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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일기(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이정순 역. 을유문화사. 2025. 360쪽)

: 유명인의 일기 87편 모음집. 아무래도 작가의 비중이 높아서 내 눈길을 끌었다. 저자들이 나름 주제별로 분류를 하긴 했지만 난 주제를 의식하지 않고 쭉 읽었다. 그리고 날 이 책으로 이끈 몇몇 작가의 일기는 역시나 인상깊었다. 특히 보부아르. 원래도 샤르트르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짧게 발췌된 보부아르의 일기에서 그가 정말 개자식임을 확인했다(46쪽). 보부아르를 비롯, 캐서린 맨스필드, 조르주 상드 등 반가운 이름들과 이들뿐 아니라 로즈 드 프레이시네 - 1817년 남장을 하고 군함에 몰래 승선해 세계 일주에 동행 - , 이렌 에프뤼시 - 1941년 반유대주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망명 - 는 더 길게 읽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쓰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일기의 분위기는 달랐다. 앙리프레데리크 아미엘처럼 세상 감상적으로 아름답게 풍광을 묘사한 일기가 있는가하면 조르주 페렉처럼 사실만 건조하고 정확하게 서술한 일기도 있다. 조르주 페렉을 읽기 전엔 가끔 쓰는 내 일기가 초라하기만 했는데, 그나마 아미엘과 페렉의 중간쯤이라고 위안삼을 수 있겠다. 책에 일기 원본이 실려 있어서 좋았다. 특히 아서 코난 도일, 빅토르 위고 등의 여행기 삽화가 보기 좋았고, 스탕달의 필체는 꽤 인상적이었다. 연초에 재밌게 읽었고 대체로 다 좋았는데 사실 번역은 별로였다. 



2. 별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대니 샤피로, 서제인 역. 위즈덤하우스. 2024. 384쪽)

: 2010년 12월, 벤은 내일이면 정든 집을 떠나 알츠하이머인 아내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마당으로 나온 벤은 옆집 소년 월도가 창문을 열고 별을 관찰하는 걸 발견한다. 늘 저렇게 별을 관찰하는 걸 벤도 알고 있다. 잠시 뒤, 월도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벤에게 말을 걸고, 둘은 아이패드의 어플을 이용해 함께 별자리를 관찰한다. 얼마 후 집으로 들어간 월도는 밖에 나갔다 온 걸 아버지에게 들켜 혼나고, 대가로 아이패드를 압수당한다. 유일한 낙이었던 별자리 관찰을 못하게 된 월도는 절망감에 집에서 나간다.


(약스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별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집의 오랜 인연과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떻게 별들이 소년과 노인을 발견해서 그들을 가족 품에 되돌려주는지. 동화처럼 아름답지만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올려다 보든 아니든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그 별들은 40년 전에도 현재에도 지금과 같이 빛났다. 우리에게 시간은 선형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별들에게 인간의 시간은 그저 그 순간일 뿐이다.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모든 일은 아직도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난 책을 덮으면서 아쉬우면서도 아쉽지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어디에선가 계속될 것이므로. 



3.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배예람. 안전가옥. 2024. 400쪽)

: 한국괴물관리협회의 보늬. 괴물에 관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이 협회 내에는 괴물을 처리하는 '손'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보늬는 손 대신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손도 없으면서 민폐처럼 협회에 붙어 있는 보늬를 보는 내부의 눈초리는 곱지 않지만 보늬는 협회의 창시자인 할머니 뺵으로 입사해서 갖은 힘을 다해 버티는 중이다. 오랜만에 현장으로 괴물을 잡으러 구팀장과 함께 나간 보늬는 포획대상인 도깨비에게 연민을 느껴 그냥 보내주고, 이 일로 화가 난 구팀장의 일갈에 이제 그만 사표를 제출해야 겠다고 결심하지만 협회 사무실에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귀신을 잡아보겠노라 자원한다. 보늬는 마침 야근을 하던 신입사원 지운과 함께 탕비실에 있다가 평소답지 않게 상냥한 구팀장과 마주치는데...


작가의 말에도 있듯,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이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나라면 진즉에 포기했을텐데. 다른 분야나마 재능이 있다는게 어딘가, 비록 하고 싶은 일이 아닐지언정. 세상의 대부분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밥을 번다.  하지만, 그런 대다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굳이 소설을 집어들 이유도 없는 거지. 재능을 뛰어넘는 애정. 보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일게다. 그리고 그건 젊음의 장점이지. 


괴물들이 대부분 전래동화에 기인한다. 책 속 세계관대로라면 괴물들의 모습을 따서 전래동화가 생긴 거지만. 그러니 전래 동화를, 어른들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읽을 땐 그저 작가가 자료조사를 열심히 했구나, 까지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들이다. 그러니 작가님, 2권을 주세요.



4. 죽은 남편이 돌아왔다 1.2(제인도. 팩토리나인. 2023. 504쪽, 488쪽)

: 오래전 실종된 남편이 드디어 사망 선고를 받았다. 효신은 기뻐하며 연인 필주에게 연락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 재우가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시어머니와 함께 경찰에게 간 효신은 낯선 남자와 마주하는데, 분명 이 남자는 자신이 알던 남편 재우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의 지문 시스템에도 이 사람은 김재우이고, 경찰 뿐 아니라 시어머니까지 아들 재우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사실 효신은 폭력과 폭언을 휘두르는 남편과 다투다 실수로 그를 죽였고, 애인과 함께 시신을 건축 중인 가평 빌라에 묻었다. 분양이 무산된 이 빌라의 시신이 발견될 리는 없는데...


도입부는 흥미진진했는데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2권 초입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특히 더 재미없어졌다. 사실 도서관에서 대출 예약 경쟁이 치열해서 꽤 오래 노리다가 대출했는데, 그래서 더 실망이 컸는지도. 그나마 결말에서 권선징악이 확실한 건 맘에 들었다. 사실 진짜 교훈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 한국말은 끝까지 잘 들어야 한다. 



5. 그린 레터(황모과. 다산책방. 2024. 268쪽)

: 얼음산국 연구원 이륀은 비티스디아 잎을 연구한다. 이 식물의 잎맥에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멸종된 식물이고 이륀의 연구 재료는 증조할아버지가 키웠던 마지막 개체이다. 사실 이륀은 1/8 쿠진족인데 이 사회에서 쿠진족은 멸시의 대상이라 이륀은 자신의 출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날 이륀에게 비티스디아 잎맥을 해석할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다는 이메일이 도착한다. 


부제대로 이건 사랑 이야기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상황에 휩쓸려 헤어졌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서 살아갔던.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개개인의 삶은 안타까울 수 밖에 없지만, 이 이야기 속 푸룬과 로밀야의 기나긴 떠돎은 안타까움 한 단어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다. 비록 그들의 후손들이 다시 손 잡을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땅에서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살아갈 수만 있었다면 그 누구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폭력과 추방과 방황. 물론 사랑은 이 모든 걸 뛰어넘었다. 그것이, 그리고 또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이어진 이륀의 생과 사랑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이 사랑에서 시작될 좀 더 나은 미래가. 



6.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홍지운. 안전가옥. 2020. 284쪽)

: 고등학생 호랑. 이제 곧 열여덟 살이 되는 그녀는 공부따윈 관심없고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펑크로 세계 정복'을 꿈꾼다. 궁궐 복원 프로젝트 반대 시위에도 참여하고, 뒤풀이에서도 술 빼고 다 먹으며 신나게 놀던 호랑. 그런데 열여덟 생일날 혜종 황제가 집에 나타난다. 이모가 조카 생일 축하해 주는 거라며... 호랑은 이제 열 여덟이 되었으니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교육을 받아야 한단다. 거침없는 성격대로 격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공주 자리를 거부해 보지만 자신이 하지 않으면 세상 비호감인 다른 황족이 차선책이 될 거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성격이 시원시원해 읽는 맛이 난다. 게다가 호랑은 평소의 주장 뿐 아니라 행동도 꽤 과격하고 발언에도 필터링이 없다.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좀 더 약게, 소위 말하는 여우처럼 굴어서 원하는 걸 얻기를 바라는 맘도 없지 않았지만 호랑은 역시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상과 현실을 합친다. 개운했다. 조금은 유치할지라도 어린 나이에만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을 읽어나가는 게 무엇보다 속 시원했고 재밌었다. 



7.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이사구. 황금가지. 2024. 336쪽)

: IT 디자이너와 능력 좋은 무당의 콜라보. 연작이라고 했는데 장편으로 읽는 게 맞는 거 같다. 앞의 이야기를 읽어야 뒤의 이야기가 이해가 쉽다. 벽간 소음과 무능하고 성질 더러운 상사 퇴치, 최애의 애정을 얻기 위한 부적 등 살면서 이 일 좀 쉽게 해결됐으면 했던 일들에 관한 부적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부적이 진짜로 효능을 발휘하려면 사람이 힘을 보태야 하는 것. 결국은 사람이 하는 거다. 부적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책 속에서야 심각하고 위험하지만 책 밖의 독자에게는 흥미진진했던, 하지만 진짜로 겪는다면 당사자에게는 엄청나게 무서웠을 이야기들. 재밌게 읽었다. 제발 현실에서는 부적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8. 편의점(유기농볼셰비키,류연웅,이아람,정세호,이산화. 안전가옥. 2020. 302쪽)

: SF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 너무 뻔해서 계속 읽을지 고민하다가 읽었는데, 두번째 작품도 내 취향이 아니어서 더 망설였지만 그 뒤의 세 작품이 다 내 취향이어서 계속 읽길 잘했다 싶었다. 가장 좋았던 건 이아람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이산화의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는 연작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곽재식. 비채. 2022. 304쪽)

: 이 작가는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고는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용두사미. 나와는 안 맞는 듯. 게다가 현실 조롱과 비판을 위한 블랙 코미디라는 건 알지만 낮에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을 저녁에 책에서 고대로 읽는 건 짜증난다. 최소한의 가공조차 안 하는 거, 좀 게으른 거 아닌가?



10.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조우리. 문학동네. 2025. 208쪽)

: 고등학교 2학년 락영. 중간고사가 끝난 날에도 스터디 카페에 왔다. 그런데 같은 반 지유가 다가온다. 가출을 했다는 지유의 얘기를 밤을 새며 들어준 뒤 함께 스터디 카페를 다니며 친해진 두 사람. 사실 락영은 서울대 입학이 목표이고, 이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부를 하는 건 몽상가인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다. 종로 뒷골목에서 적자만 보는 낡은 LP바 '첼시호텔'을 운영하는 아버지. 한때는 엄마도 함께 운영했지만 엄마는 현실을 위해 공무원이 됐다. 지유와 우정을 나누던 어느날, 지유의 책상 위에 갯지렁이가 잔뜩 올려져 있는 사건이 발생하고, 반장인 락영은 범인을 찾고 싶어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사건을 덮고 싶어한다. 지유를 보호하고 싶은 락영을 같은 반 남학생 김도영이 슬쩍 도와주고, 셋은 점점 친해진다.


딱 고등학생다운 상큼하면서도 씁쓸하고 귀엽지만 짠한 우정 이야기. 사실 락영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내 입장에선 가만히 있는 락영을 흔든 지유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유로서는 그나마 락영과의 우정이 숨구멍이었겠지. 가엽고 안타까운 아이들. 그래도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훌쩍 성장한 둘이 자랑스럽다. 특히 락영의 마음이 편안해 진 게 정말 다행이다. 지유는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셋이 다시 만나 지금과는 또다른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져서 오랜만에 남의 이야기에 행복했다. 



11. 메리 제인의 모험(호프 자런, 허진 역. 김영사. 2025. 480쪽)



12. 세 개의 푸른 돌(은모든. 안온북스. 2025. 283쪽)

: 학교 앞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아이를 주면 대가를 치르겠다는 현수막이 걸린다. 엄마를 잃은 루미에게 아빠는 그 얘기를 꺼낸다. 이 어이없는 대화를 친구 반희에게 해주는데, 늘 엎드려 있던 전학생 현이 끼어든다. 너희 아빠는 자기 편하려고 널 팔아먹겠다는 거냐고. 10년 후, 간호사로 동네 병원에서 일하는 루미에게 현의 연락이 온다. 반희와 연락이 끊겼다고, 너는 알고 있냐고.


우정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라고 보는 게 맞을 듯. 이런 가족 관계도 있는 거지 하며 읽었고 때때로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사실 모든 의문과 답답함은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해소됐다. 제주의 가믄장애기 설화는 잘 몰랐지만 심청전에 대해서는 나도 불만이 많았기에 이 이야기가 더 좋아졌다. 그래도 과격하지 않게 부드럽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어쩌면 세상의 많은 가족 문제는 그렇게 그냥 흐지부지 지나가겠지 싶어서 한숨도 나왔다. 앞에서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을 얽어매는 가족의 문제를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맞을 거 같다.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 



13. 살인자의 쇼핑몰 3(강지영. 자음과모음. 2025. 184쪽)

: 2권에서 편의점 전투 후 사라진 삼촌 정진만. 지안은 엄청난 양의 피와 지워진 CCTV 녹화분을 보고도 삼촌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지만 옐로코드의 수장인 '수전'은 정진만의 죽음을 확신하는 듯 하다. 하필이면 이때 딱 맞춰 나타난 그녀가 의심스럽고 게다가 그녀가 데려온 '그림책'이라는 지안 또래의 여자도 의심스럽지만 마비된 머더헬프의 서버부터 복구하고 쇼핑몰을 운영해야겠기에 지안은 그림책과의 동거를 받아들인다. 브라더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려는데, 그림책은 계속 거슬린다. 삼촌과 머더헬프를 소재로 가공이나 숨기는 것도 없이 웹툰을 그리는 것도, 정진만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도, 게다가 지난 몇 년간 정진만이 그녀의 웹툰 시나리오 작업을 도와줬다는 것도.


이렇게 마무리될 줄은 몰랐다. 지안의 입장에선 그나마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정진만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렇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정진만이었다는 게.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모든 일의 시초는 뭐였을까 궁금했거든. 암튼 앞으로 이 시리즈가 되살아날 일은 없다는 게 시원섭섭하다. 이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겠다.



14. 돌아온 아이들(김혜정. 현대문학. 2025. 164쪽)

: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열두 살 담희는 말문을 닫았다. 이런 담희 앞에 또래로 보이는 민진이 나타나는데, 담희 아빠의 이름을 정확히 대면서 자신의 오빠라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담희 아빠는 민진이 30년 전 실종된 자신의 여동생임을 확인하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금도 자라지 않은 모습에 당황하지만 곧 병원에 계신 자신과 민진의 엄마이자 담희의 할머니에게 데려간다. 사실 민진은 그동안 '마인계'에 있었다.


독특한 성장소설이다. 가정폭력이든 그외의 개인의 문제이든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를 마인계로 데려가 살게 하는 건 어쩌면 아이에게 나쁘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모든 걸 외면한 채 살아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 진짜 성장은 마인계가 아닌 인간계에서만 이루어지니까. 그렇다고 마인계로의 도피가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커다란 문제 앞에 선 사람에게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곳에 진심으로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15. 삼나무에 내리는 눈(데이비드 구터슨, 노혜숙 역. 피니스아프리카에. 2025. 508쪽)



16. 호러(김혜영,권하원,배예람,경민선,이로아. 안전가옥. 2021. 270쪽)

: 공포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가벼운 기분으로 집어들었는데 뜻밖에 첫번째 작품 <습습 하>가 꽤 인상깊었다. 읽을 땐 그저 공포스러웠는데 읽고 나니 슬펐다. 그러다 두번째 작품이 기대에 못 미쳐 실망스러웠는데 다행히 세번째 <엔조이 시티전>이 정말 내 취향이었다. 그 뒤의 두 작품도 좋았지만 <엔조이 시티전>만큼 집중해서 읽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민선, 이로아 작가를 기억해 둬야겠다. 



17. 퀸스 갬빗(월터 테비스, 나현진 역. 연필. 2021. 512쪽)

: 여덟 살 베스는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들어간다. 보육원에서는 매일밤 신경안정제를 주고 그걸 먹으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베스는 어느날부터 신경안정제가 더이상 지급되지 않자 불안해진다. 수업중 우연히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경비 아저씨 샤이벌이 혼자서 체스를 두고 있는 걸 보게 된 베스는 흥미를 느끼고, 샤이벌에게서 조금씩 체스를 배운다.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 베스. 열두 살에 휘틀리 부부에게 입양된 베스는 꾸준히 체스를 연습하고, 얼마 뒤 휘틀리 씨가 부인을 떠난다. 베스는 처음으로 체스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이고, 대회에서 탄 상금으로 휘틀리 부인과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베스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체스판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즐거웠다. 그깟 편견따위 던져버리라지. 물론 어린 나이에 그 무거운 압박과 긴장 속에서 불면에 시달리고, 신경안정제에 집착하고, 부모의 사랑보다는 어정쩡한 애정에 만족해야만 했던 건 안쓰러웠다. 하지만 베스는 이 모든 걸 넘어, 자기 자신마저 극복하고 진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정말 좋았다. 사실 체스에 관해서는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읽기 전에 좀 긴장도 했고 읽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 책 속의 수많은 체스 설명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했어도 베스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18. 한 방울의 내가(현호정. 사계절. 2025. 264쪽)

: 이 작가의 독특한 색이 보이는 단편집. <연필 샌드위치>와 <청룡이 나르샤>의 k얘기는 아주 잠깐 이어졌다. 인물들의 정체가 모호하고 그들의 삶 또한 분명치는 않지만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방향을 정해 나아간다. 가장 좋았던 건 <청룡이 나르샤>.


"......당신에게 가려구요." <청룡이 나르샤>



19. 위치스 파이터스(전삼혜. 안전가옥. 2023. 188쪽)

: 전편 <<위치스 딜리버리>>에서 수습 마녀로 일하고 있던 보라. 이제 스무 살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대충 점수 맞춰 간 대학 생활에는 적응이 안 되고, 마녀 일을 잘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능력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 와중에 윤정은 주 영역인 성남시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간신히 수습 기간을 연장하긴 했지만 막막한데, 저주 용품 판매가 급증한다. 이를 확인하려는 보라는 초능력자 교육기관인 드림학교에서 한 학생을 마주치고, 예전에 알던 초능력자 미카엘라에게 연락한다.


역시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작가. 미카엘라는 혼자만의 고민 때문에 우정에 신경 쓸 틈이 없고 윤세이는 미카엘라가 소중한 만큼 서운함을 숨길 수 없다. 게다가 둘 다 스스로 가진 엄청난 힘에 비해 제어하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점에서 여타 평범한 사춘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다치지 않고 크는 아이는 없지. 미카엘라와 그 친구들 뿐 아니라 보라도 성장한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막연히 기다리는 대신 한걸음 나아가기로 한 보라를 응원하고 싶고, 보라의 이야기가 계속됐으면 좋겠다. 사실 전작이 이번 작품보다 더 흥미진진하기는 했지만, 후속작도 기대된다.



20. 케임브리지 살인사건(케이트 앳킨슨, 임정희 역. 문학사상사. 2015. 404쪽)

: 1970년대, 수학자 빅터의 막내딸 네 살 올리비아가 실종된다. 더운 여름밤 언니 아멜리아와 마당 텐트에서 자던 올리비아는 다음날 새벽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20여년 후 변호사 테오는 둘째 딸 로라가 대학 진학 전 자신의 로펌에서 인턴일을 하도록 한다. 로라의 첫 출근날, 작은 열차 사고로 로라와의 점심 약속에 늦은 테오가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정체불명의 남자가 침입해 로라를 살해한 후였다. 아무도 그 남자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그 남자는 공격당한 로펌 대표를 도우려는 로라를 향해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다. 한편 어린 나이에 혼전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한 미셸은 남편 키스의 구질구질한 농장 살림과 독박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학업을 포기한 걸 후회하며 어떻게든 예전 삶을 되찾고 싶지만 남편은 도움은커녕 폭력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겨우 어린 딸을 재워놓고 사랑하는 동생의 방문을 기다리던 주말 오후, 남편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와 딸을 깨우고 항의하는 미셸의 뺨을 후려치자 격분한 미셸은 남편에게 도끼를 휘두른다. 첫번째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 후, 아멜리아와 줄리아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올리비아와 함께 없어졌던 올리비아의 애착인형을 발견하고 탐정 잭슨 브로디에게 의뢰한다.


세 사건이 긴밀하게 얽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따로인 것도 아니고. 각 사건들에서 뜻밖의 진실과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상실은 마음 아팠다. 아멜리아와 줄리아처럼, 테오처럼 그리고 잭슨 브로디처럼 상실은 평생에 걸쳐 잃어버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그래도 잭슨처럼 신실한 사람이 진실을 좇아 준다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겠지. 이 시리즈가 계속되길 바라지만, 요원하다는 거 알고 있다. 



21. 사는 사람(정이현. 위즈덤하우스. 2025. 96쪽)

: 입학 경쟁이 치열한 학원의 상담실장 다미. 이 학원 직원이라는 것 만으로도 주위의 보는 시선이 달라질 정도이다. 다미는 온라인에서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모임에 합류했다가 거기서 우재와 만나게 되고, 우재와 주말마다 고급 아파트 매수 의향이 있는 척 부동산 투어를 다닌다. 사실 다미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춰 무난하게 사는 게 맞는 거라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리스트를 만들고 임장지에 따라 옷차림까지 신경쓰는 우재가 점점 불편해진다. 한편 학원에서 다미는 한 학생으로부터 시험지를 미리 보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실장님만은 이해해 주실 거 같다면서.


제목의 '사는'은 중의적인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 인생을 사는, 집을 구매하는, 집에 사는. 다미는 집을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집에 살고 싶었던 거고, 인생을 살고 싶고 (학생의)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게다가 자신의 선의가 의도하지 않은 대가를 가져왔다면... 그래도 다미의 앞으로의 사는 일은 잘, 무난하게 흘러갈 것이다. 다미는 방향을 아니까. 짧지만 긴 생각을 하게 하는, 잊고 있었던 고민을 불러오는 책이었다.



22.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이경희,전삼혜,임태운. 안전가옥. 2022. 322쪽)

: 메타버스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 꽤나 강렬해서였는지 상대적으로 두번째 작품이 좀 약하게 느껴졌다. 원래는 전삼혜 작가의 작품을 읽으려고 대출했는데. 게다가 전삼혜 작가의 주인공들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와 달리 줏대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경희와 임태운의 작품은 내용면에서 강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던졌을 때 당연히 나오는 내용들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세 편 다 즐겁게 읽었다. 



23.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김원희 역. 북스피어. 2022. 392쪽)

: 엘리자베스 여왕은 90세 생일 연회를 가장 좋아하는 성인 윈저에서 주최하기로 한다. 각계 인사들이 모인 밤, 스물네 살 피아니스트 브로드스키는 잘생긴 외모와 활기찬 성격으로 좌중의 인기를 끈다. 여왕까지도 그와 춤을 춘 후, 여왕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브로드스키가 죽은 채 발견된다. 알몸으로 옷장 문에 목을 맨 모습으로. 자살이나 사고사가 아닌 살인 사건이라는 증거가 발견된 후, 경호국과 경찰청에서 사건 수사에 나서는 와중에 여왕은 보조비서인 젊은 여성 로지를 불러들여 은밀한 임무를 맡긴다.


(약스포)

저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얼마나 존경하는지가 보이는 픽션. 거기에 더해 정치판의 남성들이 얼마나 여성 정치인에 대해 편견과 우월감을 갖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작중에도 언급되어 있듯 여왕은 남초 사회인 정치판에서 70년이 넘게 버텼고, 양차 대전을 비롯 수많은 위기를 넘겼으며 다른 국가일지언정 군주로서의 마음가짐과 암묵적인 존중, 자기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만 그럴 지는 모르겠으나 남성 정치인들에게 여왕은 그저 나이든 여성일 뿐이고, 시대에 뒤쳐진 할머니일 뿐. 이게 첫번째로 화났던 부분이다. 또한 여왕은 보조비서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으면서도 그걸 본인이 공표하거나 알리는 대신 멍청하게 엉뚱한 곳에다 삽질을 하고 있는 경호국장에게 떠먹여 준다. 이게 사실 이 소설의 가장 확실한 차별점이자 두번째로 별로였던 부분. 여타 미스터리였다면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았겠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약간의 단서를 가지고 모든 걸 꿰뚫어 보면서도 정작 공적은 엉뚱한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더 잘 활용하려는 모습은 여왕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힘들 듯. 비록 이 책은 픽션이라 여왕의 실제 성격이 반영되었는지, 혹은 실제 여왕의 행동 패턴이 이러할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 속 엘리자베스 여왕은 충분히 존경 받을 만 했다. 즐겁게 읽었고, 이 저자가 쓴 엘리자베스 여왕 시리즈가 두 권 더 있는 것 같은데 나머지도 번역출간됐으면 좋겠다.  



24. 성리학 펑크 77(김현재,민경하,오경우,유파랑,이준,전삼혜,진산,하늘느타리,호인. 황금가지. 2023. 340쪽)

:  SF 단편집.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없는 듯. 그냥 편하게 읽었다. 첫번째 작품이 답답하면서도 꽤 재밌어서 만족스러웠고 표제작도 괜찮았다. 사실 난 전삼혜 작가 때문에 이 작품집을 집어들었는데 전삼혜의 <나무의 노래>는 나무들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배경 지식이 약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무들이 서로 뿌리를 얽고 곰팡이균을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하는 wood wide web을. 비록 작중 화자는 자신들이 나무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다 좋았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았던 건 전삼혜.



25. 엔딩 보게 해주세요(김보영,김성일,김인정,김철곤,전삼혜. 요다. 2020. 268쪽)

: 게임 소재의 앤솔러지. 게임을 전혀 안 하고 게임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도 한 편 빼놓고 다 재밌었다. 게임을 안 해도 게임 스토리는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김보영 작가의 작품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거였는데도 다시 읽어도 재밌었고 전삼혜 작가는 왠지 뭉클했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건 전삼혜.



26. 브로큰 컨트리(클레어 레슬리 홀, 박지선 역. 북로망스. 2025. 392쪽)



27. 더 허니스(라이언 라 살라, 이진 역. 아르테. 2024. 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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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허니스
라이언 라 살라 지음, 이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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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의 쌍둥이가 죽었다. 여름캠프 에스펜에 가 있었던 캐럴라인이 어느밤 갑자기 돌아와 자고 있는 나를 공격했고, 그녀를 피하다 함께 2층에서 샹들리에에 매달렸다가 추락했는데 그녀만 죽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에스펜의 세 소녀들 브리아, 시에라, 미미. 에스펜의 숙소H에 캐럴라인과 함께 있던 그녀들은 캐럴라인의 시신에 벌 모양 귀걸이를 몰래 채우고, 캐럴라인의 귀에서는 곧 벌이 날아오른다. 기절했다 깨어난 나는 캐럴라인의 죽기 직전 행동이 석연치 않았음을 기억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에스펜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래전 젠더플루이드인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에스펜에. 


"그러나 그게 바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라고, 나 자신에게 일깨운다. 캐럴라인이 어떤 애였는지 알기 위해. 그래서 캐럴라인의 마지막 모습으로부터 날 구원하기 위해. 화를 내며 날 공격했던 가짜 캐럴라인으로부터 날 구원하기 위해." 164쪽


마스가 에스펜에 돌아간 건 자신을 위한 거였다. 처음 결심은 캐럴라인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서였지만 에스펜에 도착한 후에도 그리고 와이엇의 도움으로 천천히 적응을 해나가면서도 마스는 그저 숙소H의 그녀들 - 허니스 - 와 가까워질 뿐이다. 그리고 마스에게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들. 소설은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보다 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후반부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들의 아름다운 결속과 대비되는 그들의 집단 행동이. 그리고 마스의 처음 마음과 소녀들의 각성이 더해져 성장이 이루어진다. 여왕 아니 자매의 살해범을 처단함으로써 완성되는 성장 서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매를 사랑하는 것임을, 자매를 구함으로써 나 하나만이 아닌 자매들 전체가 안전해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만 앞으로가 조금 걱정되긴 했다. 과연 마스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아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마스 곁에는 허니스가 있으므로. 손을 꼭 잡은 자매들이 가지 못할 곳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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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컨트리
클레어 레슬리 홀 지음, 박지선 옮김 / 북로망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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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는 영국 시골마을 도싯에서 남편 프랭크, 시동생 지미와 함께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양 떼가 새끼를 낳은지 얼마 안 된 봄날, 길잃은 대형견이 목장 담을 뛰어넘어 들어와 새끼양을 무차별적으로 도살하고, 지미는 총을 들어 개를 사살한다. 마침 뒤쫓아 온 개의 주인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과 아이의 아버지. 베스는 10대 시절 미친듯이 사랑했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게이브리얼을 알아본다. 


읽는 내내 마음 졸였다. 특히 2장 '바비'는 마음이 아파서 천천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바비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바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무섭기도 했지만 게이브리얼과 베스에게 일어날 일도 싫었다. 그래서 2장을 읽다가 참지 못하고 책 맨 뒤의 문장을 확인했다. 해피엔딩이기는 한 거 같아서 맘 놓고 읽었지만, 후반부의 잇단 반전 때문에 마음은 계속 연타를 맞았다. 이건 반쪽짜리 해피엔딩. 가여운 프랭크. 사랑하는 사람의 온전한 일상을 위해 무조건 참고 받아들이는 게 과연 남은 삶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 특정인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모두에게 슬픈 사건이었고 모두가 조금씩 잘못을 했다고는 하지만 왜 수습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가. 


(스포)

사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게이브리얼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이 모든 사건들에서 유일하게 다치지 않은 건 게이브리얼 뿐이지 않나. 비록 명성은 흔들렸을지언정 그외의 대가는 조금도 치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가 정말 미웠다. 망할 게이브리얼. 네가 베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옥스포드에서 그녀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그날밤'을 해명하는 말 한마디라도 하거나 편지라도 썼더라면... 


하지만, 이 모든 비극에도 불구하고 베스와 프랭크의 남은 날들이 아름답기를 나는 바랐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 소설은 그저그런 사회적 신분차이에 따른 사랑 이야기과 그 후의 치정사건이 얽힌 막장 드라마 비슷해 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현실에서 늘 반복되지 않나(현실에 없는 건 프랭크(같은 남자) 뿐). 이 슬픔들에도 불구하고 베스와 프랭크의 삶이 계속될 수 있는 건 둘 사이의 사랑 때문이고, 사랑은 이런 사건들을 견뎌야 하는 인생이든 혹은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도 되는 인생이든 인생을 이어나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이 소설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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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에 내리는 눈 - 펜/포크너상 수상작, 마르틴 베크상 수상작, 앤서니상 최종 후보작
데이비드 구터슨 지음, 노혜숙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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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산피에드로 섬.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이 작고 고립된 섬에 1954년 어부 칼 하이네의 배가 불을 켠 채 떠다니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일반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보안관은 그의 배에 올라 조사하다가 배 옆에 내려진 그물을 올리는데, 그 안에 하이네의 시신이 들어있다. 사고사라고 생각하고 검시를 의뢰한 보안관. 그런데 검시관은 하이네의 옆머리에 난 상처를 보고 전쟁 중 일본군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그같은 상처를 입히던 걸 연상해 내고, 하이네와 토지 문제로 갈등하던 일본계 미야모토 가부오가 용의자로 구속된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의 법정을 오가며, 기자 이스마엘 체임버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범죄 소설인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한 범죄가 아니었다. 읽는 내내 어느 편도 들 수 없었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적국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소에 보내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그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예전처럼 그들을 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백인들은 에고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어할 방법이 없고(226-227쪽), 일본인들은 위대한 생명과의 합일을 추구(227쪽)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하쓰에의 엄마 같은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 그 말은 마치 전체주의 옹호처럼 들린다. 하쓰에가 말했듯, 위대한 생명을 추구하는 그들이 바로 전쟁을 일으켰지 않나.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아무리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해도 지레짐작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일본인이라고 해서, 일본도를 갖고 있다고 해서 살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용의자가 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방적인 우월감과 피해의식은 삶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미야모토 가부오는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의 갈등이 촉발된 계약도 마찬가지다. 법이 언젠가 개정될 거라고 생각하며 미리 계약을 맺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것도 옳지 않다. 


넬슨 것먼슨이 최후진술에서도 말했듯, 비이성적인 두려움은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약점이다. 누가 보안관에게, 산피에드로 주민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진실이 덮이지 않음을 그저 감사해야 할 일이지.


진실과는 별개로, 삼나무 구멍에 갇힌 사랑이, 12년 전에 머문 사랑이 풀려 날아가기를 내내 바랐다. 그래서 하쓰에에게 한 번만 안아달라고 애원했던 이스마엘 체임버스의 사랑이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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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제인의 모험
호프 자런 지음, 허진 옮김 / 김영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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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 미시시피 강 유역, 열네 살 메리 제인은 노르웨이 출신의 자상하고 지혜로운 할아버지와 깐깐하고 엄격한 엄마와 함께 교역소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날 엄마는 남쪽에 사는 동생으로부터 가족 전체에 우환이 닥쳤다며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엄마 대신 메리 제인을 보내기로 한다. 배삯을 사기당하지만 무사히 미시시피 강 중류까지 간 메리 제인은 여선장이 운영하는 걸리니언 호에 오르게 되고, 선장으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아가며 이블린 이모가 사는 곳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모네 사정은 생각보다 매우 심각해서 메리 제인은 온힘을 다해 이모네 가족을 도와야 한다.


(스포 약간)

처음엔 기대감 가득한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곧 슬퍼졌다. 그 시절에 여성 혼자 여행이라니, 얼마나 힘들까. 게다가 첫 장거리 여행이라니,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진짜는 이모네 가족과 합류하면서부터. 사실 여기부터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분명 메리 제인도 열네 살이고, 이모의 첫째 딸은 열다섯 살, 둘째 딸은 열네 살인데 메리 제인은 이모와 동등하게 짐을 나눠지고 집안일을 하는데 두 딸은 어린애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놀거나 꿀 따는 데 따라가거나가 다다. 처음엔 앞 속지의 가계도가 잘못됐나 싶었다. 그 시절이라면, 게다가 집안이 넉넉치 않다면 더더욱 철이 빨리 들지 않나? 엄마는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아빠는 꼼짝도 못하고 몸져 누워있는데 집앞에서 뛰어노는 딸들이라니. 게다가 메리 제인이 식모도 아니고 사촌인데. 여기서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난 메리 제인이 궁금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메리 제인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잠깐 언급된 인물이다. 난 솔직히 기억나지 않았다(나중에 메리 제인과 '삼촌들'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어렴풋이 생각이 나긴 했다). 하지만 메리 제인 자신이 매우 진취적이면서 합리적이고 판단력이 빨라서 그녀의 이야기 자체로 정말 좋았다. 다만 앞 문단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나이 답지 않은 과한 책임감은 마음이 아팠다. 사촌들의 철없음은 이야기 끝까지 계속되고, 메리 제인은 급기야 사촌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이 차라리 자신에게 일어나기까지 바란다. 이 부분에서 또 답답... 그래서 결말이 더욱 좋았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된 메리 제인이. 


내가 읽은 메리 제인은 처음부터 철이 잘 들어있는, 이미 나이에 비헤 성장해 있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이 책의 끝에 메리 제인이 얼마나 더 성장해 있을 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 제인은 성장을 한다, 다른 방향으로. 과한 책임감과 이타심에 짓눌려 있던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걸 찾고 그것을 갖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게 된 게 진짜 성장이 아닐까. 거기에 더해 이제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깊고 지속적인 고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 그간의 경험을 바탕삼아. 때로는 열네 살처럼 또 대부분은 그녀가 속인 나이인 열아홉 살처럼 굴었던 메리 제인. 이야기는 끝났지만 메리 제인의 앞으로의 삶이 기대된다. 미시시피 강의 윤슬처럼 아름답게 빛날 그녀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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