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9
황동규 / 민음사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박신양, 최진실 주연의 영화 [편지]에 나오던 그 시,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가 썼다. 편지를 가장한 이 시는 즐겁다는 표정의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녀석의 탄생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황동규가 고3 시절 연상의 누나를 좋아했었고... 그 때문에 이 시가 탄생했다고 한다. 가지 못한 편지일까. 어쨌든, '그대'에게 주는 편지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대를 부르고(1),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며, 그 사랑도 그칠 것으로 알지만 그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계절은, 시간은 흘러갈 것임을 깨닫고 또 믿는다(2). 사소한 시작의 사랑, 그러나 한없는 기다림, 기다림 끝에 올 그침에 대한 자세, 그러면서 돌고 도는 시간의 연쇄. 젊은 날의 황동규는 그 사소한 사랑으로 실은 삶의 흐름을 다시 읽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한 철학자가 있다. 그 철학자는 <폭력과 상스러움>이란 책 속에 사는데 익살맞게 웃고 있다. 얼굴의 이그러진 정도와 만화주인공을 닮은 눈빛의 각도를 추측해볼 때, 누굴 심하게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의 입에선 끝없이 그 '누굴' 향해서 독설을 내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 이제 보니,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점잖은 철학이 아닌 통 속에서 굴러다니며 똥과 오줌과 정액의 퍼포먼스를 펼쳐내는 디오게네스의 얼굴을 닮았다. 아하!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광대의 철학'이군! 이제 그는 이렇게 점잖게 말하기 시작한다. '엑스 리브리스.' ∼라는 책에서? 어, 어? 또 말하네? '엑스 리브리스.' 이번에 그가 한 말의 의미가 책 속을 빠져 나온다. 책 밖의 세계로 튀어나온 그 의미들은 날선 칼이 된다. 칼은 춤을 춘다. 그 춤의 이름은 코믹살상댄스. 그리고 그 춤바람에 쓰러지는 무수한 헛바람들...

그런데 우리의 인문학은 다분히 자폐증에 걸려 현실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회로 안을 공전하고 있다. 그 결과 학술적 담론은 공허해지고, 대중들 사이를 떠도는 세론은 무지막지한 맹목으로 치닫는다. 담론과 세론은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론이 이데올로기의 중금속에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엑스 리브리스', 이는 잿빛 인문학의 문장들을 뽀얗게 먼지가 앉은 낡은 책 밖으로, 상아탑이라는 도서관 밖으로 끄집어내 생동하는 삶과 맞물리려는 시도이다.
ㅡ 머리말 「엑스 리브리스」에서

이 책의 이름마저도 패러디이다. 이지메를 다룬 첫 번째 글, 「마이너스 1의 평화」에서 이렇게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즉 르네 지라르의 책 이름을 바꿔서 붙인 제목인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글들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 저술의 인용과 현실 세계의 인용, 그리고 그(집단주의, 국가주의, 극우와 파시즘, 남성우월, 동성애 차별, 기득권과 지식인 등등)에 대한 신랄하고 유쾌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중권의 이름을 언제부터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것은 그가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 가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 때였다. '딴지'일보'는 사기다. 매일 안 나오니까.' ㅡ_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학 이야기
박경리, 신경림, 이제하 외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박경리와 신경림 등의 소설가, 시인 17명의 문학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라는 강연의 원고를 새로 다듬어서 모은 책이기 때문에 작가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구어체가 친근하다. 작가들의 문학관과 글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인생관, 세계관까지 들려주고 자서전적인 이야기들도 흥미를 돋군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작가가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마다 다른 제목의 다른 작품을 써왔듯이 그들의 인생과 문학관도 다른 셈이다.

- 박경리, 「생명을 존중하는 문학」 : 일본 문화를 가리켜 '에로(티시즘)와 그로(테스크)와 난센스'라고 하면서 이들의 철학과 사상이 부재한 유미주의 예술관을 군국주의와의 결합될 수 있다며 경계한다. 그리고 '감각을 넘어 감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조지훈이 '문학이라는 것은 미를 추구한다'라고 했는데 이를 비판하고 문학은 아름다움이 아닌 진실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또한 상업주의에 물들은 문학을 비판하기도 한다.

- 신경림,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 중3 때부터 시작한 시 쓰기로부터 시인의 자전적인 내력을 소개하면서 그만의 시론을 펼친다. 신경림은 '시는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25시>의 게오르규가 한 말을 빌어서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먼저 외쳐야'하는 시인의 사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즉, 시에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이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안도현 시집 문학동네 시집 99
안도현 / 문학동네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집은 짧고 굵은 울림을 주는 시, [너에게 묻는다]로 시작한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 태워서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이미지입니다. 연탄이란 존재는 자기 몸에 불을 붙여서 방구들도 데워주고, 라면도 끓여주고, 재가 되어서는 미끄러운 골목길에 으깨져서 길을 미끄럽지 않게 해주는 존재입니다.'(「헛것을 돌아볼 줄 아는 시」, 『나의 문학 이야기』, 299쪽)라고 한다. 첫 번째 시에 연이어 나오는 시 [연탄 한 장], [반쯤 깨진 연탄]을 읽고 나서면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정서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 삼행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시가 두 시들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가 지닌 함축성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 시집에는 '연탄'과 함께 '증기기관차'라는 시어도 자주 등장한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과 세상에 뜨거움을 주고 끝끝내 부서져 버리는 열정의 삶, 그것이 바로 연탄과 증기기관차의 이미지이다. 많은 시들이 안도현의 해직교사 시절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가난한 생활의 설움과 자조, 그리고 의지까지 삶의 꽉 찬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신경림이 안도현이 시를 너무 모범적으로만 쓴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밋밋하고 싱거운 듯한 느낌이다. 강렬한 긴장이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시를 기대하기란 힘들었다. 실제로 안도현은 자신이 학생시절에는 영악하게 손끝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 후로 대학 입학 이후 선배들의 충고에 따라 가슴으로 쓰여지는 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은 변증법적으로 그 둘을 종합하기에 이르렀다고 고백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안도현의 시에는 추운 겨울날의 뜨끈한 밥과 국물로 다가온다. 그의 시에는 따뜻한 숭늉이나 우유를 홀짝홀짝 마시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책, 책에 관한 책. <책그림책(BuchBilderBuch)>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책이다. 시각적인 영상이 율동하는 TV가 무미건조하게 생겨먹은 활자로 이루어진 책을 압도하는 시대에, 나는 이 책을 TV에서 소개받았다. 그전에 이미 신문의 서평으로 먼저 접한 기억이 있지만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그림을 보여주면서 책을 읽어주는 것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바로 그 책의 이름을 아무 종이에나 빠르게 갈겨서 적어두었다.

이 책의 그림은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화가가 그렸다는데 그는 책의 표지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 책의 그림들도 역시 책에 대한 그림으로 가득하다. 아니, 전부 책이 등장하는 '책그림'이다. 이들 책그림은 어떤 것은 시적詩的이며, 어떤 것은 환상적이다. 또 어떤 것들은 잔잔한 달빛을 닮았으며 물결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크빈트 부흐홀츠가 그린 그림에 밀란 쿤데라를 포함해서 여러 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글을 붙였는데, 그림이 주는 감동보다는 크지는 못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서정적인 그림을 서사적으로 변신시켜주는 작가들의 상상력을 맛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작가들의 상상과 내가 그림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빈 종이에 책을 그려놓고는 한 적이 많았다. 책을 그린 그림은 그 책의 내용을 드러내지 않는다. 책의 알맹이를 드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책 읽기 자체의 즐거움을 그 그림이 담고 있다. 이 책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책을 읽고 있는 뒷모습의 여인의 의자가 하늘로 찬찬히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그림이 있다. 독서삼매경을 그렇게 잘 표현한 그림이 또 어디 있을까? 책 안에 숨겨진 책, 그림 안에 숨겨진 책, 내용 보다 더 즐거운 독서 그 자체를 그린 그림들. <책그림책>은 그림으로, 글로, 책을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