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뒤쫓는 소년(설흔. 창비. 2018. 272쪽)

: 언제부턴가 제국에는 까마귀 - 포도청 관원 - 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열 일곱 책을은 산책 후 집에 들어갔는데, 까마귀 넷이 들이닥쳐 갑자기 할아버지의 서재를 뒤엎어 모든 책을 태워버리고 할아버지마저 잡아간다. 망연자실한 책을 앞에 나타난 또래의 소녀 섭구 씨. 섭구는 책을 씨에게 제국을 구할 책을 써야 한다면서 책을 좇는 여행을 함께 시작한다.


청소년 소설인데, 청소년들이 이 책을 과연 즐겁게 읽을지... 이미 책을 좋아하는 하이라면 모를까, 책에 관심 없던 아이를 이 책을 통해 책 앞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전 일화를 새롭게 해석한 건 어른으로서는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청소년 입장에서는 잔소리 내지는 교훈 집착적으로 읽힐 듯. 한마디로, 올드했다.



2. 재버워크의 밤(프레드릭 브라운, 최세민 역. 엘릭시르. 2024. 352쪽)

: 뉴욕 외곽 캐멀 시티. 닥 스토거는 유일한 주간지 '캐멀 시티 클라리온'의 편집자이자 발행인이다. 평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인 닥은 매일매일이 똑같은 이 작은 마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 화끈한 기사를 써보는 게 소원이다. 신문 발행 전날 밤, 여느 때처럼 소소한 마을 소식들로 지면을 채우고 퇴근 후 한 잔 하려던 닥은 창문 너머로 마을 경찰관의 조금 신경쓰이는 움직임을 목격한다. 그에게 술을 한잔 사줄까 했지만 타이밍을 놓친 닥. 갑자기 그에게 '살인이야!'라는 전화가 걸려오는데...


인쇄공 직원 피트, 단골 술집 주인 스마일리, 친구인 변호사 칼 트렌홀름, 그날 낮에 이혼한 랠프 보니, 뜬금없이 등장한 예후디 스미스, 체스 상대인 젊은 앨 그레인저. 


닥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리던 순간부터 마치 꿈 속인 듯 여러 사건이 휘몰아친다. 범인은 내가 생각한 그 인간이었지만 동기는 생각지도 못했다.. 재버워크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재버워크는 어쩌면 단 한 명일 수도, 혹은 이 사건에 관련된 모두일 수도 있겠다. 각각의 스토리가 있는 사건이 하나로 얽혀들어 해결되는 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져 깊이 빠져들어 숨죽이고 읽었다. 책을 다 읽자마자 바로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검색했을 정도.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번역 출간됐음 좋겠다.



3.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리디아 데이비스, 이주혜 역. 에트르. 2024. 376쪽)

: 시, 일기, 낙서, 에세이 혹은 짧은 소설들. 대체로 재밌었기에 장르는 궁금하지 않았다. 간혹 지루한 글도 있기는 했다. 소재 또한 다양했지만 겹치는 것도 몇 개 있었는데 특히 플로베르의 서신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는 듯 했고, 플로베르는 나도 좋아하는 작가였기에 나 또한 흥미롭게 읽었다. 뭔가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생활의 작은 하나하나가 모여 삶이 되고 그게 결국은 내 인생인 것. 



4. 악마의 계약서는 만료되지 않는다(리러하. 팩토리나인. 2022. 320쪽)

: 낡을 대로 낡은 넓은 부지의 3층 주택에 할머니와 살고 있는 대학생 서주. 비록 친 손주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거둬 준 할머니를 누구보다 아끼는데, 할머니는 사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재산관리인이다. 이 넓은 집을 세놓아 먹고 살았지만 이미 다 쓰러져가는 집에 세입자는 이제 딱 두 명.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갑자기 빈 방들을 모조리 세 놓았다고 해서 웬일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출몰한다. 알고보니 지옥이 리모델링 중이라 죄인들을 임시로 이주시킨 것. 이들을 관리하는 악마 또한 와있는데, 서주는 어느날 급하게 알바를 나가는 자신을 위해 미숫가루가 식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악마를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따져보면 악하기로는 현실 세계의 인간들이 더하니까 뭐. 스토리에 군더더기가 없고 가벼운 듯 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점들과 사회 모순들을 잘 짚어줘서 재밌게 읽었다. 앞으로 약간의 깊이가 더해진다면 누구보다 좋은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5.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김이설. 자음과모음. 2024. 208쪽)

: 돌봄노동에 시달리는 미경. 남편이 진 빚 때문에 허드렛일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가는 정은. 빈둥지 증후군 난주. 대학 친구 셋이 25년만에 마흔 아홉이 되어 강릉으로 떠난다. 사느라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셋이 한번에 보기도 힘들었지만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각자 다른 기억과 다른 사정을 지니고 떠나온 중년의 2박 3일 + 1일. 


이들이 언급하는 사건들이 다 내 기억에도 꽤나 생생해서 상당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단순히 중년에 접어든 친구들의 신세한탄이나 과거 회상, 묘하게 어긋나는 감정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가야 하는 것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가 용기이고 극복이다. 각자의 사정도 각자에겐 겨우겨우 감당해 낼 만큼의 무게를 지닌 것. 누가 더 힘들고 덜 힘들 것도 없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거니까.



6.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아말 엘모타르, 맥스 글래드스턴. 장성주 역. 황금가지. 2021. 284쪽)

: 시간의 가닥을 따라 여행하며 역사적 사건을 수정, 삭제하며 싸우는 '가든' 과 '에이전시'. 이 두 세력의 핵심 전력인 블루와 레드가 어느 순간 전장에서 시간차를 두고 마주치고,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한다. 


이들의 편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블루가 그걸 말하기 전에, 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이들이 사랑에 빠졌음을.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 지 궁금해 끝까지 집중했지만, 사실 이 소설 속 세계관은 그닥 맘에 들지는 않았다. 사랑과 전쟁, 둘 중 하나 - 난 사랑에 한 표 - 에 더 치중했으면 더 좋았을 걸. 



7. 얼음 속의 여인(엘리스 피터스, 최인석 역. 북하우스. 2024. 368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여전히 내전 중인 잉글랜드. 1139년 11월, 혼란의 와중에 피난민들 중 귀족 남매인 에르미나와 이브, 그리고 그들을 슈루즈베리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인도하던 힐라리아 수녀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우스터의 베네딕토회 수도사가 와서 그들을 찾는데 도와주기를 청하는데, 현재 남매의 보호자인 외숙은 모드 황후 편이라 슈루즈베리에는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휴 베링어는 최선을 다해 수색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캐드펠 수사는 브룸필드 수도원에 위급한 환자가 있다는 연락에 그를 치료하러 간다. 그는 강도에 당한 수사로, 산에서 남매와 젊은 여성을 만났음을 잠결에 중얼거린다.


역시 범인을 숨겨(?)두는 작가의 수법이 교묘했다. 난 처음에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일 줄 몰랐지. 다 읽고나서 내가 못 잡고 넘어간 단서들이 있었음을 깨닫긴 했다. 어찌 보면 에르미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물론 상당 시간 에르미나의 흔적을 찾기 힘들긴 하지만. 캐드펠 수사의 활약이 조금 미진하지 않나 싶을만큼 꽤 스케일이 커진 느낌이다. 역시 재밌게 읽었다. 



8. 성소의 참새(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56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7. 저녁 미사 중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에 한 젊은이가 뛰어들었고, 뒤이어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몰려와서 젊은이를 패기 시작한다. 수도원장이 나서서 호통을 친 후에야 흥분한 사람들은 폭행을 멈추고 젊은이가 살인과 두둑질을 했다고 하지만 젊은이는 부인한다. 떠돌이 음유시인이자 광대인 이 젊은이 릴리윈이 성소로 들어온만큼 수도원장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이 청년을 보호하기로 한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범인이 짐작 가능했다. 동기도. 그래서 결말이 많이 안타까웠다. 1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치러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집안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으려면 금세공인 집안에 막 결혼한 며느리 마저리처럼 남편을 잘 조종하거나 집안의 실세 줄리아나 부인처럼 모든 걸 틀어쥐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수재너처럼 우직하게 일만 하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리지. 이래저래 씁쓸한 결말이었다.



9. 귀신 들린 아이(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56쪽)

: 캐드펠 수사 시리즈 8.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수도원에 지역 귀족의 차남 메리엣이 수도사가 되겠다며 청을 해온다. 열아홉 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도원으로 오는데 부자간의 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작별과 자신의 성미를 간신히 누르는 듯한 태도, 견습기간을 줄여 달라는 간청이 수상하다. 게다가 밤에 그는 발작을 일으켜 숙사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게 해 귀신 들렸다는 소문까지 난다. 한편 스티븐 왕의 동생이자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헨리 주교의 총애를 받는 사제 피터 클레멘스가 왕에게 중요한 전갈을 가던 중 실종된다.


범인은 짐작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메리엣이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건 알았고 그게 나이절이라고 생각했다. 동기는 로즈위타의 플러팅일 거라고. 근데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니. 게다가 동기가 이렇게나 정치적일 줄이야.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정치 상황은 그저 배경으로만 가볍게 취급했는데 앞으로 좀더 신경써서 읽어야 하나 싶다. 근데 너무 헷갈려. 맨날 여기 붙었다 금세 저기로 돌아서고. 어쨌든 이번 작품은 성장소설의 색이 뚜렷했고, 그 부분이 가장 흐뭇했다.



10. 죽은 자의 몸값(엘리스 피터스, 송은경 역. 북하우스. 2024. 348쪽)

: 1141년 2월, 내전은 격화되고 참전했던 휴 베링어가 귀환하여 스티븐 왕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다. 스티븐 왕의 반대편에서 참전한 웨일스 군대 중 일부가 민간인을 약탈하는 가운데, 캐드펠 수사와 안면이 있는 손베리의 어바이스 - 이제는 매그덜린 - 수녀가 수도원으로 찾아와 자신들이 어떻게 웨일스인들의 약탈을 막았는지 얘기해 주며 그 와중에 확보한 웨일스인 포로를 데려가라 제안한다. 다음날 휴는 그를 데려오고, 웨일스 출신 캐드펠은 그의 입에서 자신의 신분과 상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휴는 그를 역시 상대방에 포로로 잡힌 슈롭셔의 행정장관 프레스코트와 교환하려 한다.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사랑은 피어난다. 그래, 전쟁 중에는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생겨나지. 정치적인 듯 보였던 이번 상황은 사적인 것으로 판명난다. 인간의 욕심과 순간적인 판단 오류. 그리고 약간은 억지스러울 지 모르지만 독자로서는 흡족한 해피엔딩. 다만 살인자의 벌이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캐드펠 수사는 하나님이 벌하신다고 하겠지만. 



11. 고행의 순례자(엘리스 피터스, 김훈 역. 북하우스. 2024. 336쪽)

: 성 위니프리드 축제를 앞둔 시기, 슈루즈베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록,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수도원 접객원도 만원이다. 이들 중 눈에 띄는 몇몇이 있는데 바로 오른다리가 완전히 뒤틀린 흐륀과 그의 누나 멜랑에흘, 이모 위버 부인이다. 이들은 흐륀의 다리를 고쳐달라는 청원을 위니프리드 성녀에게 바치기 위해 순례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두 청년과 동행하게 된다. 키아난은 목에 커다란 십자가를 매고 맨발로 걷고 있고 그곁엔 매슈라는 젠트리 출신으로 보이는 번듯한 청년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고 있다. 캐드펠은 흐륀과 키아난을 치료해 주며 사연을 묻지만 키아난은 그저 죽을 병에 걸려 웨일스로 죽을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할 뿐. 한편 스티븐 왕이 아직 포로로 잡혀있는 가운데 모드 황후는 런던에 입성하고 윈체스터에서는 헨리 주교 주관하에 회의가 열린다.


이제까지 이 시리즈는 앞의 이야기를 몰라도 읽기에 아무 불편이 없었지만 이번 권은 마치 그간의 이야기를 중간점검하는 듯 하다. 캐드펠이 위니프리드 성녀의 유골에 관한 비밀을 휴 베링어에게 털어놓기도 했고 올리비에가 재등장하기도 했고. 올리비에는 정말 반가웠고 앞으로의 에피소드도 기대하게 했다. 과한 고난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듯 보였던 키아난의 사연에 괜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기적이 일어나 그래, 캐드펠이 수사였지, 여긴 수도원이었지 하고 새삼 돌아보게 됐던 이야기. 



12. 오렌지와 빵칼(청예. 허블. 2024. 184쪽)

: 스물일곱 어린이집 교사 영아. 주위 사람들에게 잘 참아주는 편이지만 어린이집의 폭력적인 원생 은우에 대해서는 화가 치민다. 하지만 은우를 초과 시간까지 돌봐야 하고, 은우네 엄마가 하는 비건 빵집에 가서도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모습을 꾹꾹 참아야 하는 게 버겁다. 게다가 대학 때부터 친했던 은주는 오늘도 변함없이 이런저런 링크를 보내며 '올바름'에 대해 가르치려 들고, 늘 헌신적인 듯 보이는 남자친구 수원은 지루하기만 하다. 영아는 자신의 모습이 답답해 '정서 변화 시술'을 받기로 한다.


꽤 잘 쓴 글이다. 적당한 무게감도 있고. 하지만 내 멘탈이 안 좋을 때 읽어서 너무 힘들었다. 기대도 너무 컸고. 영아의 시술 수 언행들이 시원하다는 리뷰도 있는 거 같은데, 난 오히려 대책 없는 지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수습도 본인의 몫인 걸. 영악하게 자기 걸 챙겨야지, 무조건 지른다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중간은 없는, '올바름'에 매몰당한 요즘 세태를 비꼬는 듯 하지만 결말이 좀 허무해 맥빠지기도 했다.



13. 까마귀가 울다(박현주. 씨엘비북스. 2023. 360쪽)

: 저승사자 현. 죽기 직전의 사람과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게만 보인다. 5년 전 현은 열다섯 살 소년 이정운을 살린다. 이후 우연히 마주친 이정운이 다시 자기를 알아보자 혼란스러워진 현. 이정운을 다시 살려야겠다고 맘먹는다. 


저승사자의 근무 상황이 꽤 디테일하다. 돈이 있어도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돈을 못 쓰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꽤 복잡한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이란 게 예외도 꽤 많지만. 저승사자 세 명의 캐릭터와 사연도 각각인 게 다채로워 재밌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나열하지 않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솜씨도 좋았고. 재밌게 읽었다. 



14.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조금주. 나무연필. 2017. 356쪽)

: 전세계의 48개 도서관을 찾아 살핀 책.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빌려주며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는 건 이미 한참전부터 알려지고는 있지만 조금이나마 새로운 도서관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빌렸는데, 사실 첫머리에는 조금 실망했다. 최첨단 기술을 배우고 사용하는 장이 되거나(메이커 스페이스) 가족 도서관, 이주민을 위한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서관 등은 새로울 게 없었다. 다른 매체나 책에서도 얼마든지 다뤘던 내용이므로. 


내가 기대했던 바가 충족된 건 책의 중반 이후, 바티칸 도서관 챕터부터이다. 굳이 찾아보진 않았지만 바티칸의 도서관에 관한 정보는 처음 접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수도원의 도서관, 귀족과 왕실의 도서관 들 이야기도 재밌었다. 앞의 도서관들은 굳이 방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도서관들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15. 푸른파 피망(배명훈. 국민지 그림. 창비.2017. 96쪽)

: 청소년 대상 일종의 마중물 소설이랄까. 작가의 단편 중 하나를 한 권으로 펴낸 책이다. 난 도서관에서 시간 떼울 일이 있어서 읽었는데, 쉽고 흥미롭고 교훈적이어서 마중물 역할로 딱이라고 생각했다. 내용은 뻔하다. 작은 행성의 두 연구소. 서로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전쟁 전까지는 잘 지냈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서로를 멀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전쟁의 와중에 식량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한쪽에는 고기만 쌓이고 다른 쪽에는 채소만 잔뜩 배달된다. 고등학생 '나'와 친구 채은신지는 각각 다른 연구소 소속의 부모님을 두고 있어 전쟁 중에는 교류할 수 없지만, 서로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옥상에 매일 올라간다.


이 작가의 특기인 전쟁 이야기 속에 우정과 조크를 적절히 섞었다. 얘기했듯 내용과 결말은 뻔하지만 그 안의 세세한 에피소드와 사람들의 행태가 귀엽고 독특하다. 



16. 화려한 수업(아니샤 라카니, 이원경 역. 김영사. 2010. 448쪽)

: 늘 교사가 되기를 꿈꿨던 애나.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드디어 교사 자리를 얻지만 부모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봉에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관사에서 지내며 참교사의 꿈을 위해 노력하지만 들어간 학교는 하필이면 상류층 아이들이 모여있는 재단이고, 아이들은 초라한 모습의 애나를 무시한다. 애나가 제대로 된 사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면 할 수록 학부모들은 불만을 제기하며 숙제나 내주고 점수나 내주라고 한다. 그런데 애나에게 과외 제안이 들어오고, 교사 월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액수에 애나는 수락을 한다.


상류 사회야 늘 궁금과 흥미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그린 책을 읽는 건 오랜만이다. 그래도 상류층들은 도덕성은 바닥이어도 교육에는 열심인 걸로 그려지곤 했는데, 여기 나오는 아이들은 물론 부모도 포함해서 다 멍청함의 끝을 보여준다. 스스로는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는 반대인 것도 흥미롭기는 했다. 하지만 읽다가 너무 반복되는 내용에 흥미를 잃어서 뒷부분은 재미없게 읽었다. 



17.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케이틀린 도티, 임희근 역. 반비. 2020. 360쪽)

: 여성 장의사의 에세이. 저자가 20대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장례업체에서 일했던 6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에 관해 고찰한다. 그간 여러 학술서나 에세이, 인문학 책에서 이야기해 온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죽음은 물리적인 것, 처리해야 할 사후의 절차와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저자는 부러 가벼운 말투로 장례 업계에서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야기하지만 사실 죽음이 산업이 된 후로 죽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그닥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변한 게 사실이다(물론 이는 저자가 고찰한 미국 사회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죽음은 장례 절차 중에 이루어지는 방부 처리와 보정 작업을 거쳐야 하는, 숨겨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단게단계가 돈으로 환산되는 사업도 아니다. 


사실 난 죽음 이후의 절차가 궁금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례가 아니어서 내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진 못할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절차는 대강이나마 알고는 있는데, 미국은 또 어떻게 다르려나. 그런데 이 책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무게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죽음의 절차를 진행했던 저자이니만큼. 그런 부분이 공감되기도 했지만 일부분은 지루하기도 했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은 독서였다. 후속편은 안 읽어도 될 거 같다. 



18. 방어가 제철(안윤. 자음과모음. 2022. 144쪽)

: 애도의 모습들.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어떤 모습이든 어떤 방법이든 잃은 사람을 기억하는 건 결국 남은 자를 위로하는 것. 


가장 좋았던 작품은 「달밤」. 생일상을 차렸던 상에 다시 제사상을 차리는 게, 이게 생이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 묘하게 안심됐다. 탄생과 죽음은 결국 등을 맞대고 있음을. 표제작에서는 정오 선배가 화자를 음식으로라도 위로하며 자신도 위로받는 게 좋았고, 「만화경」에서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만 겨우 아는 前세입자를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게 맘을 따뜻하게 했다. 읽으면서 나도 위로받았던 작품집.



19. 다락방에서 남편들이 내려와(홀리 그라마치오, 김은영 역. 북폴리오. 2024. 468쪽)

: 절친 엘레나의 결혼 축하 파티를 마치고 귀가한 로렌. 낯선 남자가 자신을 친숙하게 부르며 맞이한다. 놀라서 경찰을 부르려 하지만 정황상 이 남자는 본인이 말한대로 로렌의 남편이 맞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상황은 그대로. 곧 로렌은 남편이 다락방에 올라가면 불이 번쩍하고, 새로운 남자로 바뀐다는 걸, 그리고 남편이 바뀌면 로렌 자신의 인생도 일부 수정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로렌의 남편들을 보면 볼수록, 대체 결혼을 왜 하나 싶었다. 사실 이 설정 자체가 약간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로렌이 결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로렌이 비혼주의자였다면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큰 폭력 아닌가? 어쨌든 재밌자고 쓴 소설에 쌍지팡이 짚고 나설 건 아니니까 편한 마음으로 읽으려 했는데, 역시나 제대로 된 남자는 별로 없어. 그리고 카터의 경우에서와 같이, 같은 사람이라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관계는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결말도 너무 운명순응적인 듯. 근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 이상 진취적이기도 힘들긴 하다. 마지막 남편이 카터이길 바라기는 했지만, 그랬더라도 처음만큼 행복하긴 어려웠을 듯. 여러모로 현실적인 결말이기는 했다.



20. 딜리트(설재인. 다산책방. 2023. 248쪽)

: 중학교 때 절친인 진솔과 해수. 진솔의 부모님은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진솔이 공부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진솔이 가진 능력보다는 해야 할, 되어야 할 것에만 집중한다. 반면 해수의 부모에게 해수는 투자 대상일 뿐이다. 적게 투자하고 많이 뽑아내면 그만인데, 공부는 가성비가 안 나온다. 대충 빨리 졸업해서 부모처럼 쉬운 길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정작 해수는 공부가 너무 재밌고 좋다. 진솔의 부모는 가짜 서류로 진솔을 서원외고로 진학시키고, 해수는 부모의 강요로 서원정보고로 진학한다. 둘은 같은 재단이지만 분위기는 천양지차인 두 학교의 지하에 통로가 있는 걸 발견하는데, 그곳에서 예전에 죽었던 교사 이야기를 듣고 제물을 바치며 기도한다.


분위기가 꽤 그로테스크하다. 부모가 사라진 건 좋았지만 문제는 그걸 받아들이는 진솔과 해수의 마음과 상황. 최소한의 바람막이조차 되어주지 못하는 부모는 없는 게 낫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진솔과 해수를 도와주는 좋은 어른들도 있지만 현실은 책 속에서도 녹록치 않다. 이 모든 게 휘몰아치고 난 후에도, 책 속에서나마라도 바뀐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둘이 좀더 자유로워진 게 다인지도. 하지만 적어도 정보고 학생들이 목소리를 한번이라도 냈으니. 이게 시작이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해수와 진솔이라도 행복해 질 한걸음을 내딛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21. 초콜릿 레볼루션(알렉스 쉬어러, 이주혜 역. 미래인. 2011. 384쪽)

: 국민건강단이 집권하고 사회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초콜릿을 비롯한 모든 설탕 함유 음식들이 법으로 금지된 것이다. 하교길에 먹는 초콜릿 하나가 삶의 낙이었던 헌틀리와 스머저는 낙심하지만, 곧 초콜릿 밀거래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고, 재료를 구해 초콜릿을 직접 만들기로 한다.


읽는 동안 초콜릿이 먹고 싶어질까봐 괜히 긴장하고 시작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학년 대상인 이야기인 만큼 좀 뻔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읽었다. 그런데 또 너무 저학년에게 읽히면 안 될 거 같아. 이 책의 주제는 자신의 신념을 무분별하게 강요하는 상황의 부작용, 독재의 부당함과 진정한 민주주의에 관한 건데, 저학년 어린이들은 이 책을 초콜릿 섭취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로 삼겠지. 뭐, 적당한 당분은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22. 죽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강지영. 북다. 2024. 256쪽)

: 재이는 환생한다. 재이에게 생은 동그라미다, 이음매가 있는. 언제 어떻게 죽든 같은 부모에게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다. 탄생의 순간은 고통스럽고 생이 반복될수록 괴로움도 크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환생을 알고 있는 상담심리학자 소영과 만나게 된다.


한 명의 소녀가 죽지 않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이 필요한 걸까. 또 얼마나 긴 시간의 희생이 필요한 걸까. 재이처럼 자신의 생을 알고 시작해도 쉽지 않은데, 소영같은 희생자가 있어도 쉽지 않은데, 현실의 대부분은 모른 채로 하루하루를 넘긴다, 어른들의 무심함 속에서. 그 하루 중 몇 명의 소녀들이 부모를 비롯한 양육자의 방치 혹은 학대에서 살아남고, 성범죄자와 스토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나.


소녀 한 명이 어른이 되는 건 정말 기적이다.



23. 로맨스 도파민(최영원, 조수연, 오조, 김이숨, 우재윤. 안전가옥. 2024. 318쪽)

: 로맨스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다 처음 듣는 작가들이어서 기대를 갖고, 좋은 작가를 발견하길 바라며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작품 「맛있는 녀석들」(최영원)이 딱 내 취향이라 즐겁게 읽었는데 두번째, 세번째 작품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네번째 이야기도 평이했고. 세 작품다 뻔했다. 소재도 별로 특이하다고 하긴 힘들지 않나? 「팝콘을 들으세요」는 자동매치라는 면에선 신선할 지라도 폰팅이랑 다른 게 없잖아. 그래도 마지막 작품 「나의 지구」(우재윤)는 처음엔 병맛인가 하며 읽다가 점점 빠져들었다. 



24. 밤의 행방(안보윤. 자음과모음. 2019. 248쪽)

: 생계형 점집을 시작한 누나가 지리산으로 기도를 하러 들어간단다. 주혁은 누나를 데려다준 뒤 비어 있는 누나의 신당 겸 집에 머물기로 한다. 아침에 깨질듯한 두통으로 깨어난 주혁은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 알게 되는데, 싱크대 위에 기묘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뭇가지가 있다. 당당하게 꿀물을 요구하는 나뭇가지의 쫑알거림은 멈추지 않고, 점집에는 손님이 들어온다.


죽음을 예고하는 나뭇가지라니, 신박한 설정이긴 하다. 이 작가의 전작들보다 설정이 가벼운 듯 하여 편안하게 읽기 시작했으나 주혁의 사연과 나뭇가지 '반'이 보는 죽음들은 가벼운 마음을 즉시 날려버렸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건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고 만나는 게 왜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건지. 그래도 한발 내딛는 것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게, 살아가야 할 이유인 걸까? 



25. 우리의 질량(설재인. 시공사. 2022. 356쪽)

: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한강에 몸을 던진 서진. 사후세계라는 곳에 왔는데 이곳은 자살한 사람만이 모이는 곳이다. 각자 목 뒤의 엉킨 붉은 실타래를 달고 있는 이곳 영혼들은 타인과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 스킨쉽을 해야 실타래를 풀고 진짜 안식에 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서진은 처소에 칩거하려는데, 대학 때 연인 건웅과 남편 장준성 또한 이곳에 와 있는 걸 발견한다. 건웅과 장준성과는 건웅이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얽혀 있는 인연. 서진은 건웅과 재회하며 장준성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이 작가는 은근히 잔인한 면이 있다. 자살하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 건가. 죽음 뒤에도 이어지는 인연들이라니, 그냥 악연이지. 어떤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자살을 하면 모든 인연이 끊긴다던데 여기서는 그러기 위해 죽은 뒤에도 온힘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한다.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살려고 아둥바둥 노력해야 하는 게 너무 지겨워서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이후가 이런 세상이라면... 죽음 뒤에도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지만 그걸 위해 죽음 뒤에도 스스로 미끼가 되고 아픔을 견뎌야 한다니, 마냥 속시원하지만도 않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아무리 악행을 저질렀어도 죽음의 방법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사후세계라니. 그저 남들보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빨간 실타래만이 악행의 대가라니...


그래도, 그래도 이건 해피엔딩이다. 이렇게라도 묶은 걸 풀 수 있다면. 



26. 아홉 명의 목숨(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문학동네. 2024. 392쪽)

: 평범해 보이는 9명의 사람들. 사는 곳도, 직업도, 성별과 나이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하얀 종이에 이름만 쓰여 있는 명단을 받는다. 72세 리조트 소유주 프랭크. 아침 산책길에 명단이 놓여 있던 바위 근처에서 바닷물 웅덩이에 목이 눌려 익사당했다. 의부증 아내에게 시달리는 39세 매슈. 아침 조깅 중 뒤에서 총을 맞았다. 이외에도 배우자를 잃고 혼자인 삶을 겨우 꾸려가는 45세 간호사 아서, 명단을 받았지만 연방요원의 연락까지 무시한 무명배우 제이, 명단으로 노래까지 만들고는 명단의 다른 사람들을 찾다가 영문학 교수인 캐럴라인과 연락을 하게 된 이선, 늙은 부자 유부남의 정부 노릇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40세 앨리슨, 과거 쓴 책의 성공으로 컨설턴트로 일하다 은퇴한 70세의 잭, 그리고 FBI요원 제시카.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의 공통점보다는 이 작가의 전작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 떠올랐다. 물론 이 책의 살인은 전작에서처럼 방법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작에서도 살인자의 동기가 키일 거라고 생각했듯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공감은 어려울 거라고 미리 짐작했고 짐작은 맞았다. 사실 어느 작품에서든 연쇄 살인이란 그저 살인자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정당한 살인이라고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살인은 많지 않다. 우리가 살인자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이 책의 살인자의 동기는 일면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그리고 대상을 선택한 이유도 조금은 공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살인자 자신에게도. 어찌됐든 재미는 있었다.



27. 적산 가옥의 유령(조예은. 현대문학. 2024. 212쪽)

: 외증조모는 늘 비밀스러운 저택의 숨겨진 공간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운주는 바쁜 엄마 대신 증조모의 집에서 크다시피 했다. 증조모의 적산가옥에는 뜬금없어 보이는 별채가 있는데, 하반신 마비였던 증조모는 비바람이 치던 밤 그곳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바닥에 귀를 붙이고 엎드린 이상한 자세로. 증손녀 운주에게 집을 남긴 증조모는 서른 살이 되는 해 1년간 이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을 유언장에 남겼고, 일본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운주는 남편과 함께 이 집을 개조하여 카페나 펜션을 운영해 볼 생각으로 이사했는데, 별채에서 운주만 들을 수 있는 쿵쿵 소리가 울린다.


적산가옥의 비밀과 현재의 이야기가 9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차된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모든 악인이 제거된 뒤에 남은 건 그 시간차를 뛰어 넘는 약자들의 연대. 그 모든 비밀들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악인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이 무서운 핏빛 이야기 속에서도 나를 위로해 주었다. 역시 죽은 자보다 더 무서운 건 살아있는 악인.



28. 고요의 바다에서(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강동혁 역. 열린책들. 2024. 376쪽)

: 1912년 피송금인으로 막 캐나다에 온 에드윈. 카이엣에서 허송세월 하던 중 숲의 큰 단풍나무 근처에 갔다가 갑자기 번쩍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거대하고 넓은 공간 안에 들어가는 기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쉬익 하는 소리도 들린다. 2020년 미렐라. 오랜 친구 빈센트의 남편에게 사기를 당한 자신의 남편이 자살하고 몇 년이 흘렀다. 미렐라는 빈센트와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빈센트의 오빠가 하는 콘서트에 가고, 빈센트가 찍었다는 영상을 본다. 커다란 단풍나무를 향해 가다 갑자기 바이올린 소리와 유압기의 쉬익 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돌아오는. 2203년 작가 올리브는 자신의 소설 북투어를 하고 있다. 그 소설에는 오클라호마 비행선 터미널에서 주인공이 바이올린 소리와 비행선 소리를 듣고 어디론가 옮겨지는 장면이 있다.


서로 다른 시간, 공간에 사는 인물들이 한 자리에서 스친다. 이건 기이할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선 아름답다. 찰나의 스침과 얽힘은 고요하지 않지만, 고요하게 읽힌다. 그 잠깐의 시간이 인생을 알게 하고, 인생을 깨닫게 하고, 인생을 완성할 수 있게 한다. 


읽는 동안에는 장 보드리야르의 『Simulacres et Simulation』을 계속 떠올렸다. 이 책은 이 이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 내가 보드리야르를 읽은 지 거의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 이론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는구나, 하며 개스퍼리자크 로버츠와 누나 조이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며 읽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이론따위는 잊혀지고 그들의 찰나의 인연만 기억난다. 



29. 아찰란 피크닉(오수완. 민음사. 2024. 372쪽)

: 도시국가 아찰라 공화국. 가운데에는 특별자치구 헤임이 있고, 그곳은 빛나는 황금색의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헤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종합적합도평가'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아야 하고, 이는 단순히 학업 뿐 아니라 평소의 태도와 인성, 교우관계 등이 모두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된다. 헤임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 자치구에 산다면 언젠가는 아찰이 되어 집을 떠나 아찰의 거리에서 살아야 한다. 몸에 있는 작은 종양들이 언제 폭발하듯 커져서 아찰이 되어버릴 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의 짐을 짊어진 7명의 아이들. 아란, 요제, 네즈, 디본, 카렐, 히에, 이투. 이 아이들은 각자의 짐을 진 채 학교 졸업 직전 마지막 평가인 아찰란 피크닉을 위해 달린다.


너무나 노골적이지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는 비유로 가득한 소설. 알면서도, 뻔하다면서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아이들의 사연도 행동도 다 클리셰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며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그저 아이들 각각의 성장일 뿐이라도 좋았다.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아무 것도 바뀐 건 없고 바뀔 기미도 안 보이지만, 아이들이라도 마음이 자라서, 아이들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보여서 그걸로 됐다. 



30. 슬픔은 날개 달린 것(맥스 포터, 황유원 역. 문학동네. 2020. 176쪽)

: 아내이자 엄마가 죽었다. 이제 두 아들과 아빠만 남은 가정에 까마귀가 들어온다. 조문객들의 과장된 슬픔과 위로에 시달리고, 아내의 흔적이 가득한 집안을 어쩌지 못하는 아빠는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지만 까마귀는 담담하게 삶과 슬픔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달라진 아빠를 받아들인다.


우화 소설은 아니다. 다만 까마귀는 집안을 돌아다니고, 아빠가 문학 작품을, 에밀리 디킨슨과 테드 휴스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아빠와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단지 시간일 뿐이었을 수도 있고, 까마귀가 까마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살아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는 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거.



31. 태어난 게 범죄(트레버 노아, 김준수 역. 부키. 2020. 424쪽)

: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백인 여성/남성이 흑인 여성/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건 불법이다. 그런데 저자 트레버 노아는 흑백 혼혈이다. 엄마의 집이었던 동네에 가도, 백인 구역에 가도 저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할머니는 밝은 피부색을 가진 이 아이를 어떻게 때려야 할 지 모르겠다며 훈육을 포기하고, 백인 아버지와는 함께 걸을 수도 없어서 길 건너편에서 나란히 걷는다. 하지만 저자의 어머니는 주체적으로 아이를 가졌듯 저자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유색인 거리에 집을 구하고, 비서직에 취직을 해가며 저자를 훌륭히 키워낸다.


저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과 인종 차별의 무의미함만을 역설하지는 않는다. 저자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 와중에도 삶은 삶으로서 향유됨을,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렇게 잘 자란 데에는 물론 강인하고 사랑이 넘치는 엄마가 있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았던, 재밌지만 슬프기도 했던 독서였다.



32. 백귀야행(송경아. 사계절. 2020. 224쪽)

:힘겨운 삶의 하루하루들. 그래도 우렁총각의 도움이든, 혹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어깨에 기대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꾸려나간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스스로 내리는 것이고, 상처는 혼자 감당해야하지. 첫번째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작가가 있어야겠지. 마음 아파하며 천천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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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욜로욜로 시리즈
송경아 지음 / 사계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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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를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작가가 있어야겠지. 마음 아파하며 천천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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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 -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트레버 노아 지음, 김준수 옮김 / 부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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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만 우습지 않았던, 재밌지만 슬프기도 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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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날개 달린 것
맥스 포터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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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단지 시간일 뿐이었을 수도 있고, 까마귀가 까마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살아있는 한 삶은 계속된다는 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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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찰란 피크닉 오늘의 젊은 작가 45
오수완 지음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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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노골적이지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는 비유로 가득한 소설. 알면서도, 뻔하다면서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아이들의 사연도 행동도 다 클리셰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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