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두 루푸는 말이 없다 - 침묵의 피아니스트를 그린 20가지 데생
이타가키 지카코 엮음, 김재원 옮김 / 봄날의책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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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난 집에 있을 땐 케이블 TV의 클래식 채널을 라디오처럼 늘 틀어두는데, 조성진이 흐루샤 야쿠프 지휘로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하는 실황이 방영되고 있었다. 문득 조성진이 각 프레이즈 끝에서 루바토를 꽤 길게 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게 흐루샤 야쿠프를 만나 평소의 스타일이 더 크게 드러난 건지 궁금해졌다. 야쿠프는 내게 생소한 지휘자였기에 그에 대한 정보도 궁금해져서 챗GPT에게 질문을 던졌고, 조성진과 야쿠프에 대해, 이어서 2악장과 3악장의 해석 변화에 대해 얘기하다가 챗GPT는 내 해석- 2악장은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 3악장은 수량이 풍부한 강물 - 에 흥미를 보이며 여러 피아니스트+지휘자+오케스트라 조합을 추천해 주었다. 마침 주말이었기에 나는 이틀에 걸쳐 모든 조합들을 찾아 들었고 챗GPT와 계속 수다를 떨며 나 나름대로의 황제 지도를 만들었다(TMI이지만 1악장은 에밀 길렐스 피아노+조지 셀 지휘+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2악장은 조성진 혹은 마우리치오 폴리니 피아노+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3악장은 빌헬름 켐프 피아노+페르디난트 라이트너 지휘가 내 취향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챗GPT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피아노+레너드 번스타인 지휘+빈 필하모닉을 추천해 주었다.


바빠서 못 듣고 있다가 지메르만+번스타인을 들었고 역시나 명불허전이구나, 예전에도 분명 듣기는 들었을 텐데 왜 그땐 허투루 들었을까 싶었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소소하게 맘 상하는 일이 있었고, 난 갑자기 예전부터 좋아했던,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기에 바빠서 등한시했던 라두 루푸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의 황제를 찾아 프란츠 벨제뫼스트+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를 듣고 새삼 깨달았다. 돌고 돌아 결국 첫사랑에게 다시 왔구나.


라두 루푸는, 조금 과장이기는 하지만 내 첫사랑이다. 내가 처음으로 연주자의 이름을 인지하게 한 피아니스트이고,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마다 해석이 다르다는 걸 알게 한, 내 취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게 한 음악가이다. 그의 섬세한 피아니즘은 늘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침묵의 피아니스트이다. 인터뷰는커녕 녹음조차 싫어했다. 연주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짐작되었지만 나중에 책 내용에서도 알려지듯 연주회를 즐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황 녹화도 음반도 극히 드물다.


이 책은 라두 루푸의 일본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그를 전담하여 일했던 이타카키 지카코가 라두 루푸를 알았던 20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거나 그들에게서 글을 받아 엮은 책이다. 그와 함께 공부하거나 연주했던 음악가뿐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조성진과 같은 후배들, 그의 아내들, 그리고 그를 가까이 지켜봤던 매니저와 조율사 들이 그에 대해, 그 선했던 성품과 음악에 대한 사랑과 경외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히 팬이라면, 아니 팬이 아니더라도 흥미로울 일화들이 많다. 미샤 마이스키가 말한, 많은 곡들의 악보를 연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암기하고 있었다거나 다니엘 바렌보임과 첫 화음이나 음만 듣고 곡 맞히기놀이를 했다는 일화라든지, 라두가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을 때, 연주가 끝나고 무대 뒤로 갔더니 알프레트 브렌델이 라두 앞에서 울고 있는 걸 목격한 제시카 나스미스와 로빈 럭의 이야기, 그리고 라두가 연주하는 <<네 개의 발라드>>의 네 번째 발라드를 듣고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워 귀를 의심하고, 이후 열흘간 피아노 앞에 앉을 수도 없었다던 루크 거스리의 일화 등은 그의 천재성을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했다. 철저히 겸손해서 신랄한 자기비판을 하든지 과장스럽게 타인을 칭찬했다(155). 뿐만 아니라 연주회 전에는 늘 불안해 했다. 자신이 음악을 망칠까 봐. 심지어는 도망치고 싶어하기도 했다.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음악에만 매몰된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첫 부인에 따르면 그는 유머 감각이 좋아 늘 눈을 반짝였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경우는 드물었고, 축구와 체스를 비롯해 다양한 게임을 음악원 시절부터 즐기곤 했다 한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인터뷰와 에세이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건, 라두의 성품이 정말 훌륭했다는 점이다. 불안하고 힘들 때에도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타입이었던 걸로 보인다.


그 동안 다른 음악가를 듣느라 라두를 외면했던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동안은 그의 음악만 들었다. 특히 그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이걸 음반을 구하지 않고도 들을 수 있다니 난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참고로 늘 자기 연주에 불만족했던 라두도 이 프로젝트가 끝나고는 흡족해 했다고 한다.


책을 덮은 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라두가 조성진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했다는 말이다. 내가 저 아이의 나이에 저만큼 다양한 악보를 접할 수 있었더라면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그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하는 맘이 들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나 위대한 음악가는 있어왔고 음악이란 취향이 갈리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난 감히 그의 음악을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내 첫사랑이에요, 나의 귀를 열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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