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의 제목은 '이태동 저 - 살아 있는 날의 축복'에서 따왔다. 오늘 오후부터 이 책을 읽고 있다. 학급 문고용 케비넷에서 발견한 책으로 나온지는 약 십 년 전 즈음 되는 책이다. 작년 초봄 무렵 처음 접했던 책인데 사는 일이 심란스럽게 느껴지거나 마음이 뒤숭숭할 때 이따금씩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게 되곤 한다. 인생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사색하고 되돌아보며 사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또렷하게 들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내면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한 위안을 받게 된다. 이 책에 담긴 첫번째 에세이의 제목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페이퍼의 제목이다.
내노라 하는 탐서주의자들에 비하면 읽어온 책이나 가지고 있는 책이 그다지 많은 편이라곤 할 수 없지만 책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이자 일상이다. 그 말의 진의를 떠나서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처분에 대한 발언을 할 때면 심하게 예민해지곤 한다. 나는 그 동안 이사를 다니면서 버린 책이나 잃어버린 책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집안의 책들 때문에 이사를 할 때마다 곤욕이라는 반응을 보이시면서 여전히 덜 버리고 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신다. 엄마 자신도 책 읽기를 좋아하시지만 나처럼 한 권의 책에 푹 빠져 지낸다든가, 돈을 주고 구입을 해서 소장하고 싶어한다든가, 하는 식의 사고방식까지는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책 읽기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 최초의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내 또래 어린아이들이 별로 없었던 시골 동네에서 자란 나는 터울이 많이 지는 오빠가 학교에 가면 혼자 놀거리를 찾아야 했다. 진흙을 퍼다가 소꿉놀이도 하고 아카시아 잎새를 뜯어다가 토끼밥을 주기도 하고 오빠의 국어교과서나 도덕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일찌감치 한글을 익히고 그렇듯 오빠의 교과서에 탐을 내는 나를 보고 엄마는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낡은 동화책들을 꺼내주셨다. 그림형제의 동화집, 이솝우화집, 걸리버 여행기, 소공녀, 암굴왕, 로빈손 크루소... 등등의 소년소녀 동화선집류였는데 요즘처럼 오감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이나 재질은 기대하기 힘들었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쾌쾌하게 올라오던 낡은 책들이었다. 그래도 특별한 놀거리가 없었던 나는 읽고 또 읽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밭을 매거나 밤을 줍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읽은 책들의 줄거리에 대해서, 주인공들의 특징에 대해서, 때로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상상력을 보태어 꾸며내 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사정은 그러했다. 아이들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지 않아 그네들이 이미 알고 있는 노래를 잘 모른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나는 아이들이 소공녀도 모르고 푸른 수염도 모른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웠다. 아무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한 해에 몇 권씩 주어지는 교과서부터 도서관에 있는 책들까지, 읽을거리가 지천에 널렸다는 행복감으로 하루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었고 책 읽기를 통해 얻은 유머감각과 상상력으로 아이들 사이에서 재미난 이야기꾼이 될 수 있었으며 왠만한 싸움에서는 책 읽기를 통해 갈고 닦은 말발 덕분에 절대 지는 일이 없게 되었다.
나의 책 읽기가 가장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첫 시기는 바로 중학교 시절이었다. 말해놓고도 풋, 하고 웃음이 삐져나올지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무척 고독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책에 푹 빠져들만한 소녀시절이었다. 선생님들의 특징을 흉내내며 친구들을 웃기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반항으로 어른들에게 대들기도 하던 나는 마치 조울증 환자와도 같았다. 겉으로는 참하고 자존심 강한 모범생이었지만 내면은 늘 고독하고 우울했으며 사람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쉽게 상처 입고 쉽게 절망하던 사춘기 시절이었다. 중3 때의 나는 학교에선 주로 잠을 자고 집에 돌아와서는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누구와도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은 대개 농구를 잘하거나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한 친구가 나 때문에 공부란 걸 시작했다고, 그래서 대학을 갈 생각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속으로 깜짝 놀랐다. 지적 허영으로 충만했던 그 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나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읽었지만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한 서양 고전들보다도 내가 그 때 참 잘 읽었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은 현진건이나 김동인 같은 초창기 현대 소설가들의 작품이었다. 마치 누렇게 빛바랜 모시 적삼의 질감과 향기가 손끝과 코끝으로 은근히 전해지는 느낌이랄까. 당시에 읽었던 모든 작품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느낌은 저만큼 질박한 강렬함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안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것 쯤은 대학에 가서도 실컷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간간히 읽었던 것은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삐딱한 책들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붙어 있으면서도 나에게 공부만을 강요하는 현실을 미워하고 있었고 그렇지만 그 현실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대리만족 비슷하게 현실을 까발리고 비꼬고 뭉개놓는 책들을 가까이 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타이타닉'과 '로미오와 줄리엣'이 개봉되었고 기숙사 친구들은 사감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너도나도 외출을 감행했지만 나는 그렇듯 달콤하고 촉촉한 로맨스를 비웃고 있었다. 어떻게 이 부당하고 쓰디쓴 현실을 놔두고 꿀을 잔뜩 발라놓은 사랑 이야기에 웃고 울고 할 수 있는가. 돌아보면 참으로 너무나 비장하기 그지 없어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는 것은 마음 속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나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정의로운 일념 하에 공부를 했고 빌려온 책에서 몰래 찢어낸 마르크스의 초상을 보면서 다짐을 굳건히 하곤 했다. 어쩌면 그것이 치기 어린 오만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나는 너무 멋졌다.
그렇게만 보자면 국문학도나 사회과학도가 되어 있어야 했던 건데. IMF가 터졌고 부모님의 설득과 나 자신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사범대에 오게 되었다. 먼저 대학을 다니고 있던 오빠가 길은 어디든 열려있다는 식으로 나를 꼬득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생들처럼 죽 몰려다니며 시험 때도 아닌데 시험 준비를 하며 사는 동기들한테 짜증을 부리던 나는 새내기 시절 후반 즈음해서 책 보고 글 쓰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바로 그 이후가 나의 책 읽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두번째 시기다. 일주일에 두번씩 꼬박꼬박 나의 얄쌍한 지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허접하게 대꾸했다가 배로 비난을 당하고, 허튼 소리 했다가 온몸에 꽂히는 눈총을 받으며, 언어로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나게 느꼈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 때부터 오기를 품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기 시작했고 내가 가진 품성 중에 무대뽀 기질을 발휘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소위 맞장을 뜨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각 분야에 박학다식한 사람들이 많았던 덕분에 책을 고르게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형도 전집'부터 '신약성서'까지 나는 먹깨비가 아니라 책깨비가 된 것처럼 읽고 또 읽었다. 단지 잘난척 하는 선배들 앞에서 '읽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도 안되면서 무작정 읽기도 했다. 계기는 그렇듯 유치하고 불순했지만 그 이후 나는 정말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처럼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고등학교 시절처럼 현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책 읽기 자체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책 속에만 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속에 길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책과의 관계 속에서 사색했다. 사람이 싫어질 땐 책의 품으로 돌아오고, 책이 답답해질 땐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지금, 여전히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고 그저 한 번 스윽 쓰다듬어 주는 그 느낌만으로도 만족스러울만큼 책을 좋아하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열정은 아무래도 식은 것 같다. 퇴근을 해서 책을 보고 있자면 내용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재밌는 것이 아닐 경우, 대개 졸음이 쏟아질 때도 많고 주말에도 활자보다는 손쉬운 영상을 택해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루에 책을 몇 줄이라도 읽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책을 읽지 않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노라면 내가 내뱉는 말들이나 생각들이 가볍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곤 할 때마다 역시 책 읽기는 나의 오래된 취미이며 가장 큰 행복 중의 하나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전과 같은 뜨거운 열정으로 몰두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책 읽기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책 읽기가 단순히 활자를 읽는 즐거움을 넘어서 어떤 식으로든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