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이하진. 안온북스. 2025. 276쪽)
: SF 단편집. 이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고 좋았어서 선택했는데 역시나 모든 작품들이 다 좋았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어쩌면 극단적인 상황이거나 또 어쩌면 조금은 비호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과 절대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작가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우선되어져야 하는지. 작가가 보여주는 작은 희망들이 아름다웠다.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선물>.
2. 낯선 편지(이머전 클락, 배효진 역. 오리지널스. 2025. 512쪽)
: 웨딩 드레스 디자이너 카라. 엄마는 두 살 때 돌아가셨고 폭력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아버지에게 질린 오빠 마이클은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 이제는 런던에서 가족을 이루고 잘 살아가고 있고 카라는 아버지를 돌봐 줄 누군가를 고용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익숙한 물건을 주면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다락방 앞에 서게 된 카라. 어릴 적 아버지는 다락방 출입을 엄금했다. 다락방 근처에서 놀고만 있어도 불호령을 내렸던 아버지. 이제는 카라가 다락방을 뒤져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고, 카라는 먼지 쌓인 다락방 가장 구석진 곳에서 수상쩍은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가들에게'라고 쓰인 엽서가 가득한데...
(약스포)
낯선 엽서의 비밀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난 카라의 입장에서 화가 났을 뿐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선택한 애니에게, 순진하게도 자신의 엽서가 아이들에게 전해질 거라 믿었던 애니에게. 나라면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렇게 허술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 법원과 남편, 사회의 폭력성을 그렇게 겪고도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늦은 나이에 진실을 알게 된 카라의 혼란과 배신감은 정말이지... 등장 인물들 중 P선생을 제외한 누구도 카라의 마음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도 내 화를 돋웠다. 엄마 없이 자란 카라 안의 어린 아이를 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게 핍진성이겠지. 이야기는 잘 짜여 있었고 필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 빠지는 독서였다.
3. 밤을 달려온(연여름. 황금가지. 2026. 340쪽)
: SF 단편집. 모든 작품이 다 재밌고 좋았다.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이야기들이지만 소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정말 다 좋았지만 가장 재밌었던 건 <캐트닙 네트워크>. 가장 좋았던 건 <화살 거두는 천사 틸리의 선택>.
4. 호랑이성의 마법사(루이스 새커, 김영선 역. 창비. 2025. 416쪽)
: 한때 성을 둘러싼 해자에서 호랑이를 키웠다는 전설 때문에 호랑이 성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고성 앞 카페. 배 나오고 땅딸막한 키의 미국인 남성 관광객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때때로 크루아상의 부스러기를 후드 티 주머니 안으로 떨군다. 사실 그는 500년 전 이 성에 살았었다. 1523년 몰락해 가는 왕국 에스콰베타. 뛰어난 마법사인 아나톨은 재무장관의 요청으로 연금술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왕의 부름에 달려가 보니 부유한 옥사타니아 왕국의 왕자와 정략 결혼을 하기로 한 툴리아 공주가 견습 필경사 피토와 사랑에 빠졌으니 이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어릴 때부터 아나톨을 따랐던 공주 또한 피트를 구해달라며 도움을 청한다. 고심 끝에 아나톨은 피트에게 기억을 잃는 약을 먹이기로 하고 레시피를 섬세하게 조정해 가며 딱 맞는 몰약을 만들기 위해 매일 피트가 갇힌 지하감옥을 방문한다.
별 기대 안하고 그저 머리나 식혔으면 하고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청소년 대상 소설이지만 정치적 입장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태도들과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하는 긴박함, 위정자들의 위선과 무지, 얕은 술수 등이 공주와 피트, 아나톨의 모험에 다채로운 색을 더해주었고, 그 와중에 공주와 피트의 섬세한 심리 묘사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읽는 건 (아마도) 처음인데 지난 작품들도 종종 찾아 읽어야겠다.
5.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미래(염승숙. 문학과지성사. 2025. 296쪽)
: 오랜만의 단편집.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 즈음의 내가 많이 지친 상태였어서 독서가 즐겁지 못했다. 내 현실이 힘든데 굳이 다른 사람들의 힘든 현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정말 힘들게 잘 쓴단 말이다. 불안하고 힘겨운 현재, 미래가 있기야 있겠지만 지금과 별반 다를 리 없는, 오히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물론 일상에서 언뜻언뜻 선한 사람들의 배려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우연이잖아. 그런 우연이 늘 생기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끝까지 읽었고, 마음이 괜찮아진 후에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문제이다. 소설이나 작가는 죄가 없다.
6. 라두 루푸는 말이 없다(이타가키 지카코 엮음, 김재원 역. 봄날의책. 2025. 248쪽)
7.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김서해. 자이언트북스. 2023. 188쪽)
: 미술대학원 휴학생 해인은 독립 서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다. 어느날 묘하게 유명인의 느낌을 주는 남자애가 서점에 오는데, 이미 여학생 두어 명이 가게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를 흘끔거리고 있다. 서점 사장과 친해진 그, 영원과 어찌어찌 말을 트게 된 해인. 그의 초대 아닌 초대로 그가 밴드 카드뮴 그린의 베이시스트라는 걸 알게 되고, 그 후 그는 아예 서점에 알바생으로 취직하며 해인에게 계속 인터뷰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뒤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생각해 보면 못 알아차릴 것도 없는데. 해인은 영원의 질문을 한 번도 무례하다거나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답을 해준다. 그러면서 중학생 때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주희에게서 춤을 배웠던 일이나 주희 엄마와의 일들을 비롯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라서 결국엔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애도에는 각자만의 방식과 시간이 있다. 해인이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써서 지난날 위에 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8. 족장의 가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역. 민음사. 2021. 408쪽)
: 카리브 해 근방의 가상의 독재국가. 그곳에는 200년을 살아온 족장이 있다. 그의 시신이 그가 살던 집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첫번째 시신은 그의 대역의 것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그리고 다시 그의 시신이, 엎드린 채 독수리에게 얼굴을 반쯤 뜯어먹힌 시신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뒤집어 볼 생각도, 그가 정말 그일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그가 처음 총을 잡았던 옛날과 첫사랑을 잃은 그때, 어머니를 매일 찾아가던 시절을 오간다.
화자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단, 이름이 나온 사람들 - 그의 대역이었던 파트리시오 아리고네스, 그를 사로잡은 환상 속 여인이었으며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마누엘라 산체스, 어머니 벤디시온 알바라도, 유일한 적법 아내 레티시아 나사레노, 친구이자 동지였던 로드리고 데 아길라르 장군,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을 벤 호세 이그나시오 사엔스 델라 바라 - 만 빼고. '나'는 그의 시신을 넘어 관저를 둘러본다. '나'는 그의 발아래 치이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그를 진찰한다. 길고 긴 문장들이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의 질병과 사랑, 상실을 이야기한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수혈해 줘야 하는 라틴 문학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작품은 저자의 여러 실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결코 다시 느낄 수 없을 그의 젊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고, 만연체의 문장에도, 일정하게 흘러가지 않는 소설 속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어쩌면 뻔하게 흘러가는 독재자의 생이 우스우면서도 짠해서 그것마저 좋았다.
9. 식물, 상점(강민영. 한겨레출판. 2024. 272쪽)
: 오래된 구옥을 개조해서 만든 식물 상점. 최유희는 간판마저 간단한 이곳을 개업하며 여러 걱정을 들었지만 식물에 관해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에 금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된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하는 한 남자. 이번에는 좀 다를까 하여 믿어보려 했건만 식물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 더해 친구랑 하는 막말 섞인 통화까지 들어버렸다. 순간 유희에게는 지난 날이 떠오른다.
내용이 통쾌해서 좋았다. 다만 유희가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싶다. 오래해야지, 그 일. 당신만이 아닌 모든 여자들을 위해서. 그런 벌레들은 박멸해야잖아? 불쌍하다고 풀어주지 말고. 어쩌면 작가가 2권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르겠는 결말이 조금 미진했고 내용이 많이 평면적이긴 했지만 말했듯 유희의 시원한 행동들이 내 지난 불쾌한 기억들마저 씻어주는 듯 해서 좋았다.
10. 암전들(저스틴 토레스, 송섬별 역. 열린책들. 2025. 416쪽)
: 사막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 '팰리스'. 이곳에 죽어가는 노인 후안 게이가 있다. 이런 그를 27년 전 한달 동안의 인연이 있는 청년이 찾아온다.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 그는 후안의 방에 머물고 후안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후안은 그에게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물건들과 이 방을 물려받으라고 얘기하는데, 그 중에는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연구서는 잰 게이가 실제로 퀴어들에게서 수집한 사례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후안은 자신과 잰 게이, 제냐 게이와의 인연을 비롯하여 이 연구서에 얽힌 이야기들도 해주고, 이야기를 듣는 그 또한 후안에게 자신의 지난 27년을 띄엄띄엄 이야기해 준다.
그는 누구일까? 실존은 하는 걸까? 어쩌면 후안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후안이 갖고 있는,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연구서는 실존한다. 아마 짐작건대 책에 얽힌 이야기들 - 잰 게이의 연구가 가로채인 사건도 진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소수자들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래야 묻히지도 잊히지도 않고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읽었던 것 중 가장 담백하고 진솔한 퀴어 문학.
11. 다른 우주에서 우리 만나더라도(마크 구겐하임, 이나경 역. 문학수첩. 2025. 392쪽)
: 평행우주가 존재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해 노벨상을 받게 된 물리학자 조너선. 연설을 하러 올라가기 직전, 아내 어맨다는 그의 손에 두 줄이 표시된 임신테스터를 쥐어준다. 벅찬 기쁨도 잠시, 귀가길 교통사고로 어맨다는 사망하고 만다. 조너선은 수많은 평행우주들 중 어맨다가 살아있는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사용하여 다른 우주로 건너가기로 맘 먹는다.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여러 차례 접촉을 했으나 충돌기 사용을 허가받지 못한 그는 용병까지 고용해서 침입해 강입자 충돌기에 들어가는데 성공하고, 결국 다른 우주로 건너간다.
(강스포)
여러 설정과 세계관은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주인공도 그 아내도 좀 이상하다. 다른 우주에 있는 자기 자신은 어쩌려고 다짜고짜 건너가기부터 하려는 거지? 물론 주인공도 이걸 간과하지는 않아서 곧 자신이 없고 어맨다만 있는 우주도 있을 거라고 머릿속에 희망 회로를 돌린다. 그러다 평행우주 간 이동이 10번이 한계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좀 우습다. 하긴, 제약이 있어야 언젠가 소설도 끝나지. 빌런이 빌런이 된 이유도 좀 유치하긴 하지만 필요악이니 그렇다고 치는데, 가장 이해 안 되는 건 앞에서 말했듯 주인공과 그 아내 어맨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어맨다는 죽은 남편이 돌아왔고 그 돌아온 남편이 다시 눈 앞에서 죽었는데 금세 나타난 또다른 남편의 품에 안긴다. 그러니까 몇 번이고 돌아오기만 하면 일단 죽어도 괜찮다는 건가?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그렇게 여러 번 죽는 거 자체를 못 견딜 거 같은데. 물론 어맨다는 평행우주를 믿었고 언젠가는 남편이 자기를 다시 찾을 거라는 걸 믿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럴 거면 그냥 서로서로 복제 인간 만들어가면서 이 우주에서 살아. 괜히 복잡하게 강입자 충돌기 같은 거 쓰려고 난리 치지 말고. 그냥 남편이 먼저 죽으면 복제하고, 그러다 아내가 죽으면 또 복제하고... 그러면 천년만년 살 수 있지 않겠어? 사실 가장 맘에 안 드는 건 여성 캐릭터의 희생으로 이 모든 성공(?)이 이루어졌다는 거. 사랑하면 무조건 희생해야 하나? 그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12. 끝맛(다리아 라벨, 정해영 역. 클레이하우스. 2025. 504쪽)
: 코스티야가 처음 끝맛을 느낀 건 열한 살 때였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와 노는 걸 보고 있던 중,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했던 탄맛이 느껴지는 일종의 팬케잌의 맛을 입 안에서 선명하게 느낀 코스티야는 엄마에게 그 얘길 하고, 곧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자신이 느끼는 끝맛을 감추며 살아가던 중, 바에서 마감을 하려는 차에 허겁지겁 들어온 중년 남성 손님과 함께 다시 끝맛이 느껴지고 술을 찾는 손님에게 자신의 끝맛이 정확히 구현된 칵테일을 준다. 손님이 한모금 마시자마자 바로 나타난 남자의 죽은 아내. 손님과 죽은 아내의 아름답고 평온한 마지막 인사를 본 코스티야는 요리를 통해 망자와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기로 맘 먹는다.
(약스포)
처음엔 그냥 코스티야의 능력 발휘 힐링 소설인 줄 알았다. 코스티야의 음식을 통해 죽은 이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사람들의 사연들. 그러나 이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코스티야 자신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코스티야. 그러면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못내 맘에 걸려 어떻게든 아버지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코스티야. 그리고 그런 그를 이해하는, 때로는 가로막는, 그리고 어쩌면 위험한 길로 이끄는 모라. 모라의 상처만으로도 난 충분히 버거웠는데, 코스티야의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불러오지 못한 것도 상당히 날 놀라게 했다. 이걸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세상을 단 한 사람이 구해야 하지? 코스티야가 그냥 모른 척 했더라면?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만 같다. 결말이 꽤 신선해서 여운이 길었다. 내 안의 비관주의자는 멀든 멀지 않았든 해피한 재회를 믿지 않지만.
13. 절창(구병모. 문학동네. 2025. 352쪽)
: 화자는 남편을 잃은 중년의 입주 독서교사이다. 면접을 위해 외딴 저택을 방문한 날 뒤뜰에서 참혹한 고문 장면과 여려 보이는 아가씨가 그 상처에 손을 대고 상대방 머릿속 '진실'을 읊는 걸 목격한다. 집주인 오언은 그 장면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화자를 고용한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 출신인 아가씨는 부유한 호텔 체인 막내아들 오언과 우연히 엮이고 능력을 들켜 오언에게 속하게 된다. 오언은 아가씨의 능력을 이용해 사업을 번창시키고, 뒷골목의 세계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아가씨와 오언의 관계는 이상하기만 하다.
뒤에 작은 반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화자가 독서교사여야 하는 이유, 이 소설의 문체가 만연체여야 하는 이유가 결국은 그거였구나. 화자도 나름 설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어쩌면 세 사람 각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오언의 사랑은, 미묘하지만 이해가 힘든 건 아니다. 화자의 사랑은 가장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아가씨의 사랑은... 결국 아가씨의 마음 속 사랑은 마지막 챕터의 그것이었나보다. 그리고 그게 가장 아름답다 말할 수 있겠지.
14. 이야기의 끝(리디아 데이비스, 송원경 역. 난다. 2024. 324쪽)
: 사랑이 끝났다. '나'는 다른 남자와의 여행 중 예전의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발송된 도시에 다다른다. 오랜 시간을 걸어 그가 살던 곳에 도착했고 "그가 그곳에 없었음에도 그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곳에 없었기에 원점으로 돌아와 끝을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곳에 그가 있었다면 모든 것이 계속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3-14쪽). 글을 쓰는 사람인 '나'는 그와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인, '나'보다 열두 살 연하였던 그와의 첫 만남과 밤새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 글을 쓰려던 그의 곤궁함, 어린 그의 이기심 그리고 이별 후 어쩔 수 없는 '나'의 집착.
나라면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남자를 사랑하는 화자의 말에 깊게 공감했던 이유는 사랑의 보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와 사랑에 빠지지도 이별을 하지도 않았기에 객관성 또한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이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나 이별이야기이기 보다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또한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결국 사랑이었지않나. 아름답고도 추한 사랑. 그 사랑 이야기의 끝은 이별이 아니다. 망각 또한 아니다. 저자는 그 끝을 기록을 통한 기억으로 가져가려 했겠지. 그러므로 사랑의 끝은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름답든 추하든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
15. 북경에서 온 편지(펄 S. 벅, 김성렬 역. 범우사. 2006. 281쪽)
: 1950년 9월, 버몬트 지방의 농장에 사는 리즈는 남편 제럴드 맥레오드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남편은 북경에 머물고 있고 그동안 띄엄띄엄 오던 편지의 간격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번 편지에는 더 절망적인 내용이 있다. 그녀는 대학 4학년에 남편 제럴드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했다. 중국인 혼혈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던 제럴드를 설득해 결혼에 이른 리즈는 남편과 함께 북경에서 신혼을 시작하지만 불안한 세계 정세는 곧 그녀와 남편에게 위협이 되어 결국 중국을 떠나기로 하는데, 북경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제럴드는 학생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곳 농장에서 혼자 아들을 키우며 생활하는 리즈. 이제 아들 레니도 장성해 얼마 후면 성인이다.
저자가 가진 '낭만적' 오리엔탈리즘이 곳곳에 드러난다. 잘 대우받는 백인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매우 '관대한' 관점들 - 특히 제럴드의 외삼촌의 친일 행위에 대한. 게다가 리즈는 여성에 대한 편협함을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제럴드의 엄마가 혁명에 동조하게 된 이유도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아들 레니에게 중국인의 피가 1/4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주저하는 레니의 첫사랑은 - 사실 이건 리즈의 생각처럼 중국 혼혈이어서가 아니라 레니의 아버지가 현재 공산국가인 중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거 같은데 - 그릇이 그만큼 밖에 안 되는 아이이다. 리즈의 생각이 저자 자신의 생각과 얼마만큼 일치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 사실상 이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 확실히 쓰여진 시대를 감안하고 읽어야만 할 소설이었다. 다만 난 그저 저자의 중국에 대한 - 어쩌면 그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 애정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16. 죽이는 화학(캐스린 하쿠프, 이은영 역. 생각의힘. 2016. 376쪽)
: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독극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한다. 대상이 되는 독은 14개이고, 저자는 각 약품의 화학적 특성 뿐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사용된 사례 및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상황까지 매우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 준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병원 조제실에서 근무하고 약제사 준비를 했던 만큼 약물에 정통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다른 어떤 도구보다 독극물 사용을 즐겨했으며 소설이었지만 독약의 맛이라든가 증상, 그 증상이 발현되는 시각 등 그 용례는 매우 정확했다. 이 책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데, 원제도 그렇고(『A is for Arsenic』) 각 챕터 제목들도 다 그런 식 - B is for Belladonna, C is for Cyanide - 이어서 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속 살인마의 흥얼거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것도 생각나고.
사실 독극물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어서 생각날 때마다 이런 가벼운 화학책을 한 권씩 읽곤 하는데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많지는 않다. 그래도 이 책은 정리도 잘 되어 있고 각 독극물의 증상 뿐 아니라 중독되었을 때 취해야 할 조치 및 해독제에 대한 설명까지 있어서 애거서 크리스티 팬이 아니더라도 읽어 두면 좋을 거 같고 팬이라면 이 책을 옆에 두고 그녀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을 거 같다.
17. 나의 미래에게(주민선. 창비. 2025. 404쪽)
: 새로운 바이러스가 돌고 어른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먼저 바이러스에 걸린 건 '나' 미아인데 깨어나 보니 언니 미래만 남아 있었다. 언니와 난 할머니가 기술 발전 이전의 시절처럼 살던 남쪽 지방의 전원주택으로 가기로 하고 짐을 꾸려 길을 떠난다.
난 아포칼립스 이야기가 별로여서 이 책도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뜻밖에 깊이 들어오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자매는 당연하게도 여러 고난을 겪고 그 와중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도 한다. 타인은 당연히 쉽게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 되는 존재이고 누군가를 대할 땐 내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와중에도 사랑은 싹트고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순수하게 되돌아 오기도 한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정말 울컥했다. 현실의 나야 인류 따위 얼른 망해버렸으면 싶지만 책 속의 망한 세상에서도 그 모든 희생과 기억과 기록을 통해 그렇게 세대는 이어지고 미래는 생겨나는 것이다.
18. 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정보라,최의택. 요다. 2025. 260쪽)
: 두 소설가가 릴레이로 쓴 여행(?) 소설. 국가 사업이라던 '석유 시추공 프로젝트' 사기에 휘말린 두 사람 - 보라, 의택 - 의 이야기다. 보라는 그럴듯한 꼬임에 넘어가 이 '대왕 고래 프로젝트'의 사업 자금 중간 모집책으로도 활동하고, 늘 그렇듯 꼬박꼬박 들어오던 인센티브는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끊기고 보라의 말만 듣고 돈을 송금한 다른 사람들의 원성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경찰 고발까지 당한 상황에서 보라 또한 자신의 돈마저 날릴 상황에 정신 못 차리는데, 이런 억울함을 알아주는 듯한 단톡방 '마이크'의 말에 그를 만나 함께 대책을 강구해 보기로 한다. 천안역에서 '마이크' 의택과 만난 '존' 보라는 그에게 자신이 속은 내용과 그 사기꾼을 잡아주겠다며 온 연락을 녹음한 걸 들려주는데, 의택은 그 녹음에서 그들의 근거지가 포항인 증거를 찾아내고,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한 편의 로드 무비 같은데, 많이 씁쓸하다. 둘 다 피해자이긴 한데 의택이 좀더 불쌍하고, 보라는 인간 자체가 안타깝고,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그냥 맨땅에 헤딩이고, 방법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결말도 안타깝긴 하지만 그보다 나은 결말도 없을 거 같다. 사기는, 피해자가 자신을 탓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범죄보다도 악질이다. 물론 덜한 범죄는 없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면 그동안 보였지만 외면했던 여러 '징조'들을 되짚어 보면서 나 자신의 아둔함을 가장 큰 잘못으로 꼽게 된다는 게, 그래서 피해자가 자기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는 게 정말 치명적이다. 짧지만 사기 범죄의 심각함을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이야기였다. 재밌으면서도 씁쓸하게 읽었다.
19. 기묘한 이야기들(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역. 민음사. 2024. 284쪽)
: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 같기도 한 단편들. 들어봤음직도 하지만, 어쩌면 내 주위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지 모를 일들이지만 단순히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환경과 여성 문제, 노인 문제, 성과 속의 권력 이야기까지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한다. 저자의 문장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감탄하며 재밌게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트란스푸기움>.
20. 빛의 조각들(연여름. 오리지널스. 2025. 264쪽)
: 컬러를 전혀 볼 수 없는 흑백증을 앓고 있는 '나' 뤽셀레는 깐깐한 업무 능력 테스트를 받을 후 화가 소카의 집에 청소부로 취직한다. 일이 까다롭다는 얘긴 들었지만 어차피 수술비 모을 때까지만 일할 생각이다. 집주인 소카는 심각한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신체의 일부라도 기계 강화 수술을 받은 경우 그 예술품을 인정받지 못하는 법에 따라 '오가닉'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소 헬멧 없이는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정기적으로 신체 검증을 받으면서. 이 집에는 또한 집사이자 소카의 매니저인 이모 위니, 소카가 어릴 때부터 그의 음식을 담당해 온 요리사 바사, 설비 담당 에르완이 살고 있다. 소카는 작품과 자신의 상태에 엄청나게 예민한데, 종종 등장해서 소카를 더 자극하곤 하는 마리안 - 위니의 딸 - 이 방학을 맞아 이든이라는 친구까지 데리고 온다.
색을 볼 수 없는 사람과 색으로 표현해야 하는 사람. 살기 힘들 정도이지만 자신으로 살기 위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사람과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수술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 둘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나이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게는 된다. 각자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든 덜어낼 방법은 있다는 것. 둘은 수영장 물이 반사하는 빛의 조각들의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 소용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거면 충분하다.
21. 이야기를 들려줘요(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6. 528쪽)
: 메인 주 크로스비 타운. 이제는 거의 은퇴한 변호사 밥 버지스는 작가 루시 바턴과 매일 함께 산책을 한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자녀들, 주위 사람들, 각자의 배우자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간이, 이 우정이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하다. 오래 이 타운에 살아온 올리브 키터리지는 10월의 어느날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밥에게 전화를 해 루시 바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밥의 주선으로 루시가 올리브의 집에 방문해 말한다.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난 이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읽었고 읽을 때마다 중간에 한 번씩 위기가 닥쳤다. 이들의 행동에 공감이 되질 않아서.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내가 이들과 다르다는 걸, 그렇지만 이들의 마음이 모두 이해가 된다는 걸 느꼈고 그게 기뻤다. 어쩌면 "우린 모두 흐르는 모래 위에 서 있"(305쪽)다는 루시의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삶에 언제 들어 오는지에 따라 그들의 허상을 만들어내죠."(305쪽)
"우리는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엉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중략)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306쪽)
난 독자로서 이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 그들과 다르고 때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싫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2. LIM : 숲 속에는 축복이(남궁지혜,돌기민,양기연,양수빈,윤단,이서수. 열림원. 2025. 228쪽)
: 젊은 작가 소설집. 한 가지 주제로 썼다고 볼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일단 뒤의 해설에서 젊음을 언급했으니 그냥 젊음이 주제였다고 하자. 그들 각자의 상황과 생활, 어려움은 익숙한 듯 새로웠으며 젊음이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하지만 나이 든다고 편해지는 것도 없긴 하지. 가장 재밌게 읽었던 건 <미식 생활>. 가장 공감 갔던 건, 아무래도 <친구를 데리고>.
23. 라흐마니노프(리베카 미첼, 이석호 역. 포노. 2023. 392쪽)
24.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피오나 매덕스, 장호연 역. 위즈덤하우스. 2025. 4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