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연애에 빠져서 설탕물 속을 헤매는 파리가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육십살이 되어도 정글 속의 고릴라와 키스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진정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는지 지금도 확신할 수는 없다.   

- 배수아,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 中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닐텐데.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다가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내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문득 회의가 밀려왔다.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인가. 한 남자가 자신의 연애사를 털어놓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친구가 하던 말, "수억 명의 기아가 아프리카에서 신음하고 있는 지금 너는 고작 그깟 연애 문제로 죽을 몰골을 하고 앉았냐.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여기저기 많다구."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마련이고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저 말이 와 닿았다. 서슬 퍼렇던 시절은 죄다 어디로 숨어들고 나 요즘 뭐하고 있는걸까. 꼭 한비야의 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종류가 다르고 감정의 색깔이 제각각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나름의 가치와 미덕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좀더 높은 곳을 향해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한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곱게 단장하고 여자로서의 매력을 가꾸는 보통 여자가 아니라, 보다 숭고하고 지속적인 가치를 위해 인생의 일정 부분을 기꺼이 할애하고 집중하는 휴머니스트가 되고 싶은 욕구. 그것은 한 때의 내 모습이기도 했고 구체적인 실천 리스트를 작성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보고자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성실한 개인주의자로서 하루하루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산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삶. 예전의 약속들은 모두 잊었거나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폐기처분 해버렸고 앞으로의 약속이란 것도 오직 현재의 만족을 위한 것일 뿐. 한없이 가벼워졌고 한없이 뻔뻔해졌다.

근래에 한 사람과 헤어지면서 그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원망과 비난을 들었고, 듣고 있다. 사랑이 변했다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들었고 아무런 기준도 없는 무차별적인 사랑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비난을 들었다. 모두 맞는 말이라서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심중을 충분히 헤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미안해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사랑은 그렇듯 변하기도 하는 것이고 그렇듯 무차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헤어지자는 의미로 받아들인 후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몹시 힘이 들었다.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기다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추억과 미련에 휩싸여 밤새 울다 지쳐 잠드는 나날이 있더라도 그것은 헤어지고 난 이후의 당연한 과정 즈음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그 사람과 나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길은 보고 싶어도 참고 연락하고 싶어도 참으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로 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며 간신히 나 자신을 바로 세울 즈음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쉽게 변할 수 있느냐는 원망이 돌아왔다. 나는 그가 곁에 없어도 행복한 내 모습을 보면 그가 안심하고 기뻐할 줄 알았다. 그를 힘들게 했으면서도 그를 잊지 못해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보면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가슴 아파할까봐 나는 더욱더 행복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것이었는데. 나는 기다리라는 말을 헤어지자는 말로 받아들이고는 혼자 속 편하게 사랑을 지워버린 가볍디 가벼운 여자가 되었다. 좀더 천천히,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멀어져야 했을까.

헤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지언정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무의식적인 이유나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을 시작할 때 상대에 관한 특별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깐따삐야 별에서 온 빨간코의 도우너라고 해도 그가 좋아진다면 그를 좋아하면 되는 것이다. 외계에 여자친구나 처자식을 두고 온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올인하여 충실하고 이별 장면에서는 주춤거리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 사랑을 시작할 때나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가능한 한 망설이거나 여운을 남기지 않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그런 내게 사랑이 어쩜 그렇듯 쉽고 간단한 것일 수 있냐고 말하지만 싹트는 감정 앞에서 주저하고 이별할 때 여운을 남기며 돌아서는 것보다,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시작하고 그 사랑이 끝났을 때 여전히 상대편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내편으로 딴딴히 모아쥐는 일이 결코 더 쉽고 간단하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교감하고 사랑을 느끼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단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고 싶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끝나간다고 해서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기는 싫다. 그것은 왠지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을 순식간에 퇴색시켜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뿐더러, 나 자신 꼭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와 분명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느만치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사랑에 대해 내가 고수하고 있는 잣대라면 잣대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 자신에 대해 염려한다. 너는 세상을 너무 모른다. 너는 멍청이며 바보다. 너의 안목은 의심스러움을 넘어 놀라울 지경이며 너의 눈높이는 땅굴 파는 두더지 수준이다. 너는 점점 뻔뻔해진다. 등등. 맞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란 사람은 고이 잠들어서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설마하니 일곱명의 난쟁이들 중에 내 마음에 들고 나와 마음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분명 그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한 난쟁이와 마음이 통할거고 파바방 불꽃이 일거고 내가 이 작고 친절한 사람을 만날 운명이어서 숲속으로 쫓겨왔다고 생각하며 마음껏 좋아라 할 것이다. 어느 날 난쟁이가 너는 너무 키가 큰데다 너무 잘 속는다면서 나와 헤어지길 원한다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와 헤어져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슬퍼하긴 해도 상심하지는 않겠다. 언젠가 사랑은 또 올 것이고 그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예전보다 더 잘, 더 정성껏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조만간 무지무지 똑똑해지지 않는 한 아마 내내 그럴 것이 분명하다.

저렇듯 똑똑하지도 못한 게 고집만 더럽게 세고 이상만 더럽게 높다는 비난을 듣고 사는 요즘, 연애나 사랑 때문에 아둥바둥 하지 말고 좀더 지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에 투신하고 싶은 욕구가 새록새록 생긴다.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머리를 때리면서 텅텅~ 하던 그녀들의 모습이 근래의 나 자신과 오버랩되곤 한다. 무슨 생각하니? 물으면 아무 생각 없다, 는 응답만 번번히 되돌아오고 십 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바로 십 분 전 일은 싸그리 까먹기 일쑤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밥 잘 먹고 농담을 하고 웃어제끼는 나를 엄마는 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싶은 표정으로 외면하신다. 내가 수줍어하고 안타까워하고 점점 앙상해져 가야만 나의 순수성이 증명되는 것인가. 외출도 자제하고 근신하는 자세로 자중의 시간을 보내야만 나의 진실성이 보장되는 것인가. 코앞에 닥친 시험이 있어서 그 시험에 밤낮으로 몰두하던가, 세상을 개혁해 보고자 하는 좌파들의 서적을 섭렵하며 감흥을 느끼던가.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날의 내 모습이 그리워진다. 난 왜 그 때가 지금보다 더 훌륭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왜 자꾸만 멍청해지는지 모르겠다고들 한다. 사실 나는 그냥 이대로도 편하고 즐거운데 이러고 있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자꾸 든다. 사람들이 내 나이에 대해서, 내 위치에 대해서, 내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귀찮다. 아무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다고 할지라도. Please Don't Pus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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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1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6-03-14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운 내야죠!

마태우스 2006-03-16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다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이겠지요. 사랑에 정답이 없는 것도 그래서일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이해가 안가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대체 얼마나 멋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일까요?

깐따삐야 2006-03-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사람들은 제가 이제 사랑을 할 나이가 아니라 결혼을 전제로 누군가를 만나도 만나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요즘같아선 그냥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ㅜ.ㅜ

마태우스 2006-03-1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를 사귈 나이라는 건 말이 안되지요. 누군가를 사귀는 순간이 바로 그 때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