. 저의 정신이 안드로메다를 넘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까지 가버리면 안 되잖아요. 이제 겨우 새해가 밝았고 게다가 첫 날인걸요. 아직 읽고 싶은 책도 많구요. 

하지만 이 작가, 굉장하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사실 척 아저씨하고는 처음 만나봤는데, 제가 좀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살짝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전 '그로테스크' 한 책을 읽으면 당장에 몸져 누워버리는 체질인지라 이 아저씨 책은 모두 그럴 거라고 단정짓고 있었습니다만, 요런 새로운 재미와 도전정신을 갖게 한 작품은 오랜만입니다. 제가 공력이 된다면 좀 더 깊이 있는 리뷰를 쓸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조금 분하고 아쉬워요. 어쨌든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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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맛>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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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내가 별점을 매길만한 책이 아니다. 이름만 들어봤지 백석이란 시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 시인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저자가 쓴 이 책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 책, 대학에서 국문과 학생들이 교재로 써야 할 책이 아닐까' 였다. 백석이란 시인에 대한 작가의 평가, 시인의 작품에 녹아든 여러 가지 맛들,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분석해낸 구성과정, 그 모두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작가가 바보 취급을 할 지도 모르지만 백석의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는 작품의 제목만 아는 나같은 사람이 아무래도 더 많을 테니까. 

책을 펼치는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잘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좀 더 알아보겠다고 집어든 사람에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백석 시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문장이 제일 첫 장, 첫 줄에 씌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백석 시, 나는 모르겠다아!'라고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이 책은 박사학위 논문을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책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일단은 국문과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친숙하게 느끼기 힘든 단어들, 시들이 엄청 소개되어 있어 그런 수정, 보완작업을 거쳤다고 해도 간단히 '네, 그렇습니까'라고 수긍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한 착각을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내용이 친절하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백석여담> 과 <음식소사> 부분이었다. 짧은 하나의 챕터가 끝나면 이 두 가지 코너가 이어지는데 백석에 관해 분석하고 시의 내용을 잘게 쪼개 설명하려 한 부분보다 더 재미가 있다. 부자의 음식과 극빈자의 음식이라든가 외간남자와 음식을 같이 먹을 자유 등의 주제로 그 시대의 모습을 음식과 관련해서 설명했다. 예전 신문 등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광고와 신문 기사 등도 실려 있어 마치 옛날 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이 책은 그러니까 결국 전문가용이다. 만약 작가가 정말로 백석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하고 백석을 소개하고 싶었다면 생애, 작품, 그 무엇 하나 가리지 않고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했어야 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일반 사람들이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그러니 결국 저 별은 그의 친절함에 대한 평가, 일반 독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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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이터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미드나이터스 세트 - 전3권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박주영.정지현 옮김 / 사피엔스21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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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것이 행복하고 또 그만큼 잠이 많은 나지만 늘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깊고 아늑한 밤 시간을,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 준 소중한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을 때는 자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내 몸이 좀 더 잠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밤을 새워도 좋겠지만 적당한 시간을 자주지 않으면 금새 몸에 이상반응이 생기는 체질이라 잠은, 꼭 자야 한다. 그럴 때면 자야 한다는 것이 무척 아깝다. 그 시간을 영원히 멈춰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안타까운 시간을 한 시간만이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자정이 되면 그로부터 한 시간동안 푸른 어둠이 찾아오고 다른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으며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캬.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해진다.
 
[어글리] 시리즈로 유명해진(?) 작가 스콧 웨스터필드가 이번에는 '시간'을 소재로 쓴 작품을 선보인다. 특정한 나이가 되면 전신성형을 받고 못난이에서 예쁜이로 모두가 변신해야 하는 사회라는 특이한 상상력을 자랑한 작가는 자정이 되면 온 세상이 멈추고 선택받은 '미드나이터'만 움직인다는 세상을 창조했다. 빅스비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마인드캐스터 멜리사와 전승을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보는자' 랙스, 수학 천재 데스, 하늘을 나는 자 조너선, 불을 가져오는 자인 제시카는 그들의 적 슬리더, 다클링과 싸우면서 마을의 비밀을 파헤친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신기한 것이다. 흘러가는대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고 오늘 지난 시간은 내일 다시 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며 그 흐름과 함께 사람의 몸 또한 변화한다. 시간은 또한 우리에게 공간의 개념이 되기도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 내일 가게 될 어딘가는 모두 시간과 맞물려 있으며 우리 삶을 지배한다. 때문에 사람은 시간에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시간에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목마르게 시간여행,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방법 등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25시간이었던 하루, 그 중에서 한 시간이 접혀 오직 선택된 자들만 활동할 수 있고 이제 그 영역은 점점 넓어져 푸른 어둠 속에서 존재하던 사악한 무리들이 그 경계를 뚫고 나오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살 수 있고 누구나 꿈꿀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다섯 명이지만 그들의 생활이 부럽다고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그 책임이 너무나 크긔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말 부분이다. 작가가 속편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깔끔하게 매듭지어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속편이 나와준다면 즐겁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무리한 전개는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판타지 소설로서 흥미로운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시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하늘을 나는 능력 등 누구나 한 번씩 꿈꿔보았을 신비한 일들이 푸른 어둠 속에서 펼쳐진다. 태양 대신 떠오르는 검은 달과 하늘에서 내리다 멈춘 수정같은 빗방울, 내리치다 멈추게 된 번개들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책 소개글에 적힌 것처럼 한밤중에 읽기 안성맞춤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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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가족>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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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뭉치로 보여지는 네 마리의 너구리 형제가 있습니다. 다다스 숲에 사는 너구리의 명문 시모가모 가의 가장 소이치로의 네 아들이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소이치로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금요구락부'라는 인간들의 송년모임에서 냄비요리가 되고 말았거든요. 남겨진 것은 천둥을 무서워하고 분노했을 때 '나가 뒈져라!'를 외치는 아내와 뭔가 조금씩 모자라보이는 털뭉치 네 아들 뿐인 겁니다. 시모가모 가는 에비스가와 가와 적대관계에 있는데요, 이 에비스가와 가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버지 소이치로의 동생 소운입니다. 뭐, 그의 아들 금각과 은각도 밉상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늘 네 마리의 털뭉치 (앗, 둘째 아들 야지로는 개구리로 변해서 개구리로 살기로 결심했으니 세 마리의 털뭉치군요) 를 괴롭힌답니다. 거기에 텐구선생 아카다마와 인간이면서도 텐구가 되기로 한 아름다운 여자 벤텐, 금각과 은각의 여동생 가이세이가 합세해 요상하고도 재미있는 너구리 세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리미 토미히코는 교토를 배경으로 글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인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태양의 탑] 등이 모두 교토를 배경으로 씌어져 있죠. 교토는 1,0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요괴의 도시'라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는 곳입니다. 1,000년이라는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 고풍스러움도 마음에 들고 그 곳에서 일어났을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곳이에요. 실제로 요괴가 제 앞에 나타난다면 저도 네 마리의 털뭉치들처럼 부들부들 떨겠지만 그래도 매력은 있으니까요, 홍홍. 또 교토만큼 요상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어울리는 곳은 없죠.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독특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너구리를 소재로 한 이 작품도 당연히 교토를 배경으로 씌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인간들의 냄비요리가 되어 세상을 떠나다니,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너구리 세계에서 워낙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시모가모 소이치로였기에 그 충격은 더 컸을 거에요. 그 용감하고 명석하며 때로는 바보의 냄새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그가 인간들의 냄비요리가 되어버린 데에는 필시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설정이 작품을 이끌어갑니다.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만. 그의 뒤를 이어 너구리계의 지도자 니세에몬이 되기 위해 장남 야이치로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차남 야지로는 개구리가 되어 우물 안에서 도를 닦고, 이야기의 화자인 삼남 야사부로는 그저 재미만 좇아 빈둥거리며 막내 야시로는 둔갑을 해도 늘 꼬리를 드러내고 마는 바보의 냄새를 풀풀 날리면서 다다스 숲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짐작하시다시피 음모가 이들을 덮치는 거죠. 

네 마리의 털뭉치의 캐릭터는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제가 궁금한 존재는 벤텐과 가이세이였어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종잡을 수 없는 벤텐과 늘 음지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욕인지 조언인지 모를 충고를 야사부로에게 던지는 가이세이요. 저는 이 작품이 시리즈가 될 줄 소개글을 보지 않고도 척, 알 수 있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이야기에서는 벤텐과 가이세이의 모호한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든요. 여자의 비밀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밝혀지지 않는 법!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겠죠, 홍홍. 

'유정천'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우쵸텐'이라고 읽습니다. 불교에서는 9천 중 가장 높은 하늘, 형체 있는 세계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지만 이 작품에는 다른 의미인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위급한 상황도 등장하지만 이 '나가 뒈져라!'를 외치는 엄마와 네 마리의 털뭉치는 어쨌거나 재미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 같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이 조금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네 마리의 털뭉치가 씩씩하고 재미있게 어머니와 살아가니 다행이에요. 아웅, 귀여운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네 마리의 털뭉치를 품안에 한 펀 꼬옥 안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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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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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는 2년 전 데라하라의 얼간이 아들로 인해 아내를 잃었다. 처참한 교통사고. 교사였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얼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즈키는 데라하라의 회사로 취직한다. 약을 팔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복수심 뿐이다. 그런데.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복수심이 회사에 들켰다. 곧바로 테스트를 준비한 그의 파트너. 약을 팔기 위해 끌어들인 일반인을 죽이라고 협박당하는 사이, 바로 그의 눈 앞에서 그 얼간이가 일명 '밀치기'라 불리는 킬러에 의해 차도로 떠밀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는, 이사카 고타로는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한 작가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유쾌하고 엉뚱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능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지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골든슬럼버] (왜곡된 정보와 사람들의 근거없는 믿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가), [모던타임스] (정보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를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풍자가 뛰어나며 자칫 어두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조차 평범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연출해버리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래스호퍼] 는 스즈키 외에 자살유도킬러로 불려지는 구지라와 칼잡이 세미의 시점에서 차례대로 전개된다. 많은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종용한 후유증으로 그들의 망령을 보는 구지라와 꼭두각시처럼 이와니시에게 휘둘리는 세미, 회사의 지시를 받고 밀치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미행하는 스즈키는 '밀치기'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킬러와 킬러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 스며들게 된 어둠의 세계, 우리가 그 동안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포스럽고 두려워해야 할 그들에게 연민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차마 느낄 수 없을 감정, 연민이 스즈키 뿐만 아니라 구지라와 세미에게조차 느껴진다.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고 칼로 숨을 끊어놓는 것일까. 그저 '하는 수밖에 없잖아'라는 생각 하나로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양심에 지고 만다.


 

 어떤 동물이든 밀집해서 살면 변종이 생기게 마련 아니오. 색이 변하기도 하고 안달하게 되면서 성질이 난폭해지지. 메뚜기떼의 습격이라고, 들어봤소? ...사람도 일정한 공간에서 복닥거리다 보면 이상해지지...초록색 메뚜기라 할지라도 무리 속에서 치이다 보면 검어지게 마련이지. 메뚜기는 날개가 자라 멀리 달아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소. 그저 난폭해질 뿐...도시에서는 특히 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가 어렵지. (p213~215)


구지라와 세미도 그런 변종 메뚜기(그래스호퍼)였다고 생각한다.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이상해진 메뚜기.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어서 누군가의 생을 빼앗으며 살아왔던 메뚜기.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자신들의 인생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변종 메뚜기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스즈키다. 스즈키 또한 구지라와 세미같은 메뚜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 남은 복수심이라면 그런 메뚜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밀치기'를 만나고, 최소한으로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오히려 그 자신을 구원했다. 그 보상으로 스즈키에게 주어진 것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죽은 듯 살지 않겠다는 의지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처럼 이 작품에서도 사회와 정치에 대한 작가의 비판 정신이 돋보인다. 감정적인 면으로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렇다고 또 이성적인 면만 강조되어 있지 않은 적당함이 좋다. 킬러들의 대결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문장 하나하나가 담백하다. 두근두근한 긴장감,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연적인 질문까지. 이사카 월드로 격하게 초대합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수밖에.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는 건 인간의 몹쓸 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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