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스즈키는 2년 전 데라하라의 얼간이 아들로 인해 아내를 잃었다. 처참한 교통사고. 교사였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얼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즈키는 데라하라의 회사로 취직한다. 약을 팔아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복수심 뿐이다. 그런데.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복수심이 회사에 들켰다. 곧바로 테스트를 준비한 그의 파트너. 약을 팔기 위해 끌어들인 일반인을 죽이라고 협박당하는 사이, 바로 그의 눈 앞에서 그 얼간이가 일명 '밀치기'라 불리는 킬러에 의해 차도로 떠밀려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는, 이사카 고타로는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한 작가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유쾌하고 엉뚱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능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지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골든슬럼버] (왜곡된 정보와 사람들의 근거없는 믿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가), [모던타임스] (정보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를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풍자가 뛰어나며 자칫 어두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조차 평범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연출해버리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래스호퍼] 는 스즈키 외에 자살유도킬러로 불려지는 구지라와 칼잡이 세미의 시점에서 차례대로 전개된다. 많은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종용한 후유증으로 그들의 망령을 보는 구지라와 꼭두각시처럼 이와니시에게 휘둘리는 세미, 회사의 지시를 받고 밀치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미행하는 스즈키는 '밀치기'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킬러와 킬러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 스며들게 된 어둠의 세계, 우리가 그 동안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포스럽고 두려워해야 할 그들에게 연민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현실에서 마주친다면 차마 느낄 수 없을 감정, 연민이 스즈키 뿐만 아니라 구지라와 세미에게조차 느껴진다.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고 칼로 숨을 끊어놓는 것일까. 그저 '하는 수밖에 없잖아'라는 생각 하나로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양심에 지고 만다.


 

 어떤 동물이든 밀집해서 살면 변종이 생기게 마련 아니오. 색이 변하기도 하고 안달하게 되면서 성질이 난폭해지지. 메뚜기떼의 습격이라고, 들어봤소? ...사람도 일정한 공간에서 복닥거리다 보면 이상해지지...초록색 메뚜기라 할지라도 무리 속에서 치이다 보면 검어지게 마련이지. 메뚜기는 날개가 자라 멀리 달아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소. 그저 난폭해질 뿐...도시에서는 특히 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가 어렵지. (p213~215)


구지라와 세미도 그런 변종 메뚜기(그래스호퍼)였다고 생각한다.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이상해진 메뚜기.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어서 누군가의 생을 빼앗으며 살아왔던 메뚜기.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자신들의 인생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변종 메뚜기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스즈키다. 스즈키 또한 구지라와 세미같은 메뚜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 남은 복수심이라면 그런 메뚜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밀치기'를 만나고, 최소한으로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오히려 그 자신을 구원했다. 그 보상으로 스즈키에게 주어진 것은 앞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죽은 듯 살지 않겠다는 의지다. 

[골든슬럼버] 와 [모던타임스] 처럼 이 작품에서도 사회와 정치에 대한 작가의 비판 정신이 돋보인다. 감정적인 면으로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렇다고 또 이성적인 면만 강조되어 있지 않은 적당함이 좋다. 킬러들의 대결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문장 하나하나가 담백하다. 두근두근한 긴장감,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연적인 질문까지. 이사카 월드로 격하게 초대합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수밖에.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는 건 인간의 몹쓸 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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