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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4
생 텍쥐페리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야간 비행 중에 실종된 파비앵의 상사, 리비에르는 어제 종영된 '달자의 봄'에서 강신자 팀장(양희경 분)을 떠올리게 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그녀는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흔들림 없이 직장에서의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것처럼 부하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룰을 적용한다. 아이가 걱정되어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 만큼은 찔러도 바늘이 휘어질 만큼 단단하고 차갑게 무장되어 있다. 드라마 초기에는 좀 너무한다 싶기도 했다. 그런다고 작업 능률이 팍팍 오를 줄 아느냐, 달자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했느냐, 임신까지 한 직원한테 되게 뭐라 그러네...투덜거리며 그녀를 배척했다. 하지만 극의 진행과 더불어, 뻔한 드라마 구도 상 어느만치 예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강신자 팀장은 지칠 줄 모르는 프로의식의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부하직원들에게 남다른 마음씀씀이를 보여준다. 첫 눈에 살갑고 다정하게 다가왔지만 갑자기 뒤통수를 맞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는 말의 교훈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여론에 비추어 봤을 때 강신자 팀장이나 리비에르는 직장 상사로서 첫 눈에 환영받기는 어려운 사람이고 아무리 겪어본다 한들, 그들을 향해 끝끝내 원망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면 동정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 동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나도 우정과 인간적인 기쁨 속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의사는 자신의 직무를 행하는 과정에서 우정과 인간적인 기쁨을 얻는다. 나는 부하들이 사고에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저녁 때, 항공지도를 펴놓고 사무실에 앉아 있노라면 이 숨은 법칙이 잘 느껴진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아무리 규율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도 그 흐름에 내맡기면 이상하게도 사고가 일어난다. 마치 내 의지만이 비행중의 기체에 이상이 생기는 걸 막고, 그리고 우편기의 도착을 지연시키는 폭풍을 막기라도 하듯이. 내 능력에 나 스스로도 이따금 놀란다.' (pp. 69-70)
그는 로비노의 목소리를 들었다. "본부장님...... 그 부부는 결혼한 지 여섯 주밖에 안되었습니다......" "가서 일이나 하시오." 리비에르는 사무원들을 둘러보다가 잡역부들, 정비사들, 조종사들 등 신념을 갖고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었던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그는 '섬들'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었다던 그 옛날의 작은 도시들을 생각했다. 그 배에 희망을 싣기 위해, 그들의 희망이 바다에서 돛을 펼치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 척의 배로 인해 모든 이들이 한층 성장하고, 그 자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어쩌면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행동은 죽음에서 해방시켜준다. 그 배로 인해 그들은 오래도록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전신들에 의미를 주고, 밤샘을 하는 직원들에게 위험성을 인식시키고, 조종사들에게 비장한 목표를 부여할 때에 비로소 리비에르도 그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람이 바다에서 범선을 다시 달리게 하듯이 활기가 그 사업을 되살릴 때, 비로소 그도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되는 것이다. (pp. 106-107)
그가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출발을 중지했다면, 야간 비행의 명분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내일이면 자기를 비난할 마음 약한 자들을 앞질러 리비에르는 지금 또 다른 한 팀의 승무원을 밤하늘로 내보낸 것이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명은 그런 표상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이미 새로운 표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승리는 한 국민을 약하게 만들고, 패배는 또 다른 국민을 각성시킨다. 리비에르가 어쩔 수 없이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라는 격려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이다. (pp. 119-120)
아무것도 제대로 자리잡히지 못했던 야간 비행의 초창기. 항로 개척을 위해 스스로를 예측불허한 위험 속에 던져야 했던 파비앵을 비롯한 수많은 조종사들. 개인적 안위와 쾌락을 초월한 그들의 목표의식과 책임감 덕분에 오늘날 보다 자유롭고 안전한 비행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편안히 현재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과거 선구자가 피땀 흘려 이룩한 성과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기 마련이다. 파비앵의 희생 뒤에는 리비에르의 명령이 있었고, 부하직원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도 없이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 이라고 단언하는 리비에르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짊어지고 가는 결연한 선구자의 모습이다.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면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 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사람은 때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학기에 신청한 강의 두 개는 모두 영문학 관련 이지만 실제로 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조교 말에 따르자면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인연을 가리켜 부부라 한단다. 헤어지고 싶어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 곯머리를 썩지만 열 달이 지나면 알아서 나오게 되어 있는 논문은 그들이 낳은 자식이란다. 분배의 법칙이 여기에서도 적용이 되니 원하는 지도교수에게 배정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어쨌든 그저 운좋게 연이 닿기를 바랄 수밖에. 아직은 적응 중이고 수업도 몇 시간 안 들었지만 같은 영문학 전공자이면서도 성향이 많이 다른 교수님들을 보는 일이 재미있다. 문학사를 맡은 교수님은 강의 시간 내내 사적인 이야기라곤 전혀 안 한다. 한 학생이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좀 쉬었다 하자고 말하자 약간 당황해 하는 표정이 스쳤고, 쉬는 동안에도 아무 말 없이 교재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계셨다. 나이도 젊은 분이 어찌 저리 빡빡할꼬... 자료를 찾아보니 사뮤엘 베게트에 대한 심오한 논문이 눈에 띄었다. 역시 고도의 지식을 갖춘 분이란 느낌이 들었다. 친해질 기회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고도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가끔 개그야나 무한도전을 보시는지.
반면에 교육방법론을 가르치는 교수님은 외모는 로빈 윌리엄스, 목소리는 정형돈이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정감 있는 모습. 살짝 눌려 있어서 최홍만이라도 불러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쭈욱 한 번 늘려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들지만, 천진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말투가 그 외양과 딱 어울린다. 문학사 시간에 여기저기 밑줄을 치며 귀를 쫑긋 세우고 머리를 쥐어짰다면, 방법론 시간에는 가끔 재미가 없어도 너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심하게 끄덕여주기만 하면 교수님이 마냥 즐거워하시니 훨씬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빡빡한 원서 교재 다섯 권을 정해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과제를 던져 주시는 모습을 볼 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해 두어야겠다는 소심한 생각도 들었다. 첫 눈에 사람 좋아 보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니까. 언뜻 보기에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이 은근히 들볶아대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더 억울할 때도 많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생하면 고생한 만큼 얻는 게 많다고 한다. 영어교육학 분야에서 저명하신 어떤 교수님은 "제가 영어로 말을 잘 못해서..." "제가 영어로 발표를 하는 것에 서툴러서..." 이런 말로 프리젠테이션의 서두를 시작하면 여지 없이 바로 F 학점을 날리신단다.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다보면 거의 폐인이 될 정도로 방대한 학습량과 과제량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끝나고 나면 한껏 실력이 향상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전에 시험장에서 보았던 모습을 기억하기론 머리카락이 많이 없으셨고 일단은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셨다. 강의를 신청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로 철저하고 엄격한 분이라면 뭔가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그렇지만 일이나 업무라는 건 사실 별 게 아니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고 맡은 이후에는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정작 사람을 진 빠지게 하고 환멸스럽게 하는 건 본업 이외의 자잘한 인간관계를 강요하는 풍토다. 과제는 적게 내주지만 정기적으로 화분에 물을 주러 오라고 말하는 교수님 보다는, 잔심부름 같은 건 일절 시키지 않고 과제를 억수로 내주는 교수님이 훨씬 낫다.
그 정체마저 뚜렷하지 않은 포스트모던이니 글로벌이니 하는 말들이 시대를 잠식하면서, 많은 것이 아무런 룰도 없이 미친 듯 널을 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야간비행의 리비에르와도 같은 원칙주의자, 행동주의자의 면모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리비에르는 행복을 성실한 의무 수행에서 찾는다. 의무 따로, 즐거움 따로, 라고 여기는 요즘 세태에 완전히 역행하는 태도다. 찰나의 쾌락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찰나의 절망도 견디지 못하지만 더 큰 목적, 더 큰 미래를 향해 의지를 굳건히 하는 사람은 잠시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 때문에 큰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면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 되었지만 야간 비행의 실용화였든, 쵸코파이의 머쉬멜로우였든,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고 계발했던 사람들은 패배는 승리를 향한 격려라고 믿으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부추기고 또 부추겼을 것이다. 끝없는 긴장 속에서도 의무 수행 이외에 다른 것에 눈 돌릴 줄 몰랐던, 그 오롯한 목표 의식과 책임감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진하는 일뿐이다, 라는 이 말이 몹시도 생경하게, 그리고 아쉽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