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가족>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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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 가족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털뭉치로 보여지는 네 마리의 너구리 형제가 있습니다. 다다스 숲에 사는 너구리의 명문 시모가모 가의 가장 소이치로의 네 아들이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소이치로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금요구락부'라는 인간들의 송년모임에서 냄비요리가 되고 말았거든요. 남겨진 것은 천둥을 무서워하고 분노했을 때 '나가 뒈져라!'를 외치는 아내와 뭔가 조금씩 모자라보이는 털뭉치 네 아들 뿐인 겁니다. 시모가모 가는 에비스가와 가와 적대관계에 있는데요, 이 에비스가와 가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버지 소이치로의 동생 소운입니다. 뭐, 그의 아들 금각과 은각도 밉상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늘 네 마리의 털뭉치 (앗, 둘째 아들 야지로는 개구리로 변해서 개구리로 살기로 결심했으니 세 마리의 털뭉치군요) 를 괴롭힌답니다. 거기에 텐구선생 아카다마와 인간이면서도 텐구가 되기로 한 아름다운 여자 벤텐, 금각과 은각의 여동생 가이세이가 합세해 요상하고도 재미있는 너구리 세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리미 토미히코는 교토를 배경으로 글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인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태양의 탑] 등이 모두 교토를 배경으로 씌어져 있죠. 교토는 1,0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요괴의 도시'라는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는 곳입니다. 1,000년이라는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 고풍스러움도 마음에 들고 그 곳에서 일어났을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곳이에요. 실제로 요괴가 제 앞에 나타난다면 저도 네 마리의 털뭉치들처럼 부들부들 떨겠지만 그래도 매력은 있으니까요, 홍홍. 또 교토만큼 요상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어울리는 곳은 없죠.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독특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너구리를 소재로 한 이 작품도 당연히 교토를 배경으로 씌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인간들의 냄비요리가 되어 세상을 떠나다니,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너구리 세계에서 워낙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시모가모 소이치로였기에 그 충격은 더 컸을 거에요. 그 용감하고 명석하며 때로는 바보의 냄새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그가 인간들의 냄비요리가 되어버린 데에는 필시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설정이 작품을 이끌어갑니다.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만. 그의 뒤를 이어 너구리계의 지도자 니세에몬이 되기 위해 장남 야이치로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차남 야지로는 개구리가 되어 우물 안에서 도를 닦고, 이야기의 화자인 삼남 야사부로는 그저 재미만 좇아 빈둥거리며 막내 야시로는 둔갑을 해도 늘 꼬리를 드러내고 마는 바보의 냄새를 풀풀 날리면서 다다스 숲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짐작하시다시피 음모가 이들을 덮치는 거죠.
네 마리의 털뭉치의 캐릭터는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제가 궁금한 존재는 벤텐과 가이세이였어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종잡을 수 없는 벤텐과 늘 음지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욕인지 조언인지 모를 충고를 야사부로에게 던지는 가이세이요. 저는 이 작품이 시리즈가 될 줄 소개글을 보지 않고도 척, 알 수 있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이야기에서는 벤텐과 가이세이의 모호한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든요. 여자의 비밀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밝혀지지 않는 법!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겠죠, 홍홍.
'유정천'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우쵸텐'이라고 읽습니다. 불교에서는 9천 중 가장 높은 하늘, 형체 있는 세계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지만 이 작품에는 다른 의미인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위급한 상황도 등장하지만 이 '나가 뒈져라!'를 외치는 엄마와 네 마리의 털뭉치는 어쨌거나 재미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 같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이 조금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네 마리의 털뭉치가 씩씩하고 재미있게 어머니와 살아가니 다행이에요. 아웅, 귀여운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네 마리의 털뭉치를 품안에 한 펀 꼬옥 안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