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헤 1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 동녘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시누헤는 아기 때 갈대 배에 실려서 의사 센무트 부부에 의하여 양육되어진다. 전통에 따라 아버지와 같은 길인 의사 수련을 하게 된다. 파라오의 두개골 개복에 참여하고 그 보고서를 쓰면서 그의 그는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한 여인과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하여 가진 재산을 다 잃고 부모님을 죽게 만들었고 부모님의 평생의 낙이었던 저승길마저도 평안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시누헤는 자신이 부리던 노예 카프카에게 부모님의 장례비용을 빌려 방부처리를 부탁했고 죽음의 집에서 시체를 씻어야 했다. 존경받는 의사에서의 추락, 결국 시누헤는 부호의 묘지 부장품을 훔쳐 고향을 떠나게 된다.

시누헤는 어디서든지 배우는 사람이다. 주어진 사실을 그냥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다른 나라에 가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시누헤가 여행했던 모든 곳에 신들은 있었다. 다양한 신들의 모습, 그것에 의지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그러나 서민과 권력자들의 신의 모습은 같지 않다. 욕망하는 인간들은 신의 목소리와 힘을 원했고 정말 탐욕스러웠다.

새로운 파라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 '홀로인자' 그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여행은 늘 고독했다. 여행 속에서 인간이 지닌 허욕을 보았다. 인간의 허욕을 보는 만큼 그의 여행은 더 고독했다. 그의 고독한 여행에는 항상 카프카가 있었다. 시누헤는 카프카를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했지만 카프카가 사는 방식을 늘 존중했다. 카프카는 시누헤처럼 특별한 기술은 없지만 밑바닥 인생 특유의 삶의 지혜는 있는 사람이다. 시누헤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법(처세술)을 터득하는 사람이다. 카프카의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하면서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시누헤에게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처음 주인과 노예라는 관계로 맺어졌지만 그들이 함께 한 여행 속에서 그들은 주. 종의 관계를 뛰어 넘어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오랜 시간을 떠돌던 시누헤는 이집트로 돌아간다. 이집트는 그에게 '홀로인 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준 파라오 이케나톤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케나톤은 개혁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이케아톤은 시누헤를 곁에 두고 그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기존 사상과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외롭고 힘들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지지 받지 못하는) 못한다는 것은 슬프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크고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한낱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상에 불과한 무언가를 강요한다면 강요를 하는 사람이나 강요를 받는 사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강요 속에서 수용되고 튕겨져 나가는 수많은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 평가를 받게 된다.

이케나톤의 혁명적인 생각들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미 아몬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누군가는 아몬의 목소리와 음성을 등에 업고 선량한 다수의 우매한 사람들을 등쳐먹고 살고 있었다. 사회 각지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는 있었지만 그들 자신 절실하게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아니 그런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무언가 따지고 질문을 해 대는 사람이 나타나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힘으로 그 사람을 사회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했었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억압당한 채 살고 있지만 그게 숙명이려니 생각했지 입 한번 놀리지 못하고 살았다.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이 등극한 파라오 이케나톤은 자신들이 믿던 아몬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야훼) 믿으라고 강요를 한다. 또 귀족과 노예가 다 같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더 이상의 전쟁은 필요 없다고 선언을 한다. 보통의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과 파라오가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새로운 사상과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기득권자와 개혁자들 사이에서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이해가 상충하는 두 집단이 갈등 속에 다수의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파라오 이케나톤의 개혁은 결국 자신을 외롭게 하고 서민들을 힘들게 한다. 결국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해 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위정자들의 개혁, 백성들의  삶과 유리 된 개혁은 한낱 이상에 불과하다. 기존 세력은 다시 부활하게 되어 있다. 그 중심에 사제 아이와 야심가 호렘헵이 있었다. 그들은 이케나톤을 제거하는데 시누헤를 이용했다. 시누헤가 이케나톤을 제거하는데 동의를 한 것은 그들이 혁명 이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그들 역시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세를 쌓는 일에만 눈이 벌갰다. 음모와 음모가 난무하는 속에서 시누헤는 고뇌하고 갈등한다. 자신들이 하는 일을 시누헤가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호렘헵은 결국 시누헤를 사막에 유폐시킨다.

시누헤는 자신의 개인을 위하여 이 글을 적는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시누헤는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케나톤의 개혁정치가 남긴 것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 해 봤을 것이다. 이케나톤의 개혁 정치는 과연 완전 실패한 것일까? 이케나톤이 꿈꾸고 노력하던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시누헤>를 보면서 시누헤는 어디에서든 현상을 바로보고 그 주어진 현상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상황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데도 그 속에서 꼭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응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시누헤가 삶을 바라보는 눈, 그것을 온전하게 자기 것 화하는 점은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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