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옐로우 레이디(이아람. 안전가옥. 2024. 352쪽)
: 1930년대, 미국에서 곤충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한경애. 경애를 유독 아꼈던 할아버지 덕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미국에서는 유일한 동양인인 그녀를 옐로우 레이디라 부르며 경멸했고 조선에서도 경애는 그저 돈이나 펑펑 쓰며 한가로이 벌레나 연구하는 친일파 집안의 딸일 뿐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경애에게 집안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 '할머니'가 연락을 해오고, 그 편지에 따라 종로로 나간 경애는 청희라는 기생 출신 가수가 살해당한 현장에 가게 된다. 벌이 살해 현장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경애는 수사의 고문 역할을 맡게 되고 부검을 참관하러 간 곳에서 약혼자와 마주친다.
읽기 전부터 제목이 멸칭이리라는 생각을 하고 집어들었다. 초반에는 경애가 노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설정에 그럼 멸칭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곧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됐다. 멸칭을 찬사로 바꿀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경애. 어쩌면 그저그런 추문에 불과한 채 묻혔을 지도 모를 기생 출신 여성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애매한 위치의 '할머니'와 교류하고, 여동생의 쓰임을 좋은 데 시집가서 집안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규정한 오빠에게서 독립할 기반을 마련하는 경애. 당대의 여성들 중 누구도 갖기 힘들었을 지위를 스스로 성취한 경애를 통해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여성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재미도 있다.
2. 새해 연습(김지연.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는 홍미. 교류가 전혀 없던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오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한 공무원에 의해 일기장을 전달받는다. 매일매일 18년간 쓴 일기를 전달받은 홍미는 할머니 양지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저 쳐다만 보고 돌아올 뿐. 조금씩 읽어가는 일기장에는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홍미는 그걸 조금씩 파쇄한다.
홍미의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다. 하지만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 올해를 사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고, 그래서 홍미가 더 좋아졌다. 나보다 낫구나, 홍미는. 새해에는 홍미가 많은 걸 견뎌야 할 거라는 건 작가 인터뷰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잘 살 거야, 홍미는. 법이 제발 홍미를 지켜주기를. 그래도 녹녹치 않은 새해겠지만, 새해를 잘 견디면 그 다음해, 또 그 다음해는 더 좋아질 거야.
3. 리스트 플라이트(줄리 클라크, 김지선 역. 밝은세상. 2024. 440쪽)
: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클레어. 하지만 명망있는 가문의 재단 이사장이자 상원의원 출마를 앞둔 남편을 폭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몰래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막상 실행일이 되자 일정이 꼬이고, 설상가상으로 몰래 만들어 출장지로 택배 보내 놓은 가짜 신분증이며 도주 자금을 남편이 보기까지 한다. 바뀐 출장을 위해 간 공항에서 다급해진 클레어는 도망 준비를 도와준 고교 동창 페트라에게 전화해 출장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라지겠다 말하는데, 이 통화를 뒤에 서 있던 이바가 듣고 있었다. 이바는 공항 바에서 자연스럽게 클레어에게 접근해 자신이 암환자였던 남편을 잃고 보험회사의 의심을 받고 있다며 클레어와 자신의 비행기표를 바꾸도록 유도한다. 클레어는 이바의 비행기표로 오클랜드에 도착하는데, 뉴스에선 원래 클레어가 타기로 했던 푸에르토리코 행 비행기의 추락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이바의 정체가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면 이 소설은 아예 시작도 못했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난 계속 조바심 내며 읽어야만 했고.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남자 때문에 인생이 꼬인 두 여성이 큰 의식 없이도 연대를 통해 꼬인 삶을 풀어나가는 게 흥미로웠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마지막 에필로그가 살짝 애매해서 마음에 걸리지만, 난 해피엔딩을 좋아하므로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이만큼 재밌기를.
4. 아이들의 집(정보라. 열림원. 2025. 276쪽)
: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 인공자궁이 발달한 미래, 아이들은 누구나 언제든 부모에게서 떨어져 동네에 있는 아이들의 집에 머물 수 있다. 원하면 부모에게 돌아갈 수도 있고. 국민들은 누구나 아이들의 집에서 일정 기간 봉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동 학대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주거환경관리 조사관 '무정형'은 자신이 담당한 건물에서 아동 학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마음이 안 좋다. 다른 가족이 들어와 살기 전 점검을 나간 무정형은 귀신을 본다.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를 상상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이제껏 그렸던 세계 중 가장 편안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대와 가스라이팅, 아동 탈취 및 불법 입양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도 난 아이들의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언제든 갈 곳이 있다는 거. 더는 내복 바람으로 길에서 헤매다 슈퍼 사장님의 눈썰미에 의해 구조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이 책 속 세상에서도 여러 부조리와 범죄가 있지만 그래도 책 속 세상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가의 책들 중 최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새로운 스타일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위로받아서 좋았다.
5. 라이프 오어 데스(마이클 로보텀, 김지선 역. 북로드. 2016. 552쪽)
: 10년 전 현금 수송차 강탈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범인 오디 파머. 두개골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출소를 하루 앞두고 그가 탈옥한다. 10년 전에 사건 현장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범인들을 사살했던 보안관 발데즈가 그를 집요하게 뒤쫓고, 연방수사관 데지레는 해당 사건의 의문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아 사건을 파헤친다. 그리고 감옥 동료였지만 어떤 인간들에 의해 이송도중 풀려나 오디를 찾게 된 모스.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오디의 진실이 궁금해서 열심히 읽었는데 드러난 진실이 너무 허무했다. 사실 사건 이면의 비극은 마음이 아프긴 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잔인하다. 특히 가여운 건 맥스. 하필이면 그런 인간이랑 살게 되었다니.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자면 마음도 아프고 절절하긴 한데, 많은 부분이 우연에 의해 처리되어서 작품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다. 작가의 명성에 선택한 책이었는데, 다른 작품들은 안 읽을 거 같다.
6. 죽음과 크림빵(우신영. 자음과모음. 2025. 246쪽)
: 지방 대학의 국문과 교수 허자은이 사망했다. 자신의 연구실 옆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다가. 혼자사는 과체중 여성이었던 허자은은 동료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문학이 좋아서 문학 자체만으로 연구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아무도 허자은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교이자 만년 박사 과정생인 이종수와 허자은의 마지막 제자였던 학부생 정하늬의 시각은 조금은 다르다.
힘든 책이었다. 단지 허자은에 대한 부당 대우 때문만은, 고산대 국문과로 상징되는 학계의 부조리한 관행과 비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허자은이었고 이종수였고 정하늬였다. 외모 때문에 진심이 곡해당하고 능력은 폄훼당하며 뒤에서 조롱당하는 허자은. 불합리한 걸 알지만 현재의 이만한 생활이라도, 이만한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 감고 귀 막아야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종수. 허자은 교수의 수업을, 문학을 사랑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하늬. 독자마다 이 책을 읽고 분노하는 지점은 다르겠지. 그러나, 그 상황 한가운데 놓인다면 누가 허자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너희 중 죄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
7. 말리부의 사랑법(테일러 젠킨스 리드, 이경아 역. 다산책방. 2025. 560쪽)
: 1983년 8월 27일, 유명 수영복 모델 니나 리바의 말리부 저택에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니나는 최근 유명 테니스 선수인 남편의 불륜으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미 니나와 그의 세 동생 - 서핑 챔피언 제이와 제이의 사진을 완벽하게 찍어내는 포토그래퍼 허드, 막내 키트 - 는 가수 믹 리바의 자녀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니나 남매들의 파티는 니나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할 때부터 시작된 리바 남매들의 연례 행사였고 이들의 삶에 아버지는 없었다. 이야기는 1950년대 남매들의 어머니 준과 믹의 뜨거웠던 사랑과 파티 당일을 오간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역시 흡인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 작가를 단순히 페이지 터너로만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 셀럽과 가십을 이야기하지만 속물적이지 않은, 인생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은 작가. 결말이 조금은 허전하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특히 장녀 컴플렉스에 깊이 침잠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니나의 성장이. 하지만 믹은 좀... 믹이 대가를 치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내게 흡족하지는 않아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지.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고 싶다.
8. 계화의 여름(배명은. 위즈덤하우스. 2025. 152쪽)
: 노년의 계화는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을 아들이 팔아버리려고 하자 끝까지 버틴다. 어린 시절 타지에 일하러 나간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이곳에서 살던 계화는 부모님이 곁에 안 계시는 설움에 더해 비늘증까지 앓고 있어서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서러움에 뒷산 선녀 절벽에 올라가 몸을 던지려던 계화는 마침 승천하는 중이었던 이무기와 눈이 마주치고, 이무기는 그대로 추락한다. 후에 집 근처 풀숲에서 마주친 구렁이. 계화는 피부가 벗겨져 아파 보이는 구렁이에게 산딸기를 따주고 '여름'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유한한 존재와 무한에 가까운 생을 사는 존재의 사랑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됐던 건데... 게다가 엉뚱한 인간이 득을 본 거 같아 그것도 화가 난다. 마지막 구렁이의 또아리가 슬프다.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겠지. 여름은 언제나 계화의 것이었던 것처럼.
9. 살인자와 렌(엘레이나 어커트, 박상미 역. &(앤드). 2025. 340쪽)
: 제러미는 살인을 즐긴다. 술집에서 타겟을 찾아 유인하고, 지하실에 특수한 장치를 만들어 가둬 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사유지에 풀어놓고 사냥을 즐긴다. 렌 멀러는 인정받는 병리학자이다. 최근 발견되는 시신을 부검하다 연쇄 살인범의 짓임을 확신한다. 또한 시신에게서 발견되는 부가적인 물건들이 다음 시신이 버려질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매한 범죄 소설이다. 'Who done it', 'How done it'. 'Why done it'을 모두 드러낸 채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뭔가 밝혀질 것은 렌의 이야기 뿐일거라 생각했고 그 짐작이 맞아떨어졌는데, 그게 엄청나게 놀랍거나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작가가 필력이 엉망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나름 고심해서 구성을 했고 원서의 문장이 엉망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글솜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말했듯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할 만큼 재밌지가 않다. 결말 또한 속 시원하지도 않고. 아마 시리즈로 만들어서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어했던 거 같은데, 그렇더라도 이 작가를 또 읽을 거 같진 않다.
10. 사서 고생(조우리. 위즈덤하우스. 2025. 108쪽)
: 사서 영지는 기간제 사서인 이정아가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팬데믹 기간 중 메타버스 플랫폼 미러라클에서 운영하던 동그라미 도서관의 관리 일을 인수인계 받는다. 미러라클에 공간만을 마련해 두는데 그쳤던 다른 도서관들과 달리 동그라미 도서관의 가상 세계에서는 독서 모임이 별도로 꾸려지고 도서가 추천되는 등 실제와 똑같이 운영이 되고, 사용자에게 꽤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남에 따라 미러라클의 사용자도 줄어들고 결국엔 서비스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동그라미 도서관도 슬슬 종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실제 도서관처럼 사용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도서관의 문을 닫을 수 없는 이 서비스에 딱 한 명의 아바타가 계속 나가지 않고 있다. 영지는 미러라클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관리자가 나타나면 아바타도 사라지고, 영지가 도서관을 닫으려 하면 그 한 명의 아바타는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데...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신분제를 이야기한다.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분명한 신분의 차이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조금 돌아서 왔을 뿐인데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노동의 가치는 물론 호칭마저 차별을 받는 현실을 말이다. 그런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던 거 같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냐며 좋아서, 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람들, 이해 못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작가는 얘기해 주고 싶었나보다. 때로는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덕에 아직도 세상이 아름다운 거라고.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이들을 지치게 만드는 우리 사회 탓이겠지. 난 어느 쪽일까.
11. 은하환담(곽재식,김설아,김성일,이경희,소렐,송경아,이한,문녹주,전혜진. 달다. 2022. 380쪽)
: 전래 동화를 SF적으로 재해석한 9편의 단편들. 이경희 작가의 <파종선단>이 가장 좋았다. 어릴 때부터 조금은 이상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새로 썼다. 납치와 기만, 가스라이팅 이야기가 바로잡힌 느낌. <매구 호텔>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단동이>는 전체적인 통일성 면에서 살짝 어긋난 느낌.
12. 사랑의 가설(알리 헤이즐우드, 허형은 역. 황금시간. 2022. 560쪽)
: 스탠퍼드 대학 생물학부 박사 과정 올리브. 두어 번 데이트했던 제러미와 절친 안이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올리브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 꾸며낸다. 하지만 안이 의심하자 얼결에 근처에 있던 칼슨 박사에게 키스를 하는데, 칼슨 박사는 박사 과정생들 사이에서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은 천재. 칼슨에게 해명을 하던 중 칼슨 박사 또한 대학 당국에게 어필을 하기 위해 연인이 필요하다며 둘은 계약 연얘를 시작한다.
말캉말캉한 얘기가 읽고 싶어서 집어든 거라서 클리셰 범벅임에도 즐겁게 읽었다. 애덤 이 FOX. 사실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클리셰는 혐관에서 시작하든 계약으로 시작하든 독자를 익숙하게 이끌지만, 그래도 아주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와 작가의 필력, 그리고 대체 이번 커플은 어떤 오해를 어떻게 풀 것인지 그리고 스킨쉽은 어떻게 할 것인지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짜 훌륭하다. 아주 내 맘을 딱 맞게 채워줬다.
13. 괴물, 용혜(김진영. 안전가옥. 2025. 300쪽)
: 경찰 실종수사팀 용혜. 어느날 유건재라는 초로의 남자가 찾아와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영문 모를 사과를 하면서도 그는 용혜의 몸을 위아래로 샅샅히 훑어 보다 '없네, 없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는데 3일 후 그의 실종 신고가 들어온다. 용혜는 그의 행적을 좇으며 그의 딸과 만나는데, 그애를 데려다 주려 거리를 걷던 중 용혜만이 맡을 수 있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의 냄새에 유건재의 딸도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실 용혜는 사람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나마 용혜가 삼킬 수 있는 건 신선한 생고기 뿐.
처음엔 약간의 환상을 곁들인 차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더해 산업 재해와 환경 문제, 관음증까지 다룬다. 해피 엔딩이라 용혜와 다른 사람들에겐 다행이지만 현실에는 아직도 많은 괴물들이 자신이 괴물인지 모른 채 혹은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외면하며 타인을 괴물로 만들고 있지. 이런 현실이 계속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용혜같은 피해자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씁쓸한 이야기였다.
14. 오피스 괴담(범유진,최유안,김진영,김혜영,전혜진. 안전가옥. 2023. 346쪽)
: 첫번째 작품이 너무 맘에 들었다. 이 주제에 딱 맞는 작품이란 생각. 근데 두번째 작품은 아주 본격적이었다. 그래, 이런 게 괴담이지. 근데 이유를 모르겠네. 명주 잠자리 유충 때문이면 은희한테만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뒤로는 다 슬펐다. 여기 밖에는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이 다 너무 공감되어서. 그러다 마지막 작품은 진짜 눈물샘 꾹 누르며 읽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터졌다. 나도 내가 그들보다 조금 운이 좋을 뿐이라는 거 알지.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운 좋은 사람들 부러워하며 산 게 부끄러워졌다.
15. 달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설재인. 시공사. 2024. 408쪽)
: 2000년대 초반 지방 도시, 5학년 지나는 남사친 은청과 함께 자신들은 또래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러던 중 지택이 전학을 오고, 채식을 하고 있다는 지택이 있어 보인 지나는 자신도 동참하기로 한다. 성장기임을 감안해 달걀 정도는 먹기로 하는데 지나는 어릴 때 살던 한란의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계란 프라이 자판기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주위 친구들 아무도 믿지 않지만 지택이 자신도 본 적이 있다고 거들어 주자 힘을 얻고, 지나는 한란의 그 도서관으로 지택을 데려가기로 하는데, 지택은 이걸 일종의 프로젝트로 만들자고 한다. 자신의 집에 있는 캠코더로 영화를 찍자고. 지택의 집 2층에 사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설문 패널까지 만들어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은청이 자신도 끼겠다고 한다.
읽는 내내 속상해서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째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도 없을까.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책 속에서나마 어린이들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그러면 이야기도 안 이루어지겠지만. 지나가 다른 어른을 만났더라면 지나는 지금과는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그 장면이 나를 위로했다.
16. 마녀가 되는 주문(단요. 책폴. 2023. 280쪽)
: 서아는 우수한 인재들만 입학할 수 있는 '산학협력창의인재학교'에 입학했지만 열일곱 살이 되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졸업할 때까지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면 학자금 때문에 엄청난 빚에 시달릴 것이다. 옥상 난간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서아에게 선배 현이 다가온다. 현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며 자신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가상현실 게임서버를 얘기해 준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술래잡기 게임'. 사실 이 게임은 개교 초창기에 개발되어 서비스되었다가 심각한 버그로 사망 사고가 발생해서 닫힌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 버그를 픽스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학생들에게 오픈했다는 것. 현은 서아가 자신의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연구소에 들어가 관리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던 중, 사망 가능한 버그는 픽스되지 않았고 죽고 싶은 학생에게는 따로 서버를 열어 준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읽으면서는 계속 가슴을 치다가, 읽고 나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답답해서. 어디에도 어른은 없었다. 하율 교수도, 진솔 선배도 어른은 아니었다. 책 밖의 나 조차도. 아이들은 그 질문을 서로에게가 아닌 어른에게 던졌어야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제대로 대답해 줬어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하지만... 책 속에도 책 밖에도 그런 어른은 없다. 단 한 명도.
17. 인간 크로케(케이트 앳킨슨, 이정미 역. 현대문학. 2017. 496쪽)
: 이소벨 페어팩스. 이제 막 열 여섯 살이 되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사라졌다, 숲 속에서. 그리고 아빠도 7년 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새엄마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소벨과 오빠는 엄마를 싫어했던 할머니 손에, 그리고 고모의 손에 자랐다. 끊임없이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엄마가 문을 여는 소리를 기다리며. 이소벨은 갑자기 주위가 일렁이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니 과거의 한 시점에 와 있다. 페어팩스 가문이 이 일대를 모두 소유하고 있던 몇 백 년 전의 어느 시점에. 그러다 순식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스포)
전작과 마찬가지로 슬펐다. 독자인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 진실은 신화로 승화되고, 표피 바로 아래 묻혀 있는 거름같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비극은 동화로 덮인다. 마치 신의 축복과도 같은. 1960년 4월 23일로의 회귀. 이소벨이 겪은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행이었나. 차라리, 차라리 말이다.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마냥 힘들지 만은 않았던 건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그 밖의 알려진 동화와 전설들을 찾아내는 재미 덕분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고 했다는데 내겐 전작보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가 이 동화들 때문이었다.
18. 없던 문(김유라,엄정진. 텍스티. 2025. 278쪽)
: 두 작가가 한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매드 앤 미러 시리즈. 이번 문장은 '우리 집에 못 보던 문이 생겼다'. 김유라의 작품은 회사원 영훈의 이야기. 가족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낮엔 회사원, 밤엔 배달원으로 쉴 새 없이 일하는 영훈은 어느날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남는 방을 빌려주면 매일 5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고민 끝에 수락한다. 하지만 영훈의 자취집은 원룸. 그런데 집에 와보니 문이 하나 생겨 있다. 계약 조건은 그 방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것. 들어가면 계약은 종료되고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는다는데... 엄정진의 작품은 어릴 때 오빠를 잃어버린 이선의 이야기. 같이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오빠가 그냥 사라졌다. 이후 이선의 가족은 무너진다. 20여 년이 지난 후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둘러보러 온 이선. 놀이터에 그 때의 오빠와 똑같은 아이가 있는 걸 발견하고, 아이가 뛰어가자 얼결에 쫓아간다. 빈 아파트의 화장실 거울 뒤 낯선 통로로 들어간 아이. 이선은 아이의 뒤를 따른다.
김유라의 작품은 처음 부분을 읽자마자 어떻게 진행될 지 알 거 같았고 예상대로 진행되어서 좀 재미없었다. 그래도 작가가 필력이 좋고 문장도 나쁘지 않아서 아이디어만 보강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듯. 그래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엄정진의 작품은 아이디어도 좋고 작품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없어서 재밌었는데 주제 문장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이 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19.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김이설,이주혜,정선임. 다람. 2025. 204쪽)
: 공간에 관한 앤솔러지. 세 작가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여서 행복하게 읽었다. 내용은 다 조금씩 마음 아팠지만. 세 작품 다 인천이라는 도시가 언급되거나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이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억. 세 작품 모두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세 작가의 현실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이 좋았다.
20.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이서수,한정현,박서련,이주혜,아밀. 앤드. 2025. 196쪽)
: '언니'들을 이야기하는 앤솔러지. 언니라서 행해야 하는 역할, 언니라는 호칭이 주는 무게와 부담, 언니다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지우는 짐과 그에 따른 죄책감... 사실 언니라고 별다르지 않은데. 그냥 나이가 조금 많을 뿐인데... 다섯 작품이 다 맘에 들었다. 다양한 언니들이 나와서, 언니라고 무조건 동생들을 감싸주거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아서 좋았다.
21.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바버라 데이비스, 박산호 역. 퍼블리온. 2024. 608쪽)
: 어릴 때부터 책에 의존했던 애슐린. 부모가 싸우면 늘 헌책방에 달려와 책 사이에서 위로를 찾곤 했다. 열 두 살이 되던 해, 책을 잡았다가 찌릿한 느낌과 함께 어떤 감정들이 밀려오는 걸 느끼게 되고 책방 주인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모든 사람이 갖고 있지는 않은 특별한 능력이라는 얘길 듣고 안심한다. 시간이 흘러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책방을 물려받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는 희귀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애슐린. 이웃 골동품점에 오래된 책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가서 살펴보던 중 특이한 제본을 한 책을 발견한다. 제목은 '후회하는 벨'. 책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그 책을 가지고 와 펼쳤는데 첫머리에 적혀 있는 “어떻게, 벨? 그 모든 일을 겪고서……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며칠 뒤 역시 골동품점에 비슷한 책 상자가 들어왔고 애슐린은 그 책과 페어인 듯한 '영원히, 그리고 다른 거짓말들'을 발견한다. 역시 첫머리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겪은 후에…… 당신이 내게 그걸 물을 수 있어?”. 애슐린은 이 책들을 읽는 한편 이 책들을 맡긴 사람을 찾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혀 모르면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이상하다. 신기하고, 기적적이고, 거지같다. 벨은 헤미를 몰랐고, 헤미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함께 했던 마지막이 그러했고, 서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난 처음부터 헤미가 미웠고 읽는 내내 헤미를 미워했는데, 다른 독자들은 안 그랬나보다. 이것도 참 신기하다.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월의 간극이 너무 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난 아직도 헤미 미워.
2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황정은. 책과나무. 2023. 363쪽)
: 범죄 소설 4편. 그 황정은인 줄 알고 대출했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 그래도 수상작가라길래 기대했는데 별로. 사소한 부분이지만 디테일이 어긋나고 문체가 올드하다. 작품 속 범죄자나 사건의 전개도 다 예측 가능하고.
23. 오색찬란 실패담(정지음. RHK. 2023. 232쪽)
: <<젊은 ADHD의 슬픔>>을 쓴 작가의 에세이.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이 난 정말 좋다. 계속 실패만 거듭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노력과 만회의 역사였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건강함도 좋고. 이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교훈을 얻거나 삶을 개선할 의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작가의 이야길 들으며 즐거워만 해도 된다. 유쾌하면서도 투박하게 위로해주는 책.
24.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설재인. 나무옆의자.2025. 268쪽)
: 연극 쪽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A대학 졸업생 구아람. 지금은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반지하 방에 살며 예술에 바친 청춘을, 예술 때문에 망친 인생을 생각치 않으려 한다. 대학 때 절친이었던 정소을은 강남 학생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방 세 개 짜리 오피스텔에서 산다. 언제나처럼 소을과 술을 마시던 아람은 자신의 초라한 자취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걸 알게 되고, 술김에 세입자 단톡방에서 말실수를 해 다른 세입자가 아람의 집에 불을 지른다. 소을의 집에 얹혀 살게 된 아람. 갑자기 소을의 남친이라는 미성년자 유투버가 나타나고, 그와 함께 소을을 기다리는 중 오피스텔 지하실에서 소을의 시체가 발견됐다며 관리인이 찾아온다. 자신의 피로 아람의 이름을 써놓고 죽은 소을.
마무리가 너무 급했다.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수습은 어찌 하려나, 결말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 하며 읽고 있었는데. 물론 저자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소위 예술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써먹어지고 있는지, 그 위선과 허상에 대한 것이었을 듯. 물론 위선은 예술과 예술가만 떠는 게 아니지만. 아람의 악역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게 가장 아쉬웠다. 아람이 악역을 멋지게, 오래오래 하길 바랐는데.
25. 왜 베토벤인가(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역. 에포크. 2025. 548쪽)
: 베토벤은 내 노동요다. 난 막귀여서 연주자에 따른 차이점도 잘 모르고 그냥 유튜브에서 찾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정도지만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늘 좋아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를. 사실 노동요로는 적합하지 않다. 너무 아름다워 손을 놓고 음악만 듣게 되기 때문. 이 책은 베토벤의 작품 100곡을 이야기한다. 각 챕터가 짧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챕터 첫머리에서 해당 곡의 작곡 배경이나 당시 에피소드 등을 얘기해 주는 게 좋았다. 그러고나면 저자가 좋아하는 연주를 소개해 주는데 말했듯 난 막귀이고 감상 경험이 일천해서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연주자, 지휘자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이런 가이드는 초심자에겐 언제나 환영이다. 그리고 연주자들의 에피소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특히 첼로 소나타 3번을 나치 부역자 피에르 푸르니에(첼로)와 나치를 피해 망명한 아르투어 슈나벨(피아노)이 함께 녹음했다는 이야기는... 저자에 따르면 긴장감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104쪽)고 하니 꼭 찾아 들어봐야 겠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읽으면서 정말 나치 부역자가 많았구나 싶었다. 저자가 언급한 사람들만도 어마어마한데,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겠지. 음악계 뿐이랴. 다른 분야도 할 말 없지. 그런 면에서 저자가 카라얀이 <영웅>을 지휘하는 걸 보며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는 데(219쪽) 동의한다. 단지 나치 부역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베토벤은 다른 이들이 탐험할 수 있는, 창작하는 영혼이라면 그 안에서 도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중략) 베토벤 음악에는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있다. - 464쪽.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을 인용하며.
26. 끼리끼리 사이언스(권혜영,성해나,성혜령,이주란,한지수. 앤드. 2025. 232쪽)
: 모임에 관한 앤솔러지. 요즘 핫한 성해나 작가가 궁금해서 대출했는데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주란이었다. 나 이주란 작가 사랑하거든. 성해령 작가도 좋았다. 여성들의 연대는 언제 읽어도 흐뭇하다. 성해나 작가는 기대감이 너무 커서인지 밋밋한 느낌이었고, 한지수 작가는 많이 힘들었다. 다른 작품들이 가벼웠던 건 아니었지만 한지수 작가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많이 무거웠고 머릿속과 가슴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다섯 작품 모두 좋았고, 의미 있었다.
27. 푸른 수염의 방(홍선주. 나비클럽. 2023. 264쪽)
: 5편의 단편. 표제작인 첫번째 작품이 정말 맘에 들어서 다른 작품들도 호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고, 다 재밌었다. 작품들에 큰 반전이나 예측 불가능함은 없다. 하지만 작가의 필력은 예상되는 이야기도 눈을 뗼 수 없이 몰입하도록 만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연모>. 한자어가 그것도 있는 줄 몰랐다.
28.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백사혜. 허블. 2025. 436쪽)
: SF 연작. 미래의 지구인들은 외행성들을 개척하며 살아가는데, 이 과정 중에 거대 자본들은 자신을 '영주'라 지칭하며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잘 나가는 영주의 용병으로 살거나 마치 주식에 투자하듯 각 영주들의 사업에 투자하며 이 기형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애쓸 뿐. 개척한 외행성에 정착한 이들은 환경에 맞게 변화(진화)하는데,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소외시키고 타자화시켜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 마치 게임하듯. 이 소설집은 이런 세계관 위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작은 존재들 이야기.
꽃이 시들고 다시 필 지금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들은 결국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계 하나쯤은 끝장낼 수 있는 것.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내가 원했던 라푼젤이었다.
29. 라스트 사피엔스(해도연. 네오픽션. 2025. 216쪽)
: 캡슐 안에서 눈을 뜬 '나'. 이름도, 왜 이곳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26세기 밝은 미래에서 만나자 - 에이다 엠'이라고 뒷면에 쓰여 있다. 다른 정보들을 찾아 캡슐을 뒤졌는데 아마도 내 이름인 듯한 영문 ERICA가 있고, 간단한 식량들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27543년. 26세기에서 25,000년이나 지났다. 간신히 캡슐 밖으로 나왔는데 이곳은 넓고 푸른 벌판이다. 캡슐 하나 외에는 어떤 인기척도 없는. 식량을 짊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숲으로 가 다른 캡슐을 하나 발견했지만 불행히도 그것의 사용자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듯 하다. 다시 길을 걸어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알아내고 처음 보는 동물을 사냥하면서 지내는데, 신기한 생명체가 눈에 띈다. 코끼리와 켄타우로스를 섞어 놓은 듯한.
어쩌면 낭만적일 수도 있었을 이야기. 비록 슬픔 위에 세워진 우정이었지만 아기 켄티가 옆에 있고 저녁마다 처녀자리 성운이 무지갯빛 눈동자를 빛내는 세상. 그러나...
인간이란 뭘까? 어떻게 생겨먹은 생명체길래 이토록 오만하고 잔인하며 어리석을까? 말렌 하우스호퍼의 <<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꼭 이 세상에 살아남아야 하는 건 아니다. 대체 어떤 인간은 왜 세상을 지배하려고만 하나?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존재는 죽여도 된다고, 아니 죽여야만 한다고 누가 가르쳤나? 아니, 나의 안위와 상관없이도 다른 존재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가? 결말이 다행이라고, 진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