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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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쓴 詩를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혐오감이 난다. 누가 시를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 나는 시를 불신하고 모독했다. 사진과 상형문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아 그러니까 나는 시가, 떨고 있는 바늘이 그리는 그래프라는 것을 波動力學이라는 것을, 독자께서 알아주시라고 얼마나 시의 길을 잃어버리려고 했던가. 죄송합니다.'라던 황지우.

그러니까, 자괴감이 느껴지는 이 自序는 그의 시집의 마지막 화룡점정이다. '사진과 상형문자 사이'라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서 그의 시들의 독특한 실험-파괴-의 방법론을 확실히 설명한다. 지금 이 글에서는 그의 시들이 구현 불가능하는 것이 아쉽다. (그의 시는 시각적 미학에까지 닿아 있으므로.) 그의 시는 詩文이면서 詩問을 市門에 닿게 한다. 시장의 잡담과 통속의 언어인 듯하면서 시처럼 울림이 있다. 그의 시는 詩畵로 詩話를 詩化한다. 시에 그림이 더한 詩畵가 아닌 글자 속으로 그림이 녹아 들어가고, 그림 속으로 시가 빨려 들어간 詩畵이다. 또, 시에 대한 시들(메타 시)도 시가 됨을 보여준다. 시를 통해서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타 시들은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를 되묻기도 하는 것이다.

'다섯 살 난 한 아이가 공터에서 힘껏, 돌을 던진다.'(87쪽)로 시작하는 어떤 시는 제목마저 달아나고 없고 단지 글꼴이 크게 부각된다. 「묵념, 5분 27초」는 시의 제목만 있고, 내용이 실종되었다. 그야말로 내용은 5분 27초 동안 묵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109∼111쪽)은 신문 읽기를 詩化한다. 즉 신문을 시각적으로 훑어가는 송일환의 안구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표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 / 준 청과물상 金正權(46)'과 '령=얼핏 생각하면 요즘 / 세상에 趙世衡같이 그릇된'과 같은 연이 이어질 수 있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하던 맥루언의 말처럼 그는 신문의 모자이크성을 시적 구성으로 삼고 있다.

「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은 어느 2인칭을 두고 말한 어지러운 잡담 또는 환멸적인 넋두리 가운데에 글 상자를 넣어 '사람이 산다 / 사람은 산다 / 살아 있는 날만 / 그리고 大腦와 / 性器 사이에 / 사람들 세상이 있다'를 부각시킨다. 혼란과 무질서 안의 시. 또는 시 밖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시인과 시인 밖의 세상. 이 시에서는 네모 상자가 테두리를 갖고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사람은 살기 사는데 살아 있는 날에만 살고 그 나머지의 날들에는 죽어 있다. 그리고 대뇌와 성기의 각각에서 사는 것이 아닌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사는 것이다.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ㅡ KBS 2TV · 산유화(하오 9시 45분)」는 모더니즘의 패러디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성모방의 방법론이 드러나는 시이다. 신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의 문구들과 화장실의 음담패설에 가까운 낙서 같은 문장을 나란히 배열했다. (이것은 신문의 사람찾는 광고문안들을 주욱 보여주고 나서, '나는 쭈그리고 앉아 / 똥을 눈다'라는「심인」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TV 프로 안내와 같이 똑같은 너비에, 마지막 문장은 말줄임까지 같다. 같은 형식을 사용한 두 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TV와 낙서/음담패설은 구분될 수 있는가? 우리는 TV를 통해 끊임없이 배설하고 잡담하고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다.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재미있으며/슬픈 시들이다. 실험적인 시의 이채롭고 다채로운 결들이 느껴지면서, 또 한결같이 시대와 시인의 어둠에 손을 넣어 말하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들이며, 알 수 없는 세상들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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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거울에 비추어볼 것)

ㅡ 「의혹을 향하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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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최윤 외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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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의 소설가들의 자전적 소설. 사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이다. 그들, 그리고 그녀의 속 이야기들. 그리고 나의 독서 기록들.

- 최윤, 「집·방·문·벽·들·장·몸·길·물」
2인칭 시점의 '너'를 두고 글이 걸어간다. 개인적으로 2인칭 시점을 처음 접해서 참신했다. 에세이 분위기에 9가지 소재를 두고 쓴 글. 감미롭고 자유로운 문체-의식-의 움직임들.

- 장정일, 「개인기록」
소설가 장정일의 고백과 그 생의 일지. '거침없는 솔직함'. 역시 장정일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 '글을 잘 쓰게 해달라고 악마에게 기도했던' 그 장정일. 그의 삶이 소설이다. 시다.

- 김영현, 「새장 속의 새」
조금은 방어적인 글. 3인칭 '그'의 가면을 쓰고서 고백을 하는 작가. '그'가 될 수밖에 없던 그.

- 정찬, 「은빛 동전」
가정사,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중심으로 쓴 글. 가난한 어린 시절, 은빛 동전을 잃어버리고 나서 소설가의 눈물의 힘이 소설을 쓰게 했을까?

- 신경숙,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
신경숙 특유의 우울하고 고독한 문체. '소녀'의 환상이 인상적. 닭을 안고 있던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자신의 어린 모습? 아니면...?

- 해설 : 김훈, 「램프와 페이지 사이의 공간」
스타일리스트 김훈! 문학평론가로 글을 쓰다. 역시 시의 맛을 깊이 느끼게 하는 글의 결. 램프와 페이지 사이의 그 행복한 공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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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1 - 제1부 격랑시대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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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을 넘으며 '아리랑'을 부르던 조정래는 다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돌아왔다. 이로써 일제 수난기로부터 80년 광주에 이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이 완결된 것이다. 중학 시절 <태백산맥>을 읽으며 세상과 역사를 보는 눈을 길렀던 추억이 있는 내게, 조정래의 <한강>은 언제쯤 꼭 한번쯤은 건너야 할 대하였다. 백여 년에 걸친 민족의 삶과 역사를 등장인물 1200여명의 얼굴을 통해서 그 세밀한 잔주름을 역사의 거친 물결처럼 그려낸 소설들과 그 소설의 아버지, 조정래. 기어코 나는 한강을 건너고 말았다.

소설 속의 유일표가 형 유일민에게 '(…)어쨌든 <전환시대의 논리>는 대단한 책이야. 책이 지식을 주고, 스승 노릇을 한다는 거야 상식이지만 사람의 의식을 그렇게 바꾸는 힘을 발휘한다는 건 처음 느낀 체험이었어.'(9권 212쪽)라고 말할 때, 여기서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 대신에 <태백산맥>을 대입해 놓았다. 물론, 리영희의 이 역작도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과문한 나도 여기저기의 글 모퉁이에서 주워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직 읽지 않아서인지, 내게는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이 가져온 인식의 충격이 소설 속의 유일표의 고백과 유사하다. <태백산맥>은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세계는 조정래의 세계이기도 했고, 한반도 땅의 뒤틀린 역사와 삶의 세계의 진정한 국면이기도 했다. 내 사고와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다준 <태백산맥>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수한 등장인물들의 파란한 생의 얽힘이 이 땅의 고난한 삶의 역사에 스며들 때, 그들의 생을 대신해서 살고 이 땅의 역사의 환부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것이 조정래 소설의 비밀이 아닐는지.

권성우는 <태백산맥>의 지식인 인물들의 가르침에 가까운 말들이 80년대의 사회과학적 성과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는 이번에 <한강>을 읽으면서 '소설'이란 양식에 대한 조정래의 의식적, 무의식적 정의 부분을 발견했는데, 그로 인해서 그의 소설 세계에 대해 좀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연좌제로 인해서 신산스런 삶을 살게 되는 유일민은 '어깨'가 되려는 고향친구인 서동철에게 한자 습득과 신문 읽기, 그리고 무협소설 읽기를 권한다. 무협소설은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와 힘의 논리를 서동철에게 학습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교양소설의 기능인 것이다. 소설에 대한 이런 태도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지식인이 아니고서도 일정한 정보와 지식, 삶의 지혜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소설이란 논조이다. 이것이 조정래가 원하는 소설의 모습 중 하나라면, 그는 이것만큼은 행복하게 성공하고 있다. ― 나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 '한강을 마치며'에서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대학 새내기가 된 아들에게 필사시키도록 했다는데, 그 이유도 문장과 역사 등의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란 것이었다.

마지막 장인, ‘광주를 향하여’에서는 80년 광주로 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아직도 생채기의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우리 역사를 되묻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분단과 독재의 그늘 속에서 전라도의 환부가 선연하게,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 물음의 답변은 물론, 독자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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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 3-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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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느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이 같은 망설임이 있기에 비참한 인생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채찍과 조롱을, 무도한 폭군의 거동을, 우쭐대는 꼴불견들의 치욕을,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을, 재판의 지연을, 관리들의 불손을, 선의의 인간들이 불한당들로부터 받고 견디는 수많은 모욕을 어찌 참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한 자루의 단검으로 찌르기만 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일진대, 어찌 참아나가야 한단 말인가. 생활의 고통에 시달리며 땀범벅이 되어 신음하면서도, 사후의 한 가닥 불안 때문에,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돌아온 이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들의 결심은 흐려지고, 이 세상을 떠나 또다른 미지의 고통을 받기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려 한다. 사리분별이 우리들을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타고난 결단력이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진 탓으로 마냥 녹슬어버린다. 의미심장한 대사업도 이 때문에 샛길로 잘못 들고 실천의 힘을 잃게 된다. 가만, 저게 누군가. 오, 아름다운 오필리어! 기도하는 미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나의 죄도 용서를 받게 하라. (「햄릿」, 62쪽)

셰익스피어를 처음으로 읽었다. 이제는 동화로서 각색되거나 영화, 만화라는 새 옷을 입은 셰익스피어가 아닌 희곡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린 것이 아닌, '희곡'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내 의지에 따라 읽었다. 물론, 순전한 내 의지라고도 할 수 없다. 영미문학에서 갖는 셰익스피어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말하는 것은 군말이 되겠다. 그러나 문학사에서의 위상과 상관없이 내 맘대로 독서하는 나에게는 다른 독서의 이유가 있었다. 문학비평이론을 읽는데 자주 접하는 방법론의 실제 적용의 예시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지겹게도 만나왔기 때문이다. 문학이론, 비평이론이 영미 쪽에서 발전되고 정리되어 온 이유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셰익스피어를 읽어보지 않은 내게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이 갖는 두 가지 의미는 내 독서史에서 차지하는 것이겠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그와 상관없이 새로운 감동을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이라는 장르와 형식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절규와 광기를 거침없이 보여주는데 취기 가득한 시적 문체를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비극의 인물 성격, 플롯, 사랑과 배신과 복수와 죽음의 주제라는 인간 성찰을 모두 주시하지 않더라도 그 문체 미학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문학 독서는 우선 충분히 잘 즐길 수 있어야 다른 의미에서의 독서로의 이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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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팀 버튼 지음, 윤태영 옮김 / 새터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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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은 소녀」

어느 날 공원에서 우연히 소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소녀의 눈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정말 예뻤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찾아냈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꽃에 대해, 그녀의 시 쓰기 수업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안경을 썼다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 그렇게 많은 눈을 가진 소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저앉아 통곡할 때에는 나도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고 얇은 책의 모든 에피소드들은 다 이러하다. 기괴한 신체를 가진 소년, 소녀들의 탄생과 그들의 우울한 삶,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것도 친절한 팀 버튼 제 삽화와 함께 함으로써 그 그로테스크함에 한층 강도를 더해주고 있다.

팀 버튼의 괴팍스런 상상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책이지만, 워낙에 각 에피소드들의 분량이 너무도 짧아서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주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여백을 통해서 또 다른 상상을 하다보면은 새로운 읽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것만 같다.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이고 환상적이며 어렵지 않은 수준의 문체를 볼 때, 분명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동화가 아닌, '그로테스크 동화'이다. 동화가 인간의 유년기를 담는 이야기이므로 원초적인 공포와 상상의 세계를 많이 그릴 수 있는데, 이 동화는 한 번 더 꼬고 뒤틀려서 만든 동화이다.

'아이'라는 존재는 성인(成人)에 비해서 불충분한 존재이다. 성인이라는 완성된 형태를 가정해 둘 때, 아이는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이 책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른이 아니라 소년/소녀가 된다. 모든 이야기에서 신체적 결함과 장애와 이상을 가진 소년, 소녀들은 어른/정상인들에게 타자화되고 핍박받고 상처받고 좌절당한다. 타자화된 인간이나 아직 미숙하다라고 사회적으로 지적 받게 되는 아이들은 자신을 정상/완성된 인간에 비해 병신스러움을 지닌, 자아로 인식한다.(범죄자들처럼) 그러므로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化된 어른일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이들 '기괴한 아이'의 사랑 문제이다. 이들은 홀로 '살아내야' 하며, 홀로 놀아야 한다. 다가서면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들 사이의 사랑마저도 어긋난다. '마른 가지 소년과 성냥 소녀의 사랑'에서 불꽃이 튀자 그 순간 소년의 온몸이 불타고 말았던 것처럼. 그나마 이들 '암울한' 이야기에서 「눈이 많은 소녀」가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그러나, 그녀가 주저앉아 통곡할 때에는 나도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는 말에서 서로에게 전염되어지는 슬픔이 절망적이기는 하지만 소통과 교감의 시작으로, 희망의 시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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