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찌개 메뉴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업데이트라면 업데이트였다. 예전엔 그냥 순두부찌개였는데 원조순두부, 버섯순두부, 김치순두부, 햄순두부, 이런 식으로 메뉴판이 추가되어 있었다. 나는 김치순두부, 선배는 버섯순두부, 후배는 원조순두부를 시켰다. 앞에 뭐가 붙은 순두부찌개는 500원이 더 비쌌다. 그래보았자 셋이 먹어도 채 만 원이 넘지 않는 저렴한 식단. 우리는 이 식당에 와서 다른 걸 먹어본 적도 없고 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순두부였다.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순두부를 몇 숟가락씩 떠서 밥에 얹어먹거나, 아예 뚝배기 채 푹 쏟은 다음 솔솔 비벼주신다. 넓직한 스댕 대접은 아무리 지저분하게 비벼도 나름의 맛깔스런 운치가 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무생채를 같이 넣고 비벼주면 더 좋고 그 위에 계란부침을 얹은 다음 한 입 쑤욱, 목구멍을 타고 뜨끈한 밥덩어리가 내려가는 순간 더 이상의 포만감이란 없다.

  점심을 먹기 전에 T 선배와 먼저 만나 도서관 앞에서 후배 W를 기다렸다. 밥 먹으러 가는 내내 입이 귀에 걸려 통화중이었다. 목하 연애 중이신 스물여섯의 청년. 얼마나 만났어? 6개월 조금 넘은 것 같은데요. 그럼 뭐 헤어질 때 됐네. 후배를 향한 나의 독설은 여전했지만 능글맞은 웃음으로 패스, 하는 녀석 또한 옛날과 다르지 않았다. 셋이 나란히 걷다 보니 독수리 오형제를 표방하던 그 시절이 떠올라 다같이 웃었다. 지금 여기에 없는 두 사람은 내 동기들이다. 복잡한 가정사로 바짝바짝 말라가던 한 친구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황인숙을 닮았던 다른 친구는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들이나 안주에 취해 헉헉거리던 나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전혀 꿈꾸지 않았던 그 내일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T 선배는 대학원을 마친 후 남이섬의 환경단체에서 일하고 있고 후배는 국문과 졸업반이라 한창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새 알고 지내온 시간이 선배와는 8년, 후배와는 6년이었다. 너도 늙었다, 는 말에 잠시 충격 먹었다. 진짜 몇 살로 보이냐고 진지하게 묻자 내 나이에서 서너 살을 감해주었다.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금새 표정이 밝아지는 나를 보고 역시 너는 단순해, 역시 선배는 간단해, 장난스런 눈빛들이 스쳤다. 사실 원래 내 역할이란 게 그랬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한 방에 모든 걸 단순화시키는 사람이었다. 마구 복잡하게 엉켜있는 사연의 실타래를 한 방에 불태워버리는 미니멀리즘의 귀재. 저도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안 그래요. 참하고 반듯하고 진지하고... 선배는 음, 하긴 그렇겠지, 라고 말해서 나를 놀래켰다. 그냥 웃고 말자고 한 이야기였는데 선배가 민망해질까봐 잠깐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봐줬다.

  선배는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과 매일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낮에는 장작도 패고 밤에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으며 남이섬에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단다. 내가 대뜸 현실적인 청사진을 펼쳐놓자 아직은, 이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마음이 맑은 사람이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영수 시간에 배웠던 것보다 고등학교 시절 정치경제 선생님이 겨울 내내 트럭을 몰고 다니며 배추장사를 도왔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기억하는 나로서는, 선배를 보면서 아쉬움도 들고 내가 가진 것들이 협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선생은 수능에 날 것은 안 가르치고 섬에서 장작 팬 이야기만 한다는데요, 라며 강짜를 부려댈 학부모가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기에 뭐라 더 말할 수는 없었다.

  후배는 김종삼 시인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국문과 교수들은 순문학을 지키려는 위세인지, 대충 쉽게 통과해서 졸업시켜 주는 일은 없을거라며 못을 박았단다. 학부생들의 모자라는 열의와 교수들의 넘쳐나는 자존심이 어긋나고 있었다. 대개 학부제로 전환된 현 시점에서 국문학을 열망해서 국문학도가 된 학부생이 몇이나 될 것이며, 기왕 배정됐으면 죽기 살기로 공부하라는 교수들의 조언에 성실히 귀 기울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후배는 졸업논문 보다도 취약한 영어실력을 더 걱정하고 있었고 그게 현실이었다. 캠퍼스는 신입생들의 짧은 스커트와 산뜻한 청바지로 푸르게 팔랑이고 있었지만 그들도 언젠가 그들이 전혀 꿈꾸지 않았던 내일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은 이상으로서 높고 아름다울 뿐. 성취도와 만족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공대 출신인 Y 선배가 뒤늦게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과 거기다 J 선배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Y 선배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졸업하자 서운한 마음에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는 것 같다고 엄청난 착각을 했던 선배였다. 몇 년 전에 어느 자리에선가, 기도 안 차는 그 실상을 파악하고 나는 억울해서 놀래 자빠질 지경이었다. 멤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는 데에 충격은 배가되었다. 완전 마녀사냥이었는데 당시엔 마녀사냥이란 말도 유행하지 않을 때라서 나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선배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채 주거니 받거니 술만 마셨다. 바로 옆자리에는 내가 진심으로 흠모했던 다른 선배가 앉아있었기에 나의 억울함은 하늘에 솟았다 땅에 내리꽂히다를 반복하며 공중을 맴돌았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는데 나는 외국어를 전공하는 여자랑 결혼하게 된다던데. 아하핫... 아마 국제 결혼 하실라나 보네염... 하나는 지르고 하나는 주워섬기며 우리는 그런 시덥잖은 대화를 주고받았고 주변 멤버들은 우리에게 만리장성을 쌓게 한답시고 하나, 둘 자리를 피해주는 시늉까지 서슴지 않았다. 평소에는 공연히 예민하고 깐죽거리기 좋아했던 사람인데 역사학, 이라니 한 번 놀라고 반듯하고 착실한 공무원인 J 선배와 사귀고 있다니 두 번 놀랐다. 아무튼 그 선배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 나이 많은 남자에게 함부로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굴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 후배들에게 욕 먹을 각오하고 조목조목 쓴소리를 해대던 선배는 그 어처구니없는 헤프닝만 빼면 비교적 순수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 부디 J 선배의 건투를 빈다.

  사람들의 소식을 주고받으며, T 선배는 내게 대학원의 인간관계란 때로 매우 정치적이야, 라는 무거운 충고를 해주었다. 뭔지 알 것 같기는 하다.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하긴 요즘 초등학생들은 우리 때와 다르다지만, 그것이 순수하기만 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톱 발톱에 삼지창을 감추고 다닐 것도 아니지만. 나는 선배에게 나무만 열심히 패지 말고 밥도 열심히 먹으라고 엄마 같은 인사를 했다. 실제로 셋 다 예전보다 여위어 있었고 탱글탱글했던 옛 모습이 그립기도 했다. 사람이란 연애를 해야 하는걸까. 스윗박스의 제이드 빌라론이 옆의 사람 뒤통수를 때려서라도 사랑에 빠지라고 하더니만, 여자친구가 있는 후배만이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헤어지고나서 술 생각나면 그 때나 연락해라. 나는 기어이 독설로 마무리했지만 후배의 능글맞은 미소를 보고는 안심했다. 나쁜 녀석, 상당한 미인과 사귄다던데 정말 밉살맞은 녀석이 아닐 수 없다고 선배와 나는 능글맞게 웃었다.

  내 큰 목소리 때문에 어김없이 몇몇 낯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돌아봤고, 몇 년 사이 많이 달라진 캠퍼스 주변 탓에 내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순두부찌개 맛이 건재하다는 사실은 위안을 주었지만 나는 밥을 비빌 때 고추장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우울해졌다. 한 번도 깜빡한 적이 없었는데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테입을 다시 돌리고 싶었다. 우리의 대화는 예전처럼 잘 이어졌고 잘 이어지지 않을 때조차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단순함은 예전과는 달리 어느 부분에서인가 억지스러웠고, 선배의 맑음은 환함이 아니라 어느만치의 그늘로 느껴졌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검은색 가죽가방을 어깨에 둘러맨 채 다시 학교로 향하던 후배의 모습도 다소 안쓰러웠다. 여기서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를 운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고 이미 지나온 시간과 기억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돌려본다 한들 우리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게다예요 2007-03-1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항상 그런 아쉬움들은 남는 거 같아요. 그래도 다들 재미있어 보이네요. 순두부에 고추장도. ^^

BRINY 2007-03-1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보이세요~ 학교생활!

깐따삐야 2007-03-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만나면 반갑고, 아쉽고 그래요. 예전엔 순두부찌개에 고추장 팍팍 넣고 비볐는데 이젠 자극적인 맛보다는 담백한 맛에 길들여진 건지도 모르죠.^^

BRINY님, 학교 다닐 때... 그 때가 참 좋지 아니한가, 생각합니다.

마태우스 2007-03-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 선배가 제이 선배와 사귄다는 사실은 제게도 충격이네요. 흐음, 인간사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인가봐요. 업그레이드된 순두부가 생각나는 계절이네요

깐따삐야 2007-03-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그러게나 말이에요. 도끼 선배, 이제는 부디 안착해야 할텐데 말이죠. 순두부는 드실 수 있나요? 콩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많아 보이셔서.^^

레와 2007-03-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 학교 앞에도 기가막힌 순두부집이 있었는데..
들리세요??? 저 침 넘어 가는 소리~ (꿀~~~꺽!)

꽃이 피면 더욱 그리워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학교..

깐따삐야 2007-03-1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순두부찌개 맛있죠.^^ 저도 봄이 오면 캠퍼스가 그리워지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