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도 지나고 경칩도 지나고 이제 더 이상 유예의 시간은 없다. 요즘 여기저기로 쳐들어오는 봄기운 때문에 공연히 심란하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난 왜 봄이 싫지? 왜 봄에는 우울하지? 그건 네가 겁이 많고 게을러서 그래.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게 두렵고 귀찮은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시시각각 쳐들어오는 것이다. 나를 한없이 불편하게 하고 매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영악하고 발랄한 사돈 처녀같다.

내가 옮겨온 사무실에 참한 전산보조 아가씨가 새로 왔다. 나랑은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인상만큼이나 깔끔하고 의젓한 사람이다. 밥을 맛있게 먹고 무거운 것도 번쩍번쩍 잘 든다는 점에서는 나랑 통하는 면이 있고 일처리를 하는 데 있어 센스가 있고 침착하다는 면에서는 내가 보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얼마전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여 지내는 중이다. 밝고 싹싹한 모습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도 가끔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내 편에서 왠지 마음이 쓰인다. 그애한테 저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사주카페를 찾아갔다가 남자친구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길 듣고 온 그녀가 나한테 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자친구의 미니홈피에 드나들고 그에게 답장 없는 문자를 보내면서 참 좋은 사람이었던 그를 못 잊어서, 행여나 혹시라도 그가 돌아올까봐, 아무도 못 만나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끊어진 실을 다시 이어봤자 뭐하겠어요, E씨는 분명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에요, 그러려고 헤어진 걸거에요. 지금은 이런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시간이 더 많이 흘러주기 전까진 쉽게 접을 수 없는 마음이란걸 잘 알면서도, 나는 때때로 너무도 간곡하게 그렇듯 소용 없고 효능 없는 말들을 그녀에게 전하곤 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우리가 있는 공간에 오면 좋은 향기가 뽀로롱 뽀로롱 난다면서 웃으시지만 다 큰 두 처녀들의 새카맣게 속 타는 심정을 누가 알까 싶다. 물론 나나 E씨나 들키고 싶지도 않겠지만.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식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하는,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이런 빠듯한 하루하루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무엇인가 찾아서 열심히 하는 척 하고 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하루를 보내기가 훨씬 더 지루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나 이렇게 소리내서 웃어도 될까, 이렇게 밥을 맛있게 먹어도 되는걸까, 피곤하다고 해도 이렇게 푹 자면 안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때는 쌍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팠는데. 그렇다. 나는 지금 그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나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그와 사랑할 땐 상대적으로 비루하게만 보였던 일상에 기대어, 그 일상을 찬미하는 중이다. 고통은 지나가고 일상은 지속된다. 내 일상만도 못한 고통이라니. 그러니까 나를 잊어줘. 나 이렇게 눈 감고 간다.

 

눈감고 간다

-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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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3-11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끼야...정말 가슴에 와닿는 글입니다. 남들은 모르는데 두분의 속만 시커멓게 탄다는 대목이 특히....

마태우스 2006-03-1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두분 다 힘내세요. 특히 4살 어린 그분이 더더욱 힘을 내야겠군요. 마음이 떠나간 남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미니홈피에 들르는 건 삼가는 게 좋은데...그러면 그나마 좋았던 감정마저 훼손되기 일쑤랍니다. 그건 그 남자분이 안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인 것 같습니다. 싫어진 사람은 괴물로 보인다는... 하지만 연락 끊고 기다리면서 내실을 다진다면, 그 일에 대해 남자는 미안해하고 그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게 되지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깐따삐야 2006-03-1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일리 있는 조언이세요. 언제 기회를 봐서 그녀에게 전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