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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엔 책을 많이 안 읽었다. 강의 중에 셰익스피어를 다시 읽고 논문을 쓰느라 관련 도서를 뒤적거린 것 말고는. 새로 출간되는 책들이 흥미를 끌지 못하면 과거에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꺼내보곤 했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게으른 독서에 그친 한해였다. 대개 이쯤 되면 읽고 싶어지는 종류의 책이 있는데 아무개의 독서 일기다. 부지런히 읽고, 메모하고, 사색한 이들의 노트를 훔쳐보면서 반성과 동시에 워밍업에 들어간다.
작가들의 흔적 중에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가, 는 상당히 내 관심을 끄는 부분이기도 하다. 단순한 호기심 충족을 넘어 그들의 정신적 역사를 엿볼 수 있고 취향에 맞을 법한 책을 소개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소설가 김형경이 유르스나르를 좋아한다고 해서 『알렉시』와 『세 사람』을 책을 구해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매력은 있지만 어려웠다. 분명 몰입되리라는 감이 왔는데 당시 내 마음이 좀 허황되어 있어서 그러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김현의『행복한 책읽기』는 문학을 공부했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책인데 꼼꼼히 정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학부 초년생 때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몇 페이지 못 나가고는 도로 갖다 주었던 경험만 있다. 이번에 서점에서 페이지를 훑다가는 평론가 김윤식에 대해 쓴 부분을 보고 빌리지 말고 사서 읽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그의 가장 빛나는 대목은 자기 직관에 그가 유보 없이 매달릴 때이며, 그가 가장 어설픈 대목은 원론에 집착할 때이다(29). 이럴 수가. 참 적확하다 싶었다.
막상 본격적인 독서에 들어가자 어느새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역시 만만한 책이 아니었구나, 긴장이 되었다. 아무리 ‘김현의 일기’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어도 애초에 ‘김현’이라는 이름 두 글자만으로도 할랑한 독서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조금씩 곱씹어가며 읽고 싶었고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남진우를 비평하는 대목의 말미에, 모든 작가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뛰어난 작가들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비평가도 자란다. 자라지 않는 비평가를 보는 것은 나이든 난쟁이를 보는 것처럼 괴롭다(266). 과연 그렇구나. 비단 비평가뿐만이 아니다.
이처럼 김현은 촌철살인의 아포리즘들로 80년대의 한국문학의 풍경을 아우르고 있었다. 한 줄 한 줄마다 한국문학에 대한 비판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기에 어느 한 대목만 인용하기엔 나머지 글들이 아쉬워진다. 지금 활동 중인 생존 작가들도 많이 언급되고 있었지만 이름만 들어본 작가나 작품들도 있었고 어떤 촌평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의 글은 가치 있고 합당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김현이라는 권위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참으로 명민하고, 사려 깊고, 예지 넘치는 비평가를 너무 일찍 잃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기형도의 죽음은 맬랑꼴리의 작품세계를 더욱 신화화시킨 경향이 없지 않지만, 김현의 죽음은 직관과 통찰을 두루 갖춘, 동시대의 비평을 접할 수 있는 작가와 독자의 혜택을 앗아간 셈이다.
김현은 책에서 ‘읽을 만하다’라는 표현을 종종 쓰고 있는데 그의 모든 글이 말 그대로 읽을 만한데 내 취향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 말로 절친이었던 김치수를 언급하는 대목이 참 좋았다. 김현에게 김치수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정말 친구였다. 이 글 속의 김현은 그저 친구가 가져온 과일을 날름날름 받아먹는 술병 환자일 뿐이고, 김치수는 친구가 또 아플까봐 휴일을 기꺼이 내어주는 다정한 몽고추장이다.
내 친구 중의 하나는 신촌에 있는 여자대학교의 선생(김치수: 문학평론가)인데, 얼굴이 시커멓고 몽고추장이라는 괴상한 별명을 갖고 있다. 내가 술병으로 한 일년을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보던 그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전화를 걸더니 관악산에 등산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 . . 일요일마다 산행을 하면서 그와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숨이 가빠서 그런 것이지만, 숨이 별로 가쁘지 않은 요즘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아침 7시에 만나 별말 없이 산길을 걷는다. 그가 쉬자고 하면, 어느 틈엔지 숨이 목까지 차 있다. 그는 참외나 사과, 배를 꺼내 깎아 반쪽을 나에게 준다. 그는 어린애 달래듯, 이젠 잘 걷는데라고 말한다. 거의 매번 되풀이되는 칭찬이다. 어린애 달래듯, 혹시 내가 이젠 못하겠다 하고 나자빠질까봐 하는 소리다. (54-55)
이렇듯 김현은 친구 김치수를 이야기하며 친구를 바다에 빗댄다. 바다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좋은 친구도 그러하단 이야기다. 이렇듯 근사한 우정론이 있는가 하면 ‘타자의 철학’이라는 부제 아래 쓴 짤막한 글도 눈길을 끈다.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165). 그렇고말고. 때론 돌이나 풀보다도 못할 수도 있다.
김현은 갔지만 책은 남았고 모처럼 유익하고 즐거운 독서를 했다. 그 동안 너무 안 읽어서 이토록 신이 난 걸까. 이제부터는 책을 보는 법을 읽지만 말고 책을 좀 읽어야겠다.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