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시는 1988년 《실천문학》에서 출간한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70-80년대 한국 도시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자조어린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 공부를 하면서 이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감상을 해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사랑하는 이가 있고, 자신만의 꿈도 품고 있는 한 젊은이가 가난으로 인해 인간적인 감정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그에겐 사치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더 이상 방범대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살수차의 물대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더 이상 기계가 굴러가는 육중한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경제는 젋은이들에게 새로운 노동의 기쁨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하는데,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가벼운 주머니는 뜨겁던 사랑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