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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책을 비롯해서, 아니 특히 책에 대해서 회의가 엄습할 때가 있다. 곁에 있는 단 한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쌓여가는 책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의 반성은 습관성이다. 그 습관성 반성은, 비록 지성인이었지만 정말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가족 한 사람, 친구 한 사람 건사할 줄 몰랐던 무능한 생활인들의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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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직감에 의해 그녀의 여린 성정을 알아채고는, 너라면 나를 절대 모질게 내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을 뿐.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단지 살고자 하는 욕구이자 본능이다. 얼마나 많은 커플들이 부조화와 불공평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을 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녀가 밤을 지새워가며 그를 걱정하고 있을 때 그는 그녀를 그런 식으로 길들이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편해서 만났다, 고 말하는 대신 사랑해, 란 말로 자존심을 지키려 들었다. 문제는 그녀가 남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고급한 여자였다는 것. 단지 편함, 만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그 여자일 필요는 없었다. 파국의 원인은 한 쪽으로 기우는 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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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 노래방에 가면 이성을 잃고 휘젓고 다닌다는 것. 시화반을 맡아오고 있다는 것. 어떤 선생님은 나를 알게 된 후 세 번을 놀랐다고 한다. 나는 의외나 예외, 반전을 즐기는 인간이 아니다. 내, 외면의 불일치는 수치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랑할 만한 소지의 것도 아니다. 나는 저혈압일 때의 내 모습을 사랑한다. 냉동건조커피 반 스푼의 농도. 프림도 설탕도 넣지 않은, 적당히 은은하고 향긋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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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그 어떤 말 보다도 아빠가 무심코 던진 저 말씀이 가슴을 콱, 막았다. 나는 아빠를 닮았다. 그래서 자신감이 있었다. 내 마음을 거울 삼아 모든 심정과 행동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잘 모를 수도 있는 2% 안에 진실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의 자리>에서 웅변적으로 그리고 있듯, 내가 내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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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운서가 후회, 라는 말을 꺼내자 작가 한 강은 "그 순간의 최대치였다"라는 나지막한 응대로 질문을 무색하게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나름대로의 시간에 나름대로의 빛깔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니더라도, 나는 왜 지나온 날들에게 저런 평범한 위안조차 주지 못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에겐 그 때 그 순간이 최대치였던 거에요. 스스로에게 모질어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타인을 대할 때도 다르지 않다. 필요한 건, 위장이 아니라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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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은 깐따삐야님이 팔색조..라는 사실..^^

깐따삐야 2007-03-1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역시 영특하신 큰오라버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