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을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루, 노새,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들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는 감수성이 풍부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나의 감수성은 그를 닮았다.
그런데 감수성만 닮고 표현력은 닮지 못해서
항상 소통에 애를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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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지난 주말 사촌 형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오랜만에 외할머니댁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의 어머니를 뵙게 되면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이 저려온다.
하나 뿐인 나의 할머니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한 평생 의자로만 살아오셨는데
정작 본인이 편히 앉을 의자는 준비해 두지 않으셨다.

나는 의자가 아닌 넓은 평상이 되고 싶다.
사랑하는 부모님, 동생
아직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래의 내 반쪽과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마음을 나눈 정겨운 친구들
나의 소중한 모든 이들이 언제든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그런 넓은 평상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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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 Pity


- D.H.Lawrence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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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시는 1988년 《실천문학》에서 출간한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70-80년대 한국 도시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자조어린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 공부를 하면서 이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감상을 해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사랑하는 이가 있고, 자신만의 꿈도 품고 있는 한 젊은이가 가난으로 인해 인간적인 감정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그에겐 사치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더 이상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살수차의 물대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더 이상 기계가 굴러가는 육중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경제는 젋은이들에게 새로운 노동의 기쁨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하는데,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가벼운 주머니는 뜨겁던 사랑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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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이맘 때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이등병 중에서도 최고 막내였다. 그래서 온갖 잡일들과 심부름 도맡아 했는데 이 때문에 자유시간이 거의 없었다. 책은 읽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시집이었다. 무작정 건우에게 전화를 걸어 책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때 그가 보내준 것이 바로 안도현 선생님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었다.

소포로 책을 받은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점호 전 짦은 틈을 이용해 책을 펼쳤는데 속지에 '웃자 -건우가'라고 씌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 위의 시가 펼쳐졌다. 행복했다. 절친한 친구가 쓴 글이라곤 '웃자'가 다였고, 겨우 3행 밖에 안되는 짧은 시였지만 이것들 때문에 길었던 군생활을 꾿꾿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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