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39년동안 공직생활을 하신 아버지.
길다면 긴 그 세월동안 아버지가 쌓아오신 공적인 관계들(사적인 친구를 제외한 사회생활을 통해서 접하게 된 사람들)은 부지기수일 것이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그 관계들은 힘을 발했다. 그만큼 아버지가 들인 공도 만만찮을테지만.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난 뒤, 그 관계들은 더이상 예전 그대로가 아니었다. 드물게 사적인 정을 쌓은 관계들만 유지되었다. 이제 아버지는 예전만큼 이러저러한 모임에 자주 참석하실 일이 없게 되었고, 반대로 이러저러한 모임으로 바쁘신 어머니없이 혼자서 식사를 하시고 밤을 보내시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자주 아버지께 전화 드리게 되었다.
둘. 평생 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
박봉인 공무원 월급(예전엔 박봉이었다)으로 자식들 셋 키우고 학교 보내느라 빠듯한 살림을 살면서, 사적으로 혹은 아이들때문에 형성된 관계들이 하나둘씩 늘어나 이젠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관계들을 유지하시느라 꽤 바쁘시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니께 아버지를 부탁드리는 전화를 조금 더 자주 드리게 되었다.
셋. 이젠 아줌마 혹은 엄마 소리 들을 나이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나.
회사가 점점 힘들어지고, 지금 있는 여의도의 어느 후진 빌딩의 임대료를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조금 싼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지금의 회사는 둘로 나뉘게 된다는데, 그럼 나는 어디로 갈건지, 누굴 사장으로 선택할 것인지를 누군가가 물었다. 나의 대답은 지금 사장님. 다른 한쪽의 사장이 될 사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업부장. 사실 둘 중 어느 회사로 갈건지에 내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지금 예상으론 당분간 내가 그 두 회사를 왔다갔다 해야할 듯 싶지만, 지금 내 심정으론 그 재수없는 부장이 내 상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게 싫다. 차라리 난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 나를 철없고 한심하다는 듯 보고 있는 영업부 과장. 좋고 싫은 건 있겠지만 하라면 해야지란 그의 말엔,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다니 참 속편하다 내지는 철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 우리 회사의 남자직원들을 가만히 보면, 그 재수를 참 싫어하면서도 하자고 하면 군말없이 그 말을 따른다. 그 일이 옳든 아니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재수의 직속부하가 아니지만, 그들은 나와 다르게 그의 영향권에 속해있으므로. 또한 그들은 처자식이 달린 사람이고, 나는 혼자이니까. 나도 상사의 말에 군말없이 따를 때가 있는데, 그건 거의 사장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렇다고 이사급의 말에 불복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 재수의 경우만 유달리 과민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장님은 재수같이 무대포로 일을 시키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다.
영업부 부장, 혹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난 참 싸가지가 없다. 단번에 오케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 조금 깐깐한 태도로(일부의 맘에 안드는 사람일 경우에. 사람에 따라서는 몹시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엔 내딴엔 웃으면서 그들을 대한다) 언제까지 해야하는 거냐고 묻기 일쑤다. 한꺼번에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야하는 나로서는 일에 경중을 두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처사이지만, 그들이 그런 내 속사정과 마음을 알 리가 없다.
난 호들갑을 떨어도 아이같이 감정적으로 굴어도 그 사람은 밉지 않지만, 자신은 정말 재수없고 예의없이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기 일쑤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배려와 예의를 요구하는 밥맛없는 사람은 정말 싫다. 그런 사람에겐 인사도 하기 싫다. 그래서 나는 개긴다. 그 사람이 나를 씹든말든. 나를 좋아하든 말든. 하지만, 내가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보고 나를 꺼려하는 것은 조금 맘에 걸린다. 그런 나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태도와 행동이 때론 그들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고 하더라도(그들 역시 그러고 싶었을 거다), 그렇게 하는 내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는 그리 관대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도 꽤 있을 거다. )
사실 난 사장님을 제외한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안하무인이다. 하지만, 난 내가 싫어하는 재수를 제외하면 나이가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도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일의 성격상 때로 깐깐하게 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비록 감정은 나와 같더라도 관계에 있어서는 공과 사를 구분할 수 있으므로. 반면 나에겐 공사의 구별보다 관계의 욕구와 내 감정이 더 소중하므로. 난 그 재수에 대한 내 감정과 행동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그들(남자들, 여자들은 일단 내편이다 ^^)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이 회사를 떠나게 되면 그들이 한번쯤은, 혹은 조금이라도 날 그리워해주길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