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의 영화로는 주저없이 '밀양'을 꼽겠지만 조금 늦게 찾아본 이 영화 또한 그에 버금갈 정도로 내 마음에 들었다. 1984년 동독이라는 배경에 처음엔 정치적 암투를 그린 시대물인가 했는데 영화는 인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영화를 세 명의 주인공에 관한 세 가지 성찰로 읽어보았다.

#1
비즐러 (울리쉬 뮤흐 분)

 그는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인 연극배우 크리스타를 도청, 감시하게 된 비밀경찰이다. 국가와 당의 신념에 따라서만 움직이던 냉혈인간 비즐러는 예술가 커플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생활을 엿듣게 되면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비즐러는 국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작품을 쓰는 드라이만과,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연극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크리스타에게 인간애를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거짓된 도청기록을 써가게 되고 그들을 지켜준 댓가로 본래의 직책을 잃게 된다.

 기억하기로, 이 영화에서 비즐러는 한번도 웃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에리카(이자벨 위뻬르 분)의 서늘했던 무표정을 상기시키는, 차디찬 대리석 같은 얼굴이다. 그에게는 가족도, 연인도 없으며 그가 나누는 대화란 취조자들을 상대로 한 심문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삶이었을 뿐, 그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보며 비즐러는 불현듯 위협을 느끼게 되고 그들이야말로 세밀한 감시가 필요한 대상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지켜보던 가운데 비즐러는 점점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간다. 급기야는 자살한 친구를 애도하는 드라이만의 피아노 연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레닌은 열정 소나타를 좋아했어. 그리고 말했지. 내가 그것을 계속 들었더라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거라고." 드라이만의 말처럼 자유와 예술이 주는 감동과 희열에 한번 눈 뜬 사람은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힘들다. 비즐러도 마찬가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그 순간, 비즐러의 마음의 벽도 함께 무너졌던 것이다. 그는 고수해왔던 가치를 포기함으로서 새롭게 구원을 받았다.


#2
드라이만 (세바스티안 코치 분)

 동독 정부가 주시하고 있는 극작가로서 자신의 신념과 생활의 안위, 동료와의 의리와 집필에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능이 탁월한 예술가이면서 정열적이고 사려깊은 연인이기도 하다.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동독의 비극적 자살에 대한 에세이를 슈피겔지에 기고하는 등, 예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고 정부의 비인간적 처사를 서방세계에 알리고 싶어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비즐러의 도청 아래 이루어지지만 비즐러는 이 모든 사실을 고의적으로 눈감아준다. 그러나 정부의 고위급 간부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어 어려움에 봉착한 상황에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크리스타의 밀고로 체포 위기에 놓이게 된다. 내막을 파악한 비즐러는 결정적 증거물인 타자기를 재빨리 감추고 드라이만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크리스타를 잃고 만다. 그는 타자기를 인멸한 사람이 크리스타라고 믿지만 통일 독일 이후 수년이 흐른 뒤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비즐러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예술가의 전형적 인상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성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뜻 맞는 동료들과 힘을 모아 신중하게 움직인다. 한편으론 견고한 시대의 장벽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굴욕을 씻어주지도, 배우로서 겪어야 하는 내적 갈등을 치유해 줄 수도 없는, 무력한 지식인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완벽한 이중주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예술가적 사랑으로 읽혔다. 드라이만은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타를 경계하고, 크리스타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사수하기 위해 드라이만을 배신하지만, 이러한 비극 앞에서 책임의 소재라든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등의 판단은 부질없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답답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전인적 사랑을 나누는 용기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뜨거운 사랑은 비즐러라는 냉혈한을 구원했다.


#3
크리스타 (마티나 게덱 분)

 동독 연극계의 히로인이자 드라이만의 연인이다. 그 시대의 여인이라기엔 도드라질만큼 화려하고 정열적이다. 드라이만의 정치적, 작가적 행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며 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지만 배우로서의 재능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고 약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약한 일면을 감추고 있다. 정부의 간부의 눈에 띄어 수치스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는데, 배우로서의 생명이 끊기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드라이만에 대한 신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동독 정부는 트리스타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 증거물이 있는 장소를 알아내어 드라이만을 체포하려 하지만 비즐러의 개입으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트리스타는 차에 치여 숨을 거두고 만다.

 마치 열정적인 남반구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듯 매혹적인 배우였다. 동독의 겨울이라는 칙칙한 배경 속에서 이 여인은 탐스러운 장미처럼 검붉은 빛을 발한다. 트리스타의 아름다움은 비즐러에게는 눈부신 동경으로, 저급한 정부간부에게는 욕망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그리고 그녀의 자의식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다. 트리스타는 드라이만의 연인, 권력자의 정부로서만 살 수는 없는 여자였다. 드라이만은 이것을 이해했지만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정부간부는 이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마음 따위도 없지만, 그녀의 직업적 운명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었다. 결국 드라이만을 배신하는 그녀의 선택은 어느만치 불가피했고, 비즐러는 두 사람 모두를 동정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절망에 빠진 그녀를 지킬 수는 없었다. 트리스타는 무책임한 시대와 이기적인 남성들로 인해 쓸쓸히 고통으로 내몰린 비운의 히로인이다.

 
 영화의 라스트 씬은 '시네마 천국' 이래로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을 염두하여 자세한 설명은 삼가필)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없고 여운은 길다. 비즐러는 이 라스트 씬에서 딱 한번 미세하게나마 밝은 낯빛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잃고나서야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그것은 자발적 상실을 통한 구원인 동시에 난생 처음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소중한 선물이었던 셈. 여기, 당신의 삶을 비추어줄 타인의 삶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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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3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쉬 뮤흐" 이 영화가 이분의 유작이였습니다.
영화를 촬영시 이미 위암 말기판정을 받았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고
사그라들었죠.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영화가 빛이 납니다.

깐따삐야 2007-12-30 21:50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그런 상황에서도 그만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니 존경스럽네요 정말. 메피님 이야길 듣고나니 영화 속에서 그가 흘렸던 눈물이 예사롭게 다가오질 않네요.
암튼 참 훌륭한 영화에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웽스북스 2007-12-3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너무 좋아요- 메피님 말씀하신 사연은 저도 몰랐던 사연인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범상치 않은 느낌을 가진 배우였어요- 진짜 마지막 불꽃이었네요

깐따삐야 2007-12-30 22:06   좋아요 0 | URL
범상치 않은 느낌. 그렇죠!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라 더 범상찮아 보이구 심상찮아 보였는지도 몰라요.

마노아 2007-12-30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에 이 영화 예매했어요. 무려 열흘이나 더 기다려서야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엄청 두근거려요. 1월 10일 어여 와라!

깐따삐야 2007-12-30 22:35   좋아요 0 | URL
재상영 하나보죠? 잘됐네요. 마노아님도 좋아하실 거에요.^^

마늘빵 2007-12-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가 젤 좋아하는 영화 또 하나 나왔다아. 비즐러 넘 귀엽지 않나요? :)

깐따삐야 2007-12-30 23:13   좋아요 0 | URL
글쎄요. 얼핏 레고인형을 떠올리게끔 하는 게 귀여운 것도 같네요.
(어째 망자에 대한 모독 같으다. -_-)

라로 2007-12-3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고싶다요~.
1월 10일에 나오면 다시 봐야쥐이~.

깐따삐야 2007-12-31 12:22   좋아요 0 | URL
다시 보셔도 좋으실 것 같다요~ ㅋㅋ 저도 나중에 한번 더 보려구요. 느낌이 또 다르겠죠.^^

순오기 2007-12-31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월 10일이라니 저도 기억할랍니다. 좋은 영화 알개 돼서 감사~ ^^
깐따님 한해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세요~
태그 덕분에 님을 알게 돼서 즐거웠어요. 새해에도 끈끈한 인연 이어가요. 우리! ^^

깐따삐야 2007-12-31 12:27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도 한번 보세요.^^
혼잣몸인 저야 특별히 마무리고 뭐고가 없죠. 그저 무탈했다는 데에 만족하고 새해 다짐이나 하는 정도에요.
저도 태그 덕분에 알라딘과 좀더 친밀해지고 순오기님도 알게 되고. 참 좋았더랬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프레이야 2008-01-0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못 보고 지나갔어요.
올해 봐야겠어요. 깐따삐야~~ ^^
부산에서도 재상영할까 모르겠네요.

깐따삐야 2008-01-01 11:41   좋아요 0 | URL
아하, 부산에 사시는군요! 먼 곳인데 혜경님 덕분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 분명히 좋아하실 거에요. dvd로도 나왔으니 꼬옥 한번 보세요.

Mephistopheles 2008-01-01 22:55   좋아요 0 | URL
소문엔 DVD 자막이 개판 오분전이라고 하더군요.오히려 어둠의 경로쪽 자막이 훌룡하다고 하더군요.^^

깐따삐야 2008-01-01 23:03   좋아요 0 | URL
독일어다보니 구텐탁이니 구테나흐트 정도 빼곤 그냥 그런갑다... 하고 봤어요. 흐흐. 개판 오분전인 자막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훌륭한 영화라지요.

다락방 2008-01-0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제 2007년 최고의 영화였어요.

여담으로, '마티나 게덱'이 주연했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도 정말 좋아요!

깐따삐야 2008-01-02 23:59   좋아요 0 | URL
우왓! 반가워요! 이 영화 정말 좋았어요.
전 마티나 게덱이란 배우도 좋았고 미필적 고의라는 말도 좋아하는데. 그 영화 꼭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