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브뤼노 몽생종, 이세욱 역. 정원출판사. 2005. 606쪽)



2. 목숨전문점(강윤화. 실천문학사. 2015. 216쪽)

: 단편집. 첫 작품을 읽고 판타지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기, 지상에 발 딛고 서 있지만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회피가 아니다. 어떻게든 남은 삶을 이어가 보려고 치는 발버둥. 하지만 해피엔딩은 없다. 그래서, 마음이 쉽지 않았다.



3. 강하고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김슬기. 클레이하우스. 2025. 368쪽)

: 강하고는 드디어 죽음을 결심한다. 배달 노동으로 가까스로 이어오던 삶. 가장 친한 친구라 믿었던 애는 강하고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남자를 낚아채고서도 둘이 계속 하고를 등쳐먹고, 알면서도 호구 노릇을 하던 하고는 이제는 지쳤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철거를 앞둔 옥탑방 구석에 누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세 명의 저승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저 근육들은 뭐지? 저승사자들에게 운반된 하고는 얼마 후 눈을 뜨는데, 정갈하게 정리된 집안이다. 여기가 사후세계인가?


강하고의 성장담. 로맨스도 살짝 있다. 꿈같은 이야기이고, 강하고가 너무나 부러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강하고의 의지. 되고자 하는 모든 걸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근처에만 가도 성공 아닌가. 이 빡빡한 자본주의 사회에선 말이다. 물론 옆에서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하지만 뭐, 없을 수도 있는 거고. 기존에 읽었던 소위 '힐링 소설'과는 결이 좀 다르지만 진짜 힐링을 주는 동화같은 이야기.



4. 바다의 긴 꽃잎(이사벨 아옌데, 권미선 역. 민음사. 2022. 476쪽)



5. 위대한 피아니스트 1.2.(해럴드 C. 숀버그, 박유진 역. 조은아 (감수). 클. 2021. 444쪽, 452쪽)



6. 페드르와 이폴리트(장 라신, 신정아 역. 열린책들. 2013. 200쪽)

: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이야기를 각색한 희곡. 내용은 알려진대로, 의붓아들을 사랑한 페드르와 의붓아들인 (죄없는) 이폴리트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신화에서와는 달리 이 희곡에서 초점을 맞춘 건 인간의 정념. 결국 인간은 애욕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이끄는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다. 그가 전쟁 영웅이든, 고귀한 혈통이든 상관없이(사실 저자는 페드르의 정념에 휘둘리는 혈통을 강조하기는 한다) . 그리고 이 정념은 부수적인 피해마저 낳는다. 사실 이폴리트는 죄가 없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 적국의 공주 아리시도 죄가 없다. 어쩌면 이 정념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테제는 오히려 이들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는다. 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 결국 기득권자의 권위와 권리를 강화하기만 한 결말인 것이다. 비록 그게 정의 실현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지언정. 


당대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인기를 얻었는지와는 별개로, 읽으면서는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와는 또다른 삐딱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7. 운명의 꼭두각시(윌리엄 트레버, 김연 역. 한겨레출판. 2023. 344쪽)

: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페르모이. 이곳에는 퀸턴 가가 있다. 킬네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가문은 대기근 때 토지의 대부분을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준, 영국 출신의 여인 애나 우드컴을 증조 할머니로 두고 있다. 그녀의 증손자인 윌리의 엄마 에비도 영국인이다. 아일랜드는 1차 대전 후 영국에게서 독립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지만 오히려 영국은 아일랜드에 군사를 파견했고, 이들은 결국 킬네이의 퀸턴 가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킬네이 저택이 이들에 의해 불타고 아버지 윌리엄과 윌리의 두 여동생이 사망한 것. 윌리는 엄마와 하녀와 함께 시내로 이사하는데, 엄마는 계속 우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위스키에 점점 더 의존하고 멀리 있는 부모에게서 온 편지를 읽지도 않는다. 이에 윌리의 외조부는 에비의 언니에게 이야기를 해서 윌리의 이모와 사촌 메리언이 방문을 한다. 윌리는 메리언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되지만, 운명은 그들을 함께 두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책을 덮은 후 운명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이끌어가는 운명. 책 제목은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해질 걸 알면서도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인간의 하찮음을 뜻하지만 인간은 그래서,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할 수 있다. 윌리로 하여금 킬네이를 떠날 수 밖에 없게 한 운명, 메리언을 등질 수 밖에 없게 한 운명. 분명 윌리는 그러지 않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러지 않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나 윌리는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 바로 그 지점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 윌리의 방법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작은 존재인 인간이 운명을 감내하는 방식인 것. 



8. 복수의 여신(마거릿 애트우드,산디 토츠비그,시엔 레스터,카밀라 샴지,엠마 도노휴,커스티 로건,캐럴라인 오도노휴,헬렌 오이예미,린다 그랜트,키분두 오누조,엘리너 크루스,수지 보이트,앨리 스미스,레이철 시퍼트,클레어 코다,스텔라 더피, 이수영 역. 현대문학. 2024. 368쪽)

: 주로 멸칭으로 쓰이는 'Virago'를 주제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진짜 영웅적이고 불의에 맞서는 여성상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앤솔러지이다. 사실 기대만큼 세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온화한 거 아닌가? 엄청 부드럽게, 많이 봐주는구만. 그래도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다 인상깊었지다. 가장 좋았던 건 「보리수나무의 처녀귀신」. 「진짜 사나이」와 「가사 고용인 노동조합」도 좋았다. 



9. 느릅나무 밑의 욕망(유진 오닐, 신정옥 역. 범우사. 2004. 178쪽)

: 작가의 초창기 희곡. 뉴잉글랜드의 척박한 농장. 농장주인 캐봇의 세 아들 중 첫째 시미언과 둘째 피터는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일을 도맡아 온 셋째이자 배다른 동생 에벤이 현금을 줄 테니 농장의 형들 몫을 자신에게 팔고 골드 러쉬가 한창인 캘리포니아로 떠나라고 하자 둘은 흔쾌히 떠난다. 둘이 떠나던 날 여행을 갔던 아버지 캐봇이 세번째 부인은 에비와 함께 돌아온다. 에벤은 농장의 소유권을 당당히 얘기하는 에비가 싫지만 곧 욕정에 굴복하여 에비와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고, 에비는 곧 임신을 한다. 캐봇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이 태어나자 아이에게 농장을 물려줄 거라고, 에벤의 몫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는데 이 농장이 돌아가신 엄마의 농장이라고 생각하는 에벤은 이 얘기를 듣고 격분한다.


처음부터 대사들이 꽤 거칠어서 살짝 놀람과 흥미가 동하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시작했다 - 교정교열이 너무 엉망이어서 짜게 식었다. '숨겨 논(35쪽)', '일부로(36쪽)' 같은 게 너무 많다. 이걸 제대로 교정해서 이후에 신판이 출간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하필이면 이 판본을 사서... 사실 제목만 봤을 때는 그래도 낭만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을 줄 알았다. '나무 밑'이라잖아. 하지만 처음 무대 배경 설명에서부터 내 짐작은 틀렸음이 드러났고 - 농장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를 상상하니 미리부터 이들의 욕망이 어디로 흐를 지 걱정스러웠다. 당대에 뿐 아니라 현대에도 충분히 문제적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파멸에는 충분히 타당했다. 



10. 닥터 지바고 상. 하(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박형규 역. 열린책들. 2001. 416쪽, 520쪽)



11. 한 사람에게(김멜라,김보영,김숨,박솔뫼,정영선. 곳간. 2026. 228쪽)

: '한 사람에게 띄우는 편지'로,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대체로 다 마음이 아팠다. 그 중 가장 날 힘들게 한 이야기는 김보영, 「축제」.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흘린 눈물이 책 속으로 흘러들어가 리로의 길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몇날 며칠이고 울 수 있는데...



12. 하드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마크 트웨인, 전봉룡 역. 신원문화사. 2005. 303쪽)

:  표제작인 단편 한 편과 중편 「고난의 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은 전국에서 가장 정직한 마을이라는 하드리버그에 원한을 가진 한 남자가 마을 전체를 타락하고 그걸 폭로하기 위해 일을 꾸미는 내용이다. 인간이 가진 욕심을 이용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한편으로는 그저 인간적일 뿐인 주민들이 벌이는 소동이 가벼운 문체로 보여진다. 사실 정말 재밌었던 건 「고난의 길」 . 골드 러쉬 시대 은과 금을 찾아나선 주인공의 좌충우돌인데, 한숨이 나오면서도 저자의 블랙 유머에 계속 피식거리게 되는 유쾌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겪는 모험 뿐 아니라 희한한 자연 현상들에 더해 심지어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까지 이야기되면서 저자 특유의 신랄한 사회 풍자와 유머가 독자를 즐겁게 한다. 딱 트웨인다운 소설.



13.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네이선 밸링루드,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6. 416쪽)

: 1930년대 화성 주거지구. 아버지와 주방엔진 왓슨과 함께 식당을 꾸려가고 있는 열네 살 애너벨은 마을의 영화 상영을 앞두고 식당 문을 일찍 닫으려하는데, 수상한 남자가 와서 커피를 청하며 시비를 걸고 결국 그는 애너벨과 아버지를 위협하여 가게의 먹을 것과 물, 연료를 몽땅 털어간다. 그의 이름은 사일러스. 애너벨은 그들이 가져간 것들 중에 1년 전 지구로 떠난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실린더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무기력하고 유약한 아버지가 가게에 침입한 다른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사고로 사람을 죽이고 유치장에 갇힌 틈을 타 직접 그 실린더를 찾으러 가기로 한다. 1년 전 지구에서 도착해서 멈춰 있을 뿐인 우주선 조종사 조가 사일러스 일당 중 일부와 접촉하는 걸 본 애너벨은 그에게 앞장을 서도록 협박하고, 왓슨의 다리를 무한궤도로 개조한 뒤 조가 소개한 사막 배달부 샐리와 함께 붉은 사막으로 향한다.


스페이스 웨스턴이라기에 읽을까말까 망설였다. 난 웨스턴은 별로고 스페이스도 딱히... 그런데 이건 정말 재밌었다. 사실 배경이나 설정 등은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지구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화성을 모르니. 중요한 건 애너벨의 성장 서사였다. 어떤 어른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아이라는 이유로 정보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으며 설명을, 정의구현을 요구하는 아이의 눈도 바로보지 못하면서 묵살하기만 하는 상황에서 애너벨은 움츠러들고 때론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자신의 길을 간다. 울고 싶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고 싶지만 자기도 모르게 울먹이고 자기도 모르게 숨기도 하면서도 목적을 잃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 애너벨. 그리고 이 대견한 소녀의 마지막 선택까지. 심드렁하게 시작했다가 뭉클하게 끝냈다. 부디 애너벨이 끝까지 평안하길. 



14. 도깨비불 게스트하우스(범유진. 모모. 2026. 316쪽)

: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진 언니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변호사에게 전해 들은 모미. 180일 동안 언니가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조카를 돌보면 돈을 준다는 말에 어차피 대학 기숙사에서 쫓겨날 상황이던 모미는 산 속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그런데 열네 살 조카는 눈도 잘 안 마주치고, 게스트하우스 건물도 좀 이상해서 갑자기 벽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튀어나온다. 사실 이곳은 사연있는 요괴들이 머무는 곳. 가끔 이곳을 발견하는 인간들도 묵어가는데, 아무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심연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요괴들은 이렇게 방문하는 인간들의 어둠을 흡수한다.


그저그런 힐링 소설이면 어쩌나, 나 이 작가 좋아하는데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인간 군상들도, 요괴들도 또 그들 각각의 사연도 어느 하나 전형적이거나 짐작 가능하지 않았고 캐릭터들이 모두 생생했다. 못된 인간이라고 모두 개과천선하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사이다가 폭발하듯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입체성, 누구도 완벽하게 착하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악하지 않은 모습들을, 약하디 약하지만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잘 스케치했다. 모미와 언니의 사연도 현실적이면서 환상적이었고. 즐겁게 읽었다. 뒤의 작가의 말에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들을 먼저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책 읽기 전에 조금이라도 스포 당하는 게 싫어서 알라딘도 안 보고 읽었더니 작가가 상상했던 요괴들과 내가 상상한 요괴가 엄청 차이가 컸다. 이 책의 후속작이나 프리퀄이 나왔으면 좋겠다.



15. 첫 여름, 완주(김금희. 무제. 2025. 224쪽)

: 성우 일을 하는 열매. 친하게 지내던 언니 고수미가 돈을 빌린 후 잠적하고, 집 보증금까지 날린 열매는 고수미의 고향 마을에 가보기로 한다. 수미가 늘 얘기했던 완주. 그곳으로 향하던 시골 버스에서 어딘가 이상한 동네 청년 어저귀를 만나고, 매점과 장의사를 같이 하는 수미 엄마 집에 살면서 매점을 돌보고 동네 사람들과 조금씩 안면을 튼다. 옆집 중학생 한양미, 완주로 내려와 틀어박힌 중견 배우 정애라, 완주 개발에 적극적인 수상쩍은 흰옷 신사 등.


(스포)


어저귀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좀 담백한 사람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굳이 설탕 안 뿌려도 맛있을 거 같았다구요. 그치만 위로가 되는 따뜻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역시나 결말 부분도 어저귀... 뭐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지. 완주라는 마을에서 아직도 열매가 그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16. 하우스메이드 3(프리다 맥파든, 정미정 역. 북플라자. 2025. 488쪽)

: 밀리는 엔조와 결혼해 벌써 첫 아이가 12살이다. 둘째는 7살. 뉴욕의 작은 집에서 비좁게 살던 가족은 무리를 해서 롱아일랜드의 낡고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오는데, 이사 첫날부터 옆집 여자는 엔조에게 추파를 던진다. 엔조 앞에서 밀리를 깔아 뭉개는 것도 서슴치 않고. 게다가 둘째 스쿨버스 배웅을 나간 아침, 둘째와 동갑인 아들이 있는 또다른 동네 엄마는 음모론과 편집증을 숨기려 하지 않으며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옆집 여자네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간 밀리네는 억지로 그 집 가정부를 자기 집에 일주일에 한 번 들이게 되는데, 이 여자가 좀 이상하다. 밀리의 물건을 뒤지는 것 같고, 밀리를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게다가 밤에는 집에서 이상한 삐걱 소리도 난다.


초반부터 엔조 때문에 짜증나서 혼났다. 정말 전형적으로 눈치없고 속 터지게 하는 스타일. 예전 시리즈에서 읽었던 단호하고 결단력있는 모습은 어디갔지? 밀리가 느끼는 감정들도 주위에서, 인터넷에서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다. 대체 이 이야기가 이전 시리즈와 연속성이 있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사건의 해결도 뭐... 마지막에 작은 반전(?) 때문에 그나마 '하우스메이드'라는 제목을 쓸 만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읽으면서 그 부분을 짐작 못 한 것도 아니다. 추리 실력이라고는 바닥인 내가 알았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겠지. 이 시리즈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였다. 



17. 고양이가 정답이다(장우석. 나비클럽. 2026. 240쪽)

: 연작 소설집. 고등학교 수학교사 주관식이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겪는 이야기들이다. 사건 해결에 수학이 중요한 키가 된다. 현실에 있을법한 이야기들이지만 또 현실에선 그렇게 확실하게 해결되지 못할 거 같기도 하다. 대체로 대부분은 해피엔딩이라 잘 읽었지만 개중에는 새드 엔딩도 있다. 그게 현실이니까. 아니, 현실에는 새드 엔딩이 더 많긴 하지만. 주관을 가진 고등학교 교사이자 고양이 탐정으로도 활약하는 주관식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18. 도깨비 사냥(임이정. 안전가옥. 2024. 288쪽)

: 어린 시절, 집에 불이 났다. 수오는 형을 따라 숲에 가기 위해 집을 나왔는데 부모님은 숲에 도깨비가 있다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형은 괜찮다고 했다. 결국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둘만 남은 형제는 삼촌 집에서 학대를 견디며 힘겹게 살아오지만 쫓겨나 쉼터를 전전하고, 어느 순간 형 태오는 사라져 수오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형을 찾아 나선 수오는 마지막으로 형과의 접점이 있던 조아랑을 찾아서 그녀를 미행한다.


읽으면서 인생의 순간마다 해야만 하는 선택에 대해 생각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또다른 잘못된 선택을 부르고야마는 연쇄성에 대해. 처음 한 번, 그 결정적인 순간에 태오가 솔직했더라면 형제는 과연 어떤 생을 살았을까? 태오는 왜 그렇게 착하면서도 악한 걸까? 동생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동생이 뭘 원하는지는 왜 생각 안 하는 거지? 그냥, 인생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젊을 때의 착각 때문인가? 어쩌면 이런 얘긴 현실에서 흔할 지도 모른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이걸 그냥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안타까워 하고 말 건가? 



19.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384쪽)

: 저자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 중 두번째. 난 첫번째는 안 읽었다. 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다. 중간중간 작은 에피소드들이 나오긴 하지만 대체로 저자가 고찰하는 '옛날' - 과거나 추억과는 구분되는 -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옛날을 소환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저자가 다룰 수 있는 모든 언어 - 그리스어, 라틴어 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히브리어에 더해 저자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어(프랑스어) 까지 - 를 동원해 옛날을 이야기하는데, 각 챕터는 짧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문장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 책을 읽는 자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위의 책을 읽고 머리와 가슴이 쓰려서 집어들었는데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이 책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약간의 답을 얻은 느낌. 특히 "물고기는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48쪽)"는 문장은 오랫동안 입 안에서 굴렸다. 



20. 라비우와 링과(김서해. 위즈덤하우스. 2024. 128쪽)

: 대학생인 주영은 알바로 정신없는 와중에 전공과목에서 D를 받는다. 기숙사에서 쫓겨날까봐 걱정이 된 주영은 담당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성적을 정정해 줄 순 없지만 자신이 하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에 지원하면 다음 학기에 유리할 것이라고 권하고, 주영은 어쩔 수 없이 합류하는데 그곳에서 방학 동안 기숙사 룸메이트인 이네스와 마주친다. 사실 방학 동안 있을 기숙사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짐을 한가득 쌓아놓은 채 메모만 한 장 남기고 일본 여행에 가버린 이네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마주친 이네스는 상냥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독자들이 제목을 읽고 '라비우는 누구고 링과는 누구야?'라고 생각하길 바랐다는데 정확하게 내가 그랬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독자도 많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아름답게, 단어 뜻 그대로 상냥하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이 좋았다. 일상 속의 특별한 순간. 숨가쁜 삶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주영에게 이런 순간들이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21. 작은 종말(정보라. 퍼플레인. 2024. 372쪽)

: 단편집. 출간된 지 좀 된 작품집이라 상당수의 작품들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것들이었지만 다 다시 읽었고, 다 좋았다. 최근 작품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비판을 하는 것도 좋았고. 가장 좋았던 건 「은둔자의 영혼」.



22. 마음만 먹으면(장진영. 자음과모음. 2021. 128쪽)

: 세 편의 단편. 첫번째 작품 「곤희」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작품들도 각자의 느낌으로 다르게 인상적이었다. 각각의 소재로 더 긴 이야기를 읽고 싶을 만큼. 그리고 각 작품 등장인물들의 미래를 알고 싶을 만큼. 



23. 안나 O(매슈 블레이크, 유소영 역. 문학수첩. 2025. 504쪽)

: 법 심리학자이자 수면 연구가인 벤. 4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안나 O'사건의 의뢰를 받는다. 안나는 상류층 출신 여성으로, 가족과 놀러 갔던 농장 오두막에서 함께 동업하던 친구 둘을 죽이고 부모에게 '미안, 내가 죽인 거 같아'라는 메시지를 남긴 후 잠에 빠져들어 4년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있다. 대중들은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을 당시 의식이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그렇다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며 아직도 격렬히 토론 중이다. 정부에서는 국제인권위원회에서 안나의 석방을 촉구함에 따라 서둘러 안나를 깨워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서 벤이 투입되는 것이다. 안나는 벤이 일하고 있는 런던 한복판의 수면 클리닉으로 이송된다.


'체념증후군'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봤는데, 의학적으로 인정된 용어는 아닌 것도 같다. 다만 이 책 본문에서 벤이 언급하는 스웨덴에 들어온 난민 아동 이야기는 진짜인 듯 하다. 이 사례는 마음 아프지만 안나의 사례는 좀 이상하긴 하다. 오랫동안 몽유병에 시달린 안나는 자신이 자는 도중 폭력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사건 직후 부모에게 문자까지 보냈다. 그럼 그녀는 의식이 있는 상태였을까 아니면 몽유병 증상인걸까? 사실 벤이 안나를 깨우기까지 긴 얘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안나는 꽤 적절한 시점에 깨어나고 그 뒤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론 부분이 지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부차적인 여러 사건들과 과거 얘기 때문에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스릴러들처럼 속도감이 있지는 않다. 게다가 부수적인 피해들이 좀... 뭐랄까, 억울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읽어볼 것 같다. 



24. 카카듀(박서련. 안온북스. 2024. 360쪽)

: 1920년. 화자 이경손은 사촌 누이가 남편이 있는 상해로 아이 여덟을 데리고 가는 길을 도운다. 이때 경손은 신학교를 나와 영화학교에 들어가려던 참. 한때 존경하고 따랐던 매형은 3.1에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상해로 피신했고 누이 또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나왔다. 그나마 신문을 통한 모금 운동으로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여 이주하는 참에, 경손보다 한 살이 많은 첫째 조카 미옥은 경손에게 "에수보다 예술"이라는 말을 던진다. 6년 후, 이제 영화감독이 된 경손은 부산에 내려와 관부연락선을 찍으려 하는데 마침 터미널에 고운 여성이 지나간다. 이는 이름을 '앨리스'로 바꾼 미옥이었다. 사실 미옥은 포와(하와이) 생으로 미국 여권을 갖고 있는 미국인. 결혼하고 이혼 해 아이를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미옥 아니 앨리스. 그리고 1년 후, 경손의 새 영화 오디션장에 앨리스가 나타난다. 앨리스는 경손에게 끽다점을 차릴 거라면서 동업을 제안하는데...


경손의 마음을 따라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내가 그 시절 그곳에 살았다면 그러했을 듯. 물론 딱 경손과 같은 집안과 성장 배경을 가졌다면 말이다. 아마 난 그 시대에 태어났어도 그렇게 돈 많이 쓰는 예술가 노릇은 못 했겠지... 화자가 경손이기에 그의 눈으로 본 앨리스는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아무리 미국 국적을 가졌을지언정 여성으로서 그만큼의 활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래서 이들이 다 실존 인물이라는 데에 놀랐다. 다 읽고 나서야 알았지뭐야. 나운규외 심훈, 박헌영, 이애리수 등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그냥 시대상과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하 가져다 쓴 건 줄 알았는데 꽤 근거 있는 언급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특히 앨리스가 실존 인물이어서 좋았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앨리스와 같은 인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PS.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희곡은 읽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책에 몰입할 수 있었지 싶다. 하지만 희곡의 내용을 알았더라도 이 책이 재미 없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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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스타코비치, 그 삶과 음악(리처드 화이트하우스, 김형수 역. 포노. 2014. 148쪽)

: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개괄하며 그에 따른 그의 삶을 살핀다. 사실상 그의 삶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정보에 지나지 않는 느낌. 저자는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은 안 읽은 듯 하다. 회고록을 훑어만 봤어도 알 법한 정보들을 (내 기준으로는 ) 틀리게 써 놓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뭐, 회고록을 아예 안 믿었을 수도 있고). 예를 들면 "쇼스타코비치도 현역 입영은 거절당했지만 소방수로 자원했고(44쪽)" 같은. 쇼스타코비치는 자원하지 않았다. 자원을 강요당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작품들을 위주로 정리해 놓은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초심자에게는 꽤 도움이 되었다. 뒤의 부록이 특히 더. 



2.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M. T. 앤더슨, 장호연 역. 돌베개. 2018. 546쪽)



3.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남궁인,손원평,이정연,임현석,정아은,천현우,최유안,한은형. 문학동네. 2024. 268쪽)

: 직장 생활 앤솔러지. 다들 견디고 있는 지리멸렬한 삶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정연, 「등대」는 결이 약간 달랐다. 작품 자체로는 재밌었지만 앤솔러지 전체에서는 조금 튀는 느낌. 그래도 다 좋았다. 



4. 안데르센 동화전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윤후남 역. 현대지성. 2016. 1280쪽)

: 완역본이라는 의미도 크고, 제본이 잘 되어서 책 어디를 펼쳐도 책등이 꺾이거나 하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종이가 지나치게 반들거려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선 읽을 수 없어 자연광에서만 읽느라 진도가 너무 느렸다. 잊을만 하면 하나씩 등장하는 오탈자도 옥에티.



5. 근접한 세계(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최고은 역. 북다. 2026. 204쪽)

: 두 작가가 쓴 다른 이야기. '윤리적 딜레마'가 주제라는데,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주제에 충실했지만 히라노 작가의 작품은 이게 대체 왜 딜레마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백한 범죄를 덮을지 말지가 딜레마라고? 범죄자가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장이라한들, 아무리 죽었다한들 범죄 사실을 덮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니 덮는다고도 생각조차 안 하는 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딜레마'라고? 딜레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도대체 어떤 성 의식을 갖고 있으면 이딴 걸 딜레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가? 이건 그냥 윤리 의식이 없는 거다. 아동 인권, 젠더 의식 따위는 없는 나라, 일본. 



6. 급발진(서귤. 안전가옥. 2024. 316쪽)

: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김사장'의 소개로 얼결에 탐정사무소에 취업한 고주운. 작디작은 사무실보다 더 도망치게 싶게 만든 건 사수라고 소개받은 곽재영의 썰렁한 아재 개그. 그러나 곽재영의 수려한 외모에 넋을 잃고 그냥 눌러 앉는다. 첫 사건으로 급발진을 주장하는 은퇴한 교사 안경숙의 약점을 잡아내는 일을 맡은 고주운은 차 안에서 내내 잠복하며 곽재영의 아재 개그와 한결같은 햄버거 사랑을 견디던 중 사건사고를 다루는 PD로 위장하여 우연히 안경숙과 친분을 쌓게 되고, 급발진 사고의 피해자들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모두 마약 거래와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급발진이라는 소재로 꽤 큰 사건을 빌드업한다. 나름 치밀하게 짜인 플롯이 흥미롭다. 주인공들의 행적도 그렇고. 하지만 결말이 좀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난 확신의 해피엔딩을 좋아해서. 결말을 읽고 나서야 처음에 왜 '빌런 탄생기'라고 했는지는 알겠다 싶었지만, 단지 이 책의 살짝 열려 있는 결말을, 정확히는 그 사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후속작을 읽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조금 궁금하긴 하다. 



7. 외로운 남자(외젠 이오네스코, 이재룡 역. 문학동네. 2010. 176쪽)

: 그는 정말 외로웠을까? 그냥 혼자였을 뿐이지 않은가? 서른다섯의 남자가 예기치 못했던 큰 유산을 받고 퇴사한 후 혼자 살아간다. 오랫동안 지내왔던 초라한 호텔에서 나와 괜찮은 셋집을 얻고 근처에 단골 식당을 만들고 최애 자리와 단골 웨이트리스를 정하고, 근처를 산책하며 매일의 한가한 일상을 살아가는 날들. 그러는동안 오래전 교류가 있었던 철학자와 통화를 하기도 하고 여자와 함께 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혼자다.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고 세상이 바뀌지만 남자의 생활은 그냥 지속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건 내가 원해오던 삶이다. 경제적 걱정 없이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는 평온한 삶. 권태롭고 의미 없어보일지언정, 그건 외부의 시선일 뿐. 모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몇몇을 제외하면 어차피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다. 꼭 기록에 남길만한 삶이 아니라해도, 무의미하다 해도 그 자신에게만 평화로웠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닐까? 누구도 해하지 않고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원제인 "Le Solitair"는 물론 '외로운 남자'라고 번역하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그냥 '혼자인 남자'로도 번역할 수 있지 않은가. 혼자라고 꼭 외로우리라는 법은 없다. 그의 삶은 혼자여도 괜찮은 삶이었지 않나.



8. 레시피 월드(백승화. 한끼. 2025. 276쪽)

: 음식과 관련된 능력자들의 이야기. 연작 소설이라고 해도 되고, 중간에 삽입된 '여담'으로 연결된 장편으로 볼 수도 있을 듯. 우리나라 방귀쟁이 며느리 설화(<방귀 전사 볼 빨간>)나 좀비 이야기(<살아있는 오이들의 밤>)는 재밌었고 독박 육아에 지친 엄마의 이야기(<깜박이는 쌍둥이 엄마>)는 오히려 현실적이라 마음이 좀 아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첫번째 이야기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없었다면 소설집이 마냥 가벼워졌을 듯. 



9. 작별 너머(다비드 디옵, 목수정 역. 희담. 2025. 352쪽)

: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딸 아글라에에게 일체의 유품을 남기고, 아글라에는 이 모두를 자신이 구입해서 고치고 있는 성으로 가져온다. 어릴 때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무궁화 나무가 있는 서랍장이 문득 눈에 띄고, 서랍 속 비밀 서랍을 연 아글리에는 낡은 수첩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부터 아카데미 회원이 되길 바랐던 미셸 아당송은 연구를 위해 세네갈에 가게 됐고, 그곳의 자연에 매료되었다. 백인으로서 아당송은 많은 특권을 누리는데, 부족의 왕자를 보좌관처럼 데리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식물 표본을 수집하던 중 어느 마을에서 '돌아온 여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마을 족장의 조카인 마람은 마을에 이르는 한적한 길 한중간에서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갔으나 몇 년 뒤 한 남자를 통해 자신이 그 마을에서 죽은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려 했고, 이는 그녀가 세네갈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뜻. 백인에게 노예로 팔려갔다가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아당송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강력 스포)


18세기 세네갈의 생활상과 당대 노예 무역의 실상, 백인들의 제국주의 정책과 인종차별 등이 잘 드러나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아당송의 사랑이야기를 위한 배경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말로 달콤한 슬픔. 비록 젊은 아당송은 순진하게도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든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라 믿었지만 아무리 소설 속일지언정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난 이 이야기가 아당송에게만 새드 엔딩이리라 믿는다. 마람은 처음 고래 섬에서 도망칠 때, 수영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므로 마람이 마지막 순간에 아당송의 손을 놓고 바다에 뛰어든 건 그녀 자신을 믿고 행한 일이었다. 난 그녀가 그 믿음에 응답받았으리라 믿는다. 마람은 계속 그녀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아당송 없이. 그게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옳았을 것이다, 그 때에도 혹은 지금이었어도. 



10. 재구성(민병훈. 민음사. 2020. 292쪽)

: 이전에 읽은 작가의 작품( 『달력 뒤에 쓴 유서』)이 정말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이 책이 더 먼저 출간된 책임에도 내게는 왠지 후속작처럼 읽혔다. 표제작이 내가 먼저 읽은 작품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에도 난 소설집의 제목 때문에, 그리고 첫번째 작품(「장화를 신고 걸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연꽃 사이를 헤치며」)을 비롯해 다른 작품들에서도 『달력 뒤에 쓴 유서』의 이야기가 조금씩 반복되기에 그렇게 느껴졌고 그게 날 조금은 피로하게 했다. 사실 마음과 상황이 좋을 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작품들이지만 내게는 꽤 무거웠고, 가끔 지루했다. 더이상 도시에서 부유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11. 검은 모자를 쓴 여자(권정현. 자음과모음. 2021. 264쪽)

: 새벽 2시, 민은 문득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민의 집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민은 얼른 달려나가지만 분명 헌옷수거함 옆에 서 있던 여자는 온데간데 없다. 남편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작은방의 동수도, 강아지 무지도 아무 일 없지만 민은 불안하다. 사실 3년 전 아들 은수가 약수터 앞 공터에서 민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유아차에서 목이 꺾여 죽은 후 민은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은수의 죽음 이후 힘들어하던 민은 강아지 무지를 입양해 키우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 눈 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동네 교회의 잠긴 문 앞에 버려져 있던 은수와 비슷한 개월수의 동수를 발견하여 입양했다. 동수 품에 안겨 있던 검은 고양이 까망이도. 그러나 민은 동수에게 깊은 정이 가질 않는다. 


어디까지가 망상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이었을까? 진실이 있기는 한가? 병원에서 공연했던 마술사가 한 말처럼 삶이란 모자 속 고양이를 꺼내는 일의 연속이다. 그냥 꺼내는 거.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꺼내는 순간 결정되는 거다.(213쪽) 민은 과연 몇 마리의 고양이를 꺼냈을까? 난 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끝까지. 민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사실은 민이 그 행동을 하길 바라고 있다. 결말에서 작가가 하지 않은 그 이야기처럼.)



12. 빛의 마녀(김하서. 자음과모음. 2019. 272쪽)

: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니콜은 횡단보도 옆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한겨울에 맨발로 얇은 코트만을 입은 채 스물 여섯 시간밖에 살지 못한 딸의 죽음에 병원 과실을 묻는 여자, 태주. 200년이 넘게 살고 있는 마녀 니콜은 문득 딸 샬럿이 기억나고,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려 주겠다며 자신의 모든 말을 따르겠냐고 묻는다. 니콜은 자신을 쫓는 마녀 헌터 에드워드의 눈을 피해 이곳에 얼마나 더 머물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태주에게 아이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준다.


태주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금 하는 일들과 니콜의 과거가 엇갈린다. 왜 니콜이 태주를 한눈에 알아볼 수 밖에 없었는지. 같은 상처를 지녔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씻어낼 지는... 결말이 조금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책 속에서나마 진실이 이렇게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으면 좀더 여운이 있지 않았을까. 이야기 자체는 좋았다. 이들이 한 방식이 건강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사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게 위로가 되기도 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13. 너무나 많은 시작(존 맥그리거, 이수영 역. 민음사. 2010. 456쪽)

: 데이비드는 이제 막 장모의 장례식에서 돌아왔다. 아내 엘리너는 가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다시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꾸려야 한다. 데이비드는 장례 기간 동안 함께 있던 딸 케이트의 성숙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뿌듯해 하고, 엘리너의 마음을 달래 주려 한다. 그리고 엘리너는 이제 곧 데이비드가 가야 하는 여행길에 동행해 주겠다고 한다. 이 여행은 무엇을 위한 여행일까? 어릴 때부터 여러 물건들을 수집하고 물건들의 이야기를 상상했던 데이비드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큐레이터가 되고 출장길에 애버딘 박물관 카페에서 일하던 엘리너를 만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한 끝에 그녀와 결혼한다.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일하러 온 메리 프리엘이 일하는 집 주인에게 강간 당하고 사생아를 출산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하지만 읽으면서 난 프롤로그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나중에야, ***의 세상이 뒤집어진 후에야 다시 기억해낸다. 이 소설 속에는 그만큼 많은 삶들이, 줄리아와 도로시와 엘리너의 삶이, 그리고 데이비드의 삶이 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들의 이야기가. 도로시의 이야기는 평범했지만 줄리아의 이야기는 조금 안타까웠고 엘리너의 이야기는 화가 났다. 어쩌면 평범하고도 흔한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삶은, 모든 삶은 저마다의 응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옹이가 진 부분은 더 단단하기에. 


소설의 목차가 데이비드가 여행을 위해 챙기는 물품의 목록이라는 걸 다 읽고서야 알았다. 미리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14. 골렘(구스타프 마이링크, 김재혁 역. 책세상. 2003. 398쪽)

: 예술품 복원을 업으로 하는 페르나트.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다. 게토 지역에 있는 그의 작업실 겸 거주지의 1층에는 고물상 바서트룸이 살고 있고 다른 층에는 지적 장애인 형제와 이들이 사랑하는 빨강머리 로지나가 있다. 페르나트는 그저 언제부턴가 이곳에 있으며 예술품 복원을 해왔고, 가끔 작가, 화가, 구두장이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어느날 페르나트에게 묘한 분위기의 손님이 와 '이부르'라는 책의 복원을 의뢰한다. 페르나트는 이 책을 복원하려 하지만 확신할 수 없고, 손님의 형상 또한 희미할 뿐이다. 이런 페르나트에게 친구들은 골렘 전설을 이야기해 준다. 페르나트는 파편적으로 돌아오는 자신의 과거 기억과 게토 지역에서의 여러 사건, 그리고 세무 공무원이지만 통찰력이 있는 정신적 지주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과의 관계, 젊은 시절 연인이었고 현재는 바서트룸의 복수 대상인 사비올라 박사와 불륜 관계인 안겔리나에 대한 연민과 보호 사이에서 부유한다.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페르나트의 모든 행동이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다만 모든 행동이 공감이 되진 않았고. 골렘의 존재 또한 그가 필연적으로 골렘의 문 없는 방을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골렘의 상징성에 대해선, 읽는 동안에는 꽤나 명확하다고 생각했다. 페르나트의 또다른 자아일 것이라고. 그리고 이런 내 추측으로 인해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예상대로여서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안겔리나를 기다리던 성당에서의 환상과 그 의미를 나중에 깨닫는 페르나트의 모습은 내가 이 소설에서 기대했던 그대로여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되었다.



15. 우리 사이에 금지된 말들(예소연,전지영,한정현. 다람. 2025. 152쪽)

: 앤솔러지. 솔직히 말하면, '금지된 말들'이라는 주제보다는 각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단편 자체의 내용이 좋았다. 읽으면서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고 읽다가 '아, 여기서 앤솔러지의 주제가 드러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세 편 다 좋았고, 뒤의 작가들 대담도 좋았다. 가장 공감됐던 건 한정현. 나머지 두 편도 당연히 좋았지만 '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16. 레드 닥>(앤 카슨, 민승남 역. 한겨레출판. 2019. 208쪽)

: 『빨강의 자서전』의 게리온은 이제 자랐다. 중년이 된 그는 그저 다닐 카름스를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우연히 만난 Sad But Great와 차를 몰고 북쪽으로 향한다. 


『빨강의 자서전』보다 조금 덜 반짝이고 조금 더 슬프다. 어쩌면 시간이 닳게 하는 건 표피가 아닌 마음이겠지. 이제 사랑은 없다. 완벽한 아내는 그저 아내일 뿐. 그래도 난 그녀가 좋았지만, G의 북녘행은 멈추지 않는다.



17. 해파리 만개(김초엽. 마음산책. 2026. 204쪽)

: 단편집. 첫번째 작품이 너무 뻔해서, 마치 청소년들에게 해주는 우화 같아서 멈칫했다. 하지만 두번째 작품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이전의 김초엽이 보여서 다시 맘 편하게 읽어 나갔다.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들에게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이 여전히 좋았다. 가장 재밌었던 건 「젤리의 우울」이지만 인상 깊었던 건 피그말리온 효과를 떠올리게 했던 「사모나」. 



18. 불필요한 여자(라비 알라메딘, 이다희 역. 뮤진트리. 2026, 436쪽)

: 72세 알리야.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그동안 혼자서 삶을 꾸려왔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집안에서 밀어붙인 조혼으로 원하는만큼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사는 집의 주인이 알리야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그리고 (전)남편의 집안과 친했던 한나의 소개로 서점에서 일할 수 있어서 혼자서 잘 살 수 있었다. 알리야는 매년 1월 1일에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바로 소설 번역. 지금까지 37권을 번역했지만 이 종이뭉치들은 그저 가정부 방과 그 옆 화장실에 쌓여 있을 뿐이다. 


알리야는 평생을 칩거한다, 책과 함께. 사실 난 그게 부러웠다. 너무 철없는 소리일 지 모르지만 알리야에게 삶은 문학이고, 문학으로 그녀 자신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페소아의 문장들로. 혼자 사는 여성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과 혼자만의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 알리야에게는 그게 책이었고 나에게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게 혼자만의 삶을 잘 꾸려가는 그녀에게도 역시 연대는 필요하다. 그래서 난 계단 위의 '세 마녀'가 고마웠다. 그녀들이 그저 막무가내가 아니어서 좋았고, 셋이 다 배경과 직업이 달라서 좋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나이들고 고립된,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웠던 여성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세 마녀는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줄 것이고 알리야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적당히 담백하고 적절히 따뜻한 게, 그게 가장 좋다. 


ps. 레바논에서도 대학원생은 '노예'라니.... 전세계 공통인건가? 웃기면서 슬프다.



19. 2026 소설, 한국을 말하다(성해나,김기태,박연준,박민정,성혜령,김경욱,하성란,윤성희,정한아,김유담,김병운,문지혁,이미상,송호근,정용준,정소현,안톤 허,권김현영,정대건. 은행나무. 2026. 216쪽)

: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짧지만 응축된 이야기들 속에서 나와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조금은 외면하고 싶은 모습도 있고 설마 싶은 모습도 있었지만. 물론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소설과 에세이 사이의 어딘가에 있던 안톤 허. 



20. 파트타임 여행자(반수연. 문학동네. 2025. 276쪽)

: 디아스포라 단편집. 저자는 10년 동안 글을 못 썼다고 했는데 그렇게 꾹꾹 눌러담은 마음이 진하게 녹아있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하나같이 마음 아픈, 길 위의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다음 발걸음이 단단할 것임을, 이들의 내일은 오늘보다 밝을 것임을 믿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들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21. 다시, 몸으로(김초엽,저우원,김청귤,청징보,천선란,왕칸위. 김이삭 역. 래빗홀. 2025. 308쪽)

: '몸'을 주제로 한국과 중국의 소설가들이 쓴 앤솔러지. 세 가지 주제로 각각 한국 작가 한 명과 중국 작가 한 명이 단편을 실었는데, 주제는 사실 크게 상관 없을 듯. 신체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의, 어쩌면 정신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인간을 구성하는 건 무엇인지, 인간 존재에서 신체란 어떤 역할인지... 주제나 소재를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좋기만 한 여섯 작품들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몸'과 가장 관련이 적은 이야기였던 청징보 <난꽃의 역사>. 



22. 하우스메이드 2(프리다 맥파든, 황성연 역. 북플라자. 2025. 400쪽)

: 밀리는 여전히 전과 기록 때문에 직장을 얻기 힘들다.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에 예전처럼 하우스메이드 일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도 어이없이 해고당했다. 구직 사이트에 올려두고 연락을 기다리던 밀리는 한 남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맨해튼 부촌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한다. 보통의 경우처럼 아내가 연락한 게 아니지만, 좋은 인상의 성공한 기업가 더글러스는 바로 일을 시작해 달라고 한다. 다만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손님방에 칩거하고 있다면서 절대 아내를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밀리의 눈에 아내 웬디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손님방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나고, 웬디의 식사는 늘 더글러스가 가져다 준다. 게다가 빨래의 검붉은 얼룩과 세면대에 찍혀 있는 피묻은 손자국...


흥미를 유발하는 글솜씨는 여전하지만 전편보다는 재미는 좀 덜하다. 웬디의 이야기는 짐작 못했지만. 그래도 권선징악이라는 면에서는 전편보다 낫지 싶다. 전편보다 더 확실해서. 3권을 읽을지말지 모르겠다. 



23. 전혀 다른 열두 세계(이산화. 읻다. 2024. 208쪽)

: 매월 1편씩 연재했던 소설을 묶은 것. 소설집 제목처럼 각 작품의 세계관이 다 다르다. 부담없이 읽기는 했는데 뭔가 조금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작가가 열두 편의 다른 이야기를 썼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가장 좋았던 건 <이무기 시절도 한때>.



24. 글쓰기에 대하여(찰스 부코스키, 박현주 역. 시공사. 2016. 332쪽)

: 저자가 작가나 편집자 등 문학과 관련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들. 약간의 편집(?)도 있는듯 한 게, 어떤 편지는 문학을 언급한 부분만 실려 있기도 하다. 부코스키는 여전히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일관되게 마초스럽고, 자신감있다. 시대상을 감안해도 맨정신으로는 인정해 주기 싫은 젠더 의식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코스키를 애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실린 부코스키의 육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걸 엮어낸 편집자에게 고맙다. 



25.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하진. 열림원. 2024. 376쪽)

: 2000년 크리스마스에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갑자기 이능력자들의 능력이 폭발한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후, 이능력자들은 별도로 관리된다. 그리고 잠재자들이 이능력자의 피를 수혈받거나 상처에 닿으면 '교란'이 일어나 10여년 동안 신체는 점점 약해지고 종국에는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열을 다루는 이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미르. 학교 주위를 맴도는 이상한 트럭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찰과 학교측에 알리지만 어른들은 애매한 태도만 보이고, 결국 트럭의 테러를 혼자서 막아내고 쓰러진 미르를 절친 건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다 건에게 교란이 일어난다. 10년 후, 미르는 이능력의 무효화를 연구하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건을 소속 병원에서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미르는 RIMO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교란 상태에 들어간 서현주 씨의 딸 서해수와 인연이 닿는다.


일반적으로 장르 소설이라 할 때 기대하는 무드의 소설은 아니다. 일단 세계관이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깊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전개하는 물리학 이론의 깊이와 비례한다. 그래서 이야기 초반에는 살짝 지루했다. 재밌어지는 건 3부부터. 해피엔딩을 믿었지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묵직했기에. 탄탄한 이론과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유없는 빌런이 없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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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름밤 해변의 무무씨(조해진. 다산책방. 2025. 172쪽)

: 은희는 수연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준다, 자신처럼 그 골목에 있는 이국의 도시 이름을 가진 가게들을 수연도 알아채는 지 궁금해하면서. 암이 재발해 입원해야 하는 은희는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집을 관리해 주고 고양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고, 함께 일하는 동준의 소개로 수연을 집에 들이게 된다. 은희의 럭키타운 402호는 은희가 사랑했던 무무씨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고 고양이 양평이와 오모리도 무무씨가 키우던 아이들이다. 은희와 무무씨는 한밤에 무인 세탁소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들으며 앉아 있곤 했다. 


정갈하고 깨끗한 문장과 담담한 문체와는 달리 은희와 수연의 삶은 뜨겁고 치열하다. 물론 차갑고 밍숭맹숭한 삶이란 없을 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은 무겁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세탁기의 물소리에서 함께 파도 소리를 떠올려 줄 누군가 있다면, 그건 행복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곁에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에 앉아 있던 세탁소 테이블 앞 자리에 한 칸을 비워두고 앉아 주는 누군가가 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곁에 앉아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이 많이 따뜻했다. 이 작가만의 조용한 처절함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2.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경비원입니다(패트릭 브링리, 김희정,조현주 역. 웅진지식하우스2025. 368쪽)

: 저자는 형을 암으로 잃고 삶의 의욕을 잃는다. 똑똑하고 착하던 형 같은 사람이 이렇게 일찍 떠나는데, 위로 올라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 다니던 <뉴요커>지를 떠난 저자는 어릴 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어머니와 함께 갔던 기억을 떠올리다 그곳의 경비원으로 취직한다. 조용히 관람실 한구석에 서서 예술 작품을 바라보며 저자는 애도를 이어가고, 관객들, 동료들과 소통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는 그저 예술을 통해 위로를 받는, 애도의 이야기라 생각해서 읽지 않았는데 마침 내가 다니는 도서관의 신착 도서 코너에 이 책이 있길래 이제는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집어들었다. 그리고 개정판을 읽기를 잘한 게, 각 페이지마다 QR코드가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예술품들을 바로바로 조회해 보면서 읽을 수 있다. 단순히 저자의 직장 생활과 애도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술 작품을 보는 저자의 견해들이 진솔하게 쓰여 있다. 저자의 감상은 전문가의 그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 초보의 견해도 아니어서 적절한 정도의 이론과 삶에의 대입,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의 연결이 독자를 너무 깊이 슬픔으로 침잠하지 않게, 혹은 너무 예술품에만 집중하여 의미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몰랐던 예술 작품들만 알게 되어도 이 책을 읽은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집어들었는데, 그 이상의 많은 것을 얻어서 좋았고 또 의외로 삶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생활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서 좋았던 독서였다. 



3. 기이현상청 사건일지(이산화. 안전가옥. 2022. 292쪽)

: '기이현상청'은 당연하게도 기이들 - 귀신, 정령, 요괴, 이매망량 등 - 이 일으키는 현상을 관리하는 국가기관이다. 일상에서 생기는 일들 중 기이가 일으키는 일들에 대한 사례들이 다섯 편의 연작으로 묶여 있다. 가벼운 맘으로 읽었다.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는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은 거라서 이 소설집의 분위기를 대강 알고 시작했지만 간혹 지루하거나 적응이 힘든 작품도 있었다. 가장 재밌었던 건 <마그눔 오푸스>. 



4. 브뤼셀의 한 가족(샹탈 아케르만, 이혜인 역. 워크룸프레스. 2024. 168쪽)




5. 테세우스 패러독스(이경희. 안전가옥. 2025. 352쪽)

: 석진환은 낯선 곳에서 깨어난다. 몸이 모두 망가진 후 사이버네틱 신체로 교체한 채 깨어난 진환.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게 된 경위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이복동생이자 자신과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미진을 의심한다. 그룹의 지분을 상당수 갖고 있는 삼촌들이 진환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언제 배신할 지 모르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초거대 바이오 기업 트라이플래닛의 신체 개조 사업의 개선을 현재 미진이 맡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면 꼭 필요한 정보가 자신이 살던 집 금고에 있다. 패스워드 뿐 아니라 생체 정보도 필요한 상황에서 모든 신체가 기계화된 자신이 금고를 열 수 있을 지 의심스럽지만 일단 그곳으로 가는데, 거기서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맞닥뜨린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 신체를 비롯한 겉모습? 내 기억? 아니면 내 성격?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분리되어 각각 존재한다면? 사실 난 기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이야말로 조작되거나 이식되기 가장 쉬운 정보 아닌가? 어쨌든 석진환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해 승리한다. 그 과정이 꽤 흥미진진했고 복제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지만 사실 읽고 나서 뭔가가 남는 소설은 아니었다. 



6. 헨리 6세 1.2.3.(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정환 역. 아침이슬. 2012. 192쪽, 204쪽, 200쪽)

: 헨리 5세가 사망하고 어린 헨리 6세가 즉위한다. 어린 왕의 등극으로 프랑스는 잉글랜드에게 빼앗겼던 영토의 회복을 노리고 이 백년 전쟁에는 영웅 잔다르크가 등장한다. 이 와중에 랭커스터와 요크의 편이 갈리며 장미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이후 호국경 글로스터가 음모에 의해 죽게 되고, 프랑스 출신의 마거릿 왕비는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헨리 6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요크를 지목하고 이에 반발한 마거릿 왕비는 내전을 일으키지만 패한다.


사실 읽기 전에는 이 시기 잉글랜드의 복잡한 왕위 계승 전쟁에 지레 겁먹고 긴장하며 시작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책 뒤편의 해설을 먼저 읽어도 좋았을 걸 그랬다 싶기도 하지만, 대강의 흐름만 알아도 각 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번역이 불편하다.  시어의 맛을 살리려 노력했다는 번역자의 말에 따라 시를 읽듯 마음을 열고 읽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그나마 이제까지 읽었던 번역 중 나은 거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산문이 분명한 부분 - 귀족이 아닌 평민이나 군인의 대사 - 에서도 비문으로 읽히는 문장들이 발견되는 게 읽기에 편하진 않았다. 너무 직역이어도, 완전 의역이어도 안 될 거 같은데... 이 책은 직역에 가까운 듯.  원서를 못 읽는 서러움이라고 해야 하나, 무능력자의 적반하장이라고 해야 하나. 



7.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바바라 몰리나르, 백수린 역. 한겨레출판. 2025. 236쪽)




8. 우리들의 반역자(존 르 카레, 남명성 역. 알에이치코리아(RHK). 2015. 492쪽)

: 옥스포드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는 페리는 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고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교에 묶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갈등을 하다 변호사인 연인 게일과 함께 카리브 해의 섬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오히려 이곳에서 페리 삶의 전환점이 될 인물을 만난다. 바로 러시아 대부호 디마. 페리의 뛰어난 테니스 실력을 본 테니스 강사가 디마와의 시합을 주선하고, 페리는 디마의 친인척과 지인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낯선 분위기에서 디마와 경기를 한다. 이후 디마는 자신의 쌍둥이 아들들 생일 파티에 이 커플을 다시 초대하지만 정작 안내된 곳은 폐가. 이곳에서 디마는 러시아의 자금 세탁 조직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을 말하고 자신과 가족들이 영국으로 망명하여 보호받기를 원한다고 한다. 


페리와 게일, 그리고 디마 가족의 이야기는 곧 페리가 접촉한 영국 정보부 요원 루크와 헥터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들 모두의 사연이 생생하고, 독자는 그들 각각에게 이입된다. 그러기에 결말은, 예상했지만 막상 닥치니 꽤 충격적이었다. 앞으로의 일들도 걱정되고...결국 가장 냉혹한 건 정치 체제도 경제 시스템도 아니다. 사람이다. 이야기는 정말 매혹적이었지만 난 책 속의 모든 이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애도를 금할 수 없다. 



9.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헤르만 헤세, 김윤미 역. 북하우스. 2022. 408쪽)

: 헤세가 음악에 대해 쓴 에세이와 시, 음악을 소재로 쓴 소설의 부분 발췌 등을 모았다. 헤세는 음악에 늘 진심이었다. 늘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에 진지했으며 항상 음악과 함께였다. 어릴 때 배웠던 바이올린에 대한 단상은 길지 않지만 그의 애정의 시작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베토벤과 쇼팽, 슈베르트는 그의 취향을 말해준다. 그는 또한 늘 그랬듯 정치 사회적 문제에도 침묵하지 않았고 이는 음악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난 그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한 얘기에 공감한다. 유대인 가족 - 며느리가 유대인이었다고 난 알고 있다 - 을 위해서라지만 엄연히 나치 치하에서 국립 음악원 원장을 지냈고, 종전 후에도 행보에 제한을 받기는커녕 병을 핑계로 출국해 버리기까지 하다니. 오히려 나치 치하에서 수감되었던 다른 예술가들은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굳이 지인이 아니더라도 화날 만 하지.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명사가 특정인을 지목해 비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통해 헤세가 그저 음악을 사랑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음악은 그의 생각, 그의 삶에 대한 태도, 철학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에 대한 지겨움과 알고 지낸 많은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 등, 헤세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즐겁게 읽었다면 흥미로울 만한 글들이 많다. 헤세의 소설들을 읽은 지 꽤 되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기억을 되살려 보는 것도 좋았고 - 대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 안 읽은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더 즐겁게, 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몰랐던 면을 알게 된 좋은 독서였다.



10. 안녕이라 그랬어(김애란. 문학동네. 2025. 320쪽)

: 돈에 관한 이야기들. 어떤 독자는 공간과 삶의 이야기로 읽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난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은 돈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돈이 엮여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고, 돈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에는 돈이라는 게 끼어들어 어색해지고 마는 이야기들. 당연히 편안하게 읽히지 않았다. 모든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게 되고 나라면 어땠나, 나같으면 아예 저런 자리에는 가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거기에 있고 그 상황에 처한 이상 화자들의 마음에는 십분 공감이 되고... 거창하게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든가 부르주아의 위선 따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들이고 소설을 통해 더 핍진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다만 그 속에서도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부여잡고 있는 건 결국 그냥 소시민들이었지. 조금은 도망치고 싶은 이야기였다. 



11. 증언 : 쇼스타코비치 회상록(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솔로몬 볼코프 엮, 김병화 역. 온다프레스. 2019. 656쪽)




12. 마지막 거짓말(라일리 세이거, 남명성 역. 밝은세상. 2023. 456쪽)

: 첫 개인전을 여는 화가 에마. 그녀의 그림은 15년 전 있었던 사건의 개인적인 기록이자 치유이다. 에마는 자신의 그림 앞에 서 있던 프레니와 재회한다. 15년 전 그 사건이 벌어졌떤 나이팅게일 캠프의 주인이자 운영자였던. 프레니는 에마에게 캠프를 다시 열 거라면서 강사로 와달라고 청한다. 아직도 그 사건에 관한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에마는 이제는 더이상 그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그 캠프에 가서 그 때 사라진 세 소녀에 관한 진실을 찾게 되면 자신이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캠프로 향한다.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진 세 소녀에 대해 다시 떠올린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자신에게 확신이 있었던 여왕벌 비비언과 비비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던 내털리, 앨리슨을.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캠프 경험도 많은 이들과 한 오두막에 배정되면서 에마는 캠프에 적응하게 되고, 비비언에게 많이 의지하지만 비비언이 자신이 좋아하는 테오에게 접근하는 걸 알고 분노한다.


이야기가 좀 지지부진한 면이 있다. 회상신은 괜찮은데 현재의 이야기는 괜히 분위기만 조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에마와 한 오두막을 쓰던 세 여학생이 또 사라지기 전까지는. 사실 책 속 진실은 약간 허무하기도 했는데, 마지막에 반전이 꽤 흥미로웠다. 그래, 그게 마지막 거짓말이었구나. 현재에 일어난 사건의 범인은 뜻밖이었고 동기가 약했지만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장면의 필력은 뛰어났다. 이 작가를 다시 읽는다면 아마도 내용보다는 문장력 때문일 거 같다. 



13. 림 :  드그다 읏따읏따(김멜라,김화진,서장원,차현지,함윤이. 열림원. 2025. 202쪽)

: '함께'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라고 했으나 꼭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의미있고 재밌다. 이 사회에서 약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도 좋았고, 소소하지만 일상에서 외면할 수 없는 소수자의 이야기들도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함윤이. 



14. 가끔 난 행복해(옌스 크리스티안 그뢴달, 진영인 역. 민음사. 2018. 164쪽)




15. 완벽한 딸들의 완벽한 범죄(테스 샤프, 고상숙 역. 북레시피. 2023. 468쪽)

: 노라는 전에 함께 모금한 돈을 저금하기 위해 전 남친 웨스, 현 여친 아이리스와 함께 은행에 들어선다. 줄을 섰는데, 앞에 있던 남자들이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은행 안의 모든 사람들을 엎드리게 한다. 은행 강도에게 인질로 잡힌 것. 노라는 재빨리 언니에게 긴급신호를 보내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한다. 사실 노라는 어릴 적부터 엄마의 사기 행각에 동원됐었다. 엄마가 정해준 역할을 습득하고 연기하는 건 노라에게는 정체성 같은 거였다. 이제 노라는 과거의 그 '완벽했던 딸들'에게서 얻은 지식을 끌어모아야 한다.


가벼운 맘으로 집어들었는데 마음이 아파서 중간중간 멈춰야만 했다. 범죄 소설이지만 이건 아동 학대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라가 어떻게 엄마에게 이용당하며 키워졌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가 은행 강도들의 인질극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드러난다. 해피엔딩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인질극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자 조금 초조해 지기도 했다. 범죄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안녕을 이토록 간절히 바란 건 처음인 듯. 그만큼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훌륭했고 구성과 문장력도 좋았다. 마음 아픈 이야기였고 현실에선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이 작가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16. 나의 완벽한 무인도(박해수. 토닥스토리. 2025. 264쪽)

: 지안은 날이 밝자 집 앞 바다로 내려간다. 이제는 잠수복도 혼자서 잘 입을 수 있다. 바다 깊이 내려가 문어를 잡아 올린다. 오늘치 식량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오전에는 선장 현주 언니가 배를 타고 섬 앞을 지나가며 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인사를 건넨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고 이제 지안은 혼자만의 생활에, 섬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텃밭을 가꾸고 생선을 잡아 말리며 혼자 가꾸는 혼자만의 생활.


읽는 내내 이게 진짜 힐링 소설이지, 싶었다. 최근 '힐링' 타이틀을 달고 출판되는 수많은 엇비슷한 이야기들 속에서 이 이야기야말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품고 있는 시원한 이야기였다. 내가 바라마지않지만 콩알만한 심장과 게으른 팔다리를 가진 나로서는 절대 실현할 수 없는 삶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안의 과거 이야기가 너무 구구절절하게 펼쳐지지 않아서 좋았다. 지안이 받은 상처는 간접적으로 보여질 뿐이어서. 그래, 중요한 건 현재이다. 지금, 여기의 삶. 지안은 이제 괜찮고, 앞으로는 더 괜찮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나마 지안이 편안해서 정말정말 좋았다. 어딘가에는 이렇게 깨끗하고 평온한 삶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17. 남극(클레어 키건, 허진 역. 다산책방. 2025. 344쪽)

: 저자의 데뷔 단편집. 위험에 처한 여러 삶의 이야기들. 이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단편들보다 훨씬 좋았다. 작품들 속 여성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위험에 빠지거나 타인을 위험하게 하기도 하지만 선택에 의해 자신을 구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오랜 기다림과 욕망 그리고 선택. 가장 좋았던 건 <남자와 여자>.



18. 림 : 옥구슬 민나(김여름,라유경,서고운,성혜령,예소연,현호정. 열림원. 2024. 200쪽)

: 김여름, 라유경을 읽고 죽음이 주제인가 했는데 그보다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죽음이 가운데에 놓여 있든 아니든. 물론 이야기 중간에 죽음이 끼어들고 꽤 큰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다만 표제작인 현호정의 작품은 조금 결이 다르게 읽혔다. 소통이 주제라고 할 때 끼워맞추기 힘든 건 아니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김여름. 



19. 문이 열리면(헬렌 라일리, 최호정 역. 키멜리움. 2024. 304쪽)

: 이브는 12월의 안개 낀 저녁 오랜만에 아버지와 이복 여동생 나탈리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한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지내왔지만 자신이 전하는 소식이 그들을 기쁘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낮에 찾아왔던 이모 샬럿을. 가족은 예전부터 나탈리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에 기대어 살아왔고 이브는 그걸 싫어해서 독립했다. 하지만 나탈리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브가 막 자신과 가족의 오랜 친구인 짐 홀랜드와의 약혼 소식을 전하는데 나탈리의 약혼자 브루스가 나타난다. 사실 이브가 낮에 샬럿의 방문을 받은 이유는 샬럿이 브루스와 이브의 사이를 의심했기 때문. 어릴 때부터 이모는 나탈리를 편애했다. 심지어 나탈리는 자신의 친조카가 아니었음에도 - 샬럿은 이브와 이브의 오빠 제럴드의 친모의 언니이다. 이브는 저택을 나갔다가 저녁 늦게 다시 방문한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이모 샬럿이 죽은 채 발견된다, 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원에서.


이 출판사의 고전 추리물 시리즈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재밌게 읽었다. 범인과 반전은 전혀 짐작 못했다. 읽는 내내 추리를 나름대로 하긴 했지만, 늘 그렇듯 엉뚱한 사람만 의심했지 뭐. 다만 범인에 대한 평가가 슬며시 바뀌는 게 조금 슬펐달까. 그건 책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20. 쓰지 않은 결말(우다영,도재경,정용준,최정나,김성중,김덕희,정은,이민진,이지,민병훈,송지현,박서련,한정현,김솔,김멜라. 아침달. 2024. 232쪽)

: 처음엔 소설 앤솔러지인 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호텔 프린스의 '소설가의 방' 을 이용했던 작가들의 에세이였다. 대부분 좋았다. 우다영은 내게 다시 카프카를 불러왔고 최정나는 내 가슴을 찢었다. 이지는 그녀의 소설, 정확히는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켰고 김덕희는 안타까웠으며 이민진과 민병훈은 소설처럼 읽혔다. 송지현과 박서련은 소설가의 작업 노트를 들여다 본 기분이라 신기했고 한정현은 깊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 같았던 김멜라는 이 책의 닫는 글로 맞춤이었다. 정말 좋았던 에세이들. 



21.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조라 닐 허스턴, 이미선 역. 문예출판사. 2014. 280쪽)




22. 자개장의 용도(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 313쪽)

: 원하는 것 혹은 곳을 위해 이동하는 여성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며 때로는 돌아오기 힘들기도 하고 거절을 당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원하는 걸 갖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들. 다 좋았다. 가장 좋았던 건 <수호자>.



23.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슈테판 츠바이크, 배명자 역. 다산초당. 24. 148쪽)

: 츠바이크의 미발표 에세이들. 그의 글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모든 글들이 다 소중하지만 이런 작품집은 더더욱 그러하다. 이 글들에서 저자는 삶의 방향을 이야기한다.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와 그걸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그의 마지막을 알기에 이 글들이 더욱 아름다우면서 안타까웠다. 버틸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24. 신이 떠나도(윤이나. 유유히. 2025. 368쪽)

: 무연산 산자락에 위치한 무연 맨션. 언덕이 가팔라 차도 경차 밖에는 못 올라오는 이 곳 무연 맨션은 집주인이자 오랫동안 부동산을 운영해 온 박길순이 얘기하듯 터가 좋다. 4층은 없는 이 곳 B동 503호에 살던 마이클은 어느 비오는 날 문강우를 '주워'왔고, 밝은 성격의 강우가 주변 사람들을 설렁설렁 도와주면서 용돈을 받는 걸 보고 강우와 함께 심부름센터를 차렸다. 어느날 강우는 산 밑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고등학생 미래의 지갑을 찾아주고, 그날 저녁 심부름센터 의뢰를 받는데, 비어 있던 맞은편 505호의 입주 청소. 그런데 시간을 정해주었다. 해시에 시작해 자시를 넘기지 말 것. 의뢰대로 밤중에 청소를 시작한 강우는 그곳에서 재림과 미래 모녀를 마주친다. 재림은 한때 여의도를 호령했던 신점의 대가. 하지만 어느날 홀연히 신이 떠났고, 재림은 신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이곳 무연 맨션에 있다고 생각하고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이사온 것.


오컬트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휴머니즘 소설. 작가가 드라마 대본으로 쓰기 시작했다더니 정말 시트콤처럼 재밌다. 그러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누군가에게 신은 존재 이유이며 때로는 존재 자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이 떠나도 삶은 계속된다. 신이 없어도, 인간 사이에서라면 얼마든지 버텨나갈 수 있고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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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이하진. 안온북스. 2025. 276쪽)

: SF 단편집. 이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고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역시나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이거나 또 어쩌면 조금은 비호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과 절대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작가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우선되어져야 하는지. 작가가 보여주는 작은 희망들이 아름다웠다.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선물>.



2. 낯선 편지(이머전 클락, 배효진 역. 오리지널스. 2025. 512쪽)

: 웨딩 드레스 디자이너 카라. 엄마는 두 살 때 돌아가셨고 폭력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아버지에게 질린 오빠 마이클은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 이제는 런던에서 가족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고 카라는 아버지를 돌봐 줄 누군가를 고용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익숙한 물건을 주면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다락방 앞에 서게 된 카라. 어릴 적 아버지는 다락방 출입을 엄금했다. 다락방 근처에서 놀고만 있어도 불호령을 내렸던 아버지. 이제는 카라가 다락방을 뒤져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고, 카라는 먼지 쌓인 다락방 가장 구석진 곳에서 수상쩍은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가들에게'라고 쓰인 엽서가 가득한데...


(약스포)


낯선 엽서의 비밀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난 카라의 입장에서 화가 났을 뿐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선택한 애니에게, 순진하게도 자신의 엽서가 아이들에게 전해질 거라 믿었던 애니에게. 나라면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렇게 허술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 법원과 남편, 사회의 폭력성을 그렇게 겪고도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늦은 나이에 진실을 알게 된 카라의 혼란과 배신감은 정말이지... 등장 인물들 중 P선생을 제외한 누구도 카라의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도 내 화를 돋웠다. 엄마 없이 자란 카라 안의 어린 아이를 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게 핍진성이겠지. 이야기는 잘 짜여 있었고 필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 빠지는 독서였다.



3. 밤을 달려온(연여름. 황금가지. 2026. 340쪽)

: SF 단편집. 모든 작품이 다 재밌고 좋았다.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이야기들이지만 소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정말 다 좋았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캐트닙 네트워크>. 가장 좋았던 건 <화살 거두는 천사 틸리의 선택>.



4. 호랑이성의 마법사(루이스 새커, 김영선 역. 창비. 2025. 416쪽)

: 한때 성을 둘러싼 해자에서 호랑이를 키웠다는 전설 때문에 호랑이 성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고성 앞 카페. 배 나오고 땅딸막한 키의 미국인 남성 관광객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때때로 크루아상의 부스러기를 후드 티 주머니 안으로 떨군다. 사실 그는 500년 전 이 성에 살았었다. 1523년 몰락해 가는 왕국 에스콰베타. 뛰어난 마법사인 아나톨은 재무장관의 요청으로 연금술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왕의 부름에 달려가 보니 부유한 옥사타니아 왕국의 왕자와 정략 결혼을 하기로 한 툴리아 공주가 견습 필경사 피토와 사랑에 빠졌으니 이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어릴 때부터 아나톨을 따랐던 공주 또한 피트를 구해달라며 도움을 청한다. 고심 끝에 아나톨은 피트에게 기억을 잃는 약을 먹이기로 하고 레시피를 섬세하게 조정해 가며 딱 맞는 몰약을 만들기 위해 매일 피트가 갇힌 지하감옥을 방문한다.


별 기대 안하고 그저 머리나 식혔으면 하고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지만 정치적 입장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태도들과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하는 긴박함, 위정자들의 위선과 무지, 얕은 술수 등이 공주와 피트, 아나톨의 모험에 다채로운 색을 더해주었고, 그 와중에 공주와 피트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읽는 건 (아마도) 처음인데 지난 작품들도 종종 찾아 읽어야겠다.



5.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미래(염승숙. 문학과지성사. 2025. 296쪽)

: 오랜만의 단편집.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 즈음의 내가 많이 지친 상태였어서 독서가 즐겁지 못했다. 내 현실이 힘든데 굳이 다른 사람들의 힘든 현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정말 힘들게 잘 쓴단 말이다. 불안하고 힘겨운 현재, 미래가 있기야 있겠지만 지금과 별반 다를 리 없는, 오히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물론 일상에서 언뜻언뜻 선한 사람들의 배려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우연이잖아. 그런 우연이 늘 생기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끝까지 읽었고, 마음이 괜찮아진 후에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문제이다. 소설이나 작가는 죄가 없다. 



6. 라두 루푸는 말이 없다(이타가키 지카코 엮음, 김재원 역. 봄날의책. 2025. 248쪽)



7.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김서해. 자이언트북스. 2023. 188쪽)

: 미술대학원 휴학생 해인은 독립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다. 어느날 묘하게 유명인의 느낌을 주는 남자애가 서점에 오는데, 이미 여학생 두어 명이 가게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를 흘끔거리고 있다. 서점 사장과 친해진 그, 영원과 어찌어찌 말을 트게 된 해인. 그의 초대 아닌 초대로 그가 밴드 카드뮴 그린의 베이시스트라는 걸 알게 되고, 그 후 그는 아예 서점에 알바생으로 취직하며 해인에게 계속 인터뷰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뒤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생각해 보면 못 알아차릴 것도 없는데. 해인은 영원의 질문을 한 번도 무례하다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답을 해준다. 그러면서 중학생 때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주희에게서 춤을 배웠던 일이나 주희 엄마와의 일들을 비롯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라서 결국엔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애도에는 각자만의 방식과 시간이 있다. 해인이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써서 지난날 위에 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8. 족장의 가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21. 408쪽)

: 카리브 해 근방의 가상의 독재국가. 그곳에는 200년을 살아온 족장이 있다. 그의 시신이 그가 살던 집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첫번째 시신은 그의 대역의 것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그리고 다시 그의 시신이, 엎드린 채 독수리에게 얼굴을 반쯤 뜯어먹힌 시신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뒤집어 볼 생각도, 그가 정말 그일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그가 처음 총을 잡았던 옛날과 첫사랑을 잃은 그때, 어머니를 매일 찾아가던 시절을 오간다.


화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단, 이름이 나온 사람들 - 그의 대역이었던 파트리시오 아리고네스, 그를 사로잡은 환상 속 여인이었으며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마누엘라 산체스, 어머니 벤디시온 알바라도, 유일한 적법 아내 레티시아 나사레노, 친구이자 동지였던 로드리고 데 아길라르 장군,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을 벤 호세 이그나시오 사엔스 델라 바라 - 만 빼고. '나'는 그의 시신을 넘어 관저를 둘러본다. '나'는 그의 발아래 치이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그를 진찰한다. 길고 긴 문장들이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의 질병과 사랑, 상실을 이야기한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수혈해 줘야 하는 라틴 문학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작품은 저자의 여러 실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결코 다시 느낄 수 없을 그의 젊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고, 만연체의 문장에도, 일정하게 흘러가지 않는 소설 속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어쩌면 뻔하게 흘러가는 독재자의 생이 우스우면서도 짠해서 그것마저 좋았다. 



9. 식물, 상점(강민영. 한겨레출판. 2024. 272쪽)

: 오래된 구옥을 개조해서 만든 식물 상점. 최유희는 간판마저 간단한 이곳을 개업하며 여러 걱정을 들었지만 식물에 관해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에 금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된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는 한 남자. 이번에는 좀 다를까 하여 믿어보려 했건만 식물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 더해 친구랑 하는 막말 섞인 통화까지 들어버렸다. 순간 유희에게는 지난 날이 떠오른다.


내용이 통쾌해서 좋았다. 다만 유희가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싶다. 오래해야지, 그 일. 당신만이 아닌 모든 여자들을 위해서. 그런 벌레들은 박멸해야잖아? 불쌍하다고 풀어주지 말고. 어쩌면 작가가 2권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르겠는 결말이 조금 미진했고 내용이 많이 평면적이긴 했지만 말했듯 유희의 시원한 행동들이 내 지난 불쾌한 기억들마저 씻어주는 듯 해서 좋았다.



10. 암전들(저스틴 토레스, 송섬별 역. 열린책들. 2025. 416쪽)

: 사막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 '팰리스'. 이곳에 죽어가는 노인 후안 게이가 있다. 이런 그를 27년 전 한달 동안의 인연이 있는 청년이 찾아온다.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 그는 후안의 방에 머물고 후안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후안은 그에게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물건들과 이 방을 물려받으라고 얘기하는데, 그 중에는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연구서는 잰 게이가 실제로 퀴어들에게서 수집한 사례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후안은 자신과 잰 게이, 제냐 게이와의 인연을 비롯하여 이 연구서에 얽힌 이야기들도 해주고, 이야기를 듣는 그 또한 후안에게 자신의 지난 27년을 띄엄띄엄 이야기해 준다.


그는 누구일까? 실존은 하는 걸까? 어쩌면 후안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후안이 갖고 있는,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연구서는 실존한다. 아마 짐작건대 책에 얽힌 이야기들 - 잰 게이의 연구가 가로채인 사건도 진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소수자들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묻히지도 잊히지도 않고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읽었던 것 중 가장 담백하고 진솔한 퀴어 문학.



11. 다른 우주에서 우리 만나더라도(마크 구겐하임, 이나경 역. 문학수첩. 2025. 392쪽)

: 평행우주가 존재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해 노벨상을 받게 된 물리학자 조너선. 연설을 하러 올라가기 직전, 아내 어맨다는 그의 손에 두 줄이 표시된 임신테스터를 쥐어준다. 벅찬 기쁨도 잠시, 귀가길 교통사고로 어맨다는 사망하고 만다. 조너선은 수많은 평행우주들 중 어맨다가 살아있는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사용하여 다른 우주로 건너가기로 맘 먹는다.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여러 차례 접촉을 했으나 충돌기 사용을 허가받지 못한 그는 용병까지 고용해서 침입해 강입자 충돌기에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결국 다른 우주로 건너간다.


(강스포)


여러 설정과 세계관은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주인공도 그 아내도 좀 이상하다. 다른 우주에 있는 자기 자신은 어쩌려고 다짜고짜 건너가기부터 하려는 거지? 물론 주인공도 이걸 간과하지는 않아서 곧 자신이 없고 어맨다만 있는 우주도 있을 거라고 머릿속에 희망 회로를 돌린다. 그러다 평행우주 간 이동이 10번이 한계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좀 우습다. 하긴, 제약이 있어야 언젠가 소설도 끝나지. 빌런이 빌런이 된 이유도 좀 유치하긴 하지만 필요악이니 그렇다고 치는데, 가장 이해 안 되는 건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과 그 아내 어맨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어맨다는 죽은 남편이 돌아왔고 그 돌아온 남편이 다시 눈 앞에서 죽었는데 금세 나타난 또다른 남편의 품에 안긴다. 그러니까 몇 번이고 돌아오기만 하면 일단 죽어도 괜찮다는 건가?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그렇게 여러 번 죽는 거 자체를 못 견딜 거 같은데. 물론 어맨다는 평행우주를 믿었고 언젠가는 남편이 자기를 다시 찾을 거라는 걸 믿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럴 거면 그냥 서로서로 복제 인간 만들어가면서 이 우주에서 살아. 괜히 복잡하게 강입자 충돌기 같은 거 쓰려고 난리 치지 말고. 그냥 남편이 먼저 죽으면 복제하고, 그러다 아내가 죽으면 또 복제하고... 그러면 천년만년 살 수 있지 않겠어? 사실 가장 맘에 안 드는 건 여성 캐릭터의 희생으로 이 모든 성공(?)이 이루어졌다는 거. 사랑하면 무조건 희생해야 하나? 그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12. 끝맛(다리아 라벨, 정해영 역. 클레이하우스. 2025. 504쪽)

: 코스티야가 처음 끝맛을 느낀 건 열한 살 때였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와 노는 걸 보고 있던 중,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했던 탄맛이 느껴지는 일종의 팬케잌의 맛을 입 안에서 선명하게 느낀 코스티야는 엄마에게 그 얘길 하고, 곧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자신이 느끼는 끝맛을 감추며 살아가던 중, 바에서 마감을 하려는 차에 허겁지겁 들어온 중년 남성 손님과 함께 다시 끝맛이 느껴지고 술을 찾는 손님에게 자신의 끝맛이 정확히 구현된 칵테일을 준다. 손님이 한모금 마시자마자 바로 나타난 남자의 죽은 아내. 손님과 죽은 아내의 아름답고 평온한 마지막 인사를 본 코스티야는 요리를 통해 망자와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기로 맘 먹는다. 


(약스포)


처음엔 그냥 코스티야의 능력 발휘 힐링 소설인 줄 알았다. 코스티야의 음식을 통해 죽은 이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사람들의 사연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코스티야 자신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코스티야. 그러면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못내 맘에 걸려 어떻게든 아버지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코스티야. 그리고 그런 그를 이해하는, 때로는 가로막는, 그리고 어쩌면 위험한 길로 이끄는 모라. 모라의 상처만으로도 난 충분히 버거웠는데, 코스티야의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불러오지 못한 것도 상당히 날 놀라게 했다. 이걸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세상을 단 한 사람이 구해야 하지? 코스티야가 그냥 모른 척 했더라면?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만 같다. 결말이 꽤 신선해서 여운이 길었다. 내 안의 비관주의자는 멀든 멀지 않았든 해피한 재회를 믿지 않지만. 



13. 절창(구병모. 문학동네. 2025. 352쪽)

: 화자는 남편을 잃은 중년의 입주 독서교사이다. 면접을 위해 외딴 저택을 방문한 날 뒤뜰에서 참혹한 고문 장면과 여려 보이는 아가씨가 그 상처에 손을 대고 상대방 머릿속 '진실'을 읊는 걸 목격한다. 집주인 오언은 그 장면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화자를 고용한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 출신인 아가씨는 부유한 호텔 체인 막내아들 오언과 우연히 엮이고 능력을 들켜 오언에게 속하게 된다. 오언은 아가씨의 능력을 이용해 사업을 번창시키고, 뒷골목의 세계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아가씨와 오언의 관계는 이상하기만 하다.


뒤에 작은 반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화자가 독서교사여야 하는 이유, 이 소설의 문체가 만연체여야 하는 이유가 결국은 그거였구나. 화자도 나름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쩌면 세 사람 각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오언의 사랑은, 미묘하지만 이해가 힘든 건 아니다. 화자의 사랑은 가장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아가씨의 사랑은... 결국 아가씨의 마음 속 사랑은 마지막 챕터의 그것이었나보다. 그리고 그게 가장 아름답다 말할 수 있겠지. 



14. 이야기의 끝(리디아 데이비스, 송원경 역. 난다. 2024. 324쪽)

: 사랑이 끝났다. '나'는 다른 남자와의 여행 중 예전의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발송된 도시에 다다른다. 오랜 시간을 걸어 그가 살던 곳에 도착했고 "그가 그곳에 없었음에도 그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곳에 없었기에 원점으로 돌아와 끝을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곳에 그가 있었다면 모든 것이 계속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3-14쪽). 글을 쓰는 사람인 '나'는 그와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인, '나'보다 열두 살 연하였던 그와의 첫 만남과 밤새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글을 쓰려던 그의 곤궁함, 어린 그의 이기심 그리고 이별 후 어쩔 수 없는 '나'의 집착. 


나라면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남자를 사랑하는 화자의 말에 깊게 공감했던 이유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와 사랑에 빠지지도 이별을 하지도 않았기에 객관성 또한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이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나 이별이야기이기 보다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또한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었지않나. 아름답고도 추한 사랑. 그 사랑 이야기의 끝은 이별이 아니다. 망각 또한 아니다. 저자는 그 끝을 기록을 통한 기억으로 가져가려 했겠지. 그러므로 사랑의 끝은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름답든 추하든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 



15. 북경에서 온 편지(펄 S. 벅, 김성렬 역. 범우사. 2006. 281쪽)

: 1950년 9월, 버몬트 지방의 농장에 사는 리즈는 남편 제럴드 맥레오드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남편은 북경에 머물고 있고 그동안 띄엄띄엄 오던 편지의 간격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번 편지에는 더 절망적인 내용이 있다. 그녀는 대학 4학년에 남편 제럴드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 중국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던 제럴드를 설득해 결혼에 이른 리즈는 남편과 함께 북경에서 신혼을 시작하지만 불안한 세계 정세는 곧 그녀와 남편에게 위협이 되어 결국 중국을 떠나기로 하는데, 북경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제럴드는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곳 농장에서 혼자 아들을 키우며 생활하는 리즈. 이제 아들 레니도 장성해 얼마 후면 성인이다.


저자가 가진 '낭만적' 오리엔탈리즘이 곳곳에 드러난다. 잘 대우받는 백인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매우 '관대한' 관점들 - 특히 제럴드의 외삼촌의 친일 행위에 대한. 게다가 리즈는 여성에 대한 편협함을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제럴드의 엄마가 혁명에 동조하게 된 이유도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아들 레니에게 중국인의 피가 1/4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주저하는 레니의 첫사랑은 - 사실 이건 리즈의 생각처럼 중국 혼혈이어서가 아니라 레니의 아버지가 현재 공산국가인 중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거 같은데 - 그릇이 그만큼 밖에 안 되는 아이이다. 리즈의 생각이 저자 자신의 생각과 얼마만큼 일치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 사실상 이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 확실히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고 읽어야만 할 소설이었다. 다만 난 그저 저자의 중국에 대한 - 어쩌면 그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 애정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16. 죽이는 화학(캐스린 하쿠프, 이은영 역. 생각의힘. 2016. 376쪽)

: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독극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다. 대상이 되는 독은 14개이고, 저자는 각 약품의 화학적 특성 뿐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사용된 사례 및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상황까지 매우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 준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병원 조제실에서 근무하고 약제사 준비를 했던 만큼 약물에 정통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다른 어떤 도구보다 독극물 사용을 즐겨했으며 소설이었지만 독약의 맛이라든가 증상, 그 증상이 발현되는 시각 등 그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 이 책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데, 원제도 그렇고(『A is for Arsenic』) 각 챕터 제목들도 다 그런 식 - B is for Belladonna, C is for Cyanide - 이어서 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살인마의 흥얼거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것도 생각나고. 


사실 독극물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어서 생각날 때마다 이런 가벼운 화학책을 한 권씩 읽곤 하는데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많지는 않다. 그래도 이 책은 정리도 잘 되어 있고 각 독극물의 증상 뿐 아니라 중독되었을 때 취해야 할 조치 및 해독제에 대한 설명까지 있어서 애거서 크리스티 팬이 아니더라도 읽어 두면 좋을 거 같고 팬이라면 이 책을 옆에 두고 그녀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을 거 같다. 



17. 나의 미래에게(주민선. 창비. 2025. 404쪽)

: 새로운 바이러스가 돌고 어른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먼저 바이러스에 걸린 건 '나' 미아인데 깨어나 보니 언니 미래만 남아 있었다. 언니와 난 할머니가 기술 발전 이전의 시절처럼 살던 남쪽 지방의 전원주택으로 가기로 하고 짐을 꾸려 길을 떠난다. 


난 아포칼립스 이야기가 별로여서 이 책도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뜻밖에 깊이 들어오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자매는 당연하게도 여러 고난을 겪고 그 와중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한다. 타인은 당연히 쉽게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 되는 존재이고 누군가를 대할 땐 내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와중에도 사랑은 싹트고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순수하게 되돌아 오기도 한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정말 울컥했다. 현실의 나야 인류 따위 얼른 망해버렸으면 싶지만 책 속의 망한 세상에서도 그 모든 희생과 기억과 기록을 통해 그렇게 세대는 이어지고 미래는 생겨나는 것이다. 



18. 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정보라,최의택. 요다. 2025. 260쪽)

: 두 소설가가 릴레이로 쓴 여행(?) 소설. 국가 사업이라던 '석유 시추공 프로젝트' 사기에 휘말린 두 사람 - 보라, 의택 - 의 이야기다. 보라는 그럴듯한 꼬임에 넘어가 이 '대왕 고래 프로젝트'의 사업 자금 중간 모집책으로도 활동하고, 늘 그렇듯 꼬박꼬박 들어오던 인센티브는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끊기고 보라의 말만 듣고 돈을 송금한 다른 사람들의 원성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경찰 고발까지 당한 상황에서 보라 또한 자신의 돈마저 날릴 상황에 정신 못 차리는데, 이런 억울함을 알아주는 듯한 단톡방 '마이크'의 말에 그를 만나 함께 대책을 강구해 보기로 한다. 천안역에서 '마이크' 의택과 만난 '존' 보라는 그에게 자신이 속은 내용과 그 사기꾼을 잡아주겠다며 온 연락을 녹음한 걸 들려주는데, 의택은 그 녹음에서 그들의 근거지가 포항인 증거를 찾아내고,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한 편의 로드 무비 같은데, 많이 씁쓸하다. 둘 다 피해자이긴 한데 의택이 좀더 불쌍하고, 보라는 인간 자체가 안타깝고,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그냥 맨땅에 헤딩이고, 방법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결말도 안타깝긴 하지만 그보다 나은 결말도 없을 거 같다. 사기는, 피해자가 자신을 탓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범죄보다도 악질이다. 물론 덜한 범죄는 없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면 그동안 보였지만 외면했던 여러 '징조'들을 되짚어 보면서 나 자신의 아둔함을 가장 큰 잘못으로 꼽게 된다는 게, 그래서 피해자가 자기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는 게 정말 치명적이다. 짧지만 사기 범죄의 심각함을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이야기였다. 재밌으면서도 씁쓸하게 읽었다. 



19. 기묘한 이야기들(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역. 민음사. 2024. 284쪽)

: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같기도 한 단편들. 들어봤음직도 하지만, 어쩌면 내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지 모를 일들이지만 단순히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환경과 여성 문제, 노인 문제, 성과 속의 권력 이야기까지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한다. 저자의 문장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감탄하며 재밌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트란스푸기움>.



20. 빛의 조각들(연여름. 오리지널스. 2025. 264쪽)

: 컬러를 전혀 볼 수 없는 흑백증을 앓고 있는 '나' 뤽셀레는 깐깐한 업무 능력 테스트를 받을 후 화가 소카의 집에 청소부로 취직한다. 일이 까다롭다는 얘긴 들었지만 어차피 수술비 모을 때까지만 일할 생각이다. 집주인 소카는 심각한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신체의 일부라도 기계 강화 수술을 받은 경우 그 예술품을 인정받지 못하는 법에 따라 '오가닉'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소 헬멧 없이는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정기적으로 신체 검증을 받으면서. 이 집에는 또한 집사이자 소카의 매니저인 이모 위니, 소카가 어릴 때부터 그의 음식을 담당해 온 요리사 바사, 설비 담당 에르완이 살고 있다. 소카는 작품과 자신의 상태에 엄청나게 예민한데, 종종 등장해서 소카를 더 자극하곤 하는 마리안 - 위니의 딸 - 이 방학을 맞아 이든이라는 친구까지 데리고 온다.


색을 볼 수 없는 사람과 색으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 살기 힘들 정도이지만 자신으로 살기 위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사람과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수술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 둘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나이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게는 된다. 각자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덜어낼 방법은 있다는 것. 둘은 수영장 물이 반사하는 빛의 조각들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소용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거면 충분하다. 



21. 이야기를 들려줘요(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6. 528쪽)

: 메인 주 크로스비 타운. 이제는 거의 은퇴한 변호사 밥 버지스는 작가 루시 바턴과 매일 함께 산책을 한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자녀들, 주위 사람들, 각자의 배우자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간이, 이 우정이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오래 이 타운에 살아온 올리브 키터리지는 10월의 어느날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밥에게 전화를 해 루시 바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밥의 주선으로 루시가 올리브의 집에 방문해 말한다.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난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읽었고 읽을 때마다 중간에 한 번씩 위기가 닥쳤다. 이들의 행동에 공감이 되질 않아서.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내가 이들과 다르다는 걸, 그렇지만 이들의 마음이 모두 이해가 된다는 걸 느꼈고 그게 기뻤다. 어쩌면 "우린 모두 흐르는 모래 위에 서 있"(305쪽)다는 루시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삶에 언제 들어 오는지에 따라 그들의 허상을 만들어내죠."(305쪽)

"우리는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엉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중략)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306쪽)


난 독자로서 이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 그들과 다르고 때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싫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2. LIM : 숲 속에는 축복이(남궁지혜,돌기민,양기연,양수빈,윤단,이서수. 열림원. 2025. 228쪽)

: 젊은 작가 소설집. 한 가지 주제로 썼다고 볼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일단 뒤의 해설에서 젊음을 언급했으니 그냥 젊음이 주제였다고 하자. 그들 각자의 상황과 생활, 어려움은 익숙한 듯 새로웠으며 젊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하지만 나이 든다고 편해지는 것도 없긴 하지. 가장 재밌게 읽었던 건 <미식 생활>. 가장 공감 갔던 건, 아무래도 <친구를 데리고>.



23.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 392쪽)



24.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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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의 챕터 6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단지 그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있지 않나. 게다가 난 대략적인 상황도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다. 앞서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마 임종의 순간까지 그를 돌본 간호사 올가 게오르기예브나의 글이 너무도 따뜻했기에, 그녀의 글 중 나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스스로에게는 불만족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 위인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64)는 문장에 너무도 공감했기에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다.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물은 자기 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장례식과 이후의 챕터를 읽은 후 그의 삶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두기로 했다. 이 글은 상당히 길고 두서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사실, 그가 아닌 나를 위한 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노브고르드 지역의 세메노바의 가족 저택에서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 30) 그의 집안은 쇠락해 가는 귀족 계층이었다. 아버지 바실리 아르카디예비치는 군인이었고 어머니 류보프 페트로브나도 장군의 딸이었으므로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도 군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군사학교의 등록금은 매우 비쌌고, 마침 어린 세르게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별거로 그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지고, 할머니에게서 자라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수업을 빼먹고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등 부모의 감독이 없는 상황을 십분 이용했다(『라흐마니노프』 37). 마침내 음악원에서 낙제점을 받고 장학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 류보프는 세르게이의 아버지 쪽 친척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알렉산드르 실로티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실로티는 모스크바의 피아노 교사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그를 맡긴다. 즈베레프는 몇몇 새끼들’ – 즈베레프의 이름에 야수라는 뜻이 있어 붙은 별명(『라흐마니노프』 42) – 을 그의 저택에서 머물게 하며 가르쳤고 자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 제자들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즈베레프는 세르게이에게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철두철미한 연습 습관, 테크닉뿐 아니라 해석의 중요성, 문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르쳤다 고정적으로 오페라, 연극, 연주회 무대를 관람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저택에는 책이 무척 많았고, 그는 제자들이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는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세르게이는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궤도 내에 편입되었다(『라흐마니노프』 43). 차이콥스키는 1886년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만프레드 교향곡>의 악보를 보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1889년 그의 시험관이 되어 무언가를 평가하였는데 5점 만점에 +를 세 개나 덧붙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50).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시기에 타네예프로부터 대위법을 배웠다




열여섯 살에 즈베레프와의 불화로 저택에서 쫓겨난 뒤 세르게이는 고모 바르바라 사티나에게 맡겨지고, 사촌 나탈리아와 소피아와 함께 살게 된다. 이건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된다. 사틴 집안은 모스크바 남동쪽 광활한 초원지대인 이바놉카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1890년 여름, 이곳에서 네 명의 사틴 남매들 및 실로티를 비롯하여 세르게이의 고모부 알렉산드르 사틴의 누이 쪽 친척인 스칼론 자매들(나탈리야, 류드밀라, 베라)과 함께 지내며 세르게이는 첫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열일곱 살에 지은 가곡 비밀스러운 밤의 고요 속에서, 작품 4 3’은 베라에게 바쳐진 것이다((『라흐마니노프』 65). 그의 <피아노 협주곡 1> 1891년 여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이 곡은 1892 3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세르게이 본인의 독주와 사보노프의 지휘로 초연된다). 1892년 사틴 일가를 떠나 독립한 세르게이는 교습, 연주, 반주자 노릇을 하며 다양한 수입원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럼에도 작곡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첫 연주회 장소는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라흐마니노프』 74)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 및 쇼팽, 리스트를 연주했고, 자신의 <전주곡 C# 단조>도 처음 선보였다.


이후 189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첫 교향곡에 착수한다. 이미 그는 촉망 받는 신진 작곡가였으므로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1).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1897 3월에 초연된 이 <교향곡 1>은 혹평을 받았다. 사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이 많다. 류드밀라 스칼론, 나타사 사티나를 비롯한 측근들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형편없는 지휘를 탓한다. 라흐마니노프 자신은 여러 혹평들처럼 퇴폐적인 면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움이 문제라고 생각한 듯 하다. 어쨌든 작곡가는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창작 마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상반된 주장들도 있다. 단지 조금 의기소침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초연 직후 작곡가는 이 곡을 수정하는 방안을 고심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9). 그러나 여름을 지나며 세르게이는 점차 침체되었고 아마도 첫사랑 베라의 약혼이 트리거가 됐을 수도 있다고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짐작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후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레프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적 타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톨스토이가 사실은 그에게 독설을 날렸고, 그건 썩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했다(『라흐마니노프』 99). 그가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였고 그는 최면치료사였다. 알려졌다시피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2>을 달 박사에게 헌정한다.


첫 교향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897년부터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1899년에는 런던 앤 여왕 홀에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하여 자신의 곡들을 지휘함으로써 국제 무대에 데뷔한다. 또한 이 시기에 여러 소품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 110)고 얘기하는데, 아마도 대규모 악곡을 쓰지 못함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마침내 1899년 여름 사틴 집안의 지인이 머물던 크라스넨스코예에서 <피아노 협주곡 2>을 작곡한다. 이 곡은 1900 2악장과 3악장이 먼저 모스크바에서 초연됐고 1901 10월에서야 완전한 형태로 작곡가 자신이 독주를 맡고 실로티가 지휘를 맡아 초연된다. 이 곡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의 우상으로 급부상한다.


1902년 그는 사촌인 나탈리아 사틴과 결혼한다. 당시 러시아정교회에서는 사촌과의 결혼을 금했기에 나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는 황제에게 특별 허가 청원을 올리고, 결혼식을 주례해 줄 사제 군종 사제 를 겨우 구해 군부대 안에서 결혼한다. 결혼을 통해 안정을 얻은 세르게이는 1906년까지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닌다. 1903년에는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전주곡집, 작품 23>이 나왔으며 1904년에는 볼쇼이 극장 지휘자직을 수락해 많은 곡들을 편곡하고 지휘했다. 1904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2>으로 글린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에 1917년까지 이 상을 네 번이나 더 수상한다. 하지만 당시의 러시아 상황은 점점 불안해 지고 있었다. 1905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학살을 계기로 시작된 혁명은 1906년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들이 해외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여름에 라흐마니노프는 <열다섯 편의 가곡집, 작품 26>을 쓰는데 여기에는 그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노랫말을 따온 쉬게 하소서가 포함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체호프를 1898년 얄타 연주회에서의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1907년에는 둘째 타탸나가 태어난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에는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동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죽음의 섬>을 작곡하여 친우였던 화가 니콜라이 스트루베에게 헌정했고, <교향곡 2> <피아노 소나타 1>에 착수했으며 오페라에도 손을 댔으나 오페라 <몬나 반나>는 결국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악보는 나중에 빌라 세나르에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3번의 겨울을 드레스덴에서 보낸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러시아로 돌아온다. 이 시기는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서 모더니즘이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소위 말해 은 시대(silver age). 라흐마니노프는 모더니즘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적대적이었고(『라흐마니노프』 160) 1909년 공개적으로 슈트라우스와 막스 레거를 필두로 한 모더니스트 그룹과 등을 돌려 보수파꼬리표를 달게 된다(『라흐마니노프』 162). 이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동안 조성 음악에만 집착하는 꼰대 이미지로 비판을 받는데,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시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난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의 <피아노 협주곡 4>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나 - ,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에 집중하기로 한다.


1909 11월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무대에 데뷔한다. 1910년 초까지 이어진 첫 미국 투어는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피아노 협주곡 3>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고루한 졸작으로 혹평 받는다. 즈베레프 문하 출신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동문이었던 스크랴빈은 쿠세비츠키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로 나섰고 라흐마니노프는 니콜라이 메트너와 함게 그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당대 음악계에서는 과잉으로 흐르는 모더니즘에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라고 여겼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음악계에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한 후라,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안정을 찾았다. 특히 1910년부터는 그가 늘 애정을 갖고 있던 이바놉카의 공동 소유주가 되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바놉카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쓰게 된다. 1912년에는 첫 번째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는데 독일산 스포츠카 로렐라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현대성을 무조건 외면하거나 비판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는 평생 차를 좋아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현대 기술에도 늘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열세 편의 전주곡집, 작품 32>(1910)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3>(1911)을 출간을 비롯하여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세르게이는 불확실한 시대의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그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라흐마니노프』 197). 하지만 그는 늘 자기의심에 시달렸다(이는 그의 첫 교향곡 실패 이후 그의 고질병 같은 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의 뮤즈 역할을 한 마리예타 샤기냔과 편지를 시작으로 교류하게 된다. 참고로, 이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다. 샤기냔은 모더니즘에 경악했고, 라흐마니노프에게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으며(『라흐마니노프』 199) 1912년에 작곡된 <열네 편의 가곡집, 작품 34>에 영향을 준다(『라흐마니노프』 204). 1912 12월에 라흐마니노프는 가족들과 로마로 가 작품 35에 해당하는 <>을 쓰고, <> <피아노 소나타 2>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다.


1914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검사를 받지만 다행히 징집되지는 않는다. 그는 1915년 부상병들을 위해 쿠세비츠키와 함께 자선연주회를 다섯 차례나 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음악 신념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늘 동료와의 철학적 대화를 기피했지만 1915년 메트너와 과연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객관적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메트너에게 감명 받았지만 본인은 란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라흐마니노프』 216). 191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철야기도, 작품 37>을 완성했고 4월에는 보칼리제, 작품 34 14’를 완성했는데 이 두 곡은 전쟁의 여파를 음악적으로 숙고한 작품이다. 1915 4월에는 스크랴빈이 패혈증으로 급서한다. 6월에는 타네예프가 숨을 거둔다. 이를 계기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으로만 공연해왔던 그간의 습관을 버리고 스크랴빈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연주회 무대에 서면서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한다(『라흐마니노프』 224). 일련의 죽음들과 전쟁의 여파로 그는 작업 의지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샤기냔의 도움으로 표도르 솔로구프를 비롯한 상징주의 작가들의 시를 통해 생산성을 회복하고 <여섯 편의 가곡집, 작품 38>을 완성한다. 1916 10월에 초연된 이 가곡집을 헌정 받은 사람은 그러나 샤기냔이 아닌 니나 코시치라는 젊은 여성 가수였다. 이 관계는 여러 음악사학자들과 대중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지만 특히 프로코피예프와 엮여서 난 세르게이가 아내를 두고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1916년 작곡가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라흐마니노프는 대체로 어둡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9>를 쓴다. 1917 2월에는 드디어 볼셰비키 혁명의 불길이 오르고 라흐마니노프는 여름에 이바놉카에 갔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다. 100여 명의 농노들이 몰려왔고 그 중 나이든 농노들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후 작곡가와 가족들은 이바놉카를 떠나야 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 9 5일 얄타에서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 E플랫장조>였다. 12 23, 작곡가는 가족들과 친구 니콜라이 스트루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의 연주회가 명목이었고 짐 속에는 겨우 2천 루블과 최소한의 생필품, 오페라 <몬나 반나>의 악보, 림스키코르샤코프의 오페라 <황금 수탉>의 스코어뿐이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240).


이후 코펜하겐을 거쳐 191811월 작곡가와 가족들은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 이미 그는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연주자 겸 지휘자로 활동하기로 맘 먹은 상태였다. 1918 12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성공적인 데뷔 리사이틀을 가진 그는 언어적 장벽을 넘기 위해 비서를 고용하고 차례로 다그마르 리브너, 예브게니 소모프, 니콜라이 만드롭스키 에이전트를 두며 스타인웨이의 협찬을 받아 미국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이후의 작곡가의 삶을 이전 시기만큼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 느낌이다. 이 시기의 생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에 더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난 두 권 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작곡가의 미국 망명 이후의 삶은 사실상 창작자로서의 삶보다는 비르투오소의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작곡가 자신도 이를 매우 괴로워했고 창작에 몰두하고 싶어했지만 시즌이 끝날 때마다 채찍으로 맞는 기분이라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61) - 가족들의 생활 안정 또한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그는 경제적인 측면을 늘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1919년 토머스 에디슨과의 녹음을 시작으로 몇 차례 음반을 녹음했고, 이는 망명 러시아인들에게 향수를 달래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재료가 되어 주었다. 음반뿐 아니라 그의 연주회는 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라흐마니노프는 망명 동포들과 소련에 남은 친지들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다. 가족 생활에서는 1924년 이리나가 표트르 볼콘스키 공작과 결혼했으나 1925년 이리나의 임신 중에 볼콘스키 공이 사망하고, 얼마후 첫 손녀 소피아가 태어난다. 이에 딸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그는 두 딸의 이름을 딴 출판사 타이르(Tair)를 설립한다. 둘째 타탸나는 1932년 보리스 코누스와 결혼했는데, 작곡가의 조카 소피아 사틴 처제 소피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에 따르면 세르게이는 이 결혼이 못마땅했는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3).


작곡가로서 그는 <피아노 협주곡 4> 1914년 여름에 착수했으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1925~1926년 겨울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연주회를 잠시 쉬고 파리와 드레스덴, 칸 등을 여행하며 완성했다. 또한 합창과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마지막 작품 <세 개의 러시아 민요, 작품 41>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1927 3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나 <피아노 협주곡 4>은 혹평을 받았고 이는 작곡가의 불안을 자극해 세르게이가 1941년까지 계속 수정하도록 했다. 1931년에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42>, 1934년에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작품 43>을 작곡했고 1936년에는 빌라 세나르에서 <교향곡 3, 작품 44>를 완성해 1939년에 개정했다. 1940년에는 <교향적 춤곡, 작품 45>가 롱아일랜드에서 작곡됐고 이 여섯 곡이 그가 망명 생활 동안 만든 곡 전부이다.


위에서 얘기했듯 망명지에서의 비르투오소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을 분해해 속속들이 이해한 다음 무대에서 재조합하는 헌신적인 스타일이었기에(『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86)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 와중에 1930년 그는 스위스 루체른에 땅을 사고 그와 아내의 이름을 딴 빌라 세나르를 건축한다. 이 집은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그에게 휴식이 되어준다. 1938 8 25, 바그너가 살았던 루체른의 호숫가 빌라의 경사진 잔디밭에서 루체른 페스티벌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하여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브루노 발터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0).


그의 쉴 새 없는 연주 일정은 당연하게도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만성적인 요통과 손의 신경통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1935년의 일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36). 1938년에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처방을 받기도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45). 하지만 가정 경제에 대한 걱정은 그를 지속적인 연주회로 내몰았고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총 1,457회 무대에 섰고 그중 1,189회는 망명자로서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40) – 결국 1943 2 22일 연주회를 취소하고 기차로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편안하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3 28일 영면한다.



이렇게 길게 그의 생을 얘기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아니, 내 말은 그가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 “6피트 반( 198센티미터)짜리 우거지상이든, 평론가 에릭 블롬이 평가했듯 자신의 시대에 전혀 속하지 못한 사람(『라흐마니노프』 16)이든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휘자 쿠세비츠키와 러시아 음악 출판사를 차려 러시아 작곡가들이 수입을 확보하고 특히 유럽 대륙 내에서 저작권 지위를 확립하도록 했다(『라흐마니노프』 155). 그는 곤궁에 처한 고국을 위해 자신의 연주회 수익금을 기꺼이 내놓았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 <레닌그라드>가 탱글우드의 버크셔 페스티벌에서 축하곡으로 연주된 것에 마음 상해하는 사람이었으며(『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3), 니콜라이 메트너, 글라주노프, 콘스탄틴 발몬트를 비롯하여 친분이 있든 없든 러시아 출신 음악가 및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의 라흐마니노프 아카이브에는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보낸 수많은 감사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15). 그는 심지어 자신보다 늦게 미국에 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을 출판사 타이르에서 출간하려고도 했다. 그가 출판사를 세운 목적은 비단 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것만이 아닌 출판에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 작가들의 신간을 망명자 사회에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4)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에 헌신했다. 그는 <<롱비치 인디펜던트>>지와의 1943년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에서만 나 자신이 됩니다. 음악은 평생을 바치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평생을 바쳐도 음악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38)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는 조국을 늘 사랑했다. “나는 러시아 작곡가이며, 내가 태어난 나라가 내 기질과 관점에 영향을 미쳤소. 음악은 내 기질이 만든 것이오. 그러니 러시아 음악이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1)라고 얘기했으며, 그가 머무는 집은 늘 러시아풍으로 꾸며졌고 동포들을 늘 도왔으며 심지어는 러시아 의사와 간호사에게만 진료를 받았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도 러시아 전선의 소식을 늘 궁금해하며 러시아군이 몇몇 도시를 재탈환했다는 소식에 신이여, 감사합니다. 부디 그들에게 힘을 주소서!”라 말하기도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59)


<<유타 이브닝 헤럴드>> 1938 12 6일자에 실린 리뷰에서 얘기했듯 라흐마니노프는 라흐마니노프이며 거의 불멸의 존재”(『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3)이다. 내가 그의 죽음을 읽고 눈물을 쏟은 까닭이기도 하다.


난 이 글을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연주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한 전주곡들을 들으며 썼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3> <교향곡 2> 이지만 오늘은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서만도 1,400번 이상 연주했다는, 그래서 지겨워했다는 이 곡이 계속 듣고 싶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그리고 그를 연주한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감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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