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느끼면서도 달력에 촘촘히 박힌 30개의 숫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막막해진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한 달의 기준점이 월급날이 되었다. 달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월급날까지 얼마나 남았나, 주말을 몇 번 보내야 하나, 부터 헤아리게 되곤 한다. 스스로의 안목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는데다 쇼핑을 피곤해 하는 나로써는 지금도 엄마가 사다주는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돈을 쓰는 일에 자신없어 하지만 그래도 월급날은 왠지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 점점 안정되고 평범한 생활인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길까 기대하며 가슴 설레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느낌.

올봄부터 문학계간지를 하나 신청해서 보기로 했다. 진작부터 하고 싶었는데 늘 같은 비용으로 다른 책들을 구입하곤 했었다. 근래 들어 책을 고르고 구입하는 데에 있어 너무 대중없다는 느낌이 들고 그에 따라 나의 사고나 감성마저 뒤숭숭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변화를 주고 싶었다. 문학과 관련된 이슈와 흐름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고 그 때 그 때 발표되는 따끈따끈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방금 택배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빳빳한 종이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계간지를 받아드는 늦은 오후에 나는 기쁠 것이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해 생각 중이다. 무방비 상태로 일단 마음을 열고 나서 상대를 알아갔던 나의 교제 패턴에 자꾸 에러가 발생하는 것을 깨닫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상대를 천천히, 조금씩 파악해 가면서 그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마음을 열어줄 것인지 결정하곤 한다. 그것은 계산이 아니라 지혜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도 신중함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간혹 너무 좋은 사람이 되어버려서 상대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할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나 바보 옆에 있으면 평범한 어른도 시커멓게 때묻고 마음이 날근날근 닳아버린 사람으로 보이듯이. 짐짓 힘겨운 모션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 나의 서투름과 무모함에서 모든 것이 기인했다고 보면 된다. 나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가장 현명한 길이다.

아이들이란 때로 천사같이 순진했다가 때로 악마처럼 사악해지곤 한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지어낼 때를 보면 세상에 저런 사악한 것이 있나 싶다가도, 해사한 얼굴로 손까지 떨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내 얼굴까지 붉어질만큼 예쁘고 감동적이다. 모든 실수가 용서가 되는 나이라서 부럽기도 하고 실수를 하면서 하나씩 배워가야 하니 스스로를 감당하기가 얼마나 버겁고 힘에 부칠까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새삼스럽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올곧고 성실하게만 생활하지 않고 이런저런 실수들을 저지르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왠지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까닭은 그만큼 내가 아이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기에는 여전히 나 자신 지나치게 답답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으나 내일은 또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해 두는 것은 그렇듯 나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고 더욱이 내가 매일 대하고 있는 아이들은 아직 말랑말랑한 영혼을 가진 미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늘 처음처럼 두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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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6 1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4-0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렇게 받아들여지셨나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안시스템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낯두꺼운 불법 사용자들이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여과 없이 오픈했던 사람들이 도리어 푼수가 되곤 하니까요.

2006-04-06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4-0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저는 요즘들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제 자신이 참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느낌 몹시 쓸쓸해요. 하지만 저는 또 다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봐 그게 또 걱정이랍니다. 눈치도 없고 눈치도 안 보고. 어디 내놓으면 아슬아슬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바로 저에요. ㅜ.ㅜ

2006-04-07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기에 걸렸다. 공교롭게도 교육정보실에 거주하는 처녀 셋이 몽땅 감기에 걸렸다. - 정보실을 출입하신 이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기 바랍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감기 바이러스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서 푯말이라도 세워놓아야 할 듯 하다. 내일은 병가 중인 선생님 대신으로 한 달 동안 근무했던 허선생님의 송별회가 있다. 그래봤자 우리 정보실 식구들끼리의 단촐한 저녁식사지만. 짧은 기간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본 허선생님은 여리여리해 보이면서도 생각이 깊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라고 남자친구 분과도 만족스런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이젠 치근덕거린다는 느낌마저 들어서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단칼에 잘랐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끄트머리가 참 구질구질하다. 이래서 엄마가 뺨을 맞더라도 똑똑한 사람한테 맞으라고 하시는 건가 보다. 원래 지나간 추억은 한껏 미화시켜서 기억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좋게, 아름답게, 아련하게, 그렇게 가슴 저편에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 근래에 하는 모양을 보니 평범의 수준에서 한참 뒤떨어진 모자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버렸다. 그런 사람을 사랑한 나는 오래 미쳤었거나, 많이 모자랐거나. 근사한 남자한테 한 방에 차였다면 오히려 기분은 개운할 것이고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긴장하고 노력했겠지. 그런데 이 경우는 찝찝하고 신경질 나는 환멸. 오직 환멸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앞으로 그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재수 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오히려 그 편이 낫다. 나를 한없이 낮추어서 한없이 모자란 상대에게 맞추어 가다가 이렇게 짜증과 환멸에 휩싸이느니 차라리 욕을 듣고 뻥하고 차이겠다. 부디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누군가를 견디지 말자.

작년까지는 안그랬던 것 같은데 부쩍 주변에서 나를 혼자 냅두지 않으려는 기운이 심심찮게 다가온다.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주문부터 내 나이를 묻곤 슬슬 노력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씀하시는 주변 어른들. 지인들의 결혼 소식을 전해오며 봄인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부추기는 친구들부터 아예 뚜쟁이로 나선듯 적극적인 정보실 아가씨까지. 여러가지 일들로 지쳐 있는 상태라서 한동안 혼자 지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어서 편안하고 든든한 누군가를 만나서 안락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왠지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더 빠르고 분명하게 정리될 것 같은 느낌. 지금으로선 둘 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아이들하고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나도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고 아이들도 3학년이 되었고. 마냥 서투르지만은 않은 경지에 이르러서인지 서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지키며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간단한 쪽지 시험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얼굴이 발개지며 답안을 써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느낌도 들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저 그들의 피로하고 빠듯한 일상에 몇 마디 농담과 위로를 건넬 뿐. 교사란 알고보면 무척 무력한 존재다. 간간이 졸업한 아이들에게서도 연락이 온다. 공부가 힘들어서 실업계로 옮겨버리겠다는 녀석부터 무작정 배고프다고 떼쓰는 녀석까지 각양각색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공부에 흥미가 있는 아이거나, 흥미가 없는 아이거나 참 힘든 시기다. 그 시절을 편하게 보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힘겹게 보내고 있다면 몸이 편하지 않다. 정말 좋으면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텐데. 이 녀석들이 힘들구나. 그나마 중학교 시절이 만만했구나. 그런 느낌이 들면서 지금쯤 아이들이 어깨가 얼마나 아프고, 엉덩이는 또 얼마나 근질거릴까 싶어서 참 안쓰러워진다.

가장 근처에 있는 인간관계부터 잘 다독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가족, 나의 학생들, 나의 친구들, 나의 동료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에게 더욱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 동안 너무 멀리, 너무 힘들게 왔다. 마알간 머리를 한 채 뒤돌아 볼 줄 모르고 주춤거리며 왔다. 이제 매순간 생각하고 돌아보고 짚어보며 또박또박 걸어야 한다. 나는 참 괜찮은 여자고 좋은 사람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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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2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조언 고맙습니다. 책 한 권이 선언처럼 들리겠네요. ^^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으면서도 말수가 적으면 일단 착해 보인다. 남에게 피해가 가느니 내가 손해보고 말겠다는 각오로 사는 사람들 중에 말수가 많은 사람들은 간혹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다. 똑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의뭉스러운 이들은 조용히 개갠다. 솔직한 사람들은 똑부러지게 좋고 싫음을 가른다.

착하다는 게 뭘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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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3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23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맞는 말씀이에요. 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연애에 빠져서 설탕물 속을 헤매는 파리가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육십살이 되어도 정글 속의 고릴라와 키스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진정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는지 지금도 확신할 수는 없다.   

- 배수아,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 中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닐텐데.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다가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내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문득 회의가 밀려왔다.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인가. 한 남자가 자신의 연애사를 털어놓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친구가 하던 말, "수억 명의 기아가 아프리카에서 신음하고 있는 지금 너는 고작 그깟 연애 문제로 죽을 몰골을 하고 앉았냐.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여기저기 많다구."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마련이고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저 말이 와 닿았다. 서슬 퍼렇던 시절은 죄다 어디로 숨어들고 나 요즘 뭐하고 있는걸까. 꼭 한비야의 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종류가 다르고 감정의 색깔이 제각각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나름의 가치와 미덕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좀더 높은 곳을 향해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한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곱게 단장하고 여자로서의 매력을 가꾸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보다 숭고하고 지속적인 가치를 위해 인생의 일정 부분을 기꺼이 할애하고 집중하는 휴머니스트가 되고 싶은 욕구. 그것은 한 때의 내 모습이기도 했고 구체적인 실천 리스트를 작성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보고자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성실한 개인주의자로서 하루하루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산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삶. 예전의 약속들은 모두 잊었거나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폐기처분 해버렸고 앞으로의 약속이란 것도 오직 현재의 만족을 위한 것일 뿐. 한없이 가벼워졌고 한없이 뻔뻔해졌다.

근래에 한 사람과 헤어지면서 그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원망과 비난을 들었고, 듣고 있다. 사랑이 변했다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들었고 아무런 기준도 없는 무차별적인 사랑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비난을 들었다. 모두 맞는 말이라서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심중을 충분히 헤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미안해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사랑은 그렇듯 변하기도 하는 것이고 그렇듯 무차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헤어지자는 의미로 받아들인 후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몹시 힘이 들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기다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추억과 미련에 휩싸여 밤새 울다 지쳐 잠드는 나날이 있더라도 그것은 헤어지고 난 이후의 당연한 과정 즈음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그 사람과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은 보고 싶어도 참고 연락하고 싶어도 참으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로 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며 간신히 나 자신을 바로 세울 즈음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쉽게 변할 수 있느냐는 원망이 돌아왔다. 나는 그가 곁에 없어도 행복한 내 모습을 보면 그가 안심하고 기뻐할 줄 알았다. 그를 힘들게 했으면서도 그를 잊지 못해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보면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가슴 아파할까봐 나는 더욱더 행복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것이었는데. 나는 기다리라는 말을 헤어지자는 말로 받아들이고는 혼자 속 편하게 사랑을 지워버린 가볍디 가벼운 여자가 되었다. 좀더 천천히,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멀어져야 했을까.

헤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지언정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무의식적인 이유나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을 시작할 때 상대에 관한 특별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깐따삐야 별에서 온 빨간코의 도우너라고 해도 그가 좋아진다면 그를 좋아하면 되는 것이다. 외계에 여자친구나 처자식을 두고 온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올인하여 충실하고 이별 장면에서는 주춤거리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 사랑을 시작할 때나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가능한 한 망설이거나 여운을 남기지 않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런 내게 사랑이 어쩜 그렇듯 쉽고 간단한 것일 수 있냐고 말하지만 싹트는 감정 앞에서 주저하고 이별할 때 여운을 남기며 돌아서는 것보다,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이 끝났을 때 여전히 상대편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내편으로 딴딴히 모아쥐는 일이 결코 더 쉽고 간단하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교감하고 사랑을 느끼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단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고 싶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끝나간다고 해서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기는 싫다. 그것은 왠지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을 순식간에 퇴색시켜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뿐더러, 나 자신 꼭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와 분명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느만치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사랑에 대해 내가 고수하고 있는 잣대라면 잣대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 자신에 대해 염려한다. 너는 세상을 너무 모른다. 너는 멍청이며 바보다. 너의 안목은 의심스러움을 넘어 놀라울 지경이며 너의 눈높이는 땅굴 파는 두더지 수준이다. 너는 점점 뻔뻔해진다. 등등. 맞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란 사람은 고이 잠들어서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설마하니 일곱명의 난쟁이들 중에 내 마음에 들고 나와 마음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분명 그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한 난쟁이와 마음이 통할거고 파바방 불꽃이 일거고 내가 이 작고 친절한 사람을 만날 운명이어서 숲속으로 쫓겨왔다고 생각하며 마음껏 좋아라 할 것이다. 어느 날 난쟁이가 너는 너무 키가 큰데다 너무 잘 속는다면서 나와 헤어지길 원한다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와 헤어져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슬퍼하긴 해도 상심하지는 않겠다. 언젠가 사랑은 또 올 것이고 그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예전보다 더 잘, 더 정성껏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조만간 무지무지 똑똑해지지 않는 한 아마 내내 그럴 것이 분명하다.

저렇듯 똑똑하지도 못한 게 고집만 더럽게 세고 이상만 더럽게 높다는 비난을 듣고 사는 요즘, 연애나 사랑 때문에 아둥바둥 하지 말고 좀더 지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에 투신하고 싶은 욕구가 새록새록 생긴다.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머리를 때리면서 텅텅~ 하던 그녀들의 모습이 근래의 나 자신과 오버랩되곤 한다. 무슨 생각하니? 물으면 아무 생각 없다, 는 응답만 번번히 되돌아오고 십 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바로 십 분 전 일은 싸그리 까먹기 일쑤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밥 잘 먹고 농담을 하고 웃어제끼는 나를 엄마는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싶은 표정으로 외면하신다. 내가 수줍어하고 안타까워하고 점점 앙상해져 가야만 나의 순수성이 증명되는 것인가. 외출도 자제하고 근신하는 자세로 자중의 시간을 보내야만 나의 진실성이 보장되는 것인가. 코앞에 닥친 시험이 있어서 그 시험에 밤낮으로 몰두하던가, 세상을 개혁해 보고자 하는 좌파들의 서적을 섭렵하며 감흥을 느끼던가.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날의 내 모습이 그리워진다. 난 왜 그 때가 지금보다 더 훌륭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왜 자꾸만 멍청해지는지 모르겠다고들 한다. 사실 나는 그냥 이대로도 편하고 즐거운데 이러고 있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자꾸 든다. 사람들이 내 나이에 대해서, 내 위치에 대해서, 내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귀찮다. 아무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다고 할지라도. Please Don't Pus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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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1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6-03-14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운 내야죠!

마태우스 2006-03-1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다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이겠지요. 사랑에 정답이 없는 것도 그래서일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이해가 안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대체 얼마나 멋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일까요?

깐따삐야 2006-03-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사람들은 제가 이제 사랑을 할 나이가 아니라 결혼을 전제로 누군가를 만나도 만나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요즘같아선 그냥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ㅜ.ㅜ

마태우스 2006-03-1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사귈 나이라는 건 말이 안되지요. 누군가를 사귀는 순간이 바로 그 때랍니다.
 

입춘도 지나고 경칩도 지나고 이제 더 이상 유예의 시간은 없다. 요즘 여기저기로 쳐들어오는 봄기운 때문에 공연히 심란하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난 왜 봄이 싫지? 왜 봄에는 우울하지? 그건 네가 겁이 많고 게을러서 그래.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게 두렵고 귀찮은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시시각각 쳐들어오는 것이다. 나를 한없이 불편하게 하고 매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영악하고 발랄한 사돈 처녀같다.

내가 옮겨온 사무실에 참한 전산보조 아가씨가 새로 왔다. 나랑은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인상만큼이나 깔끔하고 의젓한 사람이다. 밥을 맛있게 먹고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잘 든다는 점에서는 나랑 통하는 면이 있고 일처리를 하는 데 있어 센스가 있고 침착하다는 면에서는 내가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얼마전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여 지내는 중이다. 밝고 싹싹한 모습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도 가끔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내 편에서 왠지 마음이 쓰인다. 그애한테 저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사주카페를 찾아갔다가 남자친구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길 듣고 온 그녀가 나한테 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자친구의 미니홈피에 드나들고 그에게 답장 없는 문자를 보내면서 참 좋은 사람이었던 그를 못 잊어서, 행여나 혹시라도 그가 돌아올까봐, 아무도 못 만나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봤자 뭐하겠어요, E씨는 분명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에요, 그러려고 헤어진 걸거에요. 지금은 이런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시간이 더 많이 흘러주기 전까진 쉽게 접을 수 없는 마음이란걸 잘 알면서도, 나는 때때로 너무도 간곡하게 그렇듯 소용 없고 효능 없는 말들을 그녀에게 전하곤 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우리가 있는 공간에 오면 좋은 향기가 뽀로롱 뽀로롱 난다면서 웃으시지만 다 큰 두 처녀들의 새카맣게 속 타는 심정을 누가 알까 싶다. 물론 나나 E씨나 들키고 싶지도 않겠지만.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식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하는,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이런 빠듯한 하루하루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무엇인가 찾아서 열심히 하는 척 하고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하루를 보내기가 훨씬 더 지루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 이렇게 소리내서 웃어도 될까, 이렇게 밥을 맛있게 먹어도 되는걸까, 피곤하다고 해도 이렇게 푹 자면 안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때는 쌍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팠는데. 그렇다. 나는 지금 그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그와 사랑할 땐 상대적으로 비루하게만 보였던 일상에 기대어, 그 일상을 찬미하는 중이다. 고통은 지나가고 일상은 지속된다. 내 일상만도 못한 고통이라니. 그러니까 나를 잊어줘. 나 이렇게 눈 감고 간다.

 

눈감고 간다

-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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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3-11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끼야...정말 가슴에 와닿는 글입니다. 남들은 모르는데 두분의 속만 시커멓게 탄다는 대목이 특히....

마태우스 2006-03-1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두분 다 힘내세요. 특히 4살 어린 그분이 더더욱 힘을 내야겠군요. 마음이 떠나간 남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미니홈피에 들르는 건 삼가는 게 좋은데...그러면 그나마 좋았던 감정마저 훼손되기 일쑤랍니다. 그건 그 남자분이 안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인 것 같습니다. 싫어진 사람은 괴물로 보인다는... 하지만 연락 끊고 기다리면서 내실을 다진다면, 그 일에 대해 남자는 미안해하고 그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게 되지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깐따삐야 2006-03-1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일리 있는 조언이세요. 언제 기회를 봐서 그녀에게 전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