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달이를 낳고는 방학이 없다. 학기 중엔 남의 아이들 보랴. 방학 중엔 내 아이 보랴. 몸도 마음도 두 개면 좋겠다. 기왕이면 튼튼무쌍한 것으루다가. 방송 중 어떤 패널이 한국 여자들은 아이 낳은 후 부터는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더니만  나 역시 그렇다. 양방과 한방을 오가며 뻐그덕대는 몸둥아리를 수리해가며 이 여름을 났다. 나고 있다. 직장이 아무리 가족 같은 분위기 어쩌느니 해도 가족은 아니듯 싸가지 없는 말씀만 골라하는 관리자에게 하는 데 까지 하다가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배째라고 나갔더니 눈에 가시마냥 사사건건 갈궈댄다. 하지만 일단 배를 째고 본 나는 뱃속을 비워내니 한량없이 마음 편하다. 우야됐든 간에 인간이 먼저 아닌가. 우야됐든 간에 살고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영달이는 그 사이 무럭무럭 자라 꼬박꼬박 말대꾸에, 사사건건 반항에, 조곤조곤 엄마한테 훈계하기 등. 미운 네살을 온전히 실천 중이다. 예전 성질 같으면 집에 불난리든 물난리든 났을 것이지만 아마 나보고 사람 되라고 이 소녀를 보내셨는지 어금니 꽉 깨물며 참아넘기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백번. 그래도 여름 나면서 질병을 몇 차례 앓아 더 좋은 어미가 되지 못함을 자책하기도 수천번. 어느 순간 눈 감아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이 아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리면 놀라움과 두려움과 끈끈함에 가슴이 뛰기도 한다. 이 현실은 어쩐지 익숙해지는 날이 없고 매번 당황스럽다. 아직 의연한 사람이 되기엔 쓴 쑥, 매운 마늘을 더 먹어야 하는가 보다.

 

알라딘 서재가 십년이 되었다니. 나도 올해로 교육경력 십년차 교사다. 보람과 희망 속에 살아가는 교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그만둘 기세로 뱃속을 다 게워버린 교사. 옛글을 찾아 읽다보니 그 안에 묻어나는 새내기 교사로서의 열정과 순수가 참 그립다. 한편으로는 나이 먹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고 말이다. 요즘 새내기 교사들은 똑똑하고 깔끔해서 나처럼 찐득찐득한 감정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지만 나는 앞으로 이십년차 교사가 되어도,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만은, 아이들과 여전히 꾸덕꾸덕 감정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을 것 같다. 경험이나 경력보다 무서운 것이 유전 및 본성이라고 직업인으로서의 기술엔 탄력이 붙을지언정 교육 현장에 있는 '나'는 그대로다. 이 현실도 어쩐지 익숙해지는 날이 없고 매번 당황스럽다. 처참하도록.

 

서재에 쓴 페이퍼들이 차곡차곡 저장되는 사이 나도 열 살이나 더 먹고 서재와 함께 늙어간다는 말도 과연 틀리지는 않는구나. 그때는 그래도 좀 꾸미고 나서면 예뻤는데 이제는 몸무게도 너무 늘고 아줌마가 다 되었다. 남편은 물론 남자를 봐도 설레지가 않고 오로지 매일매일의 할 일에 파묻혀 지내다보니 이런저런 병만 늘었다. 책을 읽다 졸기 일쑤고 리뷰는 커녕 100자평 올릴 시간도 부족하다. 이렇듯 나도 몰래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선택의 현장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는 자각이 들면 아, 아직 인간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은 것이 어서 정신 차리고 나의 선택에 책임을! 이런 구호가 들리는 듯 하다. 혹시나 싶어 이런저런 책을 찾아읽고 똑똑한 사람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도 역시나 그저 내 자리에서 내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삶 외에는 별다른 정답도, 모범답안도 없다. 더구나 영달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모자란 어미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많이도 컸다. 우리 딸.  엄마 되서 자유가 없다고 툴툴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간 십년 사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너를 낳은 일. 앞으로도 나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렴. 엄마는 너를 바라보며 더 정직하게, 열심히 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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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3-08-15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달이 반가와요. 빨대가 아니라 광선검이라도 들고 있는 표정이에요. >.<

깐따삐야 2013-08-16 17:42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도 반가워요. 오랜만이죠? 영달이는 주로 큰 빨대를 좋아합니다.^^

hnine 2013-08-15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이 낳고나서 한동안 엄마에게 방학이란 없지요.
무엇보다도 아이 사진을 보니 정말 감격이네요. 제가 댓글을 꼬박꼬박 남기지는 않았지만 깐따삐야님 서재에 글이 올라오면 즐겨 읽고 있었던 터라 아이를 가지셨다는 것, 영달이를 낳으셨다는 소식, 영달이 키우는 얘기, 가끔씩 올려주시는 글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리 컸어요. 그동안 책 한권 분량의 얘기들도 쌓였지 않나요? ^^
아이를 보며 하시는 다짐, 아이는 나를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라는 것, 공감 백배 입니다.
저도 태그따라서 영달이 만세입니다.

깐따삐야 2013-08-16 17:49   좋아요 0 | URL
천방지축 이십대 때에는 저도 제가 인간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늘 두려웠는데 덜컥 엄마가 되었고 엄마됨=인간됨으로 생각하고 목하 수행 중이어요. hnine님처럼 이미 그 아득한 육아의 강을 건너오신 분들을 보면 저야말로 존경과 감격입니다.
영달이를 보며 저도 남편도 아닌 제3의 인물이라고 낯설어하다가도 저를 닮고 남편을 닮은 모습을 볼 때마다 놀랍고 부끄럽고 조심스러워지고 그렇답니다.^^

치니 2013-08-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영달이 영달이 하셔서 혼자 남자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던 저는, 편견덩어리.
아주 야무지고 똘똘하게 생긴 어린이네요! 사진에서 엄마 훈계하는 목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아요. ㅋㅋㅋ
영달이 만세 ~ !

깐따삐야 2013-08-16 17:51   좋아요 0 | URL
영달이가 어렸을 땐 머리 숱이 많지 않아서 아들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지금은 씩씩한 소녀가 다 되었죠. 엄마도 혼내고 아빠도 혼내고 나름 비밀도 있는 것 같고 말이죠. ㅋㅋ
치니님도 제주도에서 건강히, 잘 지내시는 거죠?

다락방 2013-08-1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달아 반가워! 제 조카랑 비슷한 나이대라 그런지 더욱 반갑네요. 저렇게 키우느라 깐따삐야님 얼마나 마음 졸이는 시간이 많았을까 생각도 들고요. 치니님 말씀대로 되게 야무지게 생겼어요. 어떤 아이로 또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궁금해져요.

'가장 잘한 일'이라 자신할 수 있다면, 그건 가장 잘한 일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 깐따삐야님, 네, 더 정직하게, 열심히 지낼 수 있도록 저도 응원할게요.
:)

깐따삐야 2013-08-16 17:54   좋아요 0 | URL
타미 이모 다락방님. 아, 타미는 다락방님 같은 이모가 있어 얼마나 좋을까. 페이퍼 읽을 때마다 부러움이 그야말로 용솟음쳐요. 영달이에겐 자매를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왜 나는 언니가 없지, 여동생이 없지, 이러고 있는다는.ㅜ.ㅜ

그럴까요. 제가 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저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주는 건 영달이 엄마로서 뿐이니까요. 아주 놀라운 경험이지요. 저처럼 이기적인 인간한테는 말예요. 응원 감사합니다. 갑자기 힘이 나네요. 열심히 살게요!

레와 2013-08-1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달이, 엄마 닮았을 것 같아요!! ㅎㅎ 강한 확신이 퐉퐉. ㅋㅋㅋㅋ (이 확신이 어디서 왔는진 모르겠어요.ㅋㅋㅋ)


깐따삐야 2013-08-16 18:02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죠, 레와님? ^^
저처럼 집착이 강하고 변덕이 심하고 직선적이고 몽상 덩어리... 아, 이런 점을 피해가면 좋겠는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죠. 아마. ㅠ.ㅠ 하지만 영달이는 다행히도 감각적이고 영리해서 어느 때는 얄미울 정도인 제 아빠를 많이 닮았답니다. 저처럼 미련한 것 보다는 낫겠다 싶어요.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저는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