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상심한 나에게 누군가 권해주었던 영화이다. 개봉작들을 시기에 맞춰 꼬박꼬박 챙겨보지 못하는 나는 누가 나오는데요? 라고 물었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의 작품이라는 말을 했고 그 작품이 좋았다면 이 영화도 분명히 마음에 들 것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유지태와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이었다. 여백이 많은 유지태의 미소와 김지수의 깨끗한 목소리를 좋아한다. 엄지원은 감정에 습기가 많고 여려 보이면서도 어딘지 인공적인 배우라는 느낌 때문에 많이 좋아하진 않고. 그 날 이후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 최근에서야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계절을 거슬러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곳곳에 담겨있는 이 영화를, 혼자 숨 죽인 채 담담한 심정으로 보았다. 안됐고, 그 마음 알 것 같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며.
현우(유지태 분)는 백화점 붕괴 사고로 연인이었던 민주(김지수 분)를 잃는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쇼핑을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기로 약속했던 상태였다. 신입검사로 바빴던 현우는 제 시간에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민주에게 먼저 백화점에 가 있을 것을 부탁한다. 민주는 오래 걸리지 않으면 그냥 이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불편했던 현우는 민주를 설득한다. 결국 민주는 혼자 백화점에 가서 현우에게 선물할 등산화를 사서 지하 커피숍에 앉아 포장을 하던 중에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슬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으로 현우는 민주가 그렇게 좋아하던 웃음을 잃어버린 채 냉정한 검사로서 자신의 일에만 몰입한다. 그러던 중에 담당했던 사건의 결과로 여론의 압박이 심해져 휴직처분을 받게 된 현우는 민주가 남긴 다이어리 속의 여정을 따라 가을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의 제목은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 민주는 현우와 함께 다시 가고싶었던 장소와 그 곳에 대한 인상을 다이어리 속에 세심히 기록해왔고, 다이어리는 민주의 아버지에 의해 현우에게 넘겨진 것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자꾸 마주치는 여자가 있다. 세진(엄지원 분)이다. 현우는 세진의 목소리를 통해 민주가 생전에 남겼던 말들을 다시 듣게 된다. 비는 하늘에서 들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거야. 비가 땅에 부딪치고, 돌에 부딪치고, 지붕 위에 부딪치고, 우산에 부딪쳐서 비소리가 들리는 거잖아. 비가 옴으로 인해 우리는 옆에서 잠자고 있던 사물의 소리를 듣게 되는거야. 뭔가 이상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세진은 커피숍에서 민주에게 커피를 갖다주었던 아가씨였고 가까운 거리에서 민주와 함께 매몰되어 민주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진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민주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구출을 기다렸고, 민주로부터 현우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민주는 죽어가면서 세진에게 현우를 위해 기록해왔던 다이어리를 남겼고, 살아남은 세진은 현우를 찾지 못해 민주의 부모에게 다이어리를 전했던 것.
두 사람은 모두 아프다. 이제는 더 이상 편하게 웃을 수 없게 되버린 현우. 면접시험장에서,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뛰쳐나가는 세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너무도 커서 민주라는 교집합을 통해 우연히 겹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 아프고 버겁다. 그러나 민주가 다이어리의 맨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했듯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는 마음 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은 미세하게나마 서로에게서 희망을 본다. 길이 너무 실없이 끝나버린다고 허탈해 할 필요는 없어. 방향만 바꾸면 여기가 또 출발이잖아. 마치 미래를 예감하는 전언과도 같은 민주의 메세지. 일상으로 돌아온 현우는 민주의 아버지로부터 나무 나침반을 선물 받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침반 바늘의 두 끝이 항상 다른 쪽을 가르키고 있지? 두 끝이 서로 만나지 못 한다고 해서 서로 다른 곳에 있겠나? 현우는 수소문을 해서 세진을 다시 찾게 되고 두 사람은 가을색이 완연한 가로수길을 걸으며 기억 속 민주와 재회한다. 새로 포장한 길인가 보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 길을 잊고 이 길을 또 달리겠죠? 좋은 길이 됐음 좋겠다.
널 만나서 내가 커졌고, 너 때문에 매일 새로워지고, 널 보면 힘이 나. 내 마음의 숲은 바로 너였나봐. 황량한 마음의 사막을 우거진 숲으로 채우기 위해 가을로 떠난 여행. 하지만 내 마음의 숲은 바로 내 곁에 있는 너라는 깨달음. 민주는 떠났지만 사랑은 남았다. 나침반과도 같은 정직한 사랑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인지도.
스토리는 진부하고 번지점프 만큼의 신선함은 없었다. 더욱이 김지수와 엄지원은 이은주가 지녔던 독특한 아우라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영화를 함께 보고싶다. 그가 속이 좀 좁은 사람이더라도 현우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나를 통해 그가 커지고, 나로 인해 나날이 새로워지고, 나를 보고 힘을 낼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멜로의 촌스러움이 아니라 마시멜로 같은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