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지금 잠에서 깼다(다닐 하름스 외,김경준 엮, 역. 미행. 2024. 476쪽)

: 19~20세기 초 러시아 고딕 소설 앤솔러지. 러시아 작가들의 SF나 고딕 경력(?)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모아 놓은 작품집은 처음이라 호기심에 집어들었는데, 다 좋았다. 


사실 난 미하일 불가코프를 좋아해서 역시 이 작품집에서도 그의 작품(「붉은 면류관」)이 가장 인상깊기는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매우 뛰어났다. 특히 묘사 부분은 「입체경」(알렉산드르 이바노프), 「베네치아의 거울」(알렉산드르 차야노프)이, 캐릭터 빌드는 「미치광이 화가」(이반 부닌)가, 생각의 깊이는 「스틱스강의 다리」(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가 좋았다.



2.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윤정은. 북로망스. 2023. 272쪽)

: 평화롭고 신비로운 마을에 길을 잃은 한 여성이 오게 되고, 마을의 남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는다. 이 딸은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데, 사춘기의 어느날 갑자기 원하는 모든 게 이루어지는 능력이 나오고, 어릴 때부터 능력 조절을 연습했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갑자기 발현된 능력은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한다. 계속 생을 리셋하며 헤어진 부모와 마을을 찾아 헤매던 아이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세탁소를 개업하고 사람들의 힘든 기억을 지워주는 일을 하기로 한다.


내용이야 뻔해도 문장이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비문이 점점 늘어났다. 내용 유치한 거야 각오했지만, 단순히 비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형용사를 써대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소위 이런 힐링(?) 소설들 펴내는 젊은 작가 & 편집자들은 자기 문장의 특징이라면서 없는 형용사를 만들어 내거나 틀린 단어를 고집스레 써내지 좀 말자, 제발!



3. 프로스트와 베타(로저 젤라즈니, 조호근 역. 데이원. 2023. 142쪽)

: 인류는 멸망했고 지구는 솔컴이 관리한다. 하지만 우연히 솔컴을 파괴한 핵미사일 때문에 디브컴이 깨어나 솔컴에게 통제권 양도를 요구한다. 하지만 솔컴은 북반구를 맡길 프로스트, 남반구를 맡길 베타를 만들어 낸다. 프로스트는 어느날 다가온 작은 기계에게서 인간에 관해 듣고,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어쩌면 다른 단편집에서 이미 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잠깐 환기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읽으면서, 많은 문학 작품들에서 인간 외의 존재들은 왜 그렇게 인간에게 관심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뭐, 창작자가 인간이라 그런 거겠지만. 작품 자체는 상당히 솜씨 좋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하지만 멸망 이후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4. 화석을 사냥하는 여자들(트레이시 슈발리에, 이나경역. 하빌리스. 2024. 364쪽)

: 최초의 어룡 화석을 발견한 화석 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 메리 애닝의 삶을 이야기한다. 런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엘리자베스는 오빠가 결혼하여 부모님의 집을 차지하게 되자 언니 루이스, 동생 마거릿과 함께 런던에서 멀지 않은 라임 레지스의 작은 저택에 내려와서 살게 된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암모나이트를 발견한 엘리자베스는 마을 사람들 중에는 화석을 발굴해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중 가장 뛰어난 메리와 친해진다. 화석에 대한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닌 메리를 알아 보고 메리가 발견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받을 수 있게 도와주게 된 엘리자베스. 그러던 와중에 메리는 마치 작은 악어와 같은 머리뼈를 발견하고, 암석 속에 그 몸통까지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어릴 때 메리 애닝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엘리자베스의 존재가 그렇게 크지 않았고, 메리가 신사 계급의 부유한 또래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났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책에서도 메리가 익티오사우루스를 발견하는 부분은 매우 자세히, 흥미진진하게 그려져서 엄청 두근두근하며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메리의 생을 좀더 실제에 가깝게 재현한다. 물론 허구가 가미되긴 했지만. 특히 메리의 사랑 이야기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이라고는 하나 맘에 안 들었다. 그런 인간을! 처음 이 책을 읽어나갈 땐 어릴 때의 그 책이 너무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소녀들에게 안 좋은 책이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이 책의 메리의 사랑 이야기 부분을 읽으며 차라리 어릴 때 읽었던 책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외 부분들은 다 재밌고 찡했고, 마음 아팠다. 


책 서문이었던가,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고생물학자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당대의 다른 많은 여성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적을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젠더 때문에 평가절하당했던 짠한 메리 애닝의 삶이 이렇게나마 후대에 한번이라도 더 조망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웠던 엘리자베스와의 우정도 좋았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녀의 생애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마무리되어서 좋았다.



5. 마지막 욕망(크리스티앙 보뱅, 김도연 역.1984Books. 2024. 144쪽)

: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나'는 손목을 긋는다. 그가 내게 준 철필을 이용하여. 피가 흘러내리는 동안 나는 당신과의 사랑을 회상한다.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이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닿기 위한 죽음.


모든 사랑은 위대하고, 모든 사랑은 시시하다. 화자의 사랑은 화자에게는 절대적이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그냥 흔하디흔한, 길지도 않았던 연애와 변심일 수 있다. 오렌지 나무 화분으로 남은 그녀가 사이에 있는. 그러나 손목을 긋는 마음만큼은 무거우리라. 


누군가는, 사랑한다면 살으라,라고 얘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에로스는 타나토스와 등을 맞대고 있는 존재. 플라톤이 말한 최초의 인간처럼 말이다.



6. 라스트 스탑(류명환. 안전가옥. 2023. 232쪽)

: 도하의 아내와 딸은 죽었다. 상담을 받으며 간신히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도하는 녹초가 된다. 어느날 퇴근길, 막차가 끊겼음에도 플랫폼에 와서 서는 구파발행 열차를 본 도하는 그 차에 올라타고, 종착역에서 아내 나연과 만난다. 연애할 때처럼 다정히 웃어주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는 꿈같은 날들. 하지만 자신이 보호관찰 대상자이며 국소기억상실증을 앓고 있고, 아내와는 이혼소송 중이라는 현실을 알게 되는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데 꽤 매끄럽기는 하지만 첫 반전(?) 부분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좀 갑작스러웠다. 아이디어와 플롯은 좋은데 문장력이 좀 약하다. 분량이 적절했던 게 신의 한수였던 거 같다. 이보다 길었다면 문장 때문에 지쳐서 읽기 싫어졌을 듯. 그래도 재밌었다.



7. 잉글랜드 부인(스테이시 홀스,최효은 역. 그늘. 2023. 464쪽)

: 유모 전문 양성학교를 졸업한 메이. 지금 있는 가정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만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메이에게도 함께 가자 제안했지만 메이는 동생들, 특히 여동생을 두고 먼 나라로 갈 수는 없어서 요크셔의 하드캐슬하우스의 4남매를 돌보러 간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잉글랜드 집안은 좀 이상하다. 잉글랜드 부인은 집안일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것 같고, 잉글랜드 씨가 사업 뿐 아니라 집안 전체를 모두 돌보고 있다.


그래도 해피엔딩이겠거니, 믿고 읽었다. 뒷표지의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 때문에 책 내용이 대강은 짐작이 되었고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무심히 넘겼던 마지막 문장이 그날 밤 자기 전에 갑자기 생각났다. 혹시 그 미소가 거대한 반전을 담고 있는 거라면? 이 모든 게 잉글랜드 부인의 큰 그림이었다면? 난 그건 좀 싫지만 어찌됐든 해피엔딩은 맞으니까. 이 마지막 문장을 위해 이 책의 화자가 메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재밌게 읽었다.



8. 안녕의 발견(김종광. 마이디어북스. 2024. 344쪽)

: 충청도 안녕시 연작집. 이 작가의 작품은 오랜만인데, 내가 좋아했던 향토색이 잘 드러나 있어서 만족하며 읽었다. 할머니들의 욕이 찰지고 등장 인물들이 꽤나 현실적이다. 가장 재밌었던 건 「어린애를 지켜라」.



9. 수확자(닐 셔스터먼,이수현 역. 열린책들. 2023. 512쪽)

: 수확자 시리즈 1. 가까운 미래.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나이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자연히 불사의 삶을 살게 된 인간들은 넘쳐 나는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수확자'라는 계급이 만들어진다. 타인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거둬야만 하는 존재. 이 영역만큼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수퍼 컴퓨터도 절대 침범 불가한 성역이다. 열 여섯 살 시트라는 자신의 집에 온 수확자에게 소신 발언을 해서, 또 다른 열 여섯 살 로언은 수확 대상의 마지막까지 손을 잡아줘서 수확자 패러데이의 견습생이 된다. 둘 중 수확자가 될 수 있는 건 한 사람 뿐.


수확자가 대상을 오로지 자신의 판단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책 속 세계관에 의하면 그거야말로 죽음에 대한 경외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그리고 그게 바로 이 시리즈의 핵심이지만. 그러기에 수확자 고더드 같은 무리가 생겨날 수 밖에 없지 않나. 그래도 시트라와 로언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즐거웠다. 그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도.



10. 메모리케어(진보라. 은행나무. 2023. 316쪽)

: 가까운 미래. 열 여섯 살이 되면 메모리케어를 받을 수 있는데, 안 좋은 기억은 트라우마 방지를 위해 삭제된다. 아직 메모리케어를 선택하지 않은 봄.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아버지가 기억관리국에 의해 정리되는 순간, 할아버지 방의 낡은 장롱 뒤를 보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만 아마 메모리케어를 받게 되면 그걸 다 잊을 거라는 걸 아는 봄. 그런데 도도제약의 영업사원이라는 아줌마가 봄에게 할아버지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선망의 대상인 썬시티에서 살게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플롯이 너무 허술하다. 겅중겅중 뛰어넘는 느낌. 개연성 따위는 진짜 메모리케어 알약에 의해 지워버린 건가? 그나마 마지막 장면 때문에 별 하나 더. 



11. 이번 한 번은 살려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4. 420쪽)

: 핀레이 도노반 시리즈 2. 전권에서 돈도 많이 벌고 핫한 로스쿨생과 연애도 시작했던 핀. 그런데 지역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던 중 아무래도 수상한 글을 보게 된다. 전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인 스티븐을 노리는 듯한 알쏭달쏭한 글. 게다가 유능한 베이비시터이자 결단력있는 동료였던 베로마저 뭔가 불안해 하고,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있을 때 전남편이 공격을 받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글 작성자를 찾는 한편 스티븐을 감시하기 시작하는 핀. 그 와중에 줄리언은 친구들과 놀러 가 버리고, 섹시한 형사 닉과의 공조도 다시 시작된다.


핀은 여전히 답답하지만 사실 핀이 이렇게 어리바리 우왕좌왕하는 덕분에 사건이 시작되고 해결도 되는 거지. 그 와중에 책도 쓰고, 새 의뢰도 받고. 난 솔직히 비호감 그 인간이 죽기를 바랐지만 극중 핀이 생각했던 아이들의 아빠라는 건 생각 못했다. 뭐, 이런 데서 티가 나는 거지, 누굴 돌봐 본 적 없는 거. 어쨌든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게 기쁘다. 핀도 점점 성장할 테고.



12. 선더헤드(닐 셔스터먼, 이수현 역. 열린책들. 2023. 573쪽)

: 수확자 시리즈 2. 1권에서 사이다였던 부분이 갑자기 고구마가 되어 돌아온다. 시트라와 로언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고, 수퍼 컴퓨터 선더헤드는 지켜보고 있던 인간들 가운데 특별히 애정하는 그레이슨 톨리버를 이용해 세상의 변화를 좀더 적절히 컨트롤하고자 한다.


전반적인 내용은 답답했지만 푹 빠져서 즐겁게 읽었다. 1권에서는 죽음에 관해 오래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선더헤드의 시각이 주로 보여지는만큼 수퍼 컴퓨터의 역할 범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인공지능이라지만 나의 모든 것을 그렇게 지켜보도록 허용해도 되는 걸까? 보호와 감시의 논쟁에서 보호 쪽으로 좀더 기울어 있는 세계관이지만, 의식을 하든 안 하든 언제어디서나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세계관 속 사람들은 선더헤드에게 상당히 의지한다. 마치 스승이나 부모처럼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질문을 던지고 조언을 요청하기까지. 물론 수퍼 컴퓨터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확률을 계산해서 주면 편하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13. 마지막 증명(이하진. 안전가옥. 2024. 188쪽)

: 2044년. 물리학자 백영은 퍼스트 콘택트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양서아 박사에게 이메일을 쓴다. 자신의 집 마당에 특이한 운석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외계의 지적 존재가 딱 자신을 겨냥해서 보내온 것 같다는 것. 이제는 아무도 거취를 모르는 양서아 박사에게선 답이 오지 않지만 백영은 묵묵히 메일을 쓴다.


서로 다시는 만날 수 없지만 서로를 위해, 서로의 존재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선택을 하는 두 사람. 책 소개에서 '마음만은 닿았다'고 하지만 글쎄, 그것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지구를 구하는 건 부차적인 이득. 하지만 내가 내 인생의 사랑을 잃었는데, 지구 따위.



14. 종소리(닐 셔스터먼, 이수현 역. 열린책들. 2023. 736쪽)

: 수확자 시리즈 3. 전편에서 음파교의 주장에 부합하는 현상이 일어나버리고, 이제 그레이슨 톨리버는 유일하게 선더헤드와 대화가 가능한 인간이다. 음파교의 보호 아래 '종소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 그는 선더헤드의 계산에 따라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한편 수확자들은 고더드에게 여전히 휘둘리고 있다.


결말이 생각보다 별로였다. 흐지부지, 그냥 당면한 문제만 해결한 느낌. 권선징악 따윈 없다. 좀 시원하길 바라며 2권과 3권을 견뎠는데. 이 시리즈 중 1권이 가장 재미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작가가 전반적으로 세계관을 훌륭하게 잘 설계했다. 



15. 없는 층의 하이쎈스(김멜라. 창비. 2023. 332쪽)

: 허름한 주상복합 남산빌리지의 상가층. 201호는 '하이쎈스'라는 필명의 사귀자 할머니가 운영하는 글씨쓰기 교습소이고 202호는 갈 데 없는 소녀 아세로라가 머물고 있다. 아세로라의 부모님은 횡령 사건에 휘말려 도주 중이고, 아세로라는 희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멈출 수 없다. 할머니 사귀자는 세상 우아하고 세련됐지만, 아세로라는 어느날 201호의 구석에서 간첩에 관한 보도자료를 발견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등기가 되어 있지 않아 없는 공간인, 그래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상가 2층. 그래도 사귀자 할머니는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다만 상가 앞 소나무를 애지중지 지킬 뿐. 이 사회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도록 알게모르게 강요한다. 눈치 보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도록. 옳지 못한 일에 목소리를 내지 말도록.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역사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만가만 버텨온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져서 좋았다. 무겁지 않지만 확실하게 존재감을 보여준 이야기.



16. 나의 사랑스런 장례식(제이슨 레이놀즈, 변예진 역. 뜨인돌. 2016. 280쪽)

: 어머니를 암으로 갑작스레 잃은 열일곱 매슈. 학업은 시시해졌고 학우들의 어색한 태도도 싫다. 아버지는 동네 유명한 주정뱅이와 어울리며 대낮부터 술집을 전전한다. 매슈는 동네의 레이 아저씨네 장례식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호기심에 참석한 장례식이 자신에게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닫고, 모르는 사람들의 장례식에 조용히 참석하기 시작한다.


상실을 경험한 소년의 성장기. 서툴지만 나이에 맞는 경험을 하며 조금씩 성숙해지는 모습이 기특했다. 물론 곁에 있는 베프 크리스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소녀 러브가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매슈를 아껴주고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주는 레이 아저씨가 있다. 삶은 혼자서는 이어갈 수 없는 것이고, 인생에서 누군가를 잃으면 그 자리는 어떻게든 다시 채워진다. 그렇다고 그 빈자리가 지워지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순하고 착한 소설이 오랜만이라 제대로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는, 사랑스러운 소설.



17. 별도 없는 한밤에(스티븐 킹, 장성주 역. 황금가지. 2015. 604쪽)

: 중단편집.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범죄에 발을 내딛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심리 묘사를 상세히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에게 공감하게 되는 건, 내 안에 있는 어둠 때문일까? 네 편 다 재밌었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두 번째 이야기인 「빅 드라이버」. 「공정한 거래」는 작가의 명성에 비해선 평범한 이야기였고,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재밌기는 했지만 결말이 아주 속시원한 기분은 아니었다. 



18. 웨하스 소년(이유리. 마음산책. 2024. 216쪽)

: 상큼한 짧은 소설들. 다 귀엽고 재밌었고,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도 않았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은 '인류싹싹'으로 제거되어야 할 진드기 같은 존재일 뿐이고(「가꾸는 이의 즐거움」), 날개를 달고 태어난 귀여운 소년이 더이상 날 수 없게 되어도 사람들은 그의 삶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그를 비난하기만 한다(표제작). 3일 연속으로 우울한 기분을 배송받은 이의 자살 시도는 그저 남일일 뿐(「투데이즈무드」). 이렇게 환상적인 이야기 속을 한겹 까보면 이야기 속 진실들은 그 어느 작품들보다 지금, 여기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날카롭기만 한 건 아니다. 추억으로 털실을 뽑아내고(「시간 뜨개질」), 너무도 평범하지만 작게작게 계속 행복했던 하루는 서른이 넘어도 재생핼 수 있다(「돌이키는 하루」). 이렇게 반짝이는 열 네편의 작품들이 다 좋았다. 애정하는 작가의 예쁜 소설들.



19. 두 세계 사이의 아이(어맨다 프라우즈, 조사이아 하틀리. 권진아 역. 살림. 2023. 368쪽)

: 모자가 쓴 우울증 극복기. 다른 많은 병들과 마찬가지로 우울증도 완치보다는 잘 달래며 살아가야 하는 병이다. 조시는 어릴 때부터 앓았던 희귀병과 난독증, 타고난 예민함으로 대학에 입학하자 우울증이 발병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울증은 주위의 무심하고 냉담한, 무지한 반응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악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조시 또한 무엇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하고 힘든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삶의 많은 부분들을 포기하고 도망쳤고, 엄마 어맨다는 조시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사랑하는 맘만으로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이런 주위 사람들, 특히 엄마의 행동들은 조시에게 '정상'이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했다.


현재 조시는 의학의 도움을 받고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잘 견디고 있다. 이 책은 마냥 장밋빛으로,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울증은 이렇게 고치는 거에요'도 물론 아니다. 그냥 조시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거기에 더해, 현재 영국의 젊은 우울증 환자들의 상황을 약간 언급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솔직히 얘기해서, 우울증 환자가 이 책을 읽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집어들 정도만 되어도 희망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우울증 환자의 주변인에게 권해주고 싶다.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나름 위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환자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거,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일이 가득한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온갖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찬 두려운 곳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20. 스피드, 롤, 액션!(연여름. 자이언트북스. 2022, 224쪽)

: 처음 자신의 영화를 찍기 위해 전재산에 온라인 펀딩까지 받아 드디어 크랭크업하나 했지만, 오랜 시간 알아온 동네 친구이자 프로듀서인 친구가 돈을 들고 날랐기 때문에 어렵게 섭외해 놓았던 영화 배경인 미미분식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살림 구역인 2층에 있던 중 달그락 소리에 내려가 보니, 10대 소녀가 라면을 끓이던 중이다. 미미분식을 운영하던 할머니의 손녀 '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은근슬쩍 눌러앉는다.


처음에는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폐업한 식당에 우연히 모이게 된, 각각의 상처를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라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작가는 자신의 색을 덧입혔다. 그들이 모이게 된 방법과 미래에 살짝 변주를 줘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들어서 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재밌는 이야기를 써냈다. 


인생은 카운트다운이 아니라 '신나는 러닝타임'(164쪽)이라는 메시지도 흔하다면 흔하겠지만, 이 작가의 이야기라서 더 수긍하게 된다. 따뜻하고 편안했던 이야기.



21. 늙은 아내들의 이야기(아놀드 베넷, 정선우 역. 아토북. 2021. 788쪽)

: 19세기 영국의 중심 스태퍼드셔, 도업 지구의 조용한 다섯 마을의 광장 앞 포목상 베인스 씨의 두 딸 콘스턴스와 소피아. 기질도 성향도 다른 두 자매는 소피아가 열 아홉살의 나이로 아버지 가게에 드나들던 외판원 스케일과 달아나면서부터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콘스턴스는 오랜 시간 아버지 가게에서 일해온 매니저와 결혼해 가게를 물려받고 아들을 하나 낳아 순종적이고 조용한 삶을 산다. 하지만 소피아는 파리에까지 가서 남편이 물려받은 유산을 함께 쓰며 지내다가 남편이 떠나버리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두 자매는 노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다. 분량에 비해 사변적이거나 쓸데없이 길어지는 묘사도 없이 꽤나 흥미롭다. 다만 번역이 정말... 이렇게 그지같은 번역과 편집은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에는 번역만 문제일 거라 생각해서 그냥 꾹 참으면서 읽어보자 했는데, 번역뿐 아니라 오탈자가 너무 많다. 오자와 비문은 모든 페이지마다 서너 개씩 빠짐없이 있고 잊을 만 하면 탈자가 나타난다. 말 그대로 단어 중간이 뻥 뚫려있다. 이런 책 진짜 몇 십년 만에 처음 본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mistress'에 분명 '여주인'이라는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정부'라고 옮긴 거. 이 번역자는 번역하면서 작품 안 읽나보다. 


이 책을 3일이나 걸려 끝까지 읽어낸 나 자신을 기특하다 해야할 지, 미련하다 해야할 지...



22. 고스트 라이터(앨러산드라 토레, 김진희 역. 미래지향. 2022. 412쪽)

: 베스트셀러 작가 헬레나 로스는 30대의 젋은 나이에 말기암 진단을 받는다. 남편과 딸을 이미 잃은 헬레나는 삶에 미련이 없다. 다만 자신이 오랜 뒤에, 필력과 경험이 모두 절정에 달했을 때 쓰려고 남겨두었던 이야기를 의사가 말한 시한(3개월) 안에 써내야 한다. 어떻게든 자신이 써보려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에이전트에게 고스트 라이터를 고용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과 라이벌인, 신간이 나올 때마다 모욕적인 이메일을 주고받던 그 여성 작가 마르카 반틀리를.


조금씩 변해가는 헬레나와 고스트 라이터의 관계 속에 4년전의 진실은 아주 조금씩 드러난다. 헬레나는 처음부터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와 방법은 나중에야 밝혀지는데, 고백하자면 난 이유보단 방법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유도 꽤 타당하다.


사실 난 사이먼이 죽은 이유가 책 속의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결혼 생활 중 그의 행태만으로도 아주 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물론 현실에선 그러면 안 되지만, 책 속이니까). 육아 방식의 차이를 이용해 아내를 '나쁜 엄마'로 만들어 버리고는 아내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고 아내에게 경멸의 눈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그런데 밝혀진 진실은 더 어마어마했고, 마음 아팠다. 헬레나의 마지막도 슬펐지만.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나도 이 책에서만큼은 헬레나가 베서니를 품에 안기를 바랐다. 슬프지만 조금은 다행이었던 이야기.



23. 다크 사이드(앤서니 오닐,이지연 역. 한즈미디어. 2017. 492쪽)

: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 다크 사이드. 달에 인류가 정착한 지금은 '니어(near)사이드'와 '파(far)사이드'로 구분되고 파사이드의 퍼거토리 지역 근처에서는 지구에서 잔혹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수용한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한 안드로이드가 이 죄수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한편 이제 막 지구에서 퍼거토리 경찰서에 부임한 유스터스. 퍼거토리의 설립자이자 절대자로 추앙받는 플레처 브라스의 오른팔이 폭발로 사망한 사건에 급작스럽게 투입되고,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하려던 그는 경찰서장의 노골적인 견제와 부하 직원들의 게으름으로 방해받는다.


내용은 뻔하게 흘러갔지만 여러 장치들 덕분에 꽤 재밌었다. 고립된 지역의 부패한 권력 이야기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원칙을 벗어난 안드로이드의 행태가 흥미로웠다. 사실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제목 또한 뻔하지만 달의 어두운 뒷면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어둠 또한 상징한다. 결말도 마냥 아름답거나 원칙적이지 않고 꽤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유스터스 형사 시리즈가 나왔어도 계속 읽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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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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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조금은 다행이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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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아내들의 이야기
아놀드 베넷 지음, 정선우 옮김 / 아토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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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번역만 문제일 거라 생각해서 그냥 꾹 참으면서 읽어보자 했는데, 번역뿐 아니라 오탈자가 너무 많다. 오자와 비문은 모든 페이지마다 서너 개씩 빠짐없이 있고 잊을 만 하면 탈자가 나타난다. 말 그대로 단어 중간이 뻥 뚫려있다. 이런 책 진짜 몇 십년 만에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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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롤, 액션!
연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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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다면 뻔한 이야기에 이 작가는 자신의 색을 덧입혔다. 그들이 모이게 된 방법과 미래에 살짝 변주를 줘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들어서 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재밌는 이야기를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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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의 아이
어맨다 프라우즈.조사이아 하틀리 지음, 권진아 옮김 / 살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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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울증 환자의 주변인에게 권해주고 싶다.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나름 위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환자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거,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일이 가득한 이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온갖 자극적인 것들로 가득찬 두려운 곳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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