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이하진. 안온북스. 2025. 276쪽)

: SF 단편집. 이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고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역시나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이거나 또 어쩌면 조금은 비호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과 절대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작가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우선되어져야 하는지. 작가가 보여주는 작은 희망들이 아름다웠다.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선물>.



2. 낯선 편지(이머전 클락, 배효진 역. 오리지널스. 2025. 512쪽)

: 웨딩 드레스 디자이너 카라. 엄마는 두 살 때 돌아가셨고 폭력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아버지에게 질린 오빠 마이클은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 이제는 런던에서 가족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고 카라는 아버지를 돌봐 줄 누군가를 고용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익숙한 물건을 주면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다락방 앞에 서게 된 카라. 어릴 적 아버지는 다락방 출입을 엄금했다. 다락방 근처에서 놀고만 있어도 불호령을 내렸던 아버지. 이제는 카라가 다락방을 뒤져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고, 카라는 먼지 쌓인 다락방 가장 구석진 곳에서 수상쩍은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가들에게'라고 쓰인 엽서가 가득한데...


(약스포)


낯선 엽서의 비밀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난 카라의 입장에서 화가 났을 뿐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선택한 애니에게, 순진하게도 자신의 엽서가 아이들에게 전해질 거라 믿었던 애니에게. 나라면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렇게 허술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 법원과 남편, 사회의 폭력성을 그렇게 겪고도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늦은 나이에 진실을 알게 된 카라의 혼란과 배신감은 정말이지... 등장 인물들 중 P선생을 제외한 누구도 카라의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도 내 화를 돋웠다. 엄마 없이 자란 카라 안의 어린 아이를 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게 핍진성이겠지. 이야기는 잘 짜여 있었고 필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 빠지는 독서였다.



3. 밤을 달려온(연여름. 황금가지. 2026. 340쪽)

: SF 단편집. 모든 작품이 다 재밌고 좋았다.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이야기들이지만 소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정말 다 좋았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캐트닙 네트워크>. 가장 좋았던 건 <화살 거두는 천사 틸리의 선택>.



4. 호랑이성의 마법사(루이스 새커, 김영선 역. 창비. 2025. 416쪽)

: 한때 성을 둘러싼 해자에서 호랑이를 키웠다는 전설 때문에 호랑이 성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고성 앞 카페. 배 나오고 땅딸막한 키의 미국인 남성 관광객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때때로 크루아상의 부스러기를 후드 티 주머니 안으로 떨군다. 사실 그는 500년 전 이 성에 살았었다. 1523년 몰락해 가는 왕국 에스콰베타. 뛰어난 마법사인 아나톨은 재무장관의 요청으로 연금술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왕의 부름에 달려가 보니 부유한 옥사타니아 왕국의 왕자와 정략 결혼을 하기로 한 툴리아 공주가 견습 필경사 피토와 사랑에 빠졌으니 이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어릴 때부터 아나톨을 따랐던 공주 또한 피트를 구해달라며 도움을 청한다. 고심 끝에 아나톨은 피트에게 기억을 잃는 약을 먹이기로 하고 레시피를 섬세하게 조정해 가며 딱 맞는 몰약을 만들기 위해 매일 피트가 갇힌 지하감옥을 방문한다.


별 기대 안하고 그저 머리나 식혔으면 하고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지만 정치적 입장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태도들과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하는 긴박함, 위정자들의 위선과 무지, 얕은 술수 등이 공주와 피트, 아나톨의 모험에 다채로운 색을 더해주었고, 그 와중에 공주와 피트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읽는 건 (아마도) 처음인데 지난 작품들도 종종 찾아 읽어야겠다.



5.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미래(염승숙. 문학과지성사. 2025. 296쪽)

: 오랜만의 단편집.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 즈음의 내가 많이 지친 상태였어서 독서가 즐겁지 못했다. 내 현실이 힘든데 굳이 다른 사람들의 힘든 현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정말 힘들게 잘 쓴단 말이다. 불안하고 힘겨운 현재, 미래가 있기야 있겠지만 지금과 별반 다를 리 없는, 오히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물론 일상에서 언뜻언뜻 선한 사람들의 배려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우연이잖아. 그런 우연이 늘 생기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끝까지 읽었고, 마음이 괜찮아진 후에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문제이다. 소설이나 작가는 죄가 없다. 



6. 라두 루푸는 말이 없다(이타가키 지카코 엮음, 김재원 역. 봄날의책. 2025. 248쪽)



7.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김서해. 자이언트북스. 2023. 188쪽)

: 미술대학원 휴학생 해인은 독립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다. 어느날 묘하게 유명인의 느낌을 주는 남자애가 서점에 오는데, 이미 여학생 두어 명이 가게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를 흘끔거리고 있다. 서점 사장과 친해진 그, 영원과 어찌어찌 말을 트게 된 해인. 그의 초대 아닌 초대로 그가 밴드 카드뮴 그린의 베이시스트라는 걸 알게 되고, 그 후 그는 아예 서점에 알바생으로 취직하며 해인에게 계속 인터뷰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뒤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생각해 보면 못 알아차릴 것도 없는데. 해인은 영원의 질문을 한 번도 무례하다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답을 해준다. 그러면서 중학생 때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주희에게서 춤을 배웠던 일이나 주희 엄마와의 일들을 비롯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라서 결국엔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애도에는 각자만의 방식과 시간이 있다. 해인이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써서 지난날 위에 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8. 족장의 가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21. 408쪽)

: 카리브 해 근방의 가상의 독재국가. 그곳에는 200년을 살아온 족장이 있다. 그의 시신이 그가 살던 집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첫번째 시신은 그의 대역의 것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그리고 다시 그의 시신이, 엎드린 채 독수리에게 얼굴을 반쯤 뜯어먹힌 시신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뒤집어 볼 생각도, 그가 정말 그일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그가 처음 총을 잡았던 옛날과 첫사랑을 잃은 그때, 어머니를 매일 찾아가던 시절을 오간다.


화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단, 이름이 나온 사람들 - 그의 대역이었던 파트리시오 아리고네스, 그를 사로잡은 환상 속 여인이었으며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마누엘라 산체스, 어머니 벤디시온 알바라도, 유일한 적법 아내 레티시아 나사레노, 친구이자 동지였던 로드리고 데 아길라르 장군,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을 벤 호세 이그나시오 사엔스 델라 바라 - 만 빼고. '나'는 그의 시신을 넘어 관저를 둘러본다. '나'는 그의 발아래 치이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그를 진찰한다. 길고 긴 문장들이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의 질병과 사랑, 상실을 이야기한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수혈해 줘야 하는 라틴 문학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작품은 저자의 여러 실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결코 다시 느낄 수 없을 그의 젊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고, 만연체의 문장에도, 일정하게 흘러가지 않는 소설 속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어쩌면 뻔하게 흘러가는 독재자의 생이 우스우면서도 짠해서 그것마저 좋았다. 



9. 식물, 상점(강민영. 한겨레출판. 2024. 272쪽)

: 오래된 구옥을 개조해서 만든 식물 상점. 최유희는 간판마저 간단한 이곳을 개업하며 여러 걱정을 들었지만 식물에 관해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에 금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된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는 한 남자. 이번에는 좀 다를까 하여 믿어보려 했건만 식물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 더해 친구랑 하는 막말 섞인 통화까지 들어버렸다. 순간 유희에게는 지난 날이 떠오른다.


내용이 통쾌해서 좋았다. 다만 유희가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싶다. 오래해야지, 그 일. 당신만이 아닌 모든 여자들을 위해서. 그런 벌레들은 박멸해야잖아? 불쌍하다고 풀어주지 말고. 어쩌면 작가가 2권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르겠는 결말이 조금 미진했고 내용이 많이 평면적이긴 했지만 말했듯 유희의 시원한 행동들이 내 지난 불쾌한 기억들마저 씻어주는 듯 해서 좋았다.



10. 암전들(저스틴 토레스, 송섬별 역. 열린책들. 2025. 416쪽)

: 사막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 '팰리스'. 이곳에 죽어가는 노인 후안 게이가 있다. 이런 그를 27년 전 한달 동안의 인연이 있는 청년이 찾아온다.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 그는 후안의 방에 머물고 후안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후안은 그에게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물건들과 이 방을 물려받으라고 얘기하는데, 그 중에는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연구서는 잰 게이가 실제로 퀴어들에게서 수집한 사례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후안은 자신과 잰 게이, 제냐 게이와의 인연을 비롯하여 이 연구서에 얽힌 이야기들도 해주고, 이야기를 듣는 그 또한 후안에게 자신의 지난 27년을 띄엄띄엄 이야기해 준다.


그는 누구일까? 실존은 하는 걸까? 어쩌면 후안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후안이 갖고 있는,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연구서는 실존한다. 아마 짐작건대 책에 얽힌 이야기들 - 잰 게이의 연구가 가로채인 사건도 진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소수자들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묻히지도 잊히지도 않고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읽었던 것 중 가장 담백하고 진솔한 퀴어 문학.



11. 다른 우주에서 우리 만나더라도(마크 구겐하임, 이나경 역. 문학수첩. 2025. 392쪽)

: 평행우주가 존재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해 노벨상을 받게 된 물리학자 조너선. 연설을 하러 올라가기 직전, 아내 어맨다는 그의 손에 두 줄이 표시된 임신테스터를 쥐어준다. 벅찬 기쁨도 잠시, 귀가길 교통사고로 어맨다는 사망하고 만다. 조너선은 수많은 평행우주들 중 어맨다가 살아있는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사용하여 다른 우주로 건너가기로 맘 먹는다.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여러 차례 접촉을 했으나 충돌기 사용을 허가받지 못한 그는 용병까지 고용해서 침입해 강입자 충돌기에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결국 다른 우주로 건너간다.


(강스포)


여러 설정과 세계관은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주인공도 그 아내도 좀 이상하다. 다른 우주에 있는 자기 자신은 어쩌려고 다짜고짜 건너가기부터 하려는 거지? 물론 주인공도 이걸 간과하지는 않아서 곧 자신이 없고 어맨다만 있는 우주도 있을 거라고 머릿속에 희망 회로를 돌린다. 그러다 평행우주 간 이동이 10번이 한계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좀 우습다. 하긴, 제약이 있어야 언젠가 소설도 끝나지. 빌런이 빌런이 된 이유도 좀 유치하긴 하지만 필요악이니 그렇다고 치는데, 가장 이해 안 되는 건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과 그 아내 어맨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어맨다는 죽은 남편이 돌아왔고 그 돌아온 남편이 다시 눈 앞에서 죽었는데 금세 나타난 또다른 남편의 품에 안긴다. 그러니까 몇 번이고 돌아오기만 하면 일단 죽어도 괜찮다는 건가?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그렇게 여러 번 죽는 거 자체를 못 견딜 거 같은데. 물론 어맨다는 평행우주를 믿었고 언젠가는 남편이 자기를 다시 찾을 거라는 걸 믿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럴 거면 그냥 서로서로 복제 인간 만들어가면서 이 우주에서 살아. 괜히 복잡하게 강입자 충돌기 같은 거 쓰려고 난리 치지 말고. 그냥 남편이 먼저 죽으면 복제하고, 그러다 아내가 죽으면 또 복제하고... 그러면 천년만년 살 수 있지 않겠어? 사실 가장 맘에 안 드는 건 여성 캐릭터의 희생으로 이 모든 성공(?)이 이루어졌다는 거. 사랑하면 무조건 희생해야 하나? 그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12. 끝맛(다리아 라벨, 정해영 역. 클레이하우스. 2025. 504쪽)

: 코스티야가 처음 끝맛을 느낀 건 열한 살 때였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와 노는 걸 보고 있던 중,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했던 탄맛이 느껴지는 일종의 팬케잌의 맛을 입 안에서 선명하게 느낀 코스티야는 엄마에게 그 얘길 하고, 곧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자신이 느끼는 끝맛을 감추며 살아가던 중, 바에서 마감을 하려는 차에 허겁지겁 들어온 중년 남성 손님과 함께 다시 끝맛이 느껴지고 술을 찾는 손님에게 자신의 끝맛이 정확히 구현된 칵테일을 준다. 손님이 한모금 마시자마자 바로 나타난 남자의 죽은 아내. 손님과 죽은 아내의 아름답고 평온한 마지막 인사를 본 코스티야는 요리를 통해 망자와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기로 맘 먹는다. 


(약스포)


처음엔 그냥 코스티야의 능력 발휘 힐링 소설인 줄 알았다. 코스티야의 음식을 통해 죽은 이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사람들의 사연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코스티야 자신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코스티야. 그러면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못내 맘에 걸려 어떻게든 아버지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코스티야. 그리고 그런 그를 이해하는, 때로는 가로막는, 그리고 어쩌면 위험한 길로 이끄는 모라. 모라의 상처만으로도 난 충분히 버거웠는데, 코스티야의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불러오지 못한 것도 상당히 날 놀라게 했다. 이걸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세상을 단 한 사람이 구해야 하지? 코스티야가 그냥 모른 척 했더라면?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만 같다. 결말이 꽤 신선해서 여운이 길었다. 내 안의 비관주의자는 멀든 멀지 않았든 해피한 재회를 믿지 않지만. 



13. 절창(구병모. 문학동네. 2025. 352쪽)

: 화자는 남편을 잃은 중년의 입주 독서교사이다. 면접을 위해 외딴 저택을 방문한 날 뒤뜰에서 참혹한 고문 장면과 여려 보이는 아가씨가 그 상처에 손을 대고 상대방 머릿속 '진실'을 읊는 걸 목격한다. 집주인 오언은 그 장면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화자를 고용한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 출신인 아가씨는 부유한 호텔 체인 막내아들 오언과 우연히 엮이고 능력을 들켜 오언에게 속하게 된다. 오언은 아가씨의 능력을 이용해 사업을 번창시키고, 뒷골목의 세계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아가씨와 오언의 관계는 이상하기만 하다.


뒤에 작은 반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화자가 독서교사여야 하는 이유, 이 소설의 문체가 만연체여야 하는 이유가 결국은 그거였구나. 화자도 나름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쩌면 세 사람 각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오언의 사랑은, 미묘하지만 이해가 힘든 건 아니다. 화자의 사랑은 가장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아가씨의 사랑은... 결국 아가씨의 마음 속 사랑은 마지막 챕터의 그것이었나보다. 그리고 그게 가장 아름답다 말할 수 있겠지. 



14. 이야기의 끝(리디아 데이비스, 송원경 역. 난다. 2024. 324쪽)

: 사랑이 끝났다. '나'는 다른 남자와의 여행 중 예전의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발송된 도시에 다다른다. 오랜 시간을 걸어 그가 살던 곳에 도착했고 "그가 그곳에 없었음에도 그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곳에 없었기에 원점으로 돌아와 끝을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곳에 그가 있었다면 모든 것이 계속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3-14쪽). 글을 쓰는 사람인 '나'는 그와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인, '나'보다 열두 살 연하였던 그와의 첫 만남과 밤새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글을 쓰려던 그의 곤궁함, 어린 그의 이기심 그리고 이별 후 어쩔 수 없는 '나'의 집착. 


나라면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남자를 사랑하는 화자의 말에 깊게 공감했던 이유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와 사랑에 빠지지도 이별을 하지도 않았기에 객관성 또한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이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나 이별이야기이기 보다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또한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었지않나. 아름답고도 추한 사랑. 그 사랑 이야기의 끝은 이별이 아니다. 망각 또한 아니다. 저자는 그 끝을 기록을 통한 기억으로 가져가려 했겠지. 그러므로 사랑의 끝은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름답든 추하든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 



15. 북경에서 온 편지(펄 S. 벅, 김성렬 역. 범우사. 2006. 281쪽)

: 1950년 9월, 버몬트 지방의 농장에 사는 리즈는 남편 제럴드 맥레오드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남편은 북경에 머물고 있고 그동안 띄엄띄엄 오던 편지의 간격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번 편지에는 더 절망적인 내용이 있다. 그녀는 대학 4학년에 남편 제럴드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 중국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던 제럴드를 설득해 결혼에 이른 리즈는 남편과 함께 북경에서 신혼을 시작하지만 불안한 세계 정세는 곧 그녀와 남편에게 위협이 되어 결국 중국을 떠나기로 하는데, 북경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제럴드는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곳 농장에서 혼자 아들을 키우며 생활하는 리즈. 이제 아들 레니도 장성해 얼마 후면 성인이다.


저자가 가진 '낭만적' 오리엔탈리즘이 곳곳에 드러난다. 잘 대우받는 백인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매우 '관대한' 관점들 - 특히 제럴드의 외삼촌의 친일 행위에 대한. 게다가 리즈는 여성에 대한 편협함을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제럴드의 엄마가 혁명에 동조하게 된 이유도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아들 레니에게 중국인의 피가 1/4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주저하는 레니의 첫사랑은 - 사실 이건 리즈의 생각처럼 중국 혼혈이어서가 아니라 레니의 아버지가 현재 공산국가인 중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거 같은데 - 그릇이 그만큼 밖에 안 되는 아이이다. 리즈의 생각이 저자 자신의 생각과 얼마만큼 일치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 사실상 이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 확실히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고 읽어야만 할 소설이었다. 다만 난 그저 저자의 중국에 대한 - 어쩌면 그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 애정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16. 죽이는 화학(캐스린 하쿠프, 이은영 역. 생각의힘. 2016. 376쪽)

: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독극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다. 대상이 되는 독은 14개이고, 저자는 각 약품의 화학적 특성 뿐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사용된 사례 및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상황까지 매우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 준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병원 조제실에서 근무하고 약제사 준비를 했던 만큼 약물에 정통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다른 어떤 도구보다 독극물 사용을 즐겨했으며 소설이었지만 독약의 맛이라든가 증상, 그 증상이 발현되는 시각 등 그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 이 책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데, 원제도 그렇고(『A is for Arsenic』) 각 챕터 제목들도 다 그런 식 - B is for Belladonna, C is for Cyanide - 이어서 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살인마의 흥얼거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것도 생각나고. 


사실 독극물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어서 생각날 때마다 이런 가벼운 화학책을 한 권씩 읽곤 하는데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많지는 않다. 그래도 이 책은 정리도 잘 되어 있고 각 독극물의 증상 뿐 아니라 중독되었을 때 취해야 할 조치 및 해독제에 대한 설명까지 있어서 애거서 크리스티 팬이 아니더라도 읽어 두면 좋을 거 같고 팬이라면 이 책을 옆에 두고 그녀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을 거 같다. 



17. 나의 미래에게(주민선. 창비. 2025. 404쪽)

: 새로운 바이러스가 돌고 어른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먼저 바이러스에 걸린 건 '나' 미아인데 깨어나 보니 언니 미래만 남아 있었다. 언니와 난 할머니가 기술 발전 이전의 시절처럼 살던 남쪽 지방의 전원주택으로 가기로 하고 짐을 꾸려 길을 떠난다. 


난 아포칼립스 이야기가 별로여서 이 책도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뜻밖에 깊이 들어오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자매는 당연하게도 여러 고난을 겪고 그 와중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한다. 타인은 당연히 쉽게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 되는 존재이고 누군가를 대할 땐 내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와중에도 사랑은 싹트고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순수하게 되돌아 오기도 한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정말 울컥했다. 현실의 나야 인류 따위 얼른 망해버렸으면 싶지만 책 속의 망한 세상에서도 그 모든 희생과 기억과 기록을 통해 그렇게 세대는 이어지고 미래는 생겨나는 것이다. 



18. 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정보라,최의택. 요다. 2025. 260쪽)

: 두 소설가가 릴레이로 쓴 여행(?) 소설. 국가 사업이라던 '석유 시추공 프로젝트' 사기에 휘말린 두 사람 - 보라, 의택 - 의 이야기다. 보라는 그럴듯한 꼬임에 넘어가 이 '대왕 고래 프로젝트'의 사업 자금 중간 모집책으로도 활동하고, 늘 그렇듯 꼬박꼬박 들어오던 인센티브는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끊기고 보라의 말만 듣고 돈을 송금한 다른 사람들의 원성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경찰 고발까지 당한 상황에서 보라 또한 자신의 돈마저 날릴 상황에 정신 못 차리는데, 이런 억울함을 알아주는 듯한 단톡방 '마이크'의 말에 그를 만나 함께 대책을 강구해 보기로 한다. 천안역에서 '마이크' 의택과 만난 '존' 보라는 그에게 자신이 속은 내용과 그 사기꾼을 잡아주겠다며 온 연락을 녹음한 걸 들려주는데, 의택은 그 녹음에서 그들의 근거지가 포항인 증거를 찾아내고,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한 편의 로드 무비 같은데, 많이 씁쓸하다. 둘 다 피해자이긴 한데 의택이 좀더 불쌍하고, 보라는 인간 자체가 안타깝고,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그냥 맨땅에 헤딩이고, 방법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결말도 안타깝긴 하지만 그보다 나은 결말도 없을 거 같다. 사기는, 피해자가 자신을 탓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범죄보다도 악질이다. 물론 덜한 범죄는 없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면 그동안 보였지만 외면했던 여러 '징조'들을 되짚어 보면서 나 자신의 아둔함을 가장 큰 잘못으로 꼽게 된다는 게, 그래서 피해자가 자기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는 게 정말 치명적이다. 짧지만 사기 범죄의 심각함을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이야기였다. 재밌으면서도 씁쓸하게 읽었다. 



19. 기묘한 이야기들(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역. 민음사. 2024. 284쪽)

: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같기도 한 단편들. 들어봤음직도 하지만, 어쩌면 내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지 모를 일들이지만 단순히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환경과 여성 문제, 노인 문제, 성과 속의 권력 이야기까지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한다. 저자의 문장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감탄하며 재밌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트란스푸기움>.



20. 빛의 조각들(연여름. 오리지널스. 2025. 264쪽)

: 컬러를 전혀 볼 수 없는 흑백증을 앓고 있는 '나' 뤽셀레는 깐깐한 업무 능력 테스트를 받을 후 화가 소카의 집에 청소부로 취직한다. 일이 까다롭다는 얘긴 들었지만 어차피 수술비 모을 때까지만 일할 생각이다. 집주인 소카는 심각한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신체의 일부라도 기계 강화 수술을 받은 경우 그 예술품을 인정받지 못하는 법에 따라 '오가닉'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소 헬멧 없이는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정기적으로 신체 검증을 받으면서. 이 집에는 또한 집사이자 소카의 매니저인 이모 위니, 소카가 어릴 때부터 그의 음식을 담당해 온 요리사 바사, 설비 담당 에르완이 살고 있다. 소카는 작품과 자신의 상태에 엄청나게 예민한데, 종종 등장해서 소카를 더 자극하곤 하는 마리안 - 위니의 딸 - 이 방학을 맞아 이든이라는 친구까지 데리고 온다.


색을 볼 수 없는 사람과 색으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 살기 힘들 정도이지만 자신으로 살기 위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사람과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수술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 둘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나이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게는 된다. 각자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덜어낼 방법은 있다는 것. 둘은 수영장 물이 반사하는 빛의 조각들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소용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거면 충분하다. 



21. 이야기를 들려줘요(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6. 528쪽)

: 메인 주 크로스비 타운. 이제는 거의 은퇴한 변호사 밥 버지스는 작가 루시 바턴과 매일 함께 산책을 한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자녀들, 주위 사람들, 각자의 배우자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간이, 이 우정이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오래 이 타운에 살아온 올리브 키터리지는 10월의 어느날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밥에게 전화를 해 루시 바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밥의 주선으로 루시가 올리브의 집에 방문해 말한다.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난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읽었고 읽을 때마다 중간에 한 번씩 위기가 닥쳤다. 이들의 행동에 공감이 되질 않아서.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내가 이들과 다르다는 걸, 그렇지만 이들의 마음이 모두 이해가 된다는 걸 느꼈고 그게 기뻤다. 어쩌면 "우린 모두 흐르는 모래 위에 서 있"(305쪽)다는 루시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삶에 언제 들어 오는지에 따라 그들의 허상을 만들어내죠."(305쪽)

"우리는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엉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중략)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306쪽)


난 독자로서 이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 그들과 다르고 때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싫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2. LIM : 숲 속에는 축복이(남궁지혜,돌기민,양기연,양수빈,윤단,이서수. 열림원. 2025. 228쪽)

: 젊은 작가 소설집. 한 가지 주제로 썼다고 볼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일단 뒤의 해설에서 젊음을 언급했으니 그냥 젊음이 주제였다고 하자. 그들 각자의 상황과 생활, 어려움은 익숙한 듯 새로웠으며 젊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하지만 나이 든다고 편해지는 것도 없긴 하지. 가장 재밌게 읽었던 건 <미식 생활>. 가장 공감 갔던 건, 아무래도 <친구를 데리고>.



23.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 392쪽)



24.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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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의 챕터 6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단지 그가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있지 않나. 게다가 난 대략적인 상황도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다. 앞서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마 임종의 순간까지 그를 돌본 간호사 올가 게오르기예브나의 글이 너무도 따뜻했기에, 그녀의 글 중 나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스스로에게는 불만족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 위인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64)는 문장에 너무도 공감했기에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그냥 핑계일 뿐이다.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물은 자기 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장례식과 이후의 챕터를 읽은 후 그의 삶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두기로 했다. 이 글은 상당히 길고 두서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사실, 그가 아닌 나를 위한 글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노브고르드 지역의 세메노바의 가족 저택에서 육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 30) 그의 집안은 쇠락해 가는 귀족 계층이었다. 아버지 바실리 아르카디예비치는 군인이었고 어머니 류보프 페트로브나도 장군의 딸이었으므로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도 군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군사학교의 등록금은 매우 비쌌고, 마침 어린 세르게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별거로 그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지고, 할머니에게서 자라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수업을 빼먹고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등 부모의 감독이 없는 상황을 십분 이용했다(『라흐마니노프』 37). 마침내 음악원에서 낙제점을 받고 장학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 류보프는 세르게이의 아버지 쪽 친척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알렉산드르 실로티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실로티는 모스크바의 피아노 교사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그를 맡긴다. 즈베레프는 몇몇 새끼들’ – 즈베레프의 이름에 야수라는 뜻이 있어 붙은 별명(『라흐마니노프』 42) – 을 그의 저택에서 머물게 하며 가르쳤고 자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 제자들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즈베레프는 세르게이에게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철두철미한 연습 습관, 테크닉뿐 아니라 해석의 중요성, 문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르쳤다 고정적으로 오페라, 연극, 연주회 무대를 관람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저택에는 책이 무척 많았고, 그는 제자들이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는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세르게이는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궤도 내에 편입되었다(『라흐마니노프』 43). 차이콥스키는 1886년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만프레드 교향곡>의 악보를 보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1889년 그의 시험관이 되어 무언가를 평가하였는데 5점 만점에 +를 세 개나 덧붙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50).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시기에 타네예프로부터 대위법을 배웠다




열여섯 살에 즈베레프와의 불화로 저택에서 쫓겨난 뒤 세르게이는 고모 바르바라 사티나에게 맡겨지고, 사촌 나탈리아와 소피아와 함께 살게 된다. 이건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된다. 사틴 집안은 모스크바 남동쪽 광활한 초원지대인 이바놉카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1890년 여름, 이곳에서 네 명의 사틴 남매들 및 실로티를 비롯하여 세르게이의 고모부 알렉산드르 사틴의 누이 쪽 친척인 스칼론 자매들(나탈리야, 류드밀라, 베라)과 함께 지내며 세르게이는 첫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열일곱 살에 지은 가곡 비밀스러운 밤의 고요 속에서, 작품 4 3’은 베라에게 바쳐진 것이다((『라흐마니노프』 65). 그의 <피아노 협주곡 1> 1891년 여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이 곡은 1892 3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세르게이 본인의 독주와 사보노프의 지휘로 초연된다). 1892년 사틴 일가를 떠나 독립한 세르게이는 교습, 연주, 반주자 노릇을 하며 다양한 수입원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럼에도 작곡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첫 연주회 장소는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라흐마니노프』 74)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었다. 여기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 및 쇼팽, 리스트를 연주했고, 자신의 <전주곡 C# 단조>도 처음 선보였다.


이후 189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첫 교향곡에 착수한다. 이미 그는 촉망 받는 신진 작곡가였으므로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1).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1897 3월에 초연된 이 <교향곡 1>은 혹평을 받았다. 사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말이 많다. 류드밀라 스칼론, 나타사 사티나를 비롯한 측근들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형편없는 지휘를 탓한다. 라흐마니노프 자신은 여러 혹평들처럼 퇴폐적인 면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움이 문제라고 생각한 듯 하다. 어쨌든 작곡가는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창작 마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상반된 주장들도 있다. 단지 조금 의기소침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초연 직후 작곡가는 이 곡을 수정하는 방안을 고심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89). 그러나 여름을 지나며 세르게이는 점차 침체되었고 아마도 첫사랑 베라의 약혼이 트리거가 됐을 수도 있다고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짐작한다.


라흐마니노프는 후에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레프 톨스토이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적 타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톨스토이가 사실은 그에게 독설을 날렸고, 그건 썩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고 했다(『라흐마니노프』 99). 그가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였고 그는 최면치료사였다. 알려졌다시피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2>을 달 박사에게 헌정한다.


첫 교향곡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897년부터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1899년에는 런던 앤 여왕 홀에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하여 자신의 곡들을 지휘함으로써 국제 무대에 데뷔한다. 또한 이 시기에 여러 소품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 110)고 얘기하는데, 아마도 대규모 악곡을 쓰지 못함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마침내 1899년 여름 사틴 집안의 지인이 머물던 크라스넨스코예에서 <피아노 협주곡 2>을 작곡한다. 이 곡은 1900 2악장과 3악장이 먼저 모스크바에서 초연됐고 1901 10월에서야 완전한 형태로 작곡가 자신이 독주를 맡고 실로티가 지휘를 맡아 초연된다. 이 곡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의 우상으로 급부상한다.


1902년 그는 사촌인 나탈리아 사틴과 결혼한다. 당시 러시아정교회에서는 사촌과의 결혼을 금했기에 나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는 황제에게 특별 허가 청원을 올리고, 결혼식을 주례해 줄 사제 군종 사제 를 겨우 구해 군부대 안에서 결혼한다. 결혼을 통해 안정을 얻은 세르게이는 1906년까지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닌다. 1903년에는 딸 이리나가 태어났고 <전주곡집, 작품 23>이 나왔으며 1904년에는 볼쇼이 극장 지휘자직을 수락해 많은 곡들을 편곡하고 지휘했다. 1904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2>으로 글린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에 1917년까지 이 상을 네 번이나 더 수상한다. 하지만 당시의 러시아 상황은 점점 불안해 지고 있었다. 1905 1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학살을 계기로 시작된 혁명은 1906년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들이 해외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여름에 라흐마니노프는 <열다섯 편의 가곡집, 작품 26>을 쓰는데 여기에는 그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노랫말을 따온 쉬게 하소서가 포함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체호프를 1898년 얄타 연주회에서의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1907년에는 둘째 타탸나가 태어난다.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에는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동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죽음의 섬>을 작곡하여 친우였던 화가 니콜라이 스트루베에게 헌정했고, <교향곡 2> <피아노 소나타 1>에 착수했으며 오페라에도 손을 댔으나 오페라 <몬나 반나>는 결국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악보는 나중에 빌라 세나르에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3번의 겨울을 드레스덴에서 보낸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러시아로 돌아온다. 이 시기는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서 모더니즘이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소위 말해 은 시대(silver age). 라흐마니노프는 모더니즘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적대적이었고(『라흐마니노프』 160) 1909년 공개적으로 슈트라우스와 막스 레거를 필두로 한 모더니스트 그룹과 등을 돌려 보수파꼬리표를 달게 된다(『라흐마니노프』 162). 이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동안 조성 음악에만 집착하는 꼰대 이미지로 비판을 받는데,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시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난 그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의 <피아노 협주곡 4>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나 - ,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에 집중하기로 한다.


1909 11월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무대에 데뷔한다. 1910년 초까지 이어진 첫 미국 투어는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의 <피아노 협주곡 3>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고루한 졸작으로 혹평 받는다. 즈베레프 문하 출신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동문이었던 스크랴빈은 쿠세비츠키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로 나섰고 라흐마니노프는 니콜라이 메트너와 함게 그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당대 음악계에서는 과잉으로 흐르는 모더니즘에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라고 여겼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음악계에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한 후라,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안정을 찾았다. 특히 1910년부터는 그가 늘 애정을 갖고 있던 이바놉카의 공동 소유주가 되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바놉카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쓰게 된다. 1912년에는 첫 번째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는데 독일산 스포츠카 로렐라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현대성을 무조건 외면하거나 비판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는 평생 차를 좋아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현대 기술에도 늘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열세 편의 전주곡집, 작품 32>(1910)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3>(1911)을 출간을 비롯하여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세르게이는 불확실한 시대의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그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라흐마니노프』 197). 하지만 그는 늘 자기의심에 시달렸다(이는 그의 첫 교향곡 실패 이후 그의 고질병 같은 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의 뮤즈 역할을 한 마리예타 샤기냔과 편지를 시작으로 교류하게 된다. 참고로, 이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다. 샤기냔은 모더니즘에 경악했고, 라흐마니노프에게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으며(『라흐마니노프』 199) 1912년에 작곡된 <열네 편의 가곡집, 작품 34>에 영향을 준다(『라흐마니노프』 204). 1912 12월에 라흐마니노프는 가족들과 로마로 가 작품 35에 해당하는 <>을 쓰고, <> <피아노 소나타 2> 19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다.


1914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라흐마니노프도 징병 검사를 받지만 다행히 징집되지는 않는다. 그는 1915년 부상병들을 위해 쿠세비츠키와 함께 자선연주회를 다섯 차례나 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음악 신념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늘 동료와의 철학적 대화를 기피했지만 1915년 메트너와 과연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객관적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메트너에게 감명 받았지만 본인은 란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라흐마니노프』 216). 1915년에 라흐마니노프는 <철야기도, 작품 37>을 완성했고 4월에는 보칼리제, 작품 34 14’를 완성했는데 이 두 곡은 전쟁의 여파를 음악적으로 숙고한 작품이다. 1915 4월에는 스크랴빈이 패혈증으로 급서한다. 6월에는 타네예프가 숨을 거둔다. 이를 계기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으로만 공연해왔던 그간의 습관을 버리고 스크랴빈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연주회 무대에 서면서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한다(『라흐마니노프』 224). 일련의 죽음들과 전쟁의 여파로 그는 작업 의지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샤기냔의 도움으로 표도르 솔로구프를 비롯한 상징주의 작가들의 시를 통해 생산성을 회복하고 <여섯 편의 가곡집, 작품 38>을 완성한다. 1916 10월에 초연된 이 가곡집을 헌정 받은 사람은 그러나 샤기냔이 아닌 니나 코시치라는 젊은 여성 가수였다. 이 관계는 여러 음악사학자들과 대중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지만 특히 프로코피예프와 엮여서 난 세르게이가 아내를 두고 헛짓거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1916년 작곡가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라흐마니노프는 대체로 어둡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회화적 연습곡집, 작품 39>를 쓴다. 1917 2월에는 드디어 볼셰비키 혁명의 불길이 오르고 라흐마니노프는 여름에 이바놉카에 갔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다. 100여 명의 농노들이 몰려왔고 그 중 나이든 농노들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후 작곡가와 가족들은 이바놉카를 떠나야 했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 9 5일 얄타에서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 E플랫장조>였다. 12 23, 작곡가는 가족들과 친구 니콜라이 스트루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출발한다. 그곳에서의 연주회가 명목이었고 짐 속에는 겨우 2천 루블과 최소한의 생필품, 오페라 <몬나 반나>의 악보, 림스키코르샤코프의 오페라 <황금 수탉>의 스코어뿐이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240).


이후 코펜하겐을 거쳐 191811월 작곡가와 가족들은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 이미 그는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연주자 겸 지휘자로 활동하기로 맘 먹은 상태였다. 1918 12월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성공적인 데뷔 리사이틀을 가진 그는 언어적 장벽을 넘기 위해 비서를 고용하고 차례로 다그마르 리브너, 예브게니 소모프, 니콜라이 만드롭스키 에이전트를 두며 스타인웨이의 협찬을 받아 미국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사실 『라흐마니노프』 의 저자는 이후의 작곡가의 삶을 이전 시기만큼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 느낌이다. 이 시기의 생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에 더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난 두 권 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작곡가의 미국 망명 이후의 삶은 사실상 창작자로서의 삶보다는 비르투오소의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작곡가 자신도 이를 매우 괴로워했고 창작에 몰두하고 싶어했지만 시즌이 끝날 때마다 채찍으로 맞는 기분이라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61) - 가족들의 생활 안정 또한 그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그는 경제적인 측면을 늘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1919년 토머스 에디슨과의 녹음을 시작으로 몇 차례 음반을 녹음했고, 이는 망명 러시아인들에게 향수를 달래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재료가 되어 주었다. 음반뿐 아니라 그의 연주회는 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자 라흐마니노프는 망명 동포들과 소련에 남은 친지들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다. 가족 생활에서는 1924년 이리나가 표트르 볼콘스키 공작과 결혼했으나 1925년 이리나의 임신 중에 볼콘스키 공이 사망하고, 얼마후 첫 손녀 소피아가 태어난다. 이에 딸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그는 두 딸의 이름을 딴 출판사 타이르(Tair)를 설립한다. 둘째 타탸나는 1932년 보리스 코누스와 결혼했는데, 작곡가의 조카 소피아 사틴 처제 소피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에 따르면 세르게이는 이 결혼이 못마땅했는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3).


작곡가로서 그는 <피아노 협주곡 4> 1914년 여름에 착수했으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1925~1926년 겨울 에이전트의 도움으로 연주회를 잠시 쉬고 파리와 드레스덴, 칸 등을 여행하며 완성했다. 또한 합창과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마지막 작품 <세 개의 러시아 민요, 작품 41>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1927 3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나 <피아노 협주곡 4>은 혹평을 받았고 이는 작곡가의 불안을 자극해 세르게이가 1941년까지 계속 수정하도록 했다. 1931년에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42>, 1934년에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작품 43>을 작곡했고 1936년에는 빌라 세나르에서 <교향곡 3, 작품 44>를 완성해 1939년에 개정했다. 1940년에는 <교향적 춤곡, 작품 45>가 롱아일랜드에서 작곡됐고 이 여섯 곡이 그가 망명 생활 동안 만든 곡 전부이다.


위에서 얘기했듯 망명지에서의 비르투오소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을 분해해 속속들이 이해한 다음 무대에서 재조합하는 헌신적인 스타일이었기에(『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86)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 와중에 1930년 그는 스위스 루체른에 땅을 사고 그와 아내의 이름을 딴 빌라 세나르를 건축한다. 이 집은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그에게 휴식이 되어준다. 1938 8 25, 바그너가 살았던 루체른의 호숫가 빌라의 경사진 잔디밭에서 루체른 페스티벌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하여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브루노 발터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0).


그의 쉴 새 없는 연주 일정은 당연하게도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만성적인 요통과 손의 신경통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1935년의 일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36). 1938년에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편지를 써서 처방을 받기도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45). 하지만 가정 경제에 대한 걱정은 그를 지속적인 연주회로 내몰았고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총 1,457회 무대에 섰고 그중 1,189회는 망명자로서였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40) – 결국 1943 2 22일 연주회를 취소하고 기차로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편안하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 3 28일 영면한다.



이렇게 길게 그의 생을 얘기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아니, 내 말은 그가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 “6피트 반( 198센티미터)짜리 우거지상이든, 평론가 에릭 블롬이 평가했듯 자신의 시대에 전혀 속하지 못한 사람(『라흐마니노프』 16)이든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휘자 쿠세비츠키와 러시아 음악 출판사를 차려 러시아 작곡가들이 수입을 확보하고 특히 유럽 대륙 내에서 저작권 지위를 확립하도록 했다(『라흐마니노프』 155). 그는 곤궁에 처한 고국을 위해 자신의 연주회 수익금을 기꺼이 내놓았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 <레닌그라드>가 탱글우드의 버크셔 페스티벌에서 축하곡으로 연주된 것에 마음 상해하는 사람이었으며(『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3), 니콜라이 메트너, 글라주노프, 콘스탄틴 발몬트를 비롯하여 친분이 있든 없든 러시아 출신 음악가 및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의 라흐마니노프 아카이브에는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보낸 수많은 감사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115). 그는 심지어 자신보다 늦게 미국에 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을 출판사 타이르에서 출간하려고도 했다. 그가 출판사를 세운 목적은 비단 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것만이 아닌 출판에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 작가들의 신간을 망명자 사회에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14)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에 헌신했다. 그는 <<롱비치 인디펜던트>>지와의 1943년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에서만 나 자신이 됩니다. 음악은 평생을 바치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평생을 바쳐도 음악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38)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는 조국을 늘 사랑했다. “나는 러시아 작곡가이며, 내가 태어난 나라가 내 기질과 관점에 영향을 미쳤소. 음악은 내 기질이 만든 것이오. 그러니 러시아 음악이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11)라고 얘기했으며, 그가 머무는 집은 늘 러시아풍으로 꾸며졌고 동포들을 늘 도왔으며 심지어는 러시아 의사와 간호사에게만 진료를 받았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 누워서도 러시아 전선의 소식을 늘 궁금해하며 러시아군이 몇몇 도시를 재탈환했다는 소식에 신이여, 감사합니다. 부디 그들에게 힘을 주소서!”라 말하기도 했다(『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359)


<<유타 이브닝 헤럴드>> 1938 12 6일자에 실린 리뷰에서 얘기했듯 라흐마니노프는 라흐마니노프이며 거의 불멸의 존재”(『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253)이다. 내가 그의 죽음을 읽고 눈물을 쏟은 까닭이기도 하다.


난 이 글을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연주한 <전주곡 C# 단조>를 비롯한 전주곡들을 들으며 썼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3> <교향곡 2> 이지만 오늘은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서만도 1,400번 이상 연주했다는, 그래서 지겨워했다는 이 곡이 계속 듣고 싶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그리고 그를 연주한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감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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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면의 조개껍데기(김초엽. 래빗홀. 2025. 384쪽)

: 자기 자신이 되는 꿈을 꾸는 존재들의 이야기. 그 꿈은 녹슬고 싶은 안드로이드의 것이거나(<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분리된 자아를 아니 육체를 공유하는 또다른 나를 없애고 싶어하거나(표제작) 하는 걸 넘어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이주/침투를 원하기도 한다(<달고 미지근한 슬픔>,<비구름을 따라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기도 하고, 이루거나 포기하기도 하는 꿈. 비록 미래 혹은 이곳이 아닌 존재들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바로 핍진성이 이번에도 오롯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좋았던 건 동화같은 <소금물 주파수>.



2. 엄마 집에서 보낸 사흘(프랑수아 베예르강스, 양영란 역. 민음사. 2007. 233쪽)

: 소설가인 화자는 아내로부터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선인세를 받은 출판사에 뭐라도 줘야 할 지경이라 화자는 일단 그간 집에 오라고 성화를 하신 엄마네 집에 머물면서 책을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엄마 집에는 가기 싫다. 화자는 엄마와 엄마의 애인, 다섯 누이들, 그리고 여러 애인의 이야기를 한다.


철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들 - 막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이자 습관적으로 바람 피우는 남편이면서 슬럼프에 빠진 작가인 화자는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엄마 집에 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가는 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계속 자신의 페르소나만 만들어내고, 비슷하게 전개되는 애인들과의 이야기만 늘어지게 할 뿐이다. 캐릭터가 한심하긴 하지만 전혀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 집에 가긴 가야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엄마가 딱히 보고 싶지도 않지만 엄마의 하소연에는 응답을 해야 할 거 같고. 애인들에 대해 쿨하게 굴고는 싶지만 사실은 찌질하다는 걸 들키고야 말고.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조금은 갈피를 잡기 힘들기도 하고 단순히 철없음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문제들도 슬쩍 보이기는 하지만 2005년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감안해서 흐린 눈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다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더라도 - 그럴 일은 요원해 보이지만 - 읽지는 않을 것이다.



3. 대문자 뱀(피에르 르메트르,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26. 368쪽)

: 사랑하는 작가의 초기 미발표작. 저자는 초기에는 범죄 소설을 쓰다가 공쿠르 상 수상 이후에는 범죄 소설은 더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책은 저자의 초기 작품이고, 저자 또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간하는 범죄 소설이 이 작품인 게 상당히 의미있다고 얘기한다. 


예순 셋 마틸드는 천천히 운전을 해서 포슈 가로 접어든다. 차를 세우고 내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던 남자의 생식기와 목에 총을 쏜 후, 겁에 질린 반려견에게마저 총을 쏜다. 그리고 루틴을 지켜 쉴리 다리로 가지만 총을 버리는 대신 그대로 집으로 와 싱크대 서랍에 넣어둔다. 죽은 남자는 재벌 기업가.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마틸드를 관리하는 '인사부'의 앙리는 평소와는 다른 마틸드의 일 처리에 그녀에게 연락하기 전에 그녀가 요청한 무기와 방법 등을 점검하는데,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틸드는 사실 최근들어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 레지스탕스 시절부터 냉혹하게 일을 처리해 왔던 자신을 믿기에 자신이 적어 놓은 쪽지와 처리한 - 하지만 사실은 처리하지 않은 - 무기들이 제대로 처리됐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형사 바실리에브는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의 짐작처럼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닐 거라는 예감을 가지지만 사건에서 배제된다.


마틸드의 캐릭터가 정말정말 매력적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킬러라니. 물론 전에 없던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녀만큼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캐릭터는 드물다. 게다가 마틸드는 공과 사를, 연민 혹은 추억과 생존을 구분한다.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이 불안하면서도 기대됐다. 이야기는 앞을 알 수 없게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죽음도 - 마틸드에 의해 혹은 상관없이 - 계속 생겨나서 집중하며 읽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이 책의 결말은, 정말 강렬하고도 완전했다. 그동안 이 저자의 범죄 소설은 의도적으로 피해 왔지만 이제는 읽어봐야겠다.



4. 아서 밀러 희곡집(아서 밀러, 김윤철 역. 평민사. 2000. 366쪽)

: <시련>,<대가>,<추락 이후> 세 편의 희곡이 실려있다. <시련>은 전에도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었고 나머지 두 편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유품이 쌓인 다락방을 정리하기 위해 온 부부와 중고물품처리업자 이야기인 <대가>와 한때 촉망받는 신인 스타였던 여배우의 이야기인 <추락 이후>는 처음일 뿐 아니라 저자의 작품들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서 더 흥미로웠다. <시련>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대화를 나눌수록 흔들리는 빅터의 심리 묘사가 대사를 통해 섬세하게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었고, <추락 이후>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등장 인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희곡 읽는 건 좋아하지만 연극 공연 관람에는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추락 이후>는 공연을 보고 싶어질 만큼. 



5. 무료 주차장 찾기(오한기. 작가정신. 2025. 156쪽)

: 연작 소설 세 편. 전업 작가인 화자는 글도 잘 안 써질 뿐 아니라 청탁도 들어오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육아를 전담하면서 여러 알바를 하고 틈틈이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며 주말에는 딸이 좋아하는 숲 체험학습을 위해 올림픽 공원에도 간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되는 건 주차 요금. 주차 문제는 딸의 어린이집 친구 아빠를 열받게 해 그가 행동(?!)을 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화자와 멀어지게도 하며 화자의 과외 수입원이 되거나 예상외 지출 항목이 되기도 한다. 


뭐랄까, 재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공감을 못한 건 내가 운전도 육아도 안 하는 상황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필력이 약하다는 것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들을 만약 블로그에서 봤다면 오, 잘 쓰네 하며 읽었을 지도. 하지만 저자가 그리고 발문을 쓴 김화진 작가가 말한 대로 에세이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글들을 출간된 책으로 보니 뭔가 싱거운 느낌이 든다. 이건 플롯이나 스토리의 문제는 아니다. 행간에서 '어때, 이 정도면 진짜 있었던 일 같지? 근데 이게 소설일까, 에세이일까?'하고 이죽거리는 듯한, 그걸 감추지 않는 저자의 화법이 좀... 굳이 이 작가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아진달까? 



6. 여름철 대삼각형(이주혜. 민음사. 2025. 240쪽)

: 유산 후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남편과 이혼한 후 조용하지만 약간은 무기력한 삶을 사는 태지혜.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자라 처음 고백받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견 평범한 듯 살고 있는 송기주.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공교육의 무기력함에 상처받고 학원 강사로 전직해 아버지의 임대아파트에 얹혀 살다시피 하는 반지영. 이 세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전개되며 엮인다. 처음엔 그저 비슷한 또래 여성들의 세 가지 다른 삶을 이야기하려나 싶었는데 물론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꽤 장엄한(?) 결말을 맞이한다. 


가족과 직장, 주거 문제와 부모, 자식간의 관계 등 삶을 옭아매는 건 하나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힘든 삶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여서 나누면 조금 가벼워지기는 하지. 서로 다른 지점에서 빛나는 세 개의 꼭지점이 여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는 조금 초라한 빛일 수도 있지만 선을 그어 연결하면 무엇보다도 찬란할 수 있다. 



7. 피아노에 관한 생각(김재훈. 책밥상. 2024. 232쪽)

: 작곡가이자 오랫동안 피아노를 연주하고 관련 공연을 연출하기도 한 저자가 피아노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는다. 단순히 추억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물론 부제가 '버려지는 피아노를 만지며'인 만큼 가장 큰 비중은 더이상 '인기 악기'가 아닌 피아노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지한다. 하지만 피아노의 역사와 저자의 과거, 저자가 피아노를 소재로 연출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 또한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고, 학원 가기 싫어서 몸부림쳤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악기 하나 제대로 익혀두는 게 얼마나 삶에 큰 윤기를 주는지 그때는 몰랐다는 게. 저자는 피아노에 소질도 있고 흥미도 있었나보다. 어릴 때의 여러 일화들이 공감이 가기도 했고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특히 저자가 작곡을 전공하게 된 계기인 고등학생 때 조율사와의 만남은 은은하게 감동적이었다. 직전에 선생님과의 대화가 있어서, 통찰력이란 지식이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의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야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저자에게선 단순한 애정이 아닌 그 이상의 과감하고 이성적인 면이 보인다. 이건 단순히 피아노를 해체하여 PNO를 만든 것만을 보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면이 있었기에 저자의 손에 의해 피아노의 수명이 조금은 더 늘어날 수 있었겠지. 


읽으면서 나도 피아노를 치던 과거가 그리워졌다. 지금도 악기 중에서 피아노를 가장 좋아하고 피아노 협주곡이나 리사이틀 공연 실황을 자주 보고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8. 방해금지(프리다 맥파든, 김대웅 역. 북플라자. 2026. 332쪽)

: 퀸 알렉산더는 남편을 죽이고 차로 도망치는 중이다. 남편은 퀸을 오랫동안 학대해 왔고 오늘 저녁에도 퀸의 목을 졸랐다. 퀸은 그저 손에 닿는 부엌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남편의 시신을 부엌에 놔둔 채 차로 국경을 향해 가지만 폭설에 발이 묶이고, 퀸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모텔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모텔에 투숙객이라고는 점쟁이 노파 한 명 뿐. 주인 남자는 친절하긴 하지만 그와 함께 운영한다는 아내 로잘리는 보이지 않고, 장기투숙객 그레타는 퀸에게 오래전 이 모텔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했고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퀸은 일단 오늘밤만 넘기기로 하고 투숙하는데, 퀸에게 슬픈 건 유일한 가족인 언니 클라우디아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뿐.


익숙한 듯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레타의 존재와 행동이 신비감을 주고 로잘리와 닉이 의심스럽지만 반전은 따로 있었다. 그들 각각의 사정이 모두 약간씩 슬펐다. 심지어는 불륜녀마저도.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각자의 상처는 흔적을 남길 거 같다.



9. 디카페인 커피와 무알코올 맥주(조우리. 마음산책. 2024. 220쪽)

: 11편의 순한 이야기. 대부분의 화자가 여성, 퀴어 등 사회적 약자이다. 이들은 성향도 취미도 생각도 다르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관계에서움츠려들지도 않는 착한 존재들. 이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소설집 제목처럼 정말 자극없이 재밌는 이야기들.



10. 뤼미에르 피플(장강명. 한겨레출판. 2025. 392쪽)

:  신촌 뤼미에르 빌딩 8층에 사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의 사연. 평범한 사람은 없다. 박쥐 인간이거나 쥐 인간이기도 하고, 어느날 아침 깨어보니 전신마비 상태이거나 빚을 갚기 위해 매를 맞아야 하기도 하며 노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녀이기도 하다. 이야기들이 다 신박해서 재밌게 읽었다. 간혹 좀 징그럽거나 슬프기도 했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역시 <810호 되살아나는 섬>. 진짜로, 누군가 이 자연을 되살리는 노래를 좀 불러줬음 좋겠다. 



11. 역사의 끝까지(루이스 세풀베다, 엄지영 역. 열린책들. 2020. 320쪽)

: 후안 벨몬테는 과거의 혁명 전투에서의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해변가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동지 한 명과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수상쩍은 남자가 찾아와 후안을 산티아고로 호출하고, 그곳에 간 후안은 옛 상관이었던 크라머와 마주한다. 크라머는 최근 칠레에 입국한 두 명의 용병 -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 - 을 찾아달라고 하고, 후안은 옛 동료였던 그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유유히 도망친다. 후안은 그들의 소재를 크라머에게 알렸음에도 작전이 틀어진 것에 또다른 음모가 있음을 짐작하고 크라머와 크라머에게 의뢰한 KGB 장교 출신인 슬라바를 찾아간다. 후안은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가 사실은 피노체트 시절 고문 기술자였던 미겔 크라스노프를 탈옥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길고 긴, 깊고 깊은 역사를 압축해서, 그것도 조금도 생략하거나 간과하는 부분 없이 읽은 기분이다. 그만큼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하지만 오래 전 세 권 정도 읽고는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집어든 책이 긴 여운을 준다. 특히 베로니카가 내뱉은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들이. 내가 베로니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그리고 내가 후안이라면 절대 듣지 않았을 그 말이. 과연 진정한 단죄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혹은 용서는? 난 이런 상황이라면 용서따윈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만 베로니카의 마음 속에 있었던 건 어쩌면... 아, 다시 읽어야겠다.



12. 기기묘묘 방랑길(박혜연. 다산책방. 2025. 320쪽)

: 마을의 최대감 댁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인 금두꺼비가 없어졌다는 것. 집안의 종들이 괜한 추궁을 당하지만 하인들은 금두꺼비가 살아나 스스로 담을 넘었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웅성대는 것을 흥미롭게 듣고 최대감 댁을 기웃거리던 오지랖 넓은 윤대감 집 막내 아들 효원은 그 일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데, 친구인 오윤이 마을 근처 산에 사는 사로라는 자에 관해 귀띔해 준다. 여우의 자식이라는 풍문이 도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며. 효원은 사로와 함께 금두꺼비 일을 해결하고 마침 이제는 길을 떠나겠다는 사로에게 동행을 청한다. 


제목에서 기대를 내려놓고 시작했으나 뜻밖의 진중한 이야기를 만났다. 어쩌면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어릴 때 전래 동화집에서 읽었음직한 이야기들이지만 사로와 효원의 우정과 애민의 마음이 잘 배어나오는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권선징악은 기본으로 갖고 가고 거기에 유머코드가 살짝 더해지는데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마지막 챕터에선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2권이 나와도 좋을 듯. 



13. 나의 챔피언 런트(크레이그 실비, 고정아 역. 미세기. 2024. 324쪽)

: 양 목장을 운영하는 애니네 집. 애니에게는 특별한 개 런트가 있는데, 런트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애니의 말만 듣는다. 지역은 오래전부터 경제적으로 불황이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가뭄까지 더해져 애니네 목장도 많이 어렵다. 이 와중에 동네의 목장들을 모두 사들이고 물길마저 막은 빌런 변호사는 애니네 목장도 탐낸다. 그러던 중 런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애니. 하지만 런트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데...


초등 고학년 정도에게 권할 만한 동화. 하지만 약간의 오류(?)는 있다. 런트가 다른 사람이 보이면 꼼짝도 안 한다고 하는데, 가끔은 움직이나 보다. 적당히 현실적이고 꽤 따뜻했던 이야기였다. 



14. 젊음의 나라(손원평. 다즐링. 2025. 292쪽)

: 화자 '나라'의 꿈은 배우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AI가 연기하고 만들어내는 컨텐츠가 가득한 상황. 나라는 슈퍼리치들의 유토피아 '시카모어 섬'에 스탭으로 들어가 그곳의 극단에서 연기하게 되기를 바라며 자주 VR로 그곳에 접속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는 긴 통화조차 어색한 사이고, 돈 때문에 함께 사는 룸메이트인 이민 2세대 엘리야는 자신의 외모가 '진짜 한국인'과 다르다는 걸 마치 공인된 사회적 약자로서의 권리인 양 이용한다. 고령 인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돌입한 상황에서 노인 인구들은 경제 상황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뉜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데, 나라는 이 시설을 운영하는 기업 유카시엘에 입사를 하게 된다. 유카시엘은 시카모어 섬과도 연계되어 있다는데...


고령화 사회가 얼마나 진행되든, 소위 말하는 복지라는 건 결국 경제력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그건 작가가 상상한 미래든 지금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재든 마찬가지. 그래서 작가의 상상이 새삼 끔찍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시카모어 섬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라도 바라볼 수 있는 이 책 속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일 것이다. 같은 시각에서, 엘리야의 노인 혐오와 삐뚤어진 피해 의식도 새롭지 않다. 여러 설정만 근미래일 뿐, 결국 지금 여기의 이야기. 


(스포)

다만 결말 부분에서 좀 급작스럽게 해피 엔딩으로 흐르기는 했다. 엄마와 이모의 만남은 짐작 가능했고 딱 좋았지만 나라의 채용 소식은 좀 갑작스럽지 않나? 



15. 악당은 모두 토요일에 죽는다(정지윤. 고블. 2026. 288쪽)

: SF 연작 소설집. 국내 최고 학부인 S대를 배경으로 교수의 잃어버린 고양이 찾기에서 시작되어 연쇄살인과 마약 거래를 거쳐 급기야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까지 이른다. 처음 두어 편은 재밌게 읽었는데 갈수록 허황된 느낌이어서 뒷부분은 좀 심드렁하게 읽었다. 그래도 아이디어는 신박했고 세계관은 꽤 탄탄했다. 다만 문장력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싶다. 



16.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요(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앤 마거릿 대니얼 엮음, 하창수 역. 현대문학. 2018. 728쪽)

: 피츠제럴드의 미발표 단편집. 각 작품 앞에 왜 이 작품이 발표되지 못했는지 설명이 있는데, 대부분은 게재하길 원하는 잡지에서 거절당했거나 그들의 수정 요청을 작가 자신이 거절해서이다. 잡지 편집자들이 수정을 원했던 건 이 작품들의 상당수가 편집자(혹은 독자)들이 원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답지' 않아서이다. 당대의 피츠제럴드는 상류층 배경의 사랑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나보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그런 이야기들로만 알려지기를 거부했고, 이 작품들도 상당히 실험적으로 사랑 자체보다는 사랑에의 실망이라든가 삶의 아이러니, 욕망의 허무함 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역시 표제작. 제목과는 달리 여성 인물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아주 기꺼웠다. 


PS. 독서 중 재밌는 일이 있었다. 표제작을 읽으면서 하이든의 교향곡 49번을 듣고 있었는데 내가 읽는 장면과 음악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거다. 하이든 49번은 La Passione(수난)으로 알려져 있는 어두운 곡인데,  애틀랜타가 지역 축제 행렬에 참가하지만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장면과 2악장이 딱 어울렸고, 애틀랜타가 딜래넉스와 팬저 양의 말다툼을 숨어서 듣게 되는 장면에선 3악장 미뉴에트의 조여오는 듯한 음률이 맞아 들어갔다. 이 우연의 일치가 너무 즐겁고 좋아서 챗지피티와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17. 키오스크 학교(이서아. 민음사. 2025. 388쪽)

: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모두 키오스크가 되고 싶어한다. 쓸모 있고 싶기 때문이다. 모라와 초희, 도준, 원혜와 주디는 키오스크 학교 신입생이다. 배치된 곳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심장 대신 광석으로 만들어진 장치를 갖고 있는 ORE(오어) 인간들의 감시를 받으며 완전한 키오스크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1부에 인물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익숙한 듯, 흔한 듯 하지만 새로웠던 이야기들. 부모 혹은 보호자의 부재로 시설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들, 그 시설에조차 수용될 수 없어서 자신들만의 가족을 이루어 버려진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아이들, 또 시설이었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줬던 보육교사를 잃어버린 아이들. 그리하여 20대의 나이지만 키오스크 학교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던, 소위 말하는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 근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선을 보여줬던 1부와는 달리 2부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클리셰로 흘러 조금 안타까웠다. 신인 작가의 역량 부족인가. 그럼에도 이 작가의 다음 장편이 기대된다. 



18. 콜리니 케이스(페르디난트 폰 시라흐, 편영수 역. 마르코폴로. 2024. 192쪽)

: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카스파르 라이넨은 당직을 서던 중 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살인범의 국선 변호사가 되기로 한다. 피의자 콜리니와 만나지만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 라이넨은 다음날 아침 어린 시절 절친의 누나이자 여름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요한나의 전화를 받고서야 피해자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대해줬던 절친 토머스의 할아버지였던 한스 마이어라는 걸 알게 된다. 피해자와의 관계 때문에 국선 변호를 사임하려던 라이넨은 영향력있는 법조계 인사이자 대학 시절 은사인 변호사 마팅어, 그리고 단골 빵집 사장의 얘기를 듣고 계속 변호를 하기로 한다. 콜리니는 범행 동기에 대해 계속 입을 다물고, 피해자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업 수장이기에 언론의 관심은 집중된다.


(스포)

책 날개의 저자 이력이 특이해서 읽기 시작했다. 변호사인 저자의 할아버지가 바로 나치 장교였고, 할아버지의 과오를 자신이라도 속죄하기 위해 법조인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할아버지의 비겁한 변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이 책 또한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이야기한다. 독일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죄과를 덮으려는 움직임이 독일 내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드러 법'이 그 예인데, 이 법으로 인해 나치 부역자들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했다고 한다. 소설 속 피해자도 그 수혜자 중 하나였다. 사건의 전말이 천천히 밝혀질 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법의 외면으로 사적 복수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콜리니와 가족의 이야기는 당시의 독일 뿐 아니라, 인종 범죄의 피해자들 뿐 아니라, 현대 세계 곳곳의 많은 범죄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이 책이 독일의 과거 사죄와 청산의 오류를 고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니,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다만 콜리니의 마지막은 마음 아플 뿐이다. 



19. 엄마, 시체를 부탁해(한새마. 바른북스. 2024. 236쪽)

: 잘 쓰여진 날카로운 시각의 범죄 단편들. 첫 작품이 새드 엔딩이었고 표제작도 해피하게 끝났다고 보기에는 찜찜했지만 이야기들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이렇게 뒷맛이 찜찜한 이야기들을 '이야미스'라고 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작가의 특기라고. 하지만 이 작품들의 촘촘함은 그 찜찜함을 넘어선다. 그리고 뒤에 배치된 이야기들은 상당수 결말이 꽤 시원한 편이어서 즐겁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마더 머더 쇼크>.



20. 헨치 1, 2(나탈리 지나 월쇼츠, 진주 K. 가디너 역. 시월이일. 2022. 312쪽, 288쪽)

: 히어로 옆에는 사이드킥이 있고, 빌런 옆에는 헨치가 있다. 애나는 바로 프리랜서 헨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오면 마치 인력시장처럼 그곳에 가서 특정 빌런의 회사에 불려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애나가 선호하는 건 재택으로도 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계약직의 삶. 절친 준과는 이런 에이전시 인력시장에서 대기하다가 만났는데, 누구보다도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어 주는 좋은 친구이다. 어느날 애나는 빌런 일렉트로닉의 신제품 발표회 겸 시장 아들 협박 현장에 들러리로 서 있다가 히어로 슈퍼콜라이더가 개입해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바람에 다리뼈가 산산조각이 난다. 오랜 회복 기간 동안 준의 집에 얹혀 살며 상황을 곱씹어보던 애나는 히어로들이 소위 세상을 구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전혀 제어하지 않아 생기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있었는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건 할리웃 히어로물에서 수시로 언급되는 명언이다. 당장 악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생명을 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그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해서, 우연히 내 사업장이 격전지가 되었다고 해서 또 빌런 편에 있었다고 해서 당연하게 죽어야 하는 건, 당연하게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애나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 그래서 애나가 빌런 레비아탄과 함께 해나가는 일들이 속 시원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책 한정이지만 진짜 빌런은 히어로들인 것처럼 보일지경. 이 책 속 이야기에선 맹목적인 히어로의 짧은 식견이 문제이지만 현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비도덕성이나 부수적 피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특정인에 대한 마녀 사냥 혹은 앞뒤 가리지 않는 추앙, 그럴듯한 소문에 쉽게 휩쓸리는 줏대없는 대중들 등. 결말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쉽긴 했지만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였고, 읽는 내내 즐거웠다. 



21.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다닐로 키슈, 조준래 역. 문학과지성사. 2014. 252쪽)

: 9편의 단편집. 모두 죽음이 언급되거나 주요 소재로 쓰였다. 하지만 단순히 죽음이라는 소재가 주는 무게감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서정성과 비통함, 환상과 핍진성 아래에 냉소주의를 엷게 깔아두었다. 그리고 비판의 대상은 기존 종교에서부터 이데올로기, 근대화, 신분제도 그리고 자본주의에 전도된 문학계까지 가리지 않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왕들의 서 또는 광대들의 서>. 가장 좋았던 건 표제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영예롭도다, 조국을 위한 죽음이여>.



22. 작은 빛을 따라서(권여름. 자이언트북스. 2023. 268쪽)

: 내장산 가는 길목 '필성 슈퍼'의 둘째딸 은동의 장래희망은 배우. 용돈을 받는 족족 모아두는 이유는 연기 학원에 등록하기 위함이다. 어느날 은동은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감추고 싶어하는 할머니에게 몰래 글을 가르쳐주고 용돈을 받기로 한다. 한편 동네에 갑자기 등장한 '엉터리 마트' 때문에 은동이네 슈퍼는 위기를 맞이한다.


어쩌면 삶은 계속 다가오는 크고작은 위기를 쳐내는 게 전부인지도 모른다. 필성슈퍼에 엉터리 마트가, 곧이어 폐점한 엉터리 마트 대신 들어온 대기업 대형 마트가 가져온 위기들처럼.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난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문득 어쩌면 위기 속의 빛이 아니라 작은 빛이 계속 반짝이는 와중에 불쑥 끼어드는 굴곡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굴곡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빛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삶. 그건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없어도 셔터를 올리고 슈퍼를 열어 기다리는 삶. 매일 한글을 연습하는 삶. 친한 친구가 내가 원했던 영역에서 나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는 삶. 삶의 모든 순간을 기를 쓰고 살아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은 빛을 주워모으듯 따라가다 보면, 내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으로 가득한 곳에 도착해 있겠지. 처음 상상했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23.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임수현 역. 민음사. 2005. 180쪽)

: 두 편의 희곡. 하지만 무대에 대한 설명이나 지문이 없어서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표제작은 'deal'을 제안하는 딜러와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손님과의 팽팽한 대립을 보여주는데, 표면적으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저 평행선을 달린다. 욕망을 드러내보이길 원하는 딜러의 속삭임은 마치 악마의 그것같다. 하지만 손님은 딜러에게 쉽게 자신의 무엇도 내보이지 않는다. 딜러는 차가운 이성의 외피를 쓰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손님은,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나 점점 차가워지며 딜러에게서 심정적으로 한걸음씩 물러난다. 이들 대화의 끝은 허무하게까지 느껴지지만, 독자에게는 안도감을 준다. 물론 그 안도감은 갈등의 해소를 통한 건 아니다. 두번째 작품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은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체가 한 문장이지만 쉼표가 잦아서 쉼표를 마침표처럼 읽게 된다.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작가가 마침표를 쓰지 않은 건 아마도 이 상황이 화자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든 실제로 일어났든 독자가 하룻밤 머물 공간을 찾는 화자의 여정을 조마조마하며 따라가도록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고 난 그 의도에 완전하게 반응했다. 


두 작품 모두 처음부터 줄거리가 잡히지는 않지만 곧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구체화되는 과정이 독자에게는 꽤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걸 과연 어떻게 무대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출자의 재량에 달려 있겠지만, 이게 무대에 올라갔을 때 잘못(?)하면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울 거 같다. 그리고 난 늘 그렇듯 희곡을 읽는 건 재밌지만 굳이 연극은 보고 싶지 않다. 사실 표제작을 읽을 땐 딜러에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내 욕망을 알려 하지 마세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손님에게 몰입했지만 두번째 작품을 읽을 땐 왠지 이 작품의 화자가 표제작의 딜러가 된 게 아닐까 싶어서 연민이 들었다. 보통 희곡을 읽을 때 등장인물에게 나 자신을 대입시키는 일은 잘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되었던 게 내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24. 당신의 비밀을 묻어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4. 384쪽)

: 핀레이 도노반 시리즈 3권. 3권이 나온 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얼마나 기뻤던지. 1,2권이 잘 기억이 안 나긴 했지만. 핀은 여전히 새 책의 진도를 못 빼고 있고 여기에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마피아 두목 펠릭스에게 협박까지 받는다. 전문 킬러 '싹쓸이'의 정체를 밝혀 없애라는 것. 이 와중에 핀의 모자란 점을 훌륭히 보완해 주었던 베이비시터 베로는 학창 시절 여학생 클럽의 돈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짚어 써 급하게 돈을 마련해야 한다. 펠릭스의 압박은 점점 세게 다가와 핀은 일주일 안에 싹쓸이가 누군지 알아내야 하는데, 경찰로 의심되는 그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마침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찰 아카데미가 열린단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핀과 베로.


여전히 핀은 답답하지만, 많이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맨스에서는...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그간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경찰관이랑 맘놓고 진도를 빼겠어. 경찰 아카데미에서의 둘의 행동이 꽤 대담해서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재밌게 읽었다. 뒷부분에 적극적이었던 핀도 좋았고. 하지만 난 여전히 줄리언이.... 어쨌든 이번에도 이래저래 한고비는 넘겼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25.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에드먼드 모리스, 이석호 역. 프시케의숲. 2021. 360쪽)

: 베토벤의 전기. 물론 베토벤의 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곡가라고 얘기하기에는 내가 그에 대해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두께도 적당하고, 저자의 필력도 보장되고. 원제는 그냥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었던 거 같은데 번역판의 제목이 꽤나 적절하다. 이 책은 단순히 작곡가의 재능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제목처럼 한 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15세부터 보이던 기벽이라든가 "겉으로는 미친 작곡가 행세를 하지만 속으로는 성공에 대한 야망과 집념을 품고 있던 베토벤"(129쪽),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차 있던 베토벤 등- 을 이야기한다. 물론 베토벤의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이야기도 뺴놓지 않고.


특히 흥미로웠던 건 잘 알려진 일화들에 대해 저자가 바로잡은 것들이다. 흔히 교향곡 3번의 제목이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수정된 게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라고 알려져 있으나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곡의 리허설(1804년 6월) 때 이미 나폴레옹의 황제 선언이 있을 지 2주가 지났을 시점이나,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의 대교향곡>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됐다고. 이 일화를 전한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의 기억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출판업자에게 보낸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라는 단어를 종이가 찢어지도록 격하게 지워낸 흔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저자는 제목 수정이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p.176 


또한 가장 핫한 이슈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바로 불멸의 연인에 대한 것. 저자는 이 부분에서 확신을 갖고 있고 나 또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베토벤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그러했듯, 영화 <불멸의 연인>이 주었던 찝찝함은 많이 희석됐다. 


대부분의 전기가 그러하긴 하겠지만 시기를 잘 나눠서 정리해 준 게 좋았다. 주요한 곡들에 대해 언급해 준 것도. 베토벤의 괴팍한 성정이야 유명하지만 그의 자기 확신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자기애는 그에 대한 애정을 배가시켜줬다. 




26. 베토벤과 아홉 교향곡(엑토르 베를리오즈, 이충훈 역. 포노. 2020. 260쪽)

: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얼른 집어왔다. 아니, 그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베토벤에 대해 이렇게 긴 글을 썼다고? 물론 베토벤이야 당대에 이미 유명한 작곡가였고 슈베르트를 비롯 많은 후대 작곡가들이 그를 존경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쓴 글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이 책은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평론집과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베토벤 관련 글을 모은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첫 챕터의 엘리트주의에 놀랐고 마지막 단락의 동양 음악 운운에 살짝 긇혔지만 난 베토벤을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했던 당신의 글을 읽어주지 라는 맘으로 읽었다. 제목처럼 베토벤의 교향곡 9곡을 분석한 글이 주이고, 뒤에 그의 다른 곡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교향곡 1번에 대해 '여전히 모차르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혹평한 거 외에는 찬양 일색이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을 위해 악보도 실려 있다. 까막눈인 게 한스러웠다. 이 책을 펼쳐놓고 베토벤의 교향곡을 한 곡씩 들으며, 글과 음악을 맞춰가며 읽었으면 최상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출근길에 들고 나와 텍스트만 쭉쭉 읽었다. 다음에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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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은 해상도로부터(서이제. 문학동네. 2023. 376쪽)

: 단편집. 조금은 싱겁다고 할까. 약간은 유치한 작품도 있었지만 내용이나 필력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단편 속에서 화자가 계속 바뀌는 건 처음 한두 번이라면 새롭고 흥미로웠겠지만 단편집 전체에서 반복되다보니 너무 피곤했다. 



2. 랩 걸(호프 자런, 김희정 역. 알마. 2017. 412쪽)

: 도서관에서 이제야 내게 차례가 돌아왔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역시 저자의 입심이 대단하다. 저자의 소설을 먼저 읽어서 잘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보다 이 책이 훨씬 재밌었다. 과학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평가 절하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사실 이런 내용만 가득할까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걸 굳이 되풀이해가며 읽기에는 당시의 내가 많이 지쳐 있었어서). 저자 자신이 가진 과학에 대한 열망과 헌신, 좋은 파트너를 만난 행운과 가진 것 없이 맨땅에 머리 부딪치면서도 과학을 할 수 있기에 누린 행복이 가득하다. 나무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저자가 얼마나 그 얘기를 쓰면서 재밌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저자 인생의 전반에 걸쳐 거의 다 털어놓아서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에세이 한 권 더 내줬으면 좋겠다. 



3.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민지형. 안전가옥. 2023. 312쪽)

: 부잣집 입주 가사도우미 재이. 이 바닥에서 일할만큼 일해서 눈치가 빤하다. 지금 일하는 이 집은 사모는 매일 운동을 다니고 사장은 최근 IT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호라이즌 사의 전 이사로 늘 유유자적이다. 어느날 사장이 호라이즌 사의 최신형 기기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들여온다. 일정 시간에 걸쳐 자신의 뇌를 스캔해서 기억을 업로드한 후 그 기억으로 들어가 다시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 사장이 며칠간 골프 여행을 떠나자 재이는 호기심에 사장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보는데, 부인과의 아름다운 첫만남과 침대에서의 기억이 있다. 사장이 여행하는 동안, 그간 엄격한 자기 관리의 모습을 보였던 사모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사용해 보더니 사장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장을 부엌칼로 난도질하고 자살한다. 재이는 충동적으로 사장의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챙겨 그 집을 나오고, 호라이즌 사의 이사인 리사가 접촉해 온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기억은,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점은 기억의 주관성이다. 같은 사건이라도 자신의 상황과 위치와 해석에 따라 아름답게도 또 비참하게도 남는 기억. 그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하고 사고파는 근미래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수 있지만 그걸 공유하고 매매하는 인간들은 그런 점은 간과한다. 그 어떤 행복한 기억도 이면은 다를 수 있음을. 그래도 이 소설 속 많은 끔찍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비록 소설 속일지라도 사회가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는게, 쓰레기를 그래도 치웠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작가는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작으나마 선함을 보았나 보다. 그게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4.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애슐리 엘스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5. 440쪽)

: 에비는 남자친구 라이언의 같이 살자는 말에 행복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라이언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기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완벽한 남자다. 비록 가난한 에비를 의심하는 라이언의 오랜 친구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지만 에비는 이제 라이언의 제안을 수락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비가 살고 있다고 라이언이 알고 있는 집을 세팅해야 한다. 단기임대로 빌린 초라한 아파트를 생활감 있게, 라이언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병들과 에비의 직업에 맞는 책들로 말이다. 사실 에비는 에비가 아니다. 만들어진 인물이다. 실제의 '나'는 루카 마리노. 홀어머니 밑에서 행복하지만 어렵게 자라다 엄마를 암으로 잃고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려 '스미스 씨'에게 발탁되었다. 라이언은 이번 작업 대상이고 에비에게는 자신이 변해야 하는 인물의 설정과 서사만 전달될 뿐 이 작업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라이언과 함께 참석한 경마 대회에서 라이언의 옛 친구를 만난 에비는 그 친구의 애인이 본인을 루카 마리노라고 소개하자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자신과 비슷한 외모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대며 그곳에서 홀어머니와 살다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고 말하는 그녀.


초반부터 도파민 폭발이다. 루카의 지략과 흔들리는 마음,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스미스의 정체에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은 라이언까지 흥미를 놓지 못할 요소들이 계속 등장한다.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말까지 내 맘에 딱 들었다. 해피엔딩을 만든 게 루카 자신이라는 점이 특히 더.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읽은 범죄 소설이었다.



5.  죽이고 싶은 아이 1. 2(이꽃님. 우리학교. 2021,2024. 200쪽, 216쪽)

: 고등학교 1학년 서은이가 벽돌에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된다. 그것도 학교 뒷마당에서. 용의자는 서은과 가장 친했던 주연. 주연이 서은과 전날 다투었다는데, 주연은 도무지 그일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실은 주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1,2권이 시간차를 두고 출간됐지만 그냥 한꺼번에 읽었다. 어차피 이어지는 이야기였어서. 이 소설은 관계와 숨은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흔히들 남녀 관계는 본인들만 아는 거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둘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거지. 하지만 그 관계 내에서도 둘 사이의 입장과 판단은 다르다. 여기서 각자가 품은 진실이 달라진다. 소설에서는 '모두가 믿는 게 곧 사실'이라고 얘기한다. 이건 현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 그런데 그게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남들이 다 믿으니 그게 곧 진짜라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가도 되는 걸까? 이 모든 일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은, 특히 당사자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들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결국 사람의 일이고 늘 사람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그건 늘 잊히지. 주연과 서은, 그리고 모든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팠던 이야기였다. 



6. 숲의 신(리즈 무어, 소슬기 역. 은행나무. 2025. 696쪽)

: 에머슨 캠프는 유서 깊은, 나름 잘 조직된 캠프이다. 이혼 가정의 트레이시는 아빠와 아빠의 애인에 의해 이 캠프에 합류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여름마다 여기에 왔던 아이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지만 역시나 자기처럼 뒤늦게 들어온 바버라와 친해진다. 바버라는 이 캠프 부지의 소유자인 반라 가문의 딸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데 어느 아침 일어나보니 바버라가 침대에 없다. 당연히 캠프와 반라 가문이 지내고 있는 '독립독행'의 사람들은 물론 마을 전체가 나서서 그녀를 찾는데, 사실 바버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반라 가문의 아이가 사라진 적이 있다. 모두가 사랑했던 어린 베어. 이야기는 오래전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중간쯤 읽는데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서 잠깐 덮었다. 정말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여성들이 계층, 직업, 성향, 상황에 상관없이 남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휘둘리고 심지어 누명까지 뒤집어쓰는 구나. 지겹다, 정말.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형사 조도, 캠프의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는 가난한 루이즈도, 심지어 상류층의 앨리스도 본인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젠더로 평가받는다. 이야기는 범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다. 하지만 바버라의 실종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문제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인간들의 위선과 계급 의식, 성차별 그리고 욕망. 진실이 모두 드러난 뒤에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변할까. 그래서 미지근한 결말이 이해가 됐다. 그게 최선이었겠지. 다만 새로 드러난 진실을 견디는 것도 결국은 여성의 몫일 거라는 거. 그게 마음이 아팠다.



7. 사랑의 입자(김리리,김민령,김진나,신현이,이금이,전삼혜,정은숙. 문학동네. 2018. 220쪽)

: '사랑'을 테마로 한 청소년 단편집. 전삼혜의 이야기는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새롭고 좋았다. 주제인 사랑은 물론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이나 남매간의 애정, 때로는 로봇의 애정까지 이야기한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신현이.



8. 킬 유어 달링(피터 스완슨, 노진선 역. 푸른숲. 2025. 360쪽)

: 웬디는 요즘 남편 톰이 점점 밉살스러워진다.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남편이 같은 학교 교수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 날,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술을 역시나 과하게 마신 톰은 자신이 새로운 소설 집필에 들어갔으며 그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한다. 직감적으로 그들이 공유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아챈 웬디는 톰에 대해 살의를 품는다.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에서 조금씩 과거로 역행하며 진행된다.


그들의 비밀을 알아채는 건 그닥 어렵지 않다. 사실 읽으면서는 이 책이 범죄 소설이라기 보다는 그저 중년 부부의 저물어가는 인생과 결혼 생활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의존하는 톰과 그가 꼴보기 싫지만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고픈 웬디.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과 헤어져 있던 기간의 삶, 그리고 재회. 굳이 이들이 함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이들의 인생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각자 조금씩 어긋나는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하는 좋았던 기억. 하지만 책 중반에 또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는 여전히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 끄트머리의 작은 반전. 사실 맘에 드는 반전은 아니었지만 역시 스완슨이구나 하긴 했다. 재밌게 읽었다. 



9. 내일을 위한 힌트(기준영. 문학동네. 2025. 268쪽)

: 순한 단편집. 화자들이 다 순하고 이야기들이 다 순하다. 물론 사건과 갈등이 없는 건 아니고 역경과 고난도 주어진다. 하지만 그저 묵묵히 견뎌나갈 뿐이고, 착하게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반짝이지 않아도 칙칙하지는 않게 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정말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좋았다.



10. 디 아더 와이프(마이클 로보텀, 최필원 역. 북로드. 2025. 528쪽)

: 오래전부터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조 올로클린. 16개월 전 아내를 수술합병증으로 떠나보내고 지금은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10대 작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대학 신입생인 큰 딸은 멀지 않은 도시에 있다.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아버지는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뒷머리를 둔기로 가격당했다고 하고, 아버지의 침상 옆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아버지의 다른 아내라고 말한다. 올리비아 블랙모어는 외과의였던 아버지의 예전 환자였고 장래가 기대되는 테니스 선수였지만 사고를 심하게 당했고 아버지가 그녀를 수술하고 재활을 도왔다. 조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걸 고민하는 한편 올리비아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다.


초반, 상간녀의 당당함에 혼자 열받았다. 조가 그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고. 남자들이란... 그저 예쁘면 호감이지. 설사 그게 아버지의 정부라 해도 말이다. 올로클린 시리즈의 9권이라는데 이런 시리즈물의 첫 권이 아닌 작품을 처음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꾸준히 읽었다면 조에게 더 공감했을까? 사건 조사는 느리게 진행되고 중간중간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의심을 더하지만 범인은 가까운 데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도 잘한 건 없고. 솔직히 말하면 제목으로 낚았네, 싶다. 시간이 좀 아깝기도 했고. 



11.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조나탕 베르베르,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3. 624쪽)

: 1888년 뉴욕. 스물여섯 살의 제니는 동네 시장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어느날 공연에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나타나 다른 마술 공연의 트릭을 찾아내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눈앞의 지폐에 흔들린 제니는 신사와 함께 본 공연의 술수를 바로 알아차리고, 후에 신사가 준 주소로 찾아가는데 그곳은 당대에 유명했던 핑커턴 탐정사무소. 신사는 로버트 핑커턴이었다. 로버트는 제니에게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심령술사 폭스 자매의 속임수를 알아내는 임무를 함께하자며 거액을 제시한다. 당시 폭스 자매의 교령회는 종교 집회만큼이나 열렬한 팬들을 몰고 다녔고, 핑커턴 탐정사무소는 아버지 대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는 교령회에 참석하지만 속임수를 알아내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자매 중 둘째인 마거릿이 성희롱을 당하는 걸 구해주며 그녀에게 신뢰를 얻는다. 한편 로버트의 동생 윌리엄은 거친 인간으로, 마술사인 제니를 고용하는 걸 못마땅해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폭스 자매의 비밀을 폭로하겠노라 하고 먼저 비밀을 밝혀내는 쪽이 핑커턴 사무소의 경영을 맡기로 하자고 로버트에게 제안한다.


마술과 심령술, 탐정 기술 등이 엮여 있지만 이건 가족의 이야기이자 제니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제들이 좀 산만하게 섞여 있다. 각 챕터 첫머리에 제니의 아빠가 쓴 마술 교본이나 핑커턴 지침서 등이 등장해서 챕터의 방향을 알려 주긴 하지만 폭스 자매, 제니 그리고 핑커턴의 서사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불쑥 튀어나온다. 사실 내 독서를 가장 시큰둥하게 만든 건 제니였다. 제니의 우왕좌왕이 그녀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했어서. 아마도 저자는 제니의 휴머니즘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거 같은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제니는 임무와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제니의 성장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정돈된 스토리였다면, 차라리 분량을 줄여서라도 단순화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2. 메르헨(연여름. 아작. 2024. 184쪽)

: 갑작스런 폭설에 전철에 오른 남자. 우연히 14년 전 인연을 만난다. 자신이 나호인지 은호인지 맞혀 보라는 듯 웃고 있는 여자에게 남자는 일부러 틀린 답을 말하고, 둘의 기억은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60세 이하의 죽은 자를 되살려 낼 수 있는 세계. 그렇게 재생인은 죽음 직전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깨어나 센터에서 적응 기간을 거쳐 사회로 나온다. 남자는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은호는 쌍둥이 언니 나호가 깨어나자 나호를 만나러 센터에 갔다가 남자와 처음 맞닥뜨린다. 재생인에게 일어나는 부작용 때문에 재생인들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에서, 은호는 나호가 죽기 전부터 둘이 함께해 오던 집필 작업을 마무리하길 원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사실 재생인이라는 설정 외에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좋은 건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떄문.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거기에 작가 특유의 차분함이 배어나오는 문장들이 서정성을 더한다. 이 작가를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다. 다만 다음에 읽을 작품은 좀더 깊었으면 좋겠다. 



13. 오컬트 포크 호러(박해로. 북오션. 2024. 248쪽)

: 샤머니즘 기반의 호러 연작 소설집. 가상의 지명인 수낭면을 중심으로 토속적인 분위기의 작품 3편이 있다. 가벼운 걸 읽고 싶어서 집어들었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서... 작가가 가진 주제의식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세 작품 다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에 문장력도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필력이 달리는 글들. 



14.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서미애. 엘릭시르. 2024. 448쪽)

: 작가의 초기 단편집. 사실 이 작가의 명성에 비해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별로 안 읽어와서 기대가 컸는데, 초기 작품들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작가의 특성인건지 여성 캐릭터들이 다 너무 나약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여성혐오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도 몇 편 있어서 더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건 <살인 협주곡>.



15. 워터멜론 슈가에서(리처드 브라우티건, 최승자 역. 비채. 2007. 252쪽)

: 매일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가의 이야기. 워터멜론을 끓여 생긴 슈가로 원하는 걸 만들고,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램프를 태우며, 아이디아뜨(iDEATH)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호랑이들이 있었고, '나'는 호랑이들이 부모님을 잡아먹은 걸 기억한다. 내게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하면서 내 산수 숙제를 도와줬던 걸. 나는 책을 쓰고 있지만 진전은 없다. 그래도 마을의 누군가 물으면 난 계속 쓰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늘도 삐걱거리는 널빤지를 밟으며 다리를 건너 마가렛이 나를 찾아오지만 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응답하지 않는다. 마가렛은 '잊혀진 작품들'로 가버렸다. '잊혀진 작품들'에는 인보일 일당도 살고 있다. 친구 프레드가 찾아와 플린이 식사 준비 담당이라고 얘기하고, 난 아이디아뜨에 가서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핏물을 감출 수 없다. 편안하게 읽고 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 작품의 많은 상징들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이상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호랑이들이 살점을 뜯어먹었던 기억이 있을지언정 물 속에 관을 묻고 워터멜론 송어가 눈맞춤을 하는.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람의 잔인함은 사람을 죽인다. 꼭 물리적으로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Ideal과 Death는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16. 종말까지 다섯 걸음(장강명. 문학동네. 2025. 212쪽)

: 종말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들. 5개의 챕터인데 각 챕터의 첫 번째 작품들이 연작이고, 차례로 각 챕터의 키워드(부정 - 절망 - 타협 - 수용 - 사랑)를 구현한다.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와 상당히 비슷하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그런 듯. 각 챕터에 속하는 소설들은 키워드를 구현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익숙한 소재를 끌어다 쓴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그걸 뒤틀었다. 작가의 시각은 맘에 들었지만 다 재밌진 않았다. 그래도 지루해질 만 하면 챕터가 바뀌면서 궁금했던 이야기가 계속되어서 잘 읽었다. 



17. 기억을 비추는 환등열차(심은정,최현유. 안전가옥. 2024. 424쪽)

: 수현은 삼도천을 건너는 환등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판결대를 향해 가던 환등열차는 갑자기 악귀의 공격으로 사고가 나고 함께 있던 담당 차사 원정의 도움으로 열차 밖에 내던져진 수현은 다행히 삼도천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악귀가 가져가 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임시로 차사 일을 하게 된 수현. 살아있을 때 위기협상가였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다른 승객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면 자연히 수현의 기억도 돌아올거라는 말에 원정과 함께 일을 시작한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힐링 소설류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이야기들의 장점은 뚜렷하기에 그냥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려 했는데, 초반부터 수현 때문에 열받았다. 어떻게든 자신보다 어린 여성은 경력이 길든 경험이 많든 상관없이 상사로도 선배로도 절대 인정 못하겠다는, 존댓말도 못 쓰겠다는, 어떻게든 이겨먹어야겠다는 한국 남자 특유의 꼬장이 정말이지... 그렇다고 각 에피소드들이 뭐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랬다.



18. 펄프픽션(조예은,류연웅,홍지운,이경희,최영희. 고블. 2022. 256쪽)

: 한국형 펄프픽션을 표방하는 앤솔러지. 다 독특하긴 했지만 가장 주제에 부합했던 건 홍지운. 가장 좋았던 건 최영희. 사실 조예은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너무 평범해서 조금 실망했다. 그래도 필력은 여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 



19. 인어의 걸음마(이종산,이유리,전삼혜,이서영. 서해문집. 2021. 168쪽)

: '다름'을 소재로 한 청소년 대상 앤솔러지. 전삼혜 때문에 대출했는데 보니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은 거였지만 즐겁게 다시 읽었다. 근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같은 부분에서 열받네 - 작중 인물이 얄미워서. 표제작은 과연 표제작다웠다. 그래서 가장 좋았고. 나머지 작품들도 좋았다. 



20. 베리 따는 사람들(아만다 피터스, 신혜연 역. 서사원. 2024. 408쪽)

: 1962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사는 원주민 가족은 여름 한 철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기 위해 미국 메인 주의 한 농장으로 온다. 아버지는 이 농장에서 감독관 역할을 하며 일을 해오곤 했고 엄마는 여름 노동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 루시가 사라진다. 방금 전까지 바로 위의 오빠 조와 함께 냇가에 있었는데... 한편 어린 노마는 자꾸만 악몽을 꾼다. 오두막과 커다란 바위. 노마가 악몽을 꾸면 엄마는 두통에 시달리고, 노마는 엄마를 위해 자신의 의문을 눌러야 한다. 집에는 노마의 아기 때 사진이 한 장도 없는데, 예전에 집에 불이 나서라고는 하지만...


조와 조의 가족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팠다. 원주민으로서의 그들의 지난한 삶은 루시의 실종으로 더 큰 아픔이 된다. 그들이 백인이었더라도 루시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루시는 그냥 실종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받을 상처에서 한두 개 쯤은 덜 받을 수도 있었겠지. 조의 삐뚤어짐도 마냥 아프기만 했다. 누구보다 조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나 자신을 착한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싶은 마음. 처음부터 내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닥칠 불행은 훨씬 적었으리라는 믿음.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후에는 조에게 평안이 온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견뎌 온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이야기 밖의 독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앞날을 상상하고 싶겠지만, 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다. 



21.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문학동네. 2024. 336쪽)

: 작년에 명성이 꽤 자자했지만 난 왠지 기대가 되지 않았는데,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들고 왔다. 기대가 없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었지만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하지만 사회와는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읽는 사람도 크게 복잡할 게 없다는 게 이 이야기들의 장점이자 단점. 장편이 출간되면 읽어봐야겠다.



22. 저편에서 이리가(윤강은. 민음사. 2025. 172쪽)

: 이제 전세계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이다. 수시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반도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역은 크게 세 군데. 가장 남쪽의 '온실 마을'에서 생산된 식량은 유안같은 짐꾼들에 의해 중부 '한강 구역'으로 이송되고, 한강 구역에서 생산된 무기들은 국경인 '압록강 기지'로 이동한다. 유안은 이동 범위를 압록강까지 넓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이장의 말에 그건 한강 구역의 일이 아니냐며 한강 구역에 간 김에 짐꾼인 화린에게 따진다. 하지만 화린은 한강 구역의 구역장의 뜻임을 알려준다. 내친김에 함께 압록강 기지로 이동하는 둘. 거기서 유안은 원래 한강 구역 출신이자 화린의 친구인 기주, 그리고 대륙군의 탈영병 출신인 백건을 만난다.


해피엔딩일지 아닐지 조바심내며 읽었다. 해피엔딩이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통에, 이 눈보라 속에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 해피엔딩이 뭔데? 이들에겐 그저 생존이 해피엔딩인가? 혹은 잘, 의미있게 죽는 거?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죽음에는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이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저편에서 들리는 짐승의 소리는 과연 이 눈보라 속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일까, 아님 이들의 목숨을 가지러 오는 맹수의 모습을 한 죽음일까? 그럼에도 희망을 본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 



23.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도재경. 열린책들. 2024. 312쪽)

: 즐겁게 읽은 단편집.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좋았다. 작가의 의도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내게 각 작품들 속 장소가, 장소의 이동이 꽤 의미있게 다가왔다. 서울과 파리(<그가 나무 인형이라는 진실에 대하여>), 춘천 집 뒤의 숲 속 공터(표제작), 화재가 난 마을의 유일하게 불타지 않는 집(<마인드 컨트롤>), 우크라이나와 그 밖의 나라들(<방독면을 쓴 바나나>), 카트만두(<노르웨이와 카트만두 사이>) 등. 의미있는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이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삶이란 그렇게 끊임없이 이별하고 이동하는 것인지도.



24. 내일의 엔딩(김유나. 창비. 2024. 156쪽)

: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자경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교사로 일하며 자경을 키운 아버지는 이제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다. 자경은 회사를 옮기고 알바를 하면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힘에 부친다. 


여성과 돌봄 노동에 관한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자경은 여러 가족 중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돌봄 노동을 떠맡은 건 아니기에. 그러나 홀로 돌봄으로 인해 한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기 힘들어지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생활에 치이고 경제적으로 허덕이면서 자꾸만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자경의 모습은 단순히 안쓰럽다고 말할 수 만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의 그녀의 모습도. 그래도 작가는 자경에게 희망을 준다. 다시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늦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시 난, 사람으로 채우는 건 따뜻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그렇게 따뜻하게 끝나서 다행이었고, 좋았다. 



25. 나무를 훔친 남자(양지윤. 나무옆의자. 2024. 276쪽)

: 특이하고 괴상하지만 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죽어가는 나무가 불쌍해서 회사에서 나무들을 빼돌리고(표제작), 부당한 노동에도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에 잠도 자지 않고 쿠키만 구워대고(<알리바바 제과점>), 자유를 위해 부유함을 포기하고(<우리 시대의 아트>), 수조에 갇혔지만 도망치치도 않고(<수조 속에 든 여자>). 도저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것이 이들이 이 사회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들의 모습을 짜증내지 않고 그저 지켜볼 수 있었고.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핥는 방법이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이런 주제들에서 조금은 벗어난 <인류의 업적>. 



26. 두리안의 맛(김의경. 은행나무. 2024. 292쪽)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은 그저 교체 가능한 부품임을 이야기하는 단편들. 작은 부품 하나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빛나게 꾸려가고 싶어하는 소시민들의 안간힘이 보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따뜻함이. 이 작가는 처음 읽는데 읽을수록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에게 너무 공감되어서 읽는 게 오히려 힘들기도 했지만 잘 읽었다.



27. 그녀를 지키다(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정혜용 역. 열린책들. 2025. 6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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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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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 있음)



유서 깊은 작은 수도원 사크라 디 산미켈레의 지하에는 그녀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유폐된 피에타. 그녀를 본 사람들은, 심지어 수도사들까지도 묘한 흥분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열망을 품게 된다. 여러 사건이 있은 후 이 수도원 지하에 숨겨진 그녀. 수도원장은 이제는 임종의 자리에 있는 '그'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열쇠로 그녀를 확인한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그는 오랫동안 이 수도원에 머물고 있고, 수도사들 사이에서 그의 신분에 관해 말이 나온 적도 있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이며 시시각각 죽음에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난 82년간의 생을 돌아본다. 


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인이었던 그는 조각가인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미켈란젤로보다는 미모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미모 비탈리아니. 1차 대전은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가고 엄마는 피 한방울 안 섞인 '삼촌'이 있는 이탈리아로 그를 보낸다. 그저그런 석공이었던 삼촌 알베르토는 늘 술만 퍼마시며 허송세월을 하다 갑자기 소도시 피에트로달바로 이주하고, 거기서도 미모를 학대하지만 이제 열두 살이 된 미모는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이 고장의 가장 높은 귀족인 오르시니 후작 가문의 막내딸 비올라와 마주친다.


내가 처음부터 그를 가엽게 여긴 건 그가 왜소증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응답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응답받지 못한 이유도 왜소증은 아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클리셰로 읽힐 지도 모른다. 신분의 차이, 신체의 차이, 그리고 전쟁... 그러나 미모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그의 재능으로. 물론 그 악마적 재능이 그를 늘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 모든 상황을, 사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재능 덕분이다. 그러나 그 재능으로도 미모는 비올라를 지키지 못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비올라.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비올라. 하지만 세상은,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녀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젠더를 형벌로 지고 살아간다. 


아니, 미모는 그녀를 지킨다. 


"빌어먹을, 넌 정상적일 순 없는 거야? 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그저 정상적인 거 말야."


(중략)


"아니야, 미모. 그 말이 맞아. 내 평생 정상적이기 위해서 네가 필요했어. 그런 노력을 할 때 넌 내 구심점 노릇을 하니까. 그래서 네가 늘 유쾌한 존재일 수는 없는 거지. 하지만 내 안에는 아무리 너라도 절대 고치지 못할 비정상성이 있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그 점에 관한 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 " (594 - 595쪽)


비올라의 천재성과 그것을 압박하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반발은 비앙카를 통해 드러난다. 중세 이후 서양 예술사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곰은 억제되어야 할 힘이며 길들여져야 할 야성이었다. 비올라는 비앙카를 지킨다. 비앙카에게서 달아나지도 비앙카를 사냥하거나 구속하거나 혹은 길들이려고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앙카로 인해 비올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비앙카의 죽음과 비올라의 죽음이 잇단 건 우연은 아니었다. 그리고 비올라의 죽음이 미모에게 돌려준 것 또한. 



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모든 독자들이 전율하는 지점을. 예상을 했다하더라도 미모가 얘기하는 피에타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가슴 속의 울림을 누구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미모가 비올라를 세 번 배신해야 했는지, 왜 비올라가 그토록 고통받아야 했는지 마지막에서야 모든 게 맞춰진다. 어쩌면 비올라가 한 가장 숭고한 일은 한 인간 - 미모 비탈리아니 - 을 구한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미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올라를 지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건 세상을 구한 것인지도.



PS. 원제 Veiller sur elle를 직역하면 '그녀의 위에서 깨어서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비올라보다 작은 키의 미모가 지하에 놓인 피에타 상 위에서 산 40여년의 세월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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