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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은 해상도로부터(서이제. 문학동네. 2023. 376쪽)

: 단편집. 조금은 싱겁다고 할까. 약간은 유치한 작품도 있었지만 내용이나 필력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단편 속에서 화자가 계속 바뀌는 건 처음 한두 번이라면 새롭고 흥미로웠겠지만 단편집 전체에서 반복되다보니 너무 피곤했다. 



2. 랩 걸(호프 자런, 김희정 역. 알마. 2017. 412쪽)

: 도서관에서 이제야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역시 저자의 입심이 대단하다. 저자의 소설을 먼저 읽어서 잘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보다 이 책이 훨씬 재밌었다. 과학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평가 절하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사실 이런 내용만 가득할까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걸 굳이 되풀이해가며 읽기에는 당시의 내가 많이 지쳐 있었어서). 저자 자신이 가진 과학에 대한 열망과 헌신, 좋은 파트너를 만난 행운과 가진 것 없이 맨땅에 머리 부딪치면서도 과학을 할 수 있기에 누린 행복이 가득하다. 나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저자가 얼마나 그 얘기를 쓰면서 재밌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저자 인생의 전반에 걸쳐 거의 다 털어놓아서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에세이 한 권 더 내줬으면 좋겠다. 



3.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민지형. 안전가옥. 2023. 312쪽)

: 부잣집 입주 가사도우미 재이. 이 바닥에서 일할만큼 일해서 눈치가 빤하다. 지금 일하는 이 집은 사모는 매일 운동을 다니고 사장은 최근 IT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호라이즌 사의 전 이사로 늘 유유자적이다. 어느날 사장이 호라이즌 사의 최신형 기기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들여온다. 일정 시간에 걸쳐 자신의 뇌를 스캔해서 기억을 업로드한 후 그 기억으로 들어가 다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 사장이 며칠간 골프 여행을 떠나자 재이는 호기심에 사장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는데, 부인과의 아름다운 첫만남과 침대에서의 기억이 있다. 사장이 여행하는 동안, 그간 엄격한 자기 관리의 모습을 보였던 사모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사용해 보더니 사장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장을 부엌칼로 난도질하고 자살한다. 재이는 충동적으로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챙겨 그 집을 나오고, 호라이즌 사의 이사인 리사가 접촉해 온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기억은,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점은 기억의 주관성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상황과 위치와 해석에 따라 아름답게도 또 비참하게도 남는 기억. 그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사고파는 근미래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지만 그걸 공유하고 매매하는 인간들은 그런 점은 간과한다. 그 어떤 행복한 기억도 이면은 다를 수 있음을. 그래도 이 소설 속 많은 끔찍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소설 속일지라도 사회가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게, 쓰레기를 그래도 치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작가는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작으나마 선함을 보았나 보다. 그게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4.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애슐리 엘스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5. 440쪽)

: 에비는 남자친구 라이언의 같이 살자는 말에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라이언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완벽한 남자다. 비록 가난한 에비를 의심하는 라이언의 오랜 친구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지만 에비는 이제 라이언의 제안을 수락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비가 살고 있다고 라이언이 알고 있는 집을 세팅해야 한다. 단기임대로 빌린 초라한 아파트를 생활감 있게, 라이언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병들과 에비의 직업에 맞는 책들로 말이다. 사실 에비는 에비가 아니다. 만들어진 인물이다. 실제의 '나'는 루카 마리노. 홀어머니 밑에서 행복하지만 어렵게 자라다 엄마를 암으로 잃고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려 '스미스 씨'에게 발탁되었다. 라이언은 이번 작업 대상이고 에비에게는 자신이 변해야 하는 인물의 설정과 서사만 전달될 뿐 이 작업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라이언과 함께 참석한 경마 대회에서 라이언의 옛 친구를 만난 에비는 그 친구의 애인이 본인을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하자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대며 그곳에서 홀어머니와 살다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고 말하는 그녀.


초반부터 도파민 폭발이다. 루카의 지략과 흔들리는 마음,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스미스의 정체에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은 라이언까지 흥미를 놓지 못할 요소들이 계속 등장한다.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말까지 내 맘에 딱 들었다. 해피엔딩을 만든 게 루카 자신이라는 점이 특히 더.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읽은 범죄 소설이었다.



5.  죽이고 싶은 아이 1. 2(이꽃님. 우리학교. 2021,2024. 200쪽, 216쪽)

: 고등학교 1학년 서은이가 벽돌에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그것도 학교 뒷마당에서. 용의자는 서은과 가장 친했던 주연. 주연이 서은과 전날 다투었다는데, 주연은 도무지 그일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실은 주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1,2권이 시간차를 두고 출간됐지만 그냥 한꺼번에 읽었다. 어차피 이어지는 이야기였어서. 이 소설은 관계와 숨은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흔히들 남녀 관계는 본인들만 아는 거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둘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거지. 하지만 그 관계 내에서도 둘 사이의 입장과 판단은 다르다. 여기서 각자가 품은 진실이 달라진다. 소설에서는 '모두가 믿는 게 곧 사실'이라고 얘기한다. 이건 현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그런데 그게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남들이 다 믿으니 그게 곧 진짜라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되는 걸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은, 특히 당사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결국 사람의 일이고 늘 사람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건 늘 잊히지. 주연과 서은, 그리고 모든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팠던 이야기였다. 



6. 숲의 신(리즈 무어, 소슬기 역. 은행나무. 2025. 696쪽)

: 에머슨 캠프는 유서 깊은, 나름 잘 조직된 캠프이다. 이혼 가정의 트레이시는 아빠와 아빠의 애인에 의해 이 캠프에 합류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여름마다 여기에 왔던 아이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지만 역시나 자기처럼 뒤늦게 들어온 바버라와 친해진다. 바버라는 이 캠프 부지의 소유자인 반라 가문의 딸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데 어느 아침 일어나보니 바버라가 침대에 없다. 당연히 캠프와 반라 가문이 지내고 있는 '독립독행'의 사람들은 물론 마을 전체가 나서서 그녀를 찾는데, 사실 바버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반라 가문의 아이가 사라진 적이 있다. 모두가 사랑했던 어린 베어. 이야기는 오래전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중간쯤 읽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서 잠깐 덮었다. 정말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이 계층, 직업, 성향, 상황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휘둘리고 심지어 누명까지 뒤집어쓰는 구나. 지겹다, 정말.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형사 조도, 캠프의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루이즈도, 심지어 상류층의 앨리스도 본인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젠더로 평가받는다. 이야기는 범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하지만 바버라의 실종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문제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인간들의 위선과 계급 의식, 성차별 그리고 욕망. 진실이 모두 드러난 뒤에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변할까. 그래서 미지근한 결말이 이해가 됐다. 그게 최선이었겠지. 다만 새로 드러난 진실을 견디는 것도 결국은 여성의 몫일 거라는 거. 그게 마음이 아팠다.



7. 사랑의 입자(김리리,김민령,김진나,신현이,이금이,전삼혜,정은숙. 문학동네. 2018. 220쪽)

: '사랑'을 테마로 한 청소년 단편집. 전삼혜의 이야기는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롭고 좋았다. 주제인 사랑은 물론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이나 남매간의 애정, 때로는 로봇의 애정까지 이야기한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신현이.



8. 킬 유어 달링(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푸른숲. 2025. 360쪽)

: 웬디는 요즘 남편 톰이 점점 밉살스러워진다.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남편이 같은 학교 교수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 날,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술을 역시나 과하게 마신 톰은 자신이 새로운 소설 집필에 들어갔으며 그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한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공유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아챈 웬디는 톰에 대해 살의를 품는다.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에서 조금씩 과거로 역행하며 진행된다.


그들의 비밀을 알아채는 건 그닥 어렵지 않다. 사실 읽으면서는 이 책이 범죄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저 중년 부부의 저물어가는 인생과 결혼 생활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의존하는 톰과 그가 꼴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고픈 웬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과 헤어져 있던 기간의 삶, 그리고 재회. 굳이 이들이 함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이들의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각자 조금씩 어긋나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좋았던 기억. 하지만 책 중반에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는 여전히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 끄트머리의 작은 반전. 사실 맘에 드는 반전은 아니었지만 역시 스완슨이구나 하긴 했다. 재밌게 읽었다. 



9. 내일을 위한 힌트(기준영. 문학동네. 2025. 268쪽)

: 순한 단편집. 화자들이 다 순하고 이야기들이 다 순하다. 물론 사건과 갈등이 없는 건 아니고 역경과 고난도 주어진다. 하지만 그저 묵묵히 견뎌나갈 뿐이고, 착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반짝이지 않아도 칙칙하지는 않게 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정말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



10. 디 아더 와이프(마이클 로보텀, 최필원 역. 북로드. 2025. 528쪽)

: 오래전부터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 16개월 전 아내를 수술합병증으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10대 작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대학 신입생인 큰 딸은 멀지 않은 도시에 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아버지는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뒷머리를 둔기로 가격당했다고 하고, 아버지의 침상 옆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아버지의 다른 아내라고 말한다. 올리비아 블랙모어는 외과의였던 아버지의 예전 환자였고 장래가 기대되는 테니스 선수였지만 사고를 심하게 당했고 아버지가 그녀를 수술하고 재활을 도왔다. 조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걸 고민하는 한편 올리비아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다.


초반, 상간녀의 당당함에 혼자 열받았다. 조가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고. 남자들이란... 그저 예쁘면 호감이지. 설사 그게 아버지의 정부라 해도 말이다. 올로클린 시리즈의 9권이라는데 이런 시리즈물의 첫 권이 아닌 작품을 처음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꾸준히 읽었다면 조에게 더 공감했을까? 사건 조사는 느리게 진행되고 중간중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의심을 더하지만 범인은 가까운 데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도 잘한 건 없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으로 낚았네, 싶다. 시간이 좀 아깝기도 했고. 



11.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조나탕 베르베르,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3. 624쪽)

: 1888년 뉴욕. 스물여섯 살의 제니는 동네 시장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어느날 공연에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나타나 다른 마술 공연의 트릭을 찾아내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눈앞의 지폐에 흔들린 제니는 신사와 함께 본 공연의 술수를 바로 알아차리고, 후에 신사가 준 주소로 찾아가는데 그곳은 당대에 유명했던 핑커턴 탐정사무소. 신사는 로버트 핑커턴이었다. 로버트는 제니에게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심령술사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알아내는 임무를 함께하자며 거액을 제시한다. 당시 폭스 자매의 교령회는 종교 집회만큼이나 열렬한 팬들을 몰고 다녔고, 핑커턴 탐정사무소는 아버지 대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는 교령회에 참석하지만 속임수를 알아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자매 중 둘째인 마거릿이 성희롱을 당하는 걸 구해주며 그녀에게 신뢰를 얻는다. 한편 로버트의 동생 윌리엄은 거친 인간으로, 마술사인 제니를 고용하는 걸 못마땅해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스 자매의 비밀을 폭로하겠노라 하고 먼저 비밀을 밝혀내는 쪽이 핑커턴 사무소의 경영을 맡기로 하자고 로버트에게 제안한다.


마술과 심령술, 탐정 기술 등이 엮여 있지만 이건 가족의 이야기이자 제니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섞여 있다. 각 챕터 첫머리에 제니의 아빠가 쓴 마술 교본이나 핑커턴 지침서 등이 등장해서 챕터의 방향을 알려 주긴 하지만 폭스 자매, 제니 그리고 핑커턴의 서사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불쑥 튀어나온다. 사실 내 독서를 가장 시큰둥하게 만든 건 제니였다. 제니의 우왕좌왕이 그녀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했어서. 아마도 저자는 제니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제니는 임무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제니의 성장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정돈된 스토리였다면, 차라리 분량을 줄여서라도 단순화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2. 메르헨(연여름. 아작. 2024. 184쪽)

: 갑작스런 폭설에 전철에 오른 남자. 우연히 14년 전 인연을 만난다. 자신이 나호인지 은호인지 맞혀 보라는 듯 웃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일부러 틀린 답을 말하고, 둘의 기억은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60세 이하의 죽은 자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세계. 그렇게 재생인은 죽음 직전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깨어나 센터에서 적응 기간을 거쳐 사회로 나온다. 남자는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은호는 쌍둥이 언니 나호가 깨어나자 나호를 만나러 센터에 갔다가 남자와 처음 맞닥뜨린다. 재생인에게 일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재생인들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은호는 나호가 죽기 전부터 둘이 함께해 오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길 원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사실 재생인이라는 설정 외에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좋은 건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떄문.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거기에 작가 특유의 차분함이 배어나오는 문장들이 서정성을 더한다. 이 작가를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다. 다만 다음에 읽을 작품은 좀더 깊었으면 좋겠다. 



13. 오컬트 포크 호러(박해로. 북오션. 2024. 248쪽)

: 샤머니즘 기반의 호러 연작 소설집. 가상의 지명인 수낭면을 중심으로 토속적인 분위기의 작품 3편이 있다. 가벼운 걸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서... 작가가 가진 주제의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세 작품 다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에 문장력도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필력이 달리는 글들. 



14.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서미애. 엘릭시르. 2024. 448쪽)

: 작가의 초기 단편집. 사실 이 작가의 명성에 비해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별로 안 읽어와서 기대가 컸는데, 초기 작품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작가의 특성인건지 여성 캐릭터들이 다 너무 나약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여성혐오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도 몇 편 있어서 더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살인 협주곡>.



15. 워터멜론 슈가에서(리처드 브라우티건, 최승자 역. 비채. 2007. 252쪽)

: 매일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가의 이야기. 워터멜론을 끓여 생긴 슈가로 원하는 걸 만들고,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램프를 태우며, 아이디아뜨(iDEATH)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호랑이들이 있었고, '나'는 호랑이들이 부모님을 잡아먹은 걸 기억한다. 내게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면서 내 산수 숙제를 도와줬던 걸. 나는 책을 쓰고 있지만 진전은 없다. 그래도 마을의 누군가 물으면 난 계속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늘도 삐걱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다리를 건너 마가렛이 나를 찾아오지만 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응답하지 않는다. 마가렛은 '잊혀진 작품들'로 가버렸다. '잊혀진 작품들'에는 인보일 일당도 살고 있다. 친구 프레드가 찾아와 플린이 식사 준비 담당이라고 얘기하고, 난 아이디아뜨에 가서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을 감출 수 없다. 편안하게 읽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 작품의 많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이상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호랑이들이 살점을 뜯어먹었던 기억이 있을지언정 물 속에 관을 묻고 워터멜론 송어가 눈맞춤을 하는.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람의 잔인함은 사람을 죽인다. 꼭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Ideal과 Death는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16. 종말까지 다섯 걸음(장강명. 문학동네. 2025. 212쪽)

: 종말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들. 5개의 챕터인데 각 챕터의 첫 번째 작품들이 연작이고, 차례로 각 챕터의 키워드(부정 - 절망 - 타협 - 수용 - 사랑)를 구현한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와 상당히 비슷하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그런 듯. 각 챕터에 속하는 소설들은 키워드를 구현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를 끌어다 쓴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그걸 뒤틀었다. 작가의 시각은 맘에 들었지만 다 재밌진 않았다. 그래도 지루해질 만 하면 챕터가 바뀌면서 궁금했던 이야기가 계속되어서 잘 읽었다. 



17. 기억을 비추는 환등열차(심은정,최현유. 안전가옥. 2024. 424쪽)

: 수현은 삼도천을 건너는 환등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판결대를 향해 가던 환등열차는 갑자기 악귀의 공격으로 사고가 나고 함께 있던 담당 차사 원정의 도움으로 열차 밖에 내던져진 수현은 다행히 삼도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악귀가 가져가 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임시로 차사 일을 하게 된 수현. 살아있을 때 위기협상가였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다른 승객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면 자연히 수현의 기억도 돌아올거라는 말에 원정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힐링 소설류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들의 장점은 뚜렷하기에 그냥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려 했는데, 초반부터 수현 때문에 열받았다. 어떻게든 자신보다 어린 여성은 경력이 길든 경험이 많든 상관없이 상사로도 선배로도 절대 인정 못하겠다는, 존댓말도 못 쓰겠다는, 어떻게든 이겨먹어야겠다는 한국 남자 특유의 꼬장이 정말이지... 그렇다고 각 에피소드들이 뭐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랬다.



18. 펄프픽션(조예은,류연웅,홍지운,이경희,최영희. 고블. 2022. 256쪽)

: 한국형 펄프픽션을 표방하는 앤솔러지. 다 독특하긴 했지만 가장 주제에 부합했던 건 홍지운. 가장 좋았던 건 최영희. 사실 조예은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너무 평범해서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필력은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 



19. 인어의 걸음마(이종산,이유리,전삼혜,이서영. 서해문집. 2021. 168쪽)

: '다름'을 소재로 한 청소년 대상 앤솔러지. 전삼혜 때문에 대출했는데 보니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은 거였지만 즐겁게 다시 읽었다. 근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같은 부분에서 열받네 - 작중 인물이 얄미워서. 표제작은 과연 표제작다웠다. 그래서 가장 좋았고. 나머지 작품들도 좋았다. 



20. 베리 따는 사람들(아만다 피터스, 신혜연 역. 서사원. 2024. 408쪽)

: 1962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사는 원주민 가족은 여름 한 철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 주의 한 농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이 농장에서 감독관 역할을 하며 일을 해오곤 했고 엄마는 여름 노동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 바로 위의 오빠 조와 함께 냇가에 있었는데... 한편 어린 노마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 오두막과 커다란 바위. 노마가 악몽을 꾸면 엄마는 두통에 시달리고, 노마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의문을 눌러야 한다. 집에는 노마의 아기 때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예전에 집에 불이 나서라고는 하지만...


조와 조의 가족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팠다. 원주민으로서의 그들의 지난한 삶은 루시의 실종으로 더 큰 아픔이 된다. 그들이 백인이었더라도 루시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루시는 그냥 실종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받을 상처에서 한두 개 쯤은 덜 받을 수도 있었겠지. 조의 삐뚤어짐도 마냥 아프기만 했다. 누구보다 조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나 자신을 착한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싶은 마음. 처음부터 내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닥칠 불행은 훨씬 적었으리라는 믿음.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후에는 조에게 평안이 온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견뎌 온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밖의 독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앞날을 상상하고 싶겠지만, 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다. 



21.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문학동네. 2024. 336쪽)

: 작년에 명성이 꽤 자자했지만 난 왠지 기대가 되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들고 왔다. 기대가 없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었지만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지만 사회와는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읽는 사람도 크게 복잡할 게 없다는 게 이 이야기들의 장점이자 단점. 장편이 출간되면 읽어봐야겠다.



22. 저편에서 이리가(윤강은. 민음사. 2025. 172쪽)

: 이제 전세계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이다. 수시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은 크게 세 군데. 가장 남쪽의 '온실 마을'에서 생산된 식량은 유안같은 짐꾼들에 의해 중부 '한강 구역'으로 이송되고, 한강 구역에서 생산된 무기들은 국경인 '압록강 기지'로 이동한다. 유안은 이동 범위를 압록강까지 넓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이장의 말에 그건 한강 구역의 일이 아니냐며 한강 구역에 간 김에 짐꾼인 화린에게 따진다. 하지만 화린은 한강 구역의 구역장의 뜻임을 알려준다. 내친김에 함께 압록강 기지로 이동하는 둘. 거기서 유안은 원래 한강 구역 출신이자 화린의 친구인 기주, 그리고 대륙군의 탈영병 출신인 백건을 만난다.


해피엔딩일지 아닐지 조바심내며 읽었다. 해피엔딩이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통에, 이 눈보라 속에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 해피엔딩이 뭔데? 이들에겐 그저 생존이 해피엔딩인가? 혹은 잘, 의미있게 죽는 거?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죽음에는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이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저편에서 들리는 짐승의 소리는 과연 이 눈보라 속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일까, 아님 이들의 목숨을 가지러 오는 맹수의 모습을 한 죽음일까? 그럼에도 희망을 본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 



23.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도재경. 열린책들. 2024. 312쪽)

: 즐겁게 읽은 단편집.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의도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 각 작품들 속 장소가, 장소의 이동이 꽤 의미있게 다가왔다. 서울과 파리(<그가 나무 인형이라는 진실에 대하여>), 춘천 집 뒤의 숲 속 공터(표제작), 화재가 난 마을의 유일하게 불타지 않는 집(<마인드 컨트롤>), 우크라이나와 그 밖의 나라들(<방독면을 쓴 바나나>), 카트만두(<노르웨이와 카트만두 사이>) 등. 의미있는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이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삶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동하는 것인지도.



24. 내일의 엔딩(김유나. 창비. 2024. 156쪽)

: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자경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교사로 일하며 자경을 키운 아버지는 이제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다. 자경은 회사를 옮기고 알바를 하면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힘에 부친다. 


여성과 돌봄 노동에 관한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자경은 여러 가족 중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돌봄 노동을 떠맡은 건 아니기에. 그러나 홀로 돌봄으로 인해 한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기 힘들어지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생활에 치이고 경제적으로 허덕이면서 자꾸만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자경의 모습은 단순히 안쓰럽다고 말할 수 만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의 그녀의 모습도. 그래도 작가는 자경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늦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시 난, 사람으로 채우는 건 따뜻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그렇게 따뜻하게 끝나서 다행이었고, 좋았다. 



25. 나무를 훔친 남자(양지윤. 나무옆의자. 2024. 276쪽)

: 특이하고 괴상하지만 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해서 회사에서 나무들을 빼돌리고(표제작), 부당한 노동에도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에 잠도 자지 않고 쿠키만 구워대고(<알리바바 제과점>), 자유를 위해 부유함을 포기하고(<우리 시대의 아트>), 수조에 갇혔지만 도망치치도 않고(<수조 속에 든 여자>). 도저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것이 이들이 이 사회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들의 모습을 짜증내지 않고 그저 지켜볼 수 있었고.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핥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이런 주제들에서 조금은 벗어난 <인류의 업적>. 



26. 두리안의 맛(김의경. 은행나무. 2024. 292쪽)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은 그저 교체 가능한 부품임을 이야기하는 단편들. 작은 부품 하나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빛나게 꾸려가고 싶어하는 소시민들의 안간힘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따뜻함이. 이 작가는 처음 읽는데 읽을수록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에게 너무 공감되어서 읽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지만 잘 읽었다.



27. 그녀를 지키다(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5. 6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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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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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 있음)



유서 깊은 작은 수도원 사크라 디 산미켈레의 지하에는 그녀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유폐된 피에타. 그녀를 본 사람들은, 심지어 수도사들까지도 묘한 흥분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열망을 품게 된다. 여러 사건이 있은 후 이 수도원 지하에 숨겨진 그녀. 수도원장은 이제는 임종의 자리에 있는 '그'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열쇠로 그녀를 확인한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그는 오랫동안 이 수도원에 머물고 있고, 수도사들 사이에서 그의 신분에 관해 말이 나온 적도 있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이며 시시각각 죽음에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난 82년간의 생을 돌아본다. 


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인이었던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미켈란젤로보다는 미모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미모 비탈리아니. 1차 대전은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가고 엄마는 피 한방울 안 섞인 '삼촌'이 있는 이탈리아로 그를 보낸다. 그저그런 석공이었던 삼촌 알베르토는 늘 술만 퍼마시며 허송세월을 하다 갑자기 소도시 피에트로달바로 이주하고, 거기서도 미모를 학대하지만 이제 열두 살이 된 미모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이 고장의 가장 높은 귀족인 오르시니 후작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와 마주친다.


내가 처음부터 그를 가엽게 여긴 건 그가 왜소증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응답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응답받지 못한 이유도 왜소증은 아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클리셰로 읽힐 지도 모른다. 신분의 차이, 신체의 차이, 그리고 전쟁... 그러나 미모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그의 재능으로. 물론 그 악마적 재능이 그를 늘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 모든 상황을, 사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재능 덕분이다. 그러나 그 재능으로도 미모는 비올라를 지키지 못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비올라.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비올라. 하지만 세상은,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녀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젠더를 형벌로 지고 살아간다. 


아니, 미모는 그녀를 지킨다. 


"빌어먹을, 넌 정상적일 순 없는 거야? 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저 정상적인 거 말야."


(중략)


"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 (594 - 595쪽)


비올라의 천재성과 그것을 압박하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반발은 비앙카를 통해 드러난다. 중세 이후 서양 예술사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곰은 억제되어야 할 힘이며 길들여져야 할 야성이었다. 비올라는 비앙카를 지킨다. 비앙카에게서 달아나지도 비앙카를 사냥하거나 구속하거나 혹은 길들이려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앙카로 인해 비올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비앙카의 죽음과 비올라의 죽음이 잇단 건 우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비올라의 죽음이 미모에게 돌려준 것 또한. 



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모든 독자들이 전율하는 지점을. 예상을 했다하더라도 미모가 얘기하는 피에타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가슴 속의 울림을 누구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미모가 비올라를 세 번 배신해야 했는지, 왜 비올라가 그토록 고통받아야 했는지 마지막에서야 모든 게 맞춰진다. 어쩌면 비올라가 한 가장 숭고한 일은 한 인간 - 미모 비탈리아니 - 을 구한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미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올라를 지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건 세상을 구한 것인지도.



PS. 원제 Veiller sur elle를 직역하면 '그녀의 위에서 깨어서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비올라보다 작은 키의 미모가 지하에 놓인 피에타 상 위에서 산 40여년의 세월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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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열 로드에서 만나(이희영,심너울,전삼혜. 위즈덤하우스. 2023. 168쪽)

: 메타버스 앤솔러지. 이희영의 작품은 클리셰이긴 했지만 가장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너울은 설정은 재미 있었지만 용두사미. 결말도 뻔했다. 전삼혜가 가장 좋았다. 몽글몽글 귀엽기도 하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2. 런던 비밀 강령회(사라 페너, 이미정 역. 하빌리스. 2024. 484쪽)

: 1873년 파리. 유명 영매 보델린의 제자로 있는 레나는 보델린으로부터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레나는 원래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레나가 부모님이 계시는 런던을 떠나 이렇게 보델린과 함께 머물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인 동생 에비가 살해당했기 때문. 보델린은 범죄 피해자의 강령회를 열어 피해자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하게 해서 범인을 찾아낸다. 에비는 예전부터 강령회에 관심이 많았고 보델린의 제자로 있기도 했다. 보델린은 런던에 있을 때 런던 강령술 협회장인 볼크먼과 친하게 지냈지만 협회가 강령회에서 사기를 친다는 오명에 휩싸이고 여러 비리에 연루된 듯하자 모든 강령회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신변의 안전이 염려되어 파리로 와 있었던 것. 그런데 협회장 볼크먼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협회의 부회장 몰리는 보델린에게 런던에 와서 볼크먼 강령회를 열어 범인을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피해자가 죽은 곳에서 강령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 레나는 이번 기회에 에비의 강령회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보델린과 동행한다.


(스포)

작가의 전작이 사실 성에 차진 않았어서 큰 기대없이 집어들었기에 꽤 흥미롭게 읽었다. 번역, 교정은 별로였지만. 19세기 '신사' 클럽의 비합리성과 독선, 위선 그리고 비리. 진짜 능력있는 여성은 외면당하고 매장당하는 현실에 퀴어 코드까지 더해져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할 소재는 충분했다. 다만 서술이 좀 산만했고 사건의 해결이 너무 유령 의존적이었달까.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단서를 따라가던 레나가 마지막에서야 진실을 알아차리는 게 의아했다. 그 정도면 진작 에비의 의도를 알았어야 하지 않나? 아무리 동생과 생각이 다르고 동생이 믿는 걸 안 믿었더라도, 이건 좀 다른 얘기잖아. 물론 범인의 정체를 살짝 비튼 건 그나마 약간의 재미를 더하긴 했지만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사건 해결이라기 보다는 그냥 레나가 영혼을 믿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도 앞에서 말했듯 별 기대없이 읽어서 나쁘진 않았다. 



3. 살인 리스트(재키 캐블러, 정미정 역. 그늘. 2024. 452쪽)

: 범죄 전문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 기자 메리 엘리스. 1월 말이 되어서야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우편으로 온 선물들을 풀어보는데 선물 중에 있던 다이어리에 이상한 게 씌어 있다. 1월 1일 옥스퍼드, 리사 죽이기. 2월 1일 버밍엄, 제인 죽이기. 3월 1일 카디프, 데이비드 죽이기. 4월 1일 첼트넘, 메리 죽이기. 겁에 질린 메리는 경찰서에 찾아가고 경찰은 이미 죽은 리사 터너 살인 사건과 관련해 메리를 미심쩍게 보지만 결국 2월 1일에 부유한 독신 여성 제인 홀랜드가 사망하자 네 군데 경찰서는 비상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문제는 이 이름들이 너무나 흔하다는 것. 4월의 타겟은 메리 엘리스가 거의 확실하지만 나머지는? 게다가 범인은 CCTV에 찍히지 않는 건 물론이고 법의학적 단서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별 내용 없는 거 같은데도 은근히 긴장하며 읽었던 게, 아무래도 '죽을 날'을 받아놓은 듯한 메리의 심정에 공감해서인 듯. 중간중간 메리의 과거사와 하우스메이트인 피터 및 피터의 애인 메간과의 에피소드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지루하지 않게 4월 1일을 기다리게 한다. 범인이 가까이에 있을 거라는 건 중간에 메리가 한번 더 받은 협박 편지 때문에 짐작했지만 진짜 범인은 너무 의외였다. 난 다른 사람을 의심했는데. 범행 동기도 찌질했고. 게다가 작은 반전도 좀 슬펐다. 그건 아니잖아. 선한 사람의 희생은 소설 속에서도 슬프다. 범인이 희생시킨 **도 그렇고, 그들이 희생시킨 &&도 그렇고. 긴장감과 설정에 비해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가 너무 약해서 이 작가를 계속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4. 공(김유나.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난 아침, 병석은 집 안에 시츄 한 마리가 있는 걸 발견한다. 어제 입었던 옷 주머니에서 펫샵 영수증을 발견한 병석은 파양을 위해 펫샵으로 가지만 주인의 어이없는 태도에 개를 다시 데려오게 된다. 하지만 곧 접대용 일본 골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강아지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사내 정치에 시댈리는 직장인의 이야기. 이리 치이고 저리 굴려지는 공 같은 1N년차 부장급 영업직의 고뇌와 고충. 답은 없다. 그저 굴러가는 방향이 낭떠러지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



5. 눈 맞추는 소설(김금희,장은진,김종광,서이제,임선우,황정은,천선란 (지은이),김선산,김형태,성보혜. 창비교육. 2025. 264쪽)

: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개, 고양이, 새 그리고...... 의 이야기'라 했는데 '그리고.....'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7편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다른 단편집에서 읽은 작품들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로웠다. 그 중 황정은은 또다시 힘겹게 읽으며 감탄했다. 진짜 잘 쓴다. 임선우는 처음 읽는 거 같은데 - 아니, 다른 앤솔러지에서 봤을 텐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정말 좋았다. 결말을 계속 고쳐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래도 7편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김금희. 처음 이 책을 집어들 때의 기대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줬다.



6.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강승희 역. 천문장. 2019. 260쪽)

: 코데레는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표백제와 고무장갑 등 청소도구를 한아름 챙겨서 동생이 말한 곳으로 간다. 욕실에 있는 시체. 동생 아율라는 그가 자신을 때리려 했다고 했다. 코데레는 일단 청소부터 시작한다. 사실 아율라가 이런 식으로 남자를 죽이고 코데레에게 전화한 게 처음은 아니다. 벌써 세 번째. 눈부신 미모의 아율라는 모든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쉽게 연애를 시작하지만 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코데레는 자신에게 화났냐는 아율라의 물음에 대꾸하는 대신 시체를 어디에 버려야 할 지 고민한다.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화가 났다. 아율라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언니 혼자 청소를 해서. 동생들이란 정말... 같이 청소해야지! 같이 고민하고, 같이 걱정해야지. 왜 사고는 동생이 치고 수습은 언니가 하냐? 아니, 이건 언니와 동생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직전까지만해도 뭔가 속 시원한 이야기일 줄 알았다. 여성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들을 사적으로 응징하는. 그런데 아니었다. 예쁜 여자가 친 사고를 못생긴 여자가 뒷처리하는 이야기는 짜증만 불러올 뿐이다. 그냥 가정폭력에 의해 망가진 여성을 다른 여성이, 자매가 돌봐주는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짜증스럽진 않았을 듯. 굳이 아율라는 숨넘어가게 아름답고 생각은 짧은 여자로, 코데레는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깐깐한 여자로 그려야 했나 싶다. 



7. 별 별 사이(김동식,김주영,전삼혜,홍지운. 우리학교. 2021. 148쪽)

: 청소년 SF 앤솔러지. 청소년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는데, 네 편 다 좋았다. 다 재밌었고. 김동식은 좀 멀멀하긴 했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건 홍지운이지만 가장 마음에 닿았던 건 전삼혜.



8. 중독의 농도(김민령,장은선,송미경,전삼혜,김학찬,오문세,김봉래. 문학동네. 2015. 196쪽)

: 중독이라는 주제로 묶인 청소년 앤솔러지. 엮은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은데, 중독의 정도가 약한 작품부터 배치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핸드폰 중독과 시험 중독, (가상의)공기 중독 등이 이야기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독들. 물론 모든 중독이 관계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송미경의 작품에서나 장은선의 작품에서 보이는, 아직 미숙하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관계성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부디 이 아이들이 괜찮아지기를. 



9. 서울에 수호신이 있을 때(이수현. 새파란상상. 2022. 448쪽)

: 어릴 때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희미하게 보곤 했던 은지는 취준 중 밤늦게 동작대교 한복판에서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다. 당황하는 사이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끌고 나타난 훤칠한 남자가 멧돼지를 현충원 쪽으로 몰아 제압하는 걸 목격한 뒤 얼결에 부암동의 상담소에 취직하게 된다. 상담소장이라는 현허는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힘든데다가 드나드는 손님도 많지 않고 가정집 같은 사무실도 체계가 없다. 하지만 곧 현허는 신령이고 멧돼지를 제압했던 비휴 또한 사람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현허의 심부름을 하며 조금씩 서울의 신성한 존재들을 알게 되는 은지.


작가가 서울에 애정을 가지고 자료 조사를 방대하게 했다는 게 드러나는, 재밌는 이야기. 몰랐던 설화도 많이 알게 됐고, 새삼 서울 구도심의 거리와 여러 유적지의 모습도 환기되어 좋았다. 거기에 더해 작가는 서울 중심의 사고 방식 또한 비판하는 균형감도 보여준다. 결말은 안타깝긴 했지만 최선이었다고는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만큼 깊이 빠져 읽었던 이야기. 가능하다면 정말 후속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10.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폴 클리브, 백지선 역. 서삼독. 2025. 448쪽)

: 조는 느긋하게 집으로 걸어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마신다. 위층에서는 여성이 샤워를 하고 있다. 조는 위층으로 올라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늘 갖고 다니던 서류 가방 속 칼로 그녀를 살해한다. 사방에 조의 흔적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는 조의 DNA 정보는 경찰에게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크라이스트처치 카버'라고 명명한 연쇄살인범 조. 하지만 언론에 알려졌듯 조가 살해한 여성은 일곱 명이 아니다. 여섯 명 뿐. 조는 어눌한 말투와 느린 행동으로 동정을 사 경찰서에 청소부로 취직했고 가끔씩은 버스를 공짜로 타기도 한다. 낮 동안의 직업을 이용해 자신이 하지 않은 살인의 진짜 범인을 찾으려는 조.


경찰 수사의 헛점을 공략하고 자만했던 조. 나르시시즘에 취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조. 조의 시점이 강하게 서술되어 나 또한 샐리를 제대로 못 알아볼 뻔 했다. 하지만 이런 독자에게 균형감을 주기 위해 소설은 샐리의 시점 또한 공평하게 보여준다. 이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 듯. 사실 살인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책은 샐리라는 선하고 바른 인물의 관점 또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게 해준다. 결말은 기대만큼 속시원하진 않았다. 여성 혐오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기를 바랐는데. 다음에도 이 작가를 읽을지는 잘 모르겠다.



11. 평균율 연습(김유진. 문학동네. 2024. 208쪽)

: 프리랜서 편집자 수민은 유학생활 중 만난 수찬과 결혼 생활을 하다 수찬의 요구로 이혼하는 중이다. 우연히 피아노 조율 영상을 보게 된 수민은 불안한 직업적 상황을 개선시켜보고자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시작한다.


유려하게 오가는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하나의 관계가 끊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지. 내 일이 아님에도, 남의 관계라도 그 종말을 지켜보는 건 힘겨웠다. 난 사실 처음부터 수찬이 원망스러웠고 수민의 엄마 또한 그러했는데 정작 수민은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속은 쉽지 않았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수민이 얘기했듯, 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 



12.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박지영. 위즈덤하우스. 2025. 112쪽)

: '생애전환 시행령'. 생애 전환기가 되면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만 40세와 66세에 검진을 받고 사람으로 살 지 혹은 다른 생으로 살아갈 지 선택하고 전환할 수 있다. 승혜도 두 번째 생애 전환기가 다가오고, 승혜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타자기가 되기로 선택한다. 승혜 타자기는 빈티지 샵에 놓이게 되는데, 부코스키의 문장을 누군가가 타이핑 한 후로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린다. 


무생물의 삶이라니, 신선했다. 그러니까 의식이 있는 무생물의 삶. 근데 이제 고통도 있는. 그 지점이 좀 별로긴 했지. 무생물이 되면 고통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의식을 가진 대가인가? 하지만 생을 전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움과 아픔을 갖고 가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지리멸렬한 인간으로 남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힘든 삶이다. 



13. 북 오브 도어즈(개러스 브라운,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5. 592쪽)

: 뉴욕의 서점에서 일하는 캐시. 오늘도 나이 든 단골 손님 웨버 씨는 마감 시간까지 책을 읽고 있다. 캐시가 마감을 하고 돌아서니 웨버 씨가 더이상 숨을 쉬지 않고, 슬픔을 느끼며 수습을 하던 중 웨버 씨가 앉아 있던 자리에 수첩만 한 크기의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한다. 속지에는 캐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메모와 함께. 책을 집에 가져 온 캐시는 이 책이 모든 문을 가고 싶은 곳에 있는 문으로 바꿔 주는 문의 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 이지와 함께 문의 책으로 곳곳을 다니던 중 비밀의 도서관 사서 드러먼드 폭스와 마주치는데, 드러먼드는 그 책이 캐시와 이지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경고하고 역시나 책을 좇는 자의 공격을 받는다. 


문의 책을 비롯, 다른 모든 책들 - 기억의 책, 행운의 책, 환상의 책, 기쁨의 책, 절망의 책 등 - 이 다 신기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모든 책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책은 그냥 그 자체로서, 그것이 담고 있는 진실로써, 이야기로써 독자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말에서 이 모든 책들이 파괴되기를 바라며 읽었다. 이야기 속에서나마 책이 파괴되기를 바라는 건 정말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글쎄... 나만 불안해? 캐시를 비롯, 다들 너무 관대한 거 아냐? 어쨌든 즐겁게 읽었다. 제발 내가 걱정하는 점을 가지고 후속편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14. 7맛 7작(박지혜,장아미,한켠,조동신,유사본,손장훈,김영주. 황금가지. 2017. 304쪽)

: 음식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 공모전 입상작들이라고 한다. 다 입상작들일텐데 필력의 편차가 좀 큰 편. 특히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고 전형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도 재밌었던 건 손장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 유사본 <하던 가락>. 손장훈은 마지막 여성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텐데.  유사본은 반대로 마지막 그 한 문장이 작품성을 더 높였다. 



15. 아름다운 여름(체사레 파베세, 이열 역. 녹색광선. 2025. 184쪽)

: 옷가게에서 일하는 열 여섯 지니아의 단조로운 삶은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는 아멜리아와 친해지면서 변하게 된다. 대담한 아멜리아를 따라 로드리게스와 어울리게 된 지니아는 그들과 함께 화가 귀도의 작업실 겸 집에 방문하게 되고, 화가인 귀도를 위해 아멜리아가 모델을 서줬는지, 귀도와 아멜리아는 어떤 관계인지 신경이 쓰인다. 


옮긴이도 얘기했듯, 저자는 10대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드러내는지. 모든 사랑은 여름처럼 뜨겁고 짧으며 강하게 빛나지만 한순간에 사그라든다. 이 여름이 지났고 겨울이 오고, 지니아는 좀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다시 여름이 오겠지만 이번 여름은 지난 여름과는 다를 것이고, 지니아도 지난 여름의 그녀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며 인생은 이어진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서 아름다운 것. 



16. 명신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김동식,김선민,문화류씨,홍지운,정명섭. 요다. 2020. 252쪽)

: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 앤솔러지. 기대가 컸던 건지 다 용두사미였다. 다른 앤솔러지에선 재밌게 잘 쓴다 했던 작가들도 여기선 다들 하향평준화가 되어버린 건지. 학교에 이른바 '안전수칙'이라는 게 있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무서운 일을 당한다는 설정은 좋았는데 작가들이 다들 설정 구현에만 신경쓰고 이야기의 완성도는 외면한 듯. 



17. 한참을 헤매다가(정미진. 엣눈북스. 2025. 392쪽) 

: 재욱은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시의 가장 큰 병원장인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서울에서 전학 온 은수의 안내를 맡게 되는데, 여행작가인 엄마를 따라 세계 곳곳에서 살아온 은수의 씩씩함과 자유로움에 빠져든다. 여름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날, 둘이 같이 키우던 강아지 호수가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가느라 은수에게 미쳐 연락을 못했고, 그날 은수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그리고 15년 후 재욱은 뇌공학자가 되어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기술을 개발한다. 은수의 무의식 속에 들어가 그녀를 깨우려는 재욱.


아이디어는 좋은데 문장력이 부족하고 디테일이 유치하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궁금하지만 각 장면장면을 읽어나가는 건 괴로웠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들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현실적이지 못했다. 다음 작품은 좀 나으려나?



18. 클락워크 도깨비(황모과. 고블. 2021. 109쪽)

: 조선 말 깊은 산속. 연화는 대장장이인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무기를 만들던 장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떻게 이 깊은 산까지 흘러들어와 솥이나 만들어 양곡과 바꾸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 없다. 연화는 혼자 놀러갔던 무덤가에서 마지막 도깨비 갑이와 만나 밤마다 씨름을 하며 함께 논다. 어느날 괴한들의 침입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연화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수레를 가지고 갑이와 함께 한양으로 내려온다. 자신의 수레에 아버지의 원진을 싣고 갑이의 불을 원동력으로 인력거를 끄는 연화.


굽힐 줄 모르는 연화 때문에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연화의 불이, 불같은 성격이 연화를 불행으로 밀어넣을까봐. 당시는 그런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작으나마 연화의 뜻으로 가득한 마을이 반가웠다. 이렇게 조용한 해피엔딩이라니. 하지만 해피엔딩만은 아니었다. 딸들을 향한 연화의 노래에 결국엔 눈물이 흐르고 말았으니. 그러나 연화는 딸들을 기다릴 것이고, 딸들은 가슴 속에 품은 불로 길을 밝혀 돌아올 것이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안에 불을 품고 있는 여성의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불을 절대 꺼트리지는 않을 것이다. 



19. 저녁의 비행(헬렌 맥도널드,주민아 역. 판미동. 2021. 488쪽)

: 전작 『메이블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참매를 길들이며 이겨냈던 저자의 신간이어서 동물들에 관한 저자의 깊은 시선이 담겨 있을 거라 기대하며 집어들었다. 역시 저자는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활과 엮어 풀어낸다. 저자가 어린 시절 잔디밭에 얼굴을 파묻고 관찰했던 벌레들, 집 주변 공터에 있던 수많은 새들, 또 어른이 되어 관찰할 수 있었던 수많은 동물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볼 수 있었던 철새들과 특별히 관찰할 수 있었던 백조들, 야생돼지와 산토끼,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칼새들의 이야기가 각 챕터마다 삶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아름다웠고 특히 해질 무렵 공기의 흐름 속에서 잠이 든 채 하늘을 유영하는 칼새의 이야기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마냥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난민, 장애인, 망명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삶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으니까. 


전반적으로 좋기는 했지만 문장 때문에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었다. 원문의 문장도 단출하진 않았을 거 같긴 하지만 번역시 모든 단어를 1:1로 옮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비문과 오타도 2~3페이지에 한번씩은 나온다. 가독성이 떨어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읽어야 했다.



20. 전교생의 사랑(박민정. 문학동네. 2025. 316쪽)

: 단편집. 앞의 다섯 편은 어린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조명한다. 표제작의 '전교생'은 전학생의 일본식 표현. 난 우리나라 표현 그대로 전교생한테서 사랑받는 뭐 그런 소녀의 이야기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네 꿈을 위해' 혹은 '프로니까'라는 말로 교묘하게 조종당해 성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밀어넣어지는 '연습생'들은, 그리고 아역 배우들은 그 시절을 보낸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뒤의 4편은 연작인데, 역시 여성 아이돌 이야기. 다만 배경이 일본이고, 현재는 잊혀지거나 다른 길을 가는 멤버들의 이야기이다. 뒤의 작품들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일상 생활에서의 위선과 은근한 '급 나누기'에 따른 소외를 이야기한다. 어느 것하나 쉽게 지나쳐 가기 힘든 우리 사회의 불편한 현실들. 이 책을 읽을 때 내 기분 탓이었는지, 답이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작품들은 훌륭했으나 이 놈의 사회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 그러니 계속 지적해야겠지. 작가들은 쓰고 독자들은 읽으면서.



21. 불멸의 인절미(한유리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24. 112쪽)

: 회사를 그만두고 집필 노동자의 길을 택한 유리는 인절미라는 기니피그를 키우며 친구 여름과 신림동 반지하 3룸에서 살고 있다. 몇 년 전 인절미와 같이 키우던 티라미수를 잃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인절미를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유리. 취직을 하면 인절미를 돌볼 시간을 낼 수 없고 시간을 확보하면 병원비를 댈 수 없는 현실. 유리는 인절미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기에 의뢰받은 소설 속에서 인절미가 불멸의 삶을 살 수 있게 우주로 보내기로 한다. 


후회의 마음이야 잘 알지. 내가 주지 못할 것을 어떻게든 갖게 해주고픈 마음도. 현실은 잔인하지만 마음만은 깊고도 깊다는 걸 인절미는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그들'이 비웃듯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을 비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좁은 공간에서 이상한 먹이를 얻어먹으며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이 이상한 지배구조는 씁쓸하다.  하지만 좁은 방 안에서 인절미와 티라미수를 거두던 유리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없는 살림에 미나리를 사고 기니피그 영양제를 주사기에 넣는 유리에게. 병원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는 유리에게. 이 지구의 모든 '반려'동물과 인간을 위해 기도한다. 



22. 매듭 정리(이경희. 위즈덤하우스. 2023. 68쪽)

:  화자는 싱글 대디이다. 딸 소연은 아기 때부터 뭐든 스스로 해냈다. 하지만 소연이 유독 서툴렀던 부분은 순서를 지키는 것. 마치 소연의 엄마가 그랬듯 시간에 맞추거나 차례대로 뭔가를 해내는 걸 어려워하던 소연은 그러나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출산 후 사망한 엄마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먼 우주로 여행갔던 이야기를 하거나. 


짧은 시간 동안 읽고 긴 시간을 생각했다. 그렇게 매듭을 묶어버릴 수 있는 마음을 나는 감히 따라가지 못한다. 시간이라는 건 없고 우리가 내린 작은 결정에 의해 생겨난 수많은 우주가 있을 뿐이라는 얘긴 어렴풋이 따라갈 수 있지만 그걸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내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연은 알고 있었지. 어떤 우주에서 자신을 먼 곳으로 데려가 줄 누군가를 위해 여기서 매듭을 묶어야 한다는 걸. 그나마 소연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매듭을 묶을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했'다고 얘기해서 다행인 건가. 그래서 소연의 아빠는 소연이 매듭을 묶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인 건가. 


난 알 수 없다. 그렇게 매듭을 묶는 마음도, 그걸 지켜보는 마음도. 



23. 3층의 탐정 폴리와 라이스(오세민. 스토리비. 2024. 492쪽)

: 명문가 출신의 장교 리니아 폴라리스. 자신의 배경을 부하들을 위해서 쓰던 그녀는 마지막 전투에서 7명의 부하들을 귀환시키지 못한다. 집으로 가자던 외침이 무색하게, 갑자기 나타난 상관 후시 루 대령에 의해 부하들이 모두 우주로 흩어진 것. 리니아 폴라리스는 살상 무기 거래로 부를 축적한 집안과 연을 끊고 3층 랄 시티로 내려와 폴리라는 이름으로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우주 쓰레기들이 지구로 쏟아진 두 차례의 '스카이폴' 이후 지구는 하늘 위의 6층과 지상의 3층으로 나뉘었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6층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3층민은 6층에 갈 수 없다. 6층은 상류층의 거주지이기 때문. 폴리가 이곳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탐정 일을 하는 동안 후시 루 대령은 폴라리스 집안의 충신답게 폴리를 감시하며 치안책임자로 3층에 머물고, 뛰어난 해커이자 2층 출신인 라이스를 폴리 곁에 붙여둔다.


마음 아픈 사랑 이야기를 연달아 두 편 읽고난 후에 가벼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내 취향이 전혀 아니어서 읽는 게 고역이었다. 나름 세계관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각 챕터를 유기적으로 엮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서술이 산만하고 문장이 유치했다. 뭔가 있을 거 같은 캐릭터들도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역할을 잃었고. 더 재밌을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



24. 삼척, 불멸(김희선. 위즈덤하우스. 2023. 64쪽)

: 병상에 오래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화자는 딱히 슬프지는 않다. 운명하시는 순간 화자에게 침대 밑에 있는 열쇠를 가져가라 했지만 화자는 잊고 있다가 장례 며칠 후 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 다시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담배 친구였다던 청소부에게서 그 열쇠를 받아온다. 사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부터 삼척이란 없다는 얘길 반복했다. 화자는 사진관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삼척과 관련된 다큐 비디오를 발견한다. 확인을 위해 삼척으로 향하는 화자.


짧지만 긴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 난 이 책을 읽었음에도 삼척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삼척에 가려고 나선 순간, 삼척 가는 길에 꾼 꿈, 그리고 손에 쥔 열쇠. 어쩌면 그곳은 삼척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삼척은 머릿 속에만 존재할 수도 있고 집단 최면일 수도 있으며 그냥 삼척일 수도 있다. 이건 사실이나 지식이 아닌 기억의 이야기이므로. '형태도 없고 기원도 없는'(43쪽).



25. 나의 여자친구(서미애. 위즈덤하우스. 2023. 100쪽)

: 고시생 종호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대학 동아리 친구 수빈과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수빈은 자주 연락이 되지 않고 가끔 만날 때도 저녁 9시까지 귀가해야 한다며 서두른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겨우 만나게 된 어느날 수빈은 양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한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종호는 수빈의 이야기를 듣다가 수빈의 양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초반에 상당한 어설픔을 보였던 종호가 후반부에선 꽤 날카롭다. 평범한 고시생이 어떻게 살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지 궁금해하던 시선은 종호의 움직임에 따라 사건의 진실에 다다르고, 드러난 진실은 흔하디흔한 돈 얘기였지만 그만큼 핍진성이 짙기도 했다. 재밌게 읽었다. 



26. 궤도(서맨사 하비, 송예슬 역. 서해문집. 2025. 240쪽)

: 국제 우주정거장. 지구를 90분 간격으로 16번 도는 우주비행사 여섯 명의 하루. 각자 국적과 성별은물론 과거도 다르고 그리운 사람도 다른, 같은 공간과 심지어는 소변(을 정화한 물)까지도 공유하지만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 지구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발생하고 달에 착륙하기 위한 다른 우주비행사들이 출발한다. 


그저 하루 열 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이 있는 이야기. 무중력 공간 속 우주비행사들처럼 둥둥 떠다니며 읽고 싶은 문장들. 문장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오랜만에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치에의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편히 자란 백인 여성의 나이브함이 보였다고 하면, 심한 건가? 



27.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김목인. 위즈덤하우스. 2023. 80쪽)

: 평범한 회사원 G는 우연히 경매 사이트에서 아코디언을 발견하고 입찰한다. 마음을 졸였지만 단독 입찰로 낙찰을 받은 그는 프랑스 소도시의 판매자가 낙찰자가 먼 한국에 있다는 걸 알고 소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한다. 번역기를 돌리며 성심성의껏 악기를 배송받으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 아코디언이 전설적인 뮤지션 마르셀 아졸라가 연주하던 카바뇰로 아코디언과 동일한 회사의 것이기 때문.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에 취재를 온 기자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다.


아코디언의 배송이 무사히 이뤄질 것인가가 줄거리의 중심을 잡고 있지만 주제는 흔하지 않은 악기를 대하는 소중한 마음들이다. 아코디언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이라 재밌게 읽었다. 어떤 취미에나 마니아는 있기 마련이지만 이 이야기는 왠지 더 순수하게 읽혔다. 아마 돈 얘기가 없어서인 듯. 악기를 단순히 수집하고 수선해서 연주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희귀한 악기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현실에는 널렸으니까. 이 이야기 속 사람들은 모두 어설프지만 아코디언 자체에 집중하고, 과하게 지식을 자랑하거나 맹렬하게 희귀한 제품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편안하고 차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야기. 



28. 나의 마지막은, 여름(안 베르, 이세진 역. 위즈덤하우스. 2019. 156쪽)

: 루게릭 병을 진단받고 59세에 벨기에에서 존엄사한 저자의 마지막 여름. 병을 처음 알게 된 날과 병의 경과에 따른 신체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만 투병기는 아니다. 존엄사를 신청했다는 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절차에 대한 안내서도 아니다. 저자의 청원으로 프랑스에 존엄사 합법화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잠깐만 나온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마지막 여름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오징어를 잔뜩 사서 얼려 두었다가 손자들이 오면 요리해 줄 수도 없고 내년에 이 정원에 또다시 필 라일락을 볼 수도 없지만 저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도 삶의 한 단계일 뿐. 내가 없어도 라일락은 아름답겠지만, 그게 다다. 모든 생은 아름답기에 내가 나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릿한 건 어찌할 수 없었지만, 저자를 위해 난 기뻤다. 저자의 마지막 여름이 다른 여름처럼 아름다워서. 저자가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 후의 여름도 아름다워서. 내 삶이 끝나더라도 다른 이들의 삶은 계속되고, 또 어디선가는 죽음이 일어나겠지만 생을 충분히 사랑했다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죽음은 슬프지 않다. 그래서 난 지금은 평온할 저자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계속 기뻐하기로 했다. 



29. 10초는 영원히(황모과. 위즈덤하우스. 2023. 92쪽)

: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늘 책상 위에 엎드려 잔다. 잠에 빠지는 바람에 알바하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명도 못할 지경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16시간을 자는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어느날 류비라는 친구가 전학을 오는데, 류비는 10초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물/사람만 인식할 수 있다. 류비는 내 옆자리에 앉게 되고 난 류비를 위해 10초를 가만히 있어주고, 류비와 사랑에 빠진다.


(약스포)


피부에 부스럼이 잔뜩 난 아이, 한없이 느린 아이, 또 엄청나게 빠른 아이, 늘 TV만 보며 다른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아이, 온 몸에 털이 뒤덮힌 아이, 항상 마스크를 쓰고 기침을 하는 아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을 보며 난 이 책이 그저 SF라서 특이한 아이들이 나오고, 이 아이들이 곧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겠구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구속된 아이들의 은유였다. 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류비마저 끌려가려 할 때 어른들은 단지 작별 인사를 위한 10초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조금의 다름도 인정하지 않고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이들의 마지막이 더 슬펐다. 작가의 말처럼, 희망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걸까. 



30.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정지돈. 위즈덤하우스. 2023. 60쪽)

: 지미는 자신을 알아봐 준 약혼자와 그 가족이 강도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들을 쫓아가 죽여버린다. 이런 그녀를 이웃에서 목격하지만 경찰이 출동했을 때 모두가 그녀의 알리바이가 되어준다. D시는 이처럼 잔혹한 범죄와 사적 복수가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곳. 어느날 오래된 연못에서 수십 구의 유해가 발견되고, 오래전 실종된 어머니의 유해를 확인하러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작가 융은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한다. 융은 검시관 K에게 도움을 청한다.


좀더 길게 읽고 싶었던 누아르. 한편으론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거 같기도 했다. 융이 쓴 글이나 융의 어머니의 억울함이 어떻게 풀릴지, 앞으로 이어질 K의 나날들은 조금이나마 달라질 지, ''네이버후드 워치'는 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하지만 뭐, 그게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사건들과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 흥미로웠던 이야기. 



31. 그냥 두세요(권혜영. 위즈덤하우스. 2025. 104쪽)

: 동생 윤서가 뜬금없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다, 대구로. 왜 대구에 가냐는 물음에 '중앙병역판정검사소'에 가야 한다는 동생의 말. 여성호르몬을 정기적으로 주사맞으며 목젖 제거, 가슴 확대 등 차근차근 수술을 받고 있는 동생이 당연히 군 면제를 받을 줄 알았는데, 자기들은 판단이 힘드니 중앙 어쩌구에 가서 재검을 받으라는 신병 검사소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동생과 동생 애인 수아까지 태우고 대구로 향한다. 사실 나는 남들보다 체지방이 많은 몸으로,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늘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윤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게소에서 음식을 잔뜩 시키는 것도 모자라 검사소 대기실에서 냄새 나는 오징어까지 꺼내든다. 


애증의 가족 관계. '쿨한' 부모이길 원하는 이기적인 부모와 역시나 내게는 짐이 되는 동생과의 갈등, 나 자신의 컴플렉스와 또 동생의 젠더 이슈. 내 몸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되고, 이 몸을 바꾸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냥 두는 게 사실은 가장 맞는 길인데. 사실 몸이 어떻든 나는 나다. 윤서는 윤서고 수아는 수아고. 알면서도 그냥 놔두기 힘든 게 내 몸. 



32. 문자 살해 클럽(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서정. 난다. 2024 .232쪽)

: 화자는 지인의 집에 방문했다가 텅 빈 서가만 있는 방을 보게 된다. 집주인 제즈는 자신이 어느날 깨달은 '문자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며 순수한 구상을 문자화하는 건 오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매주 토요일마다 문자 살해 클럽을 열어 돌아가며 문자화되지 않은 구상을 얘기하고, 화자 또한 초청받는다.


사변적일거라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각 주제별 이야기들이 마치 액자 소설처럼 재밌었다. 그럼에도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나 싶었는데 문자 살해 클럽에도 작으나마 사건이 일어나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문자는 구상을 정제하고 구체화한다고 생각한다. 구상이 문자화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면 그 구상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삐딱하게 읽어나갔기에 후반부에 라르가 '텍스트 없는 구상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다'고 말했을 때 역시나, 싶었다. 꽤 오래전 작품인데도 신박했던 재밌는 책. 



33. 글자들의 수프(정상원. 사계절. 2024. 220쪽)

: 제목과 연결되는 로맹 가리 이야기를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읽은 후 맘에 들어서 대출했다. '셰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처럼 저자가 읽은 문학 작품들과 음식을 연결지어 쓴 에세이. 단정하고 차분한 글들이 길지 않게 이어져 부담없이 읽었다. 다만 사어가 되어가는 단어들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어 문장에서 과하게 옛 단어들을 사용하였는데, 죽어가는 단어의 수명을 늘린다는 건 의미가 있으나 단어에 맞춰 만들어낸 문장은 전체 흐름상 편하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자들의 수프'는 궁금했다. 그 맛보다는 모양이. 



34. 세이프 시티(손보미. 창비. 2025. 248쪽)

: 유능한 경찰이었으나 한번의 실수로 휴직을 해야했던 '그녀'. 남편의 친구인 임윤성, 최진유 부부와 자주 어울린다. 임윤성은 인간의 기억 중 일부분만 삭제할 수 있는 '기억조작술'을 연구하는 회사의 핵심 인물이다. 임윤성은 기억조작술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나 범죄로 쾌감을 얻는 범죄자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주장하지만 그녀와 남편은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개발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는 도시에는 노후된 지역과 새로 개발된 지역의 격차가 심해지고, 도시의 구역을 나눠 '안전도'에 따라 여러 등급을 표시해 주는 세이프 시티 앱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낙후 지역의 건물에 들어가 여성 화장실만 문을 부수는 범죄가 계속 발생한다. 


굽히지 않는 여주인공을 보면 난 정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조금만 타협하지, 아니 타협하는 척만이라도 좀 하지. 조금만 돌아가면 되잖아. 목적지에 가는 데 꼭 직진만 할 필요는 없어, 가끔은 좀 돌아가도 되.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그녀와의 마주침이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여주인공의 미래 같기도 하면서, 그게 꼭 슬픈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건 그녀가 바라는 삶일 수도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걸 얻기 위해 다른 걸 버리는 건 희생이 아니라 그저 선택일 지도 모른다. 



35. 원래 내 것이었던(앨리스 피니, 권도희 역. RHK. 2018. 420쪽)

: 라디오 진행자인 앰버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병원에서 깨어난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간호사로 추정되는 두 명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큰 사고가 나서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말하려 했지만 눈도 떠지지 않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코마 상태였던 것. 드디어 남편이 오는데, 앰버는 남편이 오는 게 마냥 반갑지는 않다. 남편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곧 여동생 클레어도 오는데, 앰버는 클레어도 불편하다. 늘 자신과 비교되는 화려한 미모를 뽐내며 자신의 삶에 개입하려 하고, 남편과 이상하게 친밀하기 때문. 앰버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고를 기억해 내려 애쓰지만 악몽만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의 일기와 앰버의 현재가 교차된다. 의심스러운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상사, 그리고 그 남자의 등장 등 스릴러적인 요소도 쏠쏠하고 반전도 훌륭하다. 다만 앰버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 부분이 좀 답답하다. 하지만 앰버의 꿈이 조금씩 변하는 걸 따라가면서 어릴 적 일기와 대조해 가면서 읽으면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보인다. 결말도 이 정도면 완벽. 오랜만에 꽤 맘에 드는 범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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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면일기(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이정순 역. 을유문화사. 2025. 360쪽)

: 유명인의 일기 87편 모음집. 아무래도 작가의 비중이 높아서 내 눈길을 끌었다. 저자들이 나름 주제별로 분류를 하긴 했지만 난 주제를 의식하지 않고 쭉 읽었다. 그리고 날 이 책으로 이끈 몇몇 작가의 일기는 역시나 인상깊었다. 특히 보부아르. 원래도 샤르트르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짧게 발췌된 보부아르의 일기에서 그가 정말 개자식임을 확인했다(46쪽). 보부아르를 비롯, 캐서린 맨스필드, 조르주 상드 등 반가운 이름들과 이들뿐 아니라 로즈 드 프레이시네 - 1817년 남장을 하고 군함에 몰래 승선해 세계 일주에 동행 - , 이렌 에프뤼시 - 1941년 반유대주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망명 - 는 더 길게 읽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쓰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일기의 분위기는 달랐다. 앙리프레데리크 아미엘처럼 세상 감상적으로 아름답게 풍광을 묘사한 일기가 있는가하면 조르주 페렉처럼 사실만 건조하고 정확하게 서술한 일기도 있다. 조르주 페렉을 읽기 전엔 가끔 쓰는 내 일기가 초라하기만 했는데, 그나마 아미엘과 페렉의 중간쯤이라고 위안삼을 수 있겠다. 책에 일기 원본이 실려 있어서 좋았다. 특히 아서 코난 도일, 빅토르 위고 등의 여행기 삽화가 보기 좋았고, 스탕달의 필체는 꽤 인상적이었다. 연초에 재밌게 읽었고 대체로 다 좋았는데 사실 번역은 별로였다. 



2. 별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대니 샤피로, 서제인 역. 위즈덤하우스. 2024. 384쪽)

: 2010년 12월, 벤은 내일이면 정든 집을 떠나 알츠하이머인 아내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마당으로 나온 벤은 옆집 소년 월도가 창문을 열고 별을 관찰하는 걸 발견한다. 늘 저렇게 별을 관찰하는 걸 벤도 알고 있다. 잠시 뒤, 월도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벤에게 말을 걸고, 둘은 아이패드의 어플을 이용해 함께 별자리를 관찰한다. 얼마 후 집으로 들어간 월도는 밖에 나갔다 온 걸 아버지에게 들켜 혼나고, 대가로 아이패드를 압수당한다. 유일한 낙이었던 별자리 관찰을 못하게 된 월도는 절망감에 집에서 나간다.


(약스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별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집의 오랜 인연과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떻게 별들이 소년과 노인을 발견해서 그들을 가족 품에 되돌려주는지. 동화처럼 아름답지만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올려다 보든 아니든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그 별들은 40년 전에도 현재에도 지금과 같이 빛났다. 우리에게 시간은 선형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별들에게 인간의 시간은 그저 그 순간일 뿐이다.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 모든 일은 아직도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난 책을 덮으면서 아쉬우면서도 아쉽지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어디에선가 계속될 것이므로. 



3. 사단법인 한국괴물관리협회(배예람. 안전가옥. 2024. 400쪽)

: 한국괴물관리협회의 보늬. 괴물에 관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이 협회 내에는 괴물을 처리하는 '손'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보늬는 손 대신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손도 없으면서 민폐처럼 협회에 붙어 있는 보늬를 보는 내부의 눈초리는 곱지 않지만 보늬는 협회의 창시자인 할머니 뺵으로 입사해서 갖은 힘을 다해 버티는 중이다. 오랜만에 현장으로 괴물을 잡으러 구팀장과 함께 나간 보늬는 포획대상인 도깨비에게 연민을 느껴 그냥 보내주고, 이 일로 화가 난 구팀장의 일갈에 이제 그만 사표를 제출해야 겠다고 결심하지만 협회 사무실에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귀신을 잡아보겠노라 자원한다. 보늬는 마침 야근을 하던 신입사원 지운과 함께 탕비실에 있다가 평소답지 않게 상냥한 구팀장과 마주치는데...


작가의 말에도 있듯,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이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나라면 진즉에 포기했을텐데. 다른 분야나마 재능이 있다는게 어딘가, 비록 하고 싶은 일이 아닐지언정. 세상의 대부분은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밥을 번다.  하지만, 그런 대다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굳이 소설을 집어들 이유도 없는 거지. 재능을 뛰어넘는 애정. 보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일게다. 그리고 그건 젊음의 장점이지. 


괴물들이 대부분 전래동화에 기인한다. 책 속 세계관대로라면 괴물들의 모습을 따서 전래동화가 생긴 거지만. 그러니 전래 동화를, 어른들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읽을 땐 그저 작가가 자료조사를 열심히 했구나, 까지만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들이다. 그러니 작가님, 2권을 주세요.



4. 죽은 남편이 돌아왔다 1.2(제인도. 팩토리나인. 2023. 504쪽, 488쪽)

: 오래전 실종된 남편이 드디어 사망 선고를 받았다. 효신은 기뻐하며 연인 필주에게 연락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 재우가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시어머니와 함께 경찰에게 간 효신은 낯선 남자와 마주하는데, 분명 이 남자는 자신이 알던 남편 재우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의 지문 시스템에도 이 사람은 김재우이고, 경찰 뿐 아니라 시어머니까지 아들 재우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사실 효신은 폭력과 폭언을 휘두르는 남편과 다투다 실수로 그를 죽였고, 애인과 함께 시신을 건축 중인 가평 빌라에 묻었다. 분양이 무산된 이 빌라의 시신이 발견될 리는 없는데...


도입부는 흥미진진했는데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2권 초입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특히 더 재미없어졌다. 사실 도서관에서 대출 예약 경쟁이 치열해서 꽤 오래 노리다가 대출했는데, 그래서 더 실망이 컸는지도. 그나마 결말에서 권선징악이 확실한 건 맘에 들었다. 사실 진짜 교훈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 한국말은 끝까지 잘 들어야 한다. 



5. 그린 레터(황모과. 다산책방. 2024. 268쪽)

: 얼음산국 연구원 이륀은 비티스디아 잎을 연구한다. 이 식물의 잎맥에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멸종된 식물이고 이륀의 연구 재료는 증조할아버지가 키웠던 마지막 개체이다. 사실 이륀은 1/8 쿠진족인데 이 사회에서 쿠진족은 멸시의 대상이라 이륀은 자신의 출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날 이륀에게 비티스디아 잎맥을 해석할 수 있는 키를 가지고 있다는 이메일이 도착한다. 


부제대로 이건 사랑 이야기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상황에 휩쓸려 헤어졌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서 살아갔던.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개개인의 삶은 안타까울 수 밖에 없지만, 이 이야기 속 푸룬과 로밀야의 기나긴 떠돎은 안타까움 한 단어만으로는 말해질 수 없다. 비록 그들의 후손들이 다시 손 잡을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땅에서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살아갈 수만 있었다면 그 누구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폭력과 추방과 방황. 물론 사랑은 이 모든 걸 뛰어넘었다. 그것이, 그리고 또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이어진 이륀의 생과 사랑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이 사랑에서 시작될 좀 더 나은 미래가. 



6.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홍지운. 안전가옥. 2020. 284쪽)

: 고등학생 호랑. 이제 곧 열여덟 살이 되는 그녀는 공부따윈 관심없고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펑크로 세계 정복'을 꿈꾼다. 궁궐 복원 프로젝트 반대 시위에도 참여하고, 뒤풀이에서도 술 빼고 다 먹으며 신나게 놀던 호랑. 그런데 열여덟 생일날 혜종 황제가 집에 나타난다. 이모가 조카 생일 축하해 주는 거라며... 호랑은 이제 열 여덟이 되었으니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교육을 받아야 한단다. 거침없는 성격대로 격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공주 자리를 거부해 보지만 자신이 하지 않으면 세상 비호감인 다른 황족이 차선책이 될 거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성격이 시원시원해 읽는 맛이 난다. 게다가 호랑은 평소의 주장 뿐 아니라 행동도 꽤 과격하고 발언에도 필터링이 없다.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좀 더 약게, 소위 말하는 여우처럼 굴어서 원하는 걸 얻기를 바라는 맘도 없지 않았지만 호랑은 역시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상과 현실을 합친다. 개운했다. 조금은 유치할지라도 어린 나이에만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을 읽어나가는 게 무엇보다 속 시원했고 재밌었다. 



7.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이사구. 황금가지. 2024. 336쪽)

: IT 디자이너와 능력 좋은 무당의 콜라보. 연작이라고 했는데 장편으로 읽는 게 맞는 거 같다. 앞의 이야기를 읽어야 뒤의 이야기가 이해가 쉽다. 벽간 소음과 무능하고 성질 더러운 상사 퇴치, 최애의 애정을 얻기 위한 부적 등 살면서 이 일 좀 쉽게 해결됐으면 했던 일들에 관한 부적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부적이 진짜로 효능을 발휘하려면 사람이 힘을 보태야 하는 것. 결국은 사람이 하는 거다. 부적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책 속에서야 심각하고 위험하지만 책 밖의 독자에게는 흥미진진했던, 하지만 진짜로 겪는다면 당사자에게는 엄청나게 무서웠을 이야기들. 재밌게 읽었다. 제발 현실에서는 부적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8. 편의점(유기농볼셰비키,류연웅,이아람,정세호,이산화. 안전가옥. 2020. 302쪽)

: SF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 너무 뻔해서 계속 읽을지 고민하다가 읽었는데, 두번째 작품도 내 취향이 아니어서 더 망설였지만 그 뒤의 세 작품이 다 내 취향이어서 계속 읽길 잘했다 싶었다. 가장 좋았던 건 이아람 <여자의 얼굴을 한 방문자>. 이산화의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는 연작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곽재식. 비채. 2022. 304쪽)

: 이 작가는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고는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용두사미. 나와는 안 맞는 듯. 게다가 현실 조롱과 비판을 위한 블랙 코미디라는 건 알지만 낮에 회사에서 겪었던 일들을 저녁에 책에서 고대로 읽는 건 짜증난다. 최소한의 가공조차 안 하는 거, 좀 게으른 거 아닌가?



10.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조우리. 문학동네. 2025. 208쪽)

: 고등학교 2학년 락영. 중간고사가 끝난 날에도 스터디 카페에 왔다. 그런데 같은 반 지유가 다가온다. 가출을 했다는 지유의 얘기를 밤을 새며 들어준 뒤 함께 스터디 카페를 다니며 친해진 두 사람. 사실 락영은 서울대 입학이 목표이고, 이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공부를 하는 건 몽상가인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다. 종로 뒷골목에서 적자만 보는 낡은 LP바 '첼시호텔'을 운영하는 아버지. 한때는 엄마도 함께 운영했지만 엄마는 현실을 위해 공무원이 됐다. 지유와 우정을 나누던 어느날, 지유의 책상 위에 갯지렁이가 잔뜩 올려져 있는 사건이 발생하고, 반장인 락영은 범인을 찾고 싶어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사건을 덮고 싶어한다. 지유를 보호하고 싶은 락영을 같은 반 남학생 김도영이 슬쩍 도와주고, 셋은 점점 친해진다.


딱 고등학생다운 상큼하면서도 씁쓸하고 귀엽지만 짠한 우정 이야기. 사실 락영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내 입장에선 가만히 있는 락영을 흔든 지유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유로서는 그나마 락영과의 우정이 숨구멍이었겠지. 가엽고 안타까운 아이들. 그래도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훌쩍 성장한 둘이 자랑스럽다. 특히 락영의 마음이 편안해 진 게 정말 다행이다. 지유는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셋이 다시 만나 지금과는 또다른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져서 오랜만에 남의 이야기에 행복했다. 



11. 메리 제인의 모험(호프 자런, 허진 역. 김영사. 2025. 480쪽)



12. 세 개의 푸른 돌(은모든. 안온북스. 2025. 283쪽)

: 학교 앞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아이를 주면 대가를 치르겠다는 현수막이 걸린다. 엄마를 잃은 루미에게 아빠는 그 얘기를 꺼낸다. 이 어이없는 대화를 친구 반희에게 해주는데, 늘 엎드려 있던 전학생 현이 끼어든다. 너희 아빠는 자기 편하려고 널 팔아먹겠다는 거냐고. 10년 후, 간호사로 동네 병원에서 일하는 루미에게 현의 연락이 온다. 반희와 연락이 끊겼다고, 너는 알고 있냐고.


우정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라고 보는 게 맞을 듯. 이런 가족 관계도 있는 거지 하며 읽었고 때때로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사실 모든 의문과 답답함은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해소됐다. 제주의 가믄장애기 설화는 잘 몰랐지만 심청전에 대해서는 나도 불만이 많았기에 이 이야기가 더 좋아졌다. 그래도 과격하지 않게 부드럽게 마무리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어쩌면 세상의 많은 가족 문제는 그렇게 그냥 흐지부지 지나가겠지 싶어서 한숨도 나왔다. 앞에서 부모자식간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을 얽어매는 가족의 문제를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맞을 거 같다.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 



13. 살인자의 쇼핑몰 3(강지영. 자음과모음. 2025. 184쪽)

: 2권에서 편의점 전투 후 사라진 삼촌 정진만. 지안은 엄청난 양의 피와 지워진 CCTV 녹화분을 보고도 삼촌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지만 옐로코드의 수장인 '수전'은 정진만의 죽음을 확신하는 듯 하다. 하필이면 이때 딱 맞춰 나타난 그녀가 의심스럽고 게다가 그녀가 데려온 '그림책'이라는 지안 또래의 여자도 의심스럽지만 마비된 머더헬프의 서버부터 복구하고 쇼핑몰을 운영해야겠기에 지안은 그림책과의 동거를 받아들인다. 브라더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수습하려는데, 그림책은 계속 거슬린다. 삼촌과 머더헬프를 소재로 가공이나 숨기는 것도 없이 웹툰을 그리는 것도, 정진만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도, 게다가 지난 몇 년간 정진만이 그녀의 웹툰 시나리오 작업을 도와줬다는 것도.


이렇게 마무리될 줄은 몰랐다. 지안의 입장에선 그나마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정진만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고 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렇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정진만이었다는 게.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모든 일의 시초는 뭐였을까 궁금했거든. 암튼 앞으로 이 시리즈가 되살아날 일은 없다는 게 시원섭섭하다. 이제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겠다.



14. 돌아온 아이들(김혜정. 현대문학. 2025. 164쪽)

: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열두 살 담희는 말문을 닫았다. 이런 담희 앞에 또래로 보이는 민진이 나타나는데, 담희 아빠의 이름을 정확히 대면서 자신의 오빠라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담희 아빠는 민진이 30년 전 실종된 자신의 여동생임을 확인하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금도 자라지 않은 모습에 당황하지만 곧 병원에 계신 자신과 민진의 엄마이자 담희의 할머니에게 데려간다. 사실 민진은 그동안 '마인계'에 있었다.


독특한 성장소설이다. 가정폭력이든 그외의 개인의 문제이든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를 마인계로 데려가 살게 하는 건 어쩌면 아이에게 나쁘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모든 걸 외면한 채 살아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 진짜 성장은 마인계가 아닌 인간계에서만 이루어지니까. 그렇다고 마인계로의 도피가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커다란 문제 앞에 선 사람에게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곳에 진심으로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15. 삼나무에 내리는 눈(데이비드 구터슨, 노혜숙 역. 피니스아프리카에. 2025. 508쪽)



16. 호러(김혜영,권하원,배예람,경민선,이로아. 안전가옥. 2021. 270쪽)

: 공포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가벼운 기분으로 집어들었는데 뜻밖에 첫번째 작품 <습습 하>가 꽤 인상깊었다. 읽을 땐 그저 공포스러웠는데 읽고 나니 슬펐다. 그러다 두번째 작품이 기대에 못 미쳐 실망스러웠는데 다행히 세번째 <엔조이 시티전>이 정말 내 취향이었다. 그 뒤의 두 작품도 좋았지만 <엔조이 시티전>만큼 집중해서 읽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민선, 이로아 작가를 기억해 둬야겠다. 



17. 퀸스 갬빗(월터 테비스, 나현진 역. 연필. 2021. 512쪽)

: 여덟 살 베스는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들어간다. 보육원에서는 매일밤 신경안정제를 주고 그걸 먹으면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베스는 어느날부터 신경안정제가 더이상 지급되지 않자 불안해진다. 수업중 우연히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경비 아저씨 샤이벌이 혼자서 체스를 두고 있는 걸 보게 된 베스는 흥미를 느끼고, 샤이벌에게서 조금씩 체스를 배운다.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 베스. 열두 살에 휘틀리 부부에게 입양된 베스는 꾸준히 체스를 연습하고, 얼마 뒤 휘틀리 씨가 부인을 떠난다. 베스는 처음으로 체스 대회에 참가해서 자신의 실력을 선보이고, 대회에서 탄 상금으로 휘틀리 부인과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베스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체스판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즐거웠다. 그깟 편견따위 던져버리라지. 물론 어린 나이에 그 무거운 압박과 긴장 속에서 불면에 시달리고, 신경안정제에 집착하고, 부모의 사랑보다는 어정쩡한 애정에 만족해야만 했던 건 안쓰러웠다. 하지만 베스는 이 모든 걸 넘어, 자기 자신마저 극복하고 진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정말 좋았다. 사실 체스에 관해서는 지식이 전혀 없어서 읽기 전에 좀 긴장도 했고 읽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 책 속의 수많은 체스 설명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했어도 베스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18. 한 방울의 내가(현호정. 사계절. 2025. 264쪽)

: 이 작가의 독특한 색이 보이는 단편집. <연필 샌드위치>와 <청룡이 나르샤>의 k얘기는 아주 잠깐 이어졌다. 인물들의 정체가 모호하고 그들의 삶 또한 분명치는 않지만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방향을 정해 나아간다. 가장 좋았던 건 <청룡이 나르샤>.


"......당신에게 가려구요." <청룡이 나르샤>



19. 위치스 파이터스(전삼혜. 안전가옥. 2023. 188쪽)

: 전편 <<위치스 딜리버리>>에서 수습 마녀로 일하고 있던 보라. 이제 스무 살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대충 점수 맞춰 간 대학 생활에는 적응이 안 되고, 마녀 일을 잘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능력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 와중에 윤정은 주 영역인 성남시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간신히 수습 기간을 연장하긴 했지만 막막한데, 저주 용품 판매가 급증한다. 이를 확인하려는 보라는 초능력자 교육기관인 드림학교에서 한 학생을 마주치고, 예전에 알던 초능력자 미카엘라에게 연락한다.


역시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작가. 미카엘라는 혼자만의 고민 때문에 우정에 신경 쓸 틈이 없고 윤세이는 미카엘라가 소중한 만큼 서운함을 숨길 수 없다. 게다가 둘 다 스스로 가진 엄청난 힘에 비해 제어하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점에서 여타 평범한 사춘기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다치지 않고 크는 아이는 없지. 미카엘라와 그 친구들 뿐 아니라 보라도 성장한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막연히 기다리는 대신 한걸음 나아가기로 한 보라를 응원하고 싶고, 보라의 이야기가 계속됐으면 좋겠다. 사실 전작이 이번 작품보다 더 흥미진진하기는 했지만, 후속작도 기대된다.



20. 케임브리지 살인사건(케이트 앳킨슨, 임정희 역. 문학사상사. 2015. 404쪽)

: 1970년대, 수학자 빅터의 막내딸 네 살 올리비아가 실종된다. 더운 여름밤 언니 아멜리아와 마당 텐트에서 자던 올리비아는 다음날 새벽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20여년 후 변호사 테오는 둘째 딸 로라가 대학 진학 전 자신의 로펌에서 인턴일을 하도록 한다. 로라의 첫 출근날, 작은 열차 사고로 로라와의 점심 약속에 늦은 테오가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정체불명의 남자가 침입해 로라를 살해한 후였다. 아무도 그 남자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그 남자는 공격당한 로펌 대표를 도우려는 로라를 향해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다. 한편 어린 나이에 혼전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한 미셸은 남편 키스의 구질구질한 농장 살림과 독박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학업을 포기한 걸 후회하며 어떻게든 예전 삶을 되찾고 싶지만 남편은 도움은커녕 폭력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겨우 어린 딸을 재워놓고 사랑하는 동생의 방문을 기다리던 주말 오후, 남편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와 딸을 깨우고 항의하는 미셸의 뺨을 후려치자 격분한 미셸은 남편에게 도끼를 휘두른다. 첫번째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 후, 아멜리아와 줄리아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올리비아와 함께 없어졌던 올리비아의 애착인형을 발견하고 탐정 잭슨 브로디에게 의뢰한다.


세 사건이 긴밀하게 얽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따로인 것도 아니고. 각 사건들에서 뜻밖의 진실과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든 상실은 마음 아팠다. 아멜리아와 줄리아처럼, 테오처럼 그리고 잭슨 브로디처럼 상실은 평생에 걸쳐 잃어버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그래도 잭슨처럼 신실한 사람이 진실을 좇아 준다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겠지. 이 시리즈가 계속되길 바라지만, 요원하다는 거 알고 있다. 



21. 사는 사람(정이현. 위즈덤하우스. 2025. 96쪽)

: 입학 경쟁이 치열한 학원의 상담실장 다미. 이 학원 직원이라는 것 만으로도 주위의 보는 시선이 달라질 정도이다. 다미는 온라인에서 부동산 임장을 다니는 모임에 합류했다가 거기서 우재와 만나게 되고, 우재와 주말마다 고급 아파트 매수 의향이 있는 척 부동산 투어를 다닌다. 사실 다미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춰 무난하게 사는 게 맞는 거라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리스트를 만들고 임장지에 따라 옷차림까지 신경쓰는 우재가 점점 불편해진다. 한편 학원에서 다미는 한 학생으로부터 시험지를 미리 보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실장님만은 이해해 주실 거 같다면서.


제목의 '사는'은 중의적인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 인생을 사는, 집을 구매하는, 집에 사는. 다미는 집을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집에 살고 싶었던 거고, 인생을 살고 싶고 (학생의)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게다가 자신의 선의가 의도하지 않은 대가를 가져왔다면... 그래도 다미의 앞으로의 사는 일은 잘, 무난하게 흘러갈 것이다. 다미는 방향을 아니까. 짧지만 긴 생각을 하게 하는, 잊고 있었던 고민을 불러오는 책이었다.



22.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이경희,전삼혜,임태운. 안전가옥. 2022. 322쪽)

: 메타버스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 꽤나 강렬해서였는지 상대적으로 두번째 작품이 좀 약하게 느껴졌다. 원래는 전삼혜 작가의 작품을 읽으려고 대출했는데. 게다가 전삼혜 작가의 주인공들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와 달리 줏대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경희와 임태운의 작품은 내용면에서 강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메타버스라는 키워드를 던졌을 때 당연히 나오는 내용들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세 편 다 즐겁게 읽었다. 



23.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김원희 역. 북스피어. 2022. 392쪽)

: 엘리자베스 여왕은 90세 생일 연회를 가장 좋아하는 성인 윈저에서 주최하기로 한다. 각계 인사들이 모인 밤, 스물네 살 피아니스트 브로드스키는 잘생긴 외모와 활기찬 성격으로 좌중의 인기를 끈다. 여왕까지도 그와 춤을 춘 후, 여왕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브로드스키가 죽은 채 발견된다. 알몸으로 옷장 문에 목을 맨 모습으로. 자살이나 사고사가 아닌 살인 사건이라는 증거가 발견된 후, 경호국과 경찰청에서 사건 수사에 나서는 와중에 여왕은 보조비서인 젊은 여성 로지를 불러들여 은밀한 임무를 맡긴다.


(약스포)

저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얼마나 존경하는지가 보이는 픽션. 거기에 더해 정치판의 남성들이 얼마나 여성 정치인에 대해 편견과 우월감을 갖고 있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작중에도 언급되어 있듯 여왕은 남초 사회인 정치판에서 70년이 넘게 버텼고, 양차 대전을 비롯 수많은 위기를 넘겼으며 다른 국가일지언정 군주로서의 마음가짐과 암묵적인 존중, 자기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만 그럴 지는 모르겠으나 남성 정치인들에게 여왕은 그저 나이든 여성일 뿐이고, 시대에 뒤쳐진 할머니일 뿐. 이게 첫번째로 화났던 부분이다. 또한 여왕은 보조비서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으면서도 그걸 본인이 공표하거나 알리는 대신 멍청하게 엉뚱한 곳에다 삽질을 하고 있는 경호국장에게 떠먹여 준다. 이게 사실 이 소설의 가장 확실한 차별점이자 두번째로 별로였던 부분. 여타 미스터리였다면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았겠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약간의 단서를 가지고 모든 걸 꿰뚫어 보면서도 정작 공적은 엉뚱한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더 잘 활용하려는 모습은 여왕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힘들 듯. 비록 이 책은 픽션이라 여왕의 실제 성격이 반영되었는지, 혹은 실제 여왕의 행동 패턴이 이러할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 속 엘리자베스 여왕은 충분히 존경 받을 만 했다. 즐겁게 읽었고, 이 저자가 쓴 엘리자베스 여왕 시리즈가 두 권 더 있는 것 같은데 나머지도 번역출간됐으면 좋겠다.  



24. 성리학 펑크 77(김현재,민경하,오경우,유파랑,이준,전삼혜,진산,하늘느타리,호인. 황금가지. 2023. 340쪽)

:  SF 단편집.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없는 듯. 그냥 편하게 읽었다. 첫번째 작품이 답답하면서도 꽤 재밌어서 만족스러웠고 표제작도 괜찮았다. 사실 난 전삼혜 작가 때문에 이 작품집을 집어들었는데 전삼혜의 <나무의 노래>는 나무들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배경 지식이 약간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무들이 서로 뿌리를 얽고 곰팡이균을 주고 받으며 정보를 공유하는 wood wide web을. 비록 작중 화자는 자신들이 나무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다 좋았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았던 건 전삼혜.



25. 엔딩 보게 해주세요(김보영,김성일,김인정,김철곤,전삼혜. 요다. 2020. 268쪽)

: 게임 소재의 앤솔러지. 게임을 전혀 안 하고 게임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도 한 편 빼놓고 다 재밌었다. 게임을 안 해도 게임 스토리는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김보영 작가의 작품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거였는데도 다시 읽어도 재밌었고 전삼혜 작가는 왠지 뭉클했다. 그래서 가장 좋았던 건 전삼혜.



26. 브로큰 컨트리(클레어 레슬리 홀, 박지선 역. 북로망스. 2025. 392쪽)



27. 더 허니스(라이언 라 살라, 이진 역. 아르테. 2024. 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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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허니스
라이언 라 살라 지음, 이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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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의 쌍둥이가 죽었다. 여름캠프 에스펜에 가 있었던 캐럴라인이 어느밤 갑자기 돌아와 자고 있는 나를 공격했고, 그녀를 피하다 함께 2층에서 샹들리에에 매달렸다가 추락했는데 그녀만 죽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에스펜의 세 소녀들 브리아, 시에라, 미미. 에스펜의 숙소H에 캐럴라인과 함께 있던 그녀들은 캐럴라인의 시신에 벌 모양 귀걸이를 몰래 채우고, 캐럴라인의 귀에서는 곧 벌이 날아오른다. 기절했다 깨어난 나는 캐럴라인의 죽기 직전 행동이 석연치 않았음을 기억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에스펜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래전 젠더플루이드인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에스펜에. 


"그러나 그게 바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라고, 나 자신에게 일깨운다. 캐럴라인이 어떤 애였는지 알기 위해. 그래서 캐럴라인의 마지막 모습으로부터 날 구원하기 위해. 화를 내며 날 공격했던 가짜 캐럴라인으로부터 날 구원하기 위해." 164쪽


마스가 에스펜에 돌아간 건 자신을 위한 거였다. 처음 결심은 캐럴라인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서였지만 에스펜에 도착한 후에도 그리고 와이엇의 도움으로 천천히 적응을 해나가면서도 마스는 그저 숙소H의 그녀들 - 허니스 - 와 가까워질 뿐이다. 그리고 마스에게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들. 소설은 미스터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보다 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후반부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들의 아름다운 결속과 대비되는 그들의 집단 행동이. 그리고 마스의 처음 마음과 소녀들의 각성이 더해져 성장이 이루어진다. 여왕 아니 자매의 살해범을 처단함으로써 완성되는 성장 서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매를 사랑하는 것임을, 자매를 구함으로써 나 하나만이 아닌 자매들 전체가 안전해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만 앞으로가 조금 걱정되긴 했다. 과연 마스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아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마스 곁에는 허니스가 있으므로. 손을 꼭 잡은 자매들이 가지 못할 곳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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