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양태석 지음 / 해토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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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苦鳥. 전설의 새. 히말라야 산에 산다지만, 게을러서 둥지를 틀지 않는다, 그래서 늘 춥고 괴롭다. 「길」의 어느 작중인물이 한고조라는 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히말라야산에 산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새인데요. 이 새는 둥지를 틀지 않아 밤마다 추위에 떨면서 내일은 꼭 둥지를 지어야지, 하고 다짐한다고 해요. 그런데 다시 낮이 되어 따뜻해지면 여전히 둥지 지을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게으름만 피우는 거예요. 다시 밤이 오면 아이 추워, 아이 추워, 하면서도 또 추위에 떨고……. 낮이 되면 다시 게으름을 피우고……. 말하자면, 늘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워낙 게을러 깨달음의 길로 나서지 못하는 인간들을 이 새에 비유하는 거랍니다.'(137쪽)

아, 그래, 어떤 인위적인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삶은 늘 그런 식이지. 차라리 등 위에 버거운 집을 얹고 아주 무겁게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자기 길을 더듬는 달팽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등허리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짓지 못한다. 신의 얼굴을 한 예수조차도 등 위에 따스한 천국의 집을 짓는 대신 차가운 패배의 상징을 어깨에 짊어지지 않았던가.

한고조의 안타까운 날갯짓이 인간 모두의 일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단한 날갯짓을 깨닫는 일은, 그 자신의 이름을 한고조라고 낮게 부르짖는 일은, 누구나 가능한 일은 아닐 터. 이때의 한고조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타.

양태석의 소설집 <다락방>에는 숱한 한고조들의 등장한다. 물론 새로운 정의의 한고조들이. 그들은 바로 소설가 나부랭이다. 그들의 궁핍한 일상이, 우울한 심정이, 때로 주절주절 잡담들이, 그들을 한고조라고 커밍아웃하게 만든다. 다른 누구보다도 너절한 생활 속에서 그 자신을, 세계를, 타인의 얼굴을 꿰뚫어보려 한다. 안쓰러운 날갯짓이다. 결코 둥지를 틀 수 없는 날갯짓을, 그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한 둥지를 틀고서 그 안에서 움츠린 가운데 거짓 행복을 누리는 새가 이미 한고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괴롭다. 날갯짓을 포기한 새는 그 출발이 땅의 끝, 산의 정상에서였더라 하더라도 하늘에 이를 수는 없다. 한고조의 꿈은, 하늘의 끝에 다다르자는 게 아니다. 둥지를 틀지 않고 떠돌며, 한껏 괴로워하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누리자는 거다. 하늘의 끝을 바라보며 하늘을 누리자는 거다. 칼 같은 추위에 맞서자는 거다. 그러므로 한고조들은, 히말라야 산의 정상에서 집을 짓지 않고 정처 없이 오늘도 떠돈다. 산 아래의 아득한 세계를 내려다보고 높이의 끝을 동경한다.

한고조는 유년기를 새장에서 보냈다. 그래, 「다락방」이다. 음습한 곰팡내와 바퀴벌레들이 이 괴로운 새의 벗이었다. 남몰래 행한, 음울한 사유의 예배가 이 수줍은 새가 감추고 있는 정신의 알몸이었다. 다락방이란 새장에서의 추억은 외려 지금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가 「관객」이 되어버린, 제 삶을 버리고 안락한 둥지만을 틀고 있는 지금을. 한고조는 멸종하고 있는가. 당신은, 세계라는 커다란 새장에 갇혀 있길 거부하고 끝없이 알에서 부화하기 위해 세계를 깨뜨릴 수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한고조라고 스스로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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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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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은 '쉬운 것 가지고 쉽게 울궈 먹을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것 가지고 쉬운데로 나아가는 헌신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성인 자신은 끊임없이 어려운 것을 극복해나가는 작업을 중단해서는 아니됩니다.'(152-153쪽)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런 시각이 그의 저술과 강연의 핵심철학일 것이다. TV 강연에서의 과장된 포즈와 특이한 목소리,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줄 아는 지식인. 그러나/그래서 때로 위태로운 발언들로 독자와 시청자들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들기도 하는 철학자. 이것 또한 도올 김용옥의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는 '인간적인 철학개론서'이다. 내용도 평이하면서, 구성도 TV 앞에서 도올 특유의 강연을 듣는 것처럼 친숙하다. 대학 교재로나 쓸 철학개론서나 대중문화의 해설을 통해서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철학개론서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김용옥답게, '삼천포와 구라' 들이 난무하고 개그맨 이상의 입담들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그런 곳에 있지는 않다. '나'라는 주어를 감춘 책들에서 볼 수 없는 살아있는 경험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인간적인 철학개론서로 자리매김 하게 한다. 도올의 어린 시절, 신발을 거꾸로 신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철학 하는 방법에 대해서, 철학이란 놈의 성격에 대해서, 실제로 철학 공부하는 것의 고단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독자는 귀를 쫑긋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을 '무전제의 사고'라고 정의하고 나서, 무전제의 사고는 곧 그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다전제의 사고'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온갖 도그마들의 폐단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철학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논하는 식이다. 특별한 주제가 가지런히 모아지거나 철학사의 순서대로 이야기하는 철학서와는 다른데, 그 때문에 어수선한 게 없지는 않지만 부담감이 덜하고 흡인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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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와 글쓰기 - 김화영 문학선 나남문학선 25
김화영 지음 / 나남출판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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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유명한 번역문학가. 유려한 에세이스트. 불문학자.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였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두툼한 두께의 김화영의 문학선집을 읽게 되었다. 시, 에세이, 예술기행문, 문학평론, 미술평론, 영화평론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그의 스펙트럼은 상당한 편이다.

서문에서부터 느껴지는 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체는 독자를 아늑하고 평화로운 세계로 이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들은 피아노의 선율과 닮아있고 그 둘은 사이 좋게 어울린다. 시 모음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들에서는 단정하고 조용한 바람냄새가 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김화영은 에세이에서 화사하게 빛난다. '공간'과 '그리움'과 '아름다운 것들(예술)'에 대한 천착은 그로 하여금 여러 예술기행문을 쓰게 했던 모양이다. 주로 프랑스의 문인과 화가, 고성 등을 스케치한다. 세 편의 영화평론을 읽고 나서는 모두 감상하지 않은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이미지들이 살아있는 느낌이다. 어지간한 스케치 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가의 나무에 매여 형벌을 받는 거역의 신 탄탈로스에게 물어보라. 그는 대답하리라. 우리를 삶에게로 치달리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우리들 영혼 속에 불타고 있는 영원한 '갈증'임을. 생명은 부유한 자의 소유가 아니라 위로받지 않으려는 자, 영원한 속의 굶주림을 간직한 자의 것임을.'(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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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5-09-3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떤 시인의 일생을 쓴 글이 생각나요. 그 시인은 어린 시절 집을 나와 홀로 사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어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다는 것이 기억나요...
저도 이 책 고등학생 때 읽고 감동 많이 받았었죠!
 
문자의 역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
조르주 장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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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는 사진과 이미지들이 당당하게 활자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실려있다. 읽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으로, 아니면, 읽고 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는 게 이 시리즈의 모토인 듯 싶다.

하지만 때때로 순차적인 활자 읽기에 익숙한 독자들은 활자의 위치(내용 전개)와는 조금씩 어긋나 있는 이미지들이 번거롭기도 하겠다. 게다가 짜깁기 책답게 일관성이 부족한 것도 흠이라면 흠. 이미지가 풍부한, 특정 주제의 스크랩북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문자를 주제로 잡은 이 책에서도 고대의 문자로부터 세계 각국의 문자들이 다채롭게 출몰한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는, 문자와 계급. '역사적 사건을 보존하려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문자를 만들었다'(12쪽)고 하는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권위와 특권의 상징이었다'(39쪽)라고 한다. 문자를 포함한 지식정보의 보관/유통의 체계적인 기술은 계급성을 띨 수밖에 없는가. (요즘 흔히들 얘기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도 예외는 아니겠다.) 사가(史家)가 때로 왕보다 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지식과 권력'에 대한 오래된 명상거리가 된다.

둘째는, 문자의 시각적인 미. 누구나 아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굳이 데리다를 인용하자면, '최초의 글쓰기는 그려진 이미지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문자 저 멀리의 뜻만을 가지고 놀아왔다. 문자의 형상에 대한 재발견. 얼마나 흥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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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나이 창비시선 107
김정환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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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집 표지에는 기인 밧줄에 목을 맨 회색빛 다섯 동상의 모습이 나옵니다. 굳은 표정의 동상들이 무섭기만 하군요.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누굴까요? 레닌인가요? 세상과 역사에 어두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소련이 몰락하고 나서 이 시들을 썼겠지요. 시집의 제목처럼, '희망'을, 그리고 '나이'를 끈질기게 질문하고 있는 당신의 노래를 듣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시, 「첫 눈」에서부터 거리의 눈 내리는 풍경에다 소련연방의 해체를 겹쳐서 볼 정도로 절망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당신. …그리고 당신의 눈은 끊임없이 '선배'와 '후배'들의 얼굴에 닿습니다. 그건 말이죠, 선배와 후배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의 자리를 더듬어보는 일이었겠죠.

여기, 좌파 시인의 내적인 탄식이 '시간의 사회적 흐름'인 역사의 도상에 놓여 있습니다. 내게, 그건 물음표 모양의 역사적 화석으로 보입니다. 과연, 희망에도 나이가 있을까요? 희망도 나이가 들면, 절망으로 늙어 가는 것인가요? 두고두고 꺼내어볼 물음표 화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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