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법에 걸린 집을 길들이는 방법(찰리 N. 홈버그, 유혜인 역. 북플라자. 2024. 432쪽)
: 소설가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던 메릿. 어릴 때 만난 기억이 희미한 외할머니가 그에게 유산으로 집을 남겼다는 걸 알게 되어 초라한 하숙집을 떠나 윔브렐 하우스로 온다. 그런데 간신히 들어간 집에서는 초상화 속 여인이 메릿을 노려보고, 벽이 변형되며, 심지어는 문을 잠가 메릿을 집 안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다행히 이런 마법에 걸린 집을 관리하는 기관인 '바이커'에서 헐다라는 이름의 가정부가 파견되고, 메릿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집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시작한다. 한편 30여년 전 영국에서는 사일러스라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폭행하던 아버지를 죽이고 그 능력을 흡수한다. 사일러스는 마법력이 있는 대상에게서 능력을 흡수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데...
설정이 정교하고도 재밌어서 즐겁게 읽었지만 19세기 초임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의 역할 고정 관념이 너무 강해서 약간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여성은 하녀 혹은 가정부 역할 만을 맡는다는 게 좀... 비슷한 맥락에서 로맨스도 좀 억지스러운 거 같았고. 사실 헐다가 자신이 가진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너무 떨어지는 게 제일 답답했다. 집이 보여주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흥미로웠지만 충분히 보여주지는 않은 거 같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이 부분이 좀더 묘사되었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
2. 딩(문진영. 현대문학. 2023. 172쪽)
고등학교를 멀리 진학해 고향 마을을 떠난 지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몇십 년 만에 돌아온다. 어릴 때는 지원과 단짝이었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멀어졌던 주미는 부모님이 하시던 해변 모텔을 이어받아 계속 하고 있다. 어느날 독특한 억양의 여성이 찾아와 몇 달 전 남자가 목을 멘 401호에 묵고 싶다며 한달 치 방세를 내민다. 여성은 해변 옆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주미 아버지 친구인 영식이 하는 주미네 모텔 앞 포장마차에서 매일 저녁을 먹는다.
Ding은 서핑 보드에 난 상처를 말한다. 서핑을 하면 딩이나는 건 당연하다. 삶도 마찬가지겠지. 상처 안 받는 삶이 어딨겠어. 각자의 사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원과 주미가 살아온 이야기 끝에 재인의 이야기가, 재인이 저녁 마다 들르게 된 포장마차의 영식 이야기가, 그리고 영식의 집에 살게 된 쑤언의 이야기가. 물론 각자의 상처도 있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가가 해설에서도 얘기했듯 이 소설은 상처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처를 씩씩하게 극복해내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작은 행동 하나가 상처를 딛고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살면서 건네지는 지도 몰랐던 온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 버티는 게 힘겹지만, 살아있는 한 살아야만 하는 것. 살다보면 언젠간 저 멀리 수평선에서 고래 모습을 한 신을 만날지도.
3.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세라 핀스커, 정서현 역. 창비. 2025. 528쪽)
: SF 단편집. 첫번째 작품 <이차선 너비의 고속도로 한 구간>이 꽤 좋았어서 마음을 열고 읽어나갔다. 모든 작품에서 좋은 부분이 하나 이상씩 있어서 즐겁게 읽었지만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 좀 거슬리기는 했다. 가장 좋았던 건 <그리고 (N-1)명이 있었다.
4. 록커, 흡혈귀, 슈퍼맨 그리고 좀비(차삼동,김성준,손장훈,서번연,유권조,조성희. 황금가지. 2019. 420쪽)
: 좀비 아포칼립스 앤솔러지. 그냥 편하게 읽으려고 집어들었는데 첫 세 작품이 기대보다 더 유치해서 좀 실망스러웠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아들에게>를 읽었는데 뚯밖에도 작품성이 높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른바 '정상인'의 관점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회적 취약자(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들)를 보호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꽤 신선했다. 문장도 나쁘지 않았고, 결말도 타당했다. 그 뒤의 작품 <성모 좀비 요양원>도 나쁘지 않았다.
5. 나에게 진실이라는 거짓을 맹세해(헬레네 플루드, 권도희 역. 푸른숲. 2024. 528쪽)
6. 폐월; 초선전(박서련. 은행나무. 2024. 244쪽)
: 《삼국지(연의)》 속 절세미인이자 임팩트있게 등장하고 납득 안 되게 사라지는 초선을 그녀 자신의 시선을 다시 썼다. 삼국지를 안 읽은 사람이라도 초선의 이야기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겠지만, 그런 배경 지식 없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 무엇보다 초선의 능력과 노후를 제대로 그려주어 흡족했다. 삼국지의 그녀는 도구로서만 다뤄지는 느낌이었다면 여기서의 초선은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고 스스로 선택한 노후를 맞이한다. 사실 초선의 노후 부분이 가장 좋았다. 작가 자신도 얘기했지만 삼국지의 초선의 사라짐은 그녀의 캐릭터를 볼 때 말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작가가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종종 해줬으면 좋겠다.
7. 내가 만든 여자들(설재인. 카멜북스. 2019. 268쪽)
: 여성의 삶을 여성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단편집.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제를 섬세히 드러내면서도 중심이 잘 잡힌 이야기들이다. 사실 표제작이 너무 강렬해 다른 작품들의 내용이 잠시 잊혀질 정도였다. 지금 리뷰를 쓰기 위해 책 목차를 보니 다시 기억이 살아나긴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고, 문장들과 내용도 좋았지만 특히 여성을 돕는 건 여성이라는 주제 의식이 뚜렷한 점이 가장 좋았다.
8. 오직 밤뿐인(존 윌리엄스, 정세윤 역. 구픽. 2020. 212쪽)
: 청년 아서는 일없이 호텔에서 생활한다. 아버지와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소원하고,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아서는 갑자기 온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당대의 불안한 청년상을 그렸다. 하지만 꼭 그게 시대상 때문은 아니다. 예민하고 우울하며 자아가 비대한 아서의 심리는 사실 공감하기 힘들다. 그가 그렇게 부유하듯 살 수 있는 건 결국 집안의 경제력 덕분이니, 하고 다니는 짓들이 모두 배부른 투정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목한 건, 이게 바로 <<스토너>>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거. 철없고 치기어린, 불안하고 미숙한 아서가 있었기에 윌리엄 스토너의 아내 그레이스가 있을 수 있었겠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어서 읽어봐야겠다.
9. 암살 주식회사(잭 런던, 김이선 역. 문학동네. 2005. 303쪽)
: 러시아 출신 이반 드라고밀로프는 사회의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암살국'을 운영한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조카가 있는데, 조카는 그가 이런 일을 하는 걸 꿈에도 모른다. 조카는 자신의 애인이 삼촌과 친하게 지내길 바라 그에게 애인을 소개시켜 주기로 한다. 하지만 조카의 애인인 윈터 홀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살인 사건에 의문을 가지고 추적을 하던 중, 지인이 부둣가에서 은밀히 살인 의뢰 영업(?)을 받았다는 얘길 듣게 된다. 그는 수완좋게 암살국에 접근하여 드라고밀로프와 대면하고, 드라고밀로프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다. 드라고밀로프는 이를 수락하고 전 조직원에게 공지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윈터 홀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바로 드라고밀로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의 미완 유고를 로버트 피쉬가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초반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추격전이 된다.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결말 부분이 저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고, 역시나 조금 이질적이다 싶은 부분은 원저자의 저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말 자체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은 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일종의 트릭(?) 부분이 아쉬웠다는 것. 사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적 제재가 과연 옳을까 였을 듯. 그리고 내가 읽고 싶었던 건 속 시원하게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둘 다 멀어진 듯. 그래도,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은 한다.
10. 데이비드 코퍼필드 상, 중, 하
: 데이비드가 태어나던 말, 고모할머니(아버지의 고모)는 데이비드의 엄마를 방문한다. 자신의 조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조카며느리가 임신한 몸으로 홀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고 방문한 것이지만, 상냥하게 도움을 주는 대신 태어난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란 걸 알고 그냥 돌아서 가버린다. 데이비드는 엄마와 하녀 패거티의 지극한 돌봄을 받으며 자라나지만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새아버지와 새아버지의 누이의 언어 폭력과 교육을 가장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 참고 반항을 하고, 그 대가로 기숙학교에 보내진다. 역시나 폭력적인 성향의 교장의 독재하에 얼어붙은 분위기의 학교에서 데이비드는 간신히 친구 스티어포스를 사귄다. 하지만 새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착취 당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데이비드는 런던의 한 공장에 일꾼으로 보내진다.
내가 가진 책이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PMS 여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 둘 다겠지 - 집중이 너무 안 됐다. 글씨가 작고 행간도 촘촘하긴 했지만 이 세 권을 정말 오랫동안 읽어서 나중엔 머리가 아팠다. 문장도 너무 예스러웠고 심지어는 맞춤법도 예전 방식이어서 더 읽기 힘들었다. 게다가 비호감 캐릭터들도 너무 많았어... 그래도 저자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은 듯 하여 그 부분에 집중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해피엔딩일 거라는 기대에 기대어. 하지만 당분간은 이 저자를 못 읽을 거 같다. 심지어는 어젯밤에 안읽쌓 책탑 정리하다가 이 저자의 다른 작품이 나와서 한숨을 쉬면서 아래로 밀어넣었다.
1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애거사 크리스티, 김유미 역. 황금가지. 2015. 404쪽)
: 추리 단편집. 위의 디킨스 때문에 아픈 머리를 좀 식히려고 읽었는데, 잘 선택했다. 제목이 뭔가 동화 같아서 기대했는데 읽을 땐 전혀 동화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돌아보니 그래도 그 정도면 순했다 싶었다. 푸와로 경감과 마플 양의 이야기들인데 아무래도 단편들이니만큼 발로 뛰기보다는 안락의자 탐정의 분위기가 강하다. 그리고 난 그래서 더 좋았다.
12. 전쟁을 위한 기도(마크 트웨인, 존 그로스 그림, 박웅희 역. 돌베개. 2003. 104쪽)
: 마크 트웨인의 우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 호전성과 이기심, 잔인함을 비판한다. 평화를 위하는 척 하지만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를 바라는 마음, 내 편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임을 외면하는 위선. 내용은 짧지만 인상적인 삽화와 함께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13. 그 머나먼 - 2011년 제56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진은영 외. 현대문학. 2010. 224쪽)
: 사실 시는 (거의) 매일 읽는다. 자기 전에 한 두 편씩. 잠이 안 오는 밤엔 쭉쭉 읽는다. 하지만 피곤한 밤엔 한 편도 채 못 읽는다. 그래서 내 침대 머리맡엔 늘 시집이 있다. 그리고 그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건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므로 독서 목록엔 넣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은 앉은 자리에서 쭉 읽었다. 비가 그친 토요일 오후 베란다 테이블 앞에 앉아 산바람을 맞으며, 무알콜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며 끝까지 읽었다. 분명 무알콜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조금 취한 듯한 기분이었고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시는 다 좋았다. 수상작도 후보작도. 자선작도 역대 수상자 근작도. 유홍준과 이승훈만 빼고. 이 둘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14. 위스퍼맨(알렉스 노스, 김지선 역. 흐름출판. 2022. 516쪽)
: 제이크는 심장 마비로 죽은 엄마를 발견한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제이크에게 위안이 되는 건 언젠가부터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단발머리가 한쪽으로 삐치고 무릎의 상처가 낫지 않는 금발 소녀. 제이크는 소녀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걸 알고는 있다. 아빠 톰도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직 크지만 더 큰 문제는 제이크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 엄마와 유난히 유대가 깊었던 제이크를 돌보는 건 점점 더 힘에 부치고, 톰은 일단 아내가 죽은 집을 벗어나고자 페더뱅크라는 마을로 이사한다. 제이크가 처음부터 맘에 들어했던 집에 들어가지만 제이크는 지하에서 울부짖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실 이 마을에는 20여년 전 위스퍼맨이라는 연쇄 살인범이 있었다. 어린 소년들을 죽였던 그는 피트 형사의 결정적인 포착으로 검거됐지만 마지막 희생자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피트는 마음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를 면회하지만 위스퍼맨은 피트를 조롱할 뿐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또다시 어린 소년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톰은 수상한 사람이 자기네 집 차고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걸 발견한다.
스릴러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톰과 제이크의 관계 뿐 아니라 위스퍼맨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다른 부자의 이야기. 아이도 부모도 서로를 사랑하지만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좋을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이 바라는 것과 상대방에게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소설 중반까지 이렇게 어긋나는 톰과 제이크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양쪽 다 너무도 이해가 되어서. 작가는 스릴러의 긴장감도 놓치지 않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정말 섬세하게 잘 풀어냈다. 가족 간의 관계 뿐 아니라 상처한 후 처음 데이트에 나선 톰은 심경이라든가 자신보다 어린 상사 어맨다를 대하는 피트의 마음, 그리고 어맨다의 심경까지.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15. 잼 한 병을 받았습니다(홍락훈. 에이플랫. 2023. 4254쪽)
: SF 초단편집. 두 세쪽 정도의 짧은 단편들이긴 한데 연작인 것들이 많아서 많이 짧은 기분은 아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앞으로 쓸 작품의 시놉시스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있다. 아이디어가 대체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뭔가 세계관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휙휙 바뀌는 느낌도 들어서 뒤로 갈수록 피곤해졌다. 그래서 처음 읽기 시작할 땐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지 했다가 책을 덮을 즈음에는 당분간은 이 작가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16. 세인트 클라우드(벤 셔우드, 이나경 역. 문학수첩. 2010. 360쪽)
: 열 다섯살 찰리는 엄마가 외출한 사이 동생과 이웃집 아줌마의 차를 몰래 타고 옆 도시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러 가기로 한다. 야구가 끝난 후 밤거리를 운전해서 돌아오던 찰리는 맞은 편의 트럭을 미처 보지 못해 사고를 내고, 자신과 동생 샘의 영혼이 붕 떠 있는 걸 알게 된다. 무서움에 샘의 손을 잡고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않기로 맹세한 형제. 하지만 구급대원의 심장 마사지로 찰리는 현생으로 돌아오고, 샘은 그렇지 못한다. 스물 여덟이 된 찰리는 샘이 묻힌 마블헤드 공동묘지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며 부둣가의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해가 지는 시간에는 늘 그를 찾아오는 샘의 영혼. 형제는 석양 빛이 사라질 때까지 캐치볼을 한다. 한편 닻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늘 요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테스. 최초로 혼자 요트 세계 여행을 한 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다. 테스는 마블헤드 묘지에 잠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가 찰리를 만난다.
테스의 상황을 비롯해서 내용이 너무 뻔했지만 소설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편안하게 읽었다. 이렇게 해피 엔딩이 보장된 이야기를 읽고 싶기도 했고. 특히 석양 무렵의 두 형제의 공놀이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운 비글도 함께. 결말은 조금 아쉬웠다. 이런 이야기에서 이 정도면 열린 결말 아닌가? 물론 분위기상 해피엔딩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겠지만. 어쨌든 좋았다.
17. 도깨비불(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이재룡 역. 문학동네. 2012. 204쪽)
: 마약 중단을 시도하고 있는 알랭.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애인은 그에게 시큰둥하다. 허술한 사설 요양원에서 파리로 외출을 나온 그는 자신이 마약을 다시 하게 되리라는 걸 안다. 몇몇 지인을 찾아가고, 친구 뒤부르와도 만나지만 그의 머릿속엔 자살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성적으로도 능력이 없는 알랭. 심지어는 지인들마저도 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알랭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는 힘들었다. 그의 방황 또한 한심했다. 다만 그의 행태가 당대 젊은이들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인지 생각을 하긴 했다. 1차 대전 직후 기존 가치관의 붕괴와 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따른 허무주의로 알랭과 같은 젊은이들이 많지 않았을까. 뒤부르가 동양 철학에 심취한 것도 그런 사회상에 영향을 받을 것일지도. 어쩌면 자살은 알랭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알랭의 자살은 처절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그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순차적으로 일어날 일이었을 뿐. 이야기 밖에서 그를 지켜본 독자 또한 그가 아깝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18. 사랑은 하트 모양이 아니야(김효인. 안전가옥. 2025. 228쪽)
: 로맨스 두 편. 둘 다 설정이 흥미로웠다. 표제작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아내와 감수성 충만한 남편이 이혼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 수록작은 자신이 죽는 날을 알게 된 남자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와 우리나라 월드컵 16강 예선을 보고 죽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서 일어나는 일. 사실 표제작은 내용이 뻔했지만 작가가 상당히 섬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풀어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수록작 설정이 더 재밌었는데, 나라면 그렇게 진취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되어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결말은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한 번 비틀었어도 좋았겠다 싶었다. 이 작가를 처음 읽은 거 같은데 - 앤솔러지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다. 잘 쓴다.
19.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줄리애나 배곳, 유소영 역. 인플루엔셜. 2025. 408쪽)
: SF 단편 15편. 첫번째 작품이 인상깊었는데 갈수록 작품들이 좋아졌다. 15편 각각의 설정이 다 다르고 다 참신해서 계속 즐거웠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갖고 있다는 게 짠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마음을 정말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20. 설자은, 불꽃을 쫓다(정세랑. 문학동네. 2025. 336쪽)
: 설자은 시리즈 2편. 전편에서 왕을 만나 집사부 대사로 임명된 설자은. 어느 밤 불이 났다는 외침에 현장으로 달려간 자은과 목인곤은 불탄 집 안에서 네 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들이 화재가 시작되기 전에 숨진 걸 알게 된 자은은 이를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곧 금성 다른 동네에서도 화재가 일어난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읽는 내내 당대의 사회상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내다니, 새삼 작가의 섬세함에 감탄했다. 게다가 자은의 성장도 꽤 감격스러웠다. 추리 능력이야 전편부터 확실했지만 이번 편에서는 자은이 좀더 왕의 흰 매로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느낌. 마지막 에피소드의 결말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망설이지 않고 검을 쓴 자은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이 경험이 다음 편에서는 자은을 어떤 곳으로 이끌지 기대된다.
21.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 한은경 역. 민음사. 2006. 358쪽)
: 폴란드 출신 레오 거스키는 독거 노인이다. 윗층 사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 브루노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매일 외출을 해서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이웃에게 노출시키지만 사실 존재감은 없다. 사실 레오가 이곳 미국에 오게 된 데에는 고향 슬로님에서 함께 자란 첫사랑 알마의 영향이 크다. 알마가 먼저 미국으로 떠나왔고, 레오는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받지 못했다. 2차 대전에서 살아남아 간신히 미국에 와서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였다. 그후 레오는 이런저런 직업을 거쳐 사촌형의 열쇠 일을 함께 해왔고, 얼마 전 심장마비가 한 번 온 후 쉬고 있다. 그런데 레오가 폴란드에 있을 때 알마를 위해 썼고 친구에게 맡겼다가 유실된 원고 『사랑의 역사』가 우편함에 들어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되어서. 한편 열네살 소녀 알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예전에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한, 즈비 리트비포프가 쓴 스페인어 책 『사랑의 역사』를 발견한다. 엄마를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주고픈 알마는 번역가인 엄마에게 제이컵 마커스라는 남자가 자신이 읽기 위해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의뢰를 해오자 이 사람과 엄마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열네살 알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레오의 소설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혼란스러운 머리로 열심히 읽어나간 결과 이야기를 잘 끼워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레오가 한없이 가여워졌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의 삶은 얼마나 힘없이 나풀대는지.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즈비가 한 일은, 즈비의 아내가 한 일은 내게 분노를 불렀지만. 마지막 장면은 내내 쓸쓸했던 레오의 삶에서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삶을 지탱해 오던 사랑이 모두 끝났다는 면에서는,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모든 사랑의 역사가 레오의 삶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
(스포)
왜 아이작이 책의 번역을 의뢰했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22. 라플란드의 밤(올리비에 트뤽, 김도연 역. 달콤한책. 2018. 608쪽)
: 라플란드에 순록경찰로 처음 부임한 니나. 40일간의 극야가 끝나고 해가 돌아오는 날 첫 근무를 시작한 니나는 파트너 클레메트와 순찰을 돌면서 순록치기 마티스와 안면을 튼다. 마티스는 게으르고 지저분한 생활을 하며, 술에 절어 있다. 마티스의 순록 떼가 자꾸만 영역을 이탈해 다른 순록치기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상황. 니나는 마티스의 시선이 불쾌하다. 한편 이 지역의 토착민 사미족을 위한 유일한 박물관의 관장이 얼마전 프랑스의 수집가에게서 기증받은 사미족의 전통 북이 도난당했다고 신고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독선적인 이단 배척 정책 때문에 전세계에 71개 밖에 남지 않은 매우 귀중한 북을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마티스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순록경찰 둘이 의지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가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사미족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토착민에 대한 착취와 차별 대우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에 과격하게 맞서는 사람도, 물 흐르듯 흐름을 따라 순응하는 사람도 다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건 아일라. 가여운 아일라. 그리고 가여운 아슬락. 조상이 살던 곳에서 조상이 살던 방식을 유지하며 그저 삶을 이어가기만을 바랐던 사람들이 그렇게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이 책은 범죄 소설이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것보다 내게는 사미족의 현실이, 그리고 아슬락의 마지막 모습이 가장 깊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