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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옐로우 레이디(이아람. 안전가옥. 2024. 352쪽)

: 1930년대, 미국에서 곤충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한경애. 경애를 유독 아꼈던 할아버지 덕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미국에서는 유일한 동양인인 그녀를 옐로우 레이디라 부르며 경멸했고 조선에서도 경애는 그저 돈이나 펑펑 쓰며 한가로이 벌레나 연구하는 친일파 집안의 딸일 뿐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경애에게 집안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 '할머니'가 연락을 해오고, 그 편지에 따라 종로로 나간 경애는 청희라는 기생 출신 가수가 살해당한 현장에 가게 된다. 벌이 살해 현장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경애는 수사의 고문 역할을 맡게 되고 부검을 참관하러 간 곳에서 약혼자와 마주친다.


읽기 전부터 제목이 멸칭이리라는 생각을 하고 집어들었다. 초반에는 경애가 노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설정에 그럼 멸칭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곧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됐다. 멸칭을 찬사로 바꿀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경애. 어쩌면 그저그런 추문에 불과한 채 묻혔을 지도 모를 기생 출신 여성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고 애매한 위치의 '할머니'와 교류하고, 여동생의 쓰임을 좋은 데 시집가서 집안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규정한 오빠에게서 독립할 기반을 마련하는 경애. 당대의 여성들 중 누구도 갖기 힘들었을 지위를 스스로 성취한 경애를 통해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여성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재미도 있다. 



2. 새해 연습(김지연. 위즈덤하우스. 2025. 120쪽)

: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는 홍미. 교류가 전혀 없던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오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한 공무원에 의해 일기장을 전달받는다. 매일매일 18년간 쓴 일기를 전달받은 홍미는 할머니 양지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저 쳐다만 보고 돌아올 뿐. 조금씩 읽어가는 일기장에는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홍미는 그걸 조금씩 파쇄한다. 


홍미의 많은 부분이 공감되었다. 하지만 새해를 잘 맞이하기 위해 올해를 사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고, 그래서 홍미가 더 좋아졌다. 나보다 낫구나, 홍미는. 새해에는 홍미가 많은 걸 견뎌야 할 거라는 건 작가 인터뷰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잘 살 거야, 홍미는. 법이 제발 홍미를 지켜주기를. 그래도 녹녹치 않은 새해겠지만, 새해를 잘 견디면 그 다음해, 또 그 다음해는 더 좋아질 거야. 



3. 리스트 플라이트(줄리 클라크, 김지선 역. 밝은세상. 2024. 440쪽)

: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클레어. 하지만 명망있는 가문의 재단 이사장이자 상원의원 출마를 앞둔 남편을 폭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몰래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막상 실행일이 되자 일정이 꼬이고, 설상가상으로 몰래 만들어 출장지로 택배 보내 놓은 가짜 신분증이며 도주 자금을 남편이 보기까지 한다. 바뀐 출장을 위해 간 공항에서 다급해진 클레어는 도망 준비를 도와준 고교 동창 페트라에게 전화해 출장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라지겠다 말하는데, 이 통화를 뒤에 서 있던 이바가 듣고 있었다. 이바는 공항 바에서 자연스럽게 클레어에게 접근해 자신이 암환자였던 남편을 잃고 보험회사의 의심을 받고 있다며 클레어와 자신의 비행기표를 바꾸도록 유도한다. 클레어는 이바의 비행기표로 오클랜드에 도착하는데, 뉴스에선 원래 클레어가 타기로 했던 푸에르토리코 행 비행기의 추락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이바의 정체가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면 이 소설은 아예 시작도 못했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난 계속 조바심 내며 읽어야만 했고.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남자 때문에 인생이 꼬인 두 여성이 큰 의식 없이도 연대를 통해 꼬인 삶을 풀어나가는 게 흥미로웠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면 좋겠지만... 마지막 에필로그가 살짝 애매해서 마음에 걸리지만, 난 해피엔딩을 좋아하므로 내 방식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이만큼 재밌기를.



4. 아이들의 집(정보라. 열림원. 2025. 276쪽)

: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 인공자궁이 발달한 미래, 아이들은 누구나 언제든 부모에게서 떨어져 동네에 있는 아이들의 집에 머물 수 있다. 원하면 부모에게 돌아갈 수도 있고. 국민들은 누구나 아이들의 집에서 일정 기간 봉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동 학대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주거환경관리 조사관 '무정형'은 자신이 담당한 건물에서 아동 학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마음이 안 좋다. 다른 가족이 들어와 살기 전 점검을 나간 무정형은 귀신을 본다.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를 상상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작가가 이제껏 그렸던 세계 중 가장 편안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학대와 가스라이팅, 아동 탈취 및 불법 입양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도 난 아이들의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언제든 갈 곳이 있다는 거. 더는 내복 바람으로 길에서 헤매다 슈퍼 사장님의 눈썰미에 의해 구조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이 책 속 세상에서도 여러 부조리와 범죄가 있지만 그래도 책 속 세상은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작가의 책들 중 최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새로운 스타일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위로받아서 좋았다.



5. 라이프 오어 데스(마이클 로보텀, 김지선 역. 북로드. 2016. 552쪽)

: 10년 전 현금 수송차 강탈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범인 오디 파머. 두개골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출소를 하루 앞두고 그가 탈옥한다. 10년 전에 사건 현장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범인들을 사살했던 보안관 발데즈가 그를 집요하게 뒤쫓고, 연방수사관 데지레는 해당 사건의 의문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아 사건을 파헤친다. 그리고 감옥 동료였지만 어떤 인간들에 의해 이송도중 풀려나 오디를 찾게 된 모스. 이들의 이야기가 과거와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오디의 진실이 궁금해서 열심히 읽었는데 드러난 진실이 너무 허무했다. 사실 사건 이면의 비극은 마음이 아프긴 했다. 하지만... 인생은 참 잔인하다. 특히 가여운 건 맥스. 하필이면 그런 인간이랑 살게 되었다니.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자면 마음도 아프고 절절하긴 한데, 많은 부분이 우연에 의해 처리되어서 작품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다. 작가의 명성에 선택한 책이었는데, 다른 작품들은 안 읽을 거 같다. 



6. 죽음과 크림빵(우신영. 자음과모음. 2025. 246쪽)

: 지방 대학의 국문과 교수 허자은이 사망했다. 자신의 연구실 옆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다가. 혼자사는 과체중 여성이었던 허자은은 동료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문학이 좋아서 문학 자체만으로 연구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고자 했지만 아무도 허자은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교이자 만년 박사 과정생인 이종수와 허자은의 마지막 제자였던 학부생 정하늬의 시각은 조금은 다르다.


힘든 책이었다. 단지 허자은에 대한 부당 대우 때문만은, 고산대 국문과로 상징되는 학계의 부조리한 관행과 비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허자은이었고 이종수였고 정하늬였다. 외모 때문에 진심이 곡해당하고 능력은 폄훼당하며 뒤에서 조롱당하는 허자은. 불합리한 걸 알지만 현재의 이만한 생활이라도, 이만한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눈 감고 귀 막아야만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이종수. 허자은 교수의 수업을, 문학을 사랑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하늬. 독자마다 이 책을 읽고 분노하는 지점은 다르겠지. 그러나, 그 상황 한가운데 놓인다면 누가 허자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너희 중 죄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 



7. 말리부의 사랑법(테일러 젠킨스 리드, 이경아 역. 다산책방. 2025. 560쪽)

: 1983년 8월 27일, 유명 수영복 모델 니나 리바의 말리부 저택에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니나는 최근 유명 테니스 선수인 남편의 불륜으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미 니나와 그의 세 동생 - 서핑 챔피언 제이와 제이의 사진을 완벽하게 찍어내는 포토그래퍼 허드, 막내 키트 - 는 가수 믹 리바의 자녀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니나 남매들의 파티는 니나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할 때부터 시작된 리바 남매들의 연례 행사였고 이들의 삶에 아버지는 없었다. 이야기는 1950년대 남매들의 어머니 준과 믹의 뜨거웠던 사랑과 파티 당일을 오간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역시 흡인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 작가를 단순히 페이지 터너로만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 셀럽과 가십을 이야기하지만 속물적이지 않은, 인생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은 작가. 결말이 조금은 허전하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좋았다. 특히 장녀 컴플렉스에 깊이 침잠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니나의 성장이. 하지만 믹은 좀... 믹이 대가를 치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내게 흡족하지는 않아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지.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고 싶다. 



8. 계화의 여름(배명은. 위즈덤하우스. 2025. 152쪽)

: 노년의 계화는 어릴 때부터 살던 집을 아들이 팔아버리려고 하자 끝까지 버틴다. 어린 시절 타지에 일하러 나간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이곳에서 살던 계화는 부모님이 곁에 안 계시는 설움에 더해 비늘증까지 앓고 있어서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서러움에 뒷산 선녀 절벽에 올라가 몸을 던지려던 계화는 마침 승천하는 중이었던 이무기와 눈이 마주치고, 이무기는 그대로 추락한다. 후에 집 근처 풀숲에서 마주친 구렁이. 계화는 피부가 벗겨져 아파 보이는 구렁이에게 산딸기를 따주고 '여름'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유한한 존재와 무한에 가까운 생을 사는 존재의 사랑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됐던 건데... 게다가 엉뚱한 인간이 득을 본 거 같아 그것도 화가 난다. 마지막 구렁이의 또아리가 슬프다.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겠지. 여름은 언제나 계화의 것이었던 것처럼. 



9. 살인자와 렌(엘레이나 어커트, 박상미 역. &(앤드). 2025. 340쪽)

: 제러미는 살인을 즐긴다. 술집에서 타겟을 찾아 유인하고, 지하실에 특수한 장치를 만들어 가둬 두었다가 적당한 때에 사유지에 풀어놓고 사냥을 즐긴다.  렌 멀러는 인정받는 병리학자이다. 최근 발견되는 시신을 부검하다 연쇄 살인범의 짓임을 확신한다. 또한 시신에게서 발견되는 부가적인 물건들이 다음 시신이 버려질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매한 범죄 소설이다. 'Who done it', 'How done it'. 'Why done it'을 모두 드러낸 채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뭔가 밝혀질 것은 렌의 이야기 뿐일거라 생각했고 그 짐작이 맞아떨어졌는데, 그게 엄청나게 놀랍거나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작가가 필력이 엉망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나름 고심해서 구성을 했고 원서의 문장이 엉망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글솜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말했듯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할 만큼 재밌지가 않다. 결말 또한 속 시원하지도 않고. 아마 시리즈로 만들어서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어했던 거 같은데, 그렇더라도 이 작가를 또 읽을 거 같진 않다. 



10. 사서 고생(조우리. 위즈덤하우스. 2025. 108쪽)

:  사서 영지는 기간제 사서인 이정아가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팬데믹 기간 중 메타버스 플랫폼 미러라클에서 운영하던 동그라미 도서관의 관리 일을 인수인계 받는다. 미러라클에 공간만을 마련해 두는데 그쳤던 다른 도서관들과 달리 동그라미 도서관의 가상 세계에서는 독서 모임이 별도로 꾸려지고 도서가 추천되는 등 실제와 똑같이 운영이 되고, 사용자에게 꽤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남에 따라 미러라클의 사용자도 줄어들고 결국엔 서비스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동그라미 도서관도 슬슬 종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실제 도서관처럼 사용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도서관의 문을 닫을 수 없는 이 서비스에 딱 한 명의 아바타가 계속 나가지 않고 있다. 영지는 미러라클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관리자가 나타나면 아바타도 사라지고, 영지가 도서관을 닫으려 하면 그 한 명의 아바타는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데...


짧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신분제를 이야기한다. 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분명한 신분의 차이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조금 돌아서 왔을 뿐인데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노동의 가치는 물론 호칭마저 차별을 받는 현실을 말이다. 그런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던 거 같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냐며 좋아서, 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람들, 이해 못 하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작가는 얘기해 주고 싶었나보다. 때로는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덕에 아직도 세상이 아름다운 거라고.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이들을 지치게 만드는 우리 사회 탓이겠지. 난 어느 쪽일까. 



11. 은하환담(곽재식,김설아,김성일,이경희,소렐,송경아,이한,문녹주,전혜진. 달다. 2022. 380쪽)

: 전래 동화를 SF적으로 재해석한 9편의 단편들. 이경희 작가의 <파종선단>이 가장 좋았다. 어릴 때부터 조금은 이상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새로 썼다. 납치와 기만, 가스라이팅 이야기가 바로잡힌 느낌. <매구 호텔>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단동이>는 전체적인 통일성 면에서 살짝 어긋난 느낌. 



12. 사랑의 가설(알리 헤이즐우드, 허형은 역. 황금시간. 2022. 560쪽)

: 스탠퍼드 대학 생물학부 박사 과정 올리브. 두어 번 데이트했던 제러미와 절친 안이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올리브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 꾸며낸다. 하지만 안이 의심하자 얼결에 근처에 있던 칼슨 박사에게 키스를 하는데, 칼슨 박사는 박사 과정생들 사이에서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은 천재. 칼슨에게 해명을 하던 중 칼슨 박사 또한 대학 당국에게 어필을 하기 위해 연인이 필요하다며 둘은 계약 연얘를 시작한다.


말캉말캉한 얘기가 읽고 싶어서 집어든 거라서 클리셰 범벅임에도 즐겁게 읽었다. 애덤 이 FOX. 사실 로맨틱 코미디의 결말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클리셰는 혐관에서 시작하든 계약으로 시작하든 독자를 익숙하게 이끌지만, 그래도 아주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와 작가의 필력, 그리고 대체 이번 커플은 어떤 오해를 어떻게 풀 것인지 그리고 스킨쉽은 어떻게 할 것인지 때문에 로맨틱 코미디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진짜 훌륭하다. 아주 내 맘을 딱 맞게 채워줬다.



13. 괴물, 용혜(김진영. 안전가옥. 2025. 300쪽)

: 경찰 실종수사팀 용혜. 어느날 유건재라는 초로의 남자가 찾아와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영문 모를 사과를 하면서도 그는 용혜의 몸을 위아래로 샅샅히 훑어 보다 '없네, 없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는데 3일 후 그의 실종 신고가 들어온다. 용혜는 그의 행적을 좇으며 그의 딸과 만나는데, 그애를 데려다 주려 거리를 걷던 중 용혜만이 맡을 수 있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의 냄새에 유건재의 딸도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사실 용혜는 사람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그나마 용혜가 삼킬 수 있는 건 신선한 생고기 뿐. 


처음엔 약간의 환상을 곁들인 차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더해 산업 재해와 환경 문제, 관음증까지 다룬다. 해피 엔딩이라 용혜와 다른 사람들에겐 다행이지만 현실에는 아직도 많은 괴물들이 자신이 괴물인지 모른 채 혹은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외면하며 타인을 괴물로 만들고 있지. 이런 현실이 계속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용혜같은 피해자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씁쓸한 이야기였다. 



14. 오피스 괴담(범유진,최유안,김진영,김혜영,전혜진. 안전가옥. 2023. 346쪽)

: 첫번째 작품이 너무 맘에 들었다. 이 주제에 딱 맞는 작품이란 생각. 근데 두번째 작품은 아주 본격적이었다. 그래, 이런 게 괴담이지. 근데 이유를 모르겠네. 명주 잠자리 유충 때문이면 은희한테만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뒤로는 다 슬펐다. 여기 밖에는 갈 데가 없는 인생들이 다 너무 공감되어서. 그러다 마지막 작품은 진짜 눈물샘 꾹 누르며 읽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터졌다. 나도 내가 그들보다 조금 운이 좋을 뿐이라는 거 알지. 그러면서도 나보다 더 운 좋은 사람들 부러워하며 산 게 부끄러워졌다. 



15. 달걀프라이 자판기를 찾아서(설재인. 시공사. 2024. 408쪽)

: 2000년대 초반 지방 도시, 5학년 지나는 남사친 은청과 함께 자신들은 또래 친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러던 중 지택이 전학을 오고, 채식을 하고 있다는 지택이 있어 보인 지나는 자신도 동참하기로 한다. 성장기임을 감안해 달걀 정도는 먹기로 하는데 지나는 어릴 때 살던 한란의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계란 프라이 자판기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주위 친구들 아무도 믿지 않지만 지택이 자신도 본 적이 있다고 거들어 주자 힘을 얻고, 지나는 한란의 그 도서관으로 지택을 데려가기로 하는데, 지택은 이걸 일종의 프로젝트로 만들자고 한다. 자신의 집에 있는 캠코더로 영화를 찍자고. 지택의 집 2층에 사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설문 패널까지 만들어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은청이 자신도 끼겠다고 한다.


읽는 내내 속상해서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째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도 없을까.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책 속에서나마 어린이들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그러면 이야기도 안 이루어지겠지만. 지나가 다른 어른을 만났더라면 지나는 지금과는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그 장면이 나를 위로했다. 



16. 마녀가 되는 주문(단요. 책폴. 2023. 280쪽)

: 서아는 우수한 인재들만 입학할 수 있는 '산학협력창의인재학교'에 입학했지만 열일곱 살이 되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졸업할 때까지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면 학자금 때문에 엄청난 빚에 시달릴 것이다. 옥상 난간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서아에게 선배 현이 다가온다. 현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며 자신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가상현실 게임서버를 얘기해 준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술래잡기 게임'. 사실 이 게임은 개교 초창기에 개발되어 서비스되었다가 심각한 버그로 사망 사고가 발생해서 닫힌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 버그를 픽스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학생들에게 오픈했다는 것. 현은 서아가 자신의 뒤를 이어 관리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연구소에 들어가 관리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하던 중, 사망 가능한 버그는 픽스되지 않았고 죽고 싶은 학생에게는 따로 서버를 열어 준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읽으면서는 계속 가슴을 치다가, 읽고 나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답답해서. 어디에도 어른은 없었다. 하율 교수도, 진솔 선배도 어른은 아니었다. 책 밖의 나 조차도. 아이들은 그 질문을 서로에게가 아닌 어른에게 던졌어야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제대로 대답해 줬어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하지만... 책 속에도 책 밖에도 그런 어른은 없다. 단 한 명도. 



17. 인간 크로케(케이트 앳킨슨, 이정미 역. 현대문학. 2017. 496쪽)

: 이소벨 페어팩스. 이제 막 열 여섯 살이 되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사라졌다, 숲 속에서. 그리고 아빠도 7년 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새엄마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소벨과 오빠는 엄마를 싫어했던 할머니 손에, 그리고 고모의 손에 자랐다. 끊임없이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엄마가 문을 여는 소리를 기다리며. 이소벨은 갑자기 주위가 일렁이는 걸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니 과거의 한 시점에 와 있다. 페어팩스 가문이 이 일대를 모두 소유하고 있던 몇 백 년 전의 어느 시점에. 그러다 순식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스포)


전작과 마찬가지로 슬펐다. 독자인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 진실은 신화로 승화되고, 표피 바로 아래 묻혀 있는 거름같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비극은 동화로 덮인다. 마치 신의 축복과도 같은. 1960년 4월 23일로의 회귀. 이소벨이 겪은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행이었나. 차라리, 차라리 말이다.


내용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는 게 마냥 힘들지 만은 않았던 건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셰익스피어, 그리스 신화, 그 밖의 알려진 동화와 전설들을 찾아내는 재미 덕분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어두운 작품이라고 했다는데 내겐 전작보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가 이 동화들 때문이었다. 



18. 없던 문(김유라,엄정진. 텍스티. 2025. 278쪽)

: 두 작가가 한 문장으로 소설을 쓰는 매드 앤 미러 시리즈. 이번 문장은 '우리 집에 못 보던 문이 생겼다'. 김유라의 작품은 회사원 영훈의 이야기. 가족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낮엔 회사원, 밤엔 배달원으로 쉴 새 없이 일하는 영훈은 어느날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남는 방을 빌려주면 매일 5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고민 끝에 수락한다. 하지만 영훈의 자취집은 원룸. 그런데 집에 와보니 문이 하나 생겨 있다. 계약 조건은 그 방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것. 들어가면 계약은 종료되고 치명적인 불이익을 받는다는데... 엄정진의 작품은 어릴 때 오빠를 잃어버린 이선의 이야기. 같이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오빠가 그냥 사라졌다. 이후 이선의 가족은 무너진다. 20여 년이 지난 후 살던 아파트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둘러보러 온 이선. 놀이터에 그 때의 오빠와 똑같은 아이가 있는 걸 발견하고, 아이가 뛰어가자 얼결에 쫓아간다. 빈 아파트의 화장실 거울 뒤 낯선 통로로 들어간 아이. 이선은 아이의 뒤를 따른다.


김유라의 작품은 처음 부분을 읽자마자 어떻게 진행될 지 알 거 같았고 예상대로 진행되어서 좀 재미없었다. 그래도 작가가 필력이 좋고 문장도 나쁘지 않아서 아이디어만 보강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듯. 그래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엄정진의 작품은 아이디어도 좋고 작품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없어서 재밌었는데 주제 문장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나 싶다. 이 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19. 가능하면 낯선 방향으로(김이설,이주혜,정선임. 다람. 2025. 204쪽)

: 공간에 관한 앤솔러지. 세 작가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여서 행복하게 읽었다. 내용은 다 조금씩 마음 아팠지만. 세 작품 다 인천이라는 도시가 언급되거나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느슨하게 연결된 느낌이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억. 세 작품 모두 공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세 작가의 현실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이 좋았다. 



20.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이서수,한정현,박서련,이주혜,아밀. 앤드. 2025. 196쪽)

: '언니'들을 이야기하는 앤솔러지. 언니라서 행해야 하는 역할, 언니라는 호칭이 주는 무게와 부담, 언니다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지우는 짐과 그에 따른 죄책감... 사실 언니라고 별다르지 않은데. 그냥 나이가 조금 많을 뿐인데... 다섯 작품이 다 맘에 들었다. 다양한 언니들이 나와서, 언니라고 무조건 동생들을 감싸주거나 책임을 감당하지 않아서 좋았다.



21.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바버라 데이비스, 박산호 역. 퍼블리온. 2024. 608쪽)

: 어릴 때부터 책에 의존했던 애슐린. 부모가 싸우면 늘 헌책방에 달려와 책 사이에서 위로를 찾곤 했다. 열 두 살이 되던 해, 책을 잡았다가 찌릿한 느낌과 함께 어떤 감정들이 밀려오는 걸 느끼게 되고 책방 주인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모든 사람이 갖고 있지는 않은 특별한 능력이라는 얘길 듣고 안심한다. 시간이 흘러 프랭크 아저씨로부터 책방을 물려받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는 희귀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애슐린. 이웃 골동품점에 오래된 책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에 가서 살펴보던 중 특이한 제본을 한 책을 발견한다. 제목은 '후회하는 벨'. 책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그 책을 가지고 와 펼쳤는데 첫머리에 적혀 있는 “어떻게, 벨? 그 모든 일을 겪고서……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며칠 뒤 역시 골동품점에 비슷한 책 상자가 들어왔고 애슐린은 그 책과 페어인 듯한 '영원히, 그리고 다른 거짓말들'을 발견한다. 역시 첫머리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겪은 후에…… 당신이 내게 그걸 물을 수 있어?”. 애슐린은 이 책들을 읽는 한편 이 책들을 맡긴 사람을 찾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혀 모르면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이상하다. 신기하고, 기적적이고, 거지같다. 벨은 헤미를 몰랐고, 헤미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함께 했던 마지막이 그러했고, 서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난 처음부터 헤미가 미웠고 읽는 내내 헤미를 미워했는데, 다른 독자들은 안 그랬나보다. 이것도 참 신기하다.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월의 간극이 너무 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난 아직도 헤미 미워.



2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황정은. 책과나무. 2023. 363쪽)

: 범죄 소설 4편. 그 황정은인 줄 알고 대출했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 그래도 수상작가라길래 기대했는데 별로. 사소한 부분이지만 디테일이 어긋나고 문체가 올드하다. 작품 속 범죄자나 사건의 전개도 다 예측 가능하고. 



23. 오색찬란 실패담(정지음. RHK. 2023. 232쪽)

: <<젊은 ADHD의 슬픔>>을 쓴 작가의 에세이.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이 난 정말 좋다. 계속 실패만 거듭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노력과 만회의 역사였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건강함도 좋고. 이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교훈을 얻거나 삶을 개선할 의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작가의 이야길 들으며 즐거워만 해도 된다. 유쾌하면서도 투박하게 위로해주는 책.



24. 예술에 관한 살인적 농담(설재인. 나무옆의자.2025. 268쪽)

: 연극 쪽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A대학 졸업생 구아람. 지금은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반지하 방에 살며 예술에 바친 청춘을, 예술 때문에 망친 인생을 생각치 않으려 한다. 대학 때 절친이었던 정소을은 강남 학생들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방 세 개 짜리 오피스텔에서 산다. 언제나처럼 소을과 술을 마시던 아람은 자신의 초라한 자취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걸 알게 되고, 술김에 세입자 단톡방에서 말실수를 해 다른 세입자가 아람의 집에 불을 지른다. 소을의 집에 얹혀 살게 된 아람. 갑자기 소을의 남친이라는 미성년자 유투버가 나타나고, 그와 함께 소을을 기다리는 중 오피스텔 지하실에서 소을의 시체가 발견됐다며 관리인이 찾아온다. 자신의 피로 아람의 이름을 써놓고 죽은 소을.


마무리가 너무 급했다.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수습은 어찌 하려나, 결말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 하며 읽고 있었는데. 물론 저자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살인 사건이 아니라 소위 예술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써먹어지고 있는지, 그 위선과 허상에 대한 것이었을 듯. 물론 위선은 예술과 예술가만 떠는 게 아니지만. 아람의 악역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게 가장 아쉬웠다. 아람이 악역을 멋지게, 오래오래 하길 바랐는데. 



25. 왜 베토벤인가(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역. 에포크. 2025. 548쪽)

: 베토벤은 내 노동요다. 난 막귀여서 연주자에 따른 차이점도 잘 모르고 그냥 유튜브에서 찾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정도지만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늘 좋아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를. 사실 노동요로는 적합하지 않다. 너무 아름다워 손을 놓고 음악만 듣게 되기 때문. 이 책은 베토벤의 작품 100곡을 이야기한다. 각 챕터가 짧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챕터 첫머리에서 해당 곡의 작곡 배경이나 당시 에피소드 등을 얘기해 주는 게 좋았다. 그러고나면 저자가 좋아하는 연주를 소개해 주는데 말했듯 난 막귀이고 감상 경험이 일천해서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연주자, 지휘자가 태반이었다. 그래도 이런 가이드는 초심자에겐 언제나 환영이다. 그리고 연주자들의 에피소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특히 첼로 소나타 3번을 나치 부역자 피에르 푸르니에(첼로)와 나치를 피해 망명한 아르투어 슈나벨(피아노)이 함께 녹음했다는 이야기는... 저자에 따르면 긴장감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104쪽)고 하니 꼭 찾아 들어봐야 겠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읽으면서 정말 나치 부역자가 많았구나 싶었다. 저자가 언급한 사람들만도 어마어마한데, 언급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겠지. 음악계 뿐이랴. 다른 분야도 할 말 없지. 그런 면에서 저자가 카라얀이 <영웅>을 지휘하는 걸 보며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는 데(219쪽) 동의한다. 단지 나치 부역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베토벤은 다른 이들이 탐험할 수 있는, 창작하는 영혼이라면 그 안에서 도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중략) 베토벤 음악에는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있다. - 464쪽.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을 인용하며.



26. 끼리끼리 사이언스(권혜영,성해나,성혜령,이주란,한지수. 앤드. 2025. 232쪽)

: 모임에 관한 앤솔러지. 요즘 핫한 성해나 작가가 궁금해서 대출했는데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주란이었다. 나 이주란 작가 사랑하거든. 성해령 작가도 좋았다. 여성들의 연대는 언제 읽어도 흐뭇하다. 성해나 작가는 기대감이 너무 커서인지 밋밋한 느낌이었고, 한지수 작가는 많이 힘들었다. 다른 작품들이 가벼웠던 건 아니었지만 한지수 작가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많이 무거웠고 머릿속과 가슴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다섯 작품 모두 좋았고, 의미 있었다. 



27. 푸른 수염의 방(홍선주. 나비클럽. 2023. 264쪽)

: 5편의 단편. 표제작인 첫번째 작품이 정말 맘에 들어서 다른 작품들도 호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고, 다 재밌었다. 작품들에 큰 반전이나 예측 불가능함은 없다. 하지만 작가의 필력은 예상되는 이야기도 눈을 뗼 수 없이 몰입하도록 만든다. 가장 재밌었던 건 <연모>. 한자어가 그것도 있는 줄 몰랐다. 



28.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백사혜. 허블. 2025. 436쪽)

: SF 연작. 미래의 지구인들은 외행성들을 개척하며 살아가는데, 이 과정 중에 거대 자본들은 자신을 '영주'라 지칭하며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잘 나가는 영주의 용병으로 살거나 마치 주식에 투자하듯 각 영주들의 사업에 투자하며 이 기형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애쓸 뿐. 개척한 외행성에 정착한 이들은 환경에 맞게 변화(진화)하는데,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복속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소외시키고 타자화시켜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 마치 게임하듯. 이 소설집은 이런 세계관 위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작은 존재들 이야기.


꽃이 시들고 다시 필 지금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들은 결국 사랑 이야기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계 하나쯤은 끝장낼 수 있는 것.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내가 원했던 라푼젤이었다. 



29. 라스트 사피엔스(해도연. 네오픽션. 2025. 216쪽)

: 캡슐 안에서 눈을 뜬 '나'. 이름도, 왜 이곳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26세기 밝은 미래에서 만나자 - 에이다 엠'이라고 뒷면에 쓰여 있다. 다른 정보들을 찾아 캡슐을 뒤졌는데 아마도 내 이름인 듯한 영문 ERICA가 있고, 간단한 식량들도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27543년. 26세기에서 25,000년이나 지났다. 간신히 캡슐 밖으로 나왔는데 이곳은 넓고 푸른 벌판이다. 캡슐 하나 외에는 어떤 인기척도 없는. 식량을 짊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숲으로 가 다른 캡슐을 하나 발견했지만 불행히도 그것의 사용자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듯 하다. 다시 길을 걸어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알아내고 처음 보는 동물을 사냥하면서 지내는데, 신기한 생명체가 눈에 띈다. 코끼리와 켄타우로스를 섞어 놓은 듯한.


어쩌면 낭만적일 수도 있었을 이야기. 비록 슬픔 위에 세워진 우정이었지만 아기 켄티가 옆에 있고 저녁마다 처녀자리 성운이 무지갯빛 눈동자를 빛내는 세상. 그러나... 


인간이란 뭘까? 어떻게 생겨먹은 생명체길래 이토록 오만하고 잔인하며 어리석을까? 말렌 하우스호퍼의 <<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인간이라고 해서 꼭 이 세상에 살아남아야 하는 건 아니다. 대체 어떤 인간은 왜 세상을 지배하려고만 하나?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존재는 죽여도 된다고, 아니 죽여야만 한다고 누가 가르쳤나? 아니, 나의 안위와 상관없이도 다른 존재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가? 결말이 다행이라고, 진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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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 낮은 건 알겠지만, 앨리 스미스가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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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의 마치(정한아. 문학동네. 2025. 288쪽)

: '국민배우' 이마치.  이제 60대에 접어든 그녀는 3월 생일날 아침 습관대로 체중계에 올랐다가 깜짝 놀란다. 하루만에 체중이 확 늘었던 것. 사실 이마치는 이 집에 이사온 후 이상한 일들을 겪고 있다.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퇴해 배우 생활에 문제가 생겼고 혼자 집에 있을 때면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다. 이사한 지 몇 달 안 된 이 아파트는 라파트멍이라는 생소하지만 세련된 이름을 가진 신축이고, 이마치는 재건축한 이 아파트의 이 호수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 이유는 어릴 때 잃어버린 아들 때문. 마치는 그날 예약되어 있던 클리닉으로 가지만 택시를 탄 후에야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걸 깨닫고, 다행히 택시기사의 호의로 클리닉에 도착하지만 진료는 하염없이 미뤄진다. 집에 돌아온 마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는 걸 알게 되고 힘겹게 계단으로 올라가 탑층 60층인 자신의 집에 도착하고 내친김에 옥상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그곳에서 43층에 산다는 여자와 마주치는데, 그녀는 바로 43세의 이마치 자신이다.


판타지나 SF가 아닐까 했던 초반의 지레짐작은 틀렸음이 바로 드러난다. 마치는 알츠하이머였고 VR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 라파트멍은 이 치료를 위한 가상세계였다. 마치는 아파트를 다니면서 과거의 자신과 맞닥뜨린다. 퍼즐처럼 맞춰지는 마치의 인생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시작부터 평탄하지 못했던 삶. 12월에 태어났으나 도망간 어미대신 아이를 방치하다시피 키운 아비의 바람과 달리 3월에도 목숨이 붙어 있었기에 마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여성. 인생의 가장 따뜻했던 한 사람을 잃고 또다른 상실을 계속 겪었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그러나 돌아보니 그 길은 황폐하기만 했던 여성. 


어쩌면 라파트멍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마치만큼 끔찍한 기억은 없을지언정 누구에게나 크고작은 상처가 있으니. 제발 원하는 누구에게든 인생의 막바지에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2. 봄밤의 모든 것(백수린. 문학과지성사. 2025. 268쪽)

: 저자 특유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단편집. 해피엔딩을 위해 애쓴 흔적들. 봄햇살처럼 따뜻하지만 봄밤처럼 서늘하기도 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왔다고 단번에 몸과 맘이 데워지지는 않듯, 이 작품들에서도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건 상실의 기억 때문. 하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진다. 가장 공감했던 건 <눈이 내리네>.



3. 옥상에서 기다릴게(한세계. 자이언트북스. 2025. 248쪽)

: 열일곱 정유신. 대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꽤 쏠쏠하게 벌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반장 김지원이 어느날 대필을 부탁하는데, 그건 지난 겨울에 사고로 죽은 김영원의 유서. 김지원은 자신이 김영원의 쌍둥이 형이라면서 대필을 해주면 김영원의 일기장을 주겠다고 한다. 유신은 사실 중학교 때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인기 많았던 영원과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우정은 드러나지는 않았었고, 이제 영원이 죽은 이후 유신은 계속 잠을 못 자고 있다.


대전제가 사랑스러운 소년의 죽음이라서, 처음부터 힘들게 읽어나갔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꼭 이렇게 어린 소녀와 소년에게도 일어나야만 했을까? 소설 속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다는 내 평소의 말은 거짓말이었나보다. 유신과 지원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거라는 건 믿고 있었다. 그게 청소년 소설의 기본 stance니까. 하지만 그걸 따라가는 난 너무나 힘겨웠다. 그 와중에 지원의 행동들은 이해가 가질 않기도 했고, 유신은 안타까웠다. 그렇게 너 자신을 평가절하하지마... 물론 결말에서 지원과 유신은 농구를 해도,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괜찮아진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라도, 이런 상실은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4. 나의 작은 무법자(크리스 휘타커, 김해온 역. 위즈덤하우스. 2025. 572쪽)

: 조용한 해안가 도시 케이프 헤이븐. 30여년 전, 이 마을에서는 어린 소녀 시시 래들리가 실종됐었다. 온마을이 동원되 소녀를 찾아나섰고, 소녀는 곧 차에 치인 시신으로 발견된다. 범인은 빈센트 킹으로 밝혀지고 빈센트는 살인죄로 성인 교도소에 수감된 후 긴 복역 끝에 이제 마을로 복귀할 참이다. 당시 빈센트의 여자친구였던 시시의 언니 스타.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남매를 키우며 술과 약에 절어 사는 스타를 빈센트의 절친이자 경찰서장인 워크가 한번씩 들여다보고, 스타의 큰 딸 열세 살 더치스와 동생 로빈을 도우려 애쓰지만 더치스는 스스로를 무법자로 칭하며 어떻게든 자력으로 동생을 지키려 한다. 빈센트가 마을로 복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가 총을 맞아 죽는다. 당시 현장에는 빈센트가 있었고, 그는 신고를 한 후 워크에게 자신을 체포하라고 한다. 그의 결백을 확신하는 워크와 달리 빈센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재판만 기다리다가 갑자기 10대 시절 워크의 연인이었고 현재는 이혼 전문 변호사인 마사를 선임해 달라고 한다. 한편 더치스와 로빈은 스타의 아버지인 핼의 농장으로 보내진다.


(약스포)


나쁜 어른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좋은 어른들도. 처음엔 슬펐다가 중간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고 다시 너무도 슬퍼져서 두세 페이지마다 책을 덮고 숨을 골라야 했다. 세상은 소녀에게 너무도 가혹하다. 특히 가진 거 없이 지켜야 할 사람만 있는 어린 더치스에게는. 그래서 마지막 소녀의 선택이 더더욱 슬펐다. 그리고 사실 그건 빈센트의 선택이었지.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지만 어쩌면 이 결말이 그에겐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범죄 소설.



5. 우리집에 왜 왔어?(정해연. 허블. 2025. 204쪽)

: 세 편의 단편들. 이 작가는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작품이 내겐 너무 무서웠어서 한동안 안 읽고 있다가 단편은 좀 괜찮을까 싶어서 집어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너무 현실적인 결말이어서 단편임에도 무서웠다. 그나마 <준구>는 해피엔딩이어서 나았지만 읽는 동안에 너무 숨이 가빴고 나머지 두 작품은... 리뷰를 읽어보면 다들 이 작가의 치밀한 글솜씨에 경탄만 하던데, 나만 무서운 거야? 



6. 젊은 ADHD의 슬픔(정지음. 민음사. 2021. 248쪽)

: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 보고자 정신과를 방문했다가 ADHD 진단을 받은 저자의 에세이. 정신이 아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한동안 음주와 흡연, 처방약 남용으로 방황하던 저자가 자신의 병과 함께 살아가기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과 치료 생활을 이야기한다. 지난 달에도 얘기한 거 같은데 난 이 저자를 소설로 처음 접했고 또다른 에세이로 두 번째로 접한 후여서 저자의 스타일을 조금은 아는 상태로 읽기 시작해서인지 솔직히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한 병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판단은 정말 금물이지. 그래서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쓰며 읽었다. 그치만 저자가 워낙에 유쾌한 스타일이어서. 


저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병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자 방법을 찾아낸다. 그게 너무나 멋졌다. 시기적으로는 이 다음에 출간됐지만 난 먼저 읽은 에세이에서도 느꼈지만 저자는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차올랐다. 



7. 기억으로 가는 길(파트릭 모디아노, 윤석헌 역. 레모. 2024. 204쪽)

: 역시나 기억은 이 작가의 영원한 화두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전작들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자 보스망스는 20여년 전 슈브뢰즈라는 곳으로 함께 찾아갔던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보스망스는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를 다시 방문했던 20여년 전의 시간과 그보다 전 그곳에 살던 시절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억 속에서 계속 불러온다. 의심스러운 사람들과 알 수 없는 일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모디아노는 확실한 처방이다. 끊임없이 부유하는 그의 화자들은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을 준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은 이전의 어떤 작품들보다 덜 모호하고 더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 저자 자신이 많이 반영되어 있음을 읽는 동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아파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읽는 동안에는 나를 잊고 보스망스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8. 호르몬 체인지(최정화. 은행나무. 2025. 224쪽)

: 가까운 미래, 호르몬 체인지 시술을 통해 노인들은 다시 젊은 몸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거리에는 노인이 보이질 않고, 빈곤층의 젊은이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르몬 제공자가 된다. 70살 한나는 주위에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될 만한 노인이 하나도 없는 외로움에 시술을 받기로 한다. 윤리적 죄책감을 갖고 시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만족.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는 딸에게 상처를 받은 것도 잠시, 한나는 젊은이로서의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 시술은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소재가 흥미로워서 읽었는데, 역시나 인위적으로 죽음을 늦춘 세상은 기괴했다. 부의 격차가 극심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재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환경이 무너지고 기술이 발전할 수록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방법은 나날이 기발해진다. 책속 세계가 너무 암울해서 읽는 내내 우울했다. 나도 늙는 건 싫다. 하지만 노화가 싫은 건 외모 때문이 아니라 관절과 장기 때문이다. 소화력이 떨어져 먹을 수 있는 양이 줄고, 노안이 와서 책을 읽으려면 팔을 좀더 뻗어야 해서 일정 공간이 더 필요하고, 전에는 1시간이면 걸었던 거리를 이젠 15분이 더 걸려야 도착하고... 그런데 이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잘못된 건 늙어가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노인을 소외시키는 사회가 아닌가. 세대간, 계층간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깊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9. 죽음(한용운. 부크크. 2018. 142쪽)

: 일제 시대 경성, 친일 신문사에 폭탄이 터진다. 곧이어 한 젊은이가 자신이 한 짓이라고 자수를 해오는데....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순애는 의식 있는 여학생이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부잣집 아들을 혐오하는데, 그 부잣집 아들은 순애의 아버지를 독립운동을 했다고 고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목에 매료됐으나 죽음은 소재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치하 아버지와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외피는 일종의 스릴러다. 마지막 장면이 약간 모호했으나 난 희망적으로 해석했고, 출판사 책 소개를 보니 그게 맞는 거 같다. 읽으면서 오래된 소설이니만큼 젠더 의식이 많이 어긋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일부 여학생의 일탈을 전체 여학생으로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했고 - 사실 저자 자신도 정조를 강조하긴 하였으나 - 저자가 아래와 같이 당대로서는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개진하였기에 열린 마음으로 읽었다. 


그것은 여자를 속박하는 의미에서 여자의 정조에 대한 관념에서 나오는 남자의 희망이 아니라 여자 자신을 위하여서 필요한 조건이다. 여자가 경제상으로, 또 정치상으로 완전한 해방을 얻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인류 평등의 원칙이다. 그러나 여자는 경제상의 독립과 정치상의 인권으로만 원만한 행복을 얻는 것이냐 하면 결탄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자의 아름다운 행복은 순결하고 끊임없는 남자의 사랑에 있는 것이다. 

- 37쪽



10. 7시 45분 열차에서의 고백(리사 엉거 (지은이),최필원 (옮긴이)황금시간2023. 520쪽)

: 외근 때문에 늘 타던 시간에 집으로 가는 열차를 놓친 셀레나. 7시 45분 열차를 타기로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집 놀이방에 설치된 홈캠을 연다. 그리고 실직 상태인 남편 그레이엄이 아이들의 보모 제네바와 관계를 가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사실 그들의 불륜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고 회사를 그만둔 뒤 구직활동조차 제대로 안 하는 남편에 대해서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셀레나는 남편을 벌주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유능한 보모 제네바를 놓치고 싶진 않다. 이윽고 7시 45분 열차에 오른 셀레나는 앞자리에 앉은 마사와 말을 트게 되는데, 마사가 먼저 자신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얘기한다. 마사의 고백에 셀레나도 남편과 보모의 불륜, 자신의 기분을 얘기하게 된다. 다음 주 월요일, 보모는 출근을 하지 않고 그녀의 언니가 실종 신고를 해 경찰이 셀레나와 그레이엄을 방문한다. 그레이엄의 불륜 때문에 유력 용의자가 된 둘. 그런데 셀레나에게 이상한 문자가 온다. 다시 만나서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내용과 함께 '나에요, 마사. 열차에서 만난'. 하지만 셀레나는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준 적이 없다.


(스포)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마사의 비밀은 진작에 눈치챘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과연 나쁜 놈은 벌을 받을지 너무 궁금했다. 다만 셀레나 때문에 속 터져서... 셀레나가 끝까지 펄이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얘기하는 게 답답했다. 네 인생을 망친 건 너 자신이야. 그런 남자를 골랐을 때 이미 이런 결과가 예견되어 있던 거라구. 네 남편에게 문제가 발견되었음에도 그걸 한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덮어주고 SNS에 행복한 가정인양 가식적인 사진을 올려가며 너 자신을 속인 건 너 자신이었어, 펄이 아니라. 


결말이 100% 맘에 든 건 아니지만 그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11. 도서관 문이 열리면(범유진. 푸른숲주니어. 2025. 152쪽)

: 둔둔 중학교에는 새학기를 맞아 도서관이 새로 개관했다. 원래 창고로 쓰이던 3층 구석의 도서관에는 그러나 학생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다. 1학년 은솔은 초등학생 때부터 말을 재밌게 하는 걸로 인기를 끌었는데, 한순간의 말실수로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당한다. 불편하고 속상한 마음에 점심 시간마다 도서관을 찾게 되는 은솔. 머리카락이 새햐얀 사서 선생님과 친해지면서 도서관을 활성화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게 되는데...


4명의 아이들과 4개의 에피소드. 다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좀 마음 아팠지만.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책을 그렇게 다루면 안 돼! 책 속 4명의 아이들이 가진 고민들은 꽤 현실적이다. 흔한 학업 고민이나 부모님과의 갈등은 아니지만, 막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때 할 법한 실수와 고민들이 생생하다. 물론 현실은 더 힘들 수도 있지. 이 책처럼 모든 문제들이 너무 원칙대로 편안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맘을 쉴 수 있으면 그걸로 됐지 싶다.



12. 대통령이 사라졌다 1. 2(빌 클린턴, 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베리타스. 2020. 360쪽, 316쪽)

: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혐의는 직권 남용과 반역이다. 며칠 전 대통령은 테러 단체 '이슬람의 아들들'의 수장과 전화 통화를 했고, 그들의 근거지를 습격한 영국 특수부대의 공격을 미국 특수부대가 막았다는 것. 청문회를 준비하던 대통령은 갑자기 변장을 하고 백악관을 빠져나가고 이는 최측근 몇 명만 알 뿐이다. 이유는 얼마 전 딸을 통해 접촉해 온 제보자 때문. 제보자는 이슬람의 아들들이 미국 내 테러를 계획 중이라는 정보를 주며 구체적인 건 다시 만나서 얘기하겠다고 하지만 약속 장소에서 습격을 받아 두 명의 제보자 중 한 명이 사망하고 만다. 


처음에 바이러스라고 했을 때 인터넷이 아닌 생물학적 테러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인터넷 바이러스 또한 전국의 시스템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위험도가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을 스파이 때문이라고 해도 꼭 베이스 캠프를 외부에 차려야 했는지도 모르겠고, 대통령이 꼭 특수부대 출신이어야 했을 이유도 모르겠다. 뭐, 그냥 백면서생이었던 것보다야 잘 도망치긴 했지만. 게다가 그놈의 팍스 아메리카나. 클린턴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서 머릿속 로망을 다 실현시킬 생각이었나보다. 아주 대통령 한 명 아니었으면 세상 다 멸망할 뻔. 반역자 색출 과정은 흥미로웠으나 예상한 인물이어서 좀 별로. 원래 이런 건 가까운 사람이 범인인 법이다. 암튼 제임스 패터슨 실망. 



13. 나무와 이파리(존 로널드 루엘 톨킨, 김보원,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56쪽)

: 톨킨 동화 선집 5권.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에 쪼르륵 있길래 사이즈도 아담하고 예뻐서 빌려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앞부분에 톨킨의 판타지 문학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는 <요정이야기에 관하여>가 진입 장벽이었다. 난 톨킨의 팬이 아니고 - <<반지의 제왕>>도 안 읽었고 - 이 책도 동화를 읽고 싶어서,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들려주던 동화를 선별한 거라길래 예전에 읽었던 <<블리스 씨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해서 빌린 거였어서. 물론 <요정이야기에 관하여>는 꽤 흥미롭긴 했다. 톨킨은 <<걸리버여행기>>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등의 여행기나 신비한 이야기를 '꿈'으로 처리하는 이야기들, 동물 우화들은 요정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요정이야기를 어린이와 연결짓는 것도 우연에 가깝다. 어린이라고 요정이야길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들을 위해 더 만들어지고 각색되는 건 최근의 경향. (69-70쪽) 그렇다고 어린이와 연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특별히' 연관짓지 말라는 것. 요정이야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취향이고 어린이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에게 요정이야기가 더 필요한 이유는 요정이야기가 가진 판타지, 회복, 도피, 위로는 어른에게 더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87쪽). 이 말이 꽤 위로가 됐다.


이 뒤에는 두 개의 동화가 있다. 뒤의 <베오르흐트헬름의 아들 베오르흐트노스의 귀향>도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니글의 이파리>가 상징하는 바도 명확하고 더 내 취향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톨킨의 팬이라면 <베오르흐트헬름의 아들 베오르흐트노스의 귀향>을 더 선호할 듯.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의미있는 작품들이었다고 생각한다. 



14. 유령 해마(문목하. 아작. 2021. 364쪽)

: '해마'인 '비파'가 그녀를 처음 인식한 건 화재 현장에서였다. 사람 모양의 외피를 입고 화재 현장 안쪽에 있는 남매를 구했는데 그 뒤를 따라 나온 '반려동물'. 하지만 동물이 아니라 주민등록칩이 없는, 등록되지 않은 아이였다. 비파는 이런저런 임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그녀 미정을 지켜본다. 자신이 구해야 했으나 구하지 못했던,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한편 미정은 지방의 작은 신문사 기자가 되는데, 경찰서에 출입하다가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만 아이는 이유없이 앓다가 죽는다. 미정은 최근 젊은 사람들의 돌연사가 빈번함을 주목하게 되고 이게 가상 세계에서의 실험을 진행하는 거대 기업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 해마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서 - 그러게 왜 이름을 '해마'라고 했는지. 백업 때문에도 헷갈렸지만 진짜 인간의 뇌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한참 고민했다 - 헤맸는데 곧 비타와 미정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건 사랑 이야기. 성애적 사랑이라기 보다는 모성애적 혹은 자매애적인 사랑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지막 비파의 선택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정이 가진 인류애. 물론 미정도 현실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선함으로 싸움을 이어나간다. 아무래도 저자는 성선설을 믿는 듯.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무겁거나 심각한 건 아니다. 비파와 미정이 대면한 후의 티키타카 덕분에 후반부에서는 계속 킥킥대며 읽었다. 작가님, 문장력을 이렇게도 발휘하시는군요. 


결말이 완전히 맺지 않아서 약간 아쉬웠지만 앞으로의 이들의 행보가 기대되어, 후속작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 달나라 소년(이언 브라운, 전미영 역. 부키. 2013. 376쪽)

: 장애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의 에세이. 저자의 아들 워커는 심장-얼굴-피부 증후군(cardiofaciocutaneous syndrome, CFC). 전세계에 100여명의 환자가 있다고 한다. 신체적, 지적으로 발달이 매우 늦고 조기 사망 확률이 높은 중증 장애이다. 저자는 아내와 함께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워커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단순히 생존하는 게 아니라 워커 또한 자신만의 삶이 있는지 하는 것. "내게 중요한 건 아들이 자신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지, 내면의 삶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긴급한 물음처럼 느껴졌다." (70쪽) 또한 저자는 워커를 위해 다른 환자들을 찾고 다른 나라의 장애 돌봄 제도와 그룹홈을 찾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저자의 힘겹고도 아름다운 여정을 따라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적이기도 했으나... 그룹홈에서 워커 담당자인 트리시의 가슴을 얘기하는 데서 짜게 식었다(333~336쪽). 이건 명백히 성희롱. 대체 이런 구절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나름 유머라고 생각했나본데 아무리 16년 전 글이라고 해도 자기 아들 돌봐주는 사람에 대해 그러고 싶을까 싶다. 그녀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또 뭐냐?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한번도 약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아니면 장애가 무슨 특권이라고 생각했거나. 막판에 기분 잡쳤다. 



16. 비밀의 책 : 앤디미온 스프링(매튜 스켈턴, 조영학 역. 비룡소. 2009. 492쪽)

: 열두 살 블레이크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옥스포드에 왔다. 엄마는 옥스포드에서 논문을 위한 자료조사에 한창이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아빠만 두고 이곳에 와서 동생을 돌보는 책임을 떠맡은 게 불만스럽다.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책이 꽂힌 서가를 손등으로 훑던 블레이크는 갑자기 손등을 할퀸 책 때문에 깜짝 놀라고, 그 책을 빼서 펼쳤지만 책 속은 백지일 뿐이다. 책을 넘겨보던 중 갑자기 글씨가 떠오른 책. 알 수 없는 시가 적혀 있던 그 책을 서가 한구석에 숨겨둔 블레이크는 그날 밤 근처에서 엄마의 모임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다시 그 책을 보려 도서관에 들어가지만 인기척에 놀라 숨고, 곧 책이 파괴된 것을 발견한다. 한편 600여년 전 구텐베르크의 도제였던 앤디미온은 스승을 찾아온 남자가 너무도 수상하고 무섭다. 그가 뭔가를 꾸미는 듯 해서 몰래 지켜보던 중, 그의 짐 속에서 용의 가죽으로 만든 피지를 발견하는데...


블레이크의 상황이 답답하긴 했지만 중반까지는 모험이라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블레이크가 막 휘젓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그리고 후반부에도 굳이 빌런들이 블레이크를 희생시키려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린이 소설이라 무조건 무섭고 나쁘게 그려야해서? 그래도 꽤 흥미진진하긴 했다. 



17. 로버랜덤(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크리스티나 스컬 엮,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16쪽)

: 작은 강아지였다가 장난감 강아지가 됐다가 다시 달나라까지 다녀온 흰 강아지의 모험. 톨킨 동화 선집 4권이다. 이 이야기는 톨킨이 1925년 가족들과 해변가에 휴가를 갔다가 둘째 아들인 다섯 살 마이클이 애착 인형을 잃어버린 데서 출발한다. 가족들이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톨킨은 마이클을 위해 이 강아지 인형 로버가 사실은 진짜 강아지였다며 동화를 얘기해 준 것. 이 이야기가 글로 옮겨진 건 이후의 일이지만 이야기는 정말 귀엽고 흥미진진하다. 원래 노부인의 강아지였던 흰 개는 까탈스러운 마법사의 바짓 자락을 물어뜯는 바람에 장난감이 되어 잡화점에 전시된다. 이걸 한 가족의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사오지만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게 답답했던 강아지는 밤에 몰래 해변으로 나가고, 모래주술사와 만나 그의 도움으로 달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달나라에는 달나라 사람이 키우는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 강아지의 이름도 로버여서 장난감 강아지는 로버랜덤으로 불린다.


강아지의 달나라에서의 모험이나 바닷속 모험이 마치 우리나라 전래 동화처럼 펼쳐진다. 물론 배경 묘사는 이국적이지만 모험의 양상이랄까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앞서 말한 이야기가 생기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난 톨킨의 세계관에 통달하지 못해서 그냥 이 이야기 자체만 즐겼지만, 톨킨의 팬이라면 여기서 그의 신화체계의 조각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듯. 하지만 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정말 재밌었다. 



18. 큰 우튼의 대장장이(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벌린 플리거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48쪽)

: 톨킨 동화 선집 3. 저자가 다른 작가의 책 서문을 쓰다가 문득 요정나라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그 생각들을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시킨 것. 마을 큰 우튼에는 12년마다 큰 축제가 열린다. 커다란 케잌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나눠 먹는데, 케잌 조각 안에는 작은 동전이나 예쁜 장식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하다. 마을의 대표 요리사가 갑자기 죽은 후 그의 도제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 그 해의 케잌을 만들게 되고, 도제가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재료실 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던 별 장식을 케잌에 넣는다. 그리고 그 별 장식은 대장장이 아들의 케잌 조각에 들어가고, 아이는 케잌을 먹은 이후 이마에 반짝이는 작은 별 모양이 새겨진다. 아이가 자라서 대장장이가 된 후에도 그는 일년에 한 번씩 긴 여행을 다녀오는데...


요정나라로의 여행이라니, 이 선집 중에서 가장 동화적인 이야기였다. 요정과의 만남, 요정 왕의 정체, 대장장이의 여행의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영원한 여행은 없다는 이야기가 조금 서글프기도 했고. 멍청한 요리사의 마무리는 조금 아쉬웠지만, 그가 악당은 아니었으니. 뒤의 원고 전사본은 흥미롭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진 않았다. 아마 팬이라면 열광했을지도.



19. 달콤한 픽션(최지애. 걷는사람. 2023. 304쪽)

: 슬프지만 현실적인 단편집. 누가 이들에세 현실을 타파하지 않고 안주한다고 돌을 던질 수 있나. 이들은 주어진 것만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견뎌나가고 있는데. .

.

기시감이 너무 강했는데 이미 읽은 거였다. 다 읽고 북플 입력하다 알았다. 원래 읽은 책 또 읽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능동적 재독이 아니라서 억울한 기분. 리스트에서 빼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꼬박 이 책만 읽었으니 넣기로 했다. 작품이 나쁜 것도 아니고. 



20. 톰 봄바딜의 모험(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크리스티나 스컬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352쪽)

: 톨킨 동화 선집 2. 저자가 어쩌면 굳이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지 모를, <<반지의 제왕>> 첫머리에 나와 프로도 일행을 구해준 톰 봄바딜의 이야기. 이 밖에도 톨킨의 세계관 속 인물들에 관한 시가 총 16편이 실려 있다. 저자가 굳이 논의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이에 대한 세계관 설계는 매우 상세하고 깊다. 사실 이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난 그냥 시집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가장 좋았던 건 <그림자 신부>와 <바다의 종>. 조금 슬펐다. 뒤의 해설도 재밌었다. 



21. 햄의 농부 가일스(존 로널드 루엘 톨킨 저, 웨인 G. 해먼드, 크리스티나 스컬 엮, 폴린 베인즈 그림, 이미애 역. 아르테. 2025. 248쪽)

:  톨킨 동화 선집 1. 평범하고 조금은 게으른 농부가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용과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이다. 톨킨과 가족들이 소풍 중에 소나기를 만나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동화 선집 5권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다. 배고픈 거인은 먹을 걸 찾아 인간들의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마침 주인 몰래 사책을 나온, 햄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농부 가일스의 개에게 들키고 가일스는 스스로 가버린 거인을 얼떨결에 쫓아낸 게 되어버린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가일스에게 집안에 오랫동안 내려오지만 왕 자신은 별로 쓸모없게 생각하는 검을 하사한다. 한편 돌아간 거인은 인간 마을이 의외로 재물을 얻기 쉬운 곳이라고 얘기하고, 이를 들은 욕심많은 용이 인간 마을로 내려가는데, 왕은 기사들에게 용을 무찌를 것을 명하고 햄 마을 사람들은 가일스에게 기대를 건다. 하지만 가일스는 영 내키지 않는데...


얼결에 영웅이 되어버린 평범한 농부의 행동이나 이미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끝없이 욕심을 내는 왕, 그리고 오합지졸같은 기사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가득하다. 그 모습이 꽤 우스워서 이 책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게 이해됐다. 해피엔딩이지만, 사람(그리고 용도)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 교훈도 준다. 이 선집을 읽을 때마다 이번 게 제일 재밌었다고 하긴 하지만, 진짜로 이 책이 제일 재밌었다. 



22. 바이칼 여신(이우상. 도화. 2016. 380쪽)

: 도서관에서 대출 권수를 채우려고 빌린 책인데, 괜히 읽었다. 눈 버렸다. 진심으로, 이런 참담한 젠더 의식을 가진 작가의 책이 2000년대에 출간됐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총 9편의 작품(이라고 하기도 싫다)이 실려 있는데 그래도 다음 건 괜찮겠지, 설마 다음 건 좀 낫겠지 하는 맘으로 끝까지 읽은 게 후회된다. 시간낭비였다. 



23. 예언자의 노래(폴 린치, 허진 역. 은행나무. 2024. 364쪽)

: 늦은 밤, 아일리시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낯선 두 남자가 서 있다. 이들은 경찰. 교원노조인 남편을 찾는다. 1당 독재가 시작된 나라에는 비상대권법이라는 계엄이 실행되어 치안국 요원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시위. 참가를 망설이는 래리에게 교사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무너진 헌법의 권리를 세울 수 있겠냐며 독려했지만 결국 래리는 잡혀간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된 마크와 열네 살 몰리, 열 살 베일리와 갓난아기 벤 그리고 떨어져 사는 나이 많은 아버지 사이먼까지 아일리시 혼자서 챙겨야만 하는 상황. 이 와중에 물자 부족은 점점 심해지고 아버지는 치매기마저 보인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생이 사이먼과 아일리시네 가족을 빼내려 하지만 래리를 생각하며 거절하는데...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균열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 줄 한 줄이 다 공포스럽다. 상상할 수도 없이 치솟는 물가와 직장에서도 노골적으로 행해지는 사상 검증, 무너진 시스템 때문에 다쳐도 제대로 된 진료조차 받을 수 없고 아직 성인이 안 된 어린 청소년들까지 징집의 대상이 된다. 그러는 가운데 반란군이 응집하고, 정부군과 반란군이 도시를 양분해서 이 진영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조차 힘들고, 하지만 어떻게든 식량과 생필품을 구해서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엄마는 늘 목숨을 걸 수 밖에 없고, 그 와중에 사춘기인 아이들은 점점 불만을 표출하고... 내가 아일리시였으면 미쳐 버렸을 듯. 계속 심호흡하며 간신히 버텨가며 읽고 있었는데, 320쪽에서 결국 무너졌다. 게다가 결말도 그다지 장밋빛은 아니다. 그게 현실이겠지. 저자는 시리아 내전에서 영감을 받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썼다는데, 이런 상황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리적 배경을 아일랜드로 잡은 건 매우 효과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새삼스럽게도 작년 12월 3일이 실패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매일 전기와 물이 나오는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되었다. 



24. 소도둑 성장기(함윤이. 위즈덤하우스. 2025. 112쪽)

: 사미가 태어났을 때 의사가 벌린 주먹 안에는 작은 뼛조각이 있었다. 엄마는 그 뼛조각이 사미가 자신에게서 훔쳐낸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걸 옷 서랍 안에 보관한다. 미묘하게 사미를 언니오빠보다 덜 좋아하는 듯한 엄마 밑에서 자라며 사미는 작은 것들을 도둑질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팔 안에 들어올 만한 것들을. 초콜릿을 훔치던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도둑질을 적발한 성준과 마주한 사미는 당황하고, 성준은 수시로 사미의 곁에 나타나 도둑질을 방해한다. 그러던 어느날, 성준은 작은 상자를 프로포즈하듯 꺼내는데, 그 안엔 플라스틱 의안이 들어있다.


이야기 자체는 신선하고 재밌었다. 성준을 좋아하는 듯 하면서도 성구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사미의 마음을 알 거 같았고, 그래서 결말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쩌면 사미에게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응원하고만 싶어지는, 안쓰러운 아이 사미였다. 



25. 살인자가 아닌 남자(미카엘 요르트, 한스 로센펠트, 홍이정 역. 가치창조. 2015. 608쪽)

: 살인자가 아닌 남자는 소년의 시신에서 심장 부분을 절개하고, 시신을 동네의 외딴 웅덩이로 가져가 던진다.  소년의 엄마는 실종 신고를 하지만 찾아온 경찰은 단순 가출로 치부하며 두서없는 질문만 던지다 가버리고, 의미없는 2차 가출신고만 한다. 결국 시신이 발견되자 작은 마을은 동요하고, 수도에서 살인사건 특별전담반이 파견된다. 한편 심리학자 세바스찬은 의미없는 원나잇만 하며 세월을 죽이다가 어머니의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이 마을에 오는데, 예전에 함께 일했던 전담반의 토르켈과 마주친다.


군더더기가 많은 범죄 소설. 초반에 인물 소개가 많은 건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라 그렇다고 수긍할 수 있지만 그외에도 쓰잘데기 없는 에피소드들이 늘어진다. 예를 들면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는 과정 같은 거. 그냥 스카우트 아이들을 동원해서 실종자 수색을 하다 발견한 정도면 됐는데 스카우트 소년의 심리 상태를 쓸데없이 길게 써놓아서 서너 문장이면 될 것을 장장 4페이지에 걸쳐 늘어놓았다. 이런 에피들이 계속된다. 등장인물들도 딱히 호감가는 인물도 없다.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긴 했지만 동기도 그닥 신박하지 않았고. 이 책이 출근길에 들고 나간 두 권 중 두번째 책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안 읽었을 듯. 



26. 인간보다 인간적인(강지영. 스토리비. 2024. 312쪽)

: 변종 정수경의 능력은 매혹이다. 여느때처럼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줄을 서지 않고 행사장으로 입장하려던 수경은 특수안경을 낀 '키퍼'에게 발각되어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집으로 복귀한다. 정수경은 사실 모든 이종들이 소유주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변종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소유주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 준다는 이종. 이들은 가문대대로 소유권이 세습된다. 이종은 죽지 않고 소유주의 관심이 사라지거나 마음이 상하면 자결하고 재생한다. 이 이종이 소유주를 잃으면 변종이 된다.


(약스포)

처음엔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자는 길지 않은 이 이야기 속에서도 꽤 탄탄하게 세계관을 구축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이종들이 소유주에게 집착하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각인 같은 건가? 그럼 결말이 너무 위태한 거 아닌가? 언제든 그곳이 드러나기만 하면... 그래도 저자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지는 알 것 같다. 꼭 한 공간에서 함께 할 필요는 없다.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거, 단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어떤 생명이든 죽기 위해 혹은 사용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 수경과 교임, 영의 행복을 빈다.



27. 거인의 집(엘리자베스 맥크래큰, 김선형 역. 이안북스. 2004. 405쪽)

: 페기가 제임스를 처음 본 건 제임스가 열두 살, 페기가 스물 다섯 살 때였다. 그때 이미 제임스는 180cm이 넘었다. 학교에서 도서관 견학을 왔을 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분야 - 마술 - 를 정확히 알고 책을 찾아달라 했던 소년. 마치 어른 같았지만 (당연히) 아이의 순수함과 순진함을 지닌 제임스를 페기는 눈여겨 보게 되고, 곧 그의 아버지는 도망갔고 그는 우울한 엄마, 유쾌한 고모부와 고모와 함께 작은 집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집에도 초대받으면서 점점 그와 친해지는 페기. 제임스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신의 키가 버거워 여러 책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고, 그 와중에 술과 약을 먹은 엄마가 추운 날 집밖에 나가는 걸 돌봐주다가 제임스는 뼈가 부러지고 엄마는 사망하는 일이 생긴다.


페기가 제임스를 사랑하게 된 과정이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사랑을 하는 그 마음만은 아름다웠다. 도서관이라는 성 안에 갇힌 공주였던 페기가 제임스라는 암실로 걸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마음(121쪽). 단순히 그가 잘생겼고 키가 커서가 아니라 거인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그녀를 필요로 하기에 사랑하는 마음(122쪽). 페기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가여운 제임스에게는 그 삶이 행복으로 가득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페기가 있어서 그래도 버틸만 했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사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1950년대여서 더더욱 그랬겠지만, 남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불편함을 견뎌야 하는 정도가 아니다. 끊임없는 비정상적인 관심과 나 자신을 사람이 아닌 특출난 무엇으로 대하는 무례, 그리고 몸에 맞는 게 하나도 없어서 감수해야만 하는 아픔. 제임스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구둣가게에서 모델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발에 맞는 구두는 신을 수 없어서 - 구두를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 발에 심한 염증을 얻는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뉴욕을 보기 위해서는 서커스에서 공연을 해야만 한다. 사랑이 없었다면, 페기가 없었다면 제임스는 더 힘들었겠지. 결말에서의 페기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게 그녀로서도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지도. 남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과 그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에 관해 덤덤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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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일의 소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외, 이어령 역. 문학사상사. 2005. 375쪽)

: 여러 작가들의 앤솔러지인데, 이어령 교수가 번역 뿐 아니라 엮기까지 했다. 공통 주제라고 하기엔 좀 무리고 다만 당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 위주로 묶은 듯. 다 좋았다. 다 재밌었던 건 아니지만. 나보코프를 전면에 내세웠고 나도 그래서 선택했지만 정작 나보코프의 작품은 그저 그랬다. 가장 좋았던 건 마리아 루이자 봄발.



2. 돌이킬 수 있는(문목하. 아작. 2018. 416쪽)

: 어릴 때부터 고아로 자란 윤서리는 경찰로 입사해 수사관으로 일하던 중, 특정 사건은 흐지부지 처리된다는 걸 발견한다. 이 사건들의 담당자는 모두 서형우. 서형우는 윤서리를 불러 이것이 특수한 조직인 '비원'과 관련있음을 알려주고 윤서리를 포섭한다. 윤서리를 비원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임을 간파하고 서형우의 지시에 따라 이 조직을 비호하지만, 특정 사건에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데...


정보도 기대도 전혀 없이 읽기 시작해서 중간(아니 거의 뒤쪽)에 윤서리가 서형우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꽤 놀랐다. 그전까지도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살짝 늘어진다 싶은 부분에서 갑자기 큰 정보가 밀려오는 기분. 게다가 읽으면서 제목과 이 내용이 대체 무슨 연관인가 고민했었는데 그 고민까지 한번에 해결됐다. 다만 작가의 데뷔작이라서인지, 일부 캐릭터들은 당위성이 떨어졌다. 특히 그 쌍둥이들. 그래도 전반적으로 흡인력이 강하고 스토리도 나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을 듯. 사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대놓고 표현하지 않는 사랑. 



3. 낭만 수의사(린리신, 차혜정 역, 홍성현 감수. 모모. 2024. 360쪽)

: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함께 실습조가 된 다섯 명의 예비 수의사 이야기. 늘 1등을 놓치지 않는 아민, 돼지 농장 아들이어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수의학과에 입학했지만 공부머리가 1도 없어서 늘 고전하는 자하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반려 동물의 죽음 때문에 수의학과에 입학한 루산, 연예인처럼 인기 많은 MJ, 그리고 사연이 있는 복학생 청한. 


캐릭터들이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 같다. 다섯 명의 주인공 중 수의사가 될 자격이 있는 건 아민과 청한 뿐이어서 초반에 심하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읽었다. '넌씨눈' 인 것도 모자라 감정적으로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루산, 공부 머리 없는 거에 더해 아예 동물에 대한 지식조차 없는 - 오죽하면 아무리 길에 사는 강아지라도 강아지한테 매일 사람 먹는 음식을 주나 - 자하오, 공부는 열심히 했는지 몰라도 동물에 대한 진심이 없이 실습 중에 요령만 피우는 MJ - 하루 세 번 급여해야 할 약을 한 번에 한꺼번에 먹인다는 게 말이 되나? 환자가 안 죽은 게 다행이지. 아, 그러다 뒤에 한 마리 죽이기도 한다. 게다가 소설적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물병원에서 냉동고가 고장난 걸 한참동안 몰라서 구더기가 드글거리도록 놔두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학생들이 실습을 할 정도면 꽤 큰 규모의 병원일텐데 이 정도로 위생 관리가 안 된다고?


그래도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성장을 해 있겠지 싶어서 꾹 참고 읽었다. 어찌됐든 동물들은 귀여웠으니까. 그리고 소설 중간 부분에 이들이 대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 같다고 얘기하는 교수도 나오고, 저자도 수의학과 학생들은 놀랍도록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해서 마음이 좀 풀렸다. 결말은 예상 그대로였고 당분간은 이런 류의 소위 '힐링 소설'은 멀리하겠지만 대만 수의학과 분위기와 대만의 반려 동물 사회를 들여다 본 걸로 만족하련다. 



4. 어른이 슬프게 걸을 때도 있는 거지(박선아. 책읽는수요일. 2020. 300쪽)

: 내가 에세이를 잘 선택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상당 경우 책 자체가 저자 자신에게만 의미있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이 책도 그러했다. 저자는 산책을 소재로 자신의 추억을 엮어 글을 썼는데, 이런 소위 '감성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나와 맞지 않았다. 물론 내 마음 상태 때문이어서 다른 시기에 읽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글이 다 시큰둥했던 것도 아니다. 공감이 되는 구절들도 있었다. 다만 나란 인간이 남의 추억 팔이에 박수쳐 줄 상태가 아니었던 거지. 근데 왜 이 책을 선택해서 읽었냐고 묻는다면, 난 왜인지 이 책이 심리학 서적이라고 오해했고, 그 오해를 간직한 채 오랫동안 위시 리스트에 이 책이 있었고, 지난주에 도서관에 갔을 때 정말정말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어서 대출 권수를 채우려고 한참동안 서고 사이를 헤맸으나 채우지 못했기에 위시 리스트를 뒤져서 이 책을 찾았다. 서고에서 이 책이 에세이 사이에 있어서 잠시 당황했지만 심리 에세이인가보다 하며 빌렸다. 그리고 하필이면 마음이 각박한 날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이 글들을 저자의 추억 그대로가 아닌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느낌이 달라졌다. 이 모든 게 저자가 (혼자) 감상에 젖어 회상하는 과거가 아니라 저자의 상상이라면... 물론 이건 에세이이고 저자가 쓴 내용들은 거의 저자의 추억이지만 난 이걸 소설인 듯 읽었고 그랬더니 갑자기 재밌어졌다. 이날 난 순하고 담백한 소설이 필요했던 거다. 



5. 제로 데이즈(루스 웨어, 서나연 역. 하빌리스. 2025. 488쪽)

: 페네트레이션 테스터 잭(자신타). 기업의 의뢰를 받아 해당 기업의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가상 공격을 하여 점검을 하고 보고하는 직업이다. 남편 게이브와 함께 일하는데 남편은 집에서 네트웍 상으로 잭을 서포트하고 잭은 주로 밤에 현장에서 의뢰 기업의 보안 상태를 점검한다. 어느날 역시나 밤새도록 기업 점검을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고, 통상적인 보안 점검이라는 걸 확인해 줄 기업 이사는 연락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 끌려간 잭은 가까스로 풀려나 집으로 향하지만 다른 날들과 달리 길을 헤매고, 간신히 도착해 현관문을 가까스로 열고 들어가니 집안에 온통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남편이 목이 잘린 채 죽어있는 걸 발견한 잭은 공황상태에 빠져 신고를 늦게 하고 이로 인해 용의자가 된다.


잭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게 예상보다 힘들었다. 일단 너무 답답했고 - 처음부터 의심스럽던 인간을 왜 그렇게 덥석 믿는지 - 주인공이 너무 많이 다친다. 범인은 처음부터 알아챘지만 중간에 살짝 다른 인간에게도 화살이 돌아갔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그걸 노렸지 싶기는 하다. 어찌됐든 해피엔딩이다. 다만 범행 동기는 좀 납득이 안간다.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그래도 잘 쓴 스릴러다. 



6. 담이, 화이(배지영. 민음사. 2025. 228쪽)

: 세상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좀비로 변해 버렸다, 단 두 명만 빼고. 모두가 좀비가 되어 목적없이 걷기 시작했을 때 담은 하수관을 청소하고 있었고 화이는 주차 정산소에 있었다. 둘 다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각자도생을 하던 둘은 우연히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어 함께 있게 되지만 서로를 이해하진 못한다. 


처음엔 종말의 상황에서 둘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얘긴 줄 알고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둘이 서로를 싫어하는 걸 알고 흥미가 좀더 생겼다. 이런 설정은 없잖아. 대부분은 서로 싫어하다가도 곧 연민과 동정, 이해로 나아가지. 근데 독자로서도 각각의 상황과 성향, 그리고 행동이 이해가 되다가도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왜 굳이? 싶은 행태들. 이 책에서 좀비는 중요치 않다.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도. 중요한 건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 그러니까 사람은 싫은 사람과는 못 사는 거다. 역시 지구종말이 온다면 난 그냥 초기에 휩쓸려서 죽어버리는 1인이고 싶다. 



7.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페터 슈탐, 임호일 역. 문학과지성사. 2023. 191쪽)

: 중견 작가 크리스토프는 스톡홀름으로 젊은 여성 레나를 만나러 간다. 그는 레나를 만나 함께 걸으며 자신이 몇 년 전 만난 도플갱어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을 계속 뒤따르고 있고 그래서 자신은 그의 앞날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레나의 애인인 크리스라는 걸 이야기한다. 자신 또한 20년 전에 레나와 똑닮은 막달레나라는 여인을 사랑했었다는 것도.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믿는다. 레나는 못 믿는 그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레나에게 하는 크리스토프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그 이야기를.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난 운명을 믿는다. 성격이 운명이라는 말을. 그래서 난 누군가 나와 같은 길을 미래에 혹은 과거에 걷는다는 게 마냥 못 믿을 얘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크리스토프는 왜 그 얘길 레나에게 하는 걸까. 바뀌는 게 없는데, 바꿀 수도 없는데. 


조용한 초겨울의 산책같은 소설이었지만 결코 마음 속은 조용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질문만을 남긴 정중동의 책.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어서 읽어보고 싶다. 



8. 세 개의 적(박해울. 다산책방. 2025. 372쪽)

: 센타릭 사의 로봇팀 부장 서영하. 자신이 개발한 인간형 로봇들을 이끌고 채굴이 한창인 행성으로 온다. 인간을 도와 질병 진단, 간병 및 간호, 가사와 기타 서비스 등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로봇들은 시험 가동 중 간병 로봇인 C9이 '사망 사고'를 일으켜 여론이 돌아서자 우주로 보내진 것이다. 사실 서영하가 만든 C9은 자신의 동생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본뜬 것. 어릴 적 자신과 동생을 태운 채 아버지는 차를 몰아 바다로 돌진했고 영하는 빠져나오다 동생의 손을 놓쳤다. 이미 이 행성에 와 있던 삼촌 지제와 재회한 서영하는 로봇들을 배치하고 관리한다. 그러던 중 삼촌이 근무하는 연구동에 화재가 발생해 삼촌이 사망하고 이는 방화로 의심되지만 관리자들은 이를 덮으려는 모양새다. 영하는 어릴 때부터 친했고 지금은 이 행성에 2본부장으로 부임한 정도민에게 도움을 청해 사건을 조용히 수사한다. 그러던 중 가장 깊은 곳에서 채굴하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피부병 증상을 보인다.


단순히 로봇과 인간의 공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흔히 로봇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로봇이 상하거나 파괴되는 건 쉽게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먼 미래의 가상의 행성에서도 특정 계층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국적, 인종, 체질 때문에 그저 도구로만 존재 가치를 평가받는 사람들. 이 책의 결말은 누군가에게는 새드 엔딩일 지 모른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도 해피 엔딩에 집착하는 난 오히려 이 책의 결말이 그 어떤 이야기의 해피 엔딩보다 기꺼웠다. 이건 우주 입장에서의 해피 엔딩. 그 어떤 엔딩들보다 정당하고 올바른 엔딩이었다. 



9.  비올레타(이사벨 아옌데, 조영실 역. 빛소굴. 2023. 488쪽)

: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낸 여성의 일대기. 스페인 독감이 한창이던 1920년에 태어나 코로나 펜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생의 마지막에서 **인 카밀로에게 자신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비올레타가 화자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00년을 살면서 겪은 사회정치적 사건들과 그에 얽힌 개인사들, 우연과 필연으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애정어린 시선으로 서술된다. 어쩌면 당대를 살아간 여성이라면 흔하게 겪었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비올레타는 타고난 열정과 감각, 긍정적인 사고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새로운 사상을 거부하지 않으며 인생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게 늘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가장 큰 패착은 훌리안과의 관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 파비안과 결혼했지만 첫눈에 반한 훌리안과 불륜을 저지르고 파비안과는 당시 불법이던 이혼을 할 수 없어 '혼인무효'를 원하지만 하남자 파비안의 거부로 훌리안과는 동거를 계속하는데, 훌리안은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였다. 그냥 인간관계에서만 나쁠 뿐 아니라 불법적인 일도 서슴치않는. 이 지리멸렬한 관계를 비올레타가 끊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비올레타의 아이들 특히 훌리안과 성격이 꼭 닮은 딸 니에베스의 인생까지 망치게 된다. 읽으면서 가장 속상하고 화났던 부분. 


하지만 비올레타가 존경스러운 건, 관계에 매몰되거나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 그녀의 삶엔 늘 역경이 닥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 역병 뿐 아니라 대지진 등의 자연재해, 쿠데타, 독재 정권의 탄압과 사회 운동 등을 겪으면서 비올레타는 주위 사람들을 구하는 방법을 늘 찾아내고 나아가 자신이 가진 걸 더 많은 약자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 이게 바로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저자가 그녀의 삶을 통해 말하고 싶은 가장 분명한 주제. 가상의 인물이겠지만 또한 당대를 살아낸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한 비올레타. 현재 우리의 삶에 닥친 어려움은 비올레타가 살아간 시대와는 다르지만 그녀의 열정으로,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간다면 조금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대놓고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더라도 삶으로 페미니즘을 보여준 비올레타와 작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10.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정지음. 빅피시.2022. 240쪽)

: 관계에 관한 에세이. 난 딱히 주제를 의식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읽었다. 이 작가는 단편을 읽은 적이 있지만 에세이는 처음인데 문체가 위트있고 생각이 발랄해서 즐겁게 읽었다. 가족 관계나 사회에서 만들게 되는 관계들, 읽기만 해도 비호감인 구남친들 얘기까지 현실적이고도 실제적인, 직접적인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뻔할 수 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 그리고 적정한 거리를 두자는 것. 다 알지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삶을 적당히 드러내면서 해주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긍정적인 기분이 든다. 다 잘 될 거 같은 기분. 그래서 즐겁게 읽었다. 

 


11. 순수한 인생(데이나 스피오타, 황가한 역. 은행나무. 2017. 352쪽)

: 천재 영화감독 메도 모리. 유명 영화 사이트에 포스팅된 에세이에서 그녀는 자신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10대이던 당시 가장 유명한 감독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건 그녀 스스로 불러일으킨 논란. 그녀의 언급을 시작으로 소설은 메도의 영화 인생을 이야기해 주는데, 늘 새로운 시각으로 논쟁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자신을 믿고 밀고나가는 그녀의 독보적인 발걸음은 꽤나 진취적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 산업에 편입되기를 바라던 캐리. 캐리 또한 영화감독이 되지만 그 스텝은 메도와는 다르다. 인구에 회자될 수 밖에 없는 행보를 보이는 메도의 진실을 어쩌면 가장 잘 알고 있을 캐리의 이야기에, 전화 통화만으로 많은 유명인들의 목소리 연인이 되었던 니콜의 이야기까지 더해진다.


메도가 다큐멘터리 감독이어서 그녀의 (가상) 영화들의 이야기가 삽입되는데, 이게 이야기에 핍진성을 더한다. 마치 진짜로 존재하는 여성 감독의 커리어를 따라가는 느낌. 미국의 엔터 산업 이야기라는 점에서 테일러 젠킨스 리드의 <<데이지 존스 앤 더 식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작품의 형식이 페이크 다큐이기도 했고. 데이지 존스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메도는 적절한 시점에서 쉬기도 하고 영리하게 소재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 모든 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허용될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전화 연인' 노릇을 한 니콜은? 독자는 메도의 행보도, 캐리의 마음도, 니콜의 심정도 다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마냥 순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원제는 <<Innocents and Others>>이다. 이들이 Innocents든 Others든 어느 한 쪽에만 속한다고 할 수 없겠지. 그리고 그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될 테고. 



12. 일곱 박공의 집(너새니얼 호손, 정소영 역. 민음사. 2012. 460쪽)

: 핀천 길 끝에 있는 일곱 박공의 핀천 저택. 400여년 전 핀천 대령은 이 땅이 너무도 탐나 당시 주인이던 매슈 몰을 마법사로 몰아 죽이고 땅을 뺏었다. 몰은 죽어가며 핀천 대령을 향해 "신이 그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몰이 사는 동안엔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던 우물마저 맛이 변해버렸다. 저택이 완공되고 축하를 위한 파티가 열리던 밤 핀천 대령은 서재에서 피를 흘린 채 발견되고, 이후 400여 년이 흐른 지금 핀천 저택에는 나이 많은 독신녀 헵지바가 혼자 살고 있다. 그녀는 저택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구멍가게를 여는데, 지독한 근시에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먼 친척 조카인 피비가 찾아오는데,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존재는 저택의 어두운 생활에 빛이 되어주고, 거기에 더해 오랫동안 삼촌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복역하던 헵지바의 오빠 클리퍼드까지 풀려나 돌아온다.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을 로맨스라 언급하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로맨스적인 요소는 아주아주 끝에서야 나타난다. 게다가 난 그 로맨스가 용납이 안 돼.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고 납득이 가질 않는다. 캐릭터 붕괴 같기도 하고. 이야기의 전개는 느린 편이라 결정적인 사건은 꽤 늦게 터진다.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고딕적인 면모가 보이는데 이런 면모와 함께 마지막 그 사건과 해결을 위한 빌드업이 촘촘하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상당히 세세하여 일면 지루한 느낌도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결말, 특히 악인의 몰락이 기대되어 열심히 읽었다. 결국은 권선징악. 사랑을 통해 모든 건 해결이 가능하다는 건 어쩌면 이 저자답지 않다고도 보이지만 또 어쩌면 딱 이 저자다운 얘기일 수도. 



13.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설재인. 웨일북. 2019. 284쪽)

: 복싱 에세이랄까. 저자는 외고에서 수학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내모는 불합리한 교사 생활에 지쳐 있을 때 귀가길에 우연히 발견한 복싱 체육관을 보고 충동적으로 등록한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에너지를 끌어모아 복싱에 빠져든다. 이 자체로 하나의 성장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작가의 멋짐에 감탄했고. 단순히 챗바퀴같은 생활에 활력이나 좀 불어넣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정말 살기 위해 운동을 한 작가의 진지함이 와닿았고 한번 뛰어든 이상 끝까지 해보겠다는 끈기와 인내심도 멋있었다. 그리고 '인생 운동'을 찾아낸 것도 부러웠고. 난 아직도 내게 맞는 운동이 뭔지,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운동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는데. 작가처럼 몰두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불어 이렇게 한가지에 진심으로 임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14. 청중(바츨라프 하벨, 오세곤 역. 예니. 2000. 90쪽)

: 과거 체코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던 저자의 희곡. 부조리극이고, 등장인물은 단 둘이다. 지식인이자 극작가였던 바넥이 당국에 밉보여 맥주공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감독관인 슬라덱은 그를 불러 회유하고자 한다. 이건 이들이 되풀이하는 블랙코미디. 


(스포)


계속 비슷한 말만 반복하며 혼자 취해가는 슬라덱이 상징하는 정부의 불합리함과 무능력함은 딱 보이는데, 마지막 장면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지막에 바넥이.... 왜? 그냥 일하기 싫어서? 아님 슬라덱을 조롱하려고? 읽을 땐 재밌고 쉽게 읽었는데 덮고 나니 생각이 많아지는 희곡이었다. 



15. 이별여행(슈테판 츠바이크, 배정희,남기철 역. 이숲에올빼미. 2011. 200쪽)

두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책. 두 편 다 좋았지만 표제작이 더 이 작가다웠고 더 내 취향이었다. 부잣집 가정교사로 일하던 기억에 부자들을 경멸하던 화자. 노력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후 유망한 기업에 입사해서 일하는데, 병색 짙은 사장이 자신의 입주 개인 비서일을 해달라며 상당한 연봉을 제시한다. 내키지 않지만 사장의 저택으로 간 그는 사장의 젊은 부인에게 호감을 품게 되고, 아슬아슬하게 두던 거리는 그가 멕시코 광산사업에 투입되게 되면서 급격하게 좁혀진다. 멕시코에 간 그는 부인과 편지를 주고받지만 곧 전쟁이 터진다.


마지막이라는 말만큼 애틋한 단어는 드물다. 특히 사랑했던 사이라면. 화자의 마음도 부인의 마음도 다 공감됐다. 다만 나라면 그 마지막 여행은 가지 않았을 것. 한때 회자되던, '사랑한다'의 반대말은 '사랑했었다'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16. 바보들을 위한 학교(사샤 소콜로프, 권정임 역. 문학동네. 2010. 288쪽)

:  지적 장애아의 세상. 그가 살고 있는 세상과 그를 바라보는 세상. 그 안의 세상과 밖의 세상. 두 세상의 이야기가 번갈아 보여진다. 


고백하자면, 제목만 보고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처음에 당황했다. 그래도 각 챕터의 특징을 그리 늦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첫 챕터를 읽으면서 딱히 줄거리를 특정할 수 없다할지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화자의 머릿속 세상. 물론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악인도 있고 부조리도 있다. 하지만 화자와 결혼할 아름다운 여인도 있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우체부도 있다. 그래서 난 오히려 바깥 세상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당황스러웠다. 처음엔 안과 밖을 끼워맞춰 보려 했지만 곧 포기했고, 진즉에 포기하길 잘했다. 그냥 그 자체로도 괜찮았으니까. 이 세상이 그를 위해 계속될 수 있다면...



17. 밤의 책(실비 재르맹, 김화영 역. 문학동네. 2020. 504쪽)

: 비탈리 페니엘은 앞서 낳은 여섯 명의 아이를 모두 잃었다. 일곱 번째인 이 아들은 처음부터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태어났다. 바지선 위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테오도르포스탱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다른 배의 선주 딸 노에미를 아내로 맞이해 아들 오노레피르맹과 딸 에르미니빅투아르를 낳는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한 막달, 테오도르포스탱은 징집당해 참전하게 되고 프로이센 병사의 창에 얼굴이 대각선으로 갈라지는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테오도르 포스탱은 영혼마저 갈라진 채 돌아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또다른 아들 빅토르플랑드랭을 얻는다. 황금의 밤 늑대 낯짝이라는 별명을 갖게 될 아이를.


이 작가의 작품은 줄거리를 설명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작품이 내게 보여준 아우라는 1%도 표현되지 않는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까지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며 한 사람이, 한 집안이 어떻게 견디고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이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은 한 문장 한 문장을 모두 살살 쓰다듬으며 읽어야 한다. 아니, 첫 독서에서는 그럴 필요 없지만 작가의 문장들은 반드시 재독을 부를 것이고 그럼 그 때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읽어 나가면 된다. 미우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황금의 밤 늑대 낯짝은 날 화가 나게도 하고 안타깝게도 했지만, 정말 날 울린 건 비탈리, 그리고 황금색 그림자. 그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황금의 밤 늑대 낯짝은 그렇게 긴 삶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눈 속 열 일곱 개의 황금색 반점들 또한. 


삶은 누려야 할 어떤 것일까, 혹은 견뎌야 할? 황금의 밤 늑대 낯짝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정작 견디는 건 그가 아닌 그의 가족들이었나? 무력하게 죽어간 그의 아내들은? 처음 그가 일곱 개의 진주를 달고 황금색 그림자를 끌고 길을 떠날 때 느꼈던 안쓰러움은 책장을 덮었을 때는 많이 희미해져 있었지만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어쩌면 해야할 일은 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18. 닉 애덤스 이야기(어니스트 헤밍웨이, 이영아 역. 빛소굴. 2024. 324쪽)

: 저자가 쓴 여러 단편들 중 주인공이 닉 애덤스인 작품들만 모았다. 닉이 어릴 때부터 점차 자라서 참전을 하고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될 때까지 순차적으로 엮었다. 겁 많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 나름대로 고난을 이겨내고 꽤나 능글맞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헤밍웨이가 창작한 인물들 중 저자의 모습이 많이 반영된 인물이라는 점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꽤 흥미로웠다. 평소에 책 속 인물에 저자를 대입하지 않으려 애쓰며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아예 대놓고 그 점을 표방했기에 처음에는 뭔가 탐색하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곧 잊고 닉 애덤스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닉이 유년기를 다시 한 번 살아내는 느낌이었다. 이 작품만 보면 닉이 그저 귀향해서 야영하며 낚시를 하는 게 다이지만 전체 맥락을 보면 그가 전장에서 귀환했음을 알 수 있고 그러므로 닉이 하는 행위는 유년기를 짧게나마 되풀이함으로써 전쟁의 트라우마를 씻어내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것. 잡은 숭어를 놓아주는 행위는 아마도 전쟁 중의 살생을 속죄하는 의미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동양적인 사고일까? 


오랜만에 읽은 헤밍웨이라서 좋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볼 동기가 되어주었다. 



19. 고래눈이 내리다(김보영. 래빗홀. 2025. 284쪽)

: SF 단편집. 좋아하는 작가라서 도서관에서 발견하자마자 얼른 집어들었다. 그런데 첫 작품인 표제작부터 너무 마음 아파서 책장이 금방 넘어가진 않았다. 표제작은 길고 슬픈 서사시 같았다. 분량의 길이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별처럼. 그러나 실은 엄청 빠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가장 인상깊었던 건 표제작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다 좋았고, 다 슬펐다. 특히 <껍데기뿐이라도 좋으니>는... 내가 언니가 아니라면 덜 슬펐을까? 



20. 호박색 밤(실비 재르맹, 이창실 역. 문학동네. 2021. 560쪽)

: <<밤의 책>>의 후속작.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위해 <<밤의 책>>을 쓴 것이라고. 황금의 밤 늑대 낯짝의 손자인 샤를빅토르의 이야기이다. 형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어머니의 관심을 잃어버린 그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부모를, 세상을 증오하게 되고 스스로 살아남는다. 혼자 숲 속을 헤매며 혼자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혼자만의 논리로 타인을 재단하던 그는 여동생이 태어나자 동생을 자신이 독점하고 자신의 세계관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동생은 곧 그의 그림자를 벗어나고자 하고, 호박색 밤은 파리로 떠난다.


호박색 밤 불의 바람이 너무 공감하기 힘든 캐릭터라 전편에 비해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었다. 그가 파리에서 저지른 일도 그저 냉정하게 바라보았고. 그가 평범한 인간의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죄책감은 좀 의외였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건 페니엘 가의 다른 사람들. 전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특히 비올레트오노린과 로즈엘로이즈의 이야기가. 하지만 내가 책이 끝날 무렵 흘린 눈물은 마틸드를 위한 것이었다. 평생 알아주는 이 없는 외사랑을 한 마틸드. 전편을 읽을 땐 그저 욕심으로 보였던 그녀의 마음이 이제야 느껴졌다. 하지만 삶은 늘 그렇게 흘러가지. 깨달음은 뒤늦게 오는 것. 



21. 버넘 숲(엘리너 캐턴, 권진아 역. 열린책들. 2025. 592쪽)

: 도심 곳곳 '놀고 있는 땅'에 작물을 경작하는 게릴라 가드닝 단체 버넘 숲. 창시자인 미라 번팅은 우연히 교외의 손다이크 마을이 산사태로 고립되었고 사고가 있었을 당시 근처의 농장주 오언 다비시가 구조 작업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집을 포함한 재산을 제공했고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다. 게릴라 가드닝에 딱이라는 생각에 손다이크에 간 미라는 그곳에서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오언 다비시의 땅을 구입하려는 로버트 르모인과 마주친다. 사실 르모인이 그 땅을 사려는 건 다른 속셈때문. 르모인은 얼결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미라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한편 미라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이며 버넘 숲의 모든 골치아픈 행정 업무를 맡아하고 있는 셸리는 버넘 숲과 미라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미라에게 말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오래전 해외로 나가기 전에 미라와 사건(?!)이 있었던 토니가 귀국했다며 미라를 찾아 집으로 온다. 토니는 버넘 숲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했기에 셸리는 토니를 이용해서 미라를 떠나려 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버넘 숲의 '후이'(정기 모임)에서 토니와 미라는 충돌한다. 미라는 버넘 숲 멤버들을 이끌고 손다이크로 가서 가드닝을 시작한다.


뭔가 큼직하다고 할 사건은 374쪽에 이르러서야 터진다. 하지만 그전까지 마치 풍선이 부풀듯 미라와 셸리, 르모인 그리고 토니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가 충분히 흥미진진하게 쌓여간다. 빌드업이 꽤나 촘촘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비호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결말을 맞을 만큼은 아니었는데. 사실 내가 진짜 싫어했던 인물은 **이었다. 근데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 인물에 기대야 하게 되었다니.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결말이지만, 새드 엔딩이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역시 잘 쓰는 작가다. 



22. 사건은 식후에 벌어진다(김노랑,김태민,한켠,박하루,범유진,유사본,전효원. 황금가지. 2021. 312쪽)

: 음식을 소재로 한 앤솔러지. 첫번째 작품이 너무 기시감 있어서 지난 독서목록을 뒤져보기까지 했는데 아니어서 그냥 읽었다. 그런데 내용은 다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갔는데 결말에 작은 반전이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말이었는데도. 두번째는 살짝 지루했어서 눈물이 쏙 들어갔는데 세번째가 또 눈물샘을 꾹 누르더라. 그 뒤 세 작품은 다 재밌었다. 감칠맛 나게 잘 썼다, 세 작품 다. 셋 다 읽으면서 이게 젤 재밌네 했어서 뭐가 1등인지 못 고르겠다. 



23. 직감과 두려움(마조리 보웬,에드워드 프레더릭 벤슨,앨저넌 블랙우드,윌리엄 윌키 콜린스,엘리자베스 개스켈,버넌 리,엘런 글래스고, 장용준 역. 고딕서가. 2023. 324쪽)

: 고딕 단편들. 모든 작품들이 다 재밌었다. 굳이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흥미로웠지만 읽다 보면 당연히 여성주의 시각에서 볼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 그래서 가장 좋았던 건 버넌 리 <인형>. 직접적이고 확실한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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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법에 걸린 집을 길들이는 방법(찰리 N. 홈버그, 유혜인 역. 북플라자. 2024. 432쪽)

: 소설가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던 메릿. 어릴 때 만난 기억이 희미한 외할머니가 그에게 유산으로 집을 남겼다는 걸 알게 되어 초라한 하숙집을 떠나 윔브렐 하우스로 온다. 그런데 간신히 들어간 집에서는 초상화 속 여인이 메릿을 노려보고, 벽이 변형되며, 심지어는 문을 잠가 메릿을 집 안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다행히 이런 마법에 걸린 집을 관리하는 기관인 '바이커'에서 헐다라는 이름의 가정부가 파견되고, 메릿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집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시작한다. 한편 30여년 전 영국에서는 사일러스라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폭행하던 아버지를 죽이고 그 능력을 흡수한다. 사일러스는 마법력이 있는 대상에게서 능력을 흡수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데...


설정이 정교하고도 재밌어서 즐겁게 읽었지만 19세기 초임을 감안하더라도 여성의 역할 고정 관념이 너무 강해서 약간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작품 속에서 여성은 하녀 혹은 가정부 역할 만을 맡는다는 게 좀... 비슷한 맥락에서 로맨스도 좀 억지스러운 거 같았고. 사실 헐다가 자신이 가진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너무 떨어지는 게 제일 답답했다. 집이 보여주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흥미로웠지만 충분히 보여주지는 않은 거 같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이 부분이 좀더 묘사되었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



2. 딩(문진영. 현대문학. 2023. 172쪽)

고등학교를 멀리 진학해 고향 마을을 떠난 지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몇십 년 만에 돌아온다. 어릴 때는 지원과 단짝이었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멀어졌던 주미는 부모님이 하시던 해변 모텔을 이어받아 계속 하고 있다. 어느날 독특한 억양의 여성이 찾아와 몇 달 전 남자가 목을 멘 401호에 묵고 싶다며 한달 치 방세를 내민다. 여성은 해변 옆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주미 아버지 친구인 영식이 하는 주미네 모텔 앞 포장마차에서 매일 저녁을 먹는다.

Ding은 서핑 보드에 난 상처를 말한다. 서핑을 하면 딩이나는 건 당연하다. 삶도 마찬가지겠지. 상처 안 받는 삶이 어딨겠어. 각자의 사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원과 주미가 살아온 이야기 끝에 재인의 이야기가, 재인이 저녁 마다 들르게 된 포장마차의 영식 이야기가, 그리고 영식의 집에 살게 된 쑤언의 이야기가. 물론 각자의 상처도 있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가가 해설에서도 얘기했듯 이 소설은 상처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처를 씩씩하게 극복해내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작은 행동 하나가 상처를 딛고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살면서 건네지는 지도 몰랐던 온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 버티는 게 힘겹지만, 살아있는 한 살아야만 하는 것. 살다보면 언젠간 저 멀리 수평선에서 고래 모습을 한 신을 만날지도.



3.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세라 핀스커, 정서현 역. 창비. 2025. 528쪽)

: SF 단편집. 첫번째 작품 <이차선 너비의 고속도로 한 구간>이 꽤 좋았어서 마음을 열고 읽어나갔다. 모든 작품에서 좋은 부분이 하나 이상씩 있어서 즐겁게 읽었지만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 좀 거슬리기는 했다. 가장 좋았던 건 <그리고 (N-1)명이 있었다.



4. 록커, 흡혈귀, 슈퍼맨 그리고 좀비(차삼동,김성준,손장훈,서번연,유권조,조성희. 황금가지. 2019. 420쪽)

: 좀비 아포칼립스 앤솔러지. 그냥 편하게 읽으려고 집어들었는데 첫 세 작품이 기대보다 더 유치해서 좀 실망스러웠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아들에게>를 읽었는데 뚯밖에도 작품성이 높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른바 '정상인'의 관점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회적 취약자(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들)를 보호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꽤 신선했다. 문장도 나쁘지 않았고, 결말도 타당했다. 그 뒤의 작품 <성모 좀비 요양원>도 나쁘지 않았다.



5. 나에게 진실이라는 거짓을 맹세해(헬레네 플루드, 권도희 역. 푸른숲. 2024. 528쪽)



6. 폐월; 초선전(박서련. 은행나무. 2024. 244쪽)

: 《삼국지(연의)》 속 절세미인이자 임팩트있게 등장하고 납득 안 되게 사라지는 초선을 그녀 자신의 시선을 다시 썼다. 삼국지를 안 읽은 사람이라도 초선의 이야기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겠지만, 그런 배경 지식 없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 무엇보다 초선의 능력과 노후를 제대로 그려주어 흡족했다. 삼국지의 그녀는 도구로서만 다뤄지는 느낌이었다면 여기서의 초선은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냈고 스스로 선택한 노후를 맞이한다. 사실 초선의 노후 부분이 가장 좋았다. 작가 자신도 얘기했지만 삼국지의 초선의 사라짐은 그녀의 캐릭터를 볼 때 말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작가가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종종 해줬으면 좋겠다.



7. 내가 만든 여자들(설재인. 카멜북스. 2019. 268쪽)

: 여성의 삶을 여성의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단편집. 작가의 첫 소설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제를 섬세히 드러내면서도 중심이 잘 잡힌 이야기들이다. 사실 표제작이 너무 강렬해 다른 작품들의 내용이 잠시 잊혀질 정도였다. 지금 리뷰를 쓰기 위해 책 목차를 보니 다시 기억이 살아나긴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고, 문장들과 내용도 좋았지만 특히 여성을 돕는 건 여성이라는 주제 의식이 뚜렷한 점이 가장 좋았다.



8. 오직 밤뿐인(존 윌리엄스, 정세윤 역. 구픽. 2020. 212쪽)

: 청년 아서는 일없이 호텔에서 생활한다. 아버지와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소원하고,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거의 없다. 아서는 갑자기 온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당대의 불안한 청년상을 그렸다. 하지만 꼭 그게 시대상 때문은 아니다. 예민하고 우울하며 자아가 비대한 아서의 심리는 사실 공감하기 힘들다. 그가 그렇게 부유하듯 살 수 있는 건 결국 집안의 경제력 덕분이니, 하고 다니는 짓들이 모두 배부른 투정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자 이 책을 읽으면서 주목한 건, 이게 바로 <<스토너>>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거. 철없고 치기어린, 불안하고 미숙한 아서가 있었기에 윌리엄 스토너의 아내 그레이스가 있을 수 있었겠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어서 읽어봐야겠다.



9. 암살 주식회사(잭 런던, 김이선 역. 문학동네. 2005. 303쪽)

: 러시아 출신 이반 드라고밀로프는 사회의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암살국'을 운영한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하는 조카가 있는데, 조카는 그가 이런 일을 하는 걸 꿈에도 모른다. 조카는 자신의 애인이 삼촌과 친하게 지내길 바라 그에게 애인을 소개시켜 주기로 한다. 하지만 조카의 애인인 윈터 홀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살인 사건에 의문을 가지고 추적을 하던 중, 지인이 부둣가에서 은밀히 살인 의뢰 영업(?)을 받았다는 얘길 듣게 된다. 그는 수완좋게 암살국에 접근하여 드라고밀로프와 대면하고, 드라고밀로프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다. 드라고밀로프는 이를 수락하고 전 조직원에게 공지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윈터 홀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바로 드라고밀로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의 미완 유고를 로버트 피쉬가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초반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추격전이 된다.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결말 부분이 저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고, 역시나 조금 이질적이다 싶은 부분은 원저자의 저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말 자체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은 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일종의 트릭(?) 부분이 아쉬웠다는 것. 사실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적 제재가 과연 옳을까 였을 듯. 그리고 내가 읽고 싶었던 건 속 시원하게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둘 다 멀어진 듯. 그래도,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은 한다.



10. 데이비드 코퍼필드 상, 중, 하

: 데이비드가 태어나던 말, 고모할머니(아버지의 고모)는 데이비드의 엄마를 방문한다. 자신의 조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조카며느리가 임신한 몸으로 홀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고 방문한 것이지만, 상냥하게 도움을 주는 대신 태어난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란 걸 알고 그냥 돌아서 가버린다. 데이비드는 엄마와 하녀 패거티의 지극한 돌봄을 받으며 자라나지만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새아버지와 새아버지의 누이의 언어 폭력과 교육을 가장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 참고 반항을 하고, 그 대가로 기숙학교에 보내진다. 역시나 폭력적인 성향의 교장의 독재하에 얼어붙은 분위기의 학교에서 데이비드는 간신히 친구 스티어포스를 사귄다. 하지만 새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착취 당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데이비드는 런던의 한 공장에 일꾼으로 보내진다.


내가 가진 책이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PMS 여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 둘 다겠지 - 집중이 너무 안 됐다. 글씨가 작고 행간도 촘촘하긴 했지만 이 세 권을 정말 오랫동안 읽어서 나중엔 머리가 아팠다. 문장도 너무 예스러웠고 심지어는 맞춤법도 예전 방식이어서 더 읽기 힘들었다. 게다가 비호감 캐릭터들도 너무 많았어... 그래도 저자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많은 듯 하여 그 부분에 집중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해피엔딩일 거라는 기대에 기대어. 하지만 당분간은 이 저자를 못 읽을 거 같다. 심지어는 어젯밤에 안읽쌓 책탑 정리하다가 이 저자의 다른 작품이 나와서 한숨을 쉬면서 아래로 밀어넣었다.



1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애거사 크리스티, 김유미 역. 황금가지. 2015. 404쪽)

: 추리 단편집. 위의 디킨스 때문에 아픈 머리를 좀 식히려고 읽었는데, 잘 선택했다. 제목이 뭔가 동화 같아서 기대했는데 읽을 땐 전혀 동화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돌아보니 그래도 그 정도면 순했다 싶었다. 푸와로 경감과 마플 양의 이야기들인데 아무래도 단편들이니만큼 발로 뛰기보다는 안락의자 탐정의 분위기가 강하다. 그리고 난 그래서 더 좋았다.



12. 전쟁을 위한 기도(마크 트웨인, 존 그로스 그림, 박웅희 . 돌베개. 2003. 104)

: 마크 트웨인의 우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 호전성과 이기심, 잔인함을 비판한다. 평화를 위하는 척 하지만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를 바라는 마음, 내 편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임을 외면하는 위선. 내용은 짧지만 인상적인 삽화와 함께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13. 그 머나먼 - 2011년 제56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진은영 외. 현대문학. 2010. 224)

: 사실 시는 (거의) 매일 읽는다. 자기 전에 한 두 편씩. 잠이 안 오는 밤엔 쭉쭉 읽는다. 하지만 피곤한 밤엔 한 편도 채 못 읽는다. 그래서 내 침대 머리맡엔 늘 시집이 있다. 그리고 그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건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므로 독서 목록엔 넣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은 앉은 자리에서 쭉 읽었다. 비가 그친 토요일 오후 베란다 테이블 앞에 앉아 산바람을 맞으며, 무알콜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며 끝까지 읽었다. 분명 무알콜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조금 취한 듯한 기분이었고 하늘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시는 다 좋았다. 수상작도 후보작도. 자선작도 역대 수상자 근작도. 유홍준과 이승훈만 빼고. 이 둘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14. 위스퍼맨(알렉스 노스, 김지선 . 흐름출판. 2022. 516)

: 제이크는 심장 마비로 죽은 엄마를 발견한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제이크에게 위안이 되는 건 언젠가부터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단발머리가 한쪽으로 삐치고 무릎의 상처가 낫지 않는 금발 소녀. 제이크는 소녀가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걸 알고는 있다. 아빠 톰도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직 크지만 더 큰 문제는 제이크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 엄마와 유난히 유대가 깊었던 제이크를 돌보는 건 점점 더 힘에 부치고, 톰은 일단 아내가 죽은 집을 벗어나고자 페더뱅크라는 마을로 이사한다. 제이크가 처음부터 맘에 들어했던 집에 들어가지만 제이크는 지하에서 울부짖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실 이 마을에는 20여년 전 위스퍼맨이라는 연쇄 살인범이 있었다. 어린 소년들을 죽였던 그는 피트 형사의 결정적인 포착으로 검거됐지만 마지막 희생자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피트는 마음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를 면회하지만 위스퍼맨은 피트를 조롱할 뿐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또다시 어린 소년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톰은 수상한 사람이 자기네 집 차고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걸 발견한다.


스릴러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톰과 제이크의 관계 뿐 아니라 위스퍼맨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다른 부자의 이야기. 아이도 부모도 서로를 사랑하지만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좋을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이 바라는 것과 상대방에게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소설 중반까지 이렇게 어긋나는 톰과 제이크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양쪽 다 너무도 이해가 되어서. 작가는 스릴러의 긴장감도 놓치지 않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정말 섬세하게 잘 풀어냈다. 가족 간의 관계 뿐 아니라 상처한 후 처음 데이트에 나선 톰은 심경이라든가 자신보다 어린 상사 어맨다를 대하는 피트의 마음, 그리고 어맨다의 심경까지.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15. 잼 한 병을 받았습니다(홍락훈. 에이플랫. 2023. 4254)

: SF 초단편집. 두 세쪽 정도의 짧은 단편들이긴 한데 연작인 것들이 많아서 많이 짧은 기분은 아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앞으로 쓸 작품의 시놉시스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있다. 아이디어가 대체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뭔가 세계관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휙휙 바뀌는 느낌도 들어서 뒤로 갈수록 피곤해졌다. 그래서 처음 읽기 시작할 땐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지 했다가 책을 덮을 즈음에는 당분간은 이 작가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16. 세인트 클라우드(벤 셔우드, 이나경 . 문학수첩. 2010. 360)

: 열 다섯살 찰리는 엄마가 외출한 사이 동생과 이웃집 아줌마의 차를 몰래 타고 옆 도시의 야구 경기를 관람하러 가기로 한다. 야구가 끝난 후 밤거리를 운전해서 돌아오던 찰리는 맞은 편의 트럭을 미처 보지 못해 사고를 내고, 자신과 동생 샘의 영혼이 붕 떠 있는 걸 알게 된다. 무서움에 샘의 손을 잡고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않기로 맹세한 형제. 하지만 구급대원의 심장 마사지로 찰리는 현생으로 돌아오고, 샘은 그렇지 못한다. 스물 여덟이 된 찰리는 샘이 묻힌 마블헤드 공동묘지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며 부둣가의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해가 지는 시간에는 늘 그를 찾아오는 샘의 영혼. 형제는 석양 빛이 사라질 때까지 캐치볼을 한다. 한편 닻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늘 요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테스. 최초로 혼자 요트 세계 여행을 한 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다. 테스는 마블헤드 묘지에 잠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가 찰리를 만난다.


테스의 상황을 비롯해서 내용이 너무 뻔했지만 소설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편안하게 읽었다. 이렇게 해피 엔딩이 보장된 이야기를 읽고 싶기도 했고. 특히 석양 무렵의 두 형제의 공놀이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운 비글도 함께. 결말은 조금 아쉬웠다. 이런 이야기에서 이 정도면 열린 결말 아닌가? 물론 분위기상 해피엔딩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겠지만. 어쨌든 좋았다.



17. 도깨비불(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이재룡 . 문학동네. 2012. 204)

: 마약 중단을 시도하고 있는 알랭.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애인은 그에게 시큰둥하다. 허술한 사설 요양원에서 파리로 외출을 나온 그는 자신이 마약을 다시 하게 되리라는 걸 안다. 몇몇 지인을 찾아가고, 친구 뒤부르와도 만나지만 그의 머릿속엔 자살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성적으로도 능력이 없는 알랭. 심지어는 지인들마저도 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알랭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는 힘들었다. 그의 방황 또한 한심했다. 다만 그의 행태가 당대 젊은이들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인지 생각을 하긴 했다. 1차 대전 직후 기존 가치관의 붕괴와 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따른 허무주의로 알랭과 같은 젊은이들이 많지 않았을까. 뒤부르가 동양 철학에 심취한 것도 그런 사회상에 영향을 받을 것일지도. 어쩌면 자살은 알랭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알랭의 자살은 처절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그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순차적으로 일어날 일이었을 뿐. 이야기 밖에서 그를 지켜본 독자 또한 그가 아깝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18. 사랑은 하트 모양이 아니야(김효인. 안전가옥. 2025. 228)

: 로맨스 두 편. 둘 다 설정이 흥미로웠다. 표제작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아내와 감수성 충만한 남편이 이혼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 수록작은 자신이 죽는 날을 알게 된 남자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와 우리나라 월드컵 16강 예선을 보고 죽기 위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서 일어나는 일. 사실 표제작은 내용이 뻔했지만 작가가 상당히 섬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풀어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수록작 설정이 더 재밌었는데, 나라면 그렇게 진취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되어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결말은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한 번 비틀었어도 좋았겠다 싶었다. 이 작가를 처음 읽은 거 같은데 - 앤솔러지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다. 잘 쓴다.



19.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줄리애나 배곳, 유소영 . 인플루엔셜. 2025. 408)

: SF 단편 15. 첫번째 작품이 인상깊었는데 갈수록 작품들이 좋아졌다. 15편 각각의 설정이 다 다르고 다 참신해서 계속 즐거웠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대부분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갖고 있다는 게 짠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마음을 정말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20. 설자은, 불꽃을 쫓다(정세랑. 문학동네. 2025. 336)

: 설자은 시리즈 2. 전편에서 왕을 만나 집사부 대사로 임명된 설자은. 어느 밤 불이 났다는 외침에 현장으로 달려간 자은과 목인곤은 불탄 집 안에서 네 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들이 화재가 시작되기 전에 숨진 걸 알게 된 자은은 이를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곧 금성 다른 동네에서도 화재가 일어난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읽는 내내 당대의 사회상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내다니, 새삼 작가의 섬세함에 감탄했다. 게다가 자은의 성장도 꽤 감격스러웠다. 추리 능력이야 전편부터 확실했지만 이번 편에서는 자은이 좀더 왕의 흰 매로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느낌. 마지막 에피소드의 결말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망설이지 않고 검을 쓴 자은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이 경험이 다음 편에서는 자은을 어떤 곳으로 이끌지 기대된다.



21.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 한은경 . 민음사. 2006. 358)

: 폴란드 출신 레오 거스키는 독거 노인이다. 윗층 사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 브루노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매일 외출을 해서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이웃에게 노출시키지만 사실 존재감은 없다. 사실 레오가 이곳 미국에 오게 된 데에는 고향 슬로님에서 함께 자란 첫사랑 알마의 영향이 크다. 알마가 먼저 미국으로 떠나왔고, 레오는 그녀에게 계속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받지 못했다. 2차 대전에서 살아남아 간신히 미국에 와서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였다. 그후 레오는 이런저런 직업을 거쳐 사촌형의 열쇠 일을 함께 해왔고, 얼마 전 심장마비가 한 번 온 후 쉬고 있다. 그런데 레오가 폴란드에 있을 때 알마를 위해 썼고 친구에게 맡겼다가 유실된 원고 『사랑의 역사』가 우편함에 들어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간되어서. 한편 열네살 소녀 알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예전에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한, 즈비 리트비포프가 쓴 스페인어 책 『사랑의 역사』를 발견한다. 엄마를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주고픈 알마는 번역가인 엄마에게 제이컵 마커스라는 남자가 자신이 읽기 위해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의뢰를 해오자 이 사람과 엄마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열네살 알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레오의 소설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혼란스러운 머리로 열심히 읽어나간 결과 이야기를 잘 끼워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레오가 한없이 가여워졌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의 삶은 얼마나 힘없이 나풀대는지.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즈비가 한 일은, 즈비의 아내가 한 일은 내게 분노를 불렀지만. 마지막 장면은 내내 쓸쓸했던 레오의 삶에서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삶을 지탱해 오던 사랑이 모두 끝났다는 면에서는,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모든 사랑의 역사가 레오의 삶에서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


(스포)


왜 아이작이 책의 번역을 의뢰했는지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22. 라플란드의 밤(올리비에 트뤽, 김도연 . 달콤한책. 2018. 608)

: 라플란드에 순록경찰로 처음 부임한 니나. 40일간의 극야가 끝나고 해가 돌아오는 날 첫 근무를 시작한 니나는 파트너 클레메트와 순찰을 돌면서 순록치기 마티스와 안면을 튼다. 마티스는 게으르고 지저분한 생활을 하며, 술에 절어 있다. 마티스의 순록 떼가 자꾸만 영역을 이탈해 다른 순록치기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상황. 니나는 마티스의 시선이 불쾌하다. 한편 이 지역의 토착민 사미족을 위한 유일한 박물관의 관장이 얼마전 프랑스의 수집가에게서 기증받은 사미족의 전통 북이 도난당했다고 신고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독선적인 이단 배척 정책 때문에 전세계에 71개 밖에 남지 않은 매우 귀중한 북을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마티스가 살해당한 채로 발견된다.


순록경찰 둘이 의지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가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사미족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토착민에 대한 착취와 차별 대우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에 과격하게 맞서는 사람도, 물 흐르듯 흐름을 따라 순응하는 사람도 다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건 아일라. 가여운 아일라. 그리고 가여운 아슬락. 조상이 살던 곳에서 조상이 살던 방식을 유지하며 그저 삶을 이어가기만을 바랐던 사람들이 그렇게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이 책은 범죄 소설이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것보다 내게는 사미족의 현실이, 그리고 아슬락의 마지막 모습이 가장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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