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종강모임을 한 뒤 기말페이퍼를 두 개 냈고 자, 이제 본격적인 방학이다. 이번 학기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프로포절은 무사히 마쳤지만 다음 학기 개강 후 거의 곧바로 본논문 발표가 있기에 부지런을 떨어야 할지도. 아무튼 여느 때처럼 학교에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근처 학교로 수업을 하러 다니며 바쁘게 보냈다. 공기의 냄새가 확연히 달라지는 6월. 후텁지근한 날씨가 느껴지면서 어느새 한 해의 반을 보냈다는 것을 실감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무척 짧게 느껴지는 동시에, 참으로 다채롭게 08년도의 절반을 썼다는 생각. 공부를 하는 중에 즐거움과 동시에 한계를 느끼고 나 자신과 타인에게 감동하기도, 실망하기도 하면서. 특별함과 안온함의 중간 지대, 달콤쌉싸름한 상반기였다.
공부, 일, 인간관계, 어느 것 하나 능숙하지 못하지만 그나마 내가 가진 최대 미덕은 매사에 겁이 많다는 것 쯤 될까. 한때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화를 중시하는 노파처럼 모든 것이 그저 ‘밖에서 보기에 무난할 만큼’ 정도였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밖에서 보기에 무난할 만큼’ 정도인 인간이었으면 하는 바람. 언제부터인가 알아서 수위 조절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과거에 비해 덜 뜨겁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실망하지도 않는다. 열렬한 충만감은 때로 스스로를, 타인을 질식시키기도 하지 않던가. 내가 나를 부정하는 일에 지친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일은 스스로를 긍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 이제야 와 닿게 된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이런 나의 심경 또한 달콤쌉싸름할 뿐.
벌써 엄마가 된 친구와 이제야 사회에 첫발을 디딘 친구. 그들 사이에서 목하 연애 중인 나는 인생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한껏 고조된 기분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곁눈질을 일삼으며 방황을 꿈꾸고 ‘하늘의 눈물이 고인 땅, 별을 감춘 구름에 보인 달, 골목길 홀로 외로운 구두 소리, 메아리에 돌아보며 가슴 졸인 맘’ 에픽하이의 노래 속에서 애잔해하는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철드는 일이 더디기만 한 사람인 걸까. 새벽을 밝히며 소설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도무지 낯설어진 요즘. 나는 까슬거리는 파자마 안에서 축축하게 울고 싶다. 예전엔 청승을 떠느라 울었다면 이제는 사라지는 청승이 그리워서 울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젊고 꿈이 많군요.” 한 줄 문장에 비밀을 들켜버린 듯 수줍어하던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빛에서 나는 애정 이외에 질투를 읽었다. 그리고 외로움도. 나는 항상 그랬다. 공유하는 부분 이외에 나만의 꿈, 나만의 열정, 나만의 이야기를 갖고 싶었던 것 같다. 허무맹랑한 판타지라고 해도 좋으니 뒤통수에 코드를 꼽으면 나만의 매트릭스 안으로 빠져들어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눈 감고 달려갈 수 있는 그 곳. 나는 이런 나만은 버릴 수가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외롭게 한다고 해도. 동시에 나는 언제든 ‘밖에서 보기에 무난할 만큼’ 의 포즈를 잡고 살아가고,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새벽 같은 시간. 빨간 불이 노란 불이 될 때까지 추스르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홀로 빗장을 걸어둔 채 머릿속과 마음속을 마음껏 부유해도 좋을, 방학이다. 본격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치유하는 시간. 자, 나의 나니아 속으로 풍~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