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사계절 1318 문고 29
띠너꺼 헨드릭스 지음, 이옥용 옮김 / 사계절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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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책이야. 한번 읽어봐!" 누군가는 그렇게 권했었다.

심심찮게 입양아가 자신의 친 부모를 찾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해서 애타게 부모를 찾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하여 종종 들어왔기에 그냥 그런 이야기려니.....

그리고 사실, 나는 자기의 뿌리를 찾는다고 한국을 다시 찾아오는 아이들은 나름대로 옳곧게 큰 아이들 몇몇이고 실제로는 더 많은 아이들이 이 나라와 한국으로부터 버려진 사실에 분노하며 원망하며 살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부모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 그 한가지만 중요했지 그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 왔고 갈등을 갖었을까는 생각 해 본적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서 비로소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 그 자체로만으로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따, 네덜란드로 입양간지 16년만에 자기가 평범한 네더란드의 청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에도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 한국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분제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사춘기가 되어 자기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금발의 파란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거울을 보니 자신이 평범한 '네더란드'의 소녀가 아니라 자신이 남과 다르게 생겼고 다른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갑자기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 이 작품에는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기의 정체성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아주 잘 표현이 되어있다. 양엄마 또한 16년동안 고이 길러 온 자기 자식이 친엄마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보다 낳아준 엄마를 더 좋아 할까봐 불안해 한다. 정성을 다해서 길러온 자식을 혹시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양엄마와 인따의 심리묘사는 아주 잘 표현이 되어 있지만 몇가지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                   1. 인따의 양엄마가 입양아를 기다리며 쓴 일기에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을텐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180~181쪽)라는 표현이 있다. 물론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인정한다.  도움을 주겠다는데 고마워 해야지 뭘 이리 꾸물거리냐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건 건네듯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건넬 수 있는 것은 아니잖는가? 또 시설의 아이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고 입양자를 기다리는 사람 또한 자선 사업하는 기분으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아닐것 아닐텐데 이런 표현은 좀 보기 거북했다.

2.인따와 인따의 양엄마가 친엄마를 찾기 위하여 한국에 입국하여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택시기사였다. 기사가 영어를 잘 했으면 좋았겠지만 자기들과 언어소통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투덜대고, 호텔의 급사가 영어가 안된다고 투덜대는 것이 영 볼쌍 사나왔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들 모녀가 한번도 발 딛어보지 못한 낯선땅이다. 분명 다른 문화권이다. 다른 문화권에 들어와서 자기들의 언어와 문화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불평하는 것은 일종의 우월감으로 비쳐졌다.                                                                                      

3.인따 모녀에게 일본도 한국도 모두 외국이기는 마찬가지였을텐데 일본에 대하여는 긍정적인 표현들을 썼고 한국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들이댔다. 이것은 애증이었을까. 아니면 경제력에 따른 편견이었을까 궁금했다.

4.인따 모녀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88올림픽을 치른 후의 일이다. 그런데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닐때 과연 외국인 한 두명을 보면서 뚫어지게 바라본다거나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파란눈와 금발머리를 그렇게 신기 해 했을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튼 심리묘사에는 뛰어났지만 그 내면에 깔려 있는 것들에는 많이 신경질이 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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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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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칼레는 부모님이 이웃에 맡겨놓고 외출했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아가 되었다. 다른 친척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결국 고아원에 보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예순여섯의 나이가 아이를 기를 만큼 젊지는 않지만 자신이 아이를 맡기로 한다.

할머니와 살게된 칼레는 모든 것이 낯설다. 할머니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칼레에게 새롭게 무엇을 해 줄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갈밖에

부모님의 양육과 다른 방식의 양육을 받게 된 칼레의 당황스러움과 혼자 살아온 할머니와의 갈등은 이미 표지에서 서로 등을 돌린채 서로의 일만을 하는 그림이 말을 하고 있다. 살아온 방식의 다름은 있지만 이들은 티격대며 낯설음 속에서 점차 적응해 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깨닫게 된다.

할머니란 캐릭터가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닌 긍정적인 사고의 주인공이며 유머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 할머니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누구에게도 굴함이 없는 당당한 할머니인지라 그가 할머니라는 사실을 잠깐씩 잊게도 된다.

그녀가 할머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은 그녀의 낡은 육체와 손자인 칼레가 충분히 한사람의 인간으로 성장 할 때 까지 자신이 살아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는 대목에서 일뿐이다. 자신이 병들어 죽고 다시 어린 손자 칼레가 고아가 될까 늘 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난다. 언젠가는 자신이 죽고 칼레가 혼자 남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노라는 할머니를 보면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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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아이들 앞에서 용을 쓰는 모습을 보곤한다.

오늘은 아이들을 도서관에서 만나는 날이었다.

이번 기수 모임이 벌써 3번째인데 아직도 아이들의 등록이 일정하지 않다.

오늘 내가 만난 아이들은 7명(남6,여1명) 새로 온 녀석이야 그럴 수 있다치고-그래도 동생이 있는데 책을 모른다는게 말안 됨- 3명이나 책을 안 읽고 왔다.

그럼 마음 자세나 바로 하고 있던지 덜렁 몸만 와서 않아있다.

마음도 없이.

 네 녀석이 어울려 좁은 공간에서 떠들고 장난을 친다.

한 녀석은 5학년인데 3학년과 어울려 장난을 친다. 물론 아이들이 얌전히 있으면 그게 비 정상인지 모른다. 야구 선수도 늘 홈런을 날리는 게 아니란 것쯤은 모르지 않지만 오늘은 정도가 좀 심했다.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떻든 이녀석들에게 내가 준비한 것을 주고 싶다는 내 열망의 반향이었는지도 모름다. 그것도 모른채, 아이들은 계속 그모양. 와중에 열심히 하는 녀석이 눈물나게 고맙다.

정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이맘 니들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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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만 보지 말고 다른 책도 좀 보지?

엄마는 내가 만화만 보는 지 알지? 다른 책도 봐!

학교서 보니?

그럼 도서관에서 짬짬이 보는데

뭐 보고 있는데?

뤼팽시리즈!

추리물? 다른 건 없어?

난 판타지가 좋아.

판타지 뭐?

재미있는거!

재미있는 거 뭐?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단 말야.
NT NOVEL이 제일 재미있어

그게 뭔데? 난 모르겠다. 나중에 사면 보여줘.(우리때 유행하던 순정소설 같은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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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의 까만색 세상 어린이작가정신 저학년문고 1
질 티보 지음, 장 베르네슈 그림, 이정주 옮김 / 어린이작가정신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까만 표지. 까만색 세상. 아,  시각 장애에 관한 내용이겠군.'

처음 책을 집어들면서 든 생각이다.

 

후천적 시각 장애인은  그래도

빛이란것을 느껴 보았고, 색이란것을 보았고 사물을 어느정도는 보았기에 누군가 말로 이야기를 해 주면 상상의 그림이래도 그리 수 있으니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선천적 시각 장애인은 그런 그림도 못 그릴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장애를 가진 인간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측은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마티유의 까만색 세상이란 책을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눈 이라고 부르는 그 인체 감각기관이 제 구실을 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 중에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 측은 해 해야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그릇된 판단을 내릴때가 많다. 

보고 안 보고가 판단을 정확하게 내릴 준거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했다.

 

마티유는 서른 세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입에 다섯개(혀에 단맛 세개, 혀 밑에 신맛 하나, 입천장에 쓴맛 하나) 코에 두개, 손과 손가락에 열두개, 발과 발가락에 열두개, 귀에 두개.

마티유는 남들이 말하는 두개의 눈의 기능이 제 구실을 못함에 따라 온 몸이 눈이 된 케이스다.

온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느낀다. 온 몸으로  본 정보를 종합하여 자신만의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 낸다. 아니 두 눈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세상을 살고 있다.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라는 작품에서

장애인도 보통의 인간이라고 말을 했듯 '마티유의 까만 색 세상'에서도 마티유도 보통의 인간이고 우리 보통의 인긴이 사유하는 것을 다 사유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누가 누구를 동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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