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렸다. 공교롭게도 교육정보실에 거주하는 처녀 셋이 몽땅 감기에 걸렸다. - 정보실을 출입하신 이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기 바랍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감기 바이러스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서 푯말이라도 세워놓아야 할 듯 하다. 내일은 병가 중인 선생님 대신으로 한 달 동안 근무했던 허선생님의 송별회가 있다. 그래봤자 우리 정보실 식구들끼리의 단촐한 저녁식사지만. 짧은 기간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본 허선생님은 여리여리해 보이면서도 생각이 깊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라고 남자친구 분과도 만족스런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이젠 치근덕거린다는 느낌마저 들어서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단칼에 잘랐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끄트머리가 참 구질구질하다. 이래서 엄마가 뺨을 맞더라도 똑똑한 사람한테 맞으라고 하시는 건가 보다. 원래 지나간 추억은 한껏 미화시켜서 기억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좋게, 아름답게, 아련하게, 그렇게 가슴 저편에 묻고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 근래에 하는 모양을 보니 평범의 수준에서 한참 뒤떨어진 모자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버렸다. 그런 사람을 사랑한 나는 오래 미쳤었거나, 많이 모자랐거나. 근사한 남자한테 한 방에 차였다면 오히려 기분은 개운할 것이고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긴장하고 노력했겠지. 그런데 이 경우는 찝찝하고 신경질 나는 환멸. 오직 환멸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앞으로 그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재수 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오히려 그 편이 낫다. 나를 한없이 낮추어서 한없이 모자란 상대에게 맞추어 가다가 이렇게 짜증과 환멸에 휩싸이느니 차라리 욕을 듣고 뻥하고 차이겠다. 부디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누군가를 견디지 말자.

작년까지는 안그랬던 것 같은데 부쩍 주변에서 나를 혼자 냅두지 않으려는 기운이 심심찮게 다가온다.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주문부터 내 나이를 묻곤 슬슬 노력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씀하시는 주변 어른들. 지인들의 결혼 소식을 전해오며 봄인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부추기는 친구들부터 아예 뚜쟁이로 나선듯 적극적인 정보실 아가씨까지. 여러가지 일들로 지쳐 있는 상태라서 한동안 혼자 지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어서 편안하고 든든한 누군가를 만나서 안락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왠지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더 빠르고 분명하게 정리될 것 같은 느낌. 지금으로선 둘 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아이들하고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나도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고 아이들도 3학년이 되었고. 마냥 서투르지만은 않은 경지에 이르러서인지 서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지키며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간단한 쪽지 시험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얼굴이 발개지며 답안을 써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느낌도 들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그저 그들의 피로하고 빠듯한 일상에 몇 마디 농담과 위로를 건넬 뿐. 교사란 알고보면 무척 무력한 존재다. 간간이 졸업한 아이들에게서도 연락이 온다. 공부가 힘들어서 실업계로 옮겨버리겠다는 녀석부터 무작정 배고프다고 떼쓰는 녀석까지 각양각색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공부에 흥미가 있는 아이거나, 흥미가 없는 아이거나 참 힘든 시기다. 그 시절을 편하게 보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힘겹게 보내고 있다면 몸이 편하지 않다. 정말 좋으면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텐데. 이 녀석들이 힘들구나. 그나마 중학교 시절이 만만했구나. 그런 느낌이 들면서 지금쯤 아이들이 어깨가 얼마나 아프고, 엉덩이는 또 얼마나 근질거릴까 싶어서 참 안쓰러워진다.

가장 근처에 있는 인간관계부터 잘 다독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가족, 나의 학생들, 나의 친구들, 나의 동료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에게 더욱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 동안 너무 멀리, 너무 힘들게 왔다. 마알간 머리를 한 채 뒤돌아 볼 줄 모르고 주춤거리며 왔다. 이제 매순간 생각하고 돌아보고 짚어보며 또박또박 걸어야 한다. 나는 참 괜찮은 여자고 좋은 사람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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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4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03-2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조언 고맙습니다. 책 한 권이 선언처럼 들리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