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사람들
케빈 베일스 지음, 편동원 옮김 / 이소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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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약 어느 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왼손잡이들이 빈곤에 빠진다면, 노예 소유자들이 그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노예소유자들은 약자에 대하여 빈틈없이 알고 있는 약탈자들이다. 그들은 고대의 관습을 순식간에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에 도입한다. (26-27쪽)

이 부분에 이르러, 저자가 말하는 '일회용 사람들'은, 내가 서둘러 헛 짚어버리고만 그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위태로운 노동 현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네트웍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낯익고 유전공학이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의 지금에도 노예제는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라는 제도는 역사 책에 등장하는 한 문구나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이 책에 따르면 확실히 과거의 노예제와 현대의 노예제는 다르다. 과거에는 문화적이고 종교적, 그리고 인종적인 차원에서 노예제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구입 비용이 높았고 잠재적 노예는 늘 부족했다. 하지만 노예를 통해서 아주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예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호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판 노예제를 보자. 현대의 노예들은 그야말로 일회용품에 가깝다. 극빈에 가까운 사람들은 자꾸만 늘어난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잠재적인 노예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잠재적 노예는 자본가들의 눈에 띠면 곧 돈을 만드는 기계로 끌려간다. 사람은 병이 들거나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다버릴 수 없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들을 이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노예들이 돈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될 때, 자본가들은 이미 써버린 일회용품을 쉽게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내다버린다. 일회용품이란 본래 다시 쓰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것이 더 간편하고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태국과 모리타니, 그리고 브라질과 파키스탄, 인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곳곳을 누빈다. 현대판 노예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 도서관과 연구소를 들락거리면서 자료와 정보를 얻는다. 사회학과 인류학, 그리고 경제사를 공부한 학자로서 치밀한 저술을 해낸다. 이 책이 꾸며진 것이 아님은 현장에서 직접 얻어낸 노예들과의 대화를 볼 때, 그것을 알 수 있다. 노예제의 배경과 성립과정, 실상을 분석하기 위해서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역사에 이르기까지 논한다. 노예제의 실상을 정밀묘사하고 생생한 현장을 포착한 어느 부분에서는 그의 인류학적 탐구 방법과 민족지적 기술방법인 두껍게 기술하기thick description를 발견한다. 한편, 종교와 역사를 다룬 관점에서는 그 민족과 국가의 현실에 대해서 바로 보기 위해 과거로의 탐사도 피하지 않는다. 노예제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경찰과 국가 정부의 부패를 따져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학적 분석은 진단과 처방을 내놓기 위한 날카로운 메스가 된다.

이 책의 폭로적이고 충격적인 현실에 대한 주제에 못지 않게 저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다양한 이론과 지식이 어떻게 부패한 현실을 곧바로 또, 올바로 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치밀한 사회 분석을 통해서 그 부패한 현실을 어떻게 교정해나갈 수 있는지 실천적이고 힘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일까지.

이 책이 단순한 폭로성 저술이 되지 않는 데에는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지원책을 검토하는 데에까지 미치는 저자의 인간적인 시선이다. 즉, 단순한 폭로성 보도를 넘어서, 그 분석과 설명을 넘어서, 해결 방법과 그것의 실천을 위한 노력을 더하고, 여기에 노예 해방 과정 뒤의 과정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책의 뒷부분에 [노예제 종식을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일]을 보면 실천적인 지식인과 그 실천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해 준다.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말자.'라는 두 번째 지침은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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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범우 한국 문예 신서 79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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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글들은 여전히 마력적이다. 확실히 그는 독자를 책 속으로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장정일의 독서 편력기를 모아둔 이 책은 그 마력적인 글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조금은 해명해 준다. 시, [삼중당문고]에서 밝혔듯이 장정일에게 독서는 곧, 삶 그 자체였다. 이 책도 그렇다. 책이 일기로, 일기가 책 속으로 고스란히 녹아 들어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은 좋은 책을 소개하는 책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 권의 책이 그 책 속에서 또 다른 좋은 책을 소개하지 않는 책은 닫힌 책이다. (70쪽)

라고 말한다면,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나는 몇몇 권의 좋은 책의 목록을 장정일에게서 건네 받을 수 있었다. 메이저 출판사의 책들이나 신간 중심이나,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읽지는 않는 그의 독서 패턴에 따르자면, 그 몇몇 권의 수는 적은 편이 아니다.

여기 실린 장정일의 독서후기들은 대체로 독설에 가깝고, 그런 독설이 시원하고 유쾌하다. 그런 가시 돋친 독서후기(그에 따르면 '나름대로의 '저자후기'') 가운데, 때때로 발굴해낸 책 속의 보물들도 구경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보자 :

또 그의 오두막으로 매일 찾아와 그의 작업을 구경하는 원주민 청년이 있었는데 고갱이 판화 도구를 그의 손에 주며 조각해볼 것을 권고하자 청년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그것들을 되돌려주며, '나는 '쓸모있는 인간'이라는 뜻의 말들을 아주 단순하고 진실되게 토로하는 것이었다.' (폴 고갱의 타이티 체류기 <노아 노아>의 에피소드, 225쪽)

평론가들이란 주로 강자의 편에 서 있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문학 이론이나 문단 상황 모두가 기득권을 가진 쪽에 이롭게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텍스트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직업 자체의 근본적 요인이 그들에게 새로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보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교시를 내리기만 기다렸다가 그 교시를 분석하고 원용하는 획일적인 위계 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문단 내에서는 어느 집단보다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극우파로 이루어진 평단이라고는 하지만 좌파 평론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직업적인 평론가라기보다 시나 소설 같은 창작 작업을 함께 하는 축이었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평론가의 직함을 따는 경향을 보이는 극우파들이 문학이론과 지도교수의 눈에 들기 위해 아부를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좌파들은 순수하게 작품 자체를 평가하려고 했다. 좌파는 수적인 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그들은 주관적인 비평 기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므로 그들 상호간의 응집력은 애초에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비평으로 작품의 가치를 보장해줄 수는 없었다(이진우, <적들의 사회>, p.176) (270∼171쪽)

이 책의 마지막 독서후기에 실린 것이다. 이진우의 목소리를 빌려서 그가 대신 적어 놓은 말은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준다. 그가 이 책 어디에선가 밝히지 않았던가. 그는 평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또, <아담이 눈뜰 때>에서 19살 아담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번역문학가나 평론가의 길 대신 작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으며 재수 끝에 합격한 영문과 등록을 포기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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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의 시 16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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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같은 장정일의, 마력적인 시를 읽는 일은, 매력적이다. 장정일의 시는 쉽고, 재미있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권해주고 싶다.

장정일의 시는 다채롭고, 이채롭다. 그의 문학에 대한 욕망은 자꾸만 환유 되는지, 시에서 시로, 시에서 소설로 영화로 희곡으로 시나리오로, 자꾸만 자꾸만 옮아간다. 전염된다. 예를 들자면, 시 「요리사와 단식가」는 영화 [301·302]의 모티브이다. 서사가 있는 시들이 많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시에서 소설 등으로 업종변경을 하게 된 것은 예상된 일인지도 모른다. 형식의 면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그의 시들은 다양한 화학반응을 보인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은 김춘수의 잘 알려진 시, 「꽃」을 패러디한 시이다. 「약속 없는 세대」는 하나의 세대론이다. 「잔혹한 실내극」, 「즐거운 실내극」, 「진흙 위의 싸움」은 희곡의 모양새를 보여준다. 「자동차」는 영화 시나리오의 꼴을 띤다. 「조롱받는 시인」은 시인 장정일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함을 기사화된 문체로 희비극적으로 보여준다. 「독일에서의 사랑」과 표제시인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는 시작(詩作) 과정을 보여주는 시에 대한 시 쓰기이다.

「삼중당 문고」는 장정일의 한 생애를 집약적으로 그려놓은 이력서이다. '삼중당 문고'라는 문고판 책들을 탐독해 나갔던 지난 젊은 날이 오늘의 장정일을 있게 했을까.

장정일에게 있어, 시 쓰기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환멸감 드러내기 작업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만큼 환멸스런 세계를 그도 아직 '달리고' 있지 않은가. 달린다는 것은, 그만큼의 세계애와 자기애를 포함한 것이다. 비탄함 속에서도 철저히 숨길 수 없는.

장정일에게 섹스는 주요한 테마이자 레토릭이다.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다양한 변주가 이 시집에서도 조금은 싹이 보인다.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나, 실크 커튼」에서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조금은 남성 중심의 시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실크 커튼이란 장벽을 두고서 벌어지는 남자의 관음증과 여자의 결백증을 보여준다. 그런데 결국 실크 커튼은 남자에게 주도권이 있다. 실크 커튼은 남자에게서의 시작되는 (화자의) 시점의 위치를 조금은 알려주는 장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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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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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황지우와 박성우의 두 시집, 모두 대단한 작품들이었다. 황지우는 그 실험적이면서 독특한 형식이 놀라웠는데 박성우의 시들은 다른 의미에서 감동케 한다. 생물학적 상상력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어린아이나 원시인의 상상력이라고 할까나. 그가 시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초록 애벌레와 사내는 같은 길 위에 앉아 있고(「길」), 시인이 거미를 보며 노래(「거미」)하기도 하지만 거미가 시인을 관찰하며 사유(「거미2」)하기도 한다. 박성우의 시각은 이렇게 사람과 자연을 구분짓지 않는 상상력이 발동하는데, 이런 그의 상상력 덕분인지 그가 주로 소재로 끌어쓰고 있는 가난과 소외 등도 처절하게 아픈, 뼈저린 통증의 문체는 아니다. 젊음이 본 눈답지 않게 담담하게, 그리고 주위의 온갖 사물과 자연을 끌어 빗대는 척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말소리로 말한다.

시인의 입으로 꼼틀꼼틀하는 생물학적 상상력이 거미줄을 쳐내자, 가까이서 보아왔으나 늘 지나쳤던 세상의 작고 약한 것들이 거미줄에 걸린다. 파르르 떨리는 날개를 보고 시인은 거미처럼 걸어간다. 거미는 입을 벌린다. 먹이감은 눈을 질끈 감는다. 거미의 입에서는 거미줄로 된 베개가 나오고 이불이 나온다. 오늘 거미줄은 식탁이 아닌 시의 침대가 된다. 먹이감은 그러자 안도하면서 푸근한 가난뱅이의 잠에 빠진다. 거미줄 아래에, 놀랍도록 잔잔한 그늘을 만들어진다. 이것이 『거미』의 시인, 박성우의 전모다.

「길」과 「거미」는 모두 유사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의미의 흐름이 진행된다. [애벌레와 거미의 강하 → 시인의 관찰 → 애벌레와 거미의 걷기와 길 만들기 → 어느 사내와의 유사점을 두고 말하기]이다. 자연물의 관찰에서 상상력의 실마리가 이끌어 나온다는 점에서 경쾌하지만 사람 세계와의 연결에서는 무언가 아스라한 옹이(나무의 상처)들을 보여준다. 결국 나무의 옹이와 사람의 상처 사이에서 교류하고 작용하는 상상력이 시의 원동력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박성우 시들의 독특함이다. 그래서 그의 시의 제목들은 한결같이 거미, 새,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초승달, 민달팽이, 옹이, 감꽃, 망둥어, 굴비, 누에, 황홀한 수박, 콩나물, 깨꽃과 같은 질감과 질량이 살아있는 자연물에 가깝다. 지나치게 달콤해서 지겨워지기 쉬운 서정시나 자의식과 난해함으로 무장한 요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맛을 준다.

그리고 때로는 「콩나물」처럼, 또는 모든 푸른 이파리 가진 식물들이 그러하듯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지향과 개김의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그것이 시적 상상력을 거미줄로 이용하는 시인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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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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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처럼 전설처럼 불타올랐던 여자, 피어오르는 젊음을 온통 인식에 바쳤던 여자. 자기 자신의 삶을 철학과 예술의 제단에 기꺼이 내던졌던 그녀. 그런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들. 때로는 참을 수 없이 죽음의 사유에 빠져들고, 또 때로는 너무도 주체할 수 없는 생의 격렬한 충동에 휩싸였던 그녀의 영혼의 궤적들. 그녀의 열정이 남기고 간 검붉은 재들. 사로잡힌 한 넋의 노래. 치열하게 자신과 싸웠고, 무섭게도 자신을 사랑했던 그녀는 자기 삶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책의 이곳저곳에 온통 밑줄을 그어두고 또 느낌표, 물음표 따위를 새겨두고 싶다. 문체도 그녀를 닮아 열정적이고 시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학문에 바쳐졌던 그녀의 젊음을 따라서 가고 싶은 맘이 조금씩 싹트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열정의 감동이 숨겨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책이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 마지막 편지(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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