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에도 정리벽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다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나는지는 모르겠다. 한 폭의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모든 대화들이 거의 정확히 활자화되고,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던 감정들까지 세세하게 떠오른다. 처음 본 사람인데 내게 소설을 써보라고, 모든 걸 기록해 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나봐. 하지만 내 기억력이란, 차별 또한 심한 탓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기억나는 것만 기억하는 데다가 그 선별의 기준이나 근거조차 모호하다. 결국 이건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냐요.

 전모인님의 페이퍼를 읽으며 '친구'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떠올린 사람들이 둘 있었다. 생생한 화면정지 속에서 지금의 나라면 아마 그들과 친구로 잘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그러지 못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과 나의 인격적 성숙도를 비교해 봤을 때, 많은 부분에 있어 문제는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람에 대해 별다른 욕심도, 미련도 없어진 건 그만큼 인간관계에 대해 여유롭고 초연해져서라기보다는, 높은 기대치 앞에서 번번히 스스로를 아웃시켜버렸던 열패감 때문인 듯 싶다.

 나는 참으로 무모하게도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며 영화에나 나올법한 '진짜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완벽한 합일 상태에 이르기를 바랬던 것 같다. 욕심도 많으셔라. 거의 똑같은 질량과 부피의 애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위해주는 행복감. 그것을 지향하고 찾아다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심이 아니라 희망부터 걸었고, 결국 더 많이 좌절하는 쪽은 나였지만, 포기하느니 다시 상처 입는 쪽을 택했다. 용기는 아니었다. 본능이었다. 다정도 병인 나는 그 병 때문에 스스로를 힘겹게 만들고 늙게 했다.

 예전에 내가 아주 좋아했던, 마음으로 좋아했다고 인정하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면 그들 앞의 나는 지금처럼 시큰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내 내면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봐주었다. 나는 눈을 떴다. 나 자신에 대해. 내 가치에 대해. 그가 잘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건 우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말 그대로, 그냥 멋있는 사람이었다. 시를 잘 썼고 속이 깊었다. 다소 우울질에 변덕스러웠지만 진실을 함부로 뒤엎을 정도로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필요한 걸 취할 줄 알았고, 진실을 말할 때 모든 걸 까발리지 않고 우아하게 드러낼 줄 알았다. 장난스러웠지만 천박하지 않았고, 밉지 않은 말로 충고할 줄 알았다. 지금의 나였더라면 그와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장 종지만도 못했던 좁디좁은 내 그릇은 그들과의 관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었기에 제대로 관계가 무르익기도 전에, 그들을 놓아버리거나 밀어냈다. 그때 당시엔 좋으냐,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완벽하냐, 가 중요했다. 써글... 깐따삐야 같으니라구. 지금은 생각한다. 결국 좋은 것보다도, 완벽한 것보다도, 언제인가, 하는 타이밍이 참 중요한 거로구나.  

 친구 사귀는 게 머 대수냐, 인마. 넵, 대수였는데여. 여행 중, 버스를 기다리던 나에게 어느 일본 여자아이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영문판 하루키 소설에 관심을 보이더니 더듬더듬 이어지는 서툰 영어로 자기는 내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이 많다,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동갑이었고, 깨나 모범생처럼 보였다. 먼저 말을 건 용기가 놀랍기도 하고, 거절하면 그녀가 민망해 할까봐서 나는 내 이멜 주소를 적어주었다. 돌아왔을 때, 약속처럼 그녀로부터 이멜 한 통이 도착해 있었지만 어... 진짜 보냈네, 요러고는 무심코 지나쳤다. 윤기 옹처럼 어차피 일본사람인데 머, 하는 까칠한 마음도 있었던 데다, 친구가 얼마나 대수인데 하는 높디높은 기대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우리 친구 할까요? 해서 친구 된다냐! 하는 그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똥고집. 그때 그녀에게 답멜 한통만 보냈더라면 곤니찌와, 곰방와, 이상의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지금은 친구라는 타이틀이나, 어떻게 친구가 되느냐, 하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두는 수고로움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거의 기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벌써 겸손과 비굴의 경계 즈음에 와 있는 걸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란 생각. 그런데 왜 그 놀라운 기적을 외면하는가. 물론 가벼운 호감에서 출발하여 육중한 신뢰로 나아가기까지는, 서로간에 많은 노력과 배려가 필요하다. 자칫 핀트가 어긋나버리는 바람에 기적에서 출발해서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무한한 관심이나 진실한 애정만으로는 어렵다. 과거의 나는 그게 다인 줄로만 알아서 공연히 주변 사람 원망하며 멀쩡한 인간관계 긁어 부스럼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게 생각한다. 관심과 진심을 갈무리 할 정도의 자제와 배려가 있을 때, 그 관계가 오래 유지되는 것 같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래서 내가 카사블랑카의 거짓말쟁이, 험프리 보가트를 좋아하는 거라니깐.

 이쯤에서 산만한 정신세계 살펴본답시고 프로이드니 융 운운하지 말자. 뜨겁던 감정도 언젠간 식고 모든 것은 무심결에 지나버리면 그만이다. 결국 우정도, 사랑도 일순간 느낌이라기보단 의지 아니던가. 의지로써 가꿔나가고 키워나가는 약속. 대충 우정이려니, 사랑이려니 믿는 게 아니라 믿을만 하니깐 우정이고 사랑인 것이다. 이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한다. 이 간단한 결론 하나 말하려고 위에서 저렇듯 횡설수설 했다니 이 모든 게 몹쓸 카페인 때문이다. 이렇듯 기적처럼 다정하게 조우했던 친구도 사소한 핀트 하나 어긋나면 기저귀가 되어버린다니깐. 커피가 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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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18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꼭 사시미로 손가락 피내서 술에 타서 서로 나눠먹어야 친구되나요..^^
그냥 스쳐지나가더라도 인연과 때가 맞으면 되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싶네요.
(카페인에 니코틴까지 섭취하는 나는 어쩌라고..)

깐따삐야 2008-01-18 02:3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부담스런 인간은 되지 말아야 할텐데 말이지요.^^
(과유불급!!)

Mephistopheles 2008-01-18 03:43   좋아요 0 | URL
그냥그냥 인간관계는 흐르는대로...앞서 생각하지말고 지닌것생각하지말고 그냥 유유자적 숭구리당당숭당당....(점점 꼬이는 중)

깐따삐야 2008-01-18 03:06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유유자적! 과유불급! 오늘 예배 구호 멋지다. ㅋㅋ
근데 저는 김정렬 아저씨의 날씬한 다리가 넘흐 부러워요. 흐물흐물 개다리춤 덕분에 호리호리 하셨나...(또또 삼천포)

다락방 2008-01-18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칫 핀트가 어긋나버리는 바람에 기적에서 출발해서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저는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싫어요, 정말이예요.
기적에서 출발하는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깐따삐야님 짱!!

깐따삐야 2008-01-18 13:44   좋아요 0 | URL
점점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기적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지만 말아라... 어쩐지 슬프다요. ㅡㅜ
절절한 진심과 잘 지내보려는 선한 의도만으론 확실히 부족하죠? 인간관계란.

칭구 하자니깐 짱 먹으라네!! ㅋㅋ

비로그인 2008-01-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5년동안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낸 사람이 있어요.
작년 겨울 문득 그 친구에게 순간적으로 고마워지더군요.
그랬는데 그 친구가 작년 크리스마스때 제게
"내 오랜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하고
문자를 보내왔어요.
서로 느낌이 통했지요.

깐따삐야 2008-01-18 13:47   좋아요 0 | URL
25년, 정말 위대한 세월이네요. 저도 지금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사람들과 그만한 세월을 무탈하게 함께 할 수 있을지 자신없네요. 참 부럽습니다.^^
내 느낌이 그저 일방통행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 때처럼 기쁜 순간이 또 없죠!

레와 2008-01-1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 친구가 많다고 자부했던 어린시절.
지금은 그 관계들 이어나가다 제풀에 지쳐 쓰러져지고 또 쓰러지고..
뿌려놓은 씨앗, 잘 갖꾸고 키워야 좋은 열매를 맺을것이나, 시간이란 녀석이 조금이라도 딴지를 걸라치면 잠깐동안의 생각이나 안부 인사 하기가 얼마나 피곤한 일이냐고.. 내가 이 피곤한 것을 왜 하냐고.. 투덜투덜.. 이 투정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 씨앗들도 마찬가지였으니.. 한순간에 펑~하고 폭발해 버린 마음은 봉합불가. 원치않은 가지치기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더라는.

사람인연.
맺는것도 어렵고, 이어 나가는 건 더 어렵고, 끊어내는건 정말 못할 짓이고..

그래도 필요하다면 절묘한 타이밍에 과감히 실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핀트가 어긋나버리는 바람에 기적에서 출발해서 기저귀만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이 문구를 보자마자 생각나는 불과 몇일 전에 잘라내버렸던 그 아이.

다행스러운건 요 시간이란 녀석이 기특하게도 때가 되면 '지난일 쯤이야..' 하고 두리뭉실한 마음을 갖게 도와줄 꺼란거..

아.. 아침부터 사설이 길었습니다. (부끄..)

깐따삐야 2008-01-18 13:56   좋아요 0 | URL
내가 이 피곤한 것을 왜 하냐고... 에서 씁쓸하게 공감합니다. 일단 내 자신의 신상이 편안하고 여유롭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이기적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그게 당연한 것 같아요.

내 인생에 그늘만 잔뜩 드리우는 사람은 과감히 가지치기도 해야 하겠죠. 뭉기적대다가 나중에 진절머리 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근데 요게 차암 힘들어요. -_-

오랜만에 레와님의 긴 댓글을 읽으니 반갑고 좋습니다. 레와님의 솔직한 목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요.^^


라로 2008-01-1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도 어제 전호인님의 글을 읽고
음악 올렸는데~.^^;;;찌찌뽕
근데 전 님처럼 정리가 안되어서 걍~.ㅎㅎㅎ
근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란 생각"이시라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는겨????(페이퍼 잘 읽어 놓고 딴소리하는 나)

깐따삐야 2008-01-18 13:59   좋아요 0 | URL
어므낫. 전호인님인줄 아셨어요? ㅋㅋ
페이퍼 잘 읽어놓고 왜 딴소리 하세요오.

라로 2008-01-18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참참
기저귀 우습게 보지 마세요~.
얼마전 얼렁 어디 갔다 올거라 생각하고
기저귀 안가져갔다가 넘 당혹했는데
기적같이 나타난 어떤 분이 기적같은 기저귀를 주셔서
기적처럼 위기를 모면했다지요,^^;;;
기저귀가 기적이라니까요!!!!

깐따삐야 2008-01-18 14:04   좋아요 0 | URL
하핫! 간만에 보는 재미난 언어유희여요!
나비님은 재치 100단, 발랄미씨세요.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제공하는 사람은 뒤통수에 어른어른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08-01-1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근데....제목에 점 하나를 찍으면 바로 "청구"가 되버린다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버리는~~)

깐따삐야 2008-01-18 14:06   좋아요 0 | URL
-_- 단식기도가 아니라 딴지기도 중이신 거 아녜요?
(도로남은 돌팔매와 함께 참 가슴 아픈 노래여요.)

비로그인 2008-01-1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계속해서 깐따님의 답장을 기다렸을 그 일본여성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한국처럼 그냥 '에이~ 연락 안하나부다' 하고 넘어가는 문화가 아니라서 말이죠.
한국인에게 실망하거나 혹은 너무 소심해서 상처받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드네요.

깐따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과거의 '좋은 인연들이었지만 내가 쉽게 놓아버린'
사람들이 주르륵 기억의 필름을 타고 지나가더군요.(웃음)
'사람'이라는 그 어느 섬에도 정착할 생각이 없는 유랑인입니다,저는.
도대체 이유가 뭘까. =_=

깐따삐야 2008-01-18 14:13   좋아요 0 | URL
헉...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엘신형님 얘길 듣고보니 무쟈게 잘못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하여간 저는 실망 주고 상처 주는 데엔 국제적으루다가 일가견이 있다니깐요. -_-

추억의 슬라이드쇼를 보다보면 저 또한 문득문득 쓸쓸해지는데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별 뾰족한 수는 없어 뵈기도 하구 그래요.
형님은 맑고 순수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삼십대라는 게 안 믿겨!

비로그인 2008-01-18 14:24   좋아요 0 | URL
어헙~ 이봐요,동상.
이제 겨우(!) 삼심대에 들었다구요.그것도 한국 나이로만! ㅡ.,ㅡ

깐따삐야 2008-01-18 14:29   좋아요 0 | URL
만으로 나이를 따지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우울한 일이지요. =333
(저두 제 나이 끝에 붙은 '아홉'이라는 글자가 아주 밉상이에요.)

웽스북스 2008-01-1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님! 난 괜히 '영광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어요 ㅋㅋㅋ

깐따삐야 2008-01-18 23:49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대하는 성품이라 어딜 가도 환영 받고 귀염 받을 거에요. 난 그렇게 못하거든요. 멍- 하다가 세월이 흘러버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