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도시에도 속속 백화점이 들어서고 대규모 마트들이 동동마다 거대하게 진을 치고 있지만 역시 발길이 자주 닿고 발길따라 마음까지 가 닿는 곳은 가깝고 낯익은 작은 가게들이다. 걷고 뛸 줄 알면서도 업어달라거나 안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영달이 덕분에라도 어설프게 끙끙거리며 포대기를 두른 채 둘러볼만한 데도 동네의 소규모 가게들 뿐. 조금 멀리 나갔다가는 돌아올 때의 모습이 참 가관이다. 영달이는 나 힘들어! 땡깡을 부리고 이미 지쳐버린 나는 엄마도 힘들어! 라고는 차마 못하고 박찬호 허벅지와 추성훈 팔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껏 사력을 다해 업고 돌아오곤 한다. 늘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직장맘의 자격지심으로 인한 자발적 수난이긴 하지만 내 등과 영달이의 배가 맞닿아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지점이 싫지 않은 이유도 있다.

 

  집 근처 횡단보도를 건너면 최근에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빵집이 보인다. 이곳은 주인 아저씨, 아줌마의 인상이 참 좋다. 아저씨는 깐깐하게 생겨서 적어도 못된 재료들을 반죽에 섞진 않을 듯 하고 주로 판매를 담당하는 후덕한 아줌마는 늦은 시간에 가면 덤도 얹어주고 학급에 단체주문이라도 하는 날이면 손이 더 커진다. 특히 아저씨가 매일 굽는 토끼, 오두막, 초승달, 아기곰 쿠키는 영달이의 인기 품목. 밤하늘의 초승달과 손에 쥔 초승달 쿠키를 비교하며 좋아하던 영달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짜지 않게 양념한 아삭한 야채가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야채빵과 옥수수 빛깔의 고소한 못난이빵, 가장 적정한 단맛을 촉촉하게 유지하는 단팥빵과 빵의 기본, 소보루빵도 이 집의 베스트셀러다.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카페를 겸한 유명 베이커리들이 늘비하지만 신선한 맛과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쿠키나 빵이 생각날 때면 꼭 찾게 된다.

 

  철마다 옷을 구비하는 것도 일 중의 일인데 이제는 출산 전과 실루엣 자체가 달라도 너무나 달라져 내 스타일에 맞는 옷을 찾아 입는 것도 곤욕이다. 마른 몸이야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쳐도 멋이 나지만 감출 것이 많은 내 몸은, 더욱이 새참한 아가씨도, 중년의 귀부인도 아닌, 어중간한 연령의 애매모호한 계급의 나는 잘 맞는 옷을 고르는 일이 쉬우면서도 어렵다. 그 와중에 발견한 옷가게가 하나 있다. 주인 아줌마의 눈매가 고와서, 걸려 있는 옷들이 무난하면서도 나름 독특해서, 필요한 옷이 생기면 들르곤 한다. 요즘들어 좋아하는 옷, 싫어하는 옷에 대한 자기만의 취향이 생긴 영달이, 초록색에 꽂힌 영달이는 가게를 지나치며 "저 초록색 옷 예쁘다!"라고 외치기도 한다. 현금으로 흥정하면 곧잘 깎아주기도 하고 아줌마가 센스 있게도 내가 커버하고 싶은 부분을 꿰뚫고는 오래, 질리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잘 골라준다. 남편은 당신은 왜 항상 똑같은 옷을 사느냐고 하지만 이제는 어떤 스타일도 소화할 수 있는 몸둥아리가 아니므로, 라고 말하기 보다는 잘 보면 조금씩 다 달라요, 소심하게 응수하곤 한다.

 

  그리고 학교 옆 중국집. 뜨겁고 매운 국물이 필요한 날, 짭짤하고 기름진 먹거리가 필요한 날, 바삭한 고깃덩어리를 오물거리고 싶은 날, 집밥의 담백함이 아닌 어느만치 자극성 있는 향미가 그리운 날, 내가 찾는 곳이다. 음식을 배달시켜서 랩을 벗길 때면 그 느낌이 반감되어 직접 걸어가서 먹어야 제맛인데 남편과 싸우고 화해의 언저리에서 같이 고개를 숙인 채 짜장면을 먹기도 하고 덜컥 찾아온 졸업생들과 함께 몰려가 간짜장과 탕수육을 먹기도 했다. 중국집은 왁자지껄함도 봐주고 흘리고 먹는 모습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늘 팔팔 끓는 물과 기름 덕분에 춥지 않은 분위기가 있어 좋다. 어느 날은, 씩씩하게 주문 전화를 받고 주문받은 내역을 주방을 향해 크게 외치는 주인 아줌마의 모습을 보며 짬뽕 국물을 넘기다가 울끈불끈 기운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 집은 너무 물렁하지도, 너무 덜 익지도 않은, 적당히 익은 양파맛이 일품인 간짜장과 두껍고 축축하게 씹히지 않는 바삭한 탕수육이 맛있다. 남편과 나는 먹을 때마다 똑같이 말한다. 왜 다른 집은 이렇게 못 만들지?

 

  그리고 이름처럼 정성이 있는 정성내과. 작년 봄에 기관지가 쑥대밭이 되어서 새벽마다 고통스럽게 컹컹 짖어대던 나를 살려준 곳이다. 혈관을 찾기 어렵다고 대학병원 간호사들마저 마구 후벼대던 내 팔에서 단 한번에 혈관을 찾아내 아프지 않게 링거주사를 놓아준 의사선생님이 있는 곳. 지쳐 있던 나는 따뜻한 전기요가 깔린 침대 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깼다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손님을 받으려고 서둘러 진료를 마치거나, 약을 독하게 지어 금방 효과를 보게끔 재촉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쉬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의사가운도 입지 않고 말투도 어눌한 의사선생님이지만 자분자분한 설명이 듣기 좋고 아파서 우울해진 나를 위로해 주시기에 단골이 되었다. 그만큼 자주 아팠다는 얘긴데 그 점은 좀 슬프네.

 

  이밖에도 아리따움의 보철 낀 수다쟁이 아가씨나 두청이라는 효과만점 진통제를 소개해 준 신세계약국 약사 아저씨, 적극적인 모과마냥 생겨서 영달이가 노골적으로 무서워하는 아가방 아줌마, 찾는 책은 어떤 책이든 그 다음날로 구해주시는 서점 아저씨 등 모두 부지런하고 중요한 나의 이웃들이다. 근거리에 이러한 가게들이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불편해지겠지. 정육점 아저씨 얘기를 듣자 하니 내가 혼수를 장만했던 가구점과 그릇점이 문을 닫고 이전을 한단다. 주인이 가게세를 두배로 올려주지 않을 거면 나가라고 했단다. 플래카드를 보니 유명브랜드의 스포츠 의류매장이 입점할 예정이란다. 주인장이 직접 운영한다는데 사업이나 경영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남편과 내가 보아도 그 자리는 생뚱맞게 옷가게가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있는 사람이 더 하다고 그렇게 많은 점포를 소유하고도 모자라서 본인이 직접 나서려는가 보다. 우리는 이전을 앞두고 있는 가구점에 들러 원목 장롱을 구입하고 편백나무 토막을 두 개 얻어왔다. 영달이가 좀더 자라면 이 곳에서 책상을 사주고 싶었는데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외곽으로 이전한다니 좀 아쉽다.  

 

  판매자의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말 한번 섞지 않고도 원하는 물건을 모두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오프라인에 거주하는 작은 가게들, 나와 함께 아침을 시작해서 나와 함께 어둠을 맞고 불을 끄는 그 친밀한 가게들이 나는 더 좋다. 알라딘이 책만 사는 공간이라면 이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오가는 말이 있고 그 말 속에 사연과 풍경이 쌓여 구체적 기억으로 아로새겨지기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바, 그래서 우리 동네의 작고 오래된 가게들이 나는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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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1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 있다면 추천을 다섯개쯤 하고 싶어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님의 글이 있어서 저도 알라딘이 좋아요. 참 좋습니다.

깐따삐야 2012-10-11 12:26   좋아요 0 | URL
가끔은 다락방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 알라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흐음.( '')

레와 2012-10-1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집 중국집.. 아이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습니다.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12-10-11 12:27   좋아요 0 | URL
집밥이 최고지만 그래도 가끔 빵, 간짜장, 짬뽕, 그런 것들이 생각날 때가 있죠? ^^

비로그인 2012-10-1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부러움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전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논,밭,,,가게들은 커녕 배달의 사각지대에서 살고 있어요...얼른 이사가야겠어요!흑

깐따삐야 2012-10-11 12:30   좋아요 0 | URL
논밭이면 공기 하나는 끝내주겠네요. 저희집은 도심 한가운데라 편리하긴 하지만 먼지도 많고 종종 시끄럽고 그래요. 홍보 트럭 지나가면 영달이가 언니들 목소리 막 따라하기도 하구요.ㅠ

코코죠 2012-10-11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편의 알흠다운 수필을 읽은 것 같아요...라는 댓글은 아껴둘 걸 그랬죠. 이젠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아, 잠 못 드는 밤 이 글을 읽어 다행이었어요. 못 참고 후다닥 읽어버렸으니 이제 한번 더 차근자근 읽어보러 갈래요.

깐따삐야 2012-10-11 12:32   좋아요 0 | URL
오즈마님, 참 오랜만이네요. 아주 오래전 사진이긴 하지만 가끔 잠옷 입은 채로 머리 쥐어 박고 있던 귀여운 오즈마님 사진이 떠오르기도 해요. 요즘은 안 아프고 건강하신 거죠? ^^

LAYLA 2012-10-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청!!!!!!저에게도 궁극의 진통제인데 웬만한 약국은 인팔더라구요 ㅠㅠ

깐따삐야 2012-10-12 11:43   좋아요 0 | URL
아시는군요! 제가 웬만한 두통약은 다 잡숴봤는데 타이레놀이 역시 고전은 고전이지만 두청은 약국 이름처럼 신세계의 발견이었어요. 정말 효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