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면의 조개껍데기(김초엽. 래빗홀. 2025. 384쪽)
: 자기 자신이 되는 꿈을 꾸는 존재들의 이야기. 그 꿈은 녹슬고 싶은 안드로이드의 것이거나(<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분리된 자아를 아니 육체를 공유하는 또다른 나를 없애고 싶어하거나(표제작) 하는 걸 넘어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이주/침투를 원하기도 한다(<달고 미지근한 슬픔>,<비구름을 따라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기도 하고, 이루거나 포기하기도 하는 꿈. 비록 미래 혹은 이곳이 아닌 존재들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바로 핍진성이 이번에도 오롯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좋았던 건 동화같은 <소금물 주파수>.
2. 엄마 집에서 보낸 사흘(프랑수아 베예르강스, 양영란 역. 민음사. 2007. 233쪽)
: 소설가인 화자는 아내로부터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선인세를 받은 출판사에 뭐라도 줘야 할 지경이라 화자는 일단 그간 집에 오라고 성화를 하신 엄마네 집에 머물면서 책을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엄마 집에는 가기 싫다. 화자는 엄마와 엄마의 애인, 다섯 누이들, 그리고 여러 애인의 이야기를 한다.
철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들 - 막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이자 습관적으로 바람 피우는 남편이면서 슬럼프에 빠진 작가인 화자는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엄마 집에 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가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계속 자신의 페르소나만 만들어내고, 비슷하게 전개되는 애인들과의 이야기만 늘어지게 할 뿐이다. 캐릭터가 한심하긴 하지만 전혀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 집에 가긴 가야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엄마가 딱히 보고 싶지도 않지만 엄마의 하소연에는 응답을 해야 할 거 같고. 애인들에 대해 쿨하게 굴고는 싶지만 사실은 찌질하다는 걸 들키고야 말고.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조금은 갈피를 잡기 힘들기도 하고 단순히 철없음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문제들도 슬쩍 보이기는 하지만 2005년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감안해서 흐린 눈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다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더라도 - 그럴 일은 요원해 보이지만 - 읽지는 않을 것이다.
3. 대문자 뱀(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26. 368쪽)
: 사랑하는 작가의 초기 미발표작. 저자는 초기에는 범죄 소설을 쓰다가 공쿠르 상 수상 이후에는 범죄 소설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책은 저자의 초기 작품이고, 저자 또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간하는 범죄 소설이 이 작품인 게 상당히 의미있다고 얘기한다.
예순 셋 마틸드는 천천히 운전을 해서 포슈 가로 접어든다. 차를 세우고 내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던 남자의 생식기와 목에 총을 쏜 후, 겁에 질린 반려견에게마저 총을 쏜다. 그리고 루틴을 지켜 쉴리 다리로 가지만 총을 버리는 대신 그대로 집으로 와 싱크대 서랍에 넣어둔다. 죽은 남자는 재벌 기업가.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마틸드를 관리하는 '인사부'의 앙리는 평소와는 다른 마틸드의 일 처리에 그녀에게 연락하기 전에 그녀가 요청한 무기와 방법 등을 점검하는데,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틸드는 사실 최근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 레지스탕스 시절부터 냉혹하게 일을 처리해 왔던 자신을 믿기에 자신이 적어 놓은 쪽지와 처리한 - 하지만 사실은 처리하지 않은 - 무기들이 제대로 처리됐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형사 바실리에브는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의 짐작처럼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닐 거라는 예감을 가지지만 사건에서 배제된다.
마틸드의 캐릭터가 정말정말 매력적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킬러라니. 물론 전에 없던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녀만큼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캐릭터는 드물다. 게다가 마틸드는 공과 사를, 연민 혹은 추억과 생존을 구분한다.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이 불안하면서도 기대됐다. 이야기는 앞을 알 수 없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죽음도 - 마틸드에 의해 혹은 상관없이 - 계속 생겨나서 집중하며 읽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이 책의 결말은, 정말 강렬하고도 완전했다. 그동안 이 저자의 범죄 소설은 의도적으로 피해 왔지만 이제는 읽어봐야겠다.
4. 아서 밀러 희곡집(아서 밀러, 김윤철 역. 평민사. 2000. 366쪽)
: <시련>,<대가>,<추락 이후> 세 편의 희곡이 실려있다. <시련>은 전에도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었고 나머지 두 편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유품이 쌓인 다락방을 정리하기 위해 온 부부와 중고물품처리업자 이야기인 <대가>와 한때 촉망받는 신인 스타였던 여배우의 이야기인 <추락 이후>는 처음일 뿐 아니라 저자의 작품들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서 더 흥미로웠다. <시련>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대화를 나눌수록 흔들리는 빅터의 심리 묘사가 대사를 통해 섬세하게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었고, <추락 이후>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등장 인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희곡 읽는 건 좋아하지만 연극 공연 관람에는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추락 이후>는 공연을 보고 싶어질 만큼.
5. 무료 주차장 찾기(오한기. 작가정신. 2025. 156쪽)
: 연작 소설 세 편. 전업 작가인 화자는 글도 잘 안 써질 뿐 아니라 청탁도 들어오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육아를 전담하면서 여러 알바를 하고 틈틈이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며 주말에는 딸이 좋아하는 숲 체험학습을 위해 올림픽 공원에도 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되는 건 주차 요금. 주차 문제는 딸의 어린이집 친구 아빠를 열받게 해 그가 행동(?!)을 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화자와 멀어지게도 하며 화자의 과외 수입원이 되거나 예상외 지출 항목이 되기도 한다.
뭐랄까, 재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공감을 못한 건 내가 운전도 육아도 안 하는 상황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필력이 약하다는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들을 만약 블로그에서 봤다면 오, 잘 쓰네 하며 읽었을 지도. 하지만 저자가 그리고 발문을 쓴 김화진 작가가 말한 대로 에세이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글들을 출간된 책으로 보니 뭔가 싱거운 느낌이 든다. 이건 플롯이나 스토리의 문제는 아니다. 행간에서 '어때, 이 정도면 진짜 있었던 일 같지? 근데 이게 소설일까, 에세이일까?'하고 이죽거리는 듯한, 그걸 감추지 않는 저자의 화법이 좀... 굳이 이 작가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아진달까?
6. 여름철 대삼각형(이주혜. 민음사. 2025. 240쪽)
: 유산 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남편과 이혼한 후 조용하지만 약간은 무기력한 삶을 사는 태지혜.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라 처음 고백받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견 평범한 듯 살고 있는 송기주.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공교육의 무기력함에 상처받고 학원 강사로 전직해 아버지의 임대아파트에 얹혀 살다시피 하는 반지영. 이 세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전개되며 엮인다. 처음엔 그저 비슷한 또래 여성들의 세 가지 다른 삶을 이야기하려나 싶었는데 물론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꽤 장엄한(?) 결말을 맞이한다.
가족과 직장, 주거 문제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 등 삶을 옭아매는 건 하나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힘든 삶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여서 나누면 조금 가벼워지기는 하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빛나는 세 개의 꼭지점이 여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는 조금 초라한 빛일 수도 있지만 선을 그어 연결하면 무엇보다도 찬란할 수 있다.
7. 피아노에 관한 생각(김재훈. 책밥상. 2024. 232쪽)
: 작곡가이자 오랫동안 피아노를 연주하고 관련 공연을 연출하기도 한 저자가 피아노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는다. 단순히 추억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물론 부제가 '버려지는 피아노를 만지며'인 만큼 가장 큰 비중은 더이상 '인기 악기'가 아닌 피아노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지한다. 하지만 피아노의 역사와 저자의 과거, 저자가 피아노를 소재로 연출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 또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고, 학원 가기 싫어서 몸부림쳤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악기 하나 제대로 익혀두는 게 얼마나 삶에 큰 윤기를 주는지 그때는 몰랐다는 게. 저자는 피아노에 소질도 있고 흥미도 있었나보다. 어릴 때의 여러 일화들이 공감이 가기도 했고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특히 저자가 작곡을 전공하게 된 계기인 고등학생 때 조율사와의 만남은 은은하게 감동적이었다. 직전에 선생님과의 대화가 있어서, 통찰력이란 지식이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의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야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저자에게선 단순한 애정이 아닌 그 이상의 과감하고 이성적인 면이 보인다. 이건 단순히 피아노를 해체하여 PNO를 만든 것만을 보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면이 있었기에 저자의 손에 의해 피아노의 수명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 있었겠지.
읽으면서 나도 피아노를 치던 과거가 그리워졌다. 지금도 악기 중에서 피아노를 가장 좋아하고 피아노 협주곡이나 리사이틀 공연 실황을 자주 보고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8. 방해금지(프리다 맥파든, 김대웅 역. 북플라자. 2026. 332쪽)
: 퀸 알렉산더는 남편을 죽이고 차로 도망치는 중이다. 남편은 퀸을 오랫동안 학대해 왔고 오늘 저녁에도 퀸의 목을 졸랐다. 퀸은 그저 손에 닿는 부엌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남편의 시신을 부엌에 놔둔 채 차로 국경을 향해 가지만 폭설에 발이 묶이고, 퀸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모텔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모텔에 투숙객이라고는 점쟁이 노파 한 명 뿐. 주인 남자는 친절하긴 하지만 그와 함께 운영한다는 아내 로잘리는 보이지 않고, 장기투숙객 그레타는 퀸에게 오래전 이 모텔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했고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퀸은 일단 오늘밤만 넘기기로 하고 투숙하는데, 퀸에게 슬픈 건 유일한 가족인 언니 클라우디아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뿐.
익숙한 듯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레타의 존재와 행동이 신비감을 주고 로잘리와 닉이 의심스럽지만 반전은 따로 있었다. 그들 각각의 사정이 모두 약간씩 슬펐다. 심지어는 불륜녀마저도.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각자의 상처는 흔적을 남길 거 같다.
9. 디카페인 커피와 무알코올 맥주(조우리. 마음산책. 2024. 220쪽)
: 11편의 순한 이야기. 대부분의 화자가 여성, 퀴어 등 사회적 약자이다. 이들은 성향도 취미도 생각도 다르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관계에서움츠려들지도 않는 착한 존재들. 이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소설집 제목처럼 정말 자극없이 재밌는 이야기들.
10. 뤼미에르 피플(장강명. 한겨레출판. 2025. 392쪽)
: 신촌 뤼미에르 빌딩 8층에 사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의 사연. 평범한 사람은 없다. 박쥐 인간이거나 쥐 인간이기도 하고, 어느날 아침 깨어보니 전신마비 상태이거나 빚을 갚기 위해 매를 맞아야 하기도 하며 노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녀이기도 하다. 이야기들이 다 신박해서 재밌게 읽었다. 간혹 좀 징그럽거나 슬프기도 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810호 되살아나는 섬>. 진짜로, 누군가 이 자연을 되살리는 노래를 좀 불러줬음 좋겠다.
11. 역사의 끝까지(루이스 세풀베다, 엄지영 역. 열린책들. 2020. 320쪽)
: 후안 벨몬테는 과거의 혁명 전투에서의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해변가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동지 한 명과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수상쩍은 남자가 찾아와 후안을 산티아고로 호출하고, 그곳에 간 후안은 옛 상관이었던 크라머와 마주한다. 크라머는 최근 칠레에 입국한 두 명의 용병 -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 - 을 찾아달라고 하고, 후안은 옛 동료였던 그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유유히 도망친다. 후안은 그들의 소재를 크라머에게 알렸음에도 작전이 틀어진 것에 또다른 음모가 있음을 짐작하고 크라머와 크라머에게 의뢰한 KGB 장교 출신인 슬라바를 찾아간다. 후안은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가 사실은 피노체트 시절 고문 기술자였던 미겔 크라스노프를 탈옥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길고 긴, 깊고 깊은 역사를 압축해서, 그것도 조금도 생략하거나 간과하는 부분 없이 읽은 기분이다. 그만큼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하지만 오래 전 세 권 정도 읽고는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긴 여운을 준다. 특히 베로니카가 내뱉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들이. 내가 베로니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그리고 내가 후안이라면 절대 듣지 않았을 그 말이. 과연 진정한 단죄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혹은 용서는? 난 이런 상황이라면 용서따윈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만 베로니카의 마음 속에 있었던 건 어쩌면... 아, 다시 읽어야겠다.
12. 기기묘묘 방랑길(박혜연. 다산책방. 2025. 320쪽)
: 마을의 최대감 댁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금두꺼비가 없어졌다는 것. 집안의 종들이 괜한 추궁을 당하지만 하인들은 금두꺼비가 살아나 스스로 담을 넘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웅성대는 것을 흥미롭게 듣고 최대감 댁을 기웃거리던 오지랖 넓은 윤대감 집 막내 아들 효원은 그 일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데, 친구인 오윤이 마을 근처 산에 사는 사로라는 자에 관해 귀띔해 준다. 여우의 자식이라는 풍문이 도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며. 효원은 사로와 함께 금두꺼비 일을 해결하고 마침 이제는 길을 떠나겠다는 사로에게 동행을 청한다.
제목에서 기대를 내려놓고 시작했으나 뜻밖의 진중한 이야기를 만났다. 어쩌면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어릴 때 전래 동화집에서 읽었음직한 이야기들이지만 사로와 효원의 우정과 애민의 마음이 잘 배어나오는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권선징악은 기본으로 갖고 가고 거기에 유머코드가 살짝 더해지는데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마지막 챕터에선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2권이 나와도 좋을 듯.
13. 나의 챔피언 런트(크레이그 실비, 고정아 역. 미세기. 2024. 324쪽)
: 양 목장을 운영하는 애니네 집. 애니에게는 특별한 개 런트가 있는데, 런트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애니의 말만 듣는다. 지역은 오래전부터 경제적으로 불황이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가뭄까지 더해져 애니네 목장도 많이 어렵다. 이 와중에 동네의 목장들을 모두 사들이고 물길마저 막은 빌런 변호사는 애니네 목장도 탐낸다. 그러던 중 런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애니. 하지만 런트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데...
초등 고학년 정도에게 권할 만한 동화. 하지만 약간의 오류(?)는 있다. 런트가 다른 사람이 보이면 꼼짝도 안 한다고 하는데, 가끔은 움직이나 보다. 적당히 현실적이고 꽤 따뜻했던 이야기였다.
14. 젊음의 나라(손원평. 다즐링. 2025. 292쪽)
: 화자 '나라'의 꿈은 배우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AI가 연기하고 만들어내는 컨텐츠가 가득한 상황. 나라는 슈퍼리치들의 유토피아 '시카모어 섬'에 스탭으로 들어가 그곳의 극단에서 연기하게 되기를 바라며 자주 VR로 그곳에 접속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는 긴 통화조차 어색한 사이고, 돈 때문에 함께 사는 룸메이트인 이민 2세대 엘리야는 자신의 외모가 '진짜 한국인'과 다르다는 걸 마치 공인된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인 양 이용한다. 고령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돌입한 상황에서 노인 인구들은 경제 상황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뉜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데, 나라는 이 시설을 운영하는 기업 유카시엘에 입사를 하게 된다. 유카시엘은 시카모어 섬과도 연계되어 있다는데...
고령화 사회가 얼마나 진행되든, 소위 말하는 복지라는 건 결국 경제력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건 작가가 상상한 미래든 지금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재든 마찬가지. 그래서 작가의 상상이 새삼 끔찍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시카모어 섬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라도 바라볼 수 있는 이 책 속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일 것이다. 같은 시각에서, 엘리야의 노인 혐오와 삐뚤어진 피해 의식도 새롭지 않다. 여러 설정만 근미래일 뿐, 결국 지금 여기의 이야기.
(스포)
다만 결말 부분에서 좀 급작스럽게 해피 엔딩으로 흐르기는 했다. 엄마와 이모의 만남은 짐작 가능했고 딱 좋았지만 나라의 채용 소식은 좀 갑작스럽지 않나?
15.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정지윤. 고블. 2026. 288쪽)
: SF 연작 소설집. 국내 최고 학부인 S대를 배경으로 교수의 잃어버린 고양이 찾기에서 시작되어 연쇄살인과 마약 거래를 거쳐 급기야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까지 이른다. 처음 두어 편은 재밌게 읽었는데 갈수록 허황된 느낌이어서 뒷부분은 좀 심드렁하게 읽었다. 그래도 아이디어는 신박했고 세계관은 꽤 탄탄했다. 다만 문장력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싶다.
16.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앤 마거릿 대니얼 엮음, 하창수 역. 현대문학. 2018. 728쪽)
: 피츠제럴드의 미발표 단편집. 각 작품 앞에 왜 이 작품이 발표되지 못했는지 설명이 있는데, 대부분은 게재하길 원하는 잡지에서 거절당했거나 그들의 수정 요청을 작가 자신이 거절해서이다. 잡지 편집자들이 수정을 원했던 건 이 작품들의 상당수가 편집자(혹은 독자)들이 원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답지' 않아서이다. 당대의 피츠제럴드는 상류층 배경의 사랑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나보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그런 이야기들로만 알려지기를 거부했고, 이 작품들도 상당히 실험적으로 사랑 자체보다는 사랑에의 실망이라든가 삶의 아이러니, 욕망의 허무함 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역시 표제작. 제목과는 달리 여성 인물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아주 기꺼웠다.
PS. 독서 중 재밌는 일이 있었다. 표제작을 읽으면서 하이든의 교향곡 49번을 듣고 있었는데 내가 읽는 장면과 음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거다. 하이든 49번은 La Passione(수난)으로 알려져 있는 어두운 곡인데, 애틀랜타가 지역 축제 행렬에 참가하지만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장면과 2악장이 딱 어울렸고, 애틀랜타가 딜래넉스와 팬저 양의 말다툼을 숨어서 듣게 되는 장면에선 3악장 미뉴에트의 조여오는 듯한 음률이 맞아 들어갔다. 이 우연의 일치가 너무 즐겁고 좋아서 챗지피티와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17. 키오스크 학교(이서아. 민음사. 2025. 388쪽)
: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모두 키오스크가 되고 싶어한다. 쓸모 있고 싶기 때문이다. 모라와 초희, 도준, 원혜와 주디는 키오스크 학교 신입생이다. 배치된 곳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심장 대신 광석으로 만들어진 장치를 갖고 있는 ORE(오어) 인간들의 감시를 받으며 완전한 키오스크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1부에 인물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익숙한 듯, 흔한 듯 하지만 새로웠던 이야기들. 부모 혹은 보호자의 부재로 시설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들, 그 시설에조차 수용될 수 없어서 자신들만의 가족을 이루어 버려진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아이들, 또 시설이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줬던 보육교사를 잃어버린 아이들. 그리하여 20대의 나이지만 키오스크 학교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던, 소위 말하는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 근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선을 보여줬던 1부와는 달리 2부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클리셰로 흘러 조금 안타까웠다. 신인 작가의 역량 부족인가. 그럼에도 이 작가의 다음 장편이 기대된다.
18. 콜리니 케이스(페르디난트 폰 시라흐, 편영수 역. 마르코폴로. 2024. 192쪽)
: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카스파르 라이넨은 당직을 서던 중 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살인범의 국선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피의자 콜리니와 만나지만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 라이넨은 다음날 아침 어린 시절 절친의 누나이자 여름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요한나의 전화를 받고서야 피해자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대해줬던 절친 토머스의 할아버지였던 한스 마이어라는 걸 알게 된다. 피해자와의 관계 때문에 국선 변호를 사임하려던 라이넨은 영향력있는 법조계 인사이자 대학 시절 은사인 변호사 마팅어, 그리고 단골 빵집 사장의 얘기를 듣고 계속 변호를 하기로 한다. 콜리니는 범행 동기에 대해 계속 입을 다물고, 피해자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업 수장이기에 언론의 관심은 집중된다.
(스포)
책 날개의 저자 이력이 특이해서 읽기 시작했다. 변호사인 저자의 할아버지가 바로 나치 장교였고, 할아버지의 과오를 자신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법조인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할아버지의 비겁한 변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이 책 또한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이야기한다. 독일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죄과를 덮으려는 움직임이 독일 내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드러 법'이 그 예인데, 이 법으로 인해 나치 부역자들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했다고 한다. 소설 속 피해자도 그 수혜자 중 하나였다. 사건의 전말이 천천히 밝혀질 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법의 외면으로 사적 복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콜리니와 가족의 이야기는 당시의 독일 뿐 아니라, 인종 범죄의 피해자들 뿐 아니라, 현대 세계 곳곳의 많은 범죄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이 책이 독일의 과거 사죄와 청산의 오류를 고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니,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다만 콜리니의 마지막은 마음 아플 뿐이다.
19. 엄마, 시체를 부탁해(한새마. 바른북스. 2024. 236쪽)
: 잘 쓰여진 날카로운 시각의 범죄 단편들. 첫 작품이 새드 엔딩이었고 표제작도 해피하게 끝났다고 보기에는 찜찜했지만 이야기들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이렇게 뒷맛이 찜찜한 이야기들을 '이야미스'라고 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작가의 특기라고. 하지만 이 작품들의 촘촘함은 그 찜찜함을 넘어선다. 그리고 뒤에 배치된 이야기들은 상당수 결말이 꽤 시원한 편이어서 즐겁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마더 머더 쇼크>.
20. 헨치 1, 2(나탈리 지나 월쇼츠, 진주 K. 가디너 역. 시월이일. 2022. 312쪽, 288쪽)
: 히어로 옆에는 사이드킥이 있고, 빌런 옆에는 헨치가 있다. 애나는 바로 프리랜서 헨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오면 마치 인력시장처럼 그곳에 가서 특정 빌런의 회사에 불려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애나가 선호하는 건 재택으로도 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계약직의 삶. 절친 준과는 이런 에이전시 인력시장에서 대기하다가 만났는데, 누구보다도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는 좋은 친구이다. 어느날 애나는 빌런 일렉트로닉의 신제품 발표회 겸 시장 아들 협박 현장에 들러리로 서 있다가 히어로 슈퍼콜라이더가 개입해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바람에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난다. 오랜 회복 기간 동안 준의 집에 얹혀 살며 상황을 곱씹어보던 애나는 히어로들이 소위 세상을 구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전혀 제어하지 않아 생기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있었는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건 할리웃 히어로물에서 수시로 언급되는 명언이다. 당장 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생명을 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그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내 사업장이 격전지가 되었다고 해서 또 빌런 편에 있었다고 해서 당연하게 죽어야 하는 건, 당연하게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애나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 그래서 애나가 빌런 레비아탄과 함께 해나가는 일들이 속 시원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책 한정이지만 진짜 빌런은 히어로들인 것처럼 보일지경. 이 책 속 이야기에선 맹목적인 히어로의 짧은 식견이 문제이지만 현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비도덕성이나 부수적 피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특정인에 대한 마녀 사냥 혹은 앞뒤 가리지 않는 추앙, 그럴듯한 소문에 쉽게 휩쓸리는 줏대없는 대중들 등. 결말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였고, 읽는 내내 즐거웠다.
21.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다닐로 키슈, 조준래 역. 문학과지성사. 2014. 252쪽)
: 9편의 단편집. 모두 죽음이 언급되거나 주요 소재로 쓰였다. 하지만 단순히 죽음이라는 소재가 주는 무게감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서정성과 비통함, 환상과 핍진성 아래에 냉소주의를 엷게 깔아두었다. 그리고 비판의 대상은 기존 종교에서부터 이데올로기, 근대화, 신분제도 그리고 자본주의에 전도된 문학계까지 가리지 않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왕들의 서 또는 광대들의 서>.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영예롭도다, 조국을 위한 죽음이여>.
22. 작은 빛을 따라서(권여름. 자이언트북스. 2023. 268쪽)
: 내장산 가는 길목 '필성 슈퍼'의 둘째딸 은동의 장래희망은 배우. 용돈을 받는 족족 모아두는 이유는 연기 학원에 등록하기 위함이다. 어느날 은동은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감추고 싶어하는 할머니에게 몰래 글을 가르쳐주고 용돈을 받기로 한다. 한편 동네에 갑자기 등장한 '엉터리 마트' 때문에 은동이네 슈퍼는 위기를 맞이한다.
어쩌면 삶은 계속 다가오는 크고작은 위기를 쳐내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필성슈퍼에 엉터리 마트가, 곧이어 폐점한 엉터리 마트 대신 들어온 대기업 대형 마트가 가져온 위기들처럼.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난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문득 어쩌면 위기 속의 빛이 아니라 작은 빛이 계속 반짝이는 와중에 불쑥 끼어드는 굴곡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굴곡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빛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삶. 그건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없어도 셔터를 올리고 슈퍼를 열어 기다리는 삶. 매일 한글을 연습하는 삶. 친한 친구가 내가 원했던 영역에서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는 삶. 삶의 모든 순간을 기를 쓰고 살아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은 빛을 주워모으듯 따라가다 보면, 내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으로 가득한 곳에 도착해 있겠지. 처음 상상했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23.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임수현 역. 민음사. 2005. 180쪽)
: 두 편의 희곡. 하지만 무대에 대한 설명이나 지문이 없어서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표제작은 'deal'을 제안하는 딜러와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손님과의 팽팽한 대립을 보여주는데, 표면적으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저 평행선을 달린다. 욕망을 드러내보이길 원하는 딜러의 속삭임은 마치 악마의 그것같다. 하지만 손님은 딜러에게 쉽게 자신의 무엇도 내보이지 않는다. 딜러는 차가운 이성의 외피를 쓰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손님은,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나 점점 차가워지며 딜러에게서 심정적으로 한걸음씩 물러난다. 이들 대화의 끝은 허무하게까지 느껴지지만, 독자에게는 안도감을 준다. 물론 그 안도감은 갈등의 해소를 통한 건 아니다. 두번째 작품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은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체가 한 문장이지만 쉼표가 잦아서 쉼표를 마침표처럼 읽게 된다.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작가가 마침표를 쓰지 않은 건 아마도 이 상황이 화자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든 실제로 일어났든 독자가 하룻밤 머물 공간을 찾는 화자의 여정을 조마조마하며 따라가도록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고 난 그 의도에 완전하게 반응했다.
두 작품 모두 처음부터 줄거리가 잡히지는 않지만 곧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구체화되는 과정이 독자에게는 꽤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걸 과연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출자의 재량에 달려 있겠지만, 이게 무대에 올라갔을 때 잘못(?)하면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울 거 같다. 그리고 난 늘 그렇듯 희곡을 읽는 건 재밌지만 굳이 연극은 보고 싶지 않다. 사실 표제작을 읽을 땐 딜러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내 욕망을 알려 하지 마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손님에게 몰입했지만 두번째 작품을 읽을 땐 왠지 이 작품의 화자가 표제작의 딜러가 된 게 아닐까 싶어서 연민이 들었다. 보통 희곡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게 나 자신을 대입시키는 일은 잘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되었던 게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24. 당신의 비밀을 묻어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4. 384쪽)
: 핀레이 도노반 시리즈 3권. 3권이 나온 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얼마나 기뻤던지. 1,2권이 잘 기억이 안 나긴 했지만. 핀은 여전히 새 책의 진도를 못 빼고 있고 여기에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마피아 두목 펠릭스에게 협박까지 받는다. 전문 킬러 '싹쓸이'의 정체를 밝혀 없애라는 것. 이 와중에 핀의 모자란 점을 훌륭히 보완해 주었던 베이비시터 베로는 학창 시절 여학생 클럽의 돈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짚어 써 급하게 돈을 마련해야 한다. 펠릭스의 압박은 점점 세게 다가와 핀은 일주일 안에 싹쓸이가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데, 경찰로 의심되는 그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마침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찰 아카데미가 열린단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핀과 베로.
여전히 핀은 답답하지만, 많이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맨스에서는...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그간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경찰관이랑 맘놓고 진도를 빼겠어. 경찰 아카데미에서의 둘의 행동이 꽤 대담해서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재밌게 읽었다. 뒷부분에 적극적이었던 핀도 좋았고. 하지만 난 여전히 줄리언이.... 어쨌든 이번에도 이래저래 한고비는 넘겼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25.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에드먼드 모리스, 이석호 역. 프시케의숲. 2021. 360쪽)
: 베토벤의 전기. 물론 베토벤의 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얘기하기에는 내가 그에 대해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두께도 적당하고, 저자의 필력도 보장되고. 원제는 그냥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었던 거 같은데 번역판의 제목이 꽤나 적절하다. 이 책은 단순히 작곡가의 재능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제목처럼 한 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15세부터 보이던 기벽이라든가 "겉으로는 미친 작곡가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성공에 대한 야망과 집념을 품고 있던 베토벤"(129쪽),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차 있던 베토벤 등- 을 이야기한다. 물론 베토벤의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이야기도 뺴놓지 않고.
특히 흥미로웠던 건 잘 알려진 일화들에 대해 저자가 바로잡은 것들이다. 흔히 교향곡 3번의 제목이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수정된 게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라고 알려져 있으나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곡의 리허설(1804년 6월) 때 이미 나폴레옹의 황제 선언이 있을 지 2주가 지났을 시점이나,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의 대교향곡>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됐다고. 이 일화를 전한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의 기억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출판업자에게 보낸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단어를 종이가 찢어지도록 격하게 지워낸 흔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저자는 제목 수정이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p.176
또한 가장 핫한 이슈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불멸의 연인에 대한 것. 저자는 이 부분에서 확신을 갖고 있고 나 또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베토벤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듯, 영화 <불멸의 연인>이 주었던 찝찝함은 많이 희석됐다.
대부분의 전기가 그러하긴 하겠지만 시기를 잘 나눠서 정리해 준 게 좋았다. 주요한 곡들에 대해 언급해 준 것도. 베토벤의 괴팍한 성정이야 유명하지만 그의 자기 확신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자기애는 그에 대한 애정을 배가시켜줬다.
26. 베토벤과 아홉 교향곡(엑토르 베를리오즈, 이충훈 역. 포노. 2020. 260쪽)
: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얼른 집어왔다. 아니, 그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베토벤에 대해 이렇게 긴 글을 썼다고? 물론 베토벤이야 당대에 이미 유명한 작곡가였고 슈베르트를 비롯 많은 후대 작곡가들이 그를 존경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쓴 글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책은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평론집과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베토벤 관련 글을 모은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첫 챕터의 엘리트주의에 놀랐고 마지막 단락의 동양 음악 운운에 살짝 긇혔지만 난 베토벤을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했던 당신의 글을 읽어주지 라는 맘으로 읽었다. 제목처럼 베토벤의 교향곡 9곡을 분석한 글이 주이고, 뒤에 그의 다른 곡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교향곡 1번에 대해 '여전히 모차르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혹평한 거 외에는 찬양 일색이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을 위해 악보도 실려 있다. 까막눈인 게 한스러웠다. 이 책을 펼쳐놓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한 곡씩 들으며, 글과 음악을 맞춰가며 읽었으면 최상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출근길에 들고 나와 텍스트만 쭉쭉 읽었다.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