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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이 산문집을 빌려왔던 어제 KBS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에 한 강이 출연했다. 반가운 우연이었다. 작가는 정현종의 시를 낭송하고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라는 자작곡을 직접 불렀다. 낮지만 긴 여운의 목소리.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청신한 여대생 같았다. 그 잔잔한 아우라는 조명 아래 번쩍거리던 진한 메이크업의 아나운서가 안 되어 보일 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한 강을 처음 알게 된 건 <여수의 사랑>이란 소설집을 통해서였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내 여자의 열매>라는 책을 읽고난 후였다. 이제껏 만나보지 않은 독특한 감성이었다. 전경린의 귀기, 은희경의 위악, 신경숙의 신파에 물려갈 즈음에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특별한 수확이었다. 인간이나 속세, 그 너머의 것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 또래라면 으레 그러하듯, 사랑에 실패했거나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태생적이고도 근원적인 향수 같은 것이었다. 오정희나 최 윤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가만가만 숨을 죽인 채 꼼꼼한 독서가 필요했다. 많은 독자를 갖기는 어려운 작가란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신문 지면을 통해 그녀가 소설가 한승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닌데 새 같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알듯말듯한 작가의 얼굴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책은 그녀가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사연과 단상들로 이루어졌다. 열림원에서 나온 책인데 새빨간 표지부터 큼지막한 글씨까지 외관상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 안의 글과 사진만큼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내 마음에 들었다.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 모습이든, 방송에 출연하여 보여주는 모습이든, 몹시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짐작했는데 오히려 그렇듯 무색무취한 성품이 많은 사람들과 친구로 지내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걸 알았다. 한없이 좋기만 하다거나 게으른 우유부단이 아니다. 그녀의 견고한 자아는 연하고 투명한 막으로 감싸져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시인과 소설가들은 3개월 동안 함께 기거하며 서로의 사연과 생각을 공유한다. 동남아나 아랍처럼 주로 제3세계에서 온 그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특별한 추억의 소재가 된다.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모국으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는 베트남의 페이민, 체격답지 않게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마흐무드, 거짓말은 사람을 약하게 하므로 나는 항상 진실만을 택했기에 강해졌다고 말하는 터키의 에란디스, 엄격한 문학적 잣대를 지닌 채 스스로를 단련하던 고집쟁이, 브라질의 베르나르도, 불안한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아이처럼 천진하던 쇼퍼홀릭, 아프리카의 아예타... 한 강은 낮은 시선과 깊은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각자의 사연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초원의 빛'이라는 서점에 모여앉아 작품을 낭독하는 장면은 무척 부러웠다. 누군가는 눈물도 흘리고 누군가는 그를 안아주었겠지.
교원대는 무슨 옛 사원이 아닐까 싶을 만큼 고요하고 도서관을 오가며, 캠퍼스를 거닐며 마주치는 눈빛들은 대개 너무나 진지해서 순간, 부끄러워지곤 한다. 한 학기 동안 들을 강의를 신청하고 오늘에서야 비로소 교수님들과 동기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학부 때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이 좋아서 대학원에 왔다는 사람부터 교사가 되기 위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시작해보겠다는 사람, 머릿속에서 중국어와 영어와 한국말이 마구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앳되어 보이던 중국인, 그리고 나처럼 이런저런 혜택 누리며 편하게 학위 따보겠다고 찾아든 현직교사들... 자기소개를 하던 중에 3년 동안 남자중학교에 있으면서 너무 힘들었고... 하다가 속으로 아차, 싶었더랬다. 바로 그 길을 가기 위해 교직이수를 하려고 입학한 사람들이 태반인 마당에 저런 배부른 소리나 하고 앉았다니, 참 왕재수다.
한 강은 3개월이었지만 나는 2년이다. 엄마는 혈세를 낭비하지 말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다. 도서관에는 읽어도 읽어도 남을 만큼의 책과 논문들이 있고 강의실을 채우는 형형한 눈빛들은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교수님은 학부생과는 달리 진지함을 갖추라, 는 말씀을 하셨고 조교는 앞으로 2년간은 학생으로 사시라, 며 따가운 일침을 놓았다. 초원의 빛, 이라는 예쁜 이름의 서점도 없고 아마 낭독회 대신 세미나가 있겠지만 내 인생에 이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만큼은 틀림이 없다. 오랜만에 깨알같은 원서를 보자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지만, 오늘 어떤 선생님의 말처럼 행운을 실력으로 바꾸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것들, 나와 나를 둘러쌌던 것들에 대하여 한 강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