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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한 해 동안 315권, 103,255 페이지를 읽었다. 하루 평균 282 페이지 정도. 올해도 하루 평균 300 페이지를 읽는 건 실패했다. 내년엔 가능하려나....? 


이걸 쓰기 위해 지난 독서 목록들을 보다 보니 2월에 가장 많이 읽었던데, 가장 짧은 달에 대체 얼마나 편안했길래 그랬나 싶지만 기억나는 건 별로... 그저 내년에도 무탈히 읽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찾아주시고 리뷰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건강하게, 즐겁게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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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2-3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덜덜.... 한 해 315권이라니요!!! 저는 학부때 년간 평균 100 권이었고 그 후로는 학부 기록을 깨본적이 없었습니다 ㅠ 어구 브끄러라~ ㅠ (그래봤자 학부때 독서가 겨우 400권인데, Yjin 님 1년치 밖에 안되네요 ㅠ).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Yujin 2026-01-02 12:26   좋아요 1 | URL
저도 학부 때 일년에 딱 100권씩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경의를 표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ㅎㅎㅎ 얇은 책들도 많아서요... 올해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차트랑님도 즐거운 독서 되세요~ ^^
 

1.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카슨 매컬러스, 서숙 역. 시공사. 2014. 454쪽)

: 미국 남부의 소도시. 이 마을의 청각장애인 존 싱어는 역시 청각장애인인 친구 안토나풀로스와 함께 지내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안토나풀로스의 반복된 기행으로 그의 형이 안토나풀로스를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와 늘 모든 생활을 함께 하던 싱어는 친구와 함께 살던 방을 빼고 켈리 가족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마을의 24시간 식당 '뉴욕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쓸쓸히 지내는데, 언제인가부터 그의 방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켈리네 딸 믹, 급진적 사회주의자이며 목적을 가지고 이 마을에 온 블런트, 흑인 의사인 코플랜드, 그리고 뉴욕카페 주인 비프 브레넌. 이들은 각자의 문제가 있고, 서로는 대화하지도 마주치지도 않는다. 


전쟁 직전의 터질 듯한 이념 갈등이 이 작은 도시에서도 느껴진다. 뿌리깊은 인종 갈등은 물론이고, 과격한 진보주의자와 심드렁한 사람들, 극단적인 종말론자까지. 하지만 이 작품은 당대의 생활 모습보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되는 소설이다. 믹 켈리가 가장 안쓰러웠다. 머릿속에 늘 들리는 그 음악들. 그 음악들을 연주할 방법도, 악보에 옮길 방법도 찾지 못하고 심지어는 음악을 듣기 위해 남의 집 마당에 몰래 숨어들어야 하는 아이. 가장 안타까운 건 믹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이 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상이 맘대로 안 되는 블런트와 코플랜드. 인생이 쉽지 않은 브레넌. 하지만 가장 외로운 건 역시 싱어.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온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모두가 끊임없이 자기 얘길 하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게, 그 또한 그들에게 답을 해줄 마음이 없다는 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관계 아닐까. 때문에 싱어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가 되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역시 믹. 앞으로 누가 이 소녀의 마음을 잡아줄 수 있을까. 



2. 저는 38세에 죽을 예정입니다만(샬럿 버터필드, 공민희 역. 라곰. 2025. 376쪽)

: 38세를 일주일 앞둔 넬. 19년 전 여행지에서 자신이 죽을 나이를 들은 넬은 처음엔 그냥 흘려 넘기려 했으나 친구가 예정된 날에 죽는 걸 보고 지난 시간 동안 이 날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고 가고 싶은 곳들을 모두 가고. 이제 영국으로 돌아온 넬은 주변 정리를 시작하는데, 가구를 중고로 팔던 중 침대를 사러 온 남자에게 자신의 얘기를 다 해버린다. 남자와 밤까지 보낸 넬은 통장이며 sns를 모두 정리하고, 그동안 해야 했던 말들을 가장 소중한 다섯 명에게 편지로 남긴 뒤 최고급 호텔로 들어가 마지막 날을 준비하지만 죽음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제목에 낚였다. 물론 첫 몇 쪽 읽고 내가 기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뒷표지의 추천사를 믿었고 주인공이 꽤 사랑스러운 듯 해서 계속 읽었는데 갈수록 등장인물들이 다 별로. 바람 핀 여자랑 결혼해서 전부인과 살던 집 근처에 계속 살고 있는 아빠나 진실을 알려줬더니 넌 내내 날 부러워했고, 내 결혼 생활이 부러워서 재 뿌리는 거라고 말하는 언니도 별로였지만 가장 별로였던 건 주인공이랑 연결되는 그 남자. 그럴 거라는 건 처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스포)

자기와의 잠자리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심리는 영국이라서야, 아님 나만 고지식한 거야?



3. 세상에 똑같은 개는 없다(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강병철 역. 디플롯. 2025. 344쪽)

: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방법론을 논하는 책. 저자들은 인지과학자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강아지들 중 어떤 개체들이 치료 보조견에 적합한지를 찾아내기 위해 뇌가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듀크 대학교 내 강아지 유치원에 입학시켜 테스트와 교육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흔히들 가지는 견종별 편견 - 예를 들면, 보더콜리는 머리가 좋다 - 을 배제하기 위해 대상 강아지들은 모두 래브라도 리트리버나 골든 리트리버 교배종이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견종적 편견은 틀린 것. 같은 견종 내에서도 인지적, 성향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인간으로 대체해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인종에 따른 편견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이는 단순한 행동 하나에도 인지적인 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복잡한 행동처럼 보여도 인지가 작용하지 않고 그저 본능적으로 행하기도 하기 때문. 


저자들이 말하는 건 단순하다. 각 개체의 차이점과 개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한두 가지의 지표로 개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눈 색깔이 털 색에 영향을 미치지 않듯, 길을 잘 찾는다고 해서 인간의 몸짓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다중 지능 이론.


"우리가 강아지 유치원을 시작하기 전에 개 연구자들은 주로 기질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가 얼마나 쉽게 놀라고, 새로운 사람이나 장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검사했다는 뜻이다. 인지가 개성에 미치는 영향은 종종 터무니없이 과소평가되었다. (중략) 일반 지능은 한 가지 유형의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다른 모든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뛰어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억력 게임을 아주 잘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게임도, 실지어 기억력이 필요하지 않은 게임도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 (중략) 인지는 고려해야 할 변수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개에게서 확인되는 독특한 개성을 만다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안으로 다중 지능 이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다양한 유형의 인지적 능력이 존재하며, 각각의 능력은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중략) 다양한 인지 능력은 저마다 능력치가 다를 수 있으며 그 조합에 따라 개체의 무한한 다양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78 - 79쪽


"양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양육 방식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교적인 접촉을 전혀 허용하지 않거나 방치, 학대한다면 그 영향은 강아지에게 매우 빠르고 심하게 나타난다. 사회화에는 어떤 문턱값threshold이 있는 것 같다. 강아지가 문제없이 잘 자라려면 새로운 개, 사람, 장소에 강아지를 일정 정도 노출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턱값을 넘어서는 노출은 대개 눈에 띄는 차이를 불러오지 않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훌륭한 개가 되려면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190쪽


읽으면서 새로운 이론을 접한다기보다는 저자들의 권위를 빌려 기존의 내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 했다. 그래도 강아지를 처음 길러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책 뒤의 부록이. 


모든 강아지는, 모든 생명은 각자의 개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고 모두 소중하다.



4. 밀림의 연인들(김달리. 안전가옥. 2023. 196쪽)

: 유명 조각가의 딸 다미는 가진 게 하나도 없는 남자 석영의 진심을 믿고 결혼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석영은 메타버스 플랫폼 '밀림'에서 만난 여자 초코페와 가상의 아이까지 낳으며 푹 빠져 있다. 초코페가 자신을 구원했노라 말하는 석영의 말을 인공지능 가사도우미 로봇 키미를 통해 들은 다미는 그동안 들여다 보지도 않았던 밀림에 접속해 가상 불륜 커플을 추적한다.


다미가 자신을 갉아먹어가며 석영과의 관계를 헤쳐나가는 게 마음 아팠다. 왜 그냥 버리질 못하니. 그냥 편하게 버릴 수도 있잖아. 하지만 이게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다미의 애정이 옮아가는 게 흥미로웠다. 공감하진 못했지만. 어찌됐든 내가 바랐던 건 다미의 평화였으니. 그들의 평안이 오래 가기를. 



5. 바질 이야기(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이영아 역. 빛소굴. 2024. 270쪽)

: 연작 소설집. 중산층 집안의,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무렵부터 대학에 들어가서까지의 바질의 이야기들.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성숙하지도 못하고 그저 사랑에 빠지는 것만 잘하는 바질의 서툴고 안쓰러운, 하지만 호기롭고 씩씩한 성장기이다. 저자의 자전적인 모습들이 가장 많이 반영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개츠비>>도 생각이 나고, <<밤은 부드러워>>의 주인공도 떠올랐다. 그들에게 느꼈던 기특함과 안타까움이 다시 한번 느껴졌달까. 매 작품이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6. 질긴 매듭(배미주,정보라,길상효,구한나리,오정연. 사계절. 2025. 264쪽)

: '모계 전승'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여성들의 연대를 얘기한 배미주. 대를 이어 딸이 책임져야 하는 돌봄노동과 출산에 관해 고발한 정보라. 길상효는 처음에는 살짝 지루했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전에 읽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성들>>(클라리사 에스테스)이라는 책이 떠올랐는데 뒤의 작가 인터뷰에서 작가가 야생성으로의 회귀를 언급해서 반가웠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 중 다이애나 여신 얘기의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고. 


구한나리는 너무 아팠다. 지효의 아픔만으로도 속상했는데 원인이 이야기된 순간 책을 잠시 덮어야 했다. 제발 세상 모든 여성들이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최소한 어린 여성들만이라도. 오정연도 쉽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힘과 목소리에 대한 믿음이 주는 희망이 보여서 위로가 되었다. New In Old. 오랜 일과 오랜 꿈. 



7. 구월의 보름(R. C. 셰리프 , 백지민 역. 다산책방. 2025. 456쪽)

: 런던 근교에 사는 스티븐스 가족은 매년 9월에 보름 동안 해안 도시 보그너로 휴가를 떠난다. 신혼여행으로 이 도시를 방문했던 이래 아이들을 데리고 매년 되풀이되는 휴가 여행.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곳에서 환승하여 같은 곳 - 시뷰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 - 에 묵으며 시간을 보낸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스티븐스 부인은 매년 긴장을 하고, 스티븐스 씨는 매년 휴가 전날의 할 일 목록을 만든다. 올해는 열여덟 메리와 열일곱 딕이 친구와 휴가를 보내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췄었으나 다행히 이번에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 시절의 휴가 브이로그. 왜 재밌지?하면서 재밌게 읽었다. 스티븐스 가족의 보름 간의 일정에서 마지막에 스티븐스 씨가 회상하듯 다른 해와 다른 점은 두 가지 정도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평화롭고 평범한 휴가는 이번이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딕과 메리의 성장, 시뷰의 쇠락과 여주인의 건강 문제... 물론 스티븐스 가족이 이를 알아챈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티는 전혀 내지 않았고 - 휴가 마지막날 내년을 기약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래서 이번 휴가가 특별한 건 아니다. 그냥 보통 가족의 평범한 휴가, 그 안에서 계속 발견되는 소소한 행복과 가족 구성원들 각자의 작은 성장 - 메리의 연애, 딕의 직업적 성찰, 스티븐스 씨의 과거 회상. 잔잔하지만 출렁임을 멈추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꽤 즐거웠다. 사실 처음 집어들 땐 그저 그 시절의 생활상을 좀 들여다 보는 정도만 기대했는데... 어쩌면 기대가 없어서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PS. 이 출판사의 번역, 교정은 늘 기대이하이다. 원래도 엉망인 문장을 각오하고 읽기 시작하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 이렇게 번역기 돌린 어색한 문장은 진짜 오랜만. 



8.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예소연. 허블. 2023. 224쪽)

: 3차 대전 후 세상은 멸망한다. 사막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잔류 용병들. '워커'라 불리는 이들은 나름 커뮤니티를 만들어 생존하는데, 여성 노인 워커인 창, 아샤, 말리는 머물던 워커 커뮤니티에서 나와 예전 용병 사수 정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에게서 정이 데리고 있던 고양이 치즈의 존재를 인지한 이들은 정이 가까이 있음을 확신하고 곧 치즈를 만난다. 


결말이 조금 슬펐다. 하지만 최선이기도 했다. 마지막 선택은 그들이기에, 사랑을 믿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으니. 그래도 치즈는 계속 생존할테니 괜찮다. 어쩌면 그게 정말 답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함께하는 것. 그게 사랑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9. 로즈웰 가는 길(코니 윌리스, 최세진 역. 아작. 2024. 480쪽)

: 프랜시는 대학 때 룸메이트였던 세리나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앨버커키 공항에 도착한다. 세리나는 대학 때 프랜시를 구해줬고 지금도 절친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이상한 남자들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했다. 이번에 결혼하겠다는 남자도 외계인 덕후인데, 로즈웰의 외계인 박물관에서 결혼한다고 하는데 마침 오늘 로즈웰 외곽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발견됐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세리나를 만나지만 세리나의 약혼자는 물론 세리나도 너무나 정신이 없고, 이상한 들러리 드레스에 적응할 새도 없이 세리나의 부탁으로 차에 물건을 가지러 간 프랜시는 회전초 모양의 외계인에 의해 차 째로 납치된다. 외계인의 강압적인 지시에 따라 운전을 하던 프랜시는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남자 웨이드를 태우는데...


그동안 읽었던 이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역동적이고 재미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 외계인 대소동. 캐릭터들은 좀 전형적이지만 한 명 뺴곤 다 사랑스럽고, 좀 과하긴 하지만 해피엔딩이고. 과하다고 하는 건... 연애 면에서 그렇다는 거. 맞다, 이거 결국엔 사랑 얘기이고 연애 소설이다. 세리나가 프랜시에게 어떻게든 남자를 붙여주려 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 남자가 이 남자일 줄은 몰랐네. 게다가 정체가 그럴 줄도 몰랐고, 인디가 결론을 그렇게 낼 줄도 몰랐고. 사랑스럽긴 한데 과하다는 게 이런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꽉 찬 해피엔딩. 진짜 신나게 읽었다. 



10. 조금 망한 사랑(김지연. 문학동네. 2024. 336쪽)

: 조금 망한 인생들. 살아날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뼈를 갈아내는 노력을 해야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는. 대부분 속터지는 캐릭터들이어서 가슴 치며 읽었다. 다들 포기하는 데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놓아버리는 건 못해서 띄엄띄엄 확인도 하고 연락도 하고... 이게 현실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서 더 답답하고, 그럼에도 희망은 잃지 않았으면 좋갰고, 정신승리라도 하면서 어떻게든 생이 이어졌으면 좋겠고... 그렇게 공감하며, 안도하며 읽었다. 가장 좋았던 건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11. 가족 살인(카라 헌터, 장선하 역. 청미래. 2025. 584쪽)

: 20년 전, 런던 사교계의 여왕 캐럴라인의 연하 남편 루크 라이더가 자택 정원에서 살해당한다. 최초 발견자는 캐럴라인의 딸. 당시 집안에는 캐럴라인의 막내 아들 가이가 있었고, 루크는 구타를 당하고 정원석에 부딪혀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10살이던 가이는 아무 것도 몰랐고 범인 또한 잡히지 않았다. 20년이 흐른 지금,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가이는 살인범을 찾고자 리얼 크라임 쇼 인퍼머스의 감독을 맡는다. 법정 심리학자, 뉴욕 경찰청 출신 탐정, 런던 경찰청 퇴직 형사, 현직 법의학자, 왕실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패널은 당시의 사건을 검토하고 직접 조사에 뛰어들며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사실 범인은 처음에 짐작한 그 사람이어서 내겐 그다지 반전이 아니었다. 다만 실제 방송을 보는 듯한 서술 방식과 조사가 거듭될수록 밝혀지는 여러 진실들과 등장인물들의 관계성이 꽤 흥미로웠다. 사실 모든 범죄 소설이 그렇긴 하지만 범죄 자체의 사실과 인과관계는 요약해 놓으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아서 어떤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내고 등장인물들이 그걸 어떻게 소화하고 처리하는지가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나 영리했다. 



12. 단명소녀 투쟁기(현호정. 사계절.  2021. 152쪽)

: 고3 수정은 입시 전문 점쟁이를 찾아가 대학에 갈 수 있는지를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스무 살에 단명한다는 것. "싫다면요?"라는 대답을 하고 돌아나와 수정은 아래층 떡집에서 백설기 100조각을 챙겨 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길을 떠난다. 역 앞에서 술취한 아저씨의 공격을 받은 수정에게 날개 달린 개가 나타나 수정은 그 개의 등에 타고 날아가던 수정은 이안을 만난다. 자신과는 반대로 죽기 위해 길을 떠난 이안과 동행하기로 한 수정.


연명 설화를 재해석했다는데, 난 연명 설화를 몰랐고 처음엔 그저 심드렁하게 판타지인가보네, 하며 읽었다. 읽기에 따라 내용은 좀 중구난방일 수도 있고 산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을 피해 떠나는 소녀의 기개만큼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도록 이끌었다. 결말을 꼭 알고 싶었다. 그리고 수정을, 세상 모든 열아홉 소녀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단명하는 소녀는 없기를, 모두 무사히 어른이 되어 오래오래 살기를. 누군가 죽으라고 혹은 죽을 운명이라 해도 수정처럼 "싫다면요?"하고 정색하기를. 



13. 크레이브 1, 2(트레이시 울프, 유혜인 역. 북로드. 2024. 400쪽,360쪽)

: 영어덜트 판타지로맨스. 부모님을 한날한시에 잃고 유일한 가족인 삼촌과 사촌이 사는 알래스카로 가게 된 그레이스. 삼촌은 그곳에서 사립학교를 운영중이다. 어마어마한 추위를 뚫고 겨우 도착한 캐트미어 아카데미는 거대한 성 같은 곳. 아무리 전학생이라지만 도착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쏠리는 적대적인 눈길이 부담스러운 그레이스는 마중나왔던 사촌 메이시가 잠시 자릴 비운 사이에 로비에 있던 신기한 모양의 체스판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용 모양의 말을 잡으려는 순간 엄청나게 섹시하고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는 남학생이 말을 건다. 당장 나가서 사라지라는 그의 말. 그와 잠시 언쟁을 벌인 그레이스는 그가 이 학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잭슨 베가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학생들의 장난을 빙자한 괴롭힘에서 그레이스를 구해주는 잭슨. 그런데 다음날 잭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년이 그레이스에게 다가온다. 다정한 분위기의 플린트.


솔직히, 시리즈물의 첫번째 이야기라는 걸 알았으면 안 읽었을 거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트와일라잇과 비슷하다. 섹시하고 위험한 뱀파이어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용, 그리고 마녀와 늑대인간. 세계관 구성이 나쁘지 않고 플롯도 나름 괜찮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많이 유치하다. (어쩌면 그냥 내가 꼰대인지도.) 어떻게 보면 캐릭터 자체가 좀 전형적일 수도 있고. 정의를 실현했지만 부모와 일족에게서 비난을 받는 황태자와 그가 첫눈에 반한 반려, 그리고 그걸 약점삼아 이용하는 악당. 이 책의 끝부분도 2권을 염두에 두고 끝나긴 했는데, 2권이 번역출간되어도 안 읽을 거 같다. 아니, 어쩌면 이번처럼 도서관 대출 권수 채우겠다고 들고 와서는 꾸역꾸역 읽을 수도.


ps. 주인공들의 이름이 너무 올드하다고 생각했는데, <<블루 아워>>를 읽다가 "요정 같고 팔다리가 길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블루 아워>> 64쪽) 이라는 구절을 읽고 영어권에서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가진 이미지가 이건가 싶기도 했다. 그치만 <<블루 아워>>에서도 그레이스는 나이 많은 할머니인데. 



14. 진공붕괴(해도연. 한겨레출판. 2025. 400쪽)

: SF 단편집. 작품들 초반에 이론 설명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해 못해도 내용을 받아들이는데에는 무리가 없다. 나같은 문과 100% 머리로도 잘 읽을 수 있다는 얘기. 잘은 모르지만 이론들이 다 신박하기도 하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용이지.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마음. 모든 작품이 다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결말이 다 맘에 들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콜러스 신드롬>이었지만 내용은 <마리 멜리에스>가 가장 좋았다. 



15. 팽이(최진영. 창비. 2025. 356쪽)

: 작가의 첫번째 단편집의 리마스터링 판. 초창기 작품들이니만큼 진중하고도 생생하다. 다만 화자들이 처한 상황들이 편하지는 않다. 삶이 항상 쉬울 수는 없지만, 그게 온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내 주위에서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 누군가에 의한 거라면...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기의 내겐. 그러므로 가장 좋았던 건 <첫사랑>. 



16. 블루 아워(폴라 호킨스, 이은선 역. 문학동네. 2025. 408쪽)

: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중인 예술가 바네사 채프먼의 작품에 인간의 뼈가 사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바네사는 이미 사망했고, 바네사의 작품을 모두 상속받은 페어번 재단에서는 이 문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고자 바네사 채프먼 전문가이자 재단 큐레이터인 베커가 바네사가 살던 에리스 섬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바네사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간병인 그레이스가 살고 있다. 스스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 그레이스가 바네사의 작품을 모두 페어번 재단에 양도하지 않고 있는 문제도 해결할 겸, 베커는 그레이스에게 호감을 얻고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리고 바네사와 그레이스의 이야기, 바네사와 (전)남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듣게 된다.


이 작가의 전작이 내 취향이 아니었어서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증을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해 내다니.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과 그의 웃음을 보고 싶지만 그가 나 없이는 행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나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모든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 움직였고, 그래서 그들의 단점이 거리낌없이 드러났고, 그래서 난 힘들었다. 소설 속 그들은 당당했는데 소설 밖 나는 왜 부끄러운가.  바네사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바네사의 폭풍같은 감정기복을 지켜보는 그레이스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결말은... 그레이스가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겠지만 굳이...? 어쨌든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화가 났고 안쓰러웠다. 



17. 나름에게 가는 길(전삼혜. 위즈덤하우스. 2024. 72쪽)

: 시현은 드넓은 우주에서 쓸만한 우주 쓰레기 '데브리'를 모아 파는 데브리 피커. 데브리에는 가끔 우주의 사념들이 엉킨 '나름'이 붙는다. 시현이 우주로 나오게 된 건 오래전 죽은 동생 아영을 우주 장례 치른 후. 당시 최초였던 우주 장례는 업체에서 유골을 분실하는 바람에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줬고, 시현의 부모는 아직도 장례 업체에서 분실된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좌표를 보내올 때마다 시현에게 그곳에 가보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우주로 보내진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나름으로 나타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중에는 이 책 속의 누군가처럼 유령이라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 하지만 우린 모두 알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결코 내가 알고 사랑하던 그 존재와 같지 않다는 걸. 그렇지만 우린 또한 알고 있지. 그렇게라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을. 애도는 아무리 길어도, 깊어도 충분치 않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 마음을 비난할 수 없는 것.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 



18. 여름 손님들(테스 게리첸,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5. 428쪽)

: 메이든 호숫가의 여름 별장. 코노버 가의 둘째 아들 에단은 이곳에 그다지 좋은 추억은 없지만 아버지 조지의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 수잔과 아내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10대 딸 조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매사에 거침없는 형 콜린과 완벽한 미모의 형수 브룩, 그리고 어릴 때부터 브룩의 과잉보호 아래 자라난 병약한 조카 키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이미 와 있다. 수영 선수인 조이는 오자마자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거 에단은 오랜만에 안 써지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잠시 뒤 조이가 이 지역의 농장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며 농장에 놀러가도 되냐고 하자 건성으로 허락한 에단. 그런데 그날밤 조이는 집에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스포)

마티니 클럽 2편. 전작과는 결이 다르다. 사실 전작같은 재미를 기대했는데. 은퇴한 스파이 5인방은 매기의 이웃인 루터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자 사건에 개입하고 이번에는 경찰서장대행 조 티보듀도 점점 마음을 연다. 이들이 실력과 인맥을 동원해 사건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은 여전히 흥미진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맥거핀에 불과했다. 드러난 진실은 그저 추악한 한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된 비극. 진실이 드러났을 때 난 그 모든 원인을 제공한 그 인간과 그걸 그딴식으로 덮으려 했던 또다른 미친놈을 욕했다. 이건 살인자만 비난 받는 건 억울해. 물론 죽은 이가 가장 불쌍하지만 이 책에는 그외에도 냉전시대 국가의 맹목적인 군사력 경쟁에 희생된 또다른 개인들이 나온다. 이들이야말로 가엾지. 책에서는 이제라도 밝혀지지만, 과연 현실에서는... 주인공들의 전직을 생각해 볼 때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소재였을지언정, 이번 이야기에서는 글쎄... 물론 마지막에 매기도 지적하긴 하지만. 3편은 1편같았으면 좋겠다. 



19. 단어가 내려온다(오정연. 허블. 2021. 264쪽)

: SF 단편집. 첫번째 작품 <마지막 로그>가 정말정말 좋아서 뒤의 작품들도 기대를 잔뜩 갖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첫번째 작품이 가장 좋았다. 표제작은 '15세가 되면 자신만의 단어를 받는다'는 설정이 정말 흥미로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받고 싶은 하나의 단어를 못 고르겠다. 단어는 다 좋아, 다 옳아. 사실 다른 작품들도 다 좋긴 했다. 작품들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생명 존중 사상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 가부장제에 대한 풍자와 비판에 크게 공감했고 그걸 이렇게 풀어낸 작가의 독창성에 감탄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앤솔러지에서 처음 접했고 본격적으로 읽은 건 처음인데 작품들이 다 흡족해서 앞으로 읽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기대된다. 



20. 완벽한 결혼(제네바 로즈, 박지선 역. 반타. 2025. 412쪽)

: 워싱턴 최고의 형사 전문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세라 모건. 늘 그렇듯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하지만, 소설가 남편 애덤의 바람대로 호숫가 별장에 갈 짬을 내지 못한다. 애덤은 늘 그렇듯 혼자 그곳에 가서, 현지의 카페에서 일하는 캘리와 외도를 한다. 세라가 퇴근을 한다는 문자에 자고 있는 캘리에게 쪽지를 써두고 서둘러 집으로 온 애덤. 그런데 다음날 캘리가 별장 애덤의 침대에서 피투성이로 살해된 채 발견됐고 용의자로서 애덤이 체포된다. 세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만 애덤의 변호를 맡기로 한다.


계속 찡찡대는 개찌질이 여미새 애덤과 그 엄마 때문에 중간중간 짜증을 내며 읽었지만 합당한 결말에 만족스러웠다. 후기를 보니 범인을 예측했다는 리뷰들이 종종 보이던데 나는 전혀 짐작도 못했고 - 내가 짐작했던 유일한 진실은 보안관 스티븐스의 정체(?) 뿐 - 등장인물들이 가진 과거사마저도 내겐 흥미진진했다. 스핀오프가 나와도 괜찮겠어. 



21. 무드 오브 퓨쳐(윤이나,이윤정,한송희,김효인,오정연. 안전가옥. 2022. 324쪽)

: 미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스포)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갔고 작품들이 다 좋긴 했지만 읽으면서 꼭 이렇게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 싶기는 했다. 첫번째인 윤이나와 마지막 오정연의 작품은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결말이 아니어서 오히려 맘에 들었다. 윤이나의 작품은 사랑과 관계에 있어서 맹목성과 오만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서 좋았다. 사실 다섯 작품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건 오정연. 작가의 말에서 일부러 성별을 특정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이 완성되지 못하는 건 아니다. 



22. 헤이팅 게임(샐리 쏜, 비비안 한 역. 파피펍. 2021. 484쪽)

: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재밌게 읽은 혐관 로맨스. 루시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민 출판사에 대표실 비서로 입사했지만 언젠가는 편집부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벡스터 출판사와 합병을 하게 됐고, 공동 대표 체제로 가면서 벡스터 대표의 비서인 조슈아와 한 사무실을 쓰게 됐다. 그런데 첫 만남부터 재수없게 굴던 조슈아는 일하는 내내 틱틱거리기 일쑤. 루시와 조슈아는 하루종일 서로를 디스하고 지적하기 바쁘다. 사실 루시는 여러 사람과 다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어하기에 이런 관계가 피곤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퇴사 예정인 디자이너 대니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루시. 루시가 한 데이트 약속이 거짓말이라며 빈정대는 조슈아가 데이트 장소로 데려다 주겠다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갑자기 루시에게 키스를 한다.


초반에는 좀 열받아 하며 읽었다. 특히 엘리베이터 키스 장면. 명백한 성추행이잖아. 물론 난 이 책이 로맨스이고 결국 둘이 잘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지만, 초반 조슈아의 싹퉁머리 없는 말본새와 엘리베이터 성추행에 진심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다행히 조슈아가 사과를 하긴 하지만. 근데 그 뒤로도 관계의 주도권이 루시가 아닌 조슈아에게 더 많이 가고 루시는 여러 가지로 굴욕적인 면면을 보여서 그것도 맘에 안 들었다. 맘에 들었던 건 결말 부분 뿐. 그래도 스킨쉽 장면이 흥미진진해서 전반적으로는 재밌게 읽었다. 짜증날 만 하면 스킨쉽 장면이 나와서 화를 가라앉혀 줬거든. 추천 받아서 읽었는데 다른 어떤 장르보다 로코는 취향에 맞는 걸 발견하기가 더 힘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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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고생 핍의 사건 파일(홀리 잭슨, 장여정 역. 북레시피. 2023. 528쪽)

:  핍 시리즈 1권. 작은 마을 리틀 킬턴의 고등학생 핍은 졸업을 위한 심화탐구활동 과제로 5년 전 앤디 벨의 실종사망사건을 선택한다. 이 사건은 남자친구였던 샐 싱이 자신이 앤디를 죽였다고 자백하는 문자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핍은 샐이 범인이 아니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려 한다. 먼저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이사 안 가고 버티고 있는 싱 가족을 찾아가 샐의 동생 라비에게서 샐에 관해 묻는 것으로 조사를 시작하는데, 사건 당일 앤디가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에 샐의 알리바이가 처음 조사를 받은 다음날 함께 있었던 친구들에 의해 부정된 걸 알게 된다. 


범인은 짐작 가능했던 사람. 사실 핍의 조사가 진행됨에따라 새로운 용의자가 계속 등장하지만 처음 의심했던 사람이 범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드러난 다른 추한 진실들과 친구라고 믿었던 인간(들)의 밑바닥.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 물론 범죄를 타인에게 덮어씌우는 건 범죄소설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시리즈의 다음 편이 기대된다. 



2. 21세기 마지막 첫사랑(김빵. 자이언트북스. 2024. 268쪽)

: 2004년 고등학생 명원. 독서실 앞에 세워두었던 자전거가 사라졌다.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애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걸 발견한 명원은 그를 쫓아가고, 뒤통수를 잡아채 붙잡는데 자전거 도둑은 뻔뻔하기만 하다. 다시는 엮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가는 곳마다 나타나 신경쓰이게 하는 그애. 명원은 또래 애들같지 않은 영우에게 점점 빠져들고, 영우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된다.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 초반에 영우가 너무 짜증나게 굴어서 그만 읽을까 했는데 - 아무리 미래에서 왔어도 그렇게 지능이 낮은 애처럼 구는 게 맞는 건가? - 그동안 읽은 게 아까워서 계속 읽었다. 명원의 순수함과 여고생다움이 소설을 살렸다. 어릴 때 생각도 조금 나고. 첫사랑을 그대로 박제하는 최고의 방법은 시간여행이지.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소재가 다 비슷한 거 같아서. 



3. 우중산책(강연화. 강. 2018. 232쪽)

: 단편집. 내용들이 편하지는 않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잔잔한 일상 속 균열들.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혀 소통불가로 남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짐을 지고 있고 그게 인생이라지만... 내 마음이 괜찮을 때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4. 블러디 마더(김보현. 안전가옥. 2024. 276쪽)

: 불에 탄 '소사체' 시신이 발견된다. 희생자는 성범죄자. 담당 형사는 범인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가운데, 과거 사건을 조사하던 프로파일러는 처음 검색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두번째, 세번째 검색에서는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혼란에 빠진다.


범인의 정체는 아무리 둔한 독자라도 100쪽 정도 읽으면 알아챌 수 있다. 범인이 잡히지 않기를, 현실에도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었다. 이 소설 속 수많은 성범죄들은 모두 현실에서 이미 일어났거나 보도되지 않았더라도 현대를 사는 여성들이라면 생소하지 않은 일들이고, 그 가해자들이 현실에서 어떤 처벌을 받는지, 처벌은 받기는 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다만 우리가 바라는 건, 작가의 말에서도 얘기했듯 그저 고요한 밤일 뿐이다. 


PS. 알라딘 책 소개에 스포일러가 너무 많다. 



5. 굿 걸, 배드 블러드(홀리 잭슨, 고상숙 역. 북레시피. 2023. 480쪽)

: 핍 시리즈 2. 핍은 전편에서 샐 싱 미스터리를 훌륭하게 풀어냈고 이 과정을 팟캐스트에 올려 화제의 인물이 됐지만 이제 대학 진학 준비를 하며 조용히 지내고자 한다. 하지만 앤디 벨과 샐 싱의 추도식 날 절친인 코너의 형 제이미가 실종됐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너의 부탁들 받아 제이미의 행방을 좇던 핍은 제이미가 소셜 미디어로 어떤 여성과 긴밀하고 진지하게 연락을 했음을 알게 되고, 해당 계정은 사진을 도용해서 만든 가짜라는 것도 알아챈다. 계정 주인은 핍에게 경고 메시지를 남긴 후 계정을 폭파한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처음부터 의심스럽던 그 사람이긴 했는데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안타깝다. 그냥 보통 사람이었을 뿐. 핍이 1권에서의 어려움 - 협박과 상실 - 에도 불구하고 다시 탐정일에 뛰어든 것도 안타까웠지만 의심없이 사람을 믿는 것도 그러했다. 핍이 그 믿음에 배신당했을 땐 정말 속상했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읽는 게 쉽진 않았다. 다른 보통의 범죄소설들처럼 생각 없이 읽기에는 버거운 시리즈.



6. 누가 제이슨 벨을 죽였나(홀리 잭슨, 장여정 역. 북레시피. 2024. 648쪽)

: 핍 시리즈 3권이자 마지막.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1권에서 제기됐던 문제들이 다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마침내 해결된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핍과 친구들의 엄청난 노력 끝에. 제이슨 벨은 1권의 살해된 여학생 앤디 벨의 아버지. 1권에서부터 비호감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쁜 인간인 줄은... 핍은 팟캐스트를 통해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그런 핍에게 아무래도 스토커가 붙은 거 같다. 같은 말 - "네가 사라지면 누가 널 찾지?"- 이 반복되는 이메일, 집 앞 진입로에 놓여 있던 죽은 비둘기, 집 앞 공용도로에 그려져 있던 분필로 된 낙서. 경찰에게 얘기하지만 역시나 무시당하고, 핍에게 결국 스토커가 나타난다. 


시리즈의 마무리로는 훌륭했지만 핍의 몸/마음고생은 정말이지... 이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정말 싫었다. 사는 곳과 나이, 환경이 달라도 모든 여성들이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고 비슷한 편견과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정말 지긋지긋하다. 



7. 우리들의 우주열차(최해린. 안전가옥. 2024. 238쪽)

: 열네 살 영. 지구와 달 사이에 떠 있는 인공물 '반지'의 보육원에서 살고 있다. 창 밖의 지구는 황폐해졌다지만 그곳엔 10년 전에 영을 이곳으로 보낸 엄마가 살고 있다. 엄마가 데릴러 올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지만 원장 선생님은 영을 입양 보내려 하고, 영은 보육원에서 탈출해서 늘 탈출을 꿈꾸던 캐서린 선배와 합류한다. 그들은 우주선 레이스에 참가해 상금을 타고 인터뷰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로 한다.


영의 성장기이자 대기업으로 표방하는 천민 자본주의 비판. 캐서린 캐릭터가 멋있었는데, 그렇다고 마냥 멋지지만은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많이 드러나서. 길지 않은 책이었는데도 집중이 잘 안 되어서 읽는 데 오래 걸렸다. 디테일이 어긋난 부분이 많아 공감이 힘들고 지루했다. 



8. 초보자를 위한 살인 가이드(로절린드 스톱스, 류기일 역. 문학동네. 2023. 408쪽)

: 같은 필라테스 클래스를 다니는 70대의 메그, 대프니, 그레이스. 필라테스가 끝나고 카페에서 차 한잔을 하고 있는데 10대치고는 왜소한 몸집의 소녀 니나가 뛰어들어온다. 본능적으로 이 아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세 할머니는 니나를 카페 화장실에 숨도록 한다. 뒤이어 두꺼비처럼 생긴 남자가 들어와 가출한 자신의 딸을 찾는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셋은 남자를 따돌리고, 니나를 가장 가까운 메그의 집으로 데려온다. 니나를 근본적으로 구출하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는 셋.


제목과 내용은 범죄 소설이지만 세 할머니의 상처 치유기이자 메그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었어도 사람은 자랄 수 있으니까. 사실 가장 빛났던 건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 서로를 배려하고 기다려줄 줄 아는 성숙한 여성들이 다음 세대의 여성을 구하는 좋은 이야기였다.



9. 악마대학교(김동식. 현대문학. 2025. 136쪽) 

: 매해 열리는 악마대학교의 창의융합경진대회.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의 주제로 열리는 이 대회에서 주목을 받아야 대기업에 무사히 취업할 수 있다. 열등생 벨은 사전 발표일에도 교수한테 깨지고 고민이 깊어지는데, 동아리방에서 만난 친구들이 '사랑'과 '도박'을 주제로 한 성공적인 시뮬레이션을 보여준다. 벨은 영생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스포)

난 늘 현생이 지옥일 거라 얘기하곤 했는데, 이 책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어서 놀랐다. 인간이 원하는 영생이 결국 인간을 현생이라는 지옥에 영원히 묶이게 한 거라고. 소설일 뿐이지만 절망하기에는 충분한 얘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 어쩌구 하는 얘긴 이 책에도, 내 맘 속에도 없다. 그냥 견딜 뿐. 



10. 회생의 갈림길(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역. RHK. 2024. 508쪽)

: 미키 할러 시리즈. 본격적으로 해리 보슈와 함께 일하게 되어 정말정말 반가웠다. 해리 보슈 시리즈의 지난번 걸 읽고 이제 해리를 못 보나 싶어서 서운했는데. 해리는 미키의 사무실에서 조사원으로 일한다. 미키는 억울하게 유죄로 몰린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일로 일약 스타가 되고, 전국에서 그를 향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의뢰 편지가 쏟아진다. 미키는 해리에게 사연을 먼저 검토해 달라고 하는데, 해리의 눈길을 끄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경찰인 전남편 살해범으로 복역하고 있는 싱글맘 루신더. 루신더는 유죄 협상으로 재판 없이 복역 중이고, 증거가 있다는 경찰의 말에 그냥 포기해 버린 경우이다. 해리와 미키는 조사에 들어간다.


역시 해리는 진중하고 미키는 여우같다. 재판정에서도 실무에서도. 다만 경찰사조직의 방해 공작에 해리가 자신을 의심하는 부분은 마음 아팠다. 미키가 승리할 걸 믿고 읽기는 했지만 과정이 너무 쫄깃해서 숨 참으며 읽었다. 사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246쪽의 "겁을 내지 말고 화를 내요". 법정에서 루신다에게 미키가 한 말이다. 그들이 당신 인생을 빼앗아가게 두지 말라며 한 이 말은 맥락은 다를지언정 이 세상 모든 피해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11. 이중생활자(최현수,나혜림,김해일,전효원,이산복. 안전가옥. 2023. 356쪽)

: 제목 그대로의 주제로 묶인 앤솔러지. 다섯 작품 다 재밌었고,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각각의 분위기가 다 다른 것도 좋았고. '이중생활'을 각자 다르게 해석한 것도 좋았고 모든 작품의 상황이 다 다른 것도 좋았다. 가장 재밌었던 건 <부처핸접>이었는데 <드림센스>도 몽글몽글하니 귀여웠다. 



12. 죽은 자의 결혼식(제이미 린 헨드릭스, 정미정 역. 그늘. 2024. 392쪽)

: 트레버와 피오나의 결혼식. 내내 맑았던 날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트레버가 쓰러졌다. 견과류 알러지. 에피네프린이 늘 들어있던 피오나의 핸드백은 멀리 있었고 막상 가져왔을 땐 그 안에 에피네프린이 없었다. 트레버는 죽었고, 피오나와 결혼하기 위해 트레버가 약점을 잡아 협박했던 피오나의 여섯 친구 중 한 명이 범인이다.


어찌보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인데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그에 따른 행동들의 묘사도 섬세해서 영화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 여섯 명 각자의 비밀도 궁금했지만 대처하는 각각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원래의 일곱 명 친구들 중 트레버의 협박에 반발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게 단 한 명이라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어떤 비밀은 친구에게는 충분히 오픈할 수 있을 법했는데. 그래서 진범이 밝혀졌을 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정도 비밀이라면 난 그냥 친구들에게 얘기했을 듯. 어쩌면 범인은 공익적인 목적에서 한 일인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해피엔딩이다. 



13.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박지영. 현대문학. 2025. 268쪽)

: 50대 복미영은 자신의 팬클럽을 창단했다. 50년 내내 덕질을 해온 그녀는 최애의 범법 행위로 인해 탈덕을 하고, 자신의 특기를 자신을 위해 못 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구 최애의 굿즈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최애를 덕질하는 다른 덕후의 공격을 받은 복미영은 그 사람을 자신의 안티팬 1호로 규정하고 그 안티팬을 위해 역조공 이벤트를 하기로 한다.


세상 모든 '이모님'들을 위한 이야기. 내용도 주제도 좋았는데 다만 복미영의 습관 - 침 뱉는 거 - 때문에 더러워서 읽기 힘들었다. 헛구역질 하며 읽었다. 진짜 그것만 빼면 이만큼 멋진 사람이 없는데. 아마도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더러운 습관을 줬겠지 싶기는 했다. 이유는.... 아마 복미영에게 핍진성을 부여하려고? 아님 복미영이 너무 그럴 듯 하게 모범적이어서? 잘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이 작품에서 단순히 복미영 한 명의 덕질과 삶만을 다루지는 않다는 것.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돌봄 노동과 새로운 형태의 가족, 결핍과 투영의 마음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짠하면서도 재밌게 읽은 이야기. 



14. 연고자들(백온유. 위즈덤하우스. 2025. 116쪽)

: 윤아는 어느날 갑자기 태화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고 성인이 된 뒤에도 남매처럼, 친구처럼 지냈던 태화. 가족이 없어 무연고 시신으로 분류된 태화의 시신을 양도받기 위해 태화의 여자친구 지현과 함께 구청에 찾아가지만 복잡한 절차와 감당하기 힘든 비용에 망설이는데, 그 와중에 밤마다 태화는 윤아의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누른다.


'연고자'라는 건,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말이다. 이 말 자체로는 관계가 깊다는 것인지 가깝다는 것인지, 혹은 그저 알고만 있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증명해야만 그 사람과 관계가 있음을 인정받는다는 건 씁쓸하고도 쓸쓸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경제적인 문제까지 더해지면... 하나의 관계를 끝맺기 위해 그 관계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마음의 끝맺음. 태화가 윤아를 찾는 건 그 떄문이겠지. 이제는 더이상 윤아는 태화의 연고자가 아니게 되는 건가.



15. 유리 빛이 우리를 비추면(사라 피어스, 이경아 역. 밝은세상. 2025. 528쪽)

: 휴직 중인 형사 엘린은 남자친구와 함께 알프스 고지에 위치한 호텔로 남동생과 그의 약혼자를 만나러 온다. 이 호텔 건물을 오래 전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었고, 개축 과정에서 건축가가 실종되기도 했다. 통유리를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 호텔에서 엘린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고 남을 조종하는 데 능숙했던 남동생 아이작을 만난다. 남동생의 약혼녀 로라는 호텔 부지배인이고 엘린과는 어릴 때 친했지만 엘린의 막내 동생이 갑자기 사망한 이후에는 교류가 끊겼다. 엘린이 도착한 날 호텔 직원 한 명이 실종되고 다음날엔 로라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아이작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을 의심했지만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범행 동기도 기대와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게 별로였다는 건 아니고. 엘린의 성장 혹은 각성 드라마. 초반의 엘린은 과거 - 어릴 때의 막내 동생 사망 사건과 얼마 전 범일을 쫓다가 죽을 뻔한 일 - 에 매몰되어 판단력도 흐려진 듯 했다. 그게 너무 답답했다. 게다가 모두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정보를 그렇게 쉽게 오픈하는 건 좀... 아무도 믿지 말았어야지. 결국은 사건을 해결하긴 하지만 엘린의 이런 점 떄문에 다음 사건이 암시되는 거 아닌가. 물론 작가가 일부러 그런 장치를 해두었겠지만. 범죄 소설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엘린이 답답해서 이 작품이 시리즈가 된다고 해도 계속 읽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16. 눈부신 안부(백수린. 문학동네. 2023. 316쪽)

: 열두 살 해미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독일로 온다. 공부 잘하고 성실했던 언니가 가스 폭발 사고로 사망한 후, 아빠와 엄마 사이는 예전같지 않고 엄마의 공부를 핑계삼아 독일에서 의사로 살고 있는 행자 이모가 있는 도시로 온 것. 해미는 독일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엄마를 안심시키지만 행자 이모는 해미의 거짓말과 외로움을 꿰뚫어보고 이모의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 함께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왔던 마리아 이모, 선자 이모 등과 그들의 아이들인 레나, 한수. 이들과 어울리며 잘 적응해 나가던 해미에게 어느날 한수가 자기 엄마(선자 이모)가 아프다며,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다고 한다. 추리물 마니아인 레나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유일하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해미가 읽고 단서를 찾아줘야 한다고 하고, 해미는 방대한 분량의 이모의 일기를 읽기 시작한다.


'파독' 간호사들의 마음을 처음 들여다보는 듯 해서 읽으면서 부끄러웠다. 나도 그저 피상적으로 외화벌이를 위해, 가족과 나라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먼 나라에서 힘들게 일했던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그곳에 처음 발디뎠을 때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두고 온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애잔하게 배어나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삶을 꾸려나가고 적응하는 모습이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들의 삶과 그리움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소설 전체를 끌어가는 건 해미의 성장. 그 성장은 해미가 한국에 돌아오고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완성된다. 선자 이모의 비밀과 함께.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어쩌면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그 마지막 메시지가, KH뿐 아니라 해미에게도 아름답고도 눈부신 안부가 되었기에. 



17. 영원을 향하여(안톤 허, 정보라 역. 반타. 2025. 368쪽)

: 인간의 장기 뿐 아니라 신체 대부분이 나노봇으로 대체되는 근미래. 사실상 불멸의 존재가 된 인간을 실험하던 남아공의 한 연구소에서 피험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돌아온 피험자는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미묘하게 다른 느낌 뿐 아니라 피험자 한용훈도 자신이 이전의 그가 아니라 한다.


한 사람의 몸, 기억, 습관, 성향을 모두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인가? 미셸 우엘벡의 작품(<<어느 섬의 가능성>>)을 읽은 후 계속 갖고 있던 의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부인한다. 고유한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는 듯. 작가는 인간성이 예술을 통해 그리고 언어를 통해 불멸한다는 걸 당의정에 싸서 독자에게 주고 싶어한 거 같은데 당의정이 그다지 달지는 않았다. 근데 난 그게 좋았다. 차분한 SF. 아름다운 만연체 문장 또한, 초반엔 적응해야 했지만 곧 작가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갔다. 인간성의 완성은 결국 필멸이라는 것. 영원은 인간 개체가 아닌 마음과 영혼의 연대를 통해서야 가능하다는 것. 



18. 당신의 잘린, 손(배예람,클레이븐. 텍스티. 2025. 288쪽)

: 이번 매드앤미러 문장은 '바다에서 거대한 손이 올라왔다'. <무악의 손님>은 어릴 적 가족 여행을 갔던 바닷가에서 해일이 밀려와 동생을 잃은 희령의 이야기. 동생 희수의 손을 놓치고 살아남은 희령의 손등에는 그때부터 푸른 반점이 생겼다. 세월이 흘러 남자친구 석후의 일방적인 예약으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무악에 다시 가게 된 희령. <바다 위를 떠다니는 손>은 태평양에 거대한 손이 떠오른다. 그 손을 조사해 보니 체온과 맥박이 있고, 표면을 손상시키면 바로 재생된다. 손을 조사하던 학자 에바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사이 이 손이 있던 섬의 사람들이 갑자기 양 팔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고, 곧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이 손들을 조사하기 위해 해군 잠수함이 출격한다.


<무악의 손님> 희령은 답답하고 석후는 재수없고 다미는 짜증났다. 주어진 문장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소설이 비슷한 느낌. 물론 전개는 달랐지만. 캐릭터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무악의 손님>이 더 재밌었다. 군인과 전쟁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취향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바다 위~>는 나중에는 길을 잃었다고 본다. 얘기가 산으로 간 느낌. 



19. 인피니트(브라이언 프리먼, 최지숙 역. 그늘. 2024. 436쪽)

: 아내가 불륜을 고백한 후 화해를 위해 떠난 여행에서 사고가 나 차가 물에 빠졌다. 간신히 빠져나온 딜런. 하지만 아내는 죽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딜런은 물에서 나왔을 때 강둑에 있던 사람을 떠올린다. 오래전 죽은 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던 딜런 자신. 경찰은 고의사고를 의심하며 조사에 들어가고, 딜런의 아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경찰의 압박에 괴로워하는 와중에, 근무하고 있는 호텔에서 열리는 한 심리학자의 강연을 듣고 여기가 아닌 다른 우주의 자신에 대해 흥미를 느낀다. 얼마 후, 심리학자의 인도를 받아 다른 평행세계로 건너가게 된 딜런.


(스포)

평행세계, 다중우주... 충분히 흥미로울 소재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앞뒤는 좀 맞아야 하지 않나? 한 사람이 이 우주에서는 소심하고 다른 우주에서는 사악할 수는 있다. 작은 선택 하나가 우주를 생성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성격이나 인격도 다르게 자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어도 물리적인 육체가 동시에 두 세계에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아무런 제약도 없이 넘나드는 건 대체 뭐야? 게다가 아무리 모든 사람에게 정신병적 기질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뜬금없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흡입력이라고는 1도 없었다.



20. 대온실 수리 보고서(김금희. 창비. 2025. 420쪽) - 큰글자도서

: 영두는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 백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중학생 때 아버지와 함께 살던 강화도를 떠나 궁 근처 원서동 '낙원하숙'에서 머물며 강남의 중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그곳에서 당한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다시는 이 동네에 오지 않으려 했지만. 영두는 수리 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대온실의 역사를 조사하는 한편, 어릴 때의 일들을 떠올린다. 낙원하숙 주인이었던 문자 할머니와 할머니의 손녀 리사, 그리고 첫사랑 이순신. 


계속 마음이 아파 자꾸만 책을 덮었다. 펼쳐 읽다가도 다시 덮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두의 상처가, 문자 할머니의 상처가 아팠다. 난 아마 그 상처의 1/10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거였음에도. 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 상처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산아 대신 나선 스미에게 공감했다. 난 다 큰 어른인데도. 


작가의 말의 "나는 자주 기도했다"(410쪽)는 문장을 읽고 나도 기도해야겠다 생각했다. 그게 날 위로하는 길이리라. 영두는 어쩌면 이미 괜찮아졌을 지도 모르고 아직은 아니더라도 괜찮아질 것이다. 내가 기도할 테니. 영두의 마음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날 위로할 테니.


어쩌면 인생은 상처받고 상처 핧는 게 전부인지도.



21. 에메랄드 시티(제니퍼 이건, 최세희 역. 문학동네. 2022. 288쪽)

: 단편집. 장편들과는 다른 감성이어서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이래서 그런 장편들이 나왔구나 싶은 작품들도 있었고.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오즈의 마법사를 읽었든 안 읽었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에메랄드 시티의 화려함은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 걸. 



22. 봄이 오면 녹는(성혜령,이서수,전하영. 다람. 2025. 216쪽)

:  관계, 특히 손절에 관한 이야기들. 제목처럼 말랑하지 않다. 진짜 손절에 관한 이야기는 성혜령. 그래서 이 작품이 가장 맘에 들었다. 이서수는 흥미로웠지만 공감은 전혀 되질 않았고 전하영은 무게감이 있어 좋았지만 주제와는 동떨어져 있지 않았나 싶다.



23. 사라진 아내가 차려준 밥상(구한나리,신진오. 텍스티. 2024. 240쪽)

: 매드앤미러. 이번 문장은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사라진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삼인상>은 산골 깊숙이 있는 외딴 마을의 이야기. 들어오는 사람은 간혹 있어도 나가는 사람은 없는 작은 마을 묏맡골. '나'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산길을 넘어 이곳에 간신히 도착했고 여기서 몸을 풀었다. 이 마을에는 두 명이 밥을 먹을 때도 반드시 한 사람분의 밥그릇을 더 올려야 하는 관습이 있다. 그래야 '삼인'이 지켜 주기 때문. 나는 이제 성인이 되어 마을 제사에 한몫을 거들 수 있게 되었고, 당골의 셋째 딸 현을 사랑하고 있다. <매미가 울 때>는 여행을 가다 사고를 당한 부부의 이야기. 부부는 안개 속 뒤집힌 차에서 빠져나와 도움을 청하기 위해 걸어가지만 알몸에 버섯을 잔뜩 붙이고 있는 괴물같은 사람과 마주치고, 공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절을 발견한다.


두 작품 다 재미는 있었는데 더 좋았던 건 <삼인상>. 길지 않은 작품 속에서도 세계관과 주제가 탄탄했고 길고도 짧은 인연, 슬프고도 행복한 결말을 잘 보여줬다. <매미가 울 때>는 작품 자체로는 재밌었고 교훈적이었지만 주어진 문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사라진 아내'라구요...



24. 파괴자들의 밤(서미애,송시우,정해연,홍선주,이유소. 안전가옥. 2023. 358쪽)

: '여성 빌린'을 소재로 한 앤솔러지. 그런데 사실 여성 입장에서 이들은 빌런이 아니다. 영웅이지(한 작품만 빼고). 서미애의 작품이 너무 속시원해서 즐겁게 읽으려는 참에 송시우의 작품을 읽으면서 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데 혹시라도 유족이 읽게 되면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해연은 이 작가를 읽은 이래 처음으로 즐거웠다. 이거에요, 작가님. 작가의 말에 쓴 대로 소설 속에서라도 되갚아주고 싶다구요. 홍선주도 읽는 동안엔 괴로웠지만 결말이 맘에 들었는데 이은영은 공감이 쉽게 되질 않았다. 그 세계는 이상하기만 했지. 그냥 지옥을 묘사한 거라면 이해는 됐다. 이 작가들의 이런 앤솔러지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25. 폐기된 인생(알렉산더 마스터스, 김희진 역. 문학동네. 2025. 372쪽)

: 저자의 친구 리처드 그로브 교수는 어느날 케임브리지 근처를 지나다 쓰레기 컨테이너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안에서 책으로 보이는 묶음을 발견한다. 다른 친구가 이사할 때 저자 서명 초판본을 실수로 폐기 업체 직원에게 줘버린 일화를 기억해 낸 리처드는 그 묶음을 구출해 내고, 그게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일기장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저자에게 넘어온 일기장 묶음은 무려 50여년에 걸쳐 쓰여진 것. 저자는 알아보기 힘든 필체와 그림들, 소소하고 상세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는 절대 드러내지 않는 일기장의 내용을 읽으며 일기 주인의 정체를 추측한다.


당연히 소설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 도서관에도 소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 알라딘에서 에세이로 분류한 거 보고 약간의 혼란이 왔다. 이게 실화인걸까? 마지막에 등장한 일기장의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니 좀 이상한 기분. 내가 그의 인생을 너무 가볍게 읽은 거 아닌가 싶다. 기록조차 안 한 내 지난날들도 단편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든 아니든 내용은 계속 흥미진진했다. 저자가 일기장을 시간별로 분류하지도 않고 잡히는 대로 읽으면서 천천히 정보를 모으는 과정은 얼핏 보기엔 쳬계적이지도 않고 열정적이지도 않아 보였지만 오히려 너무 치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어쨌든 남의 인생에 접근하는 거니까, 조심조심 천천히 가야지. 저자의 전작이 노숙인 쉼터에서 만난 사람의 전기라는 건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알았고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 난 어릴 때 읽은 위인전들 영향으로, 전기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 이 책이 에세이라고 생각하니 저자의 전작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26. 소란한 속삭임(예소연.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퇴근시간 지옥철을 견디던 모아는 옆의 여성이 이어폰도 꽂지 않고 큰소리로 동영상을 보던 남성에게 한마디 하는 걸 얼떨결에 도와주게 된다. 그 여성 시내는 모아에게 잠시 얘기하자더니 '속삭이는 모임'에 들어오라고 한다. 회원은 자신과 모아 두 명. 반드시 비밀이 아닌 것을 속삭여야 한다고. 속삭일 때 더 그럴싸하다는 시내의 말에 마지못해 모임 가입에 동의한 모아는 다른날 시내의 제안에 명동으로 신입회원을 모집하러 가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수자를 영입한다.


이게 뭐야, 라며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뜻밖에 감동적인 여성 연대 이야기. 연대라는 게 굳이 크고 무거운 일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삶이 힘들고 생활이 꼬일 때 곁에 있는 여성 한 명이 다른 여성의 손을 잡아주면 그거야말로 삶을 이어갈 힘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그 손잡기는 그냥 말 한마디 거들어 주는 것이거나 청소를 도와주는 작은 일일 수도 있고. 흐뭇한 결말의 좋은 책이었다. 



27. 2025 제 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고선우,이연파,최장욱. 허블. 2025. 216쪽)

: 수상작 세 편과 각 작가의 에세이가 한 편씩 수록되어 있다. 고선우는 작품은 괜찮았으나 뒤의 에세이가 너무 못생겨서 - '못 써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글이 못생겼다. 나 중2때 일기 이렇게 썼는데. - 소설에 대한 호감마저 떨어졌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나쁘지 않으니 좀더 지켜볼 생각이다. 이연파가 가장 좋았다. 작품을 읽고도 좋았는데 에세이에서 '심정적으로 파산한 상태'(113쪽)라는 구절을 읽고 더 좋아졌다. 최장욱은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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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옐로우 레이디(이아람. 안전가옥. 2024. 352쪽)

: 1930년대, 미국에서 곤충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한경애. 경애를 유독 아꼈던 할아버지 덕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미국에서는 유일한 동양인인 그녀를 옐로우 레이디라 부르며 경멸했고 조선에서도 경애는 그저 돈이나 펑펑 쓰며 한가로이 벌레나 연구하는 친일파 집안의 딸일 뿐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경애에게 집안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 '할머니'가 연락을 해오고, 그 편지에 따라 종로로 나간 경애는 청희라는 기생 출신 가수가 살해당한 현장에 가게 된다. 벌이 살해 현장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경애는 수사의 고문 역할을 맡게 되고 부검을 참관하러 간 곳에서 약혼자와 마주친다.


읽기 전부터 제목이 멸칭이리라는 생각을 하고 집어들었다. 초반에는 경애가 노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설정에 그럼 멸칭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곧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됐다. 멸칭을 찬사로 바꿀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경애. 어쩌면 그저그런 추문에 불과한 채 묻혔을 지도 모를 기생 출신 여성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애매한 위치의 '할머니'와 교류하고, 여동생의 쓰임을 좋은 데 시집가서 집안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규정한 오빠에게서 독립할 기반을 마련하는 경애. 당대의 여성들 중 누구도 갖기 힘들었을 지위를 스스로 성취한 경애를 통해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여성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재미도 있다. 



2. 새해 연습(김지연.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는 홍미. 교류가 전혀 없던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오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한 공무원에 의해 일기장을 전달받는다. 매일매일 18년간 쓴 일기를 전달받은 홍미는 할머니 양지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저 쳐다만 보고 돌아올 뿐. 조금씩 읽어가는 일기장에는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홍미는 그걸 조금씩 파쇄한다. 


홍미의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다. 하지만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 올해를 사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고, 그래서 홍미가 더 좋아졌다. 나보다 낫구나, 홍미는. 새해에는 홍미가 많은 걸 견뎌야 할 거라는 건 작가 인터뷰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잘 살 거야, 홍미는. 법이 제발 홍미를 지켜주기를. 그래도 녹녹치 않은 새해겠지만, 새해를 잘 견디면 그 다음해, 또 그 다음해는 더 좋아질 거야. 



3. 리스트 플라이트(줄리 클라크, 김지선 역. 밝은세상. 2024. 440쪽)

: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클레어. 하지만 명망있는 가문의 재단 이사장이자 상원의원 출마를 앞둔 남편을 폭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몰래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막상 실행일이 되자 일정이 꼬이고, 설상가상으로 몰래 만들어 출장지로 택배 보내 놓은 가짜 신분증이며 도주 자금을 남편이 보기까지 한다. 바뀐 출장을 위해 간 공항에서 다급해진 클레어는 도망 준비를 도와준 고교 동창 페트라에게 전화해 출장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라지겠다 말하는데, 이 통화를 뒤에 서 있던 이바가 듣고 있었다. 이바는 공항 바에서 자연스럽게 클레어에게 접근해 자신이 암환자였던 남편을 잃고 보험회사의 의심을 받고 있다며 클레어와 자신의 비행기표를 바꾸도록 유도한다. 클레어는 이바의 비행기표로 오클랜드에 도착하는데, 뉴스에선 원래 클레어가 타기로 했던 푸에르토리코 행 비행기의 추락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이바의 정체가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면 이 소설은 아예 시작도 못했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난 계속 조바심 내며 읽어야만 했고.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남자 때문에 인생이 꼬인 두 여성이 큰 의식 없이도 연대를 통해 꼬인 삶을 풀어나가는 게 흥미로웠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마지막 에필로그가 살짝 애매해서 마음에 걸리지만, 난 해피엔딩을 좋아하므로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이만큼 재밌기를.



4. 아이들의 집(정보라. 열림원. 2025. 276쪽)

: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 인공자궁이 발달한 미래, 아이들은 누구나 언제든 부모에게서 떨어져 동네에 있는 아이들의 집에 머물 수 있다. 원하면 부모에게 돌아갈 수도 있고. 국민들은 누구나 아이들의 집에서 일정 기간 봉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동 학대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주거환경관리 조사관 '무정형'은 자신이 담당한 건물에서 아동 학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마음이 안 좋다. 다른 가족이 들어와 살기 전 점검을 나간 무정형은 귀신을 본다.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를 상상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이제껏 그렸던 세계 중 가장 편안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대와 가스라이팅, 아동 탈취 및 불법 입양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도 난 아이들의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언제든 갈 곳이 있다는 거. 더는 내복 바람으로 길에서 헤매다 슈퍼 사장님의 눈썰미에 의해 구조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이 책 속 세상에서도 여러 부조리와 범죄가 있지만 그래도 책 속 세상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가의 책들 중 최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새로운 스타일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위로받아서 좋았다.



5. 라이프 오어 데스(마이클 로보텀, 김지선 역. 북로드. 2016. 552쪽)

: 10년 전 현금 수송차 강탈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범인 오디 파머. 두개골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출소를 하루 앞두고 그가 탈옥한다. 10년 전에 사건 현장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범인들을 사살했던 보안관 발데즈가 그를 집요하게 뒤쫓고, 연방수사관 데지레는 해당 사건의 의문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아 사건을 파헤친다. 그리고 감옥 동료였지만 어떤 인간들에 의해 이송도중 풀려나 오디를 찾게 된 모스.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오디의 진실이 궁금해서 열심히 읽었는데 드러난 진실이 너무 허무했다. 사실 사건 이면의 비극은 마음이 아프긴 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잔인하다. 특히 가여운 건 맥스. 하필이면 그런 인간이랑 살게 되었다니.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자면 마음도 아프고 절절하긴 한데, 많은 부분이 우연에 의해 처리되어서 작품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다. 작가의 명성에 선택한 책이었는데, 다른 작품들은 안 읽을 거 같다. 



6. 죽음과 크림빵(우신영. 자음과모음. 2025. 246쪽)

: 지방 대학의 국문과 교수 허자은이 사망했다. 자신의 연구실 옆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다가. 혼자사는 과체중 여성이었던 허자은은 동료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문학이 좋아서 문학 자체만으로 연구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아무도 허자은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교이자 만년 박사 과정생인 이종수와 허자은의 마지막 제자였던 학부생 정하늬의 시각은 조금은 다르다.


힘든 책이었다. 단지 허자은에 대한 부당 대우 때문만은, 고산대 국문과로 상징되는 학계의 부조리한 관행과 비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허자은이었고 이종수였고 정하늬였다. 외모 때문에 진심이 곡해당하고 능력은 폄훼당하며 뒤에서 조롱당하는 허자은. 불합리한 걸 알지만 현재의 이만한 생활이라도, 이만한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 감고 귀 막아야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종수. 허자은 교수의 수업을, 문학을 사랑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하늬. 독자마다 이 책을 읽고 분노하는 지점은 다르겠지. 그러나, 그 상황 한가운데 놓인다면 누가 허자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너희 중 죄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 



7. 말리부의 사랑법(테일러 젠킨스 리드, 이경아 역. 다산책방. 2025. 560쪽)

: 1983년 8월 27일, 유명 수영복 모델 니나 리바의 말리부 저택에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니나는 최근 유명 테니스 선수인 남편의 불륜으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미 니나와 그의 세 동생 - 서핑 챔피언 제이와 제이의 사진을 완벽하게 찍어내는 포토그래퍼 허드, 막내 키트 - 는 가수 믹 리바의 자녀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니나 남매들의 파티는 니나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할 때부터 시작된 리바 남매들의 연례 행사였고 이들의 삶에 아버지는 없었다. 이야기는 1950년대 남매들의 어머니 준과 믹의 뜨거웠던 사랑과 파티 당일을 오간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역시 흡인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 작가를 단순히 페이지 터너로만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 셀럽과 가십을 이야기하지만 속물적이지 않은, 인생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은 작가. 결말이 조금은 허전하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특히 장녀 컴플렉스에 깊이 침잠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니나의 성장이. 하지만 믹은 좀... 믹이 대가를 치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내게 흡족하지는 않아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지.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고 싶다. 



8. 계화의 여름(배명은. 위즈덤하우스. 2025. 152쪽)

: 노년의 계화는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을 아들이 팔아버리려고 하자 끝까지 버틴다. 어린 시절 타지에 일하러 나간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이곳에서 살던 계화는 부모님이 곁에 안 계시는 설움에 더해 비늘증까지 앓고 있어서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서러움에 뒷산 선녀 절벽에 올라가 몸을 던지려던 계화는 마침 승천하는 중이었던 이무기와 눈이 마주치고, 이무기는 그대로 추락한다. 후에 집 근처 풀숲에서 마주친 구렁이. 계화는 피부가 벗겨져 아파 보이는 구렁이에게 산딸기를 따주고 '여름'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유한한 존재와 무한에 가까운 생을 사는 존재의 사랑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됐던 건데... 게다가 엉뚱한 인간이 득을 본 거 같아 그것도 화가 난다. 마지막 구렁이의 또아리가 슬프다.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겠지. 여름은 언제나 계화의 것이었던 것처럼. 



9. 살인자와 렌(엘레이나 어커트, 박상미 역. &(앤드). 2025. 340쪽)

: 제러미는 살인을 즐긴다. 술집에서 타겟을 찾아 유인하고, 지하실에 특수한 장치를 만들어 가둬 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사유지에 풀어놓고 사냥을 즐긴다.  렌 멀러는 인정받는 병리학자이다. 최근 발견되는 시신을 부검하다 연쇄 살인범의 짓임을 확신한다. 또한 시신에게서 발견되는 부가적인 물건들이 다음 시신이 버려질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매한 범죄 소설이다. 'Who done it', 'How done it'. 'Why done it'을 모두 드러낸 채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뭔가 밝혀질 것은 렌의 이야기 뿐일거라 생각했고 그 짐작이 맞아떨어졌는데, 그게 엄청나게 놀랍거나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작가가 필력이 엉망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나름 고심해서 구성을 했고 원서의 문장이 엉망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글솜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말했듯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할 만큼 재밌지가 않다. 결말 또한 속 시원하지도 않고. 아마 시리즈로 만들어서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어했던 거 같은데, 그렇더라도 이 작가를 또 읽을 거 같진 않다. 



10. 사서 고생(조우리. 위즈덤하우스. 2025. 108쪽)

:  사서 영지는 기간제 사서인 이정아가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팬데믹 기간 중 메타버스 플랫폼 미러라클에서 운영하던 동그라미 도서관의 관리 일을 인수인계 받는다. 미러라클에 공간만을 마련해 두는데 그쳤던 다른 도서관들과 달리 동그라미 도서관의 가상 세계에서는 독서 모임이 별도로 꾸려지고 도서가 추천되는 등 실제와 똑같이 운영이 되고, 사용자에게 꽤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남에 따라 미러라클의 사용자도 줄어들고 결국엔 서비스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동그라미 도서관도 슬슬 종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실제 도서관처럼 사용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도서관의 문을 닫을 수 없는 이 서비스에 딱 한 명의 아바타가 계속 나가지 않고 있다. 영지는 미러라클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관리자가 나타나면 아바타도 사라지고, 영지가 도서관을 닫으려 하면 그 한 명의 아바타는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데...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신분제를 이야기한다.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분명한 신분의 차이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조금 돌아서 왔을 뿐인데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노동의 가치는 물론 호칭마저 차별을 받는 현실을 말이다. 그런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던 거 같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냐며 좋아서, 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람들, 이해 못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작가는 얘기해 주고 싶었나보다. 때로는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덕에 아직도 세상이 아름다운 거라고.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이들을 지치게 만드는 우리 사회 탓이겠지. 난 어느 쪽일까. 



11. 은하환담(곽재식,김설아,김성일,이경희,소렐,송경아,이한,문녹주,전혜진. 달다. 2022. 380쪽)

: 전래 동화를 SF적으로 재해석한 9편의 단편들. 이경희 작가의 <파종선단>이 가장 좋았다. 어릴 때부터 조금은 이상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새로 썼다. 납치와 기만, 가스라이팅 이야기가 바로잡힌 느낌. <매구 호텔>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단동이>는 전체적인 통일성 면에서 살짝 어긋난 느낌. 



12. 사랑의 가설(알리 헤이즐우드, 허형은 역. 황금시간. 2022. 560쪽)

: 스탠퍼드 대학 생물학부 박사 과정 올리브. 두어 번 데이트했던 제러미와 절친 안이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올리브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 꾸며낸다. 하지만 안이 의심하자 얼결에 근처에 있던 칼슨 박사에게 키스를 하는데, 칼슨 박사는 박사 과정생들 사이에서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은 천재. 칼슨에게 해명을 하던 중 칼슨 박사 또한 대학 당국에게 어필을 하기 위해 연인이 필요하다며 둘은 계약 연얘를 시작한다.


말캉말캉한 얘기가 읽고 싶어서 집어든 거라서 클리셰 범벅임에도 즐겁게 읽었다. 애덤 이 FOX. 사실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클리셰는 혐관에서 시작하든 계약으로 시작하든 독자를 익숙하게 이끌지만, 그래도 아주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와 작가의 필력, 그리고 대체 이번 커플은 어떤 오해를 어떻게 풀 것인지 그리고 스킨쉽은 어떻게 할 것인지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짜 훌륭하다. 아주 내 맘을 딱 맞게 채워줬다.



13. 괴물, 용혜(김진영. 안전가옥. 2025. 300쪽)

: 경찰 실종수사팀 용혜. 어느날 유건재라는 초로의 남자가 찾아와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영문 모를 사과를 하면서도 그는 용혜의 몸을 위아래로 샅샅히 훑어 보다 '없네, 없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는데 3일 후 그의 실종 신고가 들어온다. 용혜는 그의 행적을 좇으며 그의 딸과 만나는데, 그애를 데려다 주려 거리를 걷던 중 용혜만이 맡을 수 있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의 냄새에 유건재의 딸도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실 용혜는 사람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나마 용혜가 삼킬 수 있는 건 신선한 생고기 뿐. 


처음엔 약간의 환상을 곁들인 차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더해 산업 재해와 환경 문제, 관음증까지 다룬다. 해피 엔딩이라 용혜와 다른 사람들에겐 다행이지만 현실에는 아직도 많은 괴물들이 자신이 괴물인지 모른 채 혹은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외면하며 타인을 괴물로 만들고 있지. 이런 현실이 계속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용혜같은 피해자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씁쓸한 이야기였다. 



14. 오피스 괴담(범유진,최유안,김진영,김혜영,전혜진. 안전가옥. 2023. 346쪽)

: 첫번째 작품이 너무 맘에 들었다. 이 주제에 딱 맞는 작품이란 생각. 근데 두번째 작품은 아주 본격적이었다. 그래, 이런 게 괴담이지. 근데 이유를 모르겠네. 명주 잠자리 유충 때문이면 은희한테만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뒤로는 다 슬펐다. 여기 밖에는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이 다 너무 공감되어서. 그러다 마지막 작품은 진짜 눈물샘 꾹 누르며 읽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터졌다. 나도 내가 그들보다 조금 운이 좋을 뿐이라는 거 알지.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운 좋은 사람들 부러워하며 산 게 부끄러워졌다. 



15. 달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설재인. 시공사. 2024. 408쪽)

: 2000년대 초반 지방 도시, 5학년 지나는 남사친 은청과 함께 자신들은 또래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러던 중 지택이 전학을 오고, 채식을 하고 있다는 지택이 있어 보인 지나는 자신도 동참하기로 한다. 성장기임을 감안해 달걀 정도는 먹기로 하는데 지나는 어릴 때 살던 한란의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계란 프라이 자판기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주위 친구들 아무도 믿지 않지만 지택이 자신도 본 적이 있다고 거들어 주자 힘을 얻고, 지나는 한란의 그 도서관으로 지택을 데려가기로 하는데, 지택은 이걸 일종의 프로젝트로 만들자고 한다. 자신의 집에 있는 캠코더로 영화를 찍자고. 지택의 집 2층에 사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설문 패널까지 만들어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은청이 자신도 끼겠다고 한다.


읽는 내내 속상해서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째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도 없을까.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책 속에서나마 어린이들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그러면 이야기도 안 이루어지겠지만. 지나가 다른 어른을 만났더라면 지나는 지금과는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그 장면이 나를 위로했다. 



16. 마녀가 되는 주문(단요. 책폴. 2023. 280쪽)

: 서아는 우수한 인재들만 입학할 수 있는 '산학협력창의인재학교'에 입학했지만 열일곱 살이 되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졸업할 때까지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면 학자금 때문에 엄청난 빚에 시달릴 것이다. 옥상 난간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서아에게 선배 현이 다가온다. 현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며 자신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가상현실 게임서버를 얘기해 준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술래잡기 게임'. 사실 이 게임은 개교 초창기에 개발되어 서비스되었다가 심각한 버그로 사망 사고가 발생해서 닫힌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 버그를 픽스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학생들에게 오픈했다는 것. 현은 서아가 자신의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연구소에 들어가 관리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던 중, 사망 가능한 버그는 픽스되지 않았고 죽고 싶은 학생에게는 따로 서버를 열어 준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읽으면서는 계속 가슴을 치다가, 읽고 나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답답해서. 어디에도 어른은 없었다. 하율 교수도, 진솔 선배도 어른은 아니었다. 책 밖의 나 조차도. 아이들은 그 질문을 서로에게가 아닌 어른에게 던졌어야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제대로 대답해 줬어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하지만... 책 속에도 책 밖에도 그런 어른은 없다. 단 한 명도. 



17. 인간 크로케(케이트 앳킨슨, 이정미 역. 현대문학. 2017. 496쪽)

: 이소벨 페어팩스. 이제 막 열 여섯 살이 되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사라졌다, 숲 속에서. 그리고 아빠도 7년 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새엄마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소벨과 오빠는 엄마를 싫어했던 할머니 손에, 그리고 고모의 손에 자랐다. 끊임없이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엄마가 문을 여는 소리를 기다리며. 이소벨은 갑자기 주위가 일렁이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니 과거의 한 시점에 와 있다. 페어팩스 가문이 이 일대를 모두 소유하고 있던 몇 백 년 전의 어느 시점에. 그러다 순식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스포)


전작과 마찬가지로 슬펐다. 독자인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 진실은 신화로 승화되고, 표피 바로 아래 묻혀 있는 거름같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비극은 동화로 덮인다. 마치 신의 축복과도 같은. 1960년 4월 23일로의 회귀. 이소벨이 겪은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행이었나. 차라리, 차라리 말이다.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마냥 힘들지 만은 않았던 건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그 밖의 알려진 동화와 전설들을 찾아내는 재미 덕분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고 했다는데 내겐 전작보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가 이 동화들 때문이었다. 



18. 없던 문(김유라,엄정진. 텍스티. 2025. 278쪽)

: 두 작가가 한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매드 앤 미러 시리즈. 이번 문장은 '우리 집에 못 보던 문이 생겼다'. 김유라의 작품은 회사원 영훈의 이야기. 가족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낮엔 회사원, 밤엔 배달원으로 쉴 새 없이 일하는 영훈은 어느날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남는 방을 빌려주면 매일 5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고민 끝에 수락한다. 하지만 영훈의 자취집은 원룸. 그런데 집에 와보니 문이 하나 생겨 있다. 계약 조건은 그 방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것. 들어가면 계약은 종료되고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는다는데... 엄정진의 작품은 어릴 때 오빠를 잃어버린 이선의 이야기. 같이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오빠가 그냥 사라졌다. 이후 이선의 가족은 무너진다. 20여 년이 지난 후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둘러보러 온 이선. 놀이터에 그 때의 오빠와 똑같은 아이가 있는 걸 발견하고, 아이가 뛰어가자 얼결에 쫓아간다. 빈 아파트의 화장실 거울 뒤 낯선 통로로 들어간 아이. 이선은 아이의 뒤를 따른다.


김유라의 작품은 처음 부분을 읽자마자 어떻게 진행될 지 알 거 같았고 예상대로 진행되어서 좀 재미없었다. 그래도 작가가 필력이 좋고 문장도 나쁘지 않아서 아이디어만 보강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듯. 그래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엄정진의 작품은 아이디어도 좋고 작품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없어서 재밌었는데 주제 문장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이 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19.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김이설,이주혜,정선임. 다람. 2025. 204쪽)

: 공간에 관한 앤솔러지. 세 작가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여서 행복하게 읽었다. 내용은 다 조금씩 마음 아팠지만. 세 작품 다 인천이라는 도시가 언급되거나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이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억. 세 작품 모두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세 작가의 현실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이 좋았다. 



20.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이서수,한정현,박서련,이주혜,아밀. 앤드. 2025. 196쪽)

: '언니'들을 이야기하는 앤솔러지. 언니라서 행해야 하는 역할, 언니라는 호칭이 주는 무게와 부담, 언니다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지우는 짐과 그에 따른 죄책감... 사실 언니라고 별다르지 않은데. 그냥 나이가 조금 많을 뿐인데... 다섯 작품이 다 맘에 들었다. 다양한 언니들이 나와서, 언니라고 무조건 동생들을 감싸주거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아서 좋았다.



21.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바버라 데이비스, 박산호 역. 퍼블리온. 2024. 608쪽)

: 어릴 때부터 책에 의존했던 애슐린. 부모가 싸우면 늘 헌책방에 달려와 책 사이에서 위로를 찾곤 했다. 열 두 살이 되던 해, 책을 잡았다가 찌릿한 느낌과 함께 어떤 감정들이 밀려오는 걸 느끼게 되고 책방 주인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모든 사람이 갖고 있지는 않은 특별한 능력이라는 얘길 듣고 안심한다. 시간이 흘러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책방을 물려받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는 희귀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애슐린. 이웃 골동품점에 오래된 책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가서 살펴보던 중 특이한 제본을 한 책을 발견한다. 제목은 '후회하는 벨'. 책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그 책을 가지고 와 펼쳤는데 첫머리에 적혀 있는 “어떻게, 벨? 그 모든 일을 겪고서……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며칠 뒤 역시 골동품점에 비슷한 책 상자가 들어왔고 애슐린은 그 책과 페어인 듯한 '영원히, 그리고 다른 거짓말들'을 발견한다. 역시 첫머리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겪은 후에…… 당신이 내게 그걸 물을 수 있어?”. 애슐린은 이 책들을 읽는 한편 이 책들을 맡긴 사람을 찾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혀 모르면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이상하다. 신기하고, 기적적이고, 거지같다. 벨은 헤미를 몰랐고, 헤미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함께 했던 마지막이 그러했고, 서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난 처음부터 헤미가 미웠고 읽는 내내 헤미를 미워했는데, 다른 독자들은 안 그랬나보다. 이것도 참 신기하다.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월의 간극이 너무 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난 아직도 헤미 미워.



2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황정은. 책과나무. 2023. 363쪽)

: 범죄 소설 4편. 그 황정은인 줄 알고 대출했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 그래도 수상작가라길래 기대했는데 별로. 사소한 부분이지만 디테일이 어긋나고 문체가 올드하다. 작품 속 범죄자나 사건의 전개도 다 예측 가능하고. 



23. 오색찬란 실패담(정지음. RHK. 2023. 232쪽)

: <<젊은 ADHD의 슬픔>>을 쓴 작가의 에세이.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이 난 정말 좋다. 계속 실패만 거듭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노력과 만회의 역사였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건강함도 좋고. 이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교훈을 얻거나 삶을 개선할 의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작가의 이야길 들으며 즐거워만 해도 된다. 유쾌하면서도 투박하게 위로해주는 책.



24.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설재인. 나무옆의자.2025. 268쪽)

: 연극 쪽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A대학 졸업생 구아람. 지금은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반지하 방에 살며 예술에 바친 청춘을, 예술 때문에 망친 인생을 생각치 않으려 한다. 대학 때 절친이었던 정소을은 강남 학생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방 세 개 짜리 오피스텔에서 산다. 언제나처럼 소을과 술을 마시던 아람은 자신의 초라한 자취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걸 알게 되고, 술김에 세입자 단톡방에서 말실수를 해 다른 세입자가 아람의 집에 불을 지른다. 소을의 집에 얹혀 살게 된 아람. 갑자기 소을의 남친이라는 미성년자 유투버가 나타나고, 그와 함께 소을을 기다리는 중 오피스텔 지하실에서 소을의 시체가 발견됐다며 관리인이 찾아온다. 자신의 피로 아람의 이름을 써놓고 죽은 소을.


마무리가 너무 급했다.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수습은 어찌 하려나, 결말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 하며 읽고 있었는데. 물론 저자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소위 예술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써먹어지고 있는지, 그 위선과 허상에 대한 것이었을 듯. 물론 위선은 예술과 예술가만 떠는 게 아니지만. 아람의 악역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게 가장 아쉬웠다. 아람이 악역을 멋지게, 오래오래 하길 바랐는데. 



25. 왜 베토벤인가(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역. 에포크. 2025. 548쪽)

: 베토벤은 내 노동요다. 난 막귀여서 연주자에 따른 차이점도 잘 모르고 그냥 유튜브에서 찾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정도지만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늘 좋아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를. 사실 노동요로는 적합하지 않다. 너무 아름다워 손을 놓고 음악만 듣게 되기 때문. 이 책은 베토벤의 작품 100곡을 이야기한다. 각 챕터가 짧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챕터 첫머리에서 해당 곡의 작곡 배경이나 당시 에피소드 등을 얘기해 주는 게 좋았다. 그러고나면 저자가 좋아하는 연주를 소개해 주는데 말했듯 난 막귀이고 감상 경험이 일천해서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연주자, 지휘자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이런 가이드는 초심자에겐 언제나 환영이다. 그리고 연주자들의 에피소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특히 첼로 소나타 3번을 나치 부역자 피에르 푸르니에(첼로)와 나치를 피해 망명한 아르투어 슈나벨(피아노)이 함께 녹음했다는 이야기는... 저자에 따르면 긴장감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104쪽)고 하니 꼭 찾아 들어봐야 겠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읽으면서 정말 나치 부역자가 많았구나 싶었다. 저자가 언급한 사람들만도 어마어마한데,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겠지. 음악계 뿐이랴. 다른 분야도 할 말 없지. 그런 면에서 저자가 카라얀이 <영웅>을 지휘하는 걸 보며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는 데(219쪽) 동의한다. 단지 나치 부역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베토벤은 다른 이들이 탐험할 수 있는, 창작하는 영혼이라면 그 안에서 도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중략) 베토벤 음악에는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있다. - 464쪽.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을 인용하며.



26. 끼리끼리 사이언스(권혜영,성해나,성혜령,이주란,한지수. 앤드. 2025. 232쪽)

: 모임에 관한 앤솔러지. 요즘 핫한 성해나 작가가 궁금해서 대출했는데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주란이었다. 나 이주란 작가 사랑하거든. 성해령 작가도 좋았다. 여성들의 연대는 언제 읽어도 흐뭇하다. 성해나 작가는 기대감이 너무 커서인지 밋밋한 느낌이었고, 한지수 작가는 많이 힘들었다. 다른 작품들이 가벼웠던 건 아니었지만 한지수 작가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많이 무거웠고 머릿속과 가슴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다섯 작품 모두 좋았고, 의미 있었다. 



27. 푸른 수염의 방(홍선주. 나비클럽. 2023. 264쪽)

: 5편의 단편. 표제작인 첫번째 작품이 정말 맘에 들어서 다른 작품들도 호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고, 다 재밌었다. 작품들에 큰 반전이나 예측 불가능함은 없다. 하지만 작가의 필력은 예상되는 이야기도 눈을 뗼 수 없이 몰입하도록 만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연모>. 한자어가 그것도 있는 줄 몰랐다. 



28.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백사혜. 허블. 2025. 436쪽)

: SF 연작. 미래의 지구인들은 외행성들을 개척하며 살아가는데, 이 과정 중에 거대 자본들은 자신을 '영주'라 지칭하며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잘 나가는 영주의 용병으로 살거나 마치 주식에 투자하듯 각 영주들의 사업에 투자하며 이 기형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애쓸 뿐. 개척한 외행성에 정착한 이들은 환경에 맞게 변화(진화)하는데,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소외시키고 타자화시켜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 마치 게임하듯. 이 소설집은 이런 세계관 위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작은 존재들 이야기.


꽃이 시들고 다시 필 지금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들은 결국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계 하나쯤은 끝장낼 수 있는 것.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내가 원했던 라푼젤이었다. 



29. 라스트 사피엔스(해도연. 네오픽션. 2025. 216쪽)

: 캡슐 안에서 눈을 뜬 '나'. 이름도, 왜 이곳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26세기 밝은 미래에서 만나자 - 에이다 엠'이라고 뒷면에 쓰여 있다. 다른 정보들을 찾아 캡슐을 뒤졌는데 아마도 내 이름인 듯한 영문 ERICA가 있고, 간단한 식량들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27543년. 26세기에서 25,000년이나 지났다. 간신히 캡슐 밖으로 나왔는데 이곳은 넓고 푸른 벌판이다. 캡슐 하나 외에는 어떤 인기척도 없는. 식량을 짊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숲으로 가 다른 캡슐을 하나 발견했지만 불행히도 그것의 사용자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듯 하다. 다시 길을 걸어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알아내고 처음 보는 동물을 사냥하면서 지내는데, 신기한 생명체가 눈에 띈다. 코끼리와 켄타우로스를 섞어 놓은 듯한.


어쩌면 낭만적일 수도 있었을 이야기. 비록 슬픔 위에 세워진 우정이었지만 아기 켄티가 옆에 있고 저녁마다 처녀자리 성운이 무지갯빛 눈동자를 빛내는 세상. 그러나... 


인간이란 뭘까? 어떻게 생겨먹은 생명체길래 이토록 오만하고 잔인하며 어리석을까? 말렌 하우스호퍼의 <<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꼭 이 세상에 살아남아야 하는 건 아니다. 대체 어떤 인간은 왜 세상을 지배하려고만 하나?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존재는 죽여도 된다고, 아니 죽여야만 한다고 누가 가르쳤나? 아니, 나의 안위와 상관없이도 다른 존재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가? 결말이 다행이라고, 진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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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 낮은 건 알겠지만, 앨리 스미스가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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