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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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관심을 가진 작품은 [설계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설계자'란 돈을 받고 누군가의 죽음을 의뢰받아 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게끔 전체적인 구성을 짜는 사람을 말한다는데, 영화 <인셉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뭔가 색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 하지만 작가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덤벼들 수는 없는 법. 결국 오래 전에 구입하고 고이 책장에 모셔둔 [캐비닛]을 꺼낸다.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품 [캐비닛].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는 것에 그리 큰 신경은 쓰이지 않지만 먼저 이 작품을 읽은 지인이 꽤 괜찮은 작품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인지 거는 기대가 꽤 크다. 

처음에 몇 장을 읽고 난 후 다시 표지를 들여다봤다. 분명히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작품의 형식이 연작단편식이라 뭔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분명히 '13호 캐비닛'이라는, 우리가 사무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비닛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 상피에르에서 일어난 화산폭발과 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저 실바리스가 툭 튀어나왔다. 재난에서 살아남은 후 사막으로 가서 상피에르 사람들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글을 남긴 그. 순간 '우웅?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하지 싶다. 

13호 캐비닛은 주인공의 직장에 폐물처럼 숨겨진 캐비닛이다. 그 캐비닛의 원래 주인은 권박사. 그는 사십 년 동안 그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다. 캐비닛 안 자료는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바로 심토머(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누군가는 식수 대신 휘발유를 마시고 누군가는 강철을 씹어먹고, 또 누군가는 신문을 읽으면서 그 종이를 삼킨다. 몸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기도 하고, 도플갱어를 만나기도 하며 두 달에서 이 년, 혹은 더 긴 세월을 잠으로 보내는 토포러도 있다. 분명히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내리고 보니 몇 달, 혹은 몇 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을 경험하는 타임스키퍼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양이로 변신하고 싶어하는 남자,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사람의 자료도 이 캐비닛 안에 들어있다. 분명히 실재하는 것은 아닐텐데 어느 순간 '나도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 하지만 실제로 겪는다면 조금 황당할 법한 이야기들이 줄줄 이어진다. 전체 분량이 조금 긴 듯도 하고, 뒤로 갈 수록 이야기가 살짝 산으로 가는 듯한 맛도 나지만 -어떻게 이런 존재들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을까- 감탄할 정도로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한 챕터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살짝살짝 등장하는 단상도 참 맛깔지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크지 않다. 그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 심토머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할 수 있게 될 지 확신조차 갖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역할은 다만 지켜보기, 혹은 심토머들의 배출구다. 어디에서도 풀 수 없는, 간혹 찾아오는 좌절과 절망감을 권박사에게, 그리고 이제는 주인공에게 털어놓으며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들의 세상에서는 그저 지켜봐주는 사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가장 절실했는지도 모르겠다. 

[캐비닛]을 읽고 나니 [설계자들]에 대한 기대가 한층 높아졌다. 아직 내 책장에는 읽을 책이 수없이 많이 쌓여 있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설계자들도 그 아이들의 가족이 될 것만 같은 느낌. 우리 소설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후 또또 새삼 깨달아서 괜히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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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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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애정해마지않는 지로 아저씨의 신작입니다 갑자기 요 한 문장으로 리뷰를 끝내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 쓰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아나요. 그만큼 온몸으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좋은 작가에요. 지로 아저씨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마다 언급했던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칼에 지다]를 읽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 조용히 서점으로 달려가셔서 책을 손에 드시길 권유합니다. 어떤 분은 지로 아저씨의 작품이 모두는 좋지 않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같은 경우는 다른 작품들도 다 좋더라구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칼에 지다]는 그다지 취향을 타지 않는 작품이니 꼬옥! 읽어보세요  

[저녁놀 천사]는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입니다. 저는 단편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지로 아저씨의 작품이라면 단편도 상관없이 모두 읽어요  네, 제가 좀 편애하는 경향도 있어요. 하지만 지로 아저씨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셨거나 저를 좀 아시는 분이라면 '아, 얘는 이럴만 해'라고 아마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의 지나친 착각일까요. 남들이 뭐라하든, 저는 계속 지로 아저씨를 사랑할 거에요! 편두통으로 인한 정신없는 리뷰, 그래도 계속 읽어주세요! 에헴! 약도 먹었으니 이제 얌전해질게요. 

표제작 <저녁놀 천사>는 자신의 가게에서 잠깐 일하다 사라진 여자를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결혼으로 심한 상처를 받고 그 아픔을 잊을 수 없어 50이 넘는 나이까지 아버지와 둘이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이 남자의 가게에, 준코라는 여자가 잠시만 머물게 해달라며 통사정을 하죠. 처음에는 마뜩찮았던 남자지만 어느 새 그녀는 남자의 가슴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준코. 그녀가 떠나고 일년 반 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남자는 잊은 듯 살았던 그녀를, 자신이 얼마나 사랑했는 지 깨닫게 됩니다. 나이도 자실만큼 자신 어르신이 그 사실을 깨닫고 훌쩍훌쩍 우는 장면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모든 감정은 강렬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죠. 

<저녁놀 천사>의 감성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이 모두 주옥같습니다. <차표>와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두 작품의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차표>에 등장하는 소년이 우리나라의 <소나기>를 연상시킬만큼 착하고 순수하다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의 소년은 이제 반항기에 접어든 아이에요. 둘 다 성장하기 위해 한 계단을 밟는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계단이 어떤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성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를 비교하면서 읽어보신다면 절로 '캬~'소리가 나올 겁니다. 

<호박>은 공소시효를 일주일 남겨둔 남자와 우연히 그를 찾아낸 형사의 이야기가, <나무바다의 사람>은 작가의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에요. 하지만 이 여섯 작품 중에 가장 강한 '캬~'를 연발하게 만든 이야기는 바로 <특별한 하루>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고, 뒤통수를 탁 얻어맞은 느낌으로 연달아 세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추리소설같은 기발한 설정과 가슴으로 깊이 전해져오는 감동에 환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한순간이라는 척도를 영원으로 바꾸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저는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아낌없이 별 다섯을 칠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쪼콤 아쉬움을 느끼게 한 것은 단 하나의 번역이었습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정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문맥에 따르면 이 '정사'는 므흣한 그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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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
막심 샤탕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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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시리즈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이 작가의 이름을 그냥 지나치실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악!> 시리즈의, 이름만 달콤한 샤탕 아저씨의 [약탈자] 입니다. 모르는 분들은 <악!> 이 비명을 지를 때의 '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잔혹하고 소름끼치는 묘사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 그 '악!'도 잘 어울리지만, 여기서는 그의 작품 [악의 영혼] [악의 심연] [악의 주술] [악의 유희] 를 일컫는 말이랍니다. '악'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릴 정도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인들과 잔혹한 묘사로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은 들어보시지 않았을까 해요. <악!> 시리즈 이후, 샤탕 아저씨의 작품을 접해본 적은 없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라는 문구와 양의 탈을 쓴 사람이 서 있는 표지에 끌린 소설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의 배경은 '전쟁터'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고 원한을 가진 적조차 없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색의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타인을 죽이는 것이 통용되는 또 다른 세상이죠. 아무리 적군이라고 해도 눈 앞에서 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은 세월을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니겠어요? 갑자기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한 소설의 문장이 생각나네요. 그런 전쟁터에서 단순히 쾌락을 위해 병사들을 죽이는 살인마가 나타납니다. 그를 잡기 위해 현대의 프로파일러 같은 헌병들이 등장하죠. (전 잘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는 헌병들이 있는 지 궁금하네요) 

이 작품의 매력은 단연 헌병대의  크레이그 프레윈 중위입니다. 과거 한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심연에 자리잡은 어둠에 대해 익숙한 프레윈 중위는 그 동안 접한 여러 사건을 통해 자신만의 이론을 가지고 있죠. 범인이 남긴 시체, 현장에 남긴 증거, 범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 등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리합니다. 마치 제가 좋아하는 미드 <크리미널 마인드>를 보는 것 같았어요. 한 단계 한 단계 범인에게 근접하는 프레윈 중위. 그런 그에게 사건 초반부터 범죄수사에 가담하게 요청한 간호사 앤 또한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범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앤이 이번 범죄를 통해 자신에게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사건 수사와 함께 인물들이 간직한 어둠에 대한 의문까지 의혹으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제가 간격을 두고 읽어서일까요? 이번 작품은 조금 지나치게 템포가 느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인에게 다가가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느낌. 범죄수사로 유명한 프레윈 중위가 유독 이 사건에서만 헛다리를 짚는 것 같은, 그런 계산된(?) 설정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속도감 있게 슉슉 넘어가는 그런 이야기를 원했는데 말이죠. 다만 누가 범인인지에 대해 자꾸 머리를 굴리게 된다는 점은 좋았습니다. 전쟁터를 배경으로 한 만큼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해하게 되는 고통에 대해 조금 더 설명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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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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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케이블에서 방송되는 <수파스타 K> 시즌2에 푹 빠져있습니다. <수파스타 K>가 방송되는 금요일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을 정도로요. 호홋. 그렇다고 사전 인터넷투표와 대국민문자투표에까지 참여할 정도는 아니구요, 그저 그들의 열정을 함께 즐기는 거죠. 자신들이 발견한 꿈을 좇아 앞만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참 좋아요.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2억이라는 상금과 앨범발매도 그들의 열정을 변질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중간에 탈락한 참가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요. 금요일밤 <수파스타 K>를 보고 나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으헥. 

장안의 화제인 <수파스타 K>인만큼 여러 가지 논란도 많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의 독설과 매주 탈락자를 선정하는 방식, 리얼리티 쇼인만큼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잔인함'을 느끼게 한 탈락자 발표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대국민문자투표 또한 참가자들의 실력이냐 스타성이냐를 판가름한다는 점에서 꽤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들썩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참가자가 8일 탈락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전 개인적으로 8일 탈락한 K군의 목소리, 좋아합니데이.  누나의 팬심이라고 할까요. 크하핫. 요렇게 누군가에게는 탈락의 눈물을, 누군가에게는 승자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인터넷과 문자투표 등이 참가자들의 생사를 결정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24시간 7일] 의 소재는 '리얼리티 쇼'입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수잔 콜린스의 <헝거게임> 시리즈, 기시 유스케의 [크림슨의 미궁], 영화 <10억>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소재죠. 근육퇴행위축증을 앓고 있는 딸 제나를 위해 쇼에 참가한 다나, 조종사였던 저스틴, 수의사 네리네, 용접공 버튼, 도축업자 브렌다, 과거에는 수녀였지만 현재는 교사인 노라, 영매 패도라와 시스템관리자 코리, 의사 듀테트레와 어부인 포스터, 회계사 찰스, 중개소를 운영하는 르네. 이렇게 12명은 쇼에 참가하기 위해 바사 섬으로 향합니다. 2백만 달러의 상금과 재미를 위해 참가한 쇼는 '컨트롤'이라는 범인에 의해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오고 참가자들은 하루에 한 명씩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다름아닌 시청자들의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요. 

생존자들의 몸 속에 투여된 에볼라 바이러스만으로는 긴장감을 극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는 지, 작가는 외부적으로도 이들을 공격합니다. 바사 섬에 갇힌 참가자들이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섬을 봉쇄하는 한편, 배를 타고 섬에서 나온 참가자들 중 일부를 무참히 죽이기도 하죠. 게다가 참가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지닌 상처, 약점과 싸워 이겨서 인터넷 투표수를 50% 차감시킬 수 있는 안전석까지 얻어내야 합니다. 대체 '컨트롤'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 지, 참가자 중 섞여 있는 공범은 누구인지, 엘리엇 케이 사이먼이라는 정신이상자가 원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갖가지 의혹 속에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그러나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매끄럽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긴장과 스릴, 엄청난 속도감은 마치 눈 앞에서 영상이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이 쇼에 열광합니다. 참가자들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표의 수는 한정없이 올라가죠. 참가자들에게는 '현실'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단순히 '쇼'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아무리 시청자들에게 살인자라고 외쳐본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만약 실제로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투표를 하지 않게 될까요?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불가사의한 인간의 심리니까요. 발전된 기술로 생활의 편리함을 얻게 된 우리지만, 그 기술의 어두운 부분도 살펴볼 때인 듯 합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잔인한 리얼리티 스릴러이지만 이 작품이 그리 무섭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인간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작가가 은연 중에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술이, 문명의 발달이 도저히 파괴시킬 수 없는 인간의 소중한 무엇.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슴 한 쪽에서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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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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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드는 책입니다. '슬프고 애틋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소개말과는 달리, 햇빛이 따사로운 창가에라도 앉아있는 양 동그랗게 몸을 말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마치 '이대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듯 해요. 커다란 그림이 있다면 액자에 끼워서 두고두고 보고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니 혼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못내 가슴에 남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은 [왕국]. 사실 저는 바나나 언니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에게 전달되는 감성이 부족하다고 해야할 지, 분명 바나나 언니가 전하고 싶은 것은 많았을텐데 그것이 저를 그대로 투과해서 제 마음 속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로 작품들과의 만남이 끝났다고 해야할 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티티새] 에서도 저는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었답니다. 당시 저보다 세 살 많은 사촌언니가 좋다고 권해주었었는데 말이죠. 어쩌면 시간이 흘러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증거(?)로 저는 [왕국]을 참 좋아하게 됐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다소 어두운 내용에 슬프고 애틋한 이야기라는 입소문에도 과감히 이 책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소재면에서는 확실히, 밝은 내용은 아니에요. 마녀 학교를 다녔던 엄마와 쌍둥이 이모에 강령회에 깊이 빠져버린 엄마가 영혼을 불러내던 중 이상한 것에 씌어 아빠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소재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죠. 주인공인 '그녀'는 엄청난 사건을 겪은 이후 그 때의 기억은 안개 속에 묻어둔 채 이리저리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모의 아들, 즉 사촌 쇼이치가 찾아와 그녀를 보살펴주겠다고 해요. 그녀를 찾아 도와주는 것이 엄마의 유언이었다면서요.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은, 그녀의 기억을 더듬고 사건을 더듬어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상처를 치료하기로 합니다. 그 와중에 쇼이치 또한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대신 사촌인 그녀를 다시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끼죠. 결국 이 책은 그녀와 쇼이치의 '일종의' 성장소설입니다. 제가 어째서 '일종'이라는 말을 썼는 지,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아마 알게 되실 겁니다. 

밝지 않은 소재를 가볍고 경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톡톡 튀는 매력의 '그녀' 덕분입니다. 어두운 기억과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왔지만 현재만을 생각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 좋았어요. 문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한 좋은 말들이 저의 마음에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랄까요.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면서 그녀와 쇼이치가 나눈 말들에는 인상깊은 것들이 많아요. 하지만 어쩐지 제 가슴 속 깊은 곳의 무엇을 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문체 자체가 '슬프고 애틋한' 느낌을 자아내기에는 부족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리고 왜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왜였을까요.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리라 생각해요. 

마지막 부분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어요. 결말이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는 아니어서 조금 서운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는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그녀'에 대한 이야기, 그녀의 모든 것을 전하는 이야기이니까요. 이 짧은 여행에 그녀와 동참해주시면,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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